(제 24 회)

제 2 장 특종기사를 찾아서

24 

 

취재에 옴해있던 김현철은 서울로 돌아온지 시간이 퍼그나 지났으나 연희와의 약속을 감감히 잊고있었다. 하긴 약속이라기보다 연희의 일방적인 요구였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가 밤이 이슥해서야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어데 계세요?》

연희였다.

《집입니다.》

《사람이 어쩜 그럴수 있어요?》

성난 목소리가 대뜸 귀청을 긁는다. 그제서야 늦더라도 만나야 한다면서 전화를 기다리겠다던 연희의 말이 생각났다.

《무슨 일입니까?》

《만나서 이야기해요.》

《오밤중에 어디서 만납니까? 그냥 래일 봅시다.》

《제가 그리로 가겠어요.》

또다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선잠이 깬 김현철은 화가 났다. 그는 부시시한 머리를 대충 빗어넘기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도 처녀라면 밤중에 전화를 해서 미안하다든지 아니면 급한 일이여서 래일로 미룰수가 없다든지… 뭐, 이런 변명이라도 있어야 하는게 아니야?)

김현철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외출복을 입고나서 거울을 보았다. 자다깨서 그런지 부석부석한 얼굴이였다. 습관적으로 살결물에 손을 가져가던 그는 자기의 이런 태도에 은근히 짜증이 났다. 그래서 거울속의 제모습에 손가락을 겨누며 혼자 말했다.

《너 선보러 가? 왜 차림새에 신경을 쓰는거냐?》

문을 쾅 닫고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삼복철이여서 밤이지만 무척 더웠다.

현관을 나선 김현철은 가까이에 있는 공원으로 내려갔다.

그는 몹시 피곤했다. 하늘의 별들도 조는듯 희미했다. 그 별빛아래서 깜박깜박 졸고있는데 전화종이 울렸다.

《집근처예요. 어디에 있어요?》

김현철은 자기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찰거마리같은데가 있어. 그 성격이…)

공원앞 가로등밑으로 날씬한 처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르르한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물오른 버들가지마냥 나긋나긋하게 느껴졌다.

연희는 공원의자쪽을 두리번거리고있었다.

김현철은 오른손을 쭉 펴올려 신호했다. 어느새 피로가 밤바람에 날려간듯 싹 가셔졌다. 마주오는 연희를 바라보는 눈이 저도 모르게 생기로 번쩍이고있는줄을 그자신도 전혀 몰랐다.

연희는 김현철에게로 다가오며 눈미소를 지었다.

김현철이 옆자리를 권하자 아래입술을 살며시 빨며 잠시 머뭇거리던 연희는 치마를 반듯이 쓸더니 조심히 앉았다.

김현철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입니까?》

《회사에서요.》

《정말입니까? 보험회사에서는 월급을 얼마나 많이 주는지 모르겠는데… 그 정열이 부럽습니다.》

일부러 시까스르는 소리를 흘려듣는지 연희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김현철은 제풀에 싱거운 생각이 들어 몸자세를 바로잡으며 물었다.

《시작합시다. 무슨 얘기입니까?》

《사적인 일이예요.》

김현철은 조금 놀랐다. 뜻밖이였다. 아마도 보험재판과 관련해서 긴급하게 만날 일이 있을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있었던것이다.

그가 슬쩍 곁눈질해보니 가로등빛속으로 시름이 쌓인 처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연희의 신경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내 도움이 필요합니까?》

역시 고개만 흔들었다.

김현철은 잠자코 연희가 마음을 눅잦히고 털어놓기를 기다렸다.

한참후에야 연희는 나직이 토로했다.

《아버지때문이예요.》

《선배님이요? 선배님이 앓습니까?》

《그런건 아닌데… 하긴 저도 모르겠어요. 혹시 속병이 생긴건 아닌지…》

연희는 안타까운듯 한숨을 토했다.

김현철이 장필성을 본것은 송별회가 마지막이였다. 그날 장미식당에서 송별모임이 끝나고 집까지 바래주려고 하였으나 장필성은 그 호의를 거절했다. 택시를 잡아주려고 해도 걸어가겠다고 하면서 그것마저 마다했다. 그때 휘청거리며 밤거리를 걸어가는 장필성의 모습은 처량해보였다.

연희는 아버지의 퇴직을 예견하지 못했던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은퇴후의 장필성의 모습은 전혀 생소해보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침에 밥상을 차려놓고 《빨리 출근하셔야지요!》 하고 소리쳤는데 스적스적 다가앉은 장필성은 몇술 뜨다말고 말했다.

《이젠 나는 출근하지 않는다. 그리구 너도 바쁘겠는데 아침밥 짓느라 하지 말아. 내가 할테니…》

그리고는 슬그머니 숟갈을 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연희는 마치 생각없이 걸어가다가 무엇엔가 머리를 되게 짓쫗은 기분이였다. 가슴 한귀퉁이에서 의지하고있던 벽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듯 한 느낌이랄가.

그래서 그날은 여느때보다 일찍 들어왔다. 전실에서 TV를 보다가 의아해 바라보던 장필성의 눈길은 이전의 살뜰하던 아버지의 눈빛이 아니라 연희가 지금껏 보지 못한 늙은이의 주름지고 처진 쓸쓸한 눈길이였다. 그것이 연희의 가슴속을 예리한 칼끝으로 헤집는것만 같아 서둘러 행주치마를 두르고 부엌으로 나섰다. 지금까지 못다한 정성을 기울여 음식상을 차리고 술까지 한병 곁들었다.

《오래간만에 제가 한잔 부을게요.》

연희는 생글거리며 술을 잔에 부었다. 그런데 흘낏 연희를 쳐다본 장필성은 부어준 술을 쭉 들이키고는 아무말없이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연희는 어쩔바를 몰랐다. 그러다가 자기의 여느때없이 자상한 행동이 아버지를 더욱 괴롭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여 다음날 아침엔 부엌에서 동자질을 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었으나 나가보지 않았다.

《밥먹고 출근해라.》 하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서야 일부러 피곤한듯 하품을 하며 전실로 나갔는데 바깥문을 열고 나가는 아버지의 뒤모습만 보였다. 상우에는 자기의 식사만이 차려져있을뿐이였다. 창문가로 다가가 밖을 살피니 장필성은 집을 등지고 행길쪽을 바라보며 외로이 서있었다. 여느때없이 희슥희슥한 뒤머리가 연희의 눈시울을 젖어들게 하였다.

저녁에 제일 좋다는 염색약을 사들고 들어왔는데 장필성은 《그만둬라. 염색약이 건강에도 좋지 않다는데…》 하고 사양했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 안타깝기만 했다.

(그래, 예전같이 살면 돼.)

연희는 그런 각오를 하고 며칠을 넘기였으나 생각이 그렇지 생활은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벌을 받았어! 응당한 죄값을 치르고있어!) 하고 여태까지 아버지를 속태워온 자신의 불효막심한 지난날을 돌이켜보면서 스스로 꾸짖기도 하였다.

정의와 진리의 대변자들이라는 기자들이 사회의 옳바른 눈과 귀가 되기는 고사하고 권력과 돈의 하수인, 매문가들로 전락되여버렸다고 여겼기에 밤마다 취해들어오는 아버지에게 매일이다싶이 짜증을 부려왔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의 아버지는 인간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하루하루의 생을 줄이기 위해 애쓰는것만 같았다. 그것이 연희의 속을 더 태웠던것이다. …

《매일 매 시각 취재경쟁으로 속을 쓰다가 갑자기 밀려났으니 그럴수도 있습니다.》

김현철이 리해가 간다는듯 위안하려고 하자 연희는 소리를 높였다.

《아버진 그렇다 쳐요. 거기서도 너무하지 않아요?》

《내가 왜요?》

《어쩜 그리도 무정할수 있어요. 명동일보사의 반수이상의 기자들이 아버지에게서 기자수업을 받았다고 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퇴직을 하니까 단 한사람도 찾아오지를 않아요. 전화도 없고요. 기자라는 사람들의 도덕수준도 정말 알만 하다니까요.》

그것이 연희가 만나자고 한 진짜 리유였다는것을 깨닫자 김현철은 죄스러움을 느꼈다.

(그래, 내가 장선배님을 너무 무심하게 대했던것은 사실이야.)

그래서인지 연희에게도 미안했다. 그리고 비록 눈앞에서 언성을 높이고 두볼에 찬 기운을 서리발처럼 돋구고있어도 류달리 연연한 연희의 속마음이 빤히 들여다보이는것 같았다. 그래서 애처로웠다. 별안간 포근히 품어주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미안합니다.》

진심이 느껴지는 그 목소리에 연희는 속이 좀 누그러지는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하고 가슴속에 얹혀두고있던 가정사를 얘기하고나니 부글거리던 심정이 다소 가라앉았다.

《래일 아버지는 인천으로 갑니다. 혹시 낚시질할줄 모르세요?》

연희가 물었다.

김현철은 속으로 웃었다. 연희의 말은 알려주는것이 아니라 로골적인 지시나 다름이 없었던것이다. 그런데 그게 싫지 않았다.

《걱정마십시오.》

이렇게 대꾸하며 생각했다.

(부장에게 시간을 달래야겠구나. 또 눈을 부라리겠지. …)

공연히 바쁜 시간을 날려보내야 한다는 불만보다도 마음 한구석이 즐거운것이 이상스러웠다.

연희가 돌아가려고 일어서자 김현철의 심정은 서운하였다. 그렇다고 좀더 함께 앉아있자고 말하기도 따분한노릇이였다. 그는 연희를 따라서며 말을 붙였다.

《집까지 바래워주겠습니다.》

연희는 도리머리를 저었다.

《혼자 가겠어요.》

《무섭지 않습니까?》

《아뇨.》

《그럼 택시라도 잡아드리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연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왜서인지 멋적은 느낌도 들고 기분이 붕 뜨기도 했다.

김현철은 고른 땅도 헛짚은듯이 허둥대며 제 먼저 걸음을 뗐다.

 

련재

독자감상글쓰기
Change the CAPTCHA codeSpeak the CAPTCHA code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17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