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회)

제 1 장 아버지와 딸

14 

 

 

《그 선배는 참 괴상한 사고를 하였소.》

번거로운 생각을 쫓으려고 사무실에서 나와 현관홀로 스적스적 걸음을 옮기던 김현철은 누군가의 큰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정치부의 어느 관록있는 기자가 한가득 모여선 동료들앞에서 이야기판을 벌려놓고있었다.

《오래전의 이야기이지만 잊혀지지 않소. 이 땅이 일제의 식민지마수로부터 해방된지 꼭 10년이 되던 해였소. 자네들 로빈손 크루소를 알지? 다니엘 데포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말이요. 무인도에 떨어져 수십년을 보낸 한 문명인의 고독과 인간의 생존본능을 그린 소설이지. 이 땅에도 그 <로빈손 크루소>가 나타날줄 누가 알았겠소? 일제시대때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줄도 모르고 태평양 어느 한 섬의 동굴에서 10년나마 숨어살던 사람이 발견되였던거요. 그게 바로 1955년경이였지. …》

그 기자는 기가 막히다는듯 스스로 혀를 끌끌 차고는 입술을 감빨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가 어느날 어느때에 돌아온다는 소식이 모든 신문사들마다에 쫙 퍼졌소. 그러니 어찌됐겠소. 백여명에 달하는 기자들이, 아니 그보다 더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을거요. 하여튼 보기 드문 기자사태가 그가 도착하게 될 항구로 몰려들었소. 생존경쟁이나 다름없는 취재경쟁에 모두 승부를 건셈이지. 그때 령리한 이 선배는 말이요. 남들이 특종을 마중하여 앞으로 나갈 때 특종을 찾아 뒤로 가는 기발한 착상을 하였소.

<나는 지금 내가 살고있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정 반대의 길을 걷고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여 <천만사람이 서쪽으로 지는 달을 쫓는 때에 홀로 동쪽으로 향하는 사람! … 태양은 어느때나 동쪽에서 솟는것이다.>라는 멋진 명구로 끝을 맺은 글이 있지? 그래 맞아! 소설가 최서해선생의 명문이요. 그 선배가 한뉘 이 문장을 외우더니만 그런 기발한 생각을 한것인지도 모르지. 신문사의 동의를 받은 선배는 그 인물의 고향부터 찾아갔소. 다른 언론사의 기자들이 항구에서 진을 치고 마냥 기다리고있을 때 그의 뿌리를 캐러 간것이지.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선배가 찾아간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귀향자는 이미 사망자로 되여있었고 그의 처는 사망통지서와 함께 보내온 남편의 유골을 마을뒤산의 양지바른 언덕에 묻고 어린 아들을 앞세워 해마다 정성껏 성묘를 해오다가 죽은 사람을 기다릴수도 없고 언제까지 돌봐주기도 힘들다는 곁의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홀아비와 재혼했다지 않소. 그후로는 큰아버지 집에 얹혀사는 외아들이 홀로 아비의 무덤을 지켜왔다오. 재가한 처는 그새 두 딸을 더 낳고 살고있었소. … 싸리울타리로 둘러싸인 초가삼간은 지난날 귀향자가 살던 때의 모습 그대로이기는 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팔려 딴 주인의 문패가 붙어있었지. 그런데 이 무슨 믿을수 없는 소문인가. 죽었다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니 온 동리사람들도 어리둥절하였다오.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재가한 녀인은 망연하여 난감해있는데 철없는 아들녀석은 아버지가 돌아오면 어머니랑 셋이서 다시 모여살게 되였다고 좋아하겠지. … 나라없던 지난날의 설음을 잊지 말라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어디까지나 특종은 특종인게요. 요는 뭔가? 어떤 사건이든지 현장을 찾아가라, 시각을 바꿔야 한다 이것이요.》

이야기에 귀를 강구고있던 김현철은 문득 뇌리를 치는것이 있어 자기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누렇게 퇴색되고 커피물로 얼룩진 신문기사의 한귀퉁이에 《랍북미수》사건의 주인공 문태석의 주민등록번호와 살해된 그의 처 김춘옥의 본적지주소가 실려있는것을 발견하였다. 눈이 번쩍 트이고 심장이 후두둑 뛰였다. 이미전부터 몇번 훑어보면서도 그냥 스쳐보낸것이 좀처럼 리해가 되지 않았다.

김현철은 전화기를 들었다. 우선 김춘옥의 본적지가 있는 군청을 찾았다. 목소리가 챙챙한 젊은 녀인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고나서 김춘옥의 이름과 주소를 알려주고는 호적계를 통해서 현재 그의 가족에 대해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단마디로 거절당했다. 그것은 곤난하거니와 그럴 시간도 없다는것이였다.

아무리 통사정을 해봤지만 소귀에 경읽기였다. 김현철은 하는수없이 하루품을 들여가며 서울시청에서 관리노릇을 하는 대학동창생을 통하여 알아보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 간신히 료해한 자료라는것이 김춘옥의 오빠인지 동생인지 하는 김춘삼이라는 이름뿐 그가 어디에서 사는지, 현재 무슨 일을 하는지도 전혀 알수 없었다.

그날 저녁 김현철은 밤새 궁싯거렸다.

(김춘삼이라… 이 사람은 어디서 살고있을가?)

문득 어느 양봉업자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벌이라는 곤충이 날개는 있지만 몇십리안팎의 자기의 생활반경을 벗어나지 못한다는것이였다.

(그래, 밑져야 본전이지.)

김현철은 다음날 시청을 찾아가 동창생에게 신세를 꼭 갚겠다고 하면서 김춘옥의 본적지가 있는 군의 전화국 직원으로부터 김춘삼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전화번호를 전부 알아냈다. 흔한 이름이여서인지 알려온 전화번호만도 스무개가 넘었다.

신문사로 돌아온 김현철은 한줄기 희망을 안고 그 전화번호들을 하나씩 눌렀다.

《김춘삼씨의 집입니까?》

《예, 접니다. 누구십니까?》

《명동일보사 기자입니다. 혹시 김춘옥이라는 녀동생이 계시지 않습니까?》

《김춘옥? 그가 누굽니까?》

《춘옥씨를 모릅니까?》

《모릅니다.》

《아, 미안합니다. 잘못 걸었습니다.》

기대와 실망이 잇달았다. 이런 때 필요한것은 기자의 끈질긴 인내성이였다.

한동안 전화기를 놓고 다음 번호를 고르는데 어떤 상대들은 추적번호로 찾아들어온다.

《당신 누구요? 기자 맞소?》

《춘옥이가 누구인지 설명이 있어야 하는게 례의 아니요?》

전화를 받은 사람들의 황당한듯 하면서도 정당한 요구였다. 하지만 뭐라 대꾸할수도 없어 민망스러운대로 모두 일축해버린 김현철은 또다시 전화번호를 눌렀다.

《김춘옥씨의 오빠되시는분의 집이 옳습니까?》

아니라는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통화를 끊을 판인데 짧은 순간이나마 여느때없이 길어진다는 촉감이 느껴졌다.

《옳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다급해졌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녀인이였다.

《김춘옥에 대해선 왜 물어요?》

분명 경계하는 어조였다. 무등 반가웠다.

《전 기자입니다. 좀 알아볼것이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미안한대로 주소를 알려주시겠습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상대측에서 수화기를 탕 놓아버린것이였다. 다시 번호를 돌렸으나 이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였다. 전화번호를 찾아냈으니 집주소를 알아낼수 있었다.

길게 기지개를 하던 김현철은 깜짝 놀라 굳어지고말았다.

장필성이 문가에 서있었던것이다.

(언제 왔을가? 통화내용을 다 들은걸가?)

무표정한 얼굴과 눈빛을 보고서는 알수가 없었다.

《어떻게… 무슨 일입니까?》

《아냐, 아무것도…》

그러던 장필성이 문득 말했다.

《점심때라 시간을 낼수 있겠지? 나랑 어디 산보나 나갈가?》

《어디로요?》

《함께 나가보면 알게 되지.》

장필성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앞서서 나갔다.

김현철은 별수없이 그의 뒤를 따라섰다.

이제는 여름살이 오르기 시작한 남산은 비교적 한적했다. 지어 쓸쓸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들은 남산기슭에서 천천히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부장에게는 미리 말해놓았으니 바삐 돌아가지 않아도 되오.》

장필성은 안심하라는듯 한번 말을 뱉고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수걱수걱 걸었다. 잠자코 따라오라는 무언의 암시였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대로 김현철은 그냥 따랐다.

남산은 서울시의 중구와 룡산사이의 경계에 있는 산이였다. 이전에는 목멱산, 인경산, 마뫼라고도 불리웠었다. 편마암으로 된 이 산은 서울분지의 남쪽변두리를 이루고있었다. 산의 서쪽부분은 누에머리라고도 했는데 산마루가 둥실하고 비교적 물매가 급한데 비해 아래비탈면의 물매는 느렸다. 이곳에는 14세기에 쌓았다는 성벽도 있었고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신호련락수단으로 리용된 봉수대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오?》

장필성이 불쑥 묻는 소리에 김현철은 깜짝 놀랐다.

《뭘 그리 생각하는가 말이요?》

다시 묻는 질문에 김현철은 자기도 모를 웃음을 지으며 엉너리를 쳐보았다.

《역시 자연은 사람을 시인으로 만드는가 봅니다.》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였던지 장필성은 말없이 다시 등을 돌려댄채 앞서 걸었다.

아직도 남산은 시민들에게 지난 30여년을 헤아리는 파쑈독재시대를 상징하는 암흑과 질식의 대명사로 각인되여있었다. 소름끼치는 공포와 인간도살의 시대가 그 이름속에 응축되여있었다.

바로 이곳에 군사파쑈독재시절 중앙정보부와 그의 바통을 이은 안전기획부가 1961년부터 1995년까지 자리잡고있었다.

그것들은 독재권력의 유지와 연장을 위해 《정권안보》라는 구실을 내세워 정치는 물론 경제, 문화 등 사회전반에 걸쳐 전횡과 불법을 일삼고 정치공작, 선거조작, 리권배분, 정치자금징수, 미행, 도청, 고문, 랍치, 밀수, 암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정신적 및 물질적폭력을 만능의 보검으로 휘둘러온 악의 총본산이였다.

이것은 세월의 흐름으로도, 자연의 풍치로도 가리울수 없고 지울수 없는 엄혹한 력사의 진실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있었다.

김현철은 이태전인가 남산에 올랐을 때 우연히 만났던 한 녀인이 생각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남산에 오면 정말 기분이 나빠요. 그때 터무니없는 간첩은닉죄에 걸려 제 남편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련행되여왔었는데 여러명이 사형을 당했어요. 요행 남편은 단순가담자로 취급된 몇사람들과 함께 징역을 살고 나왔는데 심한 고문후유증으로 지금도 다리를 절고있어요. 얼마전에 한 재미교포가 제가 관여하고있는 복지재단에 후원하려고 하였는데 누군가가 그에게 저의 남편에게 간첩혐의가 있으니 그만두는게 좋겠다고 만류했다고 해요. 그러니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은거예요.》

그 말에 김현철은 몹시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무지막지하고 살기띤 파쑈권력이 찍어놓은 암흑의 락인이 지금도 존재하고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상념에서 깨여나 얼핏 시계를 들여다본 그는 시간도 어지간히 흘렀는데 그만 돌아가는게 어떠냐고 물었다. 허나 장필성은 대답이 없이 그냥 앞서걷기만 할뿐이였다.

울창한 숲속으로 뻗어간 오솔길을 돌고나니 산정점으로 향한 계단이 시작되였다. 꽤 가파로운 길이였다.

숨이 가쁜대로 장필성의 뒤를 따라 드디여 최정점에 올라 이전에 선조들이 쌓았다는 봉화대에 이르렀다.

《우리가 걸어온 거리가 한 3천메터쯤 될거요.》

봉화대밑의 돌상에 앉으며 장필성이 김현철에게 말했다.

《여기에 오자고 한게 그저 산책이나 하자는것은 아니겠지요?》

김현철은 그옆에 앉으며 슬며시 물었다.

장필성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굽어보다가 뜨직뜨직 말했다.

《이자 오면서 느꼈겠지만 남산의 정보기관들이 옮겨가고 정권이 바뀌였다고 해도 우리들중 누구에게도 공포의 시절이 다 지나간 과거처럼 생각되지는 않을거요. 그렇소. 당시 독재권력의 사슬을 이루고 존재하던 그네들은 지금도 남아있고 그때처럼 활약하고있소. 그러니 그들이 자네가 젊었다고 해서 호의를 베풀리는 만무하지!》

김현철은 그제서야 장필성이 이야기의 본론에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것은 남산기슭에서부터 그자신이 예상하고있던것이기도 했다.

《제 한몸이 두려워 언론이 진실을 외곡하고 피해간다면 민중은 옳바른 눈과 귀를 잃고말것입니다.》

《정의와 진리를 위하여! 좋은 말이지.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자네의 젊은 생명보다도 중요하다고 믿나? 결심을 잘하라구. 이제 한발을 잘못 내디디면 자네는 한목숨 부지하기도 힘들수 있네. 자네가 딛고 서있는 그 땅속에 애매하게 목숨을 잃은 령혼들이 가득차있네.》

《선배님의 충고를 고맙게 여깁니다. 그러나 전 제 길을 가겠습니다.》

장필성은 안타깝게 한숨을 내쉬였다.

《이전에… 퍽 이전에 난 이곳 지하실에 와본적이 있소. 그때 나를 취조한자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있지. 그자도 이제는 나와 비슷한 나이가 됐겠지. … 그러나 아직은 그자를 찾고싶지 않소. 왜 그런가?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선배님이 가만히 있으면 그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장필성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 쇠고집이구만. 부디 젊은 목숨을 아끼라구.》

그들은 잠시 이야기를 끊고 묵묵히 앉아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그바람에 나무가지들이 솨 설레였다.

먼 하늘을 바라보던 김현철은 굳은 각오가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전 일단 결심을 했고 취재방향도 이미 정했습니다. 그런데 시작도 해보지 않고 그만둔다면 전 그야말로 비겁한 인간이 될겁니다.》

장필성은 머리를 저었다.

《아니, 정 반대네. 이제 그만두면 누구도 이 일에 대해 모를수 있네. 자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그러니 비겁하다고 탓할 사람도 없네.》

《아니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자신이 그 비겁성을 용납할수가 없습니다. 또 이것은 기자로서의 량심을 지키는 길인 동시에 참다운 정의와 진리를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 하기에 선배님이 지지하든, 반대하든 전 끝까지 이 길을 가렵니다!》

장필성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고는 먼저 내려가라고 손짓했다.

멀어져가는 김현철의 모습을 시름겨운 눈길로 지켜보던 장필성은 주름진 눈시울을 맥없이 내려감았다.

예로부터 젊은이는 삶에 대해 사색하고 늙은이는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 김현철은 자기의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있는지 다는 모른다. 모험도 랑만이라고 생각하고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귀에 못이 박히게 충고를 주고 경고를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엊그제 지방에 있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그곳에서 어느 대기업의 정경유착비리를 취재하고 돌아오던 젊은 기자가 로상에서 교통사고로 불의의 죽음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신문사측은 유족들에게 장례비부담을 비롯한 적지 않은 재정적지원을 약속했다. 그런데 얼마후 몇푼 안되는 위로금만 달랑 쥐여주고는 《사고가 업무와는 무관한 본인의 과실이기때문에 보상이나 지원을 할수 없다.》고 발칵 뒤집더라는것이였다. 원체 기자에게는 업무시간이 따로없다. 취재를 위해서라면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가리지 않고 뛰여다니는것이 기자이다. 그 기자 역시 사고직전까지 취재업무를 수행하고있었다. 이를 뻔히 알고있으면서도 신문사는 모르쇠를 하고있는것이였다. 기막힌것은 사고의 배후에 비리의 진상이 밝혀지는것을 달가와하지 않는 검은손이 뻗쳐있다는것이였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수 있는 이 사회의 부정의한 현실이 빚어낸 인위적인 살인이였다. 장필성은 이것을 조금도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김현철은 이 땅에 수십년간 뿌리를 내릴대로 내린 권력의 정수에 감히 도전을 하려 하지 않는가!

장필성은 비참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떨구었다.

그에게 있어서 남산은 그냥 산이 아니라 통채로 무덤이였다. 이곳에서 인간세상으로 나올수 있는 길은 단 한가지였다. 수사관의 요구에 절대복종하는것이였다. 시체도 여기에서는 진술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딘다고 하였다. 중세기적인 악형으로부터 현대과학과 기술을 최대한으로 집대성한 고문방법들이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최고의 예술의 극치》로 둔갑시키는데 리용되고있었다. 남자를 녀자로 만드는것을 내놓고는 불가능한것이란 없다는것이 이곳의 좌우명이였다. 그 좌우명에 토대하여 허위가 진실로, 진실이 허위로 바뀌우고 가공되였으며 사회를 기만하고 마취시키는 독극물로, 독재권력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하나하나의 주추돌로 되였다.

장필성은 어둑침침한 숲의 그늘속을 바라보다가 돌연 어깨를 떨었다.

그 어둠이 장필성을 어쩔수 없는 과거의 늪으로 빨아들이고있었다.

… 캄캄한 어둠속에 불현듯 눈부신 빛이 머리우에서 쏟아졌다. 장필성은 사위가 온통 백광으로 번쩍거리는듯 한 환각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장필성!》 하고 누군가가 굵은 목소리로 찾았다. 마음속에서 꾸륵꾸륵 치밀어올라오는 두려움을 간신히 누르며 눈을 떴다. 역시 아직도 눈이 부셨다. 그러나 마주보이는 어둠속 저끝에 앉아있는 낯선 사나이의 몸체가 어렴풋이 안겨왔다.

《장필성, 당신은 진실은 심장으로 말한다고 했더군. 그래서 붉은 글로 제시하니 자기의 피로 씌여진 내용을 똑바로 보시오. <주도세밀한… 간첩사건으로… 믿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누군가? 심장으로 쓴 글이니 심장으로 대답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이제 우리가 그 심장을 도려내여 저 글처럼 당신에게 보여줄테요. 걱정마오. 우리에겐 아주 뛰여난 기술이 있소. 심장 같은건 아무것도 아니요. 당신이 이북녀간첩 김춘옥과 어떻게 련관되여있고 이북의 지령을 체계적으로 받으며 이 사건을 어떻게 전도하려 했는가 하는것을 보여주는 증빙자료도 이미 준비돼있소. 어떻소? 우리는 여기서 국민의 세금을 소비하는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있소. 결코 놀고먹지 않는다오. 장기자, 반공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자면 우리에게서 배워야 하오. 정치와 사회, 력사와 진실을 알고싶다면 언제든지 이곳을 찾아오면 된단 말이요. 우리는 항상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환영할거요. 하긴 장기자도 지각이 있는분이니 이미 이곳에 대해 잘 알고있을거요. 그럼 다시 묻겠소. 당신이 이 기사를 낸 목적이 뭐요?》

장필성은 불과 몇분사이에 뇌수를 말끔히 세척당한 느낌이였다. 창백한 망막우로는 딸을 남기고 떠나간 안해의 처량한 모습과 함께 어린 연희의 눈물에 젖은 얼굴만이 맴돌뿐이였다.

눈부신 백광속으로 얼굴을 가려볼수 없는 사나이가 공포를 앞세우며 다가왔다.

《장기자, 정정기사라는것도 있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린색한 요구를 하지는 않겠소. 다만 우리가 제공하는 자료에 기초하여 글을 써서 발표하는것으로 자기의 오유를 씻으면 됩니다. 장기자의 투철한 반공정신을 보여달란 말이요. 이 얼마나 지극한 호의입니까. 당신이 여기에 온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만큼 우리는 장기자의 인격을 대단히 존경하며 예쁜 따님의 장래도 무척 걱정한답니다.》

도저히 뿌리칠수 없는 그자의 요구는 예리한 쇠톱이 되여 이미 장필성의 두뇌를 사정없이 썰고있었다. …

장필성은 긴 한숨을 내쉬였다. 남산은 산이 아니라 이 땅에 어제도 오늘도 남아있는 악령일뿐이였다!

한편 무더위처럼 푹푹 배여나오는 장필성의 두려움이 느껴지는 충고는 김현철의 걸음을 무겁게 했다. 산을 내리며 그는 곰곰히 생각을 더듬었다. 과연 자기의 선택이 옳은것일가. 장필성의 충고를 따라야 하는것이 아닐가.

이전에는 장필성의 충고를 절대적인것으로 받아들여 그에 따라 취재를 하였고 기사를 썼으며 또 호평도 받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져만 갔다.

산길을 따라 내려오는 그의 시야에 한그루의 나무가 비껴들었다.

항간에서 팥배나무라고도 부르는 나무였다.

학명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어느 친구에게서 이 나무에 대해서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이 나무는 열매가 팥을 닮았고 그 맛이 배와 같이 달다고 그렇게 부른다더군. 인생에도 선구자가 있듯이 나무에도 선구자에 해당하는 선구수종이라는것이 있지. 이런 선구식물은 척박한 땅에 먼저 정착을 해서 땅을 비옥하게 만든다네. 감동적인것은 그렇게 비옥해진 땅에 다른 식물들이 와서 번성해지면 이 나무는 서서히 퇴화되면서 사라져버린다는것일세.

바로 이 나무가 그런 선구수종의 하나라는걸세.》

김현철은 고개를 들어 먼 서쪽하늘을 바라보았다. 검은구름이 서쪽으로 기우는 태양을 향해 꾸역꾸역 밀려가고있었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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