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회)

제 1 장 아버지와 딸

12

 

남산의 신록아래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무더위에 지친 걸음새로 흘러간다. 양산속에 이마를 마주한 젊은 쌍들이 있는가 하면 맥이 진했는지 부채를 펼쳐 해빛을 가리고 헐썩걸음을 하는 늙은이도 있었다. 느릿느릿 터벅터벅… 폭양세례에 가위눌린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헐떡이고있었다.

그중 유독 한사람은 눈같이 흰 와이샤쯔에 넥타이를 단정히 졸라매고 좀처럼 더위를 타지 않는듯 침착하게 걷는다. 왼팔에 벗어서 건 양복저고리와 머리에 약간 눌러쓴 연한 커피색의 고급중절모가 눈길을 끈다. 무더운 날의 차림새로서는 류다른데가 있었다. 이 사람이 속칭 《조사모》로 불리우는 비밀조직의 회장인 리기철이였다. 왕년의 직업의식이 오늘날의 칼날같은 절제와 군인다운 행동거지로 온몸에 아직 남아있었다.

리기철은 이미 눈에 익혀둔 황철나무 그늘아래에 놓인 나무의자곁에 이르자 양복저고리를 등받이에 점잖게 걸고 여유있게 앉았다. 역시 더위에 지친 기색이였지만 중절모밑에 감춘듯 한 눈길은 무척 날카로왔다.

상전을 섬기여 권력을 성취하리라 마음먹고 나선 그는 기회를 놓치지말아야 한다는 옛글과 함께 원하는자만이 목적을 달성한다는 격언을 되새기며 온몸을 말그대로 불태우고있었다. 《사람 인》자란 마주세운 칼과 칼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그의 마음속에 철심같이 뿌리를 단단히 박은것은 권력이라는 두 글자였다. 권력이란 잃으면 죽어야 하고 가지면 죽일수 있다는것을 이미 오래전에 터득한 그였다. 리기철이 바라는 권력이란 나라의 정상자리는 아닐지라도 만인지상의 생사여탈권을 쥔 자리를 의미했으니 그것은 과거 남산의 괴수와 같은 힘을 지니는 길이였다. 청와대의 수라칸에 천하진미의 음식감이 차넘쳤다면 과거 남산의 지하실에는 절대권력의 희생물들이 가득했다. 세상천지의 그 누구라도 이런 희생물이 될수 있었다. 특등공신으로부터 몸팔이로 하루하루를 사는 하바닥창녀에 이르기까지 그 죄명을 마음먹은대로 들씌울수 있는 권력, 한세상을 살아보겠다고 아글거리는 그들모두에게 임의의 순간에 미지의 죽음을 선물할수 있는 권력을 가진것이 남산이였다. 사실상 이 땅의 권력의 최정점은 청와대라지만 그의 진짜매력을 느낄수 있는 곳은 남산지하실이였다.

리기철의 꽉 다문 입귀로 랭소가 흘렀다. 어제 밤 검은 수첩에 적혀있는 한 인물을 전화로 직접 찾았던 일이 떠올랐던것이다.

《그간 안녕하셨소? 장필성선생!》

《뉘신지?》

상대는 못마땅한 어조로 물었다.

《핫, 내 목소리를 잊으시다니. 유감이구만, 장선생!》

별치않게 힘을 주었는데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량해하십시오. 음성을 오랜만에 들으니…》

《그래요? 허- 요즘 장선생도 경기가 좋으실텐데… 그리도 열심히 글방아를 찧으며 바라마지 않던 소위 민주주의라는 봄바람이 불지 않는가요. 흐흐흐.》

《당신은 대체 누구요?》

《장선생, 남산에 밤소풍을 오시였던 87년도의 겨울밤을 잊지 않으셨겠지요? 혀바닥과 손건사는 바로해야 합니다, 그렇지요?》

《알겠소. 이제야 당신이 누군지…》

《기억하시니 다행이군. 다시 만나면 영 알아보지 못하게 될가봐 이렇게 걱정하는겁니다. 87년도에 홍콩에서 있었던 사실을 또 들먹이련다던데… 그것도 손아래 젊은 녀석을 내세워서 말입니다. 세월이 지났다고 그러면 안되지. 우린 언제나 당신의 남산서약을 가지고 계산할테니까. 흐흐흐. 몸조심하시오, 장선생!》

리기철은 이쯤하면 장필성이라는 늙은 기자의 기를 단단히 눌러놓았다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얼마전에 한 정보선으로부터 S대학 도서관에서 문태석《랍북미수》사건을 취급한 신문들을 들추면서 자료를 수집하는자가 있다는 소식이 입수되였다. 그는 곧 부하들을 풀어 그자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게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어느 신문사 기자로 있다는 그 풋내기의 이름과 주소, 동향과 가족관계와 관련한 자료들이 제출되였다.

문제는 그가 고아라는것이였다. 옛 성서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시대도 아닐진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별찌가 뚝 떨어지듯 사람이 생겨날수야 없지 않는가.

리기철은 얼뜬한 부하들을 한바탕 닦아세우고 이 문제는 자기의 비밀선으로 시급히 알아보기로 했다.

왼쪽으로 굽어도는 길목에서 기다리던 녀석의 얼굴이 나타났다. 좀상스럽게 생긴 녀석이 여라문걸음 되는 곳에서부터 연신 머리를 굽석굽석 조아리면서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리기철은 그의 인사를 받는듯마는듯 하며 예리한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리기철은 날카롭게 따졌다.

《갔던 일은?》

《제대로 되였습니다.》

리기철은 그가 가져온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김현철이라고 불리우는 문제의 그 햇내기기자가 몇달전에 한 콤퓨터화상전문가에게 부탁하여 만들었다는 모의인물사진을 복사한것이라고 했다. 그 전문가로 말하면 사건현장에 있은 증인들의 말에 기초하여 범죄자의 용모파기를 귀신처럼 해내는 인재라고 한다. 괴이한것은 김현철이 자기의 외모를 가지고 자기를 이세상에 태여나게 한 부모들의 모상을 유전학적으로 형상해달라고 부탁했다는것이였다. 그자가 아직 한번도 보지 못한 부모의 상상화를 얻으려고 애쓰는것이 흥미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리기철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인간의 욕심과 집착은 그 인간을 단단히 거머쥘수 있는 결점으로 된다. 리기철은 자기를 낳은 부모에 대한 집착이 김현철의 약점이라는것을 순간에 간파했고 그래서 그의 부모들에 대해 자세히 파고들것을 결심했다.

녀석은 리기철의 의도를 알아차린듯 입을 열었다.

《그자가 자기의 부모를 계속 찾고있지만 실은 그의 곁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소리인가?》

녀석은 고개를 낮추며 말했다.

《항용 범죄자는 범죄현장을 떠도는 법이죠. 그를 고아원에서 데려다가 양육한 수녀 라경숙이 그의 친어미일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습니다.》

《무슨 근거로?》

《김현철을 영아원으로 데려온것이 라경숙수녀입니다. 그때로서는 태줄을 자른 자리를 피묻은 헝겊으로 감아놓은 피덩이였답니다. 그런데 그가 아이를 얻었다는 날은 날씨가 보통 춥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어미가 강심을 먹었기로서니 아이를 성당문밖에 내쳐둘 때는 따스한 날을 선택하는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습니까. … 그리고 보통 아이를 양자로 삼을 때는 딴 고장으로 옮겨가는게 상례인데 그렇게 하지 않은것도 이상스러운 일입니다.》

《그게 궁금하군. 왜 옮겨가지 않았지?》

《고아원의 원장수녀가 말입니다.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만 그가 전쟁시기에 어린 라경숙을 수녀원으로 데려왔다고 합니다. 또 라경숙과 주변사람들의 관계도 괜찮았구요. 그러니 원장수녀의 든든한 보증이 있고 생활토대도 이미 어느 정도 마련된 조건에서 라경숙으로서는 자리를 옮기지 않는편이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공연히 생소한 곳에 가서 양자를 두려다가 오히려 수녀로서 말밥에 오를수도 있으니까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아비는 십중팔구 그 마을사람은 아니겠군.》

《헤헤, 물론입니다. 어미가 수녀라면 아무래도 아비는 신부가 아닐가싶습니다.》

《신부라… 짚이는게 있나?》

《강정웅이라고 서울에 있는 대단한 신부입니다.》

《누구? 강정웅?!》

리기철은 내심 놀랐다.

강정웅이라는 이름은 바위에 새긴 글처럼 리기철의 골머리에 쪼아박혀있었다.

강정웅은 1940년대 초엽 서울에서 태여나 신학교를 졸업한 뒤 유럽으로 건너가 몇해동안 류학을 하면서 신학박사의 학위를 받고 사제가 되여 70년대 중엽에 서울로 돌아온 사람이였다.

그무렵에 중앙정보부가 카톨릭교의 한 주교를 련행하여 민청학련사건관련혐의로 구속했었다. 리유는 주교가 수배당한 학생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는것이였는데 수사당국은 내란선동, 《정부》전복시도 등의 요란한 죄목에 걸어 처형함으로써 종교계에 일대 경종을 울리려 했다. 그러지 않아도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들의 반《정부》시위가 끊길 사이가 없어 골치거리인데 《왼쪽뺨을 때리면 오른쪽뺨을 내댄다.》는 종교인들까지도 여기저기서 들고일어나 그 무슨 선언서요, 항의성명이요 하는것들을 때없이 발표하면서 말썽을 일으키고있었던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둔한 곰 벌통을 쑤셔놓는 격이 될줄 미처 몰랐었다.

그때 카톨릭교도들은 각지에서 련이은 순교찬미기도회를 가지고는 성당을 뛰쳐나와 로동단체, 청년학생단체, 시민단체 등과 합류하여 항의시위대오에 뛰여들었다. 낮과 밤이 따로없이 롱성과 성토대회, 가두시위 등과 함께 항의미사들이 벌어졌고 민주화요구와 함께 독재《정권》타도를 공공연히 주장하는 시국선언도 나붙어 당국을 당황망조케 했다. 이때 카톨릭교도들을 련대시위에로 사촉하고 추동한 사제단의 앞장에 섰던 대표적인 인물의 한사람이 바로 강정웅이였다.

그후 《유신정권》이 붕괴된 후 많은 교직자들이 성당으로 돌아가 안온한 전도사업에 전념하였으나 강정웅은 로동현장들과 반《정부》시위장소들을 찾아다니며 자기의 존재를 뚜렷이 과시했다. 언제인가는 미군기지앞에서 반미시위를 추동하다가 구속되는 모습이 TV화면에 비쳐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한마디로 종교인이라고는 하지만 당국과 오랜 세월 엇서온 불온한 인물이였다.

그에 대해 간단히 상기해보던 리기철이 랭정한 어조로 물었다.

《강정웅을 의심하는 근거는 뭔가?》

《그와 라경숙수녀는 오래전부터 서신거래를 가지고 대단히 가깝게 지내고있습니다. 또한 강정웅신부는 다름아닌 김현철의 교부입니다. 지금도 후견인으로서 그자의 뒤를 봐준다고 합니다. 고아인 김현철이 일류급신문사의 기자로 취직하는데도 교부의 힘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고 합니다.》

《증거가 있소?》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없습니다. 그저 제 추측일뿐입니다. 원래 밀실에서 배꼽을 맞춘거야 그들 당사자들밖에 알턱이 없지 않겠습니까. 뭐 유전자검사라도 한다면 몰라도…》

《유전자검사라… 자네가 김현철의 립장이라면 유전자검사를 하지 않았겠나?》

《글쎄, 라경숙을 생모로 의심을 했더라면 그가 유전자검사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혹여 어리무던한 작자라면 그런 생각을 못했을수도 있습니다.》

녀석은 처음과는 달리 우물쭈물하다가 말을 얼버무렸다.

리기철은 눈살을 찌프렸다.

《기자가 어리무던하다?!》

《급히 알아보다나니 빈약한데가 없지 않지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상세하게 증거들을 수집하여 보고하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불만스러운 표정과는 달리 리기철은 너그러운 어조로 녀석을 추어주며 주머니에서 돈봉투를 꺼냈다.

《아니, 수고했네. 그런데 말이야. 자네 말대로 어리숙한 기자도 혹간 있겠지. 그러나 숙맥같은 고아는 생존할수 없는게 이 사회라네.》

돈봉투를 받아들고 감지덕지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멀어져가는 녀석의 뒤등을 시답지 않게 바라보던 리기철은 남산기슭을 따라 뻗어간 산책길을 걸었다. 많은 추억이 실려있는 길이였다. 이곳에서 리기철은 절대권력이란 어떤것인가를 직접 체험했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리기철의 얼굴을 기억하고 공포에 떨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을 악몽같은 공포속에 몰아넣은 리기철의 본명을 몰랐다. 물론 그 시절엔 본인자신도 자기의 본명을 잊고 살았다. 여러개의 가명을 바꾸어가며 그는 자기에게 거대한 권력을 안겨준자들을 위해 헌신분투했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 와서는 한갖 시러베자식같은 얼뜬한 사설탐정배의 잡다한 사설을 참을성있게 들어주고 등도 두드려주어야 하는 신세로 된것이였다. 과연 모든것을 옛일로 아프게 추억해야만 한단 말인가.

리기철은 이를 갈았다.

 

련재

독자감상글쓰기
Change the CAPTCHA codeSpeak the CAPTCHA code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17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