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회)

제 1 장 아버지와 딸

7

 

금방 물속에서 빠져나온 물매미같은 검은색의 승용차가 서울시 송파구의 한 도로를 따라 경쾌하게 달리고있었다.

폭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조대풍은 내가의 건너편을 무심히 바라보고있었다. 그의 옷깃에는 《국회》의원임을 상징하는 휘장이 달려있었다.

3년전에 조대풍은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했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 그가 출마한것은 보선(보궐선거의 략칭)이라 1년짜리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돈을 물쓰듯이 할바에는 한해를 더 준비하여 4년임기의 《총선》에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조대풍은 잡새 만마리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겠느냐며 코방귀를 뀌였다. 하여튼 그는 군사독재권력의 향수에 젖어있는 보수세력과 그의 배후에 있는 미국의 《덕》에 간신히 당선될수 있었다.

10여년전 군사독재《정권》하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안전기획부의 절대실권자였던 조대풍은 6월민주항쟁의 거세찬 격류에 밀려나 자리를 내놓은 후로 서산락일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였다. 워낙 총검으로 《정권》을 가로챘던 지난 세기 70년대말의 군사쿠데타부터 계산하더라도 지은 죄가 엄청나 소위 군부독재의 비리를 척결한다는 《국회》청문회에도 중죄인으로 여러번 나서야 하는 불운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많은 동료들이 조금이라도 형벌을 모면해보려고 모든 책임을 이전 《대통령》에게 전가시킬 때에도 조대풍만은 각하를 위해 자기의 《지조》를 남김없이 과시했다. 참을수 없는것은 지난날 공산정권의 《위협》으로부터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정권》을 수호한 자기를 크게 표창하기는 고사하고 한갖 꼭두각시로밖에 보이지 않던 정객들이 처지가 바뀌였다고 해서 청문회라는 란장판에 불러내여 눈에 홰불을 켜고 그 무슨 《인권유린》이요, 의문의 고문학살이요 하면서 마치 살인마처럼 몰아붙이는것이였다. 천둥같이 화가 치밀어오른 그는 《국회》의사당의 연탁을 부서져라고 탕탕 내리쳤고 군부《정권》의 죄악을 심판하는 재판정에서도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고 고함을 질러댔다.

다행히도 《5공》시기에 하수인노릇을 한 후안무치한 변호사를 내세운 덕에 간신히 3년이라는 가벼운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그나마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상소하던중에 연신 터져나온 비밀정보기관의 정치모략과 비리들로 죄명이 엿가락처럼 찔찔 늘어나 재판은 해를 넘기고 형량은 15년으로 불어났다. 눈덩이처럼 날마다 불어나는 죄목들을 다 계산하느라면 사형까지는 아니래도 무기형까지는 분명한듯싶었다. 이런 와중에 지금껏 신주모시듯 하던 이전 《대통령》마저 《내란죄》로 옥살이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자 그는 마침내 교도소담벽에 머리를 쪼으며 황소의 영각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더니 예상치 않았던 행운이 그에게로 찾아들었다. 뜻밖에도 설을 앞두고 당국이 실시한 특별사면바람에 하루아침사이에 자유로운 몸으로 교도소의 철문을 나서게 되였던것이다.

그가 철문밖을 나서자 진을 치고있던 기자들이 빙 둘러쌌다. 서로마다 마이크를 그의 얼굴에 들이대며 교도소에 수감되여있으면서 억울하다고 생각한적은 없는가고 물었다.

조대풍은 창백한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이 덤덤히 말했다.

《가장 큰 복수는 용서입니다. 내가 복수를 하겠다고 앙앙불락하면 내 마음만 불편해집니다. 그러나 용서를 하면 내 마음으로부터 복수심은 떠납니다.》

무표정한 기색만 아니라면 어딘가 비양기가 느껴질지도 모를 목소리였다.

교도소앞에 대기하고있는 차에 오른 조대풍은 뒤쫓아오는 기자들을 떨구기 위해 얼마간 도로를 달리다가 어느 뒤골목에서 내려 흰색의 승용차로 갈아탔다.

그 차를 타고 조대풍이 은밀히 찾아간 곳은 정동의 미국대사관이였다.

거기에는 그가 애타게 만나고싶어하는 인물이 있었다. 이미 20여년전 남부윁남에 파병되였던 그때에 그를 흡수한 이후 지금까지 그의 출세를 뒤받침해준 CIA의 고위인물이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사실 세상을 경악케한 엄청난 사건들을 한가득 빚어놓고도 오히려 《국회》청문회에서와 재판정에서 탁자를 탕탕 두드리고 큰소리를 칠수 있은것도 미국의 절대적인 후원을 믿고있었기때문이였다. 조대풍의 기대는 결코 헛된것이 아니였다.

만일 미국이 그 커다란 《검은 손》을 써주지 않았더라면 특별사면같은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것이다.

한식경가량 미국대사관에 머물렀다가 나온 조대풍은 차에 올랐다.

한 십분나마 달리도록 아무 기척도 없이 눈을 감고있던 그는 운전사곁에 앉은 자기의 비서격인 리기철에게 씹어뱉듯이 말했다.

《곧 국회보궐선거가 예견된다. 알아봐. 내가 어느쪽에 장갑을 던져야 하는지.》…

고르로운 동음속에 경쾌히 달리고있는 차창으로 탄천의 풍경이 흐르고있었다.

송파구와 강남구의 경계를 이루는 탄천은 《거무내》라고도 불리웠는데 경기도의 룡인시에서 시작되여 삼밭나루를 지나 한강과 합류하는 하천이였다. 예전에는 맑은 물이 찰랑거리던 내가였으나 지금은 생태환경을 무참히 파괴하는 산업화의 후과로 《거무내》라는 이름처럼 골탄같이 시커먼 물이 흐르고있었다.

리기철은 상전의 피로를 가셔주려는듯 고르로운 목소리로 탄천에 대한 전설을 여담삼아 늘어놓았다.

《<탄천>이라는 이름 여러개 되는데 이 탄천들은 거의가 공통된 전설을 가지고있다고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저승의 염라대왕이 보낸 사자가 삼천갑자(18만년)를 살았다는 동방삭이라는 요물을 잡으려고 왔는데 워낙 잔꾀가 많은 놈이라 쉽게 잡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승사자는 고심끝에 한가지 꾀를 생각해내여 이 내물에서 숯을 빨고있었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지나다가 그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어도 물에다 숯을 빠는 사람은 처음 보았소!>라고 하기에 저승사자는 그가 동방삭인줄 알고 잡아서 황천으로 데려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전설때문에 <숯내>, <탄천>, <거무내>라고 부르게 되였다고 합니다.》

조대풍은 그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탄천의 구린 물줄기를 무심히 바라만 볼뿐이였다.

리기철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송파구는 현재 인구수를 봐도 서울에서 비교적 인구가 많은 축에 속한다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덩지에 비해 재정형편은 그리 넉넉하지 못합니다.》

그는 조대풍의 벗어진 이마를 슬금슬금 살피면서 말을 계속했다.

《송파구는 지형상 동쪽에는 성내천, 서쪽에는 탄천, 남쪽의 장지천과 북쪽의 한강, 이렇게 네 면이 물로 둘러싸여있습니다. 보시다싶이 지금 이 물줄기들은 전부 오염되여 주민들의 원성이 높고 정부의 골치거리로 되고있습니다. 그래서 송파구의 복판에 석촌호수와 몽촌호수가 있는것을 리용하여 군데군데 끊어져있는 4개의 물길을 련결하는 <물의 도시건설>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을 이번 대통령선거공약에 담으려고 합니다. 정부급의 재정지원을 약속하고 송파구의 주변하천들의 오염을 제거하고 생태가 복원되면 어릴적 시골에서 뛰놀던 내가가 강남 도심 한복판에 재현될수 있다고 널리 선전할수 있고 그로 하여 이곳 주민들의 확실한 지지를 받게 될것입니다.》

리기철은 차안의 거울로 조대풍의 안색을 슬쩍 살펴보았다. 그는 지금 여담을 하고있는것이 아니였다.

아닐세라 조대풍은 고개를 약간 끄덕이였다.

리기철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운전사에게 조대풍의 별장으로 방향을 돌리도록 눈짓했다.

리기철과 조대풍의 인연은 습하고 무더운 남부윁남의 쟝글속에서 맺어졌다. 륙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대위의 별을 달고 호기당당하게 윁남전쟁에 발을 들이밀었던 조대풍이 지휘하는 중대는 《베트공》들의 매복에 걸려 변변히 싸우지도 못하고 괴멸되였다. 그때 중대 하사관이였던 리기철은 등에 수류탄파편이 박혀 혼절한 그를 업고 줄행랑을 놓았다. 다행히 치명상을 면하여 살아난 조대풍은 쟝글의 덩굴만 보아도 무시무시한 독사같았고 얼룩얼룩한 그루터기들은 매복한 《베트공》들처럼 보여 뒤칸에 출입할 때조차 무릎이 매시시했다. 이런 때에 웬 낯선 중령이 병원에 들렸다. 눈도 둥글고 코끝도 뭉툭하고 머리가 좀 벗어진 그 중령은 조대풍의 넙적한 얼굴을 바라보며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고는 손을 내밀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묘한것이라 그렇게 알게 된 중령이 조대풍을 자기 련대의 작전장교로 조동시켰다. 이때 조대풍은 자기 생명의 은인을 잊지 않고 꿰찼으니 작전장교로 조동될 때는 리기철을 부관으로 데려갔다. 두사람은 남부윁남파견 백마부대에서 전쟁을 치르었다. 그후 서울로 돌아온 그들은 공수특전단 단장과 대대장으로, 청와대 경호실에서 차장보와 작전관으로, 안전기획부의 부장과 국장으로 지금까지 반생나마 동거동락하였다.

조대풍이 남부윁남의 병원에서 만났던 번대머리의 중령이 《대통령》벙거지를 뒤집어썼을 때 어르신네로 존대했듯이 리기철은 자기의 상전인 조대풍을 령감님으로 추어올리며 머리를 갑삭거렸다. 손은 안으로 굽고 곱추는 곱추끼리 정든다고 사람이란 원체 동질의 인간들끼리 잘 통하는 모양이다. 총명한 머리와 능란한 작전적수완에 못지 않게 비굴해보일 정도로 극진한 《겸손성》은 리기철의 눈부신 승진의 밑천이였다.

어느새 승용차는 조대풍의 별장을 가까이 하고있었다. 옛 조선식건물의 대문앞 도로의 량옆으로 마치도 왕조시절의 문무대관들이 임금의 알현을 기다리듯 십여명의 손님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정계, 재계, 학계에서 중진급에 속한다고 할수 있는 인물들이였다. 그들은 조대풍과 선을 맺고 덕을 입어보려고 애를 쓰고있었다.

차가 그들앞에서 멈춰서자 조대풍이 내려섰다. 맨끝에 있는자는 서울대학교의 교수였는데 총장자리를 노리는 야심만만한 사내였다. 그 맞은켠에 서있는자는 제주도 도청의 요직에 있었다.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문앞으로 간 조대풍은 사람들을 휘둘러보고나서 말했다.

《다른이들은 좀 기다리고… 기철이, 넌 날 따라들어와.》

알락달락한 단청장식을 한 정각에 앉아 리기철이 건네는 차잔을 받아쥔 조대풍은 한동안 그를 주시하다가 말을 건넸다.

《솔직히 말해봐. 날 원망하지?》

리기철은 숨이 꺽 막혔다. 불쑥 찌르고 들어오는 조대풍의 의도가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어르신을 원망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

조대풍은 뜨거운 차를 불며 입가에 가져갔다. 리기철은 긴장하여 등골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난 말이야.》 하고 조대풍은 리기철의 피를 말리며 뜨직뜨직 말을 이었다.

《난 단 한순간도 자네를 잊은적이 없어. 내가 처음 국회보궐선거에서 당선된것도, 다음해 총선에서 련속 이길수 있은것도 다 자네의 공적이야.

그리고 내가 보수정당을 내올 때 기여한 일등공신도 기철이 자네야.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공천을 해주면서도 자네만은 국회의원출마를 만류했지. 자네의 꿈을 짓밟았어.》

《어제도 오늘도 전 언제나 어르신의 뜻을 사심없이 따를뿐이옵니다.》

《그땐 어쩔수 없었어. 자네 꿈을 희생한 대신에 우리가 굳건해졌어.

총선에서 7명의 국회의원을 냈으니까. 지금 밖에서 기다리는 저 사람들이 우릴 따라오게 된것은 모두다 기철이 자네 희생의 대가야.》

그제서야 조대풍의 말이 질책이 아니라는것을 감지한 리기철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해졌다.

《어르신의 믿음은 그 어떤 권력이나 금은보화와도 바꿀수 없는 저의 유일한 재부입니다.》

《그래그래, 정치하는 사람들은 자기밖에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난 자넬 믿어. 자네와 난 피로 맺어진 전우니까. 그래서 말야, 기철이!》

조대풍의 수북한 장미눈섭아래 움푹 꺼진 눈에서 강렬한 빛이 번뜩였다.

《이젠 때가 되였어.》

《말씀의 뜻을 알겠습니다.》

《다음주에 난 미국에 다녀올가 하네. 공화당의 상, 하원의원들도 만나보고 CIA와의 인맥을 더욱 두터이 하는 한편 그 선을 통해 백악관의 의향도 확실히 알아봐야겠네. 그러니 빈틈이 없도록 철저히 준비하도록 하게.》

문밖으로 나온 리기철은 그제서야 숨이 나갔다. 조대풍을 상대한지 이제는 수십년이 되여오는데도 날이 갈수록 공포를 느끼군 하는 그였다. 두려우면서도 달아날수 없고 달아나고싶어도 그럴수 없게 하는것이 조대풍의 매력인지도 몰랐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리기철은 우선 목욕부터 하였다. 물을 끼얹고나니 한결 거뜬해지는것 같았다.

여러곳에 전화를 하고 각종 문서들을 정리하느라고 시간을 보내고나니 어느새 저녁녘이 되였다.

그는 옷장을 열고 누런빛의 넥타이를 골라쥐고 홍보석이 달린 핀을 끼워보며 잘 어울리는가 가늠해보았다. 그리고는 은은해보이는 차색의 양복을 입고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거리로 나섰다.

그가 차를 몰고 다리를 건너 이른 곳은 백야의 섬-여의도였다.

하루종일 증권시장이나 은행, 《국회》에서 생존전쟁에 쫓기우던 실업가, 정치인들의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곳이였다. 그래서 여의도는 작은 섬이지만 잠드는 시간이 없어 《백야의 섬》으로 불리우는지도 모른다.

일각에서는 밤이 되여도 잠들지 못하는 여의도를 가리켜 갈수록 커지는 식욕을 감당하지 못해 씩씩대는 거대한 고래같다고들 했다.

리기철이 들어선 료정안은 혼잡스러운 바깥에 비하면 마치도 외진 섬과도 같았다. 이를테면 섬안의 《섬》인셈이였다. 출입문이 찰칵 닫기는 소리와 함께 차소리, 말소리, 발소리 등 혼란스러운 모든 잡음이 순간에 사라져버리고 흘러가버린 옛 청춘의 음향을 되살리는듯 홀에서 울리는 간드러진 피아노선률이 닫긴 가슴을 헤친다. 이 료정은 한다하는 정객이나 대재벌의 자식들도 하루전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올수 없는 최고급의 료정이였다.

리기철은 남자접대원의 안내를 받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주안상을 앞에 놓고 5명의 사나이들이 앉아있었다. 료리에는 수저를 대지 않고 차만 마신듯싶은 분위기였다.

리기철이 들어서자 모두 서둘러 일어섰다.

허리를 굽석거리는 그들을 보는 리기철의 살진 얼굴에 화색이 확 피였다.

《미안하오. 내가 좀 늦었소.》

키가 꺽두룩하고 짧게 깎은 머리에 눈찌가 날카로운 50대 초반의 사내가 말을 받았다.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우리야 한직인걸요.》

그의 말에는 불만이 력력히 슴배여있었다.

리기철은 가운데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왜 그러오, 응? 국정원에서 나왔다고 그래? 뭐 그게 어째서? 정보원에게 있어서 관직이 그리도 중요한가? 그까짓거, 난 차라리 잘되였다싶소.

자자, 술이나 마시면서 얘기합시다. 그러지 않아도 속이 클클할텐데…》

옆의 사내가 《옳습니다, 옳습니다.》 하고 괴여올리며 자기의 술잔을 리기철의 잔밑에 가져다 댄다. 몹시 주눅이 든 그 모양들이 리기철을 기고만장하게 하였다.

이들은 몇달전에 있은 정보원의 인사조동때 해임된자들로서 리기철이 조대풍을 따라 안전기획부를 떠날 때만 해도 과장, 실장을 하던 고위급정보원들이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제일먼저 달라지는것이 정보기관이라는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해임리유는 기구변화에 따른것이라고 하지만 권력자가 자기의 심복들로 정보기관을 꾸리려는 공통된 심리가 반영되여있는것이였다.

리기철로서는 그때 자기들이 실각될 때 따라오지 않은 이 의리없는자들이 괘씸하기는 하지만 《대선》이라는 거사를 앞두고 《정보의 귀재》들이 절실히 필요한 이 시각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얻은셈이였다. 그래서 정보원의 골간이라고 할만 한 중진들을 실업자로 내쫓아준 《구조조정》이 고맙기만 했다.

등치고 간 빼먹는것이 필수적인 생존방식으로 되여버린 이 땅에서 선거는 민심이나 모으고 슬슬 부채질을 하며 인격이나 차린다고 되는 신선놀음이 아니였다. 그야말로 고급한 정보전의 대결 즉 정보전쟁이였다. 상대측에서 내세운 후보자의 선거전략을 먼저 알아채고 그의 치명적인 약점을 리용하여 수세에 몰아넣어 한표라도 빼앗아내야 자기가 살아남을수 있는 일대 결전인것이다. 그러니 한명의 정보원이 소중한 이때에 천사람, 만사람맞잡이인 정보두뇌들을 걷어쥔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조대풍을 돕고있다는 증거가 아니랴싶었다.

술이 거나해지자 그들은 《정권》실세로부터 하루아침에 무직건달이 되여버린 설음과 불만을 토해내는가 하면 옛 처지도 다 잊어버리고 권커니작커니 하면서 서로 옳다고 추어주며 아낙네들처럼 떠들고있었다.

때가 된듯싶어 리기철은 안주머니에서 다섯개의 봉투를 꺼냈다. 그 봉투마다에는 이들의 년봉에 맞먹는 은행권이 들어있었다. 매 사람들의 앞에 슬그머니 놓아주자 주절대던 말소리들이 술병속으로 새들어간듯 조용해졌다.

《이건 뭡니까?》

짧은 머리에 눈찌가 날카로운 사나이가 물었다.

《매숩니까?》

그러자 옆의 사나이가 몰아붙였다.

《박실장, 당신 국장님에게 무슨 말버릇이야? 매수라니?! 우리가 무슨 공무원인가? 우린 이젠 백수란 말이야, 백수!》

그 사내는 식탁에 손을 얹고 웃몸을 일으키더니 머리를 푹 수그렸다.

《옛정을 잊지 않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모자라다고 나무람마시고 부디 우리들을 거두어주십시오.》

리기철은 너부죽한 얼굴에 사뭇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매수냐고 따지던자에게 말을 붙였다.

《박실장, 너무 그러지 마오. 모두 내 잘못이요. 그때 나 혼자 어르신을 따라 슬쩍 뛰쳐나왔으니 내가 임자네들을 먼저 버린게 아닌가싶소.

그래서 늦게나마 사과하는 의미를 담은것이니 별다르게 생각하지 마오. 박실장이 정 싫으면 나가다 쓰레기통에 버려도 되잖소. 그러나 너무 야박스레 그러지는 마오. 그럼 내 가슴이 쓰리지.》

박실장이라고 불리운 눈찌가 사나운 박영준은 여전히 마뜩지 않은듯 술잔을 들어 확 마셔버렸다. 그가 빈잔을 내려놓기를 기다렸다가 리기철은 말을 이었다.

《이게 다 우리가 어르신을 잘 모시지 못한탓이요. 그렇지 않다면 지금에 와서 이렇듯 난파선모양이 되였겠소? 지난 세월과 오늘의 현실을 잘 대비해보시오. 지금 거리바닥에는 우리때 같았으면 상상도 할수 없는 <보안법>에 위배되는 구호들이 천연스레 나돌고있소. 지어 빨갱이들의 선동까지도 용납되는 판국이요. 이것을 단숨에 짓뭉개버려야 할 우리의 진정한 반공투사들은 쪽박을 차고 내쫓기는 신세가 되여버렸고… 이런 암담한 현실을 그냥 보고만 있을수가 없어 우리 어르신도 어지러운 판국을 바로잡자고 다시 재기하신거요. 나도 꼭 그래야 한다싶고…》

그의 말에 동감하듯 사나이들은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의미있게 끄덕거렸다.

리기철은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지금이야말로 한사람, 한사람이 귀할 때요. 무릇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것이 사내의 참된 의리가 아니겠소. 난 여기 모인분들이 우리와 손을 잡고 반공일선에 한몸바치는 심정으로 나서주었으면 고맙겠소.》

박영준이 칼칼한 얼굴을 반듯 쳐들더니 하하하- 하고 소리내여 웃었다.

《이제야 본심이 보입니다.》

비양거리는것 같던 박영준은 언제인가싶게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우린 어린애가 아닙니다. 엊그제만 해도 정보일선에서 뛰던 반공용사들입니다. 조부장님이 교도소를 나서기 바쁘게 보궐선거에 출마하시는것을 보면서 우리도 이미 정세판단을 내린바가 있습니다. 또 이것이 조부장님 혼자의 결심이 아니라 미국의 뜻이라는것을 짐작하기도 어렵지 않구요. 그리고 지금 준비하고계시는 대권에 우리의 생사운명이 걸려있다는것도 모르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내라면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향유하던 그 시절을 왜 그리워하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조부장님과 국장님의 대업이자 우리의 숙명이라고 간주하고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불러놓고 이게 뭡니까. 본론을 피하고 돈봉투부터 돌리고… 그래서 좀 까박을 붙여본건데 뒤늦게나마 국장님께 용서를 빕니다.》

옆의 사내가 말을 달았다.

《사실 국장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는 차만 마시지 않았습니다. 우린 이곳에서 작은 모임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 모임의 명칭은 <조대풍을 사랑하는 모임>, 일명 <조사모>입니다.》

리기철은 가슴이 확 열리는것 같았다.

《훌륭하오. 정말 훌륭하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딴전을 피우는듯싶던 사내들이 벙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비록 다섯이지만 오래지 않아 열, 백, 천으로 불어날것입니다.》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모두 뭉치게 할것입니다.》

그때 박영준이 또다시 능청스럽게 물었다.

《국장님은 어쩌실렵니까? <조사모>에 드시렵니까?》

《물론이지. 나를 빼고 다른 적임자를 어디서 찾겠소.》

《그럼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

리기철은 옆의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또다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박영준, 이 자식이 령리한척 하면서 또 무슨 꼴을 먹이자는게야. 어디 가나 이런 지꿎은 녀석들이 말썽이라니까.)

리기철은 나직하게 물었다.

《말해보게. 그 조건이란게 뭔지…》

《다른게 아닙니다. <조사모>의 회장이 되여달라는겁니다.》

리기철은 입을 딱 벌렸다.

《하- 이 사람아, 그럼 내가 해야지. 나말고 누가 <조사모>의 회장을 한단 말인가. 자자, 축배를 들자구!》

술좌석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고조되였다. 리기철이 이젠 아가씨들을 부르자면서 봉투를 치우라는 손짓을 하자 한 사내가 박영준에게 구석의 휴지통을 가리키며 시까슬렀다.

그러자 박영준이 지지 않고 맞받았다.

《형님, 형님네 정보원들보다 우리 애들이 배나 많다는걸 잊지 마시우. 차라리 형님 돈을 좀 덜어주구려. 우리 애들 밥값이나 좀 높여주게.》

이들이 수년간에 걸쳐 때묻혀 키운 정보원들은 정계와 법조계, 학계, 언론계, 경제계 등 안 뻗쳐있는 곳이 없었다. 그러니 이들을 잘 걷어쥐고 조종한다면 대세도 역전시킬수 있는것이였다.

녀자들이 들어왔다. 잠시후 그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와 더불어 좌석이 흥그러워지자 리기철은 손목시계를 슬그머니 들여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곁의 사나이가 어느새 눈치채고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잠시 빙긋이 웃으며 갑작수를 궁리해보던 리기철은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다.

《실은 옆방에서 손님이 기다리고있소.》

그러자 사내가 킬킬 웃었다.

《역시 회장님이 제일입니다. 이런 때도 사업을 중단하지 않으시니… 어서 가보십시오. 그 <금빠찌>가 옆방에서 기다린지 한참이나 되였습니다.》

리기철은 그자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흔들어보였다.

문을 닫고 복도로 나온 리기철은 숨이 후- 나갔다.

(정말이지 무서운 놈들이야. … 글쎄 야당 《국회》의원이 나를 만나려는것까지도 미리 내탐하고있지 않는가. 뛰는 놈우에 나는 놈이 있고 나는 놈우에 타고가는 놈이 있다더니 장차 그렇게 되는게 아닌가?)

리기철은 살얼음우를 걷는듯 한 기분을 느끼며 옆방으로 들어갔다.

한 미녀를 옆에 끼고 술잔을 기울이던 목이 비둥비둥한 장년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리기철은 머리를 갑삭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미녀를 내보내고 몇잔 기울이자 《국회》의원이 간절한 어조로 말을 붙였다.

《이 사람아, 어떻게 좀 해보라니까. 명색이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이정도로 머리를 숙여주는데 그렇게 모르쇠를 한단 말인가.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기어코 여당을 이기려면 야당들이 후보단일화를 실현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조대풍씨의 지지가 절대적이라니까. 우리 당총재가 대통령이 된다면 총리자리를 내주도록 하지.》

《예예, 저야 물론 압니다만 워낙 령감님의 고집이 불통이시니… 그러나저러나간에 힘자라는껏 하고있으니까 며칠후면 알 도리가 있을겁니다.》

《이봐, 아예 우리 당과 합당하는건 어때? 그럼 다음 총재자리는 조의원에게 돌아갈거네. 다음기 대통령후보는 역시 조의원이 될거란 말야. 정치란게 이렇게 큰 밑그림을 그리는게 아니겠나? 자네가 힘 좀 써보게.》

《예예.》 하고 리기철은 고개를 갑삭거렸으나 속으로는 깨고소해하고있었다.

(바쁘긴 바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진지한 표정이였다. 정치가란 사자의 심장에 구미여우의 혀를 가져야 한다는 옛 정치인의 격언을 좌우명으로 새기고있는 그였던것이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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