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 회)

제3편 성전

9

 

해는 피빛의 노을을 남긴채 우중충한 한나산너머로 사라지고있었다.

석양은 수림뒤로 사라지면서 몇줄기 따뜻한 설핀 광선을 뿌리였는데 그것은 마치 불띠처럼 온 수림을 꿰뚫었고 소나무우듬지에 온통 찬란한 금칠을 해놓았다.

리덕구는 무거운 생각에 잠겨 잡관목을 헤치며 성널오름에 있는 유격대후방부로 가고있었다. 그의 뒤에는 무장한 련락병이 긴장하여 사방을 예리하게 살피며 따르고있었다. 숲속의 나무잎사귀들이 바람에 와슬렁거리고 때늦은 산벌들이 비로도처럼 보르르한 날개를 휘저으면서 붕붕거리며 날아가고 어딘가 가까이에서 이름을 알수 없는 새들이 지저귀고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산속을 걷는 리덕구의 표정은 어두웠다.

… 부대는 적들과의 련일 계속되는 힘겨운 전투와 식량사정으로 하여 지칠대로 지쳐있다. 지금 한알의 고구마, 한줌의 보리도 마을마다에 돌담을 쌓고 틀고앉은 적들과 피어린 전투를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구할 길이 없을만큼 심각하다. 거기다 부상자들의 상처는 계속되는 이동과 전투로 미처 아물 사이도 없이 다시 터지고 곪군 한다. 무엇보다 급선무는 식량과 의약품, 후방보급물자들이다. 유격대원들은 그 누구든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한다.

유격대원들은 자기들의 지휘관들, 보다 책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가장 중요한 걱정거리를 떠맡기고있다. 응당한 일이다. 그러나 실은 책임적인 위치에 있는 지휘관들자신도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했건만 자기자신에 대해서보다도 남들에 대해서 더 생각해야 한다. 그 역시 응당한 일이다. 지휘관들은 자기보다 먼저 대원들을 생각해야 하는것이며 전투때에는 앞장에 서야 하는것이다.

《대장동지.》 하고 줄곧 말 한마디 없이 뒤따르던 련락병 고병호가 무거운 생각에 잠긴 리덕구에게로 바싹 다가서며 나직이 불렀다.

리덕구는 멈춰서서 가까이 다가오면서 가쁜숨을 톺는 고병호를 바라보았다.

《왜? 걷기가 힘겨운 모양이구만. 좀 쉬여갈가?》

《선생님, 걷기가 힘들어서 아니라… 대장동지가 오늘 하루종일 아무것도 잡숫지 못하시였는데…》

련락병 고병호는 눈에 띄게 수척해보이는 리덕구의 얼굴을 얼핏 바라보고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이것이라도… 들어보십시오.》

고병호는 주머니에서 초들초들 마른 바나나 비슷하게 생긴 산열매를 꺼냈다.

《산열매구만. … 난 일없으니 혼자 먹소.》 하고 리덕구는 측은한 눈길로 고병호를 바라보았다. 유격대원들모두가 벌써 며칠째 산열매와 버섯으로 끼니를 대신하고있었던것이다.

《대장동지, 잡수어보십시오. 맛이 괜찮습니다.》

련락병 고병호는 어줍게 웃으며 다시 권했다.

《병호, 난 유격대본부에서 이걸 실컷 먹고 떠났어. 혼자 먹으라는데…》

나직이 뇌인 리덕구는 다시 숲속을 헤치며 앞으로 걸어갔다.

얼마동안 앞으로 나가니 문득 폭포가 나졌다. 아흔아홉골짜기를 끼고 있는 이곳 성널오름에는 폭포들이 많다.

《병호, 힘들지? … 여기서 좀 쉬여가자구.》

리덕구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폭포가 물보라를 일으키는 물가에 앉았다.

그의 온몸에서는 땀이 흐르고있었다. 고병호가 주위를 살피며 좀 떨어져서 두두룩한 언덕에 앉았다.

폭포에는 사람그림자 하나 없었다.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여기 폭포에서는 적들을 치고 돌아온 유격대원들이 왁작 떠들고 웃으면서 덕수를 맞으며 즐겁게 휴식의 한때를 보내던 곳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힘겨운 전투와 굶주림으로 지친 대원들은 그럴 경황이 없었다.

유격대원들속에서는 웃음과 락천이 점차 사라져가고있는것이다.

《병호, 요즘 유격대생활이 퍽 힘겨웁지?》

리덕구는 중학교시절부터 잘 아는 고병호에게 생각깊은 어조로 물었다.

《네, 사실 요즘 좀 힘겹지만… 이제는 단련돼서 견딜만 합니다.》 하고 고병호는 솔직히 대답하였다.

《힘들거요. 하지만 병호, 이겨내자구. 우리는 사생결단을 각오하고 싸움의 길에 나선 사람들이니까… 참, 가족들 소식은 들었소?》

《네, 아직까지는 다행히도 별일없는것 같은데… 놈들이 이제 앞으로 무슨짓을 할는지 어디 알수 있습니까.》 하고 고병호는 얼굴을 흐리며 한숨쉬였다.

《가족들이 무사하다니 정말 다행한 일이요. … 병호, 절대로 잊어서는 안돼… 미제와 리승만괴뢰도당이 우리 고향 제주도에 들씌운 전대미문의 이 피의 재난을 말이요. … 병호, 수십만 제주도인민들과 력사는 두고두고 잊지 않을거요.》

《선생님, 제가 잊다니요? … 저는 매일매일 분노와 증오, 원한을 가슴속에 쪼아박아넣고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의 가족들이…》 하고 고병호는 무엇인가 하려던 말을 불시에 삼켜버렸다. 그것은 너무도 엄청난 불행, 온 가족을 놈들에게 잃은 커다란 상처를 안고있는 리덕구에게 상기시키지 말아야 할 재난이였던것이다.

《선생님, 미제와 리승만괴뢰도당은 그 무엇으로써도 우리 제주도에 들씌운 죄행을 절대로 보상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속시원한 복수를 해야겠는데…》

고병호는 터져나오려는 비통한 울음소리를 씹어삼키고있었다.

입을 꾹 다문 리덕구는 잠시 말없이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고있었다.

《병호, 여기 제주도땅에서 저지른 놈들의 죄행은 이제 력사의 심판대에 오르게 될거요! 우리 조국, 우리 인민, 후대들은 대를 이어가며 두고두고 놈들을 저주하고 용서치 않을거요.》

리덕구는 조금도 격하지 않고 평상시의 어조로, 그러나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선생님, 그럼 현재의 우리는 뭘 한단 말입니까? 하루속히 너 죽고 나 죽고 속시원히 무자비한 복수전을 해서…》 하고 고병호는 흥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열띤 목소리로 웨치듯이 부르짖었다.

《병호, 우리도 지금 놈들을 징벌하고있소.》

리덕구는 조용히 뇌였는데 그의 말속에는 무엇인가 가슴을 치는 의미심장한것이 있었다.

《선생님, 그렇기는 하지만…》

《자, 이제는 쉴만큼 쉬였으니 가보자구.》 하고 리덕구는 폭포앞에서 일어나 후방부가 자리잡은 숲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얼마후 후방부가 자리잡은 울창한 숲속에 이르렀을 때 거기서는 웬 일인지 벅적 고아대며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방부장동무, 그래 정말 승인하지 못하겠단 말이요?》

《그렇소. 승인할수 없소! 우리는 그런 식으로 적들과 싸워서는 안된단 말이요. 여보 성규동무, 동무는 후방부소대장인데 아직도 내 말을 리해하지 못하겠소?》

《소대장이 어쨌단 말이요? 난 4. 3봉기때부터 무장을 들고 싸웠소. 그렇기때문에 이렇게 조직에 제기하는거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난 벌써 승인이고 뭐고 할것없이 나 혼자의 결심으로 산을 내려갔을거요. 후방부장동무.》 하고 중키에 몸매가 그쯘한 소대장은 숨을 헐떡거리며 얼굴이 주검처럼 질려가지고 입술을 떨며 고함을 질렀다.

열이 오른 후방부장은 장작이라도 패는것처럼 팔을 휘두르며 참지 못하고 맞받아 소리쳤다.

《성규소대장! 난 동무가 리해하기에는 족히 명백하게끔 의사표시를 했소. 개인적으로 복수를 해서는 안된다고 말이요. … 다시 반복하지만 우리의 투쟁은 개인복수가 아니요.》

《아니, 난 가겠소! 가서 내 손으로 속시원히 복수의 총탄을 퍼붓기 전에는 난 잠시도… 숨쉬기조차 고통스러워 못살겠단 말이요.》 하고 성규소대장은 그쯘한 몸을 홱 돌리더니 산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후방부장이 달려가 그를 막아나섰다.

《성규소대장! 정말 상급의 명령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겠소?》

후방부장은 할수 있는것을 다한 사람이 마지막 비상수단을 적용할 의도가 뚜렷한 의지로 그를 쏘아보며 빠른 어조로 말했다.

《좋소. 그래… 그러면 나를… 어떻게… 하겠다는거요?》 하고 분별을 잃은 성규소대장은 무섭게 얼굴을 이그러뜨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럴 때 숲속에서 리덕구가 그들에게로 급히 다가갔다.

《후방부장동무, 여기서 무슨 일이요?》

리덕구는 성이 나서 얼굴이 뒤틀리고 시꺼매진 후방부장을 면바로 쳐다보며 엄하게 질책하듯 물었다.

《글쎄, 이 동무가… 적들에게… 어제 아버지가 총살당했는데… 폭도아들을 키운 죄라고… 그런데 이 동무가 혼자서 복수하려고 내려가겠다는걸 막았더니… 저렇게 영 분별을 잃고 야단이… 아닙니까.》 하고 후방부장은 억이 막힌듯 떠듬거리며 말했다.

리덕구는 제정신이 아닌듯 마구 고함을 질러대며 실성한 사람모양으로 눈을 희번득거리는 소대장에게로 다가갔다. 그에게서는 술냄새가 풍겼다.

《동무… 술을 마셨소?》

리덕구는 나직하면서도 엄하게 물었다.

《그래, 마셨소. … 너무도 속이 타고 고통스럽고… 분통이 터져서 마셨소.》 하고 성규소대장은 실성한 사람처럼 눈을 희번득거리며 태연히 응수하였다.

그 순간 리덕구의 눈이 번쩍이며 소대장을 쏘아보았다. 그는 낮으나 저력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명령하였다.

《이 동무의 무장을 회수하시오.》

《아, 아… 대장동무, 왜 그러시오? … 내가 뭘 잘못했다고 무장을 회수한단 말이요. 그래 아버지가 놈들에게 희생되였는데… 내가 피값을 받아내겠다는데… 그래, 그게 잘못이란 말이요? …》

성규소대장은 울분을 터뜨리며 대들듯이 소리쳤다.

《무장을 내놓으시오! 그리고 동무는 가고싶은대로 가시오. 동무 같은 사람은 우리 유격대에 필요없소.》 하고 리덕구는 단호하게 언명했다.

《가라구요? 내가… 왜, 무엇때문에… 어디로 간단 말이요.》

극도의 흥분으로 딴 사람이 된 성규소대장은 악문 이발을 거의 떼지도 않고 소리쳤다. 새까맣게 질린 그의 얼굴근육이 경련으로 실룩거리고 눈자위에서 눈알이 툭- 두드러져나왔다.

《그래… 그래… 내가 무얼 잘못했다고… 쫓아내려는가. 당신들은 아버지를 잃은 내 심정을 그렇게도 몰라주는가… 리덕구대장도, 후방부장도… 당신들도 사람이겠지? … 그런데 당신들의 심장은 그렇게도 메마른 돌심장인가… 너무하오. 아… 누구도 아버지를 잃은 나의 이 아픔을 몰라주는구나.》

성규소대장은 울부짖듯이 부르짖으며 울분으로 몸을 떨었다.

《뭐요?!》

나직이 웨치는 리덕구의 눈에서는 순간 또다시 섬광이 번쩍- 하였다.

그러나 다음순간 그는 자신을 억제하며 낮으나 엄하게 명령하였다.

《고병호동무, 저 사람의 무기를 즉시 회수하고 술이 깰 때까지 억류하시오. 그리고 한시간후에 나에게로 보내주시오.》

그런 다음 리덕구는 곧바로 후방부 반토굴로 들어갔다. 뒤따라 후방부장이 머리를 수굿하고 후방부 반토굴로 들어갔다.

그들이 후방부 반토굴로 사라지자 고병호가 성규소대장의 무기를 회수하면서 참지 못하고 성을 냈다.

《여보시오. 성규소대장, 당신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가.》

《뭐야? … 아버지를 잃은 괴로움도… 그래 터놓지 못한단 말인가? 내가 뭐 못할 말을 했소?》

《그렇소. 유격대원으로서, 인간으로서 차마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였소. … 리덕구대장동지는 보름전에 어머니와 처자, 온 일가 20여명이 놈들에게 희생당했단 말이요. 그리고 엊그제는 조카 리순우동지가 적들과의 치렬한 전투에서 희생되였소. 그런데 뭐 리덕구대장이 아버지를 잃은 사람의 심정을 몰라준다구? 메마른 돌심장이라구? … 여보시오, 그런 큰 상처를 안고있는 그의 가슴에…》

격분한 고병호는 마구 두팔을 휘두르면서 분노에 찬 말마디들을 쏟아놓았다. 그의 격한 목소리가 억센 구령처럼 성규소대장의 귀를 때렸다.

《뭐, 뭐라구? … 온 일가가 모두?!》

성규소대장은 된매라도 맞은 사람처럼 풀썩 주저앉으며 머리를 떨구었다.

《아… 아… 내가 무슨 망동을…》 하고 그는 머리를 싸쥐면서 신음소리를 냈다.

《성규소대장, 일어서시오.》

날카롭게 명령조로 뇌인 고병호는 무장을 회수한 그를 앞세우고 후방부 반토굴뒤의 동굴쪽으로 걸어갔다. …

리덕구는 어스레한 후방부 반토굴의 탁자앞에 앉아 말없이 가슴속 괴로움을 누르고있었다.

《여보, 후방부장동무. 담배 한대 주오.》

《녜.》

문가에 머뭇거리며 서있던 후방부장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담배갑에서 담배 한대를 꺼내 리덕구에게 주고 성냥을 켰다. 담배를 받아들고 불을 붙이는 리덕구의 손은 모진 괴로움으로 가늘게 떨고있었다.

《대장동무, 진정하십시오. 사실 저 성규소대장동무는 지금까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잘 싸운 용감하고 진실한 동무입니다.》 하고 마음이 어진 후방부장은 괴로워하는 리덕구를 위로하였다.

《그건 나도 알고있소. 그런데… 그런 성규소대장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분별을 잃을수가 있소? … 난 실망하게 되오.》

《대장동무, 성규소대장은 젖먹이시절부터 어머니를 잃고 홀아버지손에서 자랐습니다. … 그는 아버지가 적들에게 희생되였다는 비보를 듣고 온밤 울었습니다. … 그러더니 끝내 분별을 잃고 제정신이 아니였습니다. … 그래도 다행스러운것은 복수하러 가겠다고 제발로 찾아와서 제기한것입니다. 만일 누구도 모르게 혼자 마을로 내려가기라도 했더라면…》 하고 후방부장은 긴 한숨을 내쉬였다.

리덕구는 아무런 응대없이 담배만 뻐금뻐금 피우고있었다.

《그 동무문제는 후에 보도록 합시다. 한시간후에 나한테로 데려오도록 했으니까. 그런데 후방부장동무, 놈들의 봉쇄선을 뚫고 후방물자들을 구입하러 나갈 발동선문제는 어떻게 됐소? 지금 그것이 가장 절박하고 중요한 문제요. … 그래서 내가 동무들의 보고를 기다리지 않고 긴급하게 여기로 온거요.》

리덕구는 담배불을 재털이에 눌러끄면서 신중한 어조로 무겁게 뇌이였다.

《대장동무, 그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아 벌써 세번째로 리좌구동무가 해안가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아마 오늘쯤은 여기로 올것 같은데…》

후방부장은 난색을 지으며 한숨을 토했다.

《오늘중으로 리좌구동무가 오라고 약속이 되였는데… 떠날 준비가 완료될것 같다는 련락이 오늘 아침에 왔었습니다. … 가만, 아… 도착한것 같습니다.》 하고 후방부장이 인기척을 느끼고 문쪽을 돌아보며 나직이 환성을 질렀다.

반토굴문으로 허우대가 큰 리좌구가 기분좋은 얼굴로 들어섰던것이다.

《좌구동무! 기다리고있었습니다.》

후방부장은 신바람이 나서 마주 걸어나가며 말을 보탰다.

《유격대장동무가 우리에게로 직접 왔습니다.》

리좌구는 탁자앞에 앉아있는 리덕구대장에게로 성큼 다가가 깍듯이 보고하였다.

《대장동무! 적들의 해안봉쇄선을 뚫고 나갈 배는 드디여 마련되였습니다. 떠날 준비를 완료하느라 좀 지체되였습니다.》

《적구에서 수고가 많았겠습니다.》 하고 리덕구는 뜨겁게 뇌이며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좌구의 손을 힘있게 잡았다.

리좌구는 탁자가까이의 등받이가 없는 긴 나무걸상에 앉아 구체적인 정형을 자세히 보고하기 시작하였다.

《제주도지구 토벌사령부》의 명령에 의해서 괴뢰군과 경찰놈들은 제주도의 항구와 해안선을 빈틈없이 완전봉쇄하였다. 적들은 발동선은 물론이고 노젓는 쪽배며 돛단 어선들까지 바다출입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기계배들의 발동장치(노주루)는 모조리 경찰에서 회수해갔다. 그러나 이러한 험악한 정황속에서도 유격대의 임무의 절박성으로 하여 후방부에서는 지하조직의 방조밑에 해안가마을의 어선들을 근기있게 료해장악하였다. 발동장치는 예비로 가지고있는 《노주루》를 간난신고끝에 해결하고 항해용기름과 식량, 물, 소금과 화목 등을 은밀히 갖추어놓았다. 리좌구의 지휘하에 조수가 만수된 밤에 빠져나가기로 만단의 준비가 갖추어져있었다. …

《늦어도 2~3일후에는 반드시 출발하겠소.》 하고 리좌구는 꾸밈없는 열정이 담겨진 열띤 어조로 박력있게 말했다.

《그렇다니 마음이 놓입니다. 잘 알겠지만 지금 식량과 후방물자들은 매우 절박하게 요구됩니다. … 그런데 건강상태는 어떻습니까?》

리덕구는 절박한 심정을 토로하면서 리좌구를 의미있게 바라보았다.

순간 리좌구는 여유있게 껄껄 웃었다.

《내 몸은 항상 무쇠덩어리요.》

《그럼, 말씀들 하십시오! 저는 좌구동무의 출발준비도 있고 해서… 좀 나가봐야 하겠습니다.》

후방부장은 서둘러대며 밖으로 나갔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반토굴안은 잠시 침묵이 서렸다.

《형님, 되도록 몸조심해야겠습니다. … 이제는… 집안에 어른이라고는 우리만 남았는데… 참, 형님네 애들만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형님도 그 소식을 들었습니까?》

《음, 마음씨 무던한 옆집의 아낙네가 돌보고있다는 소식을 나도 들었다. 늙으신 어머니는 놈들에게 희생되면서도… 손자애들만은 살려내려고 그렇게도 애를 쓰셨다더라.》 하고 리좌구는 괴로움에 애끊는 낮은 목소리로 혼자소리처럼 뇌였다.

그들은 한동안 서로 말없이 앉아서 담배를 연방 피우며 밖에서 들려오는 밤새의 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지나치게 걱정할건 없다. 다 잘되겠지! 가만, 내 등잔불 켤것을 가져오겠으니 앉아있어라. 오늘은 여기서 함께 하루밤 자자꾸나.》

리좌구는 생각깊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하였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리덕구 역시 생각깊은 음성으로 대꾸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헤여지면 이 준엄한 시기에 언제 다시 만나게 되겠는지 기약할수 없다는것을 그들은 서로 잘 알고있었다.

리덕구는 그가 나간 다음에도 꼼짝않고 무거운 생각에 잠겨 앉아있었다.

(배가 놈들의 봉쇄선을 무사히 빠져나가야겠는데…) 하고 리덕구는 꼼짝않고 컴컴한 반토굴에 앉아 주문처럼 외웠다.

그때 누군가 반토굴로 주춤거리며 들어와 말없이 서있었다.

《누구요? 후방부장동무요?》

《대장동지! 저는 처벌을 받으려고 왔습니다. … 한가지 간절한 청원은… 다른 그 어떤 처벌도 기꺼이 받겠지만… 저를 대오에서 쫓아내지는 말아주십시오.》 하고 성규소대장은 울음섞인 목소리로 떠듬거리며 머리를 떨구었다.

《성규소대장! 이젠 술이 깨였소? … 제정신으로 돌아왔는가 묻는거요.》

리덕구의 목소리에서는 그 어떤 용서도 허용치 않으려는 랭혹함이 울리고있었다.

《대장동지, 제가 그만… 분별을 잃었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나를 낳고 인차 눈을 감은 어머니를 대신하여 이 세상 별별 고생을 다 겪으며 저를 키웠는데… 제가 간난애였을 때는 이집저집 젖동냥을 다니셨고 제가 좀 커서는 매일 새벽 포구에 나가 뱀장어를 잡아다가 저에게 먹여 영양실조를 고쳐주느라 모진 고생을 다하신 아버지였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저는 효도 한번 못했습니다. 그런데 앞집의 경찰놈이 폭도빨갱이를 키운 애비라고 백주에 총으로 쏘아죽였답니다. 그 비보를 듣고는 너무 분통이 터져 제정신을 잃고 복수할 한가지 생각만으로…》

《여보, 성규소대장, 그만하오.》 하고 리덕구는 그의 말을 중도에서 꺾고 괴로움이 느껴지는 갈린 목소리로 말을 덧붙이였다.

《동무는 혹시 동무만 그런 아픔과 상처가 있다고 생각하는건 아니요?》

《그런건 아니지만… 저도 대장동지의 일가에 대한 가슴아픈 이야기를 좀전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참기 어렵고… 못견디게 그냥 괴롭습니다.》 하고 성규소대장은 가까스로 울분을 누르며 말했다.

《성규소대장, 지금 전체 유격대원들의 가정에, 제주도의 모든 가정에 그런 아픔과 재난이 들씌워지고있소. 온 제주도 곳곳에 무고한 인민들의 피가 흐르고있소. 그런데 유격대의 소대장인 동무가 마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개인적복수를 하러 가겠다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고함까지 지르며 야단쳤으니 그게 무슨 추태요? 명심하오. 우리는 개인복수가 아니라 조직적인 복수, 전체의 투쟁으로 놈들에게 무자비한 복수를 안겨야 하오.》

리덕구는 엄격한 자세를 허물지 않고 랭혹하게 꾸짖듯이 말했다.

《대장동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생각은 그렇지만 원통하게 희생된 아버지를 생각하면 너무도 분통이 터지고 가슴이 아파서 눈에서 피눈물이 쏟아집니다. 대장동지, 앞으로 저는 이 원한과 아픔을 절대로 잊을것 같지 않습니다.》

성규소대장은 격렬한 증오감에 휩싸여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그렇소. 잊지는 못할거요. 성규소대장, 다른 사람들은 자기의 아픔을 영 잊어버린다고 생각하오? 아니, 다른 사람들도 잊지 못하며 또 잊어버릴수도 없는것이요. 그렇지만 가증스런 놈들과 무자비하게 족쳐대면서 싸우느라면 동무의 아픔도, 다른 사람들의 아픔도 멎게 되리라고 나는 믿소.》 하고 리덕구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대장동지, 명심하겠습니다. 앞으로 적들과의 싸움에서 백배, 천배의 복수를 안기겠습니다. 대장동지, 좀전에 이미 간절히 부탁했지만 다른 그 어떤 처벌은 두렵지 않은데 대렬에서… 그냥 싸우게만 해주십시오.》

간절히 뇌이는 성규소대장의 목소리는 절반 울음소리였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우박처럼 떨어지고있었다.

리덕구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없이 침묵하고있었다.

《성규소대장,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고 믿어도 되겠소?》 하고 리덕구는 나직하니 물으며 어둠속에서 조용조용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대장동지, 믿으십시오.》

정력적이면서도 진실한, 뜨거운 감정으로 혈기차게 말하는 성규소대장의 눈에선 그침없이 눈물이 쏟아지고있었다.

《좋소. 성규소대장, 후방부장동무에게도 사죄하고 용서를 비오.》

《알겠습니다.》

성규소대장은 또다시 기운차게 대답하고는 어깨를 곧추 펴고 활기있게 밖으로 나갔다. …

그날 밤 리덕구는 적들의 봉쇄선을 뚫고 섬을 탈출하여 후방물자를 구입해올 중임을 맡고 떠나갈 좌구형과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이것이 자기들의 마지막작별의 밤, 이제 다시는 영영 만나지 못하리라는것을 알지 못하였고 또 알수도 없었다.

《형님, 만약 물자를 구입해가지고 돌아오다가 놈들의 봉쇄선을 뚫고 유격대에까지 오지 못하게 되는 경우, 불가피한 정황이 조성되는 경우 무모한 희생을 피하고 북으로, 조국의 품으로 가십시오. 이건 명령이면서 부탁이기도 합니다.》

리덕구는 절절한 어조로 당부하듯 말을 계속하였다.

《형님, 그리고 몸조심하십시오. … 무모한 모험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 알겠다. 너도 몸조심해!》 하고 리좌구는 끝없는 애정을 담아 짤막하게 뇌였다.

밤은 깊어가고있었다. 밖의 한나산상공에는 화려하게 하늘에 띠를 두른 은하수가 걸려있었다.

숲속에서는 온밤 밤새가 구슬피 울고있었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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