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석윤기

(제34회)

제 3 편

 

10

 

길은 이깔나무가 무성한 번번한 등성이를 꿰고 곧추 뻗어있었다. 4월이라 하지만 해발 1,000m가 넘는 이 고원지대에는 아직도 봄아가씨가 넘겨다볼념을 못한다.

그러나 학생복우에 회색춘추외투 하나를 걸치시고 훨훨 걸어가시는 김일성동지의 이마에는 번지르르 땀기가 내뱄다.

박훈이 역시 얼굴이 벌개서 군인다운 씩씩한 걸음을 옮겨놓으며 연신 이마에 내번지는 땀을 손등으로 씻어내리군하였다. 그러니 흑공단다부산자에 털목도리까지 든든히 감고나선 진한정이는 가뜩이나 빠른 걸음을 따라가기가 힘겨워서 헐떡거릴밖에 없었다.

《아니 무엇때문에 이렇게 서두는거요? 저승에서 우리를 기다리는것도 아닌데…》

마침내 진한정이 걸음을 멈추고서서 불평조로 말했다.

《급하면 쉬여가자고 솔직하게 말할것이지 방정맞은 소리는 왜 하는거요.

박훈이 투박하게 내쏘았다.

《허허, 그럼 좀 쉬여갑시다. 부르죠아자식이 혁명을 하자니 급하구만.

진한정이는 워낙 성미가 참배같이 사근사근한 사람이라 박훈이 아무리 구박해도 타내지 않고 말했다.

박훈이 생각에는 암만봐야 이 허여멀끔하게 생긴 미남자가 총을 들고 유격투쟁까지 하겠다는것이 잘 리해되지 않았다. 돈화의 진대감이라면 세상이 다 아는 부자인데 혹 심심풀이로 좌익서적이나 읽고 과격한 연설이나 하는 정도라면 몰라도 이것은 집도 없고 옷도 없고 먹을것도 없을뿐아니라 아직 태여나지도 못한 유격대를 따라 무장투쟁을 하겠다고 샅자리 하나 없는 봉당에 빈고농출신들과 함께 뒹구니 그 역시 독립군을 하다가 혁명의 편에 넘어온 사람으로서 암만해도 리해가 잘 가지 않는것이였다.  진한정은 우사령부에 담판을 간다고 오늘은 일부러 한밤중에 성안에 들어가 비단옷을 입고 나섰는데 그리고보니 유격대원같은 맛은 그 어디에서도 풍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길에 한번 시험을 쳐보자는 엉뚱한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사실 길이 급하였다. 낮중에 량강구까지 가대야겠는데 소사하에서 대사하까지가 20리에 거기서 길을 꺾어 량강구까지는 근 40리나 된다. 그런데 소사하에서 무장성원들이 김일성동지께서 위험한 길을 떠나신다고 막아나서는바람에 지체되다보니 한낮때나 돼야 대사하에 들어설지말지하다. 대사하에서 점심을 먹게 된다면 빨리 걸어야 해동갑이나 해서 량강구에 들어서겠는데 가뜩이나 살벌한 우사령부대주둔구역에 밤중에 들어선다는것은 어느 모로 보나 재미가 적은것이다.

사실 간밤 회의에서는 자기가 담판에 가겠다는 제기까지 했지만 단순하고 성급한 그의 생각에는 그 모든게 시끄럽고 거치장스럽게 여겨졌다. 워낙 독립군물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그는 지금 유격대창건을 위해 활동하고있는 차광수를 비롯한 지도성원들이 지나치게 재는것이 많고 리론을 많이 캐는것이 성가시게 느껴졌다. 우사령부대가 못되게 놀면 답새기면 될게 아닌가. 우리는 뭐 총이 없어서 계속 뒤길로 피해다닌단말인가. 이런 생각이 불쑥불쑥 드는것이였다. 물론 문제가 토론에 붙여져서 하나하나 캐고들어가면 그도 꼼짝달싹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밸은 나는것이였다.

《저 사령관동지.

박훈은 아무 말씀없이 앞에서 한모양으로 훨훨 걸어가시는 김일성동지께로 바투 다가가서 군인다운 절도있는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저 진한정동무가 자꾸 쉬여가자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참 고마운 제기로군. 나도 아까부터 쉬고싶었는데 사령관이 먼저 쉬자고 할수도 없고 박훈동무를 보니 이번에 책상물림들을 한번 혼내우자는 의도가 뚜렷해서 은근히 켕기던 참인데 역시 진한정동무가 용감하오.  나같으면 이런 군벌앞에서 그런 제기를 못할것 같소. 저기 저 둔덕밑의 양지에 앉읍시다. 사실은 나도 아까부터 맞춤한 쉴자리를 찾던참이요.

김일성동지의 롱기어린 서글서글한 말씀에 진한정이도 박훈이도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다.

김일성동지께서 가리키시는 구붓한 언덕굽이는 보기부터 잠풍한데다가 흐릿한 날씨인데도 거기만은 해빛이 포근해보였다. 이처럼 길손들을 끌만한 자리에는 의례 그럴만한 흔적도 남기 마련이여서 박훈이가 깔고앉을것을 마련하느라고 한걸음 먼저 달려가보니 어렵지 않게 등성이에서 끌어내려온 이깔나무등걸과 거적쪼박이 나졌다.

《보시오. 쉰다고 아무데서나 망탕 앉는게 아니란말이요.

김일성동지께서 다시한번 롱말을 하시니 진한정은 그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배울게 참으로 한두가지가 아니요. 오늘 우사령과 첫대면을 어떻게 하겠는지 그것까지 배우면 우리 일과는 매우 성과가 크다고 볼수 있는데… 앞서간 동무들이 그 문제에서도 이러한 거적때기같은것을 남겨두지 않았는지…》

진한정도 겉으로는 순박하게 말하는듯했지만 역시 속은 록록치 않아서 한숨소리 비슷하게 하는 그의 말속에는 오늘 일이 결코 락관할 일이 못된다는 뜻이 강하게 풍기고있었다.

시절이 어수선해선지 날씨가 스산해선지 길우에 행인들은 드물었다. 소사하쪽에서 나무를 산더미처럼 처실은 달구지를 끌고 앙상하게 여윈 피말 한마리가 금시 쓰러질것처럼 힘겹게 언덕을 넘어갔다. 나무짐에 가리워 보이지 않던 마부가 채찍을 팔짱사이에 끼우고앉아 건들건들 졸다가 길가에 앉아쉬는 길손들을 보자 흠칫 놀라 선잠이 깬것처럼 채찍을 휘두르며 가뜩이나 쓰러질것 같은 말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아니 저녀석이 우리를 무슨 길목이나 지키는줄로 잘못본게 아니요?

박훈이 격분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우사령이 저런 심리란말이요.

김일성동지께서 껄껄 웃으시였다.

이번에는 대사하쪽에서 이사짐보따리를 지고 그우에 서너살 나뵈는 아이를 올려놓은 중늙은이가 넘어왔다. 그밖의 식솔은 다 어디로 갔는지 보짐 한옆에는 그을음이 잔뜩 오른 쇠남비까지 매달려있었다.

얼마후 대사하쪽에서 또 한사람의 발자국소리가 다가왔다. 솜이 희뜩희뜩 삐여진 누데기같은 바지저고리를 입고 허리에 조막만한 짐을 꿍진 보자기를 건너띤 아낙네가 지팽이를 짚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언덕굽이를 돌아섰다. 허름한 수건으로 얼굴을 잔뜩 싸매고있어서 나이는 대중할수가 없으나 거지꼴이 완연하였다. 행색을 봐서는 어디에 힘이 있어보이지도 않는데 아까 말달구지군처럼 숨가쁘게 걸음을 다그쳤다. 그 역시 길손에게서 무슨 위협이라도 느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녀자는 길가에 앉아쉬는 길손을 얼핏 스쳐보고 지나치더니 무슨 생각이 났는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저 말씀 좀 묻겠어요.

뜻밖에도 명랑하게 잘 울리는 젊은 녀자의 그것도 억양이 선명하고 아름다운 조선말이 울려나왔을 때 모두 눈이 둥그래졌다.

그 녀자는 그런 눈치는 전혀 못느끼는듯 숨가쁜 목소리로 다급하게 물었다.

《여기서 소사하 토기점골까지 가자면 길이 얼마나 됩니까?

너무나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아직 누구라는것을 똑똑히 의식하기도전에 벌써 허리를 일으키시였다.

《아, 한별동지.

거지행색의 녀인이 외마디 부르짖음을 터뜨리며 그이의 손에 와락 매달렸다.

《선아동무, 이게 웬일이요?

김일성동지께서도 그의 손을 마주잡고 흔드시였다. 그이께서는 아직도 무슨 영문인지 알수가 없어 손을 잡고 흔드시면서도 그냥 눈을 슴뻑이시였다.

선아는 잠시후에야 진정이 되여 비로소 제 행색이 생각났던지 얼굴을 처맨 수건을 풀었다. 그러자 희고 아름다운 그 녀자의 천연의 모습이 드러났다. 거지행색을 하고있어서 그런지 람루한 옷가지우에 드러난 그 얼굴의 아름다움은 처절할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유선아란 이름을 들었을뿐 면대해보기는 처음인 진한정과 박훈은 그 아름다움에 흑하고 숨을 들이그을만큼 놀랐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들에게 간단한 초면인사를 시키시고나서 물으시였다.

《그래 나를 찾아오는길이요?

《그렇습니다. 밤중에 량강구에서 떠났는데 길을 잘못들어 한참 푸르하쪽으로 나가다가 되돌아서다보니 이제사 겨우 여기에 왔습니다.

유선아는 얼굴을 싸맸던 수건으로 이마며 턱밑에 흐르는 땀발을 훔치며 쑥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래 몸은 일없소? 아까 보니 다리를 저는것 같던데…》

《제 몸은 아무 일 없습니다. 제 마음 같아서는 벌써 달려온지 오랬겠는데 영희동무부모가 자꾸 붙잡고 또 저도 영희도 없는 집에 로인들만 남겨두고 떠나오기가 힘이 들어서 하루하루 미루다나니 이렇게 늦어졌습니다. 그런데 사령관동지, 제가 려순에서 한 공작보고랑은 다음에 말씀드리게 해주십시오. 간밤에 량강구에서 큰사건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급히 보고를 하러 가는길입니다.

《그렇소? 그럼 그 이야기를 먼저 하오. 그러지 않아도 우리는 지금 량강구로 가는길이요.

《예, 량강구예요? 그건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간밤에 연길쪽에서 사령관동지를 찾아오던 열명의 조선청년들이 우사령부에 잡혔습니다.

저는 돈화의 옥섬동무한테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대충 듣고 떠났지만 정말 눈앞에 보니 치가 떨려 견딜수 없었습니다. 저도 이런 꼴을 하고 왔으니 망정이지 조선사람이라는것만 드러나면 당장 잡혔을것입니다. 가지 마십시오. 이대로 갔다가는 큰일납니다.

선아는 아이들처럼 김일성동지의 두팔을 붙잡고 흔들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애원하였다.

《그럼 그렇게 붙잡힌 우리 동무들을 그냥둔단말이요? 그럴수는 없지 않소. 그래서 우리가 그 문제를 풀자고 가는길이요. 선아동무, 마음놓으시오. 우사령과 나는 아는 사이요. 그리고 이 진한정동무와도 특별히 가까운 사이고… 그래서 이렇게 교섭을 가는 길이 아니요.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그렇지 않느냐고 진한정을 돌아보시였다.

진한정은 말을 몰라 무슨 영문인지 잘 모르겠으나 김일성동지의 말씀은 다 옳다는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해보였다.

《그래요?

유선아는 뭔가 미덥지 못한듯이 김일성동지의 웃음지으시는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고 다른 두 사람의 기색을 번갈아 살피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다 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 거리에 떠도는 소문이 조선사람 공산당은 덮어놓고 잡아들이는데 만일 반항하면 그자리에서 총살해도 무방하다고 우사령이 명령했다는군요. 그런데 저는 량강구에서 왜 이처럼 험한 사태가 발생했는가 하는것을 알았어요. 저는 어느 중국음식점에서 점심을 사먹다가 니시자와를 봤어요.

《뭐요? 김혁이를 체포했다는 그놈말이요?

《그래요. 그놈이 한별동지를 잡으러 오가자에 갔다가 총에 맞고 절뚝발이가 돼서 려순에 돌아왔더군요.

《니시자와가 량강구에 있다? 동무들, 어떻소? 사태의 결정적인 원인이 어느 정도 해명되는것 같지 않소?

김일성동지께서는 긴장되여있는 박훈이와 진한정을 돌아보시였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고 유선아는 여전히 숨가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량강구에는 니시자와의 조선놈졸개가 또 박혀있습니다. 그놈이 중국사람으로 가장하고 음식점을 경영하고있더군요. 전 이름은 모르지만 제가 려순에 있을 때 그놈이 니시자와와 련계를 가지고 다니는것을 보았습니다. 니시자와도 중국옷을 입고 중국사람행색을 하고다니더군요. 그놈은 음식점에 들어와서 어떤 나살이나 먹은 조선사람과 술을 마시며 정미소이야기를 하는데 우사령부의 장교들이 그들을 보고 공순하게 인사를 하더군요.

《턱수염을 기르지 않았습디까?

박훈이가 옆에서 물었다.

《그래요. 턱수염을 기르고 겉보기는 점잖더군요.

《지대현이요.

하고 박훈이 부르짖었다.

《니시자와도 그 음식점주인노릇을 하는 조선놈도 제 얼굴을 잘 알기때문에 저는 인차 자리를 떴지만 그놈들이 우사령부장교들에게 하는 말은 놓치지 않았어요. 지금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이렇게 물밀듯이 김일성장군을 찾아오는것은 왜놈들의 만주침략에 발맞추어서 우사령부대를 섬멸하고 간도에서 조선인자치를 실시하자는것인데 이렇게 잡혀온것은 열에 하나도 안되니 일을 겪기전에 조선사람들이 사는 동네를 샅샅이 뒤져야 한다고 꼬드기더군요.

김일성동지께서는 묵묵히 생각에 잠기시였다. 원쑤는 독묻은 이발로 우사령의 심장을 물어뜯었다. 사람의 리성을 흐려놓는 그 독은 이미 우사령과 그 부하들의 온몸을 중독시켰다. 과연 앉은자리에서 몇마디 말로 그 독을 가셔낼수 있을것인가. 적들의 간악한 음모를 폭로분쇄하는 선전사업을 들이대고 꾸준한 교양대책을 세우는것이 보다 효과적이 아닐것인가. 그러나 시간이 없다.

적들도 어느땐가는 그러한 음모가 폭로된다는것을 알면서도 그런 얕은 계교를 꾸미고있다. 그놈들도 이 고비를 넘기는것이 절박한것이고 우리 역시 시간을 끌고있을 여유가 없다. 시간이 없기는 적들보다 우리 사정이 몇배 더 절박하다. 눈앞에서 인민들이 짓밟혀 죽어가고 혁명동지들이 응당 손잡고 싸워야 할 이웃형제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가고있는것이다.

《선아동무, 사태를 짐작할만합니다. 그러나 적들이 아무리 교묘하게 책동한다 해도 이미 드러난 이상 두려울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이렇게 합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박훈이와 진한정에게 동의를 구하듯이 한번 돌아보신 다음 말씀을 이으시였다.

《선아동무는 이길로 소사하에 그냥 가시오. 여기서 조금만 내려가면 웬 목동을 만나게 될것입니다. 그는 강영진이란 우리 유격대 대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가 해서 차광수동무가 우리도 모르게 뒤를 밟아보낸 동문데 그 동무를 데리고 가시오. 차광수동무를 만나거든 사태를 이야기하고 부강촌에 련락을 띄워 그놈들이 어디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감시를 붙이라고 하시오. 이제 그 강영진동무도 최용필이와 니시자와를 잘 압니다. 그 동무를 변장시켜 량강구에 들이보낼수도 있을것입니다. 어쨌든 그놈들이 량강구에 있는 한은 우리 손에 처단되고말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무기를 들고 량강구에 들어갈수 없으니 내가 우사령과 토론해서 대책을 세우겠습니다.

《그럼 사령관동지께서는 기어코 가시겠습니까?

유선아는 울먹울먹해서 그이를 지켜보았다.

《허허허.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씀하시였다.

《혁명가가 한번 나섰던 걸음을 돌려세우자면 그만한 리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래간만에 유선아동무를 만나서 회포를 나누고싶지만 그건 뒤로 미룰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우리 어머니한테 가서 기다리시오. 어머니가 반가와할것입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처럼 모진 마음의 상처를 입고 돌아온 선아를 이처럼 길가에서 만나서 길가에서 헤여지는것이 섭섭하시여 정작 돌아서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으시였다.

선아 역시 실무적인 지시까지 받은터이라 인차 작별인사를 올려야 할것이나 어쩐지 고유수에서 려순으로 떠나갈 때처럼 헤여지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는 교하로 가시는 그이를 모시고 카륜까지 함께 걸었고 길림행기차도 함께 탔었다.

그래도 정작 헤여질 때는 꼭 해야 할 말이 가슴에 쌓여 내려가지 않았었다. 그 리별이 있은후 선아는 낯선땅 려순에서 김혁이를 여의였고 다정한 동무 한영희를 원쑤에게 잃었다. 가슴에 한이 맺히고 슬픔이 넘쳐날 때마다 그리움에 젖어 불러보던 회성천의 오빠-김일성동지를 이렇게 길가에서 만나서 실무적인 이야기 몇마디를 나누고 헤여지자니 가슴 한모퉁이가 허물어져내리는듯 허전하였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그자신이 량강구에서 목격한 참상이 너무나 급하게 생각되여 이처럼 허위단심 달려온것이 아니였던가.

선아는 전날처럼 깊숙이 허리굽혀 절하였다.

《제발 몸조심하십시오. 서뿔리 조선말을 하지 마십시오.

《알겠소. 걱정 마오. 차광수동무에게 절대로 반일부대의 도발에 걸리지 말라는 지시를 각 조직에 다시 보내라고 하시오.

김일성동지께서는 밝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시고 한손을 들어 흔드시였다.

그이의 활달한 걸음걸이가 저만치 멀어졌을 때야 진한정과 박훈은 서둘러 선아와 악수를 나누고 뒤를 따랐다.

선아는 언덕굽이에 한참이나 서있다가 짚고있던 지팽이를 길가에 집어던지고 얼굴을 싸맸던 수건을 털어서 옆차기에 찔러넣어버렸다. 허리에 띤 보짐을 푸니 그속에서 권총이 나왔다. 선아는 총을 품속에 건사하고 잰걸음을 옮겨놓았다.

김일성동지께서 우사령부를 찾아가시는데 자기가 이처럼 변장을 하고 다녀야 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된것이였다.

 

 

11

 

 

대사하거리를 벗어나자 바람세가 사나와지면서 그대신 흐릿하던 날씨가 차츰 개여올랐다. 구름이 벗겨지긴 해도 하늘은 여전히 푸르딩딩한게 푸접없어보였다. 서쪽으로 곧게 뻗은 황토길우에는 누런 먼지가 자욱히 피여오르고 메마른 초원의 풀대들이 검부레기처럼 밀려다녔다.

《아니 저게 뭐요?

방금 거리 한끝을 지나 고개마루에 한걸음 먼저 올라선 박훈이 눈이 둥그래서 걸음을 멈추었다.

뒤따라 령마루에 올라서신 김일성동지께서도 량강구쪽으로 뻗은 길을 자욱히 메우며 다가오는 그 무슨 울긋불긋한 시위행렬같은것을 보고 천천히 걸음발을 늦추시였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서인지 개개의 형상은 흐릿한데 해빛을 받아 울긋불긋하게 번쩍거리는 칼과 창이며 기발대 그리고 멀리서도 소란스레 울리는 발걸음소리만은 뚜렷하게 감득되였다. 기발은 네모진 비단천에 수술을 단것 같은 시뻘건것도 있고 만장처럼 길다랗게 드리운것도 있으며 좀 작은 새빨간것도 여러개가 눈에 띄였다.

《그네들이요.

진한정이 김일성동지곁에 다가서며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사령의 부대라는 말이였다. 그러자 박훈은 본능적으로 김일성동지의 옆에 와서 그이를 옹위해섰다. 길을 떠날 때 차광수며 계영춘이며 김정룡이들이 어떤 일이 있더라도 김일성동지만은 목숨을 내놓고라도 철저히 보위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하던 말이 뢰성처럼 귀전을 쳤다.

《마침 잘 만났소. 저 사람들한테 길을 물어보고 갑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부드러운 눈길로 긴장된 두사람의 마음을 눙쳐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일행은 서둘지 않고 고개를 내려갔다.

차츰 거리가 밭아지자 수백의 발길이 피워올리는 황토먼지속에서도 반일부대대렬의 조잡한 원색 색조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창과 칼은 해빛을 받아 날카롭게 번쩍거리고 누렇고 붉은 각색 비단기발들은 둔한 빛을 뿌리면서 펄럭펄럭 곤두박질을 하였다. 맨 앞에서 오는 유난히 큰 누런 기발에는 우사령의 부대임을 표시하는 《우》자가 뚜렷이 새겨지고 그옆에 옹위하듯 붙어선 좀 작은 삼각기발들은 새빨갛게 불타오르는듯하였다. 기발마다 수술같이 너슬너슬한 붉고 푸른 단을 해달아서 비록 황토먼지속이지만 대렬의 위세를 돋구는듯하였다. 시뻘건 천이 길다랗게 드리워진 만장같은 기폭에는 죽을지언정 일제를 반대한다는 글귀가 청록색의 활달한 붓글씨로 씌여져있는데 매 반일병사들이 차고있는 붉은색바탕의 완장에는 《구국군》이라는 가로쓴 석자의 량옆에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으며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세글자를 세로 써놓았다.

《굉장하군, 경극의 한장면 같소.

진한정이 감탄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삼국지에 나오는 군대 같소.

김일성동지께서도 미소를 짓고 말씀하시였다.

박훈이만은 긴장한 눈길을 다가오는 우사령부대의 대렬에서 떼지 못했다. 대렬선두가 웅성거리는 기미가 벌써 심상찮게 보였던것이다.

아니나다를가 30m쯤 다가갔을 때 별안간 《잡아라!》 하는 웨침소리가 울리더니 와-하고 10여명의 반일병사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그들은 다짜고짜 김일성동지의 일행을 포위하더니 절컥절컥 총을 내댔다. 뒤미처 대렬전체가 와-쓸어들어서 담벽처럼 진을 치고 섰다. 총보다는 울타리처럼 둘러친 번쩍거리는 청룡도와 장창이 삼엄한 분위기를 빚어냈다.

《이건 뭣들인가!

박훈이가 권총을 쑥 뽑아들고 앞에 나섰다.

《손들엇! 쏜다!

반일병사들은 저마다 입을 모아 소리소리질렀다. 수백명이 한꺼번에 어찌나 소란스럽게 떠들어대는지 누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가려들을수도 없었다.

《박훈동무, 총을 집어넣으시오.

김일성동지께서 박훈의 어깨를 잡아누르며 엄하게 꾸중하시였다. 그러시고 앞으로 쑥 나서 한손을 높이 쳐드시였다.

《여러 반일병사들, 조용하시오. 당신들은 우사령의 부대가 아니요?

그이께서 온화하나 위엄찬 목소리로 말씀하시니 불이라도 난것처럼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잠시 입을 다물고 어떻게 대답할것인가 의논하듯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그렇소. 우리는 우사령부대요. 그런데 당신들은 누구요?

하고 메기수염을 기른 장교가 앞에 나섰다.

《우리는 반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이요. 당신들의 사령을 만나러 가는길이요. 우리를 위해 수고를 좀 해주오.

김일성동지께서는 대렬전체에 다 들릴만큼 우렁우렁 잘 울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시면서 앞에 나선 장교의 어깨를 가볍게 치시였다.

소대장견장을 단 그 중년사나이는 김일성동지의 름름한 풍모와 호령기있는 목소리에 압도된데다가 친근하게 어깨까지 쳐주시는 바람에 저으기 서슬이 꺾이여 새풀로 째놓은것 같은 가느다란 눈을 슴뻑슴뻑하며 물었다.

《그럼 당신들은 조선사람이 아니요?

만일 조선사람이라면 또다시 칼부림이라도 하리라는것이 명백하였다. 림시 방편으로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면 어느 모로 보나 중국귀공자로 보이는 진짜 중국사람 진한정이 뒤에 있고 또 그이 자신의 중국말은 너무나 류창해서 이들중 아무도 의심을 가지지 않을것이였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의 운명문제가 가로놓인 담판을 하러 가면서 속임수를 쓸수는 없다고 생각하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렇소. 나는 조선사람이요. 그러나 이 사람은 중국사람이요. 우리는 일본놈들과 싸우는 사람들이요. 당신들이 이처럼 수고를 하는것도 일본놈들과 싸우기 위한것인데 우리 역시 일본놈들과 싸움을 하고있소. 그래 이 문제와 관련해서 당신네 사령과 중대한 토의를 하자고 가는길이니 어서 당신네 사령이 있는데로 안내하시오.

그이의 말씀은 이번에도 전 대렬에 다 들릴만큼 높이 울리였다. 반일병사들은 또다시 웅성거렸다. 성급한자들가운데는 《체포해라!, 《묶어라!》 하고 총칼을 휘두르는자들도 있었다.

《조선사람은 덮어놓고 체포하라고 우리 사령이 명령했소. 당신들도 체포하겠소.

메기수염의 소대장이 군중의 압력에 떠밀리여 이렇게 소리치며 한발 나섰다. 그러나 그 말투에는 주저하는 빛도 비껴있었다. 자기네 사령을 만나러 간다는 사람을 체포해도 일없겠는가 하는 걱정이 없지도 않았던것이다.

《버릇없이 굴지 말고 어서 길을 안내하라. 사령을 찾아가는 손님에게 이게 무슨 버릇인가!

김일성동지께서는 산천이 쩡 울리게 노한 목소리를 터치시였다. 그러자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땅속에 잦아든듯 가라앉고 소대장은 언제나 꾸중을 듣기에 습관된 황감한 자세로 꼿꼿이 섰다.

놀란것은 소대장뿐아니였다. 처음에 그이의 온화한 안색과 부드러운 미소에 겁기를 잃고 제멋대로 떠들어대던 반일병사들은 주춤해서 눈을 꿈뻑꿈뻑하며 그이의 근엄하신 모습을 새삼스럽게 우러러보았다.

《누구래?

《그걸 누가 알아. 우리 사령을 만나러 간다지 않아.

이런 속삭임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서 차츰 큰 웅성거림으로 퍼져갔다.

그중에는 김일성동지의 성함을 익히 아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럼 우사령의 친구가 아닐가.

《우리 사령한테 무슨 조선사람 친구가 있을라구.

《왜 없어, 우리 사령곁에 딱 붙어다니는 조선사람이 있다던데…》

《아니 저분이 바로 조선 유격대의 김사령일지 몰라.

《김사령! 그게 누구야?

《아니 그렇게 유명한 조선의 김일성장군을 몰라. 지금 왜놈들이 남북만주를 다 처먹고도 유독 안도에만 못들어오는것이 안도에 김일성장군이 있기때문이라는데…》

《그렇댔구만. 난 우리 우사령때문인가 했지.

《에끼, 우리 사령이 뭐가 대단해서 왜놈들이 못들어온단말인가.

대렬에 퍼져가는 이런 웅성거림을 제꺽 눈치챈 박훈이 한손을 높이 쳐들고 소리쳤다.

《당신들도 다 들었겠지만 지금 왜놈들이 벌벌 떠는것은 김일성장군 한분밖에 없소. 우리 장군께서 오늘 우사령을 만나자는것은 왜놈들이 안도에도 쳐들어올 계략을 꾸미고있기때문인데 당신들이 김사령의 앞길을 막으면 되겠소.

《그럼 이분께서 김사령이라는말이요?

메기수염의 소대장이 너무나 젊으신 김일성동지의 모습에 놀란듯 고개를 기웃하였다.

《그렇소, 이분이 바로 김일성장군이시요. 당신들은 유명한 길회선철도반대투쟁이야기도 못들었소? 그리고 작년부터 동만땅을 휩쓸고있는 추수, 춘황 투쟁이야기도 못들었소? 이게 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투쟁이란말이요.

《그렇댔군.

메기수염소대장은 박훈의 이야기를 다 알아들은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대단하다는 인상을 받고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대렬에서는 그래도 역시 조선사람은 조선사람이 아닌가 하는 시비도 일어났다.

이때 대렬 뒤쪽에서 전령병이 달려왔다. 그는 메기수염소대장에게 뭐라고 귀속말을 수군거리더니 김일성동지의 일행을 유심히 살피다가 돌아갔다.

《좋소, 그러면 당신들을 우리 참모장이 있는데 데리고 가겠소. 그대신 뛸 궁리는 하지도 마오.

소대장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한개 분대나 되는 인원을 앞뒤에 따라세웠다.

김일성동지의 일행이 저희네 부대 병사들에게 에워싸여 대렬옆을 지나가자 김일성장군이 우사령을 만나자고 한다는것은 아무래도 손문선생과 무슨 의논이 있어서 그러는것 같은데 재미가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손문선생이 벌써 여러해전에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건 헛소문인가 하고 고개를 기웃거리는 사람도 있고 별의별 억측들이 다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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