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석윤기

(제29회)

제 3 편

 

1

 

길을 서둘러야 했다. 간도 일판이 폭동을 배태하고 슬슬 끓어번지고있다. 불만 달면 당장 폭발할 화약고와 같다. 석재, 남양덕이, 농막골 그리고 연두평을 비롯한 두만강기슭 어디서나 어찌라는가, 들고치라는가, 더는 못참겠다 이런 다급한 통보가 연방 날아들었다.

《넨장, 보채기는… 허재률의 걸음으로도 못당하겠으니 답답한 일 아닌가.

허재률은 기분이 좋아서 등에 진 인단장사트렁크를 추슬렀다. 즉시 춘황투쟁에로 넘어가라는 김일성동지지시를 가지고 두만강연안에 파견되여가는길이였다.

그는 얼마전 왕청5구일대에서 폭동기운이 농후하게 배태됐으니 그리로 가서 춘황투쟁을 지도하며 그 과정에 유격대성원도 선발하고 무장도 탈취하도록 하라는 김일성동지의 지시를 차광수로부터 전달받고 곧 현지로 떠나기 앞서 여태 하던 옹구에서의 사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서둘렀다. 그런데 김일성동지께서 발구를 타고 옹석라자에 나타나시였다. 그이께서는 다른 지방에서도 보고된 자료를 보면 춘황투쟁을 벌릴 정세가 성숙되였다고 하시면서 동만의 모든 지방에서 일제히 춘황투쟁에 진입할데 대한 지령과 함께 각 지방에 파견원, 혹은 련락원을 띄우시였다.

투쟁의 기본구호와 함께 처음은 식량을 꾸어달라는 차량투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식량을 빼앗아내는 탈량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전술적방향도 주시였다. 이 폭동의 선풍속에서 항일무장투쟁개시를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도록 하는것이 파견원들의 기본임무였다. 허재률은 부랴부랴 하던 사업을 다른 동무에게 인계하고 길을 떠났다.

《헌데 그 개자식은 어떻게 됐을가?

허재률은 김일성동지와 헤여진 명월구쪽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개자식이라는것은 안영호였다.

그러나 정작 허재률이가 궁금한것은 부금의 소식이였다. 그도 조직선을 통해 김일성동지의 부강촌공작이 얼마나 멋있게 결속되였는가 하는것을 대충은 알고있었다.

김일성동지의 부탁을 받고 우사령부에 찾아간 류충제가 펄펄 뛰는 우사령을 사흘이나 걸려서 구슬린 이야기며 혹시 부강촌에 불티가 튈가봐 박일보를 왜놈특무기관에 매수된 돈화사람이라고 그럴듯이 꾸며대고 설사 공산당이라 하더라도 그만큼 매달았으면 사람들에게 징계도 됐을터이니 풀어주자고 겨우 설복해서 시신을 찾아온 이야기며 박일보의 초상을 치던 날 부강촌의 일반농민들뿐아니라 보위단원들까지 제복과 총을 메치고 안윤재를 찾아가서 그들부자의 죄행을 규탄하는바람에 이제는 그 집 식구들이 동네출입도 마음대로 못하게 되여 부강촌은 안윤재의 소왕국으로부터 완전히 우리 세상이 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해져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김일성동지의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그이자신께서 말씀을 안하셨고 그후 그 집 식구들이 어떻게 되였다는것도 별로 알려진것이 없었다.

허재률은 웬일인지 자꾸만 눈앞에 얼른거리는 부금의 모습을 털어버리려고 애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자식이 착취계급출신이기때문에 그런 악질이 된것은 필연적인데… 그렇다면 그 누이동생은 어떻게 되여 그렇게 마음씨가 고운가? 이건 참 모순이야. 차광수는 본질은 다 같다고 했지. 그러니까 부금이가 친절한것은 위선이라는건가? , 인간이란 그런 몇마디 말로써는 다 표현할수 없는 보다 크고 복잡한 존재이지. 요다음에 만나면 론쟁을 좀 해야지.

허재률은 요즘 웬일인지 부강촌에서 봉변을 당하던 생각을 자주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그때의 일이 불쾌하게 생각되지 않는것이였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한집에서 자란 오누이가 각각 다른 성품을 보여준것보다 더 이상한 일이였지만 허재률은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않는것이였다. 온 집안이 자기에게 박하게 구는것이 미안하여 머리를 숙이고 앉아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바라보던 부금의 그 눈길이 잊혀지지 않았다.

두만강연안으로 나가면서 해란구와 팔구일대의 조직들에 들릴 임무까지 띠게 된 허재률은 룡정역에서 내려 걷기 시작하였다. 해란강쪽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밀짚모자가 너풀하고 금시 날아날 차비를 하였다.

《성화로군.

허재률은 두덜거리며 허름한 로동복소매속에 넣어 깍지끼였던 손을 뽑아 앞뒤로 쭈그러진 모자전을 붙잡았다. 벌써 두해째 철을 가리지 않고 쓰는 밀짚모자였다. 이제는 대륙의 거칠은 비바람에 퇴색할대로 퇴색한데다가 분주하고 다사한 허재률을 따라 길림으로, 고유수, 오가자로, 국내로, 연길, 왕청, 명월구에 장백, 송강까지 안다닌데가 없고 그나마 경찰서며 보위단의 류치장살이까지 함께 하다보니 여름 한철이나 쓰게 만든 밀짚모자가 견딜리 없었다. 그러나 허재률의 손에 잡히자 주인의 무사태평하고 검질긴 성미를 닮았는지 그런대로 아직도 외양만은 모자구실을 착실히 하고있었다. 모자와 마찬가지로 기구한것이 그의 인단장사트렁크였지만 이것은 모자와는 달리 뻗칠만 한 틀이 있어서 년초에 동자경을 만나러 룡정경찰소에 들어갔을 때 다 찌그러져서 더는 쓸모없어뵈던것이 손질을 그럴듯 하게 해서 밀짚모자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쑬쑬해보였다.

(이번 투쟁과정에 지주집을 치면 식량뿐아니라 무기도 적지 않게 나올것이다. 경찰이 달려들면 그놈들의 무기도 빼앗아내고… 그러노라면 누가 유격대원자격이 있는가 하는것도 절로 드러날판이지…)

허재률은 그냥 너풀거리는 모자를 놓지 못하고 불편한 자세로 걸어가며 혼자생각을 굴리였다.

《저, 여보세요.

뒤에서 이런 녀자의 목소리가 따라왔으나 목소리가 너무 약한데다 자기 생각에 열중해있던 허재률은 전혀 못느끼고 입밖에 소리내여 중얼거렸다.

《그러나 기본은 역시 사람이거던. 이게 김일성동지의 사상이니까… 이번에 오중흡이랑 모두 잘 싸워서 본때를 보여야겠는데… 총도 해결하고…》

《여보세요.

허재률은 펄쩍 정신이 들어 사위를 살펴보니 어느새 강가에 나와있다. 앙상하게 헐벗은 버드나무들이 얼어붙은 강기슭의 저녁풍경을 더욱 쓸쓸하게 채색하고있었다.

《인단을 소매는 안하는데요.

허재률은 생먹은 소리를 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까만 목세루두루마기에 하얀 털목도리를 쓴 녀학생차림의 처녀를 보자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있다. 원망기가 어려있는것 같기도 하고 반가움에 떨리는것 같기도 한 눈이였다.

《부금씨, 이게 웬일입니까?

허재률은 처녀의 두손을 덥석 잡고 흔들었다.

부금은 부끄러움에 몸을 어떻게 가눌지 몰라하면서도 허재률이가 그처럼 스스럼없이 반가움을 솔직하게 표현해준것이 고마왔다.

《언제 올라왔습니까? 아직 방학은 멀었겠는데…》

《사흘전에 올라왔어요. 방학은 아직 보름이나 남아있는걸요.

부금은 걸음을 옮겨놓으며 시름겹게 말했다. 목도리의 한끝을 입에 물고 걷는품이 천하태평인 허재률의 눈에도 심상찮아보이였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허재률이 이렇게 묻자 부금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저 혹시 바쁘지 않으신지… 저의 하숙이 멀지 않은데 좀 들리지 않겠어요?

《부금씨.

허재률은 난처해서 전에없이 두손을 맞비비며 무엇인가 빌듯이 말했다.

《정말 량해해주십시오. 나는 시간이 없습니다. 사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부금씨를 만나고싶었댔습니다. 방금도 부금씨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간이 없군요. 참 이거…》

허둥거리며 무슨 좋은 방도가 어느 버드나무밑에 숨어있기라도 하듯이 사위를 두리번거리는 그를 보고 부금은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것을 느꼈다.

《그러시겠지요. 저도 그러리라고 믿어요.

부금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어조에 비낀 서글픈 여운은 허재률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저 이 강가를 벗어날 때까지만이라도 함께 좀 걷지 않겠습니까?

《그러지요. 제가 무리한 청을 해서 미안해요. 지금 저같이 한가한 사람이 어디 있을라구요.

부금은 목도리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울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자꾸 그렇게 생각합니까? 사실 내가 지금 피치 못할 일이 생겨서… 부금씨, 내가 다 터놓고 말할수 없는것이 유감스러운데 량해해주시오. 내 걸음이 떠지면 그때문에 죽는 사람도 있을수 있답니다.

《네?

부금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허재률을 올려다보았다. 강바람에 너풀거리는 밀짚모자의 전이 얼굴을 반나마 가리운 그의 모습은 얼핏 보매 타고난 인단장사같은 외양을 하고있었다. 남들같으면 맵시도 보고싶을 나이이고 그 어떤 사회적성공을 위하여 젊은 혈기와 정력을 떨쳐볼 시절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 모든것을 헌신짝처럼 집어던지고 갖은 고생을 사서 하면서 병든 세상을 구원하고저 이렇게 잠시의 시간마저 사사로이 허비하기를 꺼려하는것이다.

부금은 한숨을 내쉬였다. 그는 허재률의 뒤모습을 멀리서 알아보았을 때 그 소탈하고 솔직하면서도 억센 의지력과 완강한 투지를 가진 사람에게 자기의 답답한 속을 터놓고싶고 의지하고싶다는 욕망을 무의식중에 느꼈던것이다. 생각하면 그것은 그가 부강촌에 나타나서 기구하고 어색한 분위기속에서 두번째상봉을 하였을 때 이미 싹튼 감정인지도 몰랐다. 그때 허재률은 자기에게 공산주의자라는것을 터놓았다. 그는 공산주의의 명예를 위하여 그 말을 했지만 그처럼 억센 사나이가 한개 녀학생에 불과한 자기에게 그러한 고백을 했다는것이 부금에게는 소중했고 또 그러한 고백을 아무에게나 하는것일가 하는 의문도 떠올랐다. 부금은 기나긴 겨울방학기간에 많은 밤을 밝히며 허재률의 말을 되새겼고 어디서 풍겨오는지도 모르는 그 사나이다운 싱싱한 생기를 그립게 회상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가 피끓는 가슴에 품고다니는것이 너무나 숭고한 뜻이라는것을 느낄 때 자기의 번민이라는것이 너무나 속되고 리기적인것만 같아 스스로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왜 방학도 끝나기 전에 올라왔는가요?

허재률은 부금이가 입을 다물자 더욱 미안해서 안타깝게 물었다.

《허재률씨에게 이야기할만한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그러나 역시 저한테는 퍽 중대한 일들이 있었어요.

부금은 어쩐지 쓸쓸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잔잔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였다.

락엽과 검부레기가 밀려다니는 토성굽이에는 인적이 없었다. 허재률은 이야기를 다 듣기전부터 연약한 부금의 머리우에 밀려드는 어떤 운명의 검은 구름을 느끼며 가슴을 조이였다.

《오빠는 종시 일을 저질렀어요.

허재률은 피뜩 부금의 옆얼굴을 돌아보았다. 부금은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못느꼈는지 한모양으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어떤놈의 꼬임에 넘어가서 공산주의자들을 습격한다고 한것이 사실은 우사령부의 장교들을 죽였다나요. 가뜩이나 공산당과 조선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우사령이 노해서 조선사람이나 공산당을 보기만 하면 죽이자고 한다는군요.

《나도 대충 들었습니다. 왜놈특무기관의 작간입니다. 그놈들은 체계적으로 그런 음모를 꾸미고있습니다.

허재률이 한순간에 분이 치밀어올라서 부르짖었다.

《아마 그런가봐요. 사람마다 그렇게 말하는데 우리 오빠는 제 감정에 눈이 어둡다나니 그런것도 못느낀 모양이지요.

부금은 한숨을 내쉬며 박일보의 시체가 우사령부에 매달린 이야기부터 그후 부강촌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대충하고 허재률을 돌아보았다.

《허재률씨는 김일성이라는분을 아시겠지요. 몇해전부터 길림에서 혁명운동을 지도하신다는  그분말이예요.

《글쎄요. 좀 안다고 할가…》

허재률은 엉겁결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얼버무렸다. 부금은 애초에 그이상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듯 말을 이었다.

《그분은 우리 앞집 정란이네 집에 머슴으로 와있었더군요.

《그건 누가 그럽디까?

《우리 오빠가 그러더군요. 오빠가 집을 떠나면서… 우리 오빠는 동네사람들과 우사령의 복수가 두려워서 집을 나가고말았지요. 아버지와 함께 의논하더니 아무래도 그렇게 하는것이 좋겠다고 합의를 한것 같아요. 그자리에서 앞뒤 이야기를 다하더군요. 오빠도 그분을 잡자고 보위단원들을 여기저기 숨겨놓고 길목을 지켰답니다. 그런데 후에 알고보니 그분은 그 죽은 보위단원의 시신을 찾아주자고 길을 떠났다는군요. 그러다가 오빠와 맞다들렸대요. 그자리에서 자신의 입으로 자기가 김일성이라고 내놓고 말하고 오빠를 호되게 꾸짖더라는군요.

부금은 자신이 그날새벽 정란이에게 달려가서 김일성동지께 닥쳐오는 위험을 선통해준 이야기며 그때문에 오빠에게 당했던 폭행에 대해서는 암시도 하지 않았다.

허재률은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김일성동지께서 직접 보위단원들의 매복속으로 들어가시여 안영호를 규탄하셨다는것은 너무나 상상밖이여서 뭐라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부금은 말을 이었다.

《아마 오빠는 그분을 잡으려다가 오히려 욕을 많이 본것 같아요. 그래서 며칠동안 술을 퍼마시며 바깥출입을 안했어요. 그런데 그 보위단원의 시신이 돌아왔더군요.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후에 다시 김일성동지를 봤는가요?

《그분은 그후로는 못봤어요. 그 며칠후에 한번 다녀갔다는 말도 있지만 전 못봤어요.

여기까지 말한 부금은 문득 고개를 돌리더니 물었다.

《제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아요? 시간이 급하시면…》

《아닙니다. 어서 계속하십시오. 사실은 나도 퍽 궁금하던 이야깁니다.

《그래요? 하긴 이야기가 다 끝나기도 했어요. 장례를 어떻게 지냈는지 전 몰라요. 그러나 그 장례때 그 일이 어떻게 벌어지게 됐는가 하는것을 동네사람들도 다 알게 된것 같아요. 보위단을 안살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우리 집을 들부실것처럼 야단을 쳤어요. 그리고 우리 동네에도 공산당의 무슨 조직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오빠는 집을 떠나면서 저에게 형님을 부탁하더군요. 허재률씨가 그때 봉변당하는걸 구해준 그 녀자가 저의 형님이 됐어요. 그때 저는 오빠에게 말했어요. 오빠도 마음을 돌리는게 어떠냐구요. 사실 정란이네 집 머슴군이 김일성이라는분이 옳다면 오빠가 여태 말한 공산주의자와는 너무나 다르지 않느냐구 했더니 오빠는 말이 없더군요. 오빠는 자기 일생은 다 파멸되였다고 해요. 그래서 형님이 불쌍하다고 하면서 나보고 위로하라는거지요.

《그래 지금 어디 가있습니까?

《저도 잘 몰라요. 처가가 송강에 있으니 그리로 간것 같기도 하고… 우리 집은 아주 망해버렸어요. 동네사람들은 우리 집을 인간취급을 안하고… 정란이같은 다정했던 동무가 저를 꼭 원쑤대하듯 하지요. 불쌍한것은 우리 형님과 저 두사람뿐이예요. 그래 견딜수가 없어 올케는 친정으로 가고 전 여기로 나오고말았어요.

부금은 말끝에 가는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다물고말았다.

허재률이도 뭐라고 해야 할지 말이 떠오르지 않아 묵묵히 걸음만 옮겨놓았다.

어느덧 강기슭에는 인가가 드물어지고 밀려드는 으스름속에 저만치 도살장의 우중충한 건물이 드러났다.

《너무 멀리 나오지 않습니까?

허재률은 걱정스러워 물었다.

《일없어요. 저는 이렇게 끝없이 가고싶어요. 모든게 다 귀찮아졌어요.

부금의 어조에는 불길한 허무의 그림자가 진하게 비껴있었다. 허재률은 당황해지고 한편으로는 초조하였다. 혁명이 폭풍을 일으키며 전진하는 과정에는 아무리 보편적의의를 가지는 리론으로써도 어떻다고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개별현상이 있는것이다. 만일 허재률이자신이 부금이라는 인간에 대해 동정을 느끼고 그의 번민에 리해가 가지 않는다면 혁명가로서 안타까와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이라고 일소에 붙일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과연 우리 혁명이 관심을 돌려야 할 아무런 가치도 없는것일가.

평소에 사색을 치밀하게 하는데 버릇이 되지 않은 허재률은 한순간에 심한 고민에 빠져버렸다.

《그래 정란씨는 아주 외면하던가요?

허재률은 어떤 의분을 느끼며 이렇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 애는 바쁘니까요. 나같은걸 돌아볼 경황이 없기도 하겠지요.

《뭘 하게요?

《그애 오빠가 여태 마을에서 야학을 하고있었어요. 그런데 요즘 일이 바빠져서…  아마 김일성선생님이 마을을 떠나가니 그 일이 모두 정혁씨에게 쏠리는 모양이지요. 그래서 요즘은 정란이가 야학일을 다 맡은 모양 같아요. 지금 마을에서는 전에 보위단질을 하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야학에 다니며 성수가 나서 살아가지요. 궁상맞게 사는것은 저 한사람뿐인듯합니다.

《그렇군요.

허재률은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한 생각에 잠겼다.

《재률씨.

부금은 잠시 흐른 침묵끝에 물었다.

《저의 심정을 리해하시겠어요?

《깊이는 모르지만 알듯합니다.

허재률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물론 다는 모르실거예요. 저는 오빠의 누이동생이며 오빠를 사랑합니다. 그 오빠가 부당하다는것을, 용서할수 없는 인간이라는것을 느꼈을 때 저의 심정이 어떻겠어요? 그리고 언젠가 허재률씨가 저에게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공산주의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데 대해 말씀하셨을 때 저는 그 뜻을 다 몰랐어요. 공산주의를 옹호하자는 일념만 앞서서 너무 겸손하시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러나 우리 마을에 와서 머슴을 사신 그분이 김일성선생님이라는것을 알았을 때 저는 허재률씨의 말씀의 진실을 깨달았어요. 머슴을 사는 신고는 말하지 않겠어요. 신분을 감추자니 별일이 다 있을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분께서 상범씨의 어머니병을 고쳐주자고 언땅을 파헤쳐서 수수뿌리를 캐는것을 몇번이나 목격했어요. 그리고 우리 오빠가 죽여놓고 후환이 두려워 돌아보지도 않는 박일보씨의 시신을 찾으러 떠나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진정한 공산주의자란 어떤 사람이며 얼마나 위대하고 너그럽고 사랑에 넘친 인간인가 하는것을 깨달았어요. 거기에 비추어볼 때 제 사랑하는 오빠는 얼마나 옹졸하고 리기적이고 악착한가. 게다가 솔직하지도 못하고 억세지도 못하면서 악만 남았는가 하는것을 사무치게 느꼈어요. 제가 그런 오빠의 누이동생이며 그보다 더한 아버지의 딸이라는것을 깨달았을 때… 저는 솔직한 말이지 허재률씨를 원망하기도 했어요. 제가 허재률씨를 만나지만 않었다면 이런 무시무시한 모순을 모르고 살수도 있지 않았을가 하고말이예요. 그러나 그것은 부질없는 생각이지요. 제가 일생 이런 고통과 번민을 느끼지 못하고 마음 편하게 살지도 못할것이지만 설사 산다 한들 그것이 무슨 사람다운 생활이겠어요. 저는 그래도 사람이 아니예요?

허재률은 부러진듯이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분명 부금은 눈물을 짓고있는듯 하였으나 돌아볼 힘이 없었다. 이처럼 심각한 인간문제앞에서 모대기기에는 아직 너무나 어리고 연약한 처녀의 순결한 넋이 피투성이가 되여 몸부림치는것을 느낄 때 허재률의 다변도 해학도 다 움츠러들고말았다.

이 녀자는 어데로 가야 하는가. 오빠의 뒤를 따라 자멸의 길을 걸으라고 내버려둬야 옳은가.

허재률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다가 너무나 머리가 뻐개지는듯 하여 털썩 하고 강가에 주저앉아버렸다. 앉고보니 벼락을 맞아 넘어진 고목그루터기였다. 골을 싸쥐고 웅크린 그의 뒤에 급히 다가선 부금은 인단장사트렁크를 부축하며 다급히 물었다.

《왜 그래요? 어디 편찮으세요?

《아니요. 부금씨도 여기 좀 앉으십시오.

허재률은 밀짚모자가 떠들리게 두손바닥으로 이마를 짚고 웅크린채 말했다.

부금은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그의 곁에서 서성거렸다.

《부금씨.

이윽고 허재률은 한손으로 이마를 짚은채 고개를 쳐들고 부금을 불렀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사실 길이 바쁩니다. 내 생각 같아서는 부금씨의 괴로운 심정을 두고 몇날 몇밤이라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싶습니다. 처녀인 부금씨가 나한테 그만큼 솔직하게 자기 심정을 다 터놓았는데 내가 무엇을 감추겠습니까? 나는 부금씨가 그처럼 괴로와하는것을 보고만 있을수 없습니다. 그러나 솔직한 말이지 지금 당장 무슨 출로를 대줄수는 없군요. 부금씨, 지금 내 가슴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부금은 소리없이 흐느꼈다. 아까 괴로움을 호소할 때와는 다른 눈물이였다. 처녀의 안타까운 가슴속에 깊이 감추고 살던 사람에게서 이처럼 깊은 리해와 뜨거운 동정을 느낄 때 고마움의 눈물이 걷잡을수 없이 흘러내렸다.

《재률씨.

부금은 인단장사트렁크를 어루쓰다듬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괴로운 나머지 별소리를 다해서 공연히 마음속을 번거롭게 해드렸군요. 그러나 저에게는 재률씨의 그 한마디한마디 말씀이 목숨보다 귀중해요. 정말, 저를 동정해주어서 고마와요.

허재률은 그에 대해서는 대답을 않고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였다는것을 깨달은 그는 결단성있게 일어났다.

《부금씨, 이제는 돌아가십시오. 부금씨의 앞으로의 처신에 대해서는 솔직한 말로 당장에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길을 가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지금 우리 동무들가운데는 부금씨네보다 월등 큰 부자집 자손들도 혁명에 참가하여 용감하게 싸우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부금씨에게 그런 사람이 되라고 말할 자신도 없고 또 터놓고 말해서 부금씨가 그렇게 될수 있다는 확신도 안갑니다. 그러나 나는 기어이 이 길에서 부금씨의 출로를 찾아내겠습니다. 나는 이 밤중으로 100여리를 걸어 두만강기슭에 가대야 합니다. 혼자 밤길을 걷노라면 생각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것입니다.

부금은 멍하니 서서 여름밀짚모자가 너풀거리는 허재률의 허술한 차림과 그의 입에서 울려나오는 열렬한 말을 새겨보려고 애썼다. 찬바람부는 이 밤중에 무인지경 100리를 걸어갈수 있는 이런 사람의 신념이 그에게는 한없이 부러웠다. 그도 그런 사람을 따라 걷고싶었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어차피 산 인간들의 생활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황야에 떠도는 망령과 같은것으로 되고말것이 아닌가.

그는 구원될길 없는 자기 운명을 어렴풋한 공포속에 예감하며 그자리에 주저앉아 허재률이가 남겨준 그 따뜻한 말을 부둥켜안고 영영 돌처럼 굳어지고싶었다.

《부금씨, 락망하지 마시오. 우리 혁명은 절대로 그런 인정없는 혁명이 아닙니다. 김일성동지께서 이끄시는 우리 혁명은 인간을 구원하자는 혁명입니다. 그래 부금씨가 박일보보다도 못하단말입니까. 절대 락망하지 말고 인간으로서의 량심을 깨끗이 간직하십시오. 내 급한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꼭 좋은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오빠의 갱생에 대해서도 연구해보겠습니다. 부금씨, 나하고 약속하십시오. 나와 다시 만날 때까지 희망을 가지고 씩씩하게 살아가겠다는것을 말입니다.

부금은 입술을 떨며 간신히 고개를 끄떡거렸다. 눈물이 그렁해서 쳐다보는 그의 두눈에는 기쁨의 불꽃이 피여올랐다. 허재률은 그 보석같은 눈을 한참이나 얼없이 들여다보다가 날이 저무는것을 느끼고 결단성있게 발길을 돌렸다.

《난 가겠습니다. 내 부탁을 잊지 마시오.

《몸조심…》

부금은 몇걸음 따라가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인사말은 끝을 맺지 못했고 그의 손은 허공중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수선한 바람이 어둠을 몰고와서 차츰 벌어져가는 두사람사이를 자욱히 메워버렸다.

 

×

 

이무렵 부강촌에서 쫓겨나다싶이한 안영호는 송강에 있는 처이모부 장상민네 집에 깊숙이 숨어 술병을 그러안고 세월을 보내고있었다. 엎어지면 코닿을데 처자가 있고 거기에 새각시인 안해도 와있었지만 일체 아는 사람 면전에 나서기가 싫었다.

창피하고 분하고 울고싶도록 자기 신세가 가긍하게 생각되였지만 그러한 정신적파산이 어디서 오는것인지는 그자신도 똑똑히 가려낼수 없었다.

총을 차고 쥐락펴락하던 동네에서 쫓겨난것을 생각하면 창피하였다. 그러나 그때문에 제 네편네까지 못볼 심정까지는 되지 않았다.

《흥, 내가 속아서 청춘과 사랑을 다 제물로 바친것은 공산주의자도 못되는 협잡군이였단말이지…》

안영호는 술병을 기울여 절반은 술잔에 붓고 절반은 상우에 엎지르면서 중얼거렸다.

《네가 한갖 철없는 중학생으로서 책 한권도 변변히 읽은것이 없는 주제에 감히 천하의 일에 간참하려들고 기갈이든 인민을 위하여 물 한모금을 떠바친 일이 없이 무위도식으로 제일신의 안락만을 일삼아온 주제에…》

부강촌 뒤산에서 쩌렁쩌렁 울리던 김일성동지의 질책소리가 그냥 귀전을 때렸다.

세상앞에 천둥벌거숭이로 나선듯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규탄이 변명할 여지없이 정당하기에 그렇게 흘러보낸 자기 인생이 스스로 가긍하게 생각되고 가족앞에 나서기도 창피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이러한 내심을 리해할수 없었고 그자신 누구에게 터놓지도 않았다.

처이모부 장상민은 밤이면 같이 술상을 마주하고앉아 위로도 해주고 술이 너무 과하다고 나무라기도 하였지만 밤낮으로 분주히 돌아치기때문에 얼굴을 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장상민이 문득 대낮에 나타나더니 소인방씨가 인사를 전하더라는 말을 하고는 아무래도 머리가 아프겠는데 바람을 쏘이러 가지 않겠는가고 권하였다.

《어디루요?

안영호는 이 지긋지긋한 고장을 뜰수 있다는것만 해도 귀가 솔깃해서 게슴츠레한 눈길을 쳐들었다.

《자네 소원대로 아는 사람 없는 고장에 데려다주지. 실은 내가 집안일이 있어 왕청 농막골형님네 집에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어. 같이 가지 않겠나?

《가지요, 갑시다. 당장 떠납시다요.

안영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말코지에 걸린 모자를 벗겨내느라고 헛손질을 몇번이나 하였다.

《허허허, 당장이야 어떻게 떠나나. 명월구로 빙 돌아서 두만강가까지 가자면 여간 먼길인가? 차비를 좀 해야지. 임자 처도 만나보지 않겠나?

《처고뭐고 당장 떠납시다요. 나는, 나는 정 못살겠소.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데 가서 칵 죽고싶소. 어서 갑시다.

안영호는 앉아있는 장상민의 어깨를 잡아일으키는 시늉을 하였다. 장상민은 선웃음을 터뜨리며 마지못해 일어났다.

안영호는 그렇게 서둘러 떠난 길이 어떤 운명의 길인지 전혀 알지 못했고 생각해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가 만일 폭동기운으로 뒤설레이는 국경지대에서 《조선인자치구호》를 제창하는 주구들을 군중속에 박아넣어 미구에 있게 될 《만주국》의 발족에 장애를 없애자는 후꾸다와 연길헌병대 대장 가또중좌의 모의에 의해 안도에서는 이미 쓸모없게 된 자기가 선발되였다는것을 알았다면 그렇게까지 길을 서둘지는 않았을것이다. 왕청농막골에는 장상민의 형 장상규가 토호형세를 하고있는데 옛날에 연정회에도 관계했던 인물인만큼 돈밖에 모르는 시골지주는 아닐것이니 말동무라도 될것이라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 그 장상규야말로 후꾸다와 가또가 노리는 인물이고 국경지대에서 재력과 경력이 그럴듯한 그 형을 설복하여 《조선인자치운동》에 내세우려고 장상민이가 찾아간다는것을 안영호로서는 상상도 할수 없었다.

자기가 가는 길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있는지 짐작 못하고 무작정 좋은 기분으로 길을 떠난것은 그들을 태우고가는 마부 문청룡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오후 그들 일행은 무슨 급한 일이나 있는듯이 부랴부랴 길을 떠났다. 안영호는 종시 술에서 깨여나지 못하여 처가집앞을 지나면서도 안해를 만나볼 생각을 안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리별에 대한 애짭짤한 정서만은 몸에 배여 연연한 눈길로 지나치는 어수선한 거리와 들판을 눈물이 그렁해서 바라보았다.

마차안에서 장상민은 락태한 고양이상을 하고있는 안영호를 위안하고 힘을 불어넣느라고 열변을 토하였다. 두놈 다 취해가지고 어깨를 치고 볼을 비비며 돌아가는 꼴이 보기가 역하였지만 문청룡은 기분이 좋았다. 총총한 시간에 겨우 말미를 얻어 차광수를 만나러 갔더니 이번 길만 다녀오면 총을 잡게 해주겠다는것이였다. 게다가 이번에 장상규네 집에 가면 참으로 오래간만에 어머니도 만날수 있을것이였다. 차광수의 말에 의하면 자기가 지지리 고생하며 돌멩이처럼 세상발길에 채여 굴러다닌것은 자리귀신때문이 아니라 왜놈들과 장상규 같은 지주놈들때문이라는것이다. 그래서 그놈들을 반대하여 총을 들고나서라고 유명한 김일성장군님께서 말씀하셨다는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또 몰라라 김일성장군님이면 어떻게 되는가, 차광수의 말투로 보면 그는 김일성장군님과도 퍽 가까운 사이같다. 그렇다면 더구나 틀림이 있겠는가. 형세 봐서 어머니를 안도로 모시고 올수도 있다. 전날처럼 장상규네 형제는 우리 모자를 따로따로 떼놓고 부려먹자고 할것이지만 이제 총을 잡고 싸우게 된 마당에 그까짓것들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게 있는가.

참 세상이란 얼마나 그럴듯하게 돼있는가. 이제는 우리 세상이다.

문청룡은 신바람이 나서 휘- 휘- 회파람을 불며 채찍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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