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서《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석윤기 (제27회) 제 2 편
24
돈화성안은 왜놈들의 강점당초보다 더 살벌하였다. 그때는 류동하는 정세때문에 적들도 미처 정신을 못차릴 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몇달사이에 갈놈은 가고 올놈은 왔으며 갈팡질팡하던 무리들도 대체로 편을 골라서 자리를 잡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돈화의 정세가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였다. 물론 김일성동지께서도 옥섬을 믿고싶으시였다. 그가 처녀의 몸으로 왜놈들의 총을 빼앗아메고 안도로 찾아온것을 보면 혁명하겠다는 결심이 보통이 아닌것도 짐작할수 있었다. 전번 김책과 관련된 련락을 실수없이 보장한것만 봐도 결코 어수룩한 촌처녀가 아니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옥섬을 돈화에 다시 보내놓으시고보니 마음에 걸려서 잘 내려가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측은한 생각때문에만도 아니였다. 련락소일이 특별히 기술상 어려운 문제는 없다고 해도 생활에 든든히 발을 붙이고 여유작작하게 앉아있는 배심이 있어야 하는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지금 활시위처럼 팽팽히 긴장되여있을 옥섬이가 오직 누군가를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그 일을 매일, 매 시각 고통없이 견디여나가리라고 믿을수 있을것인가. 그는 매일 매 시각 오빠를 생각하며 복수를 다짐할것이다. 그리고 무시로 자기를 외따로 떼여보낸 차광수를 원망할것이다. 옥섬이와 서향이가 부강촌에 들렸을 때도 그런 생각이 계셨기때문에 다른 대책을 취하려고 하셨으나 그들이 한사코 반대하는데다 당장 외진 산속에서 달리 취할 방도도 없어서 일단 그대로 보내시였다. 그런데 이번에 돈화에 나오신 기회에 형편을 보아서 교하의 선아를 데려오든가 선아 역시 움직일 형편이 못된다면 명월구나 왕청에서 든든한 사람을 데려오든가 아니면 최만득이를 내보내는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시였다. 서향이네 집은 돈화성문밖에서 초간히 떨어진 교외에 있었다. 마호방향에서 돈화성안으로 들어가자면 자연히 서향이네 장원앞을 지나게 되는데 거기에 자그마한 저자거리가 생겨 꽤 번화하였다. 그 집은 지을 당시만 해도 돈화거리와는 동떨어진 벌판에 짓다보니 마치 성을 짓듯 토담을 육중하게 쌓고 네귀에 포대를 해단 으리으리한 집이였다. 지금도 정문과 네귀의 포대에 가병들이 지키고있었다. 그러나 그 집앞에서부터 큰길까지 크고작은 인가가 잇달려있어서 지금은 어딘지 그 요란한 외모가 시대착오적인 공허감을 자아냈다. 한참 지켜서서 살펴봐야 별로 드나드는 사람이 없는데도 대문에 뻗치고선 가병은 성문의 보초들보다 더 엄하게 통행인들을 단속하였다. 통행인이라야 전족을 한 로친이 남새구럭을 들고 들어간것이 하나, 목수연장을 멘 중년사나이 둘이 들어간것이 있고 안에서 청지기 비슷해보이는 사나이와 총을 멘 가병 하나가 나온것밖에 없는데 그 매 사람을 일일이 불러세워놓고 무언가 따지고 짐을 들추어보고하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이렇게 딱딱해가지고야 낯선데서 찾아오는 동무들이 혼비백산하지 않겠는가.) 서향이네 집을 처음 와보시는 김일성동지께서는 어리둥절하여 잠시 망설이다가 부딪쳐볼밖에 없다고 생각하시고 말발구에 앉으신채 대문으로 다가가시였다. 《나 안에 좀 들어갑시다.》 《뭐?》 엄엄한 표정을 하고 서있던 가병이 너무나 붙임성있는 그이의 말씀에 뗑해서 돌아보았다. 보아야 아무데서나 흔히 보는 막벌이군차림의 젊은이가 말발구에 앉은채 웃고있다. 《안에는 왜 들어가? 안돼.》 제복차림에 비해서는 꽤 나이들어보이는 가병은 단마디로 잘라버렸다. 《무슨 일거리가 없나요? 짐을 싣는다든가 장작을 팬다든가…》 김일성동지께서는 여전히 푸접좋게 이야기를 붙이시였다. 《없어, 없어. 집안에도 인간이 남아돌아간단말야.》 보초는 어서 물러나라고 손을 홰홰 내저었다. 《그래요? 그래도 큰집에서는 여기 가면 일거리가 있을것이라고 하던데요.》 그이께서는 미타한대로 접선암호를 외워보시였다. 그러나 역시 상대는 막무가내였다. 보초는 자꾸 성가시게 굴지 말라는듯 육중한 대문의 빗장을 왁살스럽게 잡아흔들었다. 《허 참, 완전히 벽창호로군.》 김일성동지께서는 어이없는 웃음이 절로 나가시였다. (무식한 도깨비눈에 부작이 보일라구. 차광수동무가 일을 굉장하게 꾸며놓았군.) 이렇게 속으로 뇌이신 그이께서는 이제는 별수 없이 돈화중학으로 해서 직접 류충제선생을 찾아볼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시고 발구를 돌려세우시였다. 어쩐지 마음속이 허전하시였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합리적인 점도 없지 않은것 같았다. 어쨌든 저런 구중심처에 들어앉았으니 옥섬이의 안전에 대해서는 일단 마음을 놓을수 있을것 같았다. 최효열이를 생각할 때 그가 우리 혁명에 기탁하고 간 오직 하나의 살붙이를 돌봐야 할 책임이 우리모두에게 있는것이다. 그러나 옥섬을 온실의 꽃과 같이 다루는것이 과연 최효열의 뜻이겠는가. 옥섬이 당자는 또 어떻게 생각할것인가. 옥섬이와 차광수사이에 싹트고있는 미묘한 감정을 눈치챈지 오래이신 김일성동지께서는 차광수의 고집스러운 결백성때문에 처녀가 마음고생을 한다고 생각하시였다. 서향이네 집 담장이 직각으로 꺾어지는곳에 우에는 포대가 솟아있고 아래에는 자그마한 출입문이 나있었다. 그앞을 지나치며 엄엄하게 솟아있는 대문쪽을 무심히 돌아보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퍼렇게 이끼가 낀 그 출입문이 소리없이 열리는바람에 눈을 흡뜨시였다. 처음에 그 문을 낸 목적이 어데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체 이런 식의 집에서 정문과 그에 잇달린 각문외에는 다른 출입문을 내지 않는것이 상례이고 또 정문에서 그처럼 깐깐하게 단속하는것으로 보아 이런 출입문을 허술하게 내쳐둘리가 없겠는데 거기로 웬 처녀가 빠져나왔다. 얼핏 보면 솜을 두툼하게 두고 누빈 꽃무늬 알락달락한 바지저고리를 입고 고리로 엮은 구럭을 옆에 끼고나오는 품이 이런 토호네 집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안잠자기 행색이였다. 처녀는 곁눈도 팔지 않고 부지런히 큰길로 걸어갔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어느덧 해가 높이 솟아오른것을 느끼시고 가볍게 말채찍을 두르시였다. 말새끼는 마침 으시시한 날씨에 좀 땀을 빼고싶었던지 성급히 발굽을 내짚으며 꽃무늬바지저고리를 입은 처녀의 옆을 씽하니 째고나갔다. 발구채가 허리라도 칠가봐 아슬아슬한 순간에 처녀는 몸을 피할대신 날렵한 동작으로 발구우에 올라탔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아연하여 발구를 멈추어세우려 하시였다. 그러나 처녀는 숨가쁘게 속삭였다. 《그냥 가세요. 왜 이런데로 손수 나오십니까?》 목소리부터 눈물에 젖어 떨리는 처녀를 다시한번 돌아보신 그이께서는 놀라시였다. 서향이였다. 바로 엊그제 돈화의 이름높은 부자집의 딸이며 진대감의 며느리감으로 화려하게 성장을 하고 부강촌에 나타나서 마을사람들을 놀라게 하던 그 서향이가 이런 안잠자기흉내를 내다니… 그 호화마차는 어데다 두고 지나가는 발구에 몸을 날리는 품이 어느 모로 보나 내당에 깊이 묻혀있는 처녀같지를 않다. 하기는 정구치는 솜씨가 괜찮았으니 전족시대의 귀부인은 아닐테지만 너무나 뜻밖의 일이였다. 《어떻게 된거요?》 김일성동지께서는 그가 앉기 편하게 자리를 내주시며 다그쳐 물으시였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여기 형편을 알아본 다음 옥섬동무가 이렇게 지시했어요.》 서향이는 불안한 눈길로 사위를 살피며 말했다. 《옥섬동무가? 옥섬동무는 어데 있소?》 《저의 유모네 집에 있어요. 자그마한 구멍가겐데 거기가 훨씬 안전하다고 하면서 그 집에 가서 가게일을 보고있어요. 유모는 저의 친어머니나 같은 사람이예요. 그집 바깥로인이 병들어서 아버지가 살림을 꾸려준거예요.》 김일성동지께서는 무슨 변명처럼 덤비며 말하는 서향의 옆모습을 지켜보시였다. 진한정이가 봤으면 뭐라고 할것인가, 누구의것을 빌려입었는지 잘 맞지도 않는 알락달락한 촌스러운 옷을 입고 달리는 말발구에 선뜻 뛰여오르는데는 이런 규방처녀로서 이만저만한 용기가 들지 않을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소?》 김일성동지께서는 긴장되는것을 느끼며 물으시였다. 《별일은 없었어요.》 그제야 서향은 침착성을 회복하고 거북하게 앉았던 자세를 편안히 잡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저 명월구에서 여기 들어와보니 진한정씨네 집에는 특무가 지키고있더군요. 옥섬동무 말이 우리 집에도 꼭 감시가 붙어있을거라고 하더군요. 사실 그럴것 같기도 하고… 지금 당장은 없다 해도 언젠가는 그놈들이 주목하겠는데 그런데로 련락원들이 들어오게 할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하는수없이 정문에는 그 유모의 동생을 세워놓고 제가 객방에서 지키고있기로 했어요. 그러다가 암호를 대는 사람이 오면 제가 옥섬동무한테 안내해가기로 했어요. 아까 정문에 있던 사람이 그 유모의 동생인데 아주 성실하고… 반일경향이 뚜렷한 사람이예요. 그리고 김일성동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있어요.》 《그러니 서향동무는 내가 대문간에 온걸 다 알았댔소?》 김일성동지께서는 별안간 가슴속깊이에서 북받쳐오르는 환희를 억제하기 어려워 흥분한 목소리로 물으시였다. 《처음엔 몰랐어요. 전 송강에서 그분이 준 책을 읽노라고 정신이 팔려있었어요. 그런데 빗장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군요. 그건 우리들의 신호랍니다. 놀라서 내다보니 김일성동지겠지요. 저는 하마트면 곧장 대문으로 달려나갈번했답니다. 그런데 옥섬동무가 제 발목에 고무줄을 매서 문고리에 달아놓았지요. 그걸 푸는동안 침착해지라고요… 저같은 철부지는 그런 훈련을 한동안 쌓은 다음에야 자유를 줄수 있다나요. 처음엔 옥섬동무가 너무하는구나 생각했댔어요. 그런데 지내고보니 옥섬동무가 얼마나 정당하겠어요. 저는 조직은 현명하고 실수하는 법이 없다는것을 시간마다 느껴요.》 서향의 담담한 목소리를 들으려니 그이의 눈시울은 까닭없이 젖어드시였다. 서향이는 무심히 말하고있는것 같지만 얼마나 뜻깊은 말을 하고있는가. 《서향동무, 정말 고맙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진심으로 머리숙여 절하고싶으시였다. 그리고 그 어떤 로련한 지하공작원도 당하기 어려울만큼 치밀하고 능숙하고 용의주도한 옥섬의 조치를 리해해준데 대해서도 치하하고싶으시였으나 그것이 두 처녀사이에 어떤 간격을 두는것 같이 생각되여 일부러 그만두시였다. 돈화에 들어선이래 까닭없이 무직하던 그이의 가슴은 활짝 개여올랐다.
25
《그 령감의 말이 처음에는 침을 석달만 맞으면 알조가 있다고 장담하더니 요즘에 와서는 이런 침은 적어도 일년은 맞아야 효험을 본다는군.》 류충제는 차탁우에 두팔을 단정히 올려놓고 살이 빠진 손으로 따끈한 차잔을 매만지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믿을만한 의사입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맞은편의 중국식 구들에 걸터앉으시여 언제나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옛 한문교원의 말을 흥미진진하게 들으시였다. 《착실한 늙은이지. 지금은 시세를 잘못만나 침통을 들고 이집저집 구걸을 다니다싶이 하지만 일찌기 봉래산에서 도를 닦던중 신선을 만나 화타, 편작의 비전을 전수받았다는 이인이라는군.》 류충제는 자신은 한마디도 믿지 않는 말을 심중하게 번져놓았다. 《그런 대단한 의사의 침을 벌써 석달나마 맞으셨으니 이제는 퍽 차도가 있겠습니다?》 《웬걸, 아무 차도가 없을뿐아니라 오히려 최근에는 전에 없던 증상까지 나타난다네. 갑자기 허리가 끊어지라고 아파나는 때가 가끔 있는데 그럴 때면 목질리운 돼지처럼 침쟁이령감에게 천하가 들썩하도록 상욕을 퍼붓지. 허허허, 천하가 병들고 나라의 존망이 위태한 판에 한개 촌늙은이의 병이 무슨 대수겠나. 대체 김사령의 일은 어떻게 돼가나?》 류충제는 차탁너머로 손을 뻗쳐 새삼스럽게 그이의 팔목을 잡고 흔들었다. 《선생님, 벌써 성주라는 이름을 잊으셨습니까? 오래간만에 사제간이 이처럼 구멍가게 뒤고방에서 허물없이 만났는데 사령은 찾아서 무엇하겠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옛 스승의 여윈 손을 덧잡아쥐시고 정어린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허나 세상일은 그렇지가 않군. 내 전날 진한정군의 집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나같은 용렬한 늙은이가 세상일에 간참할 틈이 없으려니만 생각했네만 지금에 와서 보니 내 집 울타리안에서조차 충신과 간신이 나고 거리에 나서면 친지들가운데 죽기로써 나라를 구하자는 의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왕 왜놈들이 들어왔으니 다소 거북하더라도 그 발바닥을 핥으면서 구복을 채울수밖에 없다는 무리들도 적지를 않네. 이런 무리를 만날적마다 내 늙은 몸에서도 피가 끓고 살이 뛰네. 가슴을 치며 하늘을 우러러 천하의 일을 통탄할 때 떠오르는것이 김사령의 얼굴이라… 풍문을 타고 김사령의 군사가 백두산기슭에 널렸다는 말을 들으면 천지신명의 가호가 있기를 빌뿐이지 언감 사사로운 인연을 빌어 성스러운 군영의 기틀을 허물 법이 있겠나. 내 평소에 옛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번거로운 범절을 다 우습게 보는터이지만 김사령을 받드는 심정은 곧 나라와 겨레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막지 말아주게.》 《선생님말씀이 과하십니다. 저도 마음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이 한몸을 다 바치고싶지만 세상일이 다 뜻대로 되여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간데족족 선생님과 같이 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큰 기대를 걸어주는것을 대하니 절로 용기가 납니다.》 《허허, 천하를 바로잡는 일이 어찌 손바닥을 뒤집듯이야 되겠나. 내가 젊어서부터 주제넘게 두루 옛사람들의 글을 가르치러 다니면서 많은 말을 한가운데 그래도 지각이 든 말을 한마디는 한게 있네. 그것은 길림육문중학교에서 상월선생과 나눈 말인데 지금 천하가 아무리 어지럽다 해도 필경 저 성주에 의해서 바로잡힐 날이 있을거라고말일세. 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과연 선견지명이 있는 말이 아닌가말일세, 허허허.》 류충제는 손을 뻗쳐 김일성동지의 무릎을 잡아흔들며 유쾌하게 웃었다. 장지너머에서는 옥섬이와 서향이가 나란히 앉아 수신을 기우며 행인을 살피고있다. 날씨가 차서 이따금 아이들이 빨갛게 언 때묻은 손에 돈 몇푼을 들고와서 해바라기씨나 호콩을 사갈뿐 가게를 찾는 사람은 드물었다. 건너편방에서는 서향의 유모가 끙끙 앓음소리를 치는 령감의 시중을 드느라고 부엌으로 드나드는 기척이 느껴질뿐 집안은 괴괴하였다. 《저 아가씨들은 추운데 공연한 수고를 하지 않나. 이리 들어오라고 하지…》 류충제는 손바닥만한 유리를 해붙인 장지문너머를 턱으로 가리키며 불안한 소리를 했다. 《둬두십시오. 혁명규률이 그러니 나로서도 어찌할수 없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부드럽게 웃으시며 이 식견이 활달하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하려 하지 않는 옛 스승을 어떻게 실천활동에 끌어들일것인가 궁리하시였다. 《내가 전에 사기를 읽으면서 손무가 삼령오신으로써 오왕 함려의 후궁궁녀들을 길들여 하루아침에 막강한 군사로 만들어냈다는 대목을 읽고 태사공의 필범이 교묘함을 찬탄했더니 오늘 분내나 풍길줄 알았던 서향이가 천한 옷을 입고 가게방에 나앉아 칼이라도 막아낼듯이 앉아있는것을 보니 태사공의 필범이 단지 교묘할뿐아니라 진실함을 믿겠군. 서향이까지 싸움에 나선것을 보니 필경은 나도 허리병을 다 고치지 못하고 김사령의 령을 받들려나서게 되지 않겠는가 은근히 근심스럽네. 대체 김사령이 변복차림으로 이 험한 돈화땅까지 나를 찾아온 뜻이 뭔가?》 역시 눈치 무디지 않은 늙은이라 먼저 용건을 물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그의 손을 지그시 잡으시였다. 《선생님께서 안도의 우사령과 친교가 있다는것이 사실입니까?》 《사실이지.》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친교는 있다지만 그 사람의 래력은 나도 자세히 모르네.》 류충제는 김일성동지께서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내신 까닭을 가늠해보듯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흑룡강군벌 장경혜가 장작림이와 작의형제를 무을 때부터 장경혜를 따라다녔다니 혹 그 사람도 록림에서 나왔는지 모르지. 글자는 전혀 모르지만 사람이 우둔하지는 않네. 한때 장작상이밑에서 대대장을 한 일도 있네. 그때 내가 그를 알게 되였네. 그후에 어찌어찌해서 왕덕림이를 따라 라자구에 가있더니 다시 사이가 벌어졌다더군. 그 사람이 지금 안도에 웅거해있지만 얼마전까지는 남호두에 있다가 내려왔네. 안도야 생소한 땅이지. 남호두에서 9.18사변직후 왜놈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기관총까지 빼앗았다네. 지금 만주의 군벌군대모두가 향방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판인데 그런 공을 세웠으니 그에게 인심이 쏠리게 됐네.》 《그 사람이 일제를 반대하는것이 진심이라면 무엇때문에 공산주의를 그렇게 사갈시하는것입니까?》 《저와 비슷한 군벌들이 다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니까 저도 공산주의를 반대하는거겠지. 그 사람이 대대장때만 해도 그렇게 심하지 않았는데 저렇게 극단적인 반공으로 기울어진데는 왜놈들의 선전에 넘어간데다가 재작년 간도폭동때 공산주의에 너무 데서 그런것 같네.》 《간도폭동이라니, 5.30폭동말씀입니까?》 《그렇지. 그때 그 사람이 왕덕림이를 만나러 라자구에 갔다가 돌아오는길에 왕청 어디에 있다는 처가고장에 들렸다는군. 그때 마침 폭동군중이 그 동네를 휩쓸어서 그 처가켠집은 불에 다 타고 그자신은 간신히 수하군졸들에게 업혀서 사지를 빠져나왔다는군. 그때부터 그는 조선사람들을 좋아안하고 공산주의라면 펄펄 뛰지. 전에 기연가미연가하던 왜놈들의 악선전도 이제는 열이면 열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됐다네. 이 한가지 사실로 미루어봐도 우사령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것을 가히 짐작할걸세…》 김일성동지께서는 차츰 안색이 흐려지시였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우사령을 움직인다는것이 간단한 일로 생각되지 않으시였다. 《왜 그러나? 김사령이 갑자기 무슨 근심이 생겼나?》 류충제는 그이의 안색이 변한것을 보고 근심스럽게 물었다. 《아닌게아니라 마음이 가볍지를 않군요. 지금 우리 형편이 기어이 그 우사령의 마음을 돌려세워야 하겠는데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보니 간단히 마음을 고쳐먹을 사람같지를 않고 게다가 우리의 든든한 우익이 되여주셔야 할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천하의 일보다는 자신의 허리를 더 중히 여기시여 침을 몇달간 더 맞을 생각을 하시는 모양이니 너무나 일이 난감해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허허허, 김사령이 나를 격동시켜 세객으로 쓸 의향인듯 한데 이 늙은것의 세치 혀바닥에 너무 큰 기대를 거는것이 아닐가?》 《처마밑의 돌에 구멍이 뚫어지는것을 보십시오. 어찌 선생님의 설복이 락수물보다 못하겠습니까. 물론 하루아침에 그의 마음을 돌려세우지는 못할것입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오해를 풀고 다음은 공산주의를 리해하고 다시 한걸음 나아가서 공산주의와 손을 잡고 나가는 식으로 한걸음한걸음 깊이 들어가면 결국은 우사령의 마음도 처마밑의 돌처럼 되리라 믿습니다.》 《장구책이로군. 내 혀바닥이 세월없이 떨어지는 락수물처럼 꾸준할수가 있을가?》 류충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였다. 《물론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때문에 저도 처음부터 우사령을 굽혀달라고 청을 드리는것은 아닙니다. 지금 당장 한가지 문제가 생겨 애를 먹고있는데 우선 그 부탁을 먼저 좀 들어달라는것입니다.》 《그건 뭔가?》 《선생님, 사람이란 매번 자기 처지와 본분에 맞게 처신하지를 못하는가봅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시 류충제의 손을 잡고 안타깝게 말씀하시였다. 《그렇지, 그래서 교육이라는것이 있는것이지. 이제 우사령만 두고봐도 그 사람이 왜놈의 말을 믿고 공산주의를 그처럼 사갈시하는것은 다 자기 처지와 분수를 모르기때문이 아니겠나.》 《지당한 말씀입니다. 제가 최근 몇달간 안도의 한동네에 나가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은 자기들을 구원하자는 혁명가들을 한사코 반대하는대신 왜놈들의 독발린 말은 모두 그럴듯하게 듣는단말입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여기서 잠시 말씀을 끊으시고 생각에 잠겨계시다가 부강촌형편을 대충 이야기하시였다. 그리고나서 최근 부강촌의 보위단원들이 왜놈특무기관의 마수에 걸려 마침내 박일보가 우사령부의 병영앞에 매달리게까지 된 경위를 세세히 말씀하시였다. 《일이 참 공교롭게 됐군. 헌데 내가 이야기를 듣고보니 김사령의 뜻을 리해할수가 없군. 그 살인에 가담한놈들이 불과 4∼5명에 지나지 않는다면 김사령의 힘으로써 그놈들을 잡아족치지 못할수가 있는가. 또한 그놈들을 잡아족친 다음에야 이미 사실이 명백하고 증거가 뚜렷해질것인즉 구태여 내가 나서서 우사령을 설복하고말고 할것이 없지 않겠나.》 《선생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는것이 당연합니다.》 하고 김일성동지께서 가볍게 한숨을 지으시며 말씀하시였다. 《세상의 리치는 그렇게 명백하고 단순한데 실생활에서는 그것이 늘 그대로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왜놈들이 우리와 우사령사이에 쐐기를 치기 위하여 그런 악착한 모략을 꾸몄고 거기에 우매한 인간들이 리용된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우사령은 지금 당장은 누구의 말보다 죽은 사람의 몸에서 나온 날조된 문건을 더 믿을것입니다. 그걸 뒤집어엎자면 우리는 그 보위단놈들과 함께 그 모략을 꾸민놈들을 함께 잡아내야겠는데 지금은 그럴 가능성이 없습니다. 또 한가지 딱한 사정은 우리가 그 보위단을 잡아내여 우사령앞에 데리고 간다면 그는 당장 그들을 죽일것입니다. 그들의 죄행을 생각하면 죽어마땅하다고도 할수 있겠지만 이렇게 서로 죽일내기를 한다는것은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자는 우리의 목적에 맞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왜놈들의 수에 걸려드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왜놈들은 조중인민사이에 리간을 조성하여 서로 죽일내기를 하도록 쌍방을 꼬드기고있습니다.》 《음- 그것도 그렇군. 그러니까 내가 당장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우선 조선사람과 중국사람,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서로 힘을 합쳐 국난을 타개해야 한다는것을 깨우치는것입니다.》 《허나 그것은 당장 어렵다고 하지 않았나?》 《어렵다 하더라도 계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면해서는 그 죽어서 매달렸다는 보위단원의 시신을 돌려보내도록 해주는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때문에 필요한가?》 류충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 사람의 가족들의 곡소리가 온 마을을 짓누르고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죄도 지었거니와 지금은 죽어서 아무것도 못느끼겠지만 살아있는 가족들은 아무 죄도 없이 재앙을 들썼습니다. 그리고 슬프게 울며 동정을 바라고 구원을 청하는데 그를 꼬여낸 그의 동료들도 이 마당에는 후환이 두려워 얼굴조차 내밀지 않습니다. 사람의 불행을 보고 우리 공산주의자까지 입을 다물수야 없지 않습니까.》 류충제는 한참이나 고개를 숙인채 입을 다물고있더니 허리를 툭툭 치기 시작하였다. 《허리가 또 아프십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이 일이 성사되기 어렵다는것을 느끼시며 물으시였다. 《견딜만 하네. 먼길 떠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허리가 아파나는것 같군. 그래 언제 떠나면 될것 같은가?》 《가주시겠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의 손을 잡으며 물으시였다. 《갈수밖에 있나. 김사령이 한개 어리석은 인간의 불행을 가셔주려고 이처럼 지각없는 늙은이를 안타까이 설복하는데 목석이라도 일어나야 할 형편이 아닌가. 내 지금도 그 죽은자와 그 동족들을 당장 요정낼대신 오히려 나같은것을 찾아와서 이런 부탁까지 하는 김사령의 속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을 못하겠네만 받들수밖에 없네.》 《고맙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시였다. 《허허허, 이제 우리 답답한 이야기는 그만두고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서향이랑 불러서 그지간 쌓였던 회포를 풀어보는것이 어떤가.》 《좋습니다. 선생님말씀을 듣고보니 저도 가슴이 활짝 열립니다.》 《허허허, 참으로 좋은 일이네. 장부의 마음이 비록 철석같다지만 지기를 만나서 웃는 맛이 없어서야 무슨 재미가 있겠나. 여보게, 서향이, 옥섬이랑 이리 들어오라구, 가게엔 로친을 좀 내보내게나.》 류충제는 바깥에 대고 큰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아무 응대도 없었다. 한식경이나 하회를 기다리던 류충제는 고개를 기웃하며 일어나서 장지문을 열고 가게방을 내다보았다. 두 처녀는 큰길에 나가 아래우로 망을 보고있었다. 류충제는 열어젖힌 문설주를 잡은채 서서 잠시 고개를 숙이였다. 《어허, 한가히 보낼 세월이 못되는군. 나는 가겠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이것은 혁명규률이 돼서 그런데 이제 곧 들어올것입니다.》 《아닐세. 이젠 나도 그 혁명규률에 복종할밖에 없는듯 하네.》 김일성동지께서 아무리 소매를 잡고 말리셔도 류충제는 끝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김일성동지께서도 그날밤으로 떠나시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