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석윤기

(제24회)

제 2 편

 

18

 

박일보는 이튿날도 돌아오지 않았다. 풍이 들어서 늘 자리보존을 하고 누워있는 그의 아버지가 보위단실까지 찾아나와서 아들의 행처를 대달라고 성화를 먹였다. 박일보네는 워낙 조부모와 시집 못간 늙은 누이, 일보의 량주에 자식이 셋이나 되는 큰 식솔이였지만 일손이라는것은 일보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농사일에도 마음을 못붙이고 투전방에 드나들기 좋아하더니 요즘에는 보위단 제복을 얻어입고 총대를 메고 돌아다니니 살림이 펴일수가 없었다. 그래도 단간방에 일곱이나 되는 식솔이 일보가 안윤재네 집에서 한달에 두번씩 닭의 염통만 하게 자루에 꿍져가지고오는 수수쌀을 넘겨다보며 춥고 어두운 만주의 기나긴 겨울을 근근히 견디여가고있었다.

일보가 없고보면 마흔이 다 된 로처녀로 시집을 못가본채 머리를 쪽지고있는 반미치광이같은 일보의 누이와 워낙 체소한 몸집이 굶고 얼어서 조막만하게 쭈그러든 그의 안해가 밥을 벌어들일밖에 살길이 없는데 그들의 서글픈 외양에 비추어볼 때 이 세상은 너무나 험악하고 각박한 세상이였다.

안영호는 이런것을 생각할 때 자기네가 간밤에 큰 일을 저질렀다는 어떤 무서운 예감이 엄습해왔다. 박일보의 아버지가 기르마같이 구부러진 허리를 지팽이에 의지하고 찾아나왔다가 돌아간지 한식경이 못되여 이번에는 어지러운 토목수건으로 얼굴을 감싼 꼭 여라문살짜리 계집애같은 일보의 처가 보위단실앞까지 와서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떨고있었다.

마을에는 벌써 흉흉한 소문이 돌고있었다. 아침나절에 량강구장에 갔다온 사람들이 지난밤 장거리에서 공산당과 우사령부 병사들사이에 싸움이 붙어서 여러명이 죽었는데 공산당은 다 내빼고 우사령네 부하들만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고있다는 말을 퍼뜨렸다.

지난밤에 같이 갔던 김영택이가 들어와서 일보의 처가 찾아나왔는데 혹시 동네에 떠도는 소문이 일보의 죽음과 무슨 상관이 있지 않을가 하고 미타한 소리를 했을 때 안영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내보냈다. 그러나 그자신도 마음이 뒤숭숭하였다. 그는 차기득이를 데리고 자기 집에 가서 함께 점심을 먹으며 량강구에 나가서 일보를 찾아보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보라구. 공산당이 얼마나 지독한가. 공산당을 살려두고는 우리 같은 사람은 못살아. 어제밤에 공산당이 거기에만 모이지 않고 딴데 또 모여들어 음모를 하고있었던게 틀림없어. 제꺽 가보구 오라구. 일보가 어디 다쳐서 아는 집에 들어갔을수도 있고 혹시 우사령네 순찰병들한테 걸렸을수도 있는데 형편을 봐서 데려올만 하면 데려오고 그럴 형편이 못되면 어서 돌아오라구. 내가 나가서 손을 쓸테니… 그사이 내 여기서 김일성의 정체를 다 발가놓겠어.

《그런데 그건 확실한 정봅니까?

차기득이 미타해서 물었다. 그는 아침에 영호가 그 말을 귀띔하며 몇군데 순찰과 매복을 조직하라고 했을 때부터 그런 태도였다. 하기는 안영호자신이 주목하는것이 바로 증손이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기때문에 기득이로서는 손바닥같이 환한 동네에 김일성이같은 공산당의 수령이 들어와있다는것이 잘 믿어지지 않을수밖에 없었다.

차기득이가 량강구로 떠나간 다음 안영호는 증손이가 잘 다닌다는 뒤산골짜기 오별장네 나무가리방향에 매복을 조직하고 오정혁이와 송남칠이에게 감시를 붙이는 한편 리상범을 불러들여 심문을 시작하였다. 보위단원가운데 증손이와 제일 가깝고 이래저래 련계가 깊은것이 상범이기도 하였지만 영호에게는 어제 상범이네 집에서 받은 인상이 너무나 강하였기때문에 어쩐지 그를 얼리거나 을러메서 조기면 진상을 규명할수 있을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안영호의 주관에 지나지 않았다. 상범은 겉보기는 전이나 다름없이 어수룩하고 구복을 채우기 위해서는 일거리를 가리지 않을 대없는 인간같았지만 실상 지난 달포동안에 부강촌에서 그중 심하게 변한것이 상범이였다.

《상범이, 이사람, 자네 내가 묻는 말에 정직하게 사실대로 대답해야 하네.

하고 안영호는 여전히 서툰 동작으로 경례를 붙이고 벌겋게 언 귀바퀴를 매만지는 상범을 똑바로 건너다보며 허두를 떼였다.

상범은 안윤재네 집에서 들어내온 허름한 량수책상 맞은편에서 무슨 새삼스러운 소리냐는듯이 턱을 쳐들고 건너다본다.

《우선 거기 걸상을 끌어다놓고 좀 바투 앉게.

그것 역시 보위단생활에서 유난스러운 취급이여서 상범은 한동안 말귀를 못알아챈 사람처럼 멍하니 서있다가 영호가 손가락으로 긴걸상을 가리켜서야 등받이의 가름대 하나가 빠져달아난 건들거리는 긴걸상을 대각선으로 엇비듬히 끌어다놓고 그끝에 엉뎅이를 불안스럽게 놓고앉았다.

《그래 요즘 자네 모친 병환은 어떤가? 좀 차도가 있는가?

안영호는 일부러 여유작작한 태도로 이야기를 맨 변두리서부터 시작하였다.

《지난가을보다는 퍽 나아졌지요. 사실 난 널을 짜는가보다 생각했는데 사람의 목숨이 그렇게 허무하지는 않더군요.

《거 다행이로군. 그래 저 지대현선생의 침이 효험을 봤나?

《웬걸요. 그 령감이야 침 몇대 놓고 약 한제 지어주고는 곧 손을 털고 나앉지 않았나요.

《참 그랬지. 그럼 저 명월구에서 의사를 데려왔다는 소문이 있더니 그 의사가 좋은 약을 써준게로군.

《글쎄요.

하고 상범은 수굿한 이마전너머로 영호의 눈치를 살펴보며 옆차기를 뒤져서 담배쌈지를 꺼냈다.

《담배 한대 피우겠시다.

《오, 어서 피우게. 가만 이 권연 한대 피워보라구.

영호는 제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여 통채로 밀어내놓으며 우선우선해서 말을 이었다.

《그 명월구의사가 주사랑 놔주고 지대현선생을 엉터리의사라고 욕했다는 말이 돌던데…》

《그건 사실이우다.

상범은 권연갑을 집어서 자세히 들여다본 다음 마치 제비를 뽑듯 신중한 동작으로 한가치를 뽑아들고 또 이끝저끝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명월구의사의 말을 듣기전에는 지대현선생을 하늘같이 생각했댔지요. 그렇게 용하다는 선생이 가망없다는 말을 하니까 우린 아예 맥을 놓았지요. 그런데 명월구의사는 그게 다 가난한 사람의 돈주머니를 털어먹자는 수작이라고 욕하더군요.

《그래서?

안영호는 눈귀를 좁히고 상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는 어느새 제곬에 들어선것이였다.

《하여튼 죽을 병은 아니라니 그 말이 제일 반갑더군요. 그래 약을 이것저것 좀 썼는데 사실 명월구의사가 지어준 약은 별로 없어요. 지대현선생한테 약값 다 털리고나니 어디 명월구까지 가서 약 지어올 돈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증손이의 약을 썼나?

안영호는 불의에 이야기를 본줄기로 끌고갔다. 그러면 방심하고 이야기에 끌려들었던 상범이가 후닥닥 뛰여일어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상범은 태연히 담배불을 붙여서 후- 하고 연기를 내뿜고는 입맛을 쩝쩝해보았다.

《그거 참 맛이 좋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한테는 좀 슴슴하구만요. 그런데 증손이가 어쨌다구요?

안영호는 자기가 노리고 던진 말이 빗나갔다는것을 깨닫자 슬그머니 약이 올라 빽 하고 소리쳤다.

《명월구의사의 약을 쓰지 못해서 증손이 약을 썼는가말일세.

《증손이 약이라니? 오-라 그 수수대뿌리말이군요.

영호는 입이 쓰거워 대척을 않고 상범의 흐물거리는 모양을 쏘아보았다.

《그런데 사실 단장님앞이니 말이지만 그게 조화는 조화란말입니다.

상범은 전에 안하던 단장이라는 말까지 섞어가면서 책상앞에 바싹 가슴을 갖다붙이고 속삭였다.

《증손이 그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어머니 앓는모양을 보더니 이건 수수뿌리를 좀 달여먹으면 제꺽 낫는 병이라고 하기에 우습게 생각했댔지요. 자기가 전에 산판에 있을 때 꼭 그런 병을 앓는 사람과 한방에서 살았는데 수수뿌리를 한 열흘 달여먹고 나았다고 우기지 않겠나요. 난 말같지 않아서 내버려두었더니 웬걸 제절로 수수뿌리를 캐다가 달여서 우리 어머니한테 꼭 세끼씩 대접하군 한단말입니다. 나는 약도 약이지만 증손이같은 사람이 참 쉽지 않다고 생각하지요.

《그래 상범이, 증손이가 무슨 딴말은 한게 없어? 야학방에랑 다닌다던데 거기서 뭘 들은 소리는 없는가말이야?

안영호는 거적문을 미는것 같이 무슨 반응이 없는것이 안타깝고 약이 올랐으나 상범이하고 해낼 일도 아니여서 억지로 자기를 다잡고 다시 상냥하게 물었다.

《말이야 많이 하지요. 자기가 산판에 있을 때 이야기도 하고 간도에 있을 때 들은 소리도 하고… 거 뭐 자기네 있던 고장에도 야학이 있었다던가요. 무슨 소리를 어떻게 했는지 딱히 알수야 있나요.

상범의 대답은 여전히 버선우를 긁는것처럼 조급증만 보태주었다. 마침내 안영호는 다시 소리질렀다.

《증손이가 공산당소리를 한게 없어?

《증손이가 공산당소리요?

상범은 이번에야말로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무슨 말입니까? 증손이가 공산당이란말입니까?

《그렇단말이다. 그것도 굉장한 공산당이다.

《에 무슨 말인지… 원 롱담을 해도 분수가 있지…》

상범은 시무룩이 웃으며 이번에는 제 담배쌈지에서 써레기를 한줌 집어내여 말기 시작했다.

《너 들은 소리 있지?

안영호는 사납게 다그쳤다.

《없어요. 난 무슨 말인가 했더니 공산당 말이였군. 그런건 난 들은일 없어요. 아무렴 증손이가 공산당이겠나요. 공산당이라면 뭐 굉장히 사납고 협잡군이라면서요?

안영호는 입맛이 쓰거워 대척을 않고 눈알만 사납게 굴리였다. 언젠가 자기가 한 말을 들고나오는 상범이가 과연 순박하고 어리숙한 농촌청년이겠는가 하는 의심이 부쩍 들었다. 그러자 온 동네사람이 모두 수상쩍게 생각되고 자기 한사람만 진실을 모르고 속아서 살아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영호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잘못하다가는 세상사람들을 모두 의심하게 될것 같았다.

《나갓!

그는 자기를 다잡기 위하여 책상을 탕 내리치며 소리질렀다.

상범이가 놀라서 미처 다 말지 못한 담배를 말지채 쌈지에 도로 털어놓고 모자를 한손으로 움켜쥐며 일어나는데 차기득이가 숨을 헐썩거리며 달려들었다.

《부단장님.

차기득이는 경례를 붙이듯말듯 상범이가 여태 우물거리고있는것도 못보고 곧장 안영호에게 다가와서 수군거렸다.

《일보가 매달렸어요. 공산당이라는 딱지를 달고 우사령부…》

안영호는 놀라서 한손을 쳐들어 차기득의 입앞에 갖다대며 상범이에게 사납게 소리쳤다.

《뭘 꾸물거려? 빨리 나가지 못해!

《네, 나갑지요. 나갑니다.

상범은 움켜쥔 모자를 머리우에 올려놓고 정중하게 보위단경례를 하였다. 그리고는 서둘지 않고 문밖으로 사라졌다.

《개자식.》 하고 적의가 번뜩거리는 눈길로 잠시동안 상범의 등을 쏘아보던 안영호는 제정신이 돌아오자 황황히 차기득이를 긴걸상에 끌어다앉히고 자기도 나란히 붙어앉았다.

《어떻게 됐다고? 덤비지 말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말하게.

《큰일났어요. 그날 우리가 친건 공산당이 아니라 우사령부의 1대대와 2대대의 장교들이였대요.

《뭐? 그건 누가 그래?

《누가 그러다니요. 지금 량강구랑 송강일판에 소문이 짜한데요. 그 사람들이 장거리 기름장사네 뒤고방에서 밤마다 마장을 놀았다는군요. 우리가 그 집 대문으로 나올 때 진가유방옆으로 해서 나오지 않았나요. 그 집이 바로 진가유방의 살림집인데 그 집 주인이 도박군들을 붙였다는군요. 그래서 그 진가도 우사령의 격분을 사서 지금 갇혀있대요.

안영호는 골이 뗑해서 도무지 무슨 소린지 가려들을수 없었다. 다만 선명한것은 그날 어쩐지 지대현이와 그 소인방이, 두사람의 벙어리같은자들 그리고 국민부 행동대원이라고 소개하던자의 언행이 수상쩍었다는 인상이였다. 그러나 그는 덮어놓고 나무랐다.

《그럴수가 있는가. 지대현이가 공산당과 우사령부장교를 가려 못본단말이야?

《그야 모르지요.

차기득은 안영호가 덤비기 시작하자 차츰 침착해지면서 말했다.

《진가유방이 우사령부 장교들의 투전방이라는걸 량강구사람들은 다 안다고들 하니 이상하지요.

《그럼 우리가 우사령부 장교들인줄 알고 일부러 쳤단말이야?

안영호는 또다시 소리쳤으나 이미 서슬이 한풀 꺾어진 목소리였다.

《그야 모르지요. 하여간 지금 떠도는 소문은 공산당이 우사령부를 노리고 똑똑한 장교들을 한꺼번에 몰살시키자고 들었는데 요행 죽은것은 넷밖에 안되지만 그중에 우사령의 다섯번째 결의형제 동생이 있다는군요. 그리고 공산당편에서는 한사람이 뛰다가 탄알을 세발이나 맞고 즉사했는데 그 몸에서 공산당삐라가 나왔다질 않나요? 박일보가 탄알을 세발씩이나 맞았다는게 참 이상하지요. 그날 대문가에서 뒤로 달려나오는것을 분명히 보았는데…그땐 방안에 있던것들은 공산당인지 우사령부 장교인지 다 죽었거나 내빼고 없었는데… 사실 우리가 담장을 넘어갔을 때는 그 최용필이랑 그패들이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해치운 뒤가 아니였나요? 부단장님도 헛총질을 한것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 말 한마디 안하던 국민부 행동대원이라는자들이 그 마당에서 쑥덕거리는 소리를 귀결에 들었는데 그게 암만해도 일본말 같애요.

《일본말이라니? 그럼 일본사람들이 조선옷으로 변장하고 우리와 같이 갔다가 박일보를 쏘았단말인가? 떨떨한 소리… 그것들이 설죽여서 혹시 목숨이 붙어있는자가 있었는지 모르지… 틀림없이 그렇게 됐을거야.

《그렇지만 박일보의 품에서 공산당삐라가 나왔다는건 또 뭔가요?

《그건… 그건 우사령부에서 그렇게 꾸민것이겠지…》

《그건 왜요?

《뭘 자꾸 왜요 왜요 하나? 도대체 보고하는건 자넨가 난가?

안영호는 어느덧 이마에 내배인 진땀을 손바닥으로 뻑 씻으며 소리쳤다.

차기득은 멍하니 바라보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박일보의 몸에 그 삐라가 있은게 사실같아요. 박일보의 시체를 장거리에 매달았는데… 참 이상하지 않나요. 그 몸에서 우사령부 주요간부들을 암살하라는 조선공산당 연변당부의 지시문이 나왔다거던요. 그 지시문으로 저고리동정을 했더라지 않나요. 그걸 그대로 다 전시해놓았어요. 우사령이 오늘 결의형제들을 다 데리고나와서 죽은 사람들의 장사를 지냈는데 다섯번째 동생의 시체를 그러안고 통곡하면서 복수를 한다고 맹세를 했다는군요.

《그래? 그렇다면…》

안영호는 어떻게 말끝을 맺어야 할지 진정할수 없었다. 처음 그 소식을 듣고 당황해난것은 우사령의 분노를 직접 자기네가 들쓸것으로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것이 공산당쪽으로 쏠리고보니 우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 결과가 어떤 파멸적인것을 내포하고있는듯한 예감에 압도되였다.

《그런데 박일보가 사실 공산당일가요?

《그럴수도 있겠지…》

안영호는 흥심없이 대꾸했다. 연변당부의 지시문이 나왔다는 그 저고리는 소인방의 집에서 변장용으로 갈아입은것이다. 누가 박일보를 죽였으며 그의 몸에서 어떻게 공산당의 문건이 나왔으며 그리고 중요하게는 어떻게 되여 그 집을 공산당의 회합장소로 알고 습격하게 되였는가 하는것은 모두 한고리에 꿰여진 수수께끼였다.

《이 말을 누구누구가 아는가?

한참후 안영호는 입을 꾹 다물고 벌떡 일어나서 자기 책상으로 가다가 물었다. 사납게 이글거리는 눈이며 당장 물어뜯을것 같은 말투며 바르르 떨리는 입귀며 어느것이나 평소의 영호같지를 않았다.

《지금은 같이 간 김영택이밖에 모르는데 소문이 너무 파다하니…》

《거기 매달린게 박일보라는걸 누가 아는가말이야?

《그건 아무도 모르지요. 우사령부에서 그걸 아는 날이면 당장 우리 부강촌을 도륙을 내자고들걸요.

차기득이도 이렇게 말해놓고보니 비로소 이 사태가 얼마나 큰 위험을 배태하고있는가 하는것을 새삼스럽게 통감한듯 입을 다물어버렸다.

안영호는 제 가슴을 두팔로 싸안고 한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책상앞을 오락가락하다가 중얼거렸다.

《상범이가 이제 무슨 눈치를 채지 않았을가…》

《그 둔한게 눈치는 무슨 눈치를 채겠나요?

차기득은 제 책임이 있는만큼 얼버무리려들었다.

《아니야. 지금 당장은 무슨 소린지 모른다 해도 이제 량강구의 소문을 듣게 되면 짐작할게야.

차기득은 눈에 뚜렷한 공포를 담고 안영호의 창백하게 번져가는 얼굴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좋아.

이윽고 안영호는 빈대피가 얼룩덜룩한 벽에서 모자를 벗겨쓰며 말하였다.

《이 말은 그 누구도 모르게 해야 돼. 상범이는 감시를 붙이라구. 아니 누구를 붙일게 아니라 기득이 자네가 직접 감시하라구. 만일 조금이라도 수상한 눈치만 보이면 그 즉시에 총살할 권리를 자네한테 주네. 그리고 영택이에게 단단히 당부하라구. 그자식도 입을 다물지 못하면 없애치워도 좋아!

차기득이는 미처 대답을 못하고 찬바람을 일으키며 방안을 나가는 안영호의 비수같은 모습만 지켜보았다.

  

19

 

 

밤새 눈이 내렸다. 수북이 쌓인 숫눈은 피비린내 풍기는 끔찍한 사건들과 몸서리치는 흉악한 음모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더럽고 어수선한 세상을 마치 신선의 세계처럼 정갈하고 순결한 색조로 포근히 덮어 감싸주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여느날과 다름없이 지게를 지고 아침 일찌기 산으로 오르시였다.

간밤에 오정혁이 대전자에 나갔다가 차광수의 통보를 가지고왔다. 옥섬이로부터 전달받은 지시를 다 수행하고 김책을 만났다는것이였다.

상범이를 통해 안영호가 무슨 기민가를 챘다는것과 어제 량강구에서 벌어진 사태를 보고받으김일성동지께서는 적들이 틀림없이 주목하고있을 이런 때 산으로 들어간다는것이 여러모로 위험하다고 생각되시였으나 큰 구상을 안고 포치하신 일을 다소의 난관이 있다고 해서 뒤로 미룰수는 없다고 생각하시였다. 어차피 이제는 결정적인 시각이 다가온것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 보위단경비막앞을 지나가신 잠시후에 차기득이가 개털외투소매속에 두손을 엇갈아 찌르고 어슬렁어슬렁 뒤를 따랐다. 안영호가 량강구로 나가면서 오별장의 나무가리를 단단히 감시하라고 재삼 당부하였기때문에 그자신은 아직 이렇다할 확신이 없었지만 증손의 뒤를 따르지 않을수 없었다.

이른아침이라 길우에는 발자국이 얼마 나지 않아서 사람형체를 보지 않고도 놓칠 걱정은 없었다.

차기득은 요즘 자기가 제정신에 사는것 같지 않았다. 안영호의 지시대로 뛰고닫고 하지만 며칠 못가서 밝혀지는것을 보면 일마다 시원히 되는것은 없고 모두 진창에 코를 박고 뒹군것 같은 맹랑한 놀음뿐이였다. 지금도 증손의 발자국을 밟아가지만 이끝에 무슨 흔들레판이 기다리고있을지 모른다는 은근한 불안이 가슴을 무겁게 하였다.

산자드락의 강낭밭을 지나니 산속으로 갈라져들어가는 길이 나졌다. 길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눈이 쌓여 워낙 싸리밭에 좁다랗게 틔여있던 발구길은 반반 다 묻히고 깊숙이 찍힌 사람의 발자국 한줄기만 선명히 나있었다. 증손이가 지나간 발자국이였다. 숫눈길우에 찍혀진 발자국을 보니 뭔가 범접하기 어려운 위압이 느껴지면서 함부로 뒤를 밟는것이 저어되였다. 만일 그 발자국을 따라 곧장 산으로 들어갔다가 땀흘리며 나무를 하는 증손이를 만나면 얼마나 멋적을것인가. 물론 자기는 마을의 보위단소대장이니만치 산속을 순시하러 나왔다고 할수도 있을것이고 아무 말도 없이 돌아나와도 별일 없을것이다. 그렇다고 증손이가 따지고들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안영호가 공산당이라고 지목하는 사람앞에 불쑥 나타나서 단둘이 마주 면대한다는것은 아무래도 께림직하였다. 만일 증손이가 진짜 공산당이라면 더구나 문제가 아닌가.

기득이가 갈림길에 홀로 서서 복잡한 속구구를 하고있는데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방금 지나온 강낭밭속에서 《자네 거기서 뭘 하나?》 하는 목소리가 울려왔다.

환한 대낮이지만 기득이는 섬찍해서 목을 움츠렸다.

《누, 누구얏!

이렇게 웨치는 그의 목소리는 너무 떨려서 말끝이 여물지 못했다.

《날세, 나야.

하고 강낭밭속에서 송남칠이가 지게를 한쪽 어깨에 걸치고 나왔다.

《자네, 거긴 왜 들어갔나?

기득이는 난데없이 나타난 남칠이가 수상해서 따지고들었다. 아무래도 뒤를 보고나온것 같지를 않았다. 그런데 남칠이는 히죽이 웃더니 어깨를 툭 쳤다.

《자네를 기다리고있었지.

《뭐 나를 기다려? 내가 언제 올지 알고 기다려?

기득이는 속이 뜨끔해서 소리쳤다.

《조용조용히 말하라구. 자네가 내 뒤를 따라오기에 나한테 무슨 할말이 있는가 했지.

송남칠은 싱글싱글 웃음발을 날리며 능청스럽게 응수하였다.

《내가 자네 뒤를 따랐단말이야? 내가 자네 뒤는 왜 따라?

《그러게말이야. 난 또 자네가 투전생각이 나서 그러는가 했지.

《자식두, 내가 다시 투전목을 쥐면 손목쟁이를 작두로 자르겠다고 하지 않았어?

차기득은 한풀 꺾여 푸념조로 말했다.

그는 소 살 돈을 다 떼웠다가 돌려받은 그날밤 이후로 송남칠이앞에 가면 자연 골을 쳐들게 되지 않았다.

《그럼 왜 내 뒤를 따르는건가?

《허, 이건 생억지군. 이사람아, 조심하게. 지금 우리 동네에 공산당이 들어왔다네. 방금도 수상한 사람이 이리로 들어갔다고 해서 나온 길이네.

차기득은 장히 립장이 옹색하여 거짓말 절반 참말 절반해서 우물우물 얼버무렸다.

《보위단 눈깔은 올빼미 눈깔인게로군. 밤에는 그리 잘 보더니 대낮에 한동네사람도 못가려봐? 이리로 간건 증손이밖에 없어.

차기득은 더는 해볼 말이 없어 하늘을 쳐다보며 날씨걱정을 하는데 남칠이가 박일보이야기를 꺼냈다. 기득이는 량강구에서 난탕을 친 이야기를 하고싶지 않아서 몇마디 모르쇠를 놓다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말았다.

《자식, 제 주제에 누구 뒤를 캐겠다고…》

송남칠은 저만치 멀어져가는 기득이의 등에 대고 코방귀를 내불었다.

그는 지게를 지고 눈우에 선명히 난 김일성동지의 발자국을 이리저리 메꾸어놓으며 싸리밭을 누벼나갔다.

그는 아직 증손이가 바로 유명한 김일성동지시라는것까지는 몰랐다. 그러나 머지 않아 부강촌에 태여날 혁명조직을 꾸려주고 지도해주는것이 다름아닌 증손이라는것을 눈치챘다. 오정혁은 그에게 거꾸로 선 이 더러운 세상을 뒤집어엎자면 모두 혁명조직에 뭉쳐 싸워야 한다면서 얼마전에는 증손이를 잘 보위할데 대한 구체적인 과업을 주었다.

남칠이는 오별장네 나무가리에서 증손이가 어떤 낯모를 외지의 사람들과 만나는것을 몇번 띠여보았고 그때마다 오정혁이가 망을 보는것을 목격한바도 있어서 증손이가 실은 큰 혁명가였구나 하는 눈치를 채고있었다. 생판 모르는 라자구사람이 보위단에 잡혔을 때 그 사람을 자기 고향사람이라고 차기득에게 청을 대고 빼낸것도 실은 증손이가 시킨 일이 아닌가 하는 짐작도 없지 않았다. 최근에는 증손이가 무슨 글쪽지를 보다가 눈길이 마주칠 때도 있었는데 그런 때도 자기를 별로 피하는 눈치가 아니였다. 남칠이는 그것이 고마왔다. 어느덧 그는 오정혁이 말대로 자기도 농민협회나 반제청년동맹의 성원이 다 된 자각을 가지고 정혁이가 시키는 일을 어김없이 수행해나갔다. 오늘도 오정혁이 말발구를 메워타고 새벽같이 길을 떠나면서 낮경에 돌아오겠으니 그때까지 산에 붙어있으라는 과업을 주고갔다. 그래서 증손이의 뒤를 따라 동네를 벗어났는데 기득이가 증손이의 뒤를 밟는것이 확실했기때문에 산턱으로 질러서 기득이보다 한걸음 먼저 강낭밭에 들어섰던것이다.

남칠이는 일부러 멀찌기 오별장네 나무가리를 에돌아서 자기네 나무가리로 갔다.

증손이는 우등불을 피워놓고 그옆에서 찍어놓은 통나무를 톱으로 토막내고있었다. 그렇게 토막을 쳐서는 부엌에서 때기 알맞춤하게 도끼로 패나갔다. 톱질하는 솜씨나 도끼질하는 품이 아무리 뜯어보아야 위불없는 나무군이였다.

남칠이는 분명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암시를 너무나 많이 받아왔지만 이런 때는 역시 고개가 기웃거려지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오정혁은 중낮이 좀 못되여 발구우에 웬 안경쟁이신사를 태우고 곧장 산판으로 치달아왔다. 그것은 차광수였다.

 

내린채로 다지여지지 않은 숫눈은 마치 방금 타낸 햇솜처럼 복신복신한 느낌을 주었다. 거기에 숲속을 새여들어온 엷은 해빛을 받아 연한 보라빛을 띠고있어서 아무리 만져도 차거울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실상 그 눈이 얼마나 독스러운 랭기를 품고있는것인가. 산은 온통 그런 눈속에 묻혀있었다. 그 엄청난 눈세계에 비하면 우등불은 너무나 가냘파보였다.

방금 팬 장작을 무드기 짐근 지게가 한옆에 뻗쳐있고 우등불가까이 굴려놓은 통나무우에는 날이 선 도끼가 쿡 박혀있었다. 그옆에 비껴세운 대톱에는 물기어린 톱밥이 톱날짬마다 묻어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토막친 통나무우에 걸터앉으시여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계시였다. 험한 로동에 터갈린듯 그이의 손가락에는 두툼하게 헝겊붕대가 감겨있어서 가뜩이나 무릎우에 엷은 공책하나를 받치고 글을 쓰시는데는 여간 불편할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써내신 종이가 벌써 여러장 장작토막에 지질려있었다. 종이우를 달리는 꽁다리연필을 따라 거치장스럽게 끌려다니는 손가락의 헝겊끝을 바라보던 차광수는 더는 가슴에 솟구치는 격정을 참을길 없어 《김일성동지!》 하고 한마디 웨치고는 눈을 걷어차며 달려갔다.

글을 쓰시는데 열중해계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문득 고개를 드시였다. 목수건으로 귀를 싸매신 그이의 얼굴에 일순 불꽃처럼 환희가 피여올랐다.

《차광수동무!

그이께서는 눈을 걷어차며 마주 달려오시여 차광수를 덥석 그러안으시였다.

《무사했구만.

그이의 말씀에 차광수도 목메인 소리로 《무고하셨군요.》 하고 받아외우며 눈을 슴뻑거렸다. 저 아래 발구를 세워놓고 망을 보고있던 오정혁이도 불시에 코마루가 매워와서 낯을 돌렸다.

거의 날을 번지지 않고 통신이 오고갔지만 그이께서 부강촌에 들어오신이래 처음 손과 손을 잡아보고 체온을 느껴보는 상봉이였다.

서로 무사했다는 말마디는 짧았다. 그러나 그 한마디 말속에 담겨진 뜻은 깊었고 또 뜨거운 정이 어려있었다. 다시 없을 혁명의 령수를 가장 악질적인 반동부락에서 머슴살이고역까지 치르시게 하지 않을수 없었던 차광수의 속은 그지간에 타고 말라서 그것이 형체만 있었다면 미이라가 될 지경이였다. 한편 자신께서 계시지 않는 모든곳에서 사업의 과중한 부담을 차광수에게 지워놓으시고도 급하고 중한 과업이 제기되면 그때마다 차광수에게 위험한 임무를 추가적으로 제기하시지 않을수 없었던 김일성동지께서 여전히 끌끌하고 믿음직스러운 전사를 이런 호젓한 숲속에서 맞이하시는 기쁨은 이 상봉으로 하여 그지간에 쌓이고 덧쌓였던 만단시름이 한꺼번에 다 녹아내리는듯 그렇게 크고 뜨거웠다.

《자, 발구우에서 싹 얼었겠는데 우선 몸을 좀 녹이오.

김일성동지께서는 차광수의 한쪽 어깨를 그러안으신채 그의 손을 이끌어 우등불곁에 앉히시였다. 차광수는 《괜찮습니다.》 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언손을 불에 대고 펼쳐들며 새삼스럽게 사위를 더듬어보았다.

싱그러운 톱밥내가 떠돌았다. 우등불앞에서 피여오르는 불길도 연기도 은은한 그을음내를 풍기면서 무언지 모르게 신선하고 정화된 세계로 이끌어가는듯 하였다. 장작토막으로 지질러놓으신 여러장의 글쓴 종이를 보던 차광수는 아직도 그이께서 쥐고계시는 증손이의 《신분》에 어울리는 꽁다리연필을 눈물이 그렁해서 바라보았다.

《무엇을 이렇게 쓰시오?

《내 차차 이야기하지. 그래 김책동무는 어떻게 됐소? 건강은 괜찮은것 같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우등불을 차광수앞으로 헤쳐놓으시며 서둘러 물으시였다.

《큰일은 없는것 같은데 지금 당장은 온몸이 띵띵 부어서 좀 힘들어합니다. 그래도 김일성동지를 만나게 된다니 점잖은 사람이 마치 어린애같이 껑충껑충 뛰더군요. 저 대전자밑에 있는 산막에서 대기하고있습니다.

《그렇게 몸이 시원치 않다면 괜히 불렀소…》

김일성동지께서는 무거운 어조로 말씀하시며 말끝을 흐리시였다.

《아니 뭐 그럴 정도는 아니요. 아무래도 감옥살이를 오래 했으니까 영향이 없을수 없지 않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아무 말씀 없이 우등불을 헤치시다가 이윽히 차광수를 바라보시였다.

《차동무도 조심해야겠소. 그래 이번에 나가보니 형편이 어떻소?

《순서대로 보고하지요.

하고 차광수는 정색해서 우등불에 펼쳐댔던 손을 거두었다.

《허동무는 해란구에서 사업을 마무리하고는 곧 왕청5구쪽으로 나가라고 지시를 전달했습니다. 그때 그 땜쟁이 장가에 대한 자료를 더 확인하라는 과업도 주고 떠났지요. 리광동무는 라자구에서 만났는데 거기서는 반일부대들이 하도 여러갈래다나니 곬을 잡기 힘들어합니다. 우선 경향이 비교적 좋은 대상부터 사업을 집중하고 인간적으로 접근할 방책을 토론했습니다.

차광수는 리광이와 진행한 사업내용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나서 왕청2구공청비서 김중권이를 만나 관부대에 들여보낼 사람문제를 토론한데 대해서 보고하였다.

2구에서는 일이 괜찮게 됩니다. 그 동무들이 대감자 공안분서를 습격해서 한꺼번에 토퉁을 일곱자루나 해결했습니다. 그걸 밑천으로 해서 우선 소규모유격대를 꾸리고 그런 배경을 가지고 관부대와 교섭하기로 했습니다. 앞에 나서서 교섭하는것은 김은식동무와 장용산동무가 적당한것으로 합의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만족하신듯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차광수는 잠시 숨을 톺다가 말을 이었다.

《그다음 다시 허재률동무한테 오니 장악했다는 그 땜쟁이들이 다 진짜 땜쟁이들이고 수상한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는것입니다. 그 사람은 워낙 산동에서 흘러온 사람인데 성도 장가고 늘 행상을 다니는것이 상당히 비슷한것 같았습니다. 그래 내 직접 뒤를 따르며 살펴보니 50이 다 된 령감이였습니다. 왜놈군대의 현역대위가 그렇게 나이 많을수 없고 얼굴도 체구도 그렇게 변형될수가 없습니다. 우선 피부가 기름이 싹 빠지고 검버섯이 거멓게 핀것이 한두달이나 한두해의 고역을 가지고는 그렇게 될수 없지요. 나는 땜쟁이를 찾는것을 단념하고 곧장 김책동무의 집이 있다는 평강개척촌이라는데로 찾아갔습니다. 우리 일이 잘되느라고 그런지 마침 김책동무가 집에 들렸습디다. 후에 알고보니 그도 우리 조직을 찾아헤매다가 기진맥진해서 잠시 집에 들려서 옷을 갈아입고 나서는 길인데 바로 그뒤에 문제의 땜쟁이가 달렸더군요. 해란강가의 버드나무숲에서 제껴버렸습니다.

하고 차광수는 두툼하게 껴입은 외투안주머니에서 흔히 일본부랑배들이 쓰는 일본 비수 한자루를 꺼내놓았다.

《권총도 있었는데 그건 거기동무들이 너무 탐을 내기에 주고왔습니다.

《잘했소. 수고를 했소. 그런데 그런 위험한 일을 참모장자신이 하면 되겠소. 만일 그놈이 한놈이 아니면 어떻게 할번했소?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비수를 만져보시며 걱정스럽게 말씀하시였다.

《정황이 어쩔수 없었습니다. 전날 최만득동무를 빼낼 때도 김일성동지의 비판을 들었기때문에 조심하느라고 했지만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또 놓칠것 같아서 부득불 그렇게 했는데 뭐 위험한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만해도 다행이요. 그러나 그건 순전히 우연이란것을 잊지 마시오. 앞으로는 우연에 기대를 걸것이 아니라 매사를 과학적으로 타산하고 꼭 틀림없다는 확신이 갈 때에만 행동해야 하오. 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벌리게 될 유격전에서도 하나의 전략전술적원칙으로 돼야 할거요. 우리 동무 한사람을 잃고 적을 백놈 잡았다 해도 그건 승리한 전투로 보기 어렵소.

차광수는 고개를 숙이고 그이의 뜨거운 심려가 어린 말씀을 귀담아듣고있다가 조용히 입을 벌렸다.

《김책동무는 얼마나 김일성동지를 만나고싶어하는지 모릅니다. 녕안에서 카륜회의소식을 듣고 당장 달려오려고 했는데 바로 그런 때 체포되였답니다. 이제는 김일성동지의 옆에서 직접 김일성동지의 지도를 받으며 투쟁할수 있게 됐다면서 감옥을 살면서 옳바른 로선과 방침이 없는 운동의 와중에서 헛되이 흘러보낸 세월을 한탄하던 일을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김일성동지를 만나면 그 동무가 아마 춤이라도 출지 모르겠습니다. 이야기를 해보니 역시 리론도 있고 투쟁경험도 풍부하고 무엇보다도 완강한 투지를 가진 듬직한 동무입니다.

《나도 그 동무를 꼭 만나고싶었는데…》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심란한 어조로 말끝을 흐리시였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기어코 만나야겠다고 하셨다더니.

차광수는 놀라서 물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한동안 침묵하신채 우등불만 헤치시다가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지금 여기 정세가 대단히 긴장되였소.

차광수는 낯색이 변하였다. 그는 송강에서 장철하가 하던 말과 대장간에서 문청룡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때문에 부랴부랴 옥섬을 띄우던 때의 불안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역시 지대현이네가 하던 그 수작때문입니까?

《아마 그런것 같소. 그것도 그것이지만 지금 부강촌형편이 어차피 공개적인 대결에로 나가지 않을수 없게 됐소. 우리는 불일 오정혁동무의 오누이와 저기 망을 보는 송남칠동무, 그의 아주머니 그리고 보위단에 있는 상범이, 이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반제청년동맹을 조직하자는거요. 그밖에도 우리를 지지동정하는 사람은 많소. 보위단도 벌써 안윤재네 사병노릇을 하지 않겠다는것이 지배적인 경향이요. 그런데 량강구에서 한 사건이 발생했소.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엊그제 안영호네가 량강구 진가유방의 도박판을 들이친 이야기를 하시고 계속하시였다.

《알아보니 역시 왜놈들이 꾸민 흉악한 음모같소. 문제는 우사령이 공산주의자들을 더욱 적대시하게 됐다는데만 있는것이 아니라 부강촌의 보위단원 박일보가 왜놈들의 독한 마수에 걸려 공산당원의 죄목을 쓰고 우사령부에 매달린데 있소. 이 일은 후과가 크게 미칠것이 예견되기때문에 그냥 내쳐둘수 없소. 그런데다 차광수동무가 통보한대로 저놈들이 이제는 내 정체를 알아내고 첩첩히 감시를 붙이고있소. 오늘 래일 손을 쓸것 같소. 우리 역시 부강촌의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옳은 인식을 주기 위하여 결정적인 대결에로 나가지 않을수 없게 됐소. 결국 부강촌에서의 공작은 마무리할 때가 된셈이니 조직만 내오면 나도 뜰 생각인데…》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다가 말씀을 이으시였다.

《이런 형편에서 여기에 김책동무를 데리고 왔다가는 그 동무가 위험할것 같소. 우리는 만일의 경우에 어차피 무장으로 적과 맞서야 할 사람이니 별문제지만 그 동무는 이제 먼길을 가야겠는데 꼬리에 무엇이 달리면 장차 북만에서 벌리자는 일에 큰 랑패를 볼수 있소.

《아니 북만에 보내다니요? 그 동무는 기어이 김일성동지곁에서 일하고싶다는데…》

《나도 그 동무와 함께 일하고싶소. 그러나 우리가 무장투쟁을 벌리자면 기본은 국경가까이에서 투쟁을 시작하겠지만 장차는 광활한 대륙도처에서 무장투쟁의 불길이 타올라야 하오. 그런데 김책동무는 이미 북만에 상당한 지반을 가지고있소. 그 동무가 북만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다는것은 우리의 전반적인 투쟁에 큰 의의가 있소. 나는 그 동무를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싶었는데 지금은 그 동무의 안전때문에 그만두어야 할것 같소. 그래서 내 편지를 써놓았으니 이걸 가지고가서 차동무가 내 의도를 전하시오.

김일성동지께서는 무거운 어조로 말씀을 맺으시고는 장작토막으로 지질러놓은 종이들을 집어서 간종그리시였다. 그리고 아까 쓰다가 놓으신 마지막장에 몇자 더 적어넣으시더니 차근차근 접으시여 그것을 딴 종이로 네모나게 싸서 봉하시였다.

차광수는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이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김책의 뒤에 적의 특무가 달렸기때문에 그이의 신변을 생각해서 접촉을 꺼려할 때는 단호하게 데려오도록 하신 그이께서 이번에는 김책의 안전때문에 멀지 않는 곳까지 와있는 사람을 못데려오게 하시고 이렇게 눈속에 앉으시여 장문의 편지를 쓰셨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일신은 새털처럼 가볍게 생각하시면서 오직 혁명의 리익을 위하여, 한사람의 동지를 얻기 위하여서는 생명의 위험도 무릅쓰시고 온갖 신고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위대한 한별정신을 새삼스럽게 절감하는것이였다.

《그럼 여기 일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차라리 지금이라도 자리를 떠야 하지 않습니까?

그이께서 넘겨주시는 편지를 받으면서 차광수는 갈린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그럴수 없소. 지금 부강촌의 형편은 더욱더 반혁명의 편으로 구겨박히느냐 아니면 이 시점에서 눈을 뜨고 혁명의 편으로 돌아서느냐 하는 갈림길에 놓여있소. 정황이 조성되면 즉시적인 대책을 세워야 하는만큼 지금이야말로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하오. 이제 조직을 내오면 나도 인차 소사하로 나가겠지만 이러나저러나 나야 뭐라오. 여차직하면 강 하나 사이에 두고 우리 무장대가 있는데… 그러니 내 걱정은 말고 빨리 가서 김책동무를 출발시키시오.

김일성동지께서는 근심이 탁 실린 차광수의 얼굴을 바라보시며 그의 무릎을 잡아흔드시였다.

《사람두, 뭘 그렇게 심각해서 그러오. 우리가 무장투쟁을 벌리면 총알이 비발치듯 하는 전투장에도 나가야겠는데 이제는 적보다 우리 사람들과 지지자들이 더 많은 동네에 있는것이 무어가 두렵단말이요. 그런 걱정은 말고 어서 김책동무에게 가서 명월구회의과정을 잘 설명하시오. 내가 편지에 쓰노라고 했지만 열흘간에 걸치는 회의내용을 다 쓸수야 없지 않소. 차광수동무가 회의내용도 이야기하고 그사이 명월구회의결정을 관철하는 길에 나서서 겪은 일들, 얻은 교훈들, 각지에서 새로 창조한 투쟁방법들 이런것들도 다 이야기해주오. 그리고 북만땅에서 새로 무장투쟁의 불을 지펴올리자면 불씨가 될 한자루의 총은 있어야 하겠으니 이 총을 가지고가라고 하시오. 북만까지 가자면 호신용으로도 필요할거요.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허술한 솜저고리자락을 헤치시고 옆차기에서 권총 한자루를 꺼내시였다. 그이께서 평소에 애용하시던 권총이였다.

차광수는 마치 자신이 김책이가 된듯 그 총을 받아서 가슴에 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 총까지 내놓으면 여기서는 어떻게 하자는겁니까?

《나한테야 무슨 총이 필요하겠소. 지금은 인민속에서 군중공작을 하는것이고 또 동무들과 만나서는 혁명의 방향상 문제를 토론하는데 당장 총을 써야 할 일이 어데 있겠소. 내가 여기서 총을 쓰게 된다는것은 좋은 일이 못되오. 그러나 정 부득이한 경우에는 오정혁동무한테도 총이 있고 보위단의 총을 좀 빌려쓸수도 있지. 나는 언제나 인민들속에 있으니 아무 걱정 하지 마오. 허허허.

차광수는 더는 드릴 말씀이 없어 멍하니 지켜보기만 하였다.

《어서 떠나오. 김책동무가 기다리겠소. 그리고 소사하에 돌아가면 무장대를 적당한 규모의 유격대로 대렬을 편성해야겠소. 그러니만큼 아직 무장이 없는 영배동무나 철희동무같은 안도동무들이 자기 무기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 벌리도록 하시오. 그러되 구국군과의 련계를 고려해서 행동해야겠소. 악질토호들이나 경찰을 기본대상으로 해야 하오. 처단대상으로 정한 일제의 주구들은 대체로 다 무장을 가지고있는것만큼 그놈들을 처단할 때 도수대동무들을 한두사람씩 데리고 가서 무장을 해결하도록 하시오.

차광수는 그이께서 실무적인 지시를 주시자 더는 다른 말을 못하고말았다.

얼마후 차광수는 오정혁에게 그이의 신변을 목숨으로 지킬데 대한 과업을 거듭 강조하고 대전자를 향해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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