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 《불멸의 향도》

 

           장 편 소 설

 


 권  정  웅               

(제 23회)

 

제 13 장

  

 

림귀현은 제철소구내에 이르자 차에서 내렸다. 갱도를 걸어갈 때 생긴 버릇대로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사하고 가설건물안에 들어섰다. 여기서는 평양에서 내려온 미술가들이 대형유화를 그리는 미술작업을 하고있었다.

어느새 알아차렸는지 40대의 화가가 붓을 든채로 맞받아나왔다.

《또 오셨습니까?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지요.

《하긴 그렇소.

《그렇게까지 걱정 안해도 되겠는데요.

림귀현은 그물모자를 쓴 미술가의 등을 떠밀며 웃었다.

아닌게아니라 며칠에 한번씩 와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였다. 대형유화판을 세운다는것으로 마음이 한껏 흐뭇해져 다른 사업에서도 성수가 났던것이다. 당대표자회결정 관철을 위해 제철소에 나올 일이 자주 생기였고 그때마다 여기부터 들리게 되는 림귀현이였다.

그는 한창 진행되는 미술작업을 돌아보았다. 높이 10메터, 폭은 6메터 정도인데 그것을 대돌에 올리기까지 하면 규모가 상당히 클것이였다.

미술가들이 말하는 그 세부묘사란것이 자꾸 더해지자 날이 다르게 형상이 생동하게 살아났다.

림귀현은 몇걸음 다가서기도 하고 또는 뒤로 물러서기도 하면서 대형유화를 쳐다보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한쪽 손을 높이 드시여 용광로를 가리키며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짓고계시였다. 주위에 둘러선 로동자들과 일군들의 얼굴에는 수령님을 우러러 흠모의 정이 함뿍 어려있었다.

림귀현은 가슴이 새삼스레 뜨거워진다. 광산지하막장에서 만나뵈온 때의 수령님영상이 눈앞에 떠올랐기때문이다. 한참이나 그림을 쳐다보고있다가 그는 미술가에게 물었다.

《유상철로장이 보이지 않누만.

《지금 저쪽에 있습니다.

림귀현이 미술가가 가리키는쪽을 바라보니 울깃불깃한 색감통들이 잔뜩 널려있는 새짬에서 유상철이 옹크리고앉아 무슨일을 하고있었다. 림귀현이 그리로 걸어갔다.

 《로장아바인 여기서 뭘하십니까?

림귀현이 명랑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네?

고개를 돌린 유상철은 림귀현을 보고 일어섰다. 그는 색감을 이기던 박죽같은것을 그냥 손에 들고있었다.

《어느새 미술가가 됐소이다.

《미술가라니요? 그저 이렇게 색감이나 이겨주고 붓도 닦아주면서 그림쟁이맛을 좀 보는거지요.

《하여튼 지성이 여간 아니시군요… 옛날에도 명필이 되려거든 먹가는 법부터 배우랬다지 않습니까.

《그런데 책임비서동지!

유상철이 색감이 발린 손을 걸레로 문대면서 앞으로 다가섰다.

《이렇게 하다가는 5.1절전에 완성될것 같지 않습니다. 그림은 그렇다치고 유화판틀이 그때까지…》

《로장아바이의 말이 옳습니다.

《수령님영상을 하루빨리 크게 모시자구 하는데…》

《다그칠 대책을 세워야지요. 도에 있는 미술가들로 력량을 보충하고 유화판틀을 세우는 작업두 와짝 내밀어보자는겁니다.

《참, 이렇게 관심해주시니.

《이건 친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친히 발기하신거구 우리모두 성심성의로 빨리 해야만 할 사업이지요.

《더 이를말입니까.

《로장아바이, 그럼 난 유화판틀을 세우는 <구내산>에 가겠습니다.

《저두 거기루 가려던 참입니다. 하던 일 마저 끝내구…》

림귀현이 나가자 유상철은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그는 요새 용광로에서 기본교대시간을 보내고는 《구내산》에 세울 유화를 그리는 여기에 나와있군하였다.

그도 림귀현이 나간지 얼마후 거기서 나왔다.

 

×

 

 명옥은 외면상 고모사촌오빠네 집에 오는 려행길 같았다. 허나 이번 걸음이 자기한테는 운명적인 걸음인듯이 생각되였다.

그동안 세번이나 편지를 보냈지만 한창수한테서는 아무런 답장도 없었다. 명옥은 창수를 잊은적이 단 하루도 없었다. 그의 름름한 체구와 남성다운 매력을 가진 얼굴모습이 눈앞에 자꾸만 다가섬을 어쩔수 없었다. 명옥은 사랑의 번민에 빠진것이였다. 게다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여기에 자연 개입하게 되면서 옥신각신이 벌어지군하였다.

어떤 때는 명옥이를 직접 맞대놓고 부모님은 서로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였다.

《명옥아, 창수가 군대에 나간 사이에도 너희들은 편지를 주고받았지. 나는 네가 창수의 편지를 기다리다가 그 편지를 받아 읽는 너의 얼굴과 몸가짐을 지켜보군했다. 너희들은 단순히 문안편지나 주고받은게 아니지 않니?… 무엇이든 한번 약속하면 그걸 지키는게 사람의 도리이지. 이런 문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창수가 공장대학에 다닌다는걸 봐서 제 발전을 생각지 않는것도 아니고 더구나 제철소에서 강철기둥으로 나라를 받들겠다는 그 마음이 얼마나 미덥니…》

이러면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말했다.

《아니 여보, 당신은 제딸 생각은 안하는것 같구만요. 딸의 장래도 생각해봐야지요. 그래 거기에 가면 명옥이가 무대에서 물러나야 하는데두요?

어머니의 말이 옳은것 같기도 하다. 거기에 어디 내가 설수 있는 《무대》가 있단 말인가.

명옥은 멀지 않은 기차길이지만 먼길 떠나는 사람처럼 생각이 많아졌다.

한창수의 아버지 전우라던 전상환부부장이 찾아왔던 일도 생각이 났다.

《그곳은 오늘의 1211고지입니다. 그래서 창수는 거길 못떠나겠다는거지요. 나도 그 심정이 마음에 들어…》

전상환이 신원동에 있는 명옥이네 집에 찾아온것은 비내리는 저녁이였다.

《제가 이 집 따님의 혼담에 끼여들 사람이 못된다고는 보지 마십시오. 창수로 말하면 저의 락동강전우의 아들이니 제가 창수의 아버지이고 형님이 되여 이 혼담에 나서지 않을수 없습니다. 이 점을 리해해주십시오. 저는 이에 대해 충고를 받고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한창수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며 한창수가 왜 어렵고 힘든 전선에 서있는가 그것부터 설명해드리려고 했습니다… 이 집 부모님들도 창수를 어릴적부터 잘 알고 당사자들도 의합이 된줄로 알았는데…》

명옥이는 뻐스정류소까지 전상환이를 바래주었다. 전상환이 승용차를 먼저 보내였는데 그새 비가 내리기 시작한것이다.

우산을 쓰고 두사람이 나란히 걸었다.

전상환이 먼저 말을 떼였다.

《명옥동무, 어째든 제철소에 한번 가보오. 제철소란 기간공업부문이고 사람들이 모두 선이 굵고 쬐쬐하지 않지. 가보면 창수가 왜 거기를 떠나지 못하는가를 인차 리해하게 될거요. 명옥이, 난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일생문제라 해도 어떻게 사랑이나 결혼이 생활장소라든가 기타 실무적인 조건에 구애될수 있겠소… 그리구 이건 다른 얘기인데 제철소에 동무같은 전문가가 있으면 크게 떠받들리울게요. 원래 그 제철소의 군중써클이 쎄오. 관장도 무용지도원도 다 음악대학이나 예술학교 졸업생들이요. 무용지도원도 평양에서 내려간 녀성이구. 성악지도원이 없어 애를 먹는데 만일 명옥동무같은 전문가가 있다면 그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소. 아니, 량해해주오. 제 사업분야라구 해서 내 욕심을 부리는것 같구만. 실무적인것을 반대한다면서 실무적으로 들어가서 미안하오. 하하하…》

전상환이의 웃음은 소탈하고 솔직한것이였다.

한번 제철소에 가본다는것이 조련치 않은 일이였다. 그가 제철소에 간다면 그것은 벌써 일정한 결심이 섰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였다. 그래서 세번이나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내용들은 처녀의 모순된 심정을 그대로 반영하고있었다.

도시에 사는 사람은 다 《1211고지》와 등지고 사는 사람인가. 여기서도 당과 조국에 충실할수 있지 않는가. 그런가 하면 이렇게도 썼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내가 인민의 사랑을 받는 가수로 되게 해줄수 있지 않는가… 어쨌든 무슨 말이든 회답을 달라. 한번 평양에 와달라. 왜 그리도 고집불통인가? 등등…

명옥이가 맨처음 들린곳이 제철소합숙이였다.

관리원아주머니가 호기심에 차서 한창수와 어떻게 되는 사이인가고 물었으나 명옥은 일부터 심상히 대답해주었다.

6촌오빠예요. 여기 고모사촌네 집에 왔다가 잠간 만나보구 가려구.

허나 관리원아주머니는 능청스러웠다.

《요새 합숙에서 보질 못했다오.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니까.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오더니 성사가 되여 아예 합숙에서 나갈 잡도리인지…》

그때 지나가던 처녀인듯한 관리원이 명옥이를 아래우로 훑어보더니 입을 삐죽이며 말하였다.

《평양처녀만 생각한다나요. 여기 처녀들은 왼눈으로도 보지 않는대요.

그러자 다른 중년관리원이 접수실에 들어섰다.

《한창수요? 요새 병원에 입원하고있었더랬는데.

《네? 병원에요?

명옥은 깜짝 놀랐다.

《용광로출선구에서 다리에 화상을 입었다더군요.

《언제?

《그건 처음듣는 소린데.

곁에서 두 관리원이 같이 놀라며 눈이 둥그래졌다.

명옥은 뒤에서 녀자들이 호기심에 차서 자기를 바라보는것도 느끼지 못하고 병원으로 반달음을 놓았다.

명옥이는 늙수그레한 외과의사를 만났다. 한창수라는 말이 나오자 의사는 돋보기너머로 명옥이를 쳐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순간 명옥이는 안도의 숨이 나갔다. 어쩐지 사람의 마음을 눅잦혀주고 따뜻이 감싸주는 그런 미소였던것이다…

《멋쟁이청년이지요. 한데 자칫 잘못했더라면 큰일날번했습니다.

명옥은 의사의 설명을 들었다. 창수는 용광로에서 쇠물구멍을 뚫는 착공기를 개조하는 일에 달라붙었는데 불의에 쇠물이 쏟아지면서 그 열풍으로 화상을 당하였다. 다행히 2도정도의 화상이였다는것이였다. 화상이란 그 치료과정은 둘째치고 맨처음은 몹시 아픈데 신음소리 한마디 지르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자 이내 우스개소리도 하더라는것이다. 약혼녀라도 있으면 부르라고 하니까 약혼녀도 없고 고아의 처지인데 영원히 합숙생일수도 있다는것이다. 의사는 맨처음은 그를 희떱고 진지하지 못한 청년으로 알았댔으나 지내놓고보니 진짜 대장부다운 사나이더라는것이다.

담당의사는 치료기일이 두주일가량 남았는데 너무 성화를 부려 사흘에 한번씩 와서 처치를 받는다는 조건부로 퇴원시킨지 벌써 며칠이 되였다는것이다.

명옥이는 병원을 나서자 웬일인지 더는 걸음을 옮겨놓을수 없었다. 그는 이를 사려물고 눈을 딱 내리감았다.

《어쩌문… 어쩌문…》

설음이 북받쳐올라 참을길이 없었다. 이제는 다 나았다고 하는 의사의 말에 다소 위안을 느끼면서도 자기한테 소식 한장 보내지 않은 창수가 그지없이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바로 창수가 겉으로는 그렇게 태여한체했지만 속으로는 몹시 외로움을 느꼈으리라는것도 짐작하였다. 그러자 문득 명옥은 자기가 창수곁에 있었다면, 창수에게 사랑의 번민을 안기지 않았더라면 화상과 같은 그런 일이 혹시 없었을수도 있었으리라는 왕청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것이 꼭 자기때문이라고 생각이 미친 명옥이는 다리맥이 풀려 그냥 서있을수조차 없었다.

그는 옆에 있는 소공원의 단풍나무밑 장의자에 앉아 숨을 돌리였다. 어느덧 해가 서산에 걸리였다. 명옥은 고모사촌오빠네 집에 가서 하루밤 묵으면서 두루 마음을 정리해보는것이 좋지 않을가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인차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오늘저녁으로 꼭 창수를 만나보고싶었다. 아니 만나야 했다. 그래서 제철소구내로 창수를 찾아들어갔다.

그는 자그마한 손가방에 양복차림 그대로였다.

명옥은 바람결에 흘러넘어오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구내철길을 넘다말고 마주오는 반백의 상고머리아바이에게 물었다.

《저… 미안하지만 말 좀 물읍시다.

《네, 어서 물어보시우.

《저… 용광로직장에 가자면 어디로…》

《가만, 몇호용광로에 가자구 그러시오.

명옥은 당황해나서 어물어물하였다. 합숙호실은 알아도 몇호용광로인지는 몰랐던것이다.

《내 2호용광로 로장인데 누굴 만나려구 그러시오.

《저, 혹시… 한창수라고 모르십니까?

《아 한창수, 내가 왜 모르겠소. 그가 바루 우리 2호용광로에 있는데.

《네? 그렇습니까?…》

명옥은 너무도 반가와 뭐라구 인사말도 못하고있다가 인차 다소곳이 고개를 숙여 절을 하였다.

《첨 뵙겠습니다. 전 평양에서 온…》

그러자 상대방은 《아!》 하고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이였다.

《난 유상철이라구 부르오. 그러니 동문… 김명옥동무가 아니요?

《네?

명옥은 크게 놀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 이 아바이가 어떻게 나를 다 알가. 그러니 창수동무가 뭐라구 한게 분명하지.)

유상철은 히죽이 미소를 짓고 말하였다.

《허물하지 마오. 난 한창수의 로장이요. 여기서는 그의 아버지가 돼야 할 사람이요. 그러니 왜 내가 동무의 이름을 모를수 있겠소.

명옥은 얼굴이 빨갛게 되였다.

유상철이 한걸음 다가서며 처녀의 손을 다정히 잡아주었다. 혹시 처녀가 이제는 마음을 돌려먹고 이렇게 찾아온것이나 아닌가싶어 유상철은 기분이 무척 좋아지기까지 하였다.

《가만, 나와 같이 가기요. 용광로에는 없을게요. 비번이니까.

《비번이라니요?

《오 참, 그건 근무교대가 아니란 소리요. 입버릇처럼 돼나서. , 같이 찾아보자구.

그러면서 유상철은 합숙이나 병원에 갔었다는 명옥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무리 2도화상이라 해도 이거 정말 안됐소. 내가 잘 돌보아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건데.

유상철의 자책어린 목소리가 별스레 가슴속으로 뜨겁게 흘러들었다. 그는 애써 침착한 어조로 말하였다.

《본인 부주의겠지요. 그는 어릴적부터 덤비는 축이였으니까요.

《그건 그렇소. 하지만 이번 일은 나한테 책임이 있소. 그날 내가 미리 주의를 주었어야 하는건데…》

두눈을 깜박거리던 명옥의 눈에는 마침내 가랑가랑 눈물이 괴여올랐다. 오랜 용해공의 체취가 풍기면서 인정이 넘치는 이 상고머리로장한테서 한창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감득하게 되니 저절로 눈물이 났던것이다.

사위는 어둑어둑해왔으나 제철소구내는 외등빛으로 훤하였고 거의 마감단계에 이른 유화판건설장은 건설직장사람들과 지원자들로 법석 끓고있었다.

벽체에 얼기설기 설치한 발판에서 촉수높은 외등불빛속에 미장칼이 번뜩이였다. 《자, 사모리요.》 하는 소리가 연방 날아올랐다.

유상철은 창수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다가 다시 명옥이한테로 와서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리였다.

《그러니 창수는 어데 가있나?

명옥은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만두십시오. 이제 만나게 되겠지요.

《그럼 고모사촌네 집에 가서 자고 래일 다시 오라구.

《고마워요.아직 시간이 많은데 전 여기 더 있고싶어요. 로장아바이두 지원로동에 나오신것 같은데 같이 갑시다. 저두 대학때 이런 일을 많이 해보았어요.

유상철은 손을 내흔들었다.

《피곤하면 여기가.》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목을 가리켜보였다. 《못쓰게 된다는데… 가수들은 그게 생명과 같다잖나. 그만두오. 그만둬.

《괜찮아요.

그들은 사모리를 이기는 큰 철판이 놓인곳으로 갔다. 작업장은 모두 흥겨운 기분에 싸여 웃고 떠들썩하였다.

명옥은 양복저고리를 벗고 흰샤쯔바람에 손수건으로 머리채를 뒤로 묶었다. 그가 삽을 집어들자 유상철이 그것을 한사코 빼앗았다.

《우리가 뭐 손님을 이렇게 부려먹을수가 있소?

《아니예요. 전 얼마든지 몰탈이기는 작업을 할수 있어요.

하지만 명옥은 끝내 웬 청년한테 삽을 빼앗기고말았다. 유상철이와 청년은 둘이 겨끔내기로 삽을 제치고 엎어치며 부리나케 세멘트와 모래를 골고루 섞어나갔다. 명옥은 구경만 하고있을수 없어 웬 단발머리처녀와 맞들이를 들고 거기다가 혼합물을 퍼담아 날라갔다. 땀이 흐르고 기분이 거뜬해졌다.

유상철이 삽자루를 짚고서서 맞들이를 들고가는 명옥이를 대견스레 바라보며 《요즘 예술인들은 옛날과는 다르다니께 참.》 하고 감탄하는것이였다.

그런데 이때 방송차에서 음악이 뚝 끊어지더니 식당에서 국수를 눌러왔으니 야간작업성원모두 앞마당으로 나오라고 알리였다. 뒤이어 방송차에서 식당주방에서 온 녀인의 챙챙한 목소리가 들리였다. 온실에서 기른 오이꾸미에다 농마국수라고 하면서 그 맛이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모두다 와- 하고 웃었다. 명옥이는 머리뒤를 묶었던 손수건을 풀어 얼굴과 목을 문대였다. 육체적로동이 가져다주는 쾌감만이 아니라 여기서 떠도는 즐거운 분위기에 휩싸이다나니 자기는 자연 미지의 세계, 아니 그러면서도 무척 친근한 세계에 들어선것만 같았다.

유상철이 《자, 우리도 한그릇 제껴보지.》 하고 무랍없이 명옥에게 말하였다.

어느새 도착했는지 식료차가 와있었다. 거기서 실어온것을 부리워 이동간이식당같은천막으로 들여갔다.

낮교대에서 곧추 여기로 온 사람, 집에서 교대시간보다 몇시간 먼저 나온 사람, 어쨌든 건설자들모두를 위해 저녁참을 내온것이다.

천막안에서 국수사리, 꾸미, 육수, 얼벌벌한 양념… 이렇게 흐름식으로 사발에 놓여지고 그것을 몇명의 녀인들이 목판에 담아 날라내갔다. 속이 출출했던 사람들이 위생저가락이 놓인 국수사발을 받아들고 벽체에 의지해 쌓아놓은 널판자우에 앉았다. 벽돌장을 깔고 앉아 먹는 사람, 외등불빛 가까이 서서 먹는 사람… 그러면서 걸쭉한 롱담과 우스개로 작업장은 몹시도 흥성거리였다.

그들이 저녁참을 다 끝냈을 때였다.

몇장 겹쌓은 불로크더미우에 중년의 문화회관 관장이 나섰다.

그는 방송차에서 끌어온 줄을 한손에 감아쥐고 다른 손으로는 마이크를 입가까이로 가져갔다.

《야간작업을 하고있는 건설자여러분! 그리고 이 작업을 돕기 위해 나온 지원자여러분! 오락회를 시작하기전에 도당위원장동지, 아니 도당책임비서동지가 낮에 밤을 이어 수고하는 여러분들에게 인사의 말씀을 간단히 드리겠다고 합니다.

키가 큰 림귀현이 블로크더미우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여유있게 온 얼굴에 웃음을 담은채 회관 관장한테서 마이크를 받아들었다.

《여러분, 정말 수고가 많습니다. 여러분들의 눈부신 로력투쟁에 의하여 대형유화판건설은 바야흐로 완성단계에 이르게 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 건설되는 유화판에 어버이수령님의 자애로운 영상을 모시게 될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현지에 나오신 우리 수령님을 언제나 뵈옵는 기쁨을 안고 일하게 될것입니다. 바로 이 긍지, 이 자부심을 간직할 그날을 위해 우리 제철소 종업원들과 그 가족들이 이렇게 성심성의로 일하고있는것입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여 머리우로 휘두르기도 하고 그것으로 가슴을 툭툭 두드려보이기도 하면서 열정적으로 선동연설을 하였다.

《로동계급의 국제적명절인 5.1절을 앞두고 대형유화판건설을 끝낸다는 우리자신의 결의를 잊지 맙시다. 그러면서 우리는 무쇠기둥으로 나라를 떠받들어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을 병진시킬데 대한 당의 구호를 관철해나갑시다.

해방직후도 그렇고 전쟁이 끝난 직후도 그렇고 나라사정이 어려울 때면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제철소로동계급을 찾아주시였습니다. 그 신임, 그 기대, 그 사랑을 잊지 맙시다.

우렁찬 박수소리가 일어났다. 림귀현도 한동안 같이 박수를 쳤다. 이윽고 관장이 다시 마이크를 잡더니 누군가 가져온 대우에 그것을 꽂아놓고는 두손을 맞잡았다.

《에, 그럼 이제부터 오락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직장별로 자발적으로 나오십시오. 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명심할건 우리 직맹에서는 이런 때에도 사회주의경쟁조항에서 어느 직장이 앞장서는가를 주시한다는 그것입니다. 물론 그러지 않아도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나와주리라 믿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 빨리 나오십시오.

맨처음으로 공무직장선반공처녀인 김옥희가 나왔다. 온 제철소에 소문난 꾀꼴새였다. 손풍금반주에 맞추어 녀성민요독창이 흘러나왔다.

 

       하늘에 나래펴서 매봉이냐

       산모습이 날카로워 매봉이냐

       이 나라 젊은이들…

그다음은 해탄직장에서 남성저음독창이 나왔다.

다음은 용광로직장, 회전로… 경쟁적으로 나왔다. 그들이 노래부르는 수준이 높아 명옥은 저으기 놀랐다. 우선 감정이 진실하고 절절해서 좋았다. 명옥은 유상철이와 함께 군중속에 끼워 연방 박수를 치며 진심으로 감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데 명옥은 곁에 선 유상철이 아까 사모리를 같이 이기던 청년에게 뭐라뭐라 말하는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 청년이 어느새 관장한테로 가서 귀에 대고 무슨 말을 하는것이였다. 그러자 관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쪽으로 돌아서서 기운차게 말하였다.

《여러분, 이자리에는 국립민족예술극장에서 온 가수동무가 참가했습니다. 그 동무가 여러분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게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나오시오. 나오시오.

장단 맞춰 박수가 울리였다.

그 순간 명옥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고 했으나 어느새 유상철의 손이 그의 팔을 지그시 붙잡는것이였다.

유상철은 히죽이 웃으며 명옥이한테 말하였다.

《한곡조 불러주오. 건 무엇보다 나의 청원이요. 그리구 이 군중의 한결같은 요구라는것을 생각해서…》

앞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내며 길을 틔워주었다.

《자 자, 저쪽으로 좀 비키슈.

《자꾸 뒤만 돌아보지 말고 길을 내주란 말이야.

명옥은 스스럼없이 나갔다. 그는 층계에 올라서서 군중을 향해 무슨 말이든 하고싶었으나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약간 얼굴을 붉히다가 손풍금수를 돌아보며 노래곡목을 말하였다.

손풍금수의 전주가 울리고 명옥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두손을 맞쥐였다.

 

       금수산 제일봉에 아침해살이 붉게 피니

       꽃봉오리 완연하여 모란봉이라 하였는가

       …

 

1절이 끝나자 벌써 박수가 터졌다. 2, 3절을 부르자 박수와 함께 《야!-》 하는 환성이 터져올랐다.

《재청!

《재청이요!

명옥은 또다시 손풍금수에게 돌아서서 뭐라고 말하였다.

명옥은 민요독창이 전문이였지만 다른 노래를 부르고싶었다. 《천리마선구자의노래》였다. 그는 맞쥔 두손에 힘을 주며 한발을 앞으로 약간 내짚었다.

 

       백두의 정기는 넘치고

       우리 손으로 새 사회 꾸린다.

       동무여 나가자 혁신의 불길이 타오른다

       …

 

명옥은 모두어잡았던 손을 들고 감정의 고조에 맞추어 흔히 그러하듯 한손을 높이 쳐들었다가 내리우며 불빛에 비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앉은 사람, 서있는 사람 모두 자기를 바라보고있었다.

구절마감에 그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한곳에 머물렀다. 한사람이 고개를 숙였다가 쳐들고 그리고는 다시 숙이는것이였다. 명옥은 노래를 부르면서도 그가 한창수라는것을 인차 알아보았다. 마침내 명옥이와 창수의 시선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명옥은 자기가 그만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되였다.

명옥이의 열렬한 호소인듯 노래소리는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

       위대한 수령님 부르시는 한길로

       아름다운 청춘의 희망은 꽃피네

       …

 

명옥은 노래를 끝내고 요란한 박수속에서 인사를 하고나서 잠간 한창수쪽을 바라보았다.

(화상당한 상처는 일없나요? 왜 저한테도 알리지도 않았나요? 너무해요. 너무해요…)

박수와 함성은 한참이나 계속되였다.

군중속에서 이런 말이 들렸다.

《저 배우가 우리네 회관 성악지도원으로 오는게 아니야?

《무슨 엉터리없는 소리를 해. 예술인으로서 우리 제철소에 현실체험을 왔겠지.》 하고 제법 아는체하는 젊은 친구도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뒤이어 춤판이 벌어졌다. 북소리, 꽹과리소리가 들썩하게 울리였다. 거기에 손풍금소리까지 합쳐졌다.

적어도 몇백명은 실히 될 로동자들이 넓다란 마당에 흩어져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모래무지에 발이 빠지는 사람, 자갈무지에 엉덩방아를 찧는 사람, 방금전까지 사모리통을 지고 발판으로 오르내리느라고 맥이 빠졌다는 중년사나이도 벽돌장을 깔고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어느새 춤판에 뛰여들었다. 또 이쪽에 앉아 손바닥에 물집이 생겼다면서 붕대를 감고있던 영양제식당 취사원아주머니도 허리를 꼬며 돌아간다.

《좋다! 조오치!

흥에 겨워 웨쳐대는 소리가 전등불빛으로 환한 건설장을 감돌다가 검푸른 야공 멀리로 울려간다.

《옹헤야》, 《노들강변》… 군중무용으로 류행하던 춤이 다 나왔다. 나중에는 원무곡이 흘렀다.

 

       바람결 맑고

       별빛도 정다워

       즐거운 이 저녁

       다정한 동무들

       모두다 유쾌히

       춤추고 노래하자…

 

저쪽구경군들속에 서있던 한창수가 손풍금을 타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의 다리를 념려해서 나무의자를 가져다놓았으나 그는 돌아다보지도 않고 머리를 숙일사하고 열정적으로 손풍금을 탔다.

유상철은 《옹헤야》때 들어가서 몇번 어깨를 들썩들썩하다가 나왔다. 다른 사람들이 떠밀었으나 그는 홰홰 손을 내저었다.

 

       다정한 동무들

       모두다 유쾌히

       춤추고 노래하자…

       …

 

명옥은 웬 낯모를 청년과 손을 잡고 춤을 추었다. 그 싱검둥이청년은 춤을 추면서 《난 동무를 잘아오. 한달전까지 평양맥주공장옆 아빠트에서 살면서 민족예술극장으로 나드는 동물 보았거든.》 하고 말을 걸었다.

《아, 그런가요? 그런데 어떻게 돼서…》

《어떻게 될거나 있습니까. 강철전선을 지원해서 여기 왔지요. 그런데 오늘 내가 이렇게 동무하고 춤을 추게 될줄이야.

여느때같으면 《호호호》 하고 웃음으로 흘려버리고말았을것이였다.

그런데 지금 명옥의 온 마음은 한창수한테 가있었다. 그는 될수록 그쪽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짝패는 어째서인지 자꾸 그를 한창수쪽으로 끌고 가는것만 같았다.

《저 친구 손풍금수준이 대단하거든. 아마 다리만 아니라면 이 춤판에 뛰여들었을텐데 그 늘씬한 몸을 굽혔다 폈다 할 땐 같은 총각들두 그 멋에 막 질투가 난단 말이요.

《남자들이 무슨 쬐쬐하게 질투까지…》

《하 이 동문 정말 모르는군. 저 한창수란 친구는 평양에서 어떤 멋쟁이처녀가 오겠다는것도 거절하는 그런 수준이요.

명옥은 음악에 맞춰 손을 놓고 저쪽으로 몇걸음 갔다가 이쪽으로 돌아와 그 청년의 손을 다시 잡으면서 방긋 웃으며 일부러 딴전을 폈다.

《평양에서 누가 여기로 오겠다구 해요?

《뭐라구요? 그게 진심이요?

청년은 명옥의 손을 놓고만다. 명옥이 시까슬렀다.

《나하구 더 추지 않을래요?

《허참, 추긴 춰야겠는데.… 다시 그런 말 하지 않겠다는 담보로 말이요.

《호호호, 그렇게 하죠.

이렇게 말하는 명옥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괴여올라 주위가 어룽어룽해보이였다. 저쪽의 한창수가 손풍금을 타며 일부러 이쪽을 보지 않는것만 같았다.

명옥은 느닷없이 어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얘, 거기에 어디 네가 늘 말하는 그 <무대>가 있니?

그러자 지금 이 순간 명옥은 속으로 어머니한테 대답하였다.

(어머니, 여기두 무대가 있어요. 이것을 무대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린 정말 이 사람들한테 큰죄를 짓는거예요.)

오락회가 끝나고 다시금 작업이 시작되였다.

유상철이 뭐라고 말하자 한창수가 고개를 끄덕이였다.

명옥은 손가방을 손에 들고 양복저고리를 팔에 걸친채 한창수한테 다가갔다.

그들사이는 인사가 필요없었다.

두사람은 노래와 춤판에서 서로 말없이 많은 심정을 주고받았던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웬일인지 명옥이로서는 폭발적으로 감정이 터져나올것 같아 입술을 사려물었다.

유상철이와 헤여진 두사람은 으슥진 나무밑으로 갔다. 명옥이 떨리는 가슴을 누르며 조용히 물었다.

《왜 다리를 다치고도 말 한마디 없이… 아니, 아니예요. 왜 한번도 답장이 없었어요?

《한데 동문 왜 온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럼 좀 묻자요. 내가 못올데를 왔어요?… 난 고모사촌오빠네 집에 왔던길에 들렸어요.

명옥은 마감말에 어째선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한창수는 나직이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명옥동무, 밤도 깊었구 피차에 마음을 가라앉힐겸 오늘은 이만하구 래일 다시 만나자구. 시간이야 있겠지?

명옥이는 저로서도 뜻밖이니만큼 랭정해지며 말하였다.

《하긴 내 보기에도 창수동문 지금 너무 피곤한것 같아요. 래일 아침교대에 나가요?… 그렇다면 푹 쉬여야지요.

한창수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합숙앞 소공원에서 오후 6시에…》

《그렇게 하자요.

이리하여 그들은 헤여졌다.

 

×

  

이튿날 저녁.

한창수는 외출복을 갈아입고 나섰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은 구리빛인데 잘된 주물품처럼 나무랄데 없이 체격이 쭉 빠졌다.

시커먼 눈섭, 빛나는 눈, 덩실한 코마루. 그 모든것이 남성미를 잘 나타내였다. 다만 다리의 상처가 이따금 마치였지만 그럴수록 그는 천연스레 시적시적 걸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생각에 잠기였다. 애정이란 이렇게도 복잡한것인가.

포기하자, 망각하자 하면 더욱더 검질기게 눈앞에 명옥의 모습이 떠오르군한다.

시계를 보니 아직 30분은 있어야 했다. 그는 일부러 마음의 안정을 보이느라고 슬슬 휘파람을 불었다. 《샘물터에 물을 길러 동이 이고 나갔더니…》

《여기 있어요.

?!

한창수가 고개를 번쩍 들고 휘둘러보니 바로 한걸음뒤에 명옥이가 서있지 않는가. 처녀는 땅에서 솟은것처럼 나타나 그를 놀래웠다. 명옥이 사실은 벌써부터 와있으면서 한창수가 언제쯤 나타나는가하여 시계를 보고 재던중이였다. 약속시간 전인가 아니면 후인가. 상대방의 열정을 가늠하는 징표로 될수 있기때문이였다.

한창수는 놀라운 눈길로 처녀를 바라보았다.

어제저녁에도 불빛속에서 그새 변모된 명옥의 모습을 가려볼수 있었다. 쌍까풀진 눈, 오똑하니 들린 코, 도드라진 입술, 그것이 갸름한 얼굴과 신비로울만치 잘 어울리여 방금 망울을 터친 꽃송이같이 보이였다.

어째선지 그한테서는 무대에서 다스려지고 가꾸어진 인공미가 아니라 순수한 자연그대로의 미가 느껴졌다.

한창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였다. 그들은 강기슭의 공원으로 나섰다. 살구나무가지들에는 이제 곧 피여날 꽃망울들이 연분홍색으로 부풀었다.

한창수가 장의자를 가리키며 자리를 권하자 명옥이는 그옆에 와 앉더니 웬일인지 손가방을 열고 봉투 하나를 꺼내였다.

한창수는 담배를 붙여물고 눈길을 피하며 멀리 강하구쪽을 바라보았다. 저녁안개가 뽀얗게 서려 강줄기는 멀리까지 보이지 않았다.

《이걸 읽어보세요.

명옥이의 음성은 약간 떨리였다.

《그게 뭔데.

한창수는 봉투를 받아들면서 저편의 눈을 쳐다보았다.

편지 겉봉에는 《한창수동무 앞》이라고 하였을뿐 보내는 사람의 주소도 이름도 적은것이 없었다. 편지치고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한창수는 이리 뒤집고 저리 번지고 하였다. 명옥이가 입을 열었다.

《그 편지는 지금 보아도 되고 차츰 후날 보아도 됩니다. 우리 이모부가 창수동무를 도와주기 위해 보내는것입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몰래 가지고가라 해서…》

여기까지 말한 명옥이는 그 편지로 하여 어떤 면구스러운 일이라도 당한듯 얼굴이 빨갛게 되였다. 그는 잠간 동안을 두었다가 고개를 돌려 말하였다.

《창수동무, 난 여기 와서 보고… 창수동무가 왜 나같은 녀자를 두고… 아니 그런게 아니라 왜 회답도 없이 있었는지 그걸 알게 되는것만 같아요.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을 해놓고는 뒤말을 잇지 못해 안타까이 숨을 몰아쉬였다.

《아니 그건 도대체 무슨 소리요?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창수가 입을 열었다.

《난 사실 솔직히 말해서 명옥이한테 미안했소. 내 욕심만 부리는것 같아서말이요. 털어놓고말하면 명옥동무와 나는 서로 리상이 다른데 어떻게 내가… 그리구 이런 문제야 강박해서 되는것도 아닌거구… 사실 명옥동문 이제 가수로 무대에서 명성을 떨칠수 있는데 거기를 어떻게 떠날수 있겠소? 난 다 리해하오. 여기에는 명옥동무가 설 무대가 없단 말이요.

《무대… 무대… 우리 어머니가 하던 말과 똑같은 말을 하는군요.

그러면서 명옥은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난 이미 여기에 내가 설 무대가 있다는걸 발견하고도 남았어요. 여기에도 내가 설 무대가 있어요.)

한창수는 담배만 대구 갈아대면서 여느때의 그 류창하던 언변은 다 어디 갔는지 말을 못하였다.

명옥이 흥분된 어조로 말하였다.

《난 어제 유상철아바이한테서 많은 얘기를 들었어요. 친애하는 김정일동지께 결의다진대로 여기서 강철기둥이 되겠다고 한 그 영원한 맹세 하나만으로도 창수동무가 나같은 녀자를 따라 평양에 훌쩍 올라갈수 없다는것쯤은 나도 알수 있었어요. 아무리 미련한 녀자라 해도 그것을 모르겠나말예요. 화상을 당하고도 나한테는 말한마디 없이… 전화 한통이면 되는데 평양이 천리인가요 만리인가요.

명옥은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창수는 당황해났다.

《아니, 왜 이러우. 왜 이래?

명옥은 얼굴을 가리운채 흐느끼며 도리머리를 하였다. 이윽고 명옥이는 두손을 내리우고 창수를 곧바로 쳐다보았다. 명옥이의 긴 속눈섭에 매달린 눈물이 원망과 함께 그 어떤 분노로 하여 번쩍이는것만 같았다.

《어쩜 그럴수 있어요? 남의 마음에 불을 달아놓고는 제편에서… 그것도 모르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으니… 머저리처럼…》

《아니요. 명옥이, 난 명옥이를 위해 물러나려고…》

《그만둬요. 그렇게 물러나는 남자라면 난 애당초 여기에 오지도 않고… 창수동문 그런 사람이 아니예요! 그렇게 될수 없어요!

《명옥이, 진정하오. 진정해.》 그러면서 한창수는 자기가 쥐고있던 편지겉봉을 뜯고 속지를 읽기 시작했다.

 

한창수동무 앞

 

나는 명옥의 이모부되는 사람이요. 내가 동무에게 도와줄수 있는것은 평양의 어느 대학을 지망하는 경우 입학할수 있게 극력 떠밀어주겠다는거요. 공장대학을 다닌다는 말을 들었으나 아무래도 주간대학을 나오는것이 자질도 그렇고 발전의 길도 빠를것이요. 단연! 이제 한두달후면 추천사업이 있겠으니 만약 희망하면 알려주기 바라오.

 

김 인 도                       

 

한창수는 뜨적뜨적 읽고나서 속지를 다시 천천히 봉투에 밀어넣었다.

《걱정해줘서 고맙긴한데…》

《됐어요. 그걸 저한테 주세요.

《왜?

《글쎄요…》

명옥은 편지를 두손에 받아들고 머리높이까지 올렸다가 북- 소리가 나게 찢어버렸다. 눈살은 매섭게 꼿꼿해지고 입술은 어떻게나 세게 사려물었던지 하얗게 이발자리까지 났다.

《아니 건 왜?

한창수는 얼떠름해서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내가 어리석었어요… 우리 어머닌 이것으로 동물 옴짝 못하게 할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어머니들이란 그럴수 있지요… 편지를 들고온 제가 어리석었어요. 끝없이 어리석었지요.

침착하고 거침없는 목소리였다.

한창수는 한손으로 명옥의 손을 잡았다.

명옥은 손을 빼지 않고 애절한 눈길로 한창수의 얼굴만 쳐다본다. 떨어져 앉아있던 그들사이 간격은 어느새 좁혀지고 장의자우에 나란히 붙어앉아있었다. 그러는동안 날이 어두어왔다.

한창수가 말하였다.

《난 사실 유화판 세우는것이나 준공되면 한번 평양에 다녀올가도 생각했댔소. 전상환부부장이 전화로 동무네 집엘 갔댔다면서 그 사연을 나한테 말했고… 명옥동무도 아까 말했지만 친애하는 김정일동지를 만나뵙고 나는 여기서 우리 당을 받들려는 결심이 더욱 확고해졌소. 강철로 우리의 향도의 별이신 그이를 받들겠다는 그 결심말이요.

명옥이, 우린 참 행복한 세대요… 오늘은 꼭 얘기해야만 하겠소… 전상환부부장이 전우의 의리를 다해 우리들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게 된건 친애하는 김정일동지의 뜨거운 인정때문이였소.

《네?

명옥은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이런 사실은 이제는 다 얘기해도 될것 같아서 말하는거요. 알겠소?

명옥은 눈물이 가랑가랑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러다가 창수의 큰 가슴에 얼굴을 와락 묻었다.

잠시후 창수가 입을 열었다.

《명옥이, 우리는 그이의 축복을 받고있소. 향도의 별이 우리를 축복하고있단 말이요.

한창수는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찬란한 별들이 하늘에 금싸래기처럼 한벌 쫙 깔리였다. 명옥이도 고개를 쳐들었다.

유독 강렬한 빛을 뿌리는 별이 하나 머리우에 떠서 그들을 내려다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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