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석윤기

(제23회)

제 2 편

 

16

 

옥섬이도 서향이도 나무지게를 지고 마당으로 들어서시는 김일성동지를 보았다. 목수건으로 귀를 싸맨것밖에 산속의 혹독한 추위를 막기 위한 방한구라고 한가지도 걸치신것 없는 그이의 허술한 옷차림이 우선 처녀들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그이의 행전에는 성에가시가 그대로 박혀있고 혹한속에 맨살이 드러나있는 얼굴과 손등은 피빛이 번지다못해 멍든듯 한 기운이 느껴졌다. 머리카락과 눈섭밑에는 성에가 하얗게 내불렸는데 넓은 이마에서는 땀기가 번지르르하였다.

옥섬이도 서향이도 한달음에 달려가 그이의 몸에 더운 옷가지를 씌워드리고싶고 그이앞에 무릎을 꿇고앉아 무엇인가 죽을 죄를 지은듯 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고싶었다.

그러나 바로 그런것을 환히 꿰뚫어보기라도 한듯 차광수는 부강촌에 가서 그이를 아는척하지도 말며 그 어떤 색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말뿐아니라 특히 동정하는듯 한 빛을 절대로 보여서는 안된다고 거듭거듭 당부하였다. 그거야말로 김일성동지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으로 된다고 진한정이도 귀가 아프도록 곱씹었다. 머슴은 그러한 차림, 그러한 고역이 자연스러운것이며 이에 대해 주인인 오정혁이조차도 필요이상의 동정심을 보이거나 관례를 벗어나는 친절을 베풀면 적들의 주목을 끌게 되여 결국 그이의 공작도 신변도 위태롭게 만든다는것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오정혁은 그들이 보기에 보통이상으로 랭정한듯 하였다. 이런 맵짠 날씨에 눈이 정갱이를 치는 산속에서 나무를 해왔는데도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점심을 하고는 그길로 또 산에 가라고 매우 딱딱한 어조로 분부하는것이였다.

이것은 두 처녀를 격분시켰다. 전에 김일성동지의 부강촌공작을 위하여 돈화에 왔을 때나 서향이가 부강촌에 들렸을 때까지만 해도 오정혁은 내성적이고 사람들에게 매몰차게 대할줄 모르는 유약한 청년이였다. 그의 바로 그러한 성격때문에 반동들이 득세한 부강촌에 조직의 뿌리를 박기가 그렇게 힘들기도 했던것이다.

안윤재며 그 손아귀에 있는 보위단패거리들앞에서는 대차게 맞서지 못하던 그가 어쩌면 공작을 위하여 자기 집에 머슴을 살러오신 혁명의 지도자를 제집 울타리안에서까지 진짜 머슴을 대하듯 할수가 있을가, 오히려 그의 부모들과 누이동생 정란이가 사람이 무던하고 인정이 후하였다.

《아니 이 사람아, 날씨가 차츰 더 험해지는데 오늘은 그만두지 그래.

하고 오별장령감은 아들에게 나무라는투로 권했고 안로인은 혀를 끌끌 차며 땀을 훔치라고 머리수건을 벗어주었다. 그리고는 진정이 어린 목소리로 말하였다.

《어서 구들로 올라가서 몸을 녹이게. 이 추위에 땀을 이렇게 흘렸으니 감기들가 무섭네. 이렇게 밖에 서서 찬바람 쏘이면 영낙없다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빙긋 웃으시며 태평스러운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산속에서 다 내려오다가 토끼를 만나서 한번 뒹굴었지요. 그래서 옷을 이렇게 마추지 않았어요.

《아니 토끼라니? 토끼가 어떻게 했게 장정이 뒹군단말인가?

사람좋은 안로인은 큰변이라도 난듯이 눈이 커다래졌다.

《그놈이 눈에 빠져서 허우적이길래 덮치려니까 지게가 기우뚱하면서 내가 먼저 넘어졌지요. 그랬더니 그놈이 내 귀옆을 째고 달아나더군요. 그놈을 잡았으면 손님대접을 잘하는걸.

《원 사람두, 손님은 자네 떠난 다음에 왔는데 산속에서 어떻게 알고 손님대접할 생각을 했나?

안로인은 그이께서 돌려주시는 머리수건으로 어깨며 행전의 눈가루를 털어드리며 가볍게 눈을 흘겼다. 이 로인은 날이 갈수록 젊은 머슴에게 정이 들어 오히려 공작상 무슨 후과라도 입을가봐 걱정스러울 정도로 친절하게 대하였다.

그이께서는 아무리 허술하게 겉차림을 하고 머슴군답게 막굴어도 이 집 안로인을 비롯하여 동네사람들이 누구나 호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게 하는 그 인상적인 웃음을 지으시며 무랍없이 말씀하시였다.

《그런데 저 대처에서 굉장한 녀자손님이 왔다면서요? 우리 집 며느리감이라는 말도 돌던데요.

《이사람아, 그런 실없는 말은 귀등으로 듣고 어서 방에 가서 몸이나 녹이게. 며느리는 무슨 며느리, 돈화의 진대감댁 며느리감이라는데… 우리 집 작은주인과 진대감네 아들과 친구지간이라네.

《네, 그런데 둘이 오지 않았어요?

《쉿, 그만하고 방에 들어가라니까… 아마 그 녀자손님은 더 귀한 손님인게야. 진대감네 며느리도 우리 정혁이도 여간 어렵게 대하지 않는걸 보니… 겉보기는 얌전한 처년데…》

그 처녀들은 하루밤 묵고가라고 온 집안이 달라붙어 만류했으나 점심참을 마치자 곧 길을 떠나갔다.

그때 김일성동지께서는 벌써 산으로 들어가시고 집안에 계시지 않았다.

옥섬이와 서향이는 그런줄도 모르고 집안팎을 살피다 못해 마차가 동구길을 빠져나올 때까지 혹시나 해서 대문쪽을 돌아보기도 하고 골목길을 여지저기 더듬어보기도 하였지만 워낙 맵짠 날씨라 길우에는 인적이 없었다.

그렇게 오래간만에 만나뵙고도 인사는커녕 알은체조차 하지 못하고 마감엔 눈짓 한번 건네여보지 못한채 무심히 그이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소리없이 눈물이 미음돌았다. 처녀들은 인조유리를 댄 시창에 이마를 갖다대고 무심히 흘러가는 눈벌을 바라보며 껄껄한 방수포로 된 풍자락을 적셨다.

그들을 바래워주겠다고 마차에 함께 타고나온 오정혁은 맞은편에 앉아서 그들의 비관에 잠긴듯 한 모습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고있었다. 그것 역시 처녀들의 가슴을 구슬프게 만들었다.

전날 오정혁이가 조직에서 혁명적진취성이 부족하고 유약하다는 비판을 받아온것을 모르는 그들은 돈화에 드나들 때 례절바르고 상냥하던 오정혁을 애잡짤한 감회를 가지고 추억하였다. 처녀같이 싹싹하던 사람이 지금은 얼마나 뚝뚝해지고 겉보기부터 우악스러워졌는가. 혁명은 벌써 그들의 신상에뿐아니라 사람들의 성격에도 커다란 흔적을 남겨놓은듯싶었다.

마차는 황구령쪽으로 길을 잡았다. 돈화로 가자면 푸르하줄기를 따라 마호방향으로 나가는것이 훨씬 빠르겠는데 왜 명월구방향으로 가는것인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오정혁의 태도가 뚝뚝하니 물어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마차소리를 듣고 보위단경비막에서 솜털뭉치같은 보초가 엇갈아낀 두팔짬에 보총을 움켜안고 뛰여나왔으나 호화로운 마차의 꾸밈새를 보고 벌써 누구라는것을 짐작한 모양 안으로 쑥 기여들어갔다. 지나치면서 보니 경비막안에는 전에없이 많은 보위단원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고있었다.

날씨가 푸르딩딩한게 어딘지 모르게 독기가 느껴졌다. 잔잔하게 누워있던 눈벌이 갑자기 소스라친듯 돌개바람을 일으키며 눈가루를 휘뿌렸다. 그것은 보기만 해도 을씨년스러워 그때마다 처녀들은 잔뜩 옹송그린 몸을 떨며 진저리를 쳤다.

김일성동지께서 이런 어수선한 날 짐승들도 나다니지 않는 눈덮인 산속에 홀로 들어가시여 고된 신역을 치르신다고 생각할 때 이것이 무엇때문이냐, 아무리 불쌍한 로동자, 농민이라 하더라도 이런 때 그런 고역을 날마다 치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가 하는 항변이 터져나오고 그이께서 그런 고초를 겪으시도록 방임하고있는 혁명가들이며 조직이며 또는 잘 알지는 못하지만 혁명군이나 당, 공청의 지도성원들이 그 무슨 사정이요, 정세요 하고 손꼽아 렬거하는 리유들에 대해 반감이 치밀었다. 처녀들의 그러한 감정은 우선 눈앞에 앉아있는 오정혁의 근엄한 자세에 그 어떤 역기를 느끼게 하였다.

《동무들이 이번에 참 큰일을 해주었소. 만일 동무들이 제때에 와주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를번했소.

처녀들의 마음속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오정혁은 심중한 어조로 말했다.

서향이는 그러한 인사말이 자기와는 별로 관계없는 말이라고 생각되여 잠자코있었고 옥섬은 그가 마음만 있다면 집주인이요 조직원인만큼 얼마든지 그이의 사업조건을 잘 보장해드릴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방금도 하고있었기때문에 어쩐지 그의 말이 바로 귀에 걸리지 않았다.

녀성들의 표정이며 더구나 그 심리에 대해서 어지간히 둔감한 편인 오정혁은 같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차광수동무와 련계가 닿으면 곧 대책을 세우겠다고 전해주오. 진한정동무에게도 그렇고… 사실 이번에 닥친 위험이 차라리 좋은 계기라고도 볼수 있소.

그래도 처녀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정혁의 말은 어딘지 모르게 자기변명처럼 느껴졌다.

오정혁이도 더는 할말이 없었다. 머리속이 번거롭기도 하였다. 지대현이며 장상민이가 김일성동지께서 부강촌에 계신다는것을 어느정도라도 눈치챘다는것은 다름아닌 왜놈특무기관에서 그런 냄새를 맡았다는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그대로 우사령부에 전달될것이다. 어떻게 하든지 조선공산주의자들과 중국의 반일세력사이에 쐐기를 치고 리간을 조성하려고 갖은 모략을 다 꾸며 그것을 통해 김일성동지의 반일유격전쟁구상을 와해시켜보려고 발악하고있는 적들이 이 기회를 놓칠 까닭이 없다. 처음 김일성동지의 부강촌공작문제가 론의될 때 벌써 적의 특무기관에서 부강촌을 노리고있다는것이 하나의 착안점이기도 하였다. 그러니만큼 김일성동지께서 부강촌을 떠나야 한다는것은 더 론의해볼 여지도 없는 문제이지만 그이께서 정작 떠나신다면 그 사업의 마무리를 어떻게 짓겠는가 하는것이 문제이다. 부강촌에는 김일성동지께서 와계시는 달포사이에 벌써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이제는 부강촌이 안윤재의 소왕국이 아니였으며 안윤재나 안영호의 호령소리가 부강촌사람들의 가슴을 얼어들게 하지도 못했다. 물론 아직도 그들의 손아귀에 명맥을 틀어잡힌 사람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런 사람조차도 그것을 숙명적인것으로, 절대적인것으로는 감수하지 않게 되였다. 사람들은 눈을 떴으며 세상물계를 어느정도 알게 되였다. 야학에서는 계급투쟁과 반일의 구호가 거의 공개적으로 론의되고 혁명가요소리도 울려나왔지만 그런 놀라운 소식도 안윤재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길에서 사람을 단속하여 류치장에 처넣는 놀음도 이 한달어간에는 종적을 감추었다. 그사이 부강촌을 지나간 젊은 길손이 전혀 없었던것은 물론 아니였다. 그러나 경비를 서는 보위단원들은 일부러 게으름을 부렸으며 심지어 박일보같은 사람은 경비를 서다가 저멀리 수상한 인적이 보이면 슬그머니 아궁이에 내려가서 불을 쪼이군하였다. 라자구의 련락원을 빼돌린 상범은 이미 우리 사람이나 같았다. 다만 한사람 차기득이만은 안윤재네 집과 주종관계로 얽혀서 아직 안영호의 수족노릇을 하고있었지만 그도 전같이 사납게 굴지는 못했고 송남칠의 청을 말없이 들어주기도 한다. 뭔가 소리없이 조여드는 시대의 압력을 피부로 느끼는 모양이였다.

마차는 어느덧 동네를 멀리 벗어나서 눈덮인 고개를 넘어섰다. 좁다랗게 틔인 골짜기가 마치 굴뚝아가리처럼 사나운 눈바람을 토해놓았다.

《이젠 모든게 명백한데…》

하고 정혁이가 마치 방금 중단된 이야기라도 계속하듯이 심란한 어조로 말했다.

《혹시 김일성동지가 실태를 묻는다든지 하더라도 동무들은 다른 소리 말고 덮어놓고 여기 공작을 빨리 결속짓고 돌아가야 한다는 방향으로 말씀드리오. 안도에서 일이 몹시 급하게 제기된다는 실태도 강조하고…》

《아니 그럼 우리가 김일성동지를 만나뵙게 돼요?

옥섬은 저도 모르게 헤덤비며 물었다.

《그럴것 같소. 마차를 이쪽으로 돌리라는걸 봐서 여기 어디서 기다릴것 같소.

《그래요?

두 처녀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방금까지 속을 썩이던것이 공연한짓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이를 만나뵙기만 하면 이 외롭고 인적없는 산속에서 홀로 고생하시며 위태로운 공작을 계속하시지 못하도록 눈물을 흘리며 진정도 하고 정혁이 말대로 위험한 사태를 얼마든지 강조할수도 있을것 같았다. 두 처녀는 서로 눈길을 마주치며 우리 어떻게 하나 그이를 설복해야 한다는것을 말없는 가운데 언약하였다.

마차는 또 한굽이 고개길을 넘어섰다. 이제 부강촌은 멀리 눈벌뒤로 사라졌고 인적이 드문 마차길은 깊은 눈속에 묻혀있었다. 나무를 하러 이처럼 먼길까지 나오신다는것을 생각할 때 처녀들은 새삼스럽게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게 되였다.

오정혁이도 사위를 두리번거리며 혹시 무슨 흔적을 놓치고 오지나 않았나 해서 불안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김일성동지께서 여태 나무를 지러 다니시군하던 골짜기는 퍽 전에 지나쳤다. 그 골안에서 태반의 공작들이 진행되군하였다. 그런데 오늘은 마차를 명월구방향으로 돌리라는 말씀만 하시고 한걸음 먼저 지게를 지고 집을 나서시였기때문에 어디서 만나자는것인지 이제 와서 보면 분명치 못한 점이 있었다. 혹시 종전에 사업하시던 그 골짜기에서 기다리시는것은 아닌지… 오정혁이가 미타해서 앞뒤를 더 자주 살피는데 차츰 바람이 사나와지면서 눈보라가 날렸다. 자욱하게 서리는 눈장막속에 행인이 나타났다.

조선바지저고리에 행전을 치고 도로긴지 미투린지 다지워진 눈덩이가 엉켜붙은 신을 푹푹 눈속에 박으며 팔짱을 끼고 수굿이 눈보라속을 걸어가는 뒤모습을 봐서는 나이를 대중할수 없었다. 바람소리때문에 마차가 다가오는줄 모르는지 그냥 한대중으로 머리를 깊숙이 숙이고 걸어가던 행인은 마차가 옆을 지나치려 하자 몸을 날려 발판에 올라섰다. 동시에 오정혁이 마차문을 열어드렸다.

《왜 이런데까지 나오십니까? 조동무, 마차를 멈추오.

하고 오정혁이 소리치자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냥 몰라고 손짓하시며 정혁이옆에 앉으시였다. 서향이네 집에서 마차를 모는사이 진한정의 영향을 받아 반제청년동맹원이 된 마부는 말고삐를 잡아채다가 당황하여 고개를 돌렸다.

마차가 주저주저하며 걸음발을 늦추었다.

《어서 냅다 모시오. 혹시 길우에 무엇이 나타난다 해도 볼사이없이 달려야 하오.

그러시면서 김일성동지께서는 옥섬이와 서향의 손을 하나씩 잡으시고 따뜻한 웃음을 보내시였다.

《동무들이 이게 무슨 고생입니까? 나라가 허물어지니 동무들까지 이런 사지판에 나서게 됐소. 사람들의 마음이 모질어졌습니다.

그이께서 《동무들까지》라고 하신 한마디 말씀속에는 의지가지없는 옥섬이와 여태 고생이라는것을 모르고 자라난 서향의 처지가 다같이 갓난애기처럼 사람들의 사랑과 보호를 받아야만 한다는 뜻이 포함되여있는듯 하여 두 처녀는 어쩐지 설음을 받다가 어머니를 만난듯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김일성동지.

두 처녀는 억이 막혀 한꺼번에 울먹이는 소리를 내였다.

《저희들이 고생을 하다니요? 지금 모든 조직원들이 다 푸르허쪽을 바라보며 근심하고있습니다. 어머님께서랑 얼마나 속을 썩이시는지 모릅니다.

옥섬이가 그이의 손우에 고개를 숙이고 안타깝게 호소하였다.

《고맙소. 동무들이 그렇게 걱정해주니 나는 이렇게 끄떡없지 않소. 그런데 서향씨까지 이런 험한 길을 나다니고 옥섬동무는 또 돈화로 나가게 한다니 참 사람들이 무심하오. 그러나 동무들도 그 사람들 심중을 리해해줘야 하오. 차광수동무는 편지에 쓰기를 옥섬동무가 돈화에 나가겠다고 열렬히 자원해나섰고 또 녀자이기때문에 아무 위험도 없는것처럼 주장하고있지만 사실 련락소에 공작원을 파견하면서 그런것을 조건으로 든다는것부터가 벌써 마음을 못놓는다는것을 말해주는거요. 그럼 왜 마음을 못놓으면서도 그렇게 하자고 우기는가? 그것은 첫째로 이 일이 매우 절박한 문제로 제기되여있는데 우리에게는 돈화에서 로출되지 않은 경험있고 든든한 공작원이 많지 못한때문이요. 그다음 리유는, 그건 내 짐작인데 차광수동무의 옹졸한 생각도 좀 작용한것 같소.

《아닙니다. 차광수동무가 편지에 쓴것은 다 사실입니다. 전 돈화에 가는것을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옥섬은 당황한 나머지 지나치게 열을 내여 말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쓸쓸하게 웃으시였다.

《됐소, 고맙소. 서향동무도 진한정동무가 왜 동무를 이런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는가 하는것을 리해해야 하오.

《전 다 리해합니다. 그건 사실 저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때 규방에 깊이 숨어있기만 한다면 정말 뜻있는 생활은 한끝도 구경 못하고 불쌍하게 죽어갈것입니다.

《그렇소. 사실 진한정동무는 서향씨를 사랑하기때문에 일부러 동무를 이런 일에 자꾸 끌어들이는거요. 그걸 리해한다니 나도 기쁘오.

마차는 내리막길에 접어들어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눈바람이 풍자락을 창날처럼 들이쳐 팽팽하게 헤워진 풍자락은 회파람소리를 지르며 파들파들 떨었다.

《너무 멀리 나가지 않습니까? 이젠 저녁중으로 돌아가기 힘들것 같은데요.

오정혁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만 돌아갑시다.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사위를 한번 살펴보시더니 실무적인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표정은 근엄해졌다.

《이제 옥섬동무는 명월구까지 나갔다가 허재률동무를 만나시오. 허동무가 잠시 자리를 뜰수도 있는데 그러면 거기서 좀 기다렸다가 허동무가 돌아오면 함께 안도로 돌아와야겠소.

《그럼 돈화는 어떻게 합니까?

옥섬이와 오정혁이가 거의 같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엔 선아동무를 보내야겠소.

《선아동무는 아직 앓는다는데 어떻게 보냅니까?

옥섬이가 다시 안타까운 소리를 지르자 그이께서는 옥섬의 손을 다둑거리시며 말씀하시였다.

《선아동무의 형편을 알아보고 만일 인차 움직일 형편이 못되면 다른 대책을 세우겠습니다. 어쨌든 옥섬동무는 안도로 돌아와야겠소.

옥섬은 고개를 깊숙이 떨구고있다가 외면하고 손에 쥐고있던 손수건을 눈귀에 갖다댔다. 그리고 머리수건밑으로 삐여져나온 머리카락을 단정히 매만져넣고 무릎우에 두손을 반듯이 올려놓았다. 그의 얼굴에는 결연한 빛이 어리였다.

김일성동지.

옥섬은 거의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떨며 말씀드렸다.

《저를 돈화에 보내주십시오. 저도 차광수동무가 왜 저를 돈화로 보냈다는것도 짐작하고 그리고 또 김일성동지께서 저를 다시 안도로 돌려보내시려는 심중도 짐작합니다. 저는 물론 한개 철없는 처녀에 지나지 않지만 오빠의 희생때문에 제가 조직의 응석꾸러기로 될수는 없습니다. 만일 제가 김일성동지께 걱정이나 끼쳐드리며 동지들의 부담이나 되고있는줄 안다면 오빠는 저를 용서하지 않을것입니다. 김일성동지, 저를 그대로 보내주십시오. 저도 혁명가가 되고싶고 혁명가들의 동지가 되고싶습니다.

옥섬의 두볼로는 굵다란 눈물줄기가 흘러내렸다. 턱끝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눈물은 손등을 때렸지만 옥섬은 그것을 느끼는지 못느끼는지 눈물을 훔칠 생각을 전혀 않고 단정히 앉아 김일성동지만 간절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마차는 무거운 침묵을 싣고 눈보라속을 달렸다. 시름없는 워낭소리만 바람소리짬짬으로 흘러들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눈가루가 몸부림치는 세루로이드 인조유리창을 내다보시였다.

《참 무심한 세월이요. 사랑하기때문에 멀리 떠나야 하고… 사랑하기때문에 박정하게 굴다니…》

그이의 말씀이 심연으로 빠져드는 연덩이처럼 무겁게 울리였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계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조선말로 무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럼 당분간 옥섬동무의 희망을 참작하도록 합시다.

그러자 옥섬은 물기어린 눈을 반짝거리며 머리를 쳐들고 서향이도 말귀를 짐작했는지 덩달아 기뻐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들의 기쁨에 넘친 모습을 측은한 눈길로 지켜보시더니 여전히 묵중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동무들이 하는 일이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옥섬동무, 내 말을 똑똑히 기억하시오. 우선 아까 말한대로 명월구에 나가 허동무를 만나시오. 래일쯤이면 거기에 차광수동무가 나타날것입니다. 차광수동무에게 리광동무를 만나고 그길로 왕청2구에 가서 공청비서 김중권동무를 만나라고 하시오. 마촌에 있는 구국군 관부대에 사람을 박아넣겠다는 제기를 해왔는데 내가 동의했다고 전하고 들여보낼 사람들문제를 같이 토의하라고 하시오. 그다음 룡정에서 전날 말이 있던 그 땜쟁이같은자가 세명정도 장악됐다는데 직접 대상을 료해확인하고 대책을 세우며 녕안현당비서 김책을 찾아서 나와 련계를 짓도록 하라고 하시오. 차광수가 안전문제때문에 꺼릴수 있는데 이것은 광활한 땅에서 우리의 구상을 펼치자는 중대한 문제이기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집행돼야 한다고 말하시오. 그다음 돈화로 가면 됩니다. 내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옥섬은 시험을 치르는 아이처럼 눈을 감고 잠시 입안에서 외우다가 또박또박 말했다.

《명월구에 나가 허재률동지를 만나겠습니다. 거기서 며칠 기다리다가 차광수동무가 오면 첫째 리광동지를 만나고 2구공청비서 김중권동지를 만나 저… 구국군…》

옥섬은 또 잠시 눈을 감고 더듬거리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고무하시듯 머리를 끄덕이시고 정혁은 금시 제입으로 관부대라는 말을 튕겨주고싶은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그의 입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후 옥섬은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흥분해서 말을 더듬거린 벌충이라도 하듯 덤비며 말하였다.

《구국군 관부대에 사람을 박아넣는것을 김일성동지께서 비준하셨으니 그 사람들 문제를 저… 같이 토론하고 그다음, 그다음은 저 그다음은 룡정에서 땜쟁이 세명을 료해하고 처단하… 아니 대책을 세우고 김책이라는 사람을 김일성동지와 만나도록 하라는것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는것은 유격대를 여러곳에 내오는 문제기때문에 위험해도 꼭 데리고 와야 한다고…》

《허허허, 대단하오. 대단해.

김일성동지께서는 옥섬의 손을 잡고 흔드시며 기쁨에 넘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나는 다소 개념적으로 말했는데 옥섬동무는 그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말했소. 100% 합격이요. 그만하면 나도 마음을 놓겠소.

옥섬은 어느새 이마에 송골송골 내밴 땀을 훔치며 가볍게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서향이도 옥섬이가 말을 잘해서 칭찬을 받는다는것을 리해하고 기쁨에 넘쳐 옥섬의 한쪽 손을 꼭 쥐였다.

그들은 김일성동지의 말씀의 내용만 듣고도 자기들의 임무가 얼마나 중요하다는것을 느꼈으며 동시에 김일성동지께서 이름없는 벽촌에 머슴군차림으로 배겨계시지만 실상 광활한 땅에 번져가는 혁명의 불길이 그이의 손길아래에서 그처럼 세차게 타번진다는것을 가슴뜨거운 흥분속에서 느끼는것이였다.

바로 그때문에 사실 이 마차에 타고가는 사람모두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문제-김일성동지의 부강촌공작이 더욱 위태롭게 되였다는데 대해서는 말을 꺼낼 엄두를 못내고말았다.

 

 

17

 

 

안영호는 처가집에서 한 열흘 놀고올 생각이였으나 지대현이를 만나자 그길로 총총히 부강촌으로 돌아왔다. 송강에 나간 첫날 처이모부 장상민이네 집에서 술을 마시며 지대현을 청하러 일부러 마차를 량강구까지 보냈으나 지대현은 소인방이라는 물주와 함께 어디로 나가고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흘만에 제발로 찾아와서 엄청난 말을 하였다. 김일성이 바로 부강촌에 있는듯 하다는것과 지금 량강구에서 공산당의 중요인물들이 모여 회의를 하니 당장 체포해야겠다는것이였다. 그날도 처이모부 장상민네 집에서 지대현이와 함께 밤새 술을 퍼마신 그는 새벽에야 처가집에 나와 하루밤을 더 묵고 이튿날 점심참이 지나서 송강을 떠났다. 열흘 작정으로 온길을 닷새만에 돌아가는것이였다. 밤새 퍼마신 술때문에 지금도 골이 욱신거리고 속이 메슥메슥하였다. 장인, 장모는 혀를 차며 술국을 끓여들이고 베개를 돋구어주면서 하루쯤 더 묵고 떠나라고 붙잡았으나 일단 부강촌에 김일성이 들어와있는듯 하다는 말을 들은 이상에는 잠시도 가만있을수 없었다. 게다가 지대현이 당장 오늘밤에 량강구에 나타난다는 공산당을 잡겠다고 량강구로 나오라는것이였다.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내맡기고 게슴츠레 감겨드는 눈시울을 억지로 뻗치며 안영호는 지금도 그 생각을 검질기게 좇고있었다.

(그까짓 량강구에 나가 공산당을 잡는것은 문제도 아니지만 손바닥만한 동네에 그런 거물이 박혀있다니 무슨 소린지… 암만해도 모를 소리야. 그런데 지대현이뿐아니라 처이모부까지 그건 믿을만한 계통에서 나온 정보라고 장담하지 않았는가. 그러고보면 요즘에 와서 우리 동네가 전같지 않은것만 사실인데…)

암만 생각해봐야 모를 일이였다. 그는 한참 정신을 가다듬고 부강촌에서 누가 김일성이 같은 거물로 변신할수 있을가 하고 하나하나 꼽아나갔다. 그러나 술에 부대껴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지고는 불과 열명도 못꼽아서 왕청같은데로 생각이 달아나군하였다.

(제일 말째게 구는놈은 송남칠이지… 그래, 그놈이 전번에 나한테 목침까지 집어던지지 않았나. 야학문제를 맨처음 들고나온것도 그놈이고… 그놈이 공산주의물이 들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아무도 곧이듣지 않을걸. 그러니까… 그렇다고 남칠이가 김일성일수야 없지 않는가. 허허허, 남칠이가 김일성이라니… 그러니까 엉뚱한 사람의 탈을 쓸수 있지. 대체 김일성이가 나이는 얼마나 됐을가? 아무리 못돼도 40은 됐겠지. 그럼 우리 부강촌에 40이상 되는 사람은 누구누군가? 그건 참 간단하지. 불과 쉬나문 되나마나한데 거기서 로친이 다섯, 여섯…)

하고 안영호는 팔짱을 끼고있던 손을 뽑아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아이구, 할망구들이 이렇게 많다구야. 할망구를 열둘씩이나 뽑아버리고 여기에 정혁이 아버지, 후창포수령감, 그 아래집… 이름이 뭐더라…)

이렇게 꼽아나가던 안영호는 별안간 건들거리던 고개를 꼿꼿이 쳐들었다. 아무 맥락도 없이 장철하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던것이다. 장철하는 영호가 잘 알뿐아니라 자기네 온 집안이 존경을 가지고 대하는 독립군 대장이다. 그런것만큼 의혹을 가질수 없었다. 무엇때문에 40이상 되는 장정을 꼽아나가는 과정에 그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그것은 영호자신도 설명할길이 없었지만 일단 떠오른 그 이름은 뇌리에 깊숙이 박혀 뽑아지지를 않았다.

 (왜 잔치날 그렇게 총총히 돌아갔을가? 김일성이 부강촌에 들어와있다면 혹 장철하가 잔치에 왔다가 그를 만난것이나 아닌가? 들리는 말에는 김일성이 길림청년학생들의 지도자였다고 한다. 그무렵에 장철하도 길림에 있었고 정의부에서도 청년학생운동에 깊이 관련되여있었다. 그렇다면 김일성이 나이가 40씩 될수는 없지 않는가. 참 모를 일이다.

세상에 김일성의 이름이 날린지가 언젠데 아직 40도 안됐다는것은 또 무슨 소린가…)

가냘픈 실머리지만 뭔가 손끝에 붙잡힐듯 하던 생각은 또다시 헝클어지고말았다. 그러자니 골이 욱씬욱씬하는게 머리박죽이 버그러져나가는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오늘 량강구에 나가서 지대현이를 만나면 다시한번 쪼아봐야지, 그 령감이 술김에 무당넉두리같은 수작을 한겐지도 모르지.)

이렇게 자신을 억지로 납득시킨 안영호는 우선 오늘밤 량강구에 데리고갈 보위단원들을 머리속으로 고르기 시작하였다. 자기까지 합하여 서너명이면 되겠다니까 우선 차기득이가 가야 할것이고… 이렇게 생각하다가 될수록 충실하면서도 좀 어수룩한 편이 좋다는 지대현의 말이 떠올라 고개를 기웃거렸다.

《별난놈의 주문이 다 있군.

혼자 소리내여 중얼거린 안영호는 털외투깃을 추켜세우며 진저리치듯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그 일만 아니라면 집에 가서 젊은 안해의 사랑섞인 잔소리와 살뜰한 시중을 받으며 혼곤히 잠들고싶었다. 그러나 다난한 시절에 태여난 청년이 그런 달콤한 꿈만 꿀수는 없었다.

날은 벌써 저물어온다. 어서 데리고갈 단원들을 준비시켰다가 대충 저녁요기나 한 다음 곧 떠나야 할것이다.

자기 집 대문앞에서 마차를 내린 영호는 대문안으로 들어갈 생각도 않고 장모가 꾸려준 보따리를 마부에게 내주며 안방쪽을 향해 턱짓을 하였다. 때마침 아버지에게 불려갔다 나오는길인듯 박일보가 문전에 나타났다.

안영호는 그를 불러세워놓고 아래우로 한참 뜯어보다가 오늘저녁 량강구로 갈 차비를 하고 기다리라고 분부하였다. 그가 보기에 박일보 역시 상범이와 같이 아무렇게나 부려먹을수 있는 어리석은 게으름뱅이였다. 겸하여 그에게 그사이 동네에서 별일이 없었는가고 물어보니 닷새전에 언젠가 왔던 돈화 주대감네 집 마차가 굉장히 고운 처녀 둘을 태우고 오정혁이네 집에 왔다가 간것밖에 다른 일은 없었다고 한다.

안영호는 그 호화마차가 전번부터 동네민심에 파문을 던져놓고 간것이 저으기 못마땅하였으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뜻모를 코방귀만 한번 내불었다. 그리고는 목덜미를 파고드는 쌀쌀한 저녁바람을 피하듯 가재걸음을 치며 어스름이 진연기처럼 자욱히 밀려드는 골목을 걸어갔다. 마차안에서 잔뜩 가드라뜨린채로 언 다리가 가뜩이나 고르롭지 못한 골목의 울퉁불퉁 얼어붙은 빙판길에 걸채여 자꾸만 비틀거렸다. 머리속도 여전히 청청치 못하였다.

《에, !

그는 누구에게라없이 두덜거리며 상범이네 열어젖힌채로 있는 텁수룩한 삽짝앞에 섰다. 수수대로 명색이나 가려보게 둘러친 울바자너머로 눈바람이 휩쓸고간 손바닥만한 마당이 휑하니 비여있다.

《빌어먹을놈, 살림도 더럽게는 살지.

안영호는 자기 수족처럼 마음대로 부려먹는 상범이의 사는 꼴이 새삼스럽게 비위를 돋구어주어서 혼자 욕설을 퍼부으며 비틀비틀 마당에 들어섰다. 찬바람이 태질을 하며 삽짝을 후려쳐서 찌국찌국 갈린 소리로 비명을 질러댄다.

안영호가 막 상범이를 소리쳐부르려는데 안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는 그만하고 올라오라니까. 아래목에 불기운이 돌기 시작했어.

상범이 어머니의 목소리다. 언제부터 죽는다고 소문을 놓더니 아직 검질기게 목숨이 붙어있을뿐아니라 요즘에는 오히려 정신이 총총해진다는 말이 돌아간다. 지금 들리는 목소리만 해도 죽어가는 로친의 목소리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이제 올라가요.

부엌에서 이런 목소리가 울려왔다. 이게 누군가? 암만해도 상범의 목소리같지를 않았다. 영호는 주춤해서 걸음을 멈추었다.

《거 수수대뿌리가 병에만 좋지 않구 끼니도 에울것 같다니까. 한사발 쭉 들이키면 속이 든든해지는게… 기미년흉년때 송기 벗기던 생각이 다 나질 않겠나.

상범이 어머니는 곁에 사람을 두고 하듯 감개어린 회고담을 꺼냈다. 영호는 어리둥절하였다. 말귀도 알아듣기 어렵거니와 도대체 누구와 주고받는 소린지 짐작할수 없었다.

《그것도 낟알건덕지라고 구수한 맛이 있으니 그렇지 허기야 에우겠습니까. 그래도 로인들 병에는 아주 좋다는군요.

《임자가 이 엄동설한에 내 병을 고쳐주겠다고 언땅을 허벼서 수수대뿌리를 캐다가 달여주니 나는 그게 약이 돼서가 아니라 임자 정성때문에 내 몸이 추선다고 생각하네.

《어머니도 참, 저 명월구에서 온 의사선생이 어머니병은 자시지 못해서 생긴 병이지 이름있는 병도 아니라는데 공연히 겁이 나서 그러지요. 이제 봄이 오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농사일도 하게 돼요.

《고맙네. 임자같은 사람이 어디 있을고… 내 아들이 있다지만…》

로인은 말끝을 맺지 못한다. 눈물이라도 짜는 모양이다.

영호는 긴장된 나머지 자기 얼굴이 창백해진다는것을 느꼈다.

목소리의 임자를 짐작한것이다.

군불을 잔뜩 지펴올린 부엌에서 훈훈한 온기가 피여나오고 구수한 냄새가 뜬김과 함께 문짬으로 새여나왔다.

아궁앞에 퍼더앉아 불을 지피고있는 더벅머리머슴 증손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낙네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자기나 부금이 혹은 아버지년배의 어른들에게도 다 호감을 주는 인상적인 웃음을 짓고 부지깽이로 불밑을 쑤시며 부뚜막을 사이에 두고 병들어 누운 안늙은이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있다. 이윽고 솥뚜껑소리가 나더니 《엣 뜨거!》 하는 순박한 목소리가 울렸다. 안영호는 슬그머니 발소리를 죽이고 상범이네 마당을 빠져나왔다. 어떤 무시무시하고 엄숙한 진실앞에 마주선듯 한 예감이 가슴을 꽉 움켜쥐였다. 그는 숨이 가빠서 도저히 한자리에 붙박혀 서있을수 없었다. 지대현이와 처이모부 장상민이가 쑥덕거리던 말, 장철하의 얼굴, 형체도 없이 자기 생활과 자기 목을 누르려드는 공산주의《유령》, 날마다 귀따갑게 들려오는 흉흉한 소문- 한꺼번에 엄청난 련상작용이 일어나서 어마어마한 허구의 세계를 빚어내는듯 하였다. 이런 일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있을수 있는가. 내가 술이 너무 과해서 환장을 해버린게 아닌가. 정신을 차리자. 이러다가 큰 실수를 하겠다…

안영호는 술기운이 한꺼번에 말끔히 가셔졌으나 그대신 너무나 기상천외의 착상에 얼떨떨해져 술에 취한 때보다 더 비틀거리며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시꺼먼 그림자가 마주오더니 우뚝 멎어서서 《아니 부단장님, 어디로 갑니까?》 하고 놀란 소리를 질렀다. 상범이다. 사실은 상범을 찾으러 그 집까지 갔댔고 지금 당장 그를 데리고 량강구로 갈 생각이였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인 타산은 없지만 지금 상범을 량강구에 데리고갈 충실하고 어리숙한 축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상범인가? 모두들 보위단실에 있는가?

안영호는 건성으로 묻고 상범의 대답을 듣기도전에 걸음을 옮겨놓았다.

세상에 소문높은 공산당의 수령 김일성, 그가 과연 오정혁이네 머슴군 증손이란말인가? 이게 실지 현실에 있을수 있는 일인가. 지금 세상은 홍길동이가 돌아치던 시절도 아니고 림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가 환생하던 세상도 아니다. 그러나 안영호의 뇌리에는 불을 지피듯 선명하게 아로새겨지는 형상이 떠올랐다. 장철하가 처음 부강촌에 오던 날 오정혁이네 사랑방앞에 저 증손이가 나타났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장철하는 분명 이상한 충격을 받고 그 젊은 머슴군에 대해 캐여물었었다. 그가 불시에 잔치판에 랭수를 끼얹으며 돌아가겠다고 정신없이 나설 때도 지금 생각하면 사랑채 울밑에 저 증손이가 나타났었다. 그러고보면 증손이가 이 동네에 들어설 때도 그가 김일성이라는 가정하에서만 설명되는 현상들이 한두가지만 일어난게 아니였다. 오정혁이가 룡정에서부터 좌익학생운동에 관련되여있은것을 영호는 진작부터 알고있었다. 최근에 와서 그 집에 묘령의 녀자손님들이 굉장한 호화마차를 타고 자주 드나든다는것도 우연한 일이라고 볼수 없다. 그러고볼 때 이제는 오직 그렇게밖에 설명할수 없는 그것을 어떻게 여태까지 생각 못했는가 하는것이 이상스러울 정도였다.

영호는 흥분때문에 숨이 가빴다. 김일성이 자기 손아귀에 들었다하고 생각하니 이제는 어떻게 이 흥분을 진정시키겠는가 하는것이 근심스러울 정도였다. 서뿔리 다쳐서는 안될것이다. 놓친다든가 저항이 있을수 있다든가 하는 현실적인 타산때문이 아니라 골수에 사무친 공산주의에 대한 원한을 어떻게 갚을것인가 하는 잔인한 복수심이 가쁘게 달아오르는 흥분을 식혀주었다. 자기의 순진한 꿈을 롱락하고 짓밟은 공산주의, 더러운 출세욕과 무절제한 생활때문에 부슥부슥해진 대진내나는 터럭손을 뻗쳐 자기 사랑의 순결한 육체를 더럽히고 끝내는 갓난애의 목을 조이듯 아름다운 처녀를 죽음에로 내몬 철면피한 야수, 온갖 위선과 허위가 희멀끔한 인간형상으로 뭉쳐진것이 바로 영호의 반생을 망쳐놓은 공산주의였다. 그 공산주의가 또다시 자기 생활의 턱밑에 다가섰다. 그러나 이제는 그 순진하던 중학생시절처럼 자기의 귀중한것을 다 섬겨바치고 흉곽이 우물어들도록 짓밟혀서 피를 토하지는 않을것이다. 아니다. 이번에는 내 손으로 공산당의 수령을 잡아내여 아직도 세상청년들을 현혹시키고있는 공산주의의 추악한 진실을 만천하에 고발할것이다.

안영호는 흥분한 나머지 보위단실에 가서도 두서없이 돌아치다가 겨우 차기득이에게 박일보와 김영택이 두사람을 준비시켜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집으로 오라고 이르고는 돌아갔다. 집에 와서도 그는 상례를 벗어난 행동을 하였다.

전에없이 닭장에 닭을 몰아넣느라고 덤벼치다가 오히려 장닭 한마리를 울밖으로 날려보내는가 하면 저녁상을 들고 들어오는 안해를 불이 이는 눈으로 쏘아보는바람에 아직 시집살이에 치여나지 못한 안해가 당황한 나머지 문지방에 걸려 상을 엎지르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처가에 다녀왔으면 갔다온 전말을 어른에게 아뢰는 법이지 인사조차 없으니 이런 후레자식이 어디 있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르고 부금이도 어딘가 동뜬것 같은 오빠를 이상한 눈길로 뜯어보았다.

(, 이제 두고보아라. 그것이 무엇때문인지 래일이면 알게 될것이다.)

안영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차기득이네를 데리고 량강구로 떠났다.

지대현이가 그처럼 중요한 일이라고 력설한 일이지만 맞다들고보니 어디라없이 수상쩍은것이 느껴지는 음산하고 시시한것이였다.

지대현은 약속한 음식점에서 그들을 기다리고있다가 장거리 한끝에 자리잡고있는 중국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겉보기는 퇴락하기 시작한 집이였으나 육중한 대문을 지나 안마당에 들어서니 잘 손질된 깨끗한 곁채가 나타났다. 거기서 말쑥한 다부산자차림의 젊은 주인이 나타났는데 이름을 소인방이라고 불렀다. 얼굴이 백랍같이 창백한것이 어딘가 섬찍한 느낌을 주는 사람인데 살룩살룩 한쪽다리를 절었다. 그는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더니 안방에 데리고들어갔다. 얼굴이 희좁게 생긴 체소한 조선사람이 술내를 풍기며 권총소제를 하고있다가 아니꼬운 눈초리로 그들을 맞이하였다. 지대현이가 삼원포에서 파견되여온 국민부 행동대원 최용필씨라고 소개하였다. 그밖에 바지저고리를 입은 두사람이 더 있었으나 그들은 벙어리같이 일체 말이 없었다. 조선바지저고리를 입기는 했으나 어딘가 조선사람 같지 않은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일부러 입을 봉하고있는지 몰랐다.

안영호는 소인방이라는 중국사람이나 이 국민부 행동대원이라는 인간이나 다 깨끗한 인간같지 않은 느낌을 주었으나 그런 내색을 할수도 없어서 그저 눈치만 살폈다. 일은 주장 최용필이라는자가 나서서 꾸미고 지대현이와 소인방이는 뒤전에서 보기만 하는데 최용필이가 이러저러해서 옷을 갈아입고 가야 한다든가 행동시간은 밤 1시인데 그사이 여기서 기다리되 절대 바깥출입을 말아야 한다든가, 오늘 사로잡게 될 공산당은 공산당가운데서도 위험인물들인만큼 추호의 동요도 없어야 하겠다든가 하는따위 주의사항을 늘어놓을 때마다 소인방의 눈치를 살폈다. 모든 거동과 분위기로 보아 사실상 오늘 일을 주관하는것은 호인같이 친절하게 구는 절뚝발이 소인방이며 지대현이나 최용필은 그의 수족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쉽게 느낄수 있었다.

안영호는 최용필이가 하는 말가운데 석연치 않은것이 있었으나 그의 사색은 계속 부강촌에 들어온 김일성의 생각에 쏠려 그 모든 일이 다 하찮은 일로만 생각되였다.

소인방은 기다리는동안 무료하겠다고 푸짐한 술상을 차려들였다. 처음에는 꼿꼿이 앉아있던 차기득이는 술상을 보자 성미를 누그러뜨렸다. 같이 데리고온 박일보, 김영택이는 다같이 어리무던한 축인데다 술이라면 오금을 못펴는 위인들이라 게걸스레 술잔을 들이키고 안주를 널었다. 자정이 지나자 술과 안주로 배를 든든히 채운 일행은 벙어리같은 두사람과 꼭같이 조선바지저고리로 변복을 하고 캄캄한 거리로 나섰다. 집을 나서면서 보니 지대현은 대문을 열어주고는 그대로 마당안에 남아서 빗장을 질렀다. 결국 공산당원들이 모여서 무슨 음모를 꾸민다는 현장으로 가는것은 소인방이와 최용필이 그리고 벙어리같은 조선바지저고리의 두 청년에다 안영호네 일행 합해 여덟사람뿐이였다. 안영호는 속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량강구에는 우사령네 큰 부대가 있는데 우리 여덟사람이서 처리할 대상이라면 우사령네 부대에서 얼마든지 처리할수 있을것이 아닌가. 하필 추운 날 부강촌에서까지 사람을 불러댈 까닭이 무언가, 더구나 이런 추운 날 털외투를 다 벗기고 조선옷을 꼭 입어야 한다는것은 무언가? 아무리 상대가 조선공산주의자들이기때문에 접근하기 좋게 한다지만 총을 들고 들이대는데야 그런 잔꾀를 피울 필요가 어데 있는가, 안영호는 국민부 행동대원이라는자가 생기기부터 좀상스럽게 생겼더니 일도 시시하게 꾸민다고 생각하면서 그자를 흘겨보았다. 그런 눈치라도 챘는지 최용필은 어둠속에서 맺고끊듯이 속삭였다.

《이젠 일체 말을 해서는 안되오. 여기서 우물우물하다가는 공산당의 탄알에 맞아죽을줄 아오. 얼씬하는놈은 무작정 쏘아제껴야 한단말이요.

차기득이 주춤하며 물었다.

《그놈들을 사로잡는게 아니고 죽이는가요?

《사로잡아서는 뭘하겠소. 여기것들은 공산당중에서도 그중 위험하고 질이 나쁜것들이요. 여기놈들을 하나씩만 요정내면 여느 공산당 백명을 잡은것과 맞먹는다고 볼수 있소.

박일보, 김영택이도 고개를 기웃하였으나 취기가 걷잡을수 없이 밀려오는데다 괴괴한 겨울밤에 사람을 잡으러 나섰다는 생각에 눌려 무슨 말을 번지지 못하였다. 안영호부터가 무엇에 홀린것 같기도 하고 진창에 빠진것 같기도 하여 꼭 가위눌린것 같은 사색을 가누어낼수가 없었다.

《여기요.》 하고 최용필이 어느 담장밑에 몸을 숨기며 수군거렸다. 담장은 토피로 쌓은것인데 꽤 든든하고 높직해보였다. 담장을 넘어서면 바로 방인듯 창문으로 새여나오는 불빛이 희미하게 비쳐 담장꼭대기에 총총히 박아놓은 유리쪼각들이 반짝반짝 빛을 뿌렸다.

《내가 먼저 담장에 올라설테니 뒤따르오. 공산당은 여섯놈인데 한두놈 더 있을수도 있소. 모두 요정내고는 앞대문으로 빠져나와야 하오. 대문은 내가 열겠소.

최용필은 이렇게 말하더니 어둠속에서 담장밑을 더듬었다. 언제 차비해놓았는지 굵직한 기둥감이 놓여있다. 그것을 소리 안나게 담장에 걸쳐놓은 최용필은 손짓으로 잡으라는 시늉을 하고는 날쌔게 담장으로 기여올라갔다. 이어 시종 말없는 국민부 행동대원이라는 두자가 올라가고 차기득이, 박일보, 김영택이가 뒤따랐다. 안영호가 올라가자 마감으로 소인방이가 불편한 다리로 조심조심 올라오며 사위를 경각성있게 살폈다.

안영호가 담장우에 올라서려는데 최용필은 벌써 담장밑으로 몸을 날리더니 덧문을 걷어차며 방안으로 뛰여들었다.

《이 공산당놈들! 꼼짝말앗!

이런 쇠된 웨침소리에 이어 꽝, , 총소리가 울렸다. 갑자기 환하던 불이 탁 꺼졌다.

그때야 담장에서 뛰여내리던 안영호는 한순간에 수라장이 된 방안에서 누런 군복을 본듯 하였다. 그러나 다음순간 불이 꺼졌기때문에 그런 인상을 확인할 길도 없었고 생각을 가다듬어볼 여유도 없었다. 바로 눈앞에서 총소리가 터져오르고 불꽃이 벙끗벙끗 하였다.

《앞마당으로 뛰여라!》 이런 중국말이 터져나왔다. 여기에 중국공산당도 섞였는가, 이런 생각을 하며 안영호는 소리나는쪽을 향하여 어방대중 권총을 발사하였다.

한참 정신없이 총질을 하다가 빨리 철수하라는 최용필의 거친 목소리를 듣고 허둥지둥 앞대문을 빠져나왔다. 목에 겨불내가 나도록 달려서 들어가던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총소리를 듣고 우사령부의 순찰병들이 우당탕거리며 달려가는것이 보였다.

큰길에 나와서야 박일보와 소인방이 보이지 않는다는것을 깨달았다.

《박일보 못봤어?

안영호가 꽥 하고 소리치니 차기득이는 두리번두리번 사위를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저기 가는게 누구요.

아닌게아니라 저쪽 골목길로 부지런히 걸어가는 그림자가 보였다.

《저기 가는군.

최용필이 빨리 뒤따르라고 손짓하였다.

그러나 안영호는 어둠속에서도 멀어져가는 그 사람의 걸음걸이가 살룩살룩한다는것을 가려보았다.

《저건 아니야. 집주인이야. 박일보를 못봤어?

안영호가 날카롭게 소리치니 김영택이가 우물우물 대답하였다.

《대문까지 분명 따라나왔는데요. 난 나보다 먼저 나간줄 알았어요. 어디 갔을가? 여- 박일보.

김영택이 어둠속에 대고 소리를 지르자 최용필이 당황해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정신있소? 순찰병들 못봤소?

《순찰병들이 봤다는데는 어떻단말이요?

안영호가 발끈해서 대들었다.

《허- 이런 팔부짜리가 보위단장이라… 여보 당신 사람 죽이고도 무섭지 않아.

《뭐 사람을 죽여?

그제야 안영호는 기가 질렸다. 그가 주춤거리는 사이 최용필은 씹어삼키듯 반말질로 내뱉었다.

《빨리 달리지 못해! 그자식은 살았으면 래일 우사령부에 가서 찾아오면 될것이고 죽었으면 하는수없는 일이지. 우거지상을 하고있으면 무슨 수가 있어?

안영호는 비로소 자기네가 사나운 독수에 걸려들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몸부림쳐봐야 빠져나갈길이 없었다.

기가 질려 장거리뒤에 있는 그 음침한 집에 돌아오니 한걸음 먼저 도착한 소인방이가 여전히 친절한 표정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안영호에게는 그 웃음짓는 상판이 요귀의 탈처럼 느껴져서 진저리가 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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