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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석윤기 (제20회) 제 2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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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하는 량강구에 거의 다 들어서서야 자기가 부랴부랴 부강촌을 떠나게 된 까닭을 찬찬히 생각해보았다. 본시는 그렇게 훌쩍 떠날 생각이 아니였다. 안윤재가 놀아나는것이 두루 맞갖지 않는데다 술기운이 번져 그런 망발을 했는가, 몇백리밖에서 일부러 찾아온 중매애비가 하필이면 잔치날 한밤중에 느닷없이 달려나온것은 아무래도 온당한 일이 못되였다. 장철하는 모를 때라면 몰라도 일단 상대를 알아본 이상 김성주와 한지붕아래에서 하루밤은 고사하고 단 반시간도 얼굴이 뜨거워 견디지 못할 심정이였다. 한때 자신은 년장자로서 그에게 독립에 대해 떠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운이 더욱 핍박해지고 사람들의 생사존망이 기약하기 어렵게 된 마당에 자기는 자기 목숨 하나를 보존하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체모도 의리도 다 헌신짝처럼 짓밟아버렸다. 그런 자기를 너무나 잘 알고 직접 마주서서 대결한 김성주가 오늘 부강촌에서 머슴을 살면서 여전히 나라를 다시 찾자고 그토록 애를 쓰고있는데 옛독립군중대장인 자기는 부유한 기업가가 되여 호사스런 잔치의 주빈으로서 술상을 마주하고 가무에 취해있다. 이것을 차마 어찌 견딜수 있는가. 족제비도 낯짝이 있다더라. 장철하는 안윤재일가의 놀라움과 만류를 단호히 물리치고 훌쩍 잔치집에서 빠져나올 때까지는 미처 똑똑히 의식하지 못한 생각들을 하나하나 갈무리해보았다. 역시 그때 그렇게 뛰여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안윤재네 사랑방이나 혹은 오별장네 집에서 밤을 묵게 되였다면 량심의 몸부림때문에 잠들수 없을것이며 잘못하면 그런속에서 김성주의 정체를 본의아니게 드러내는 망발을 저지를지도 몰랐을것이다. 량강구거리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밤이 깊었다. 길가의 객주집에서 려장을 풀었지만 종시 잠을 청할수 없었다. 부강촌을 떠날 때 기분 같아서는 곧장 교하로 돌아갈것 같았으나 하루밤을 새우며 고실고실 갈마드는 생각에 시달리고보니 불시에 잔치집을 빠져나온 때와 꼭같은 생각으로 해서 그냥 안도땅을 하직할수 없다는 심정에 사로잡혔다. 머지 않은곳에 성주 모친이 병고에 시달리고있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성주 당자와는 감히 마주 대할 배심이 없었지만 강반석녀사에게는 직접 신세를 지기도 했고 김형직선생과의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안도땅까지 와서 그냥 문전을 스쳐지나칠수 없었다. 게다가 안도땅은 그자신 한창시절에 독립군들을 데리고 돌아다닌 인연깊은 고장이요 만나보고싶은 친지도 많은 곳이였다. 장철하는 아침 일찌기 조반을 시켜먹고 길을 떠나 곧장 송강거리에 들어섰다. 낯익은 물산객주집에 들리니 강반석녀사일가는 년전에 흥륭촌으로 농사를 지으러 갔다가 다시 거리로 들어왔으나 얼마전에는 또다시 소사하 무주툰으로 이사를 가더니 지금은 그곳에서도 자리를 옮겨 토기점골이라는데서 산다더라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장철하는 점심후에 송강거리를 나섰다. 그곳에서 토기점골까지는 불과 몇마장 안된다는 말을 듣고 길도 좋지 않기에 마차를 세워둔채 걸었다. 객주집사람이 가르쳐준대로 묵은 갈대와 억새가 눈바람에 설렁거리는 얼어붙은 개울을 따라 한시간나마 걸었으나 마을이라 할만 한것은 아무데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눈이 쌓여있어서 초원에 외롭게 트인길은 사라졌다 이어졌다 하다가 어느 풀숲에서 흐지부지되고말았다. 그러나 이고장 지세에 밝고 또 독립군시절에 험한 길을 무수히 걸어본 장철하는 별로 당황해하지 않고 어렴풋한 짐작을 따라 곧장 걸음을 옮겨놓았다. 마음속에는 집을 바로 찾아내겠는가 하는 걱정은 없고 그저 강반석녀사를 정작 만나면 어떻게 첫 인사를 하며 옭맺혔을 그 어진 마음을 무슨 말로 풀것인가 하는 걱정만 앞섰다. 무작정 빌었다고 그 결곡한 성미에 나를 용납해줄것인가, 비루한 인간으로 침뱉는다 해도 어쩔수 없는 일이다. 자고로 사람은 궁도에서 알아본다고 한다. 실지 나라는 위인이 좋은 시절 술자리에서나 사귈 인간이지 어려운 때 뜻을 같이할 인물은 못되는지도 모른다. 장철하는 번거로운 생각에 무작정 눈덮인 초원을 헤쳐가는사이 종시 길을 잃고말았다. 발재툰방향으로 짐작되는 꽤 높은 야산기슭의 이깔나무숲속에서 흐지부지 없어지고만 길을 되짚어 돌아나오며 비로소 토기점골이라는것이 동네라 할만큼 인가가 모인곳이 못된다고 하던 객주집 주인의 말을 상기하였다. 갈대가 거칠게 자라서 길을 넘는데 이런 황량한 초원에서 몇채 외롭게 들어앉은 오두막을 찾아낸다는것이 헐치 않으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높은곳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가릴것도 없는 평지초원이라 집을 쉽게 찾을수도 있을것 같아 앙상하게 헐벗은 이깔나무숲을 헤쳐나갔다. 산속에는 눈이 더 깊었다. 인적드문 숲속에 내려쌓인 눈은 겉은 퍼러스름하게 얼어붙었으나 정작 밟으면 풀썩하고 허물어지면서 무릎까지 빠져들었다. 마차를 타고 나들이 떠나온 점잖은 행색으로는 함부로 들어설곳이 못되였다. 한참 신고하며 올리막을 톺아오르는 사이 숨도 가빠올랐다. 《어허, 이제는 늙었군.》 장철하는 소리내여 혼자말을 하였다. 몇해전만 같으면 이런 메등쯤 소금가마니를 메고 달려도 호랑이처럼 펄펄 날았을것이다. 그사이 나이를 먹어서보다 호사스러운 생활에 정신은 나약해지고 몸에는 비게가 끼여서 몸과 마음이 모두 살진 암퇘지꼴이 되였다. 장철하는 자기의 한심한 몰골을 비로소 랭철한 눈으로 살펴보게 될수록 기가 꺾이여 더는 걸을 맥도 없어졌다. 그는 마침 가로누운 진대통이 나타나자 대충 눈을 털고 그우에 털썩 주저앉았다. 권연 한대를 붙여물고 사위를 둘러보니 아까 산기슭에서 보던 나무숲이 앞을 막아 전망은 더 나빠졌다. 산꼭대기우에 올라가봐야 동네를 찾아낼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그 역시 한심하게 느껴졌다. 《내가 독립군에서 물러나기를 잘했지. 산세 하나 가려볼줄 모르는것이 군사를 거느리고 어찌할것인가. 하기는 독립군이라는것이 정작 왜놈들과 싸움을 하자고 잡도리한적이 있기나 했던가.》 장철하는 어떤 허무감에 사로잡혀 풀썩풀썩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앙상하게 헐벗은 이깔나무우듬지가 뿌연 재빛하늘을 배경으로 가볍게 떨고있었다. 하늘은 연한 구름발로 잔주름이 잡혔는데 그역시 몇억겁을 잘못 살아온 자기의 죄책감때문에 그렇게 울적한 표정으로 침묵에 잠겨있는듯 하였다. 《한생을 잘살기란 헐치를 않어.》 장철하는 그 하늘을 위로하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에 대한 대답이기나 한듯 땅- 하는 총소리가 울려왔다. 장철하가 흠칫 놀라 일어나는데 또 한방의 발사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첫번째 총소리는 일본제 신식보총소리요 두번째것은 구식토퉁소리였다. 장철하는 일어난채로 어쩔것인가 질정하지 못하여 망설였다. 대체 무슨 총소린가? 누가 총을 쏘는가, 산속에서 나는 총소리가 사냥총소리가 아니라면 필시 군대가 분명한데 그가 알기에 아직 왜놈군대는 안도땅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사령의 구국군이거나 무한장의 보위단일수 있다. 그러나 두번 울린 총소리가 각각 다른것으로 보면 여러가지 총을 가진것이 분명한데 우사령의 군대가 토퉁을 가지고있을것 같지 않고 안도8개 동네의 보위단 단장으로 뽐내고 돌아간다는 대지주 무한장의 가병이라 해도 그렇게 잡색총을 메웠을것 같지 않다. 혹시 이 근방을 어스벙거리다가 무지한 토비들한테 걸려 봉변이나 당하지 않을것인가. 장철하는 슬그머니 털외투자락을 헤치고 옆차기의 권총을 더듬어보았다. 그리고 총소리 나던 숲속을 향하여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놓았다. 몇걸음 못가서 또 한방의 총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아까 울린 총소리와는 또 다른 신식보총소리였다. 장철하가 산굽이를 하나 돌아드는사이 총소리는 연방 울렸다. 그가운데는 보총소리뿐아니라 사냥총소리도 나고 권총소리도 섞여있었다. 산굽이를 돌아서니 이깔나무숲은 끊어지고 삼태기처럼 패워들어간 공지가 나타났다. 총소리는 바로 그 공지에서 산쪽을 향하여 발사하는 규칙적인 소리였다. 장철하는 그 골안에 들어서기 전에 벌써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격훈련이라는것을 짐작하였다. 이미 군사와 인연을 끊은지 오랜 정미소주인이 총소리에 호기심을 느끼고 이렇게 눈덮인 산속을 헤덤비며 뛴다는것은 어느모로 보나 격에 맞지 않는 일이였다. 장철하자신도 그렇다는것을 느끼고 몇번인가 걸음을 멈추었다. 잘못하면 의심을 살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떠올랐다. 그러나 호기심을 누를수는 없었다. 총소리를 듣자 그의 온몸에서는 피가 끓었다. 장철하는 나무그루사이를 누비며 공지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등성이에 나섰다. 우묵하게 산턱을 파고든 그 공지에는 스무나문명되는 장정들이 줄을 지어 서있고 그앞에 한사람이 무릎을 꿇고앉아 맞은편 산턱에 외따로 서있는 강대그루터기를 가리키며 무엇인가 열심히 말하고있다. 어깨에 받친 총탁판을 두드리며 눈과 총신의 수평을 몇번이고 내그어보이는것이 사격자세와 탄도의 원리를 설명하고있는것 같다. 그 사람의 복장은 전날 독립군들이 입던 허름한 군복인데 대렬에 선 사람들은 학생복이 많고 더러는 조선바지저고리에 행전을 치고 허리를 보통혁띠로 졸라맸다. 모자도 털모자며 새총쟁이모자가 있는가 하면 학생모도 있고 더러는 맨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인 사람도 있다. 옷은 어쨌거나 모두 조선사람들이라는것이 첫눈에도 알렸다. 장철하는 무턱대고 반가왔다. 장백에 나가있던 리재우중대가 왜놈《토벌》을 맞아 괴멸되였다더니 혹시 그 잔여분자들이 어떤 반연으로 안도땅에 옮아앉은것인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서 더구나 무심히 볼수 없었다. 어쨌든 저들이 조선군사인것만 틀림없다. 장철하는 공연히 덤비며 공지로 내려갔다. 음달에 깊숙이 박혀있던 얼음버캐에 발이 미끄러져서 두어바퀴 딩굴다가 일어나니 아래에서 사격훈련을 하던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이쪽을 겨누고있었다. 그 눈길에 어리는 엄격한 빛을 느끼고서야 장철하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먼눈에도 그들의 모습에서는 때국이 흐르던 그 옛날 독립군들의 주제는 찾을래야 찾을길이 없었다. 그대신 하나같이 팔팔한 생기와 약동하는 젊음이 느껴지고 비록 옷차림은 각각이지만 무장한 군사들에게서만 풍겨오는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사람을 압도하였다. 장철하가 주춤거리자 훈련을 지켜보던 안경쓴 학생복의 청년이 한사람을 시켜 이쪽으로 보냈다. 털모자의 귀덮개를 토끼귀처럼 너풀거리며 달려오는것을 보니 틀림없이 잡으러 오는것이다. 장철하는 잘못 걸렸구나 생각하고 제발로 맞받아갔다. 《당신 누구요?》 달려온 청년은 대여섯걸음앞에서 걸음을 딱 멈추더니 절컥 하고 총을 내대며 야무지게 소리쳤다. 털모자의 귀덮개가 한쪽만 내려덮이고 다른 한쪽은 쳐들린채 있는것이 그 젊은이의 애티를 강조해주었다. 《나 장철하라는 사람이요. 수상한 사람은 아니요.》 《묻는 말에나 대답하시오. 어디서 사는 사람이요? 무얼하는 사람이요?》 장철하는 사과알같이 볼이 붉은 그 청년의 눈에서 그 어떤 적의가 풍기는것을 감촉하자 어쩐지 구슬픈것을 느끼며 두서없는 대답을 하였다. 《교하에서 잔치보러 부강촌에 왔댔소.》 《무얼하는 사람인가말이요.》 《무얼 하다니?》 《직업이 없소?》 《직업? 아 참, 교하에서 정미소를 벌려놓고있소. 나도 본시는 안도땅에 살댔소.》 《어디로 가는길이요?》 《교하로 돌아가는길에 아는 집을 찾아볼가 하고 이리로 왔소.》 《여기에 무슨 집이 있단말이요? 대체 어디로 가는길이요?》 보매는 애티가 어린 애젊은 청년인데 인정사정없이 다그쳐댄다. 《토기점골이라는 동네를 찾아가는데 생소한 길이다보니 길을 잘못 든것 같소.》 장철하는 차츰 더 랑패감을 느끼며 허둥지둥 섬겼다. 《토기점골? 토기점골의 누구를 찾소?》 《혹시 알겠는지, 그곳에 김성주라고 길림 나가 공부하는 청년네 집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뭐 김성주? 김성주를 어떻게 아오?》 《김성주를 좀 알지요. 그러나 지금 찾아가는것은 김성주가 아니라 그 사람의 모친이 토기점골에서 산다길래 찾아가는길이요.》 청년은 의심쩍은 눈초리를 굴리며 장철하를 아래우로 다시한번 훑어보더니 아까보다 더 야무지게 소리쳤다. 《동네를 찾아가는길이면 곧장 찾아갈것이지 여기는 왜 기웃거리오. 당신 이름이 장 뭐라고?》 《장철하요. 여기 들린것은 사실 사람을 만나 길을 물어볼 생각도 있었고 또 조선청년들이 총쏘는 훈련을 하는걸 보니 감격이 커서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됐소. 난 수상한 사람은 아니니 량해해주오.》 둘이 한참 주거니받거니하는데 저 아래서 안경쓴 청년이 올라왔다. 《영배동무, 내려가보오.》 안경쓴 청년은 어딘가 피곤이 어린듯 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면서 단단히 총을 틀어잡고있는 젊은이의 어깨를 툭 쳤다. 《수상한 늙은입니다.》 영배라고 불리운 그 청년은 총대를 꼬나잡은채 귀전에 대고 속삭였다. 그 소리가 장철하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알겠소. 내가 아는 사람이요. 내려가서 박훈동무를 올려보내시오. 그리고 동무들은 묘준훈련을 계속하오.》 《알겠습니다.》 영배라는 청년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잘 납득이 안가는지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뜨직뜨직 내려갔다. 장철하도 안경쓴 청년이 어딘가 낯이 익다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차광수였다. 김성주가 길림 덕승문밖의 자기 집에 하숙하고있을 때 자주 찾아오기도 했지만 길림청년학생운동의 지도적인물의 한사람이기때문에 장철하로서는 좋은 의미에서나 나쁜 의미에서나 관심이 컸던 인물이였다. 《장선생님, 오래간만입니다.》 차광수는 어딘가 찬기운이 풍기는 목소리로 정중하게 말하였다. 반가와서 한걸음 다가가던 장철하는 그 정중성밑에 깔려있는 모멸감을 감촉하고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차광수가 자기에게 호의를 가지고 대할 까닭이 없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그는 이름난 공산주의자로서 바로 김성주의 바른팔이나 같은 사람이다. 《참 오래간만일세. 이런데서 차군을 만날줄은 천만뜻밖이군.》 장철하는 자기가 점점 궁지에 몰려든다는것을 느끼며 어떤 체념이 어린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했다. 《정말 뜻밖입니다. 장선생님이 우리 훈련을 보러 오리라고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차광수의 랭철한 말속에는 가벼운 비양기가 느껴졌다. 하기는 차광수가 그쯤 교양이 있는 사람이니 그만하지 그렇지 않다면 면대해서 상욕을 퍼부은들 할 말이 없을것이다. 《그러나저러나 수고가 많네. 그래 저 사람들은 무슨 사람들인가? 듣자니 자네들이 유격대를 뭇고있다고들 하던데 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인가?》 《사실 선생님이 아니라면 그런 질문에 대답해드릴수도 없고 오히려 비밀구역에 함부로 들어선데 대해 톡톡히 값을 받아내겠지만 선생님한테야 그럴수가 있습니까. 전날 우리 김성주동무가 교하에 갔을 때 선생님이 했다는 말을 우리도 전해들었습니다. 그 말을 뼈에 새기고 우리는 우리의 주장을 기어이 실천하려고 나섰습니다.》 차광수는 장철하를 곧바로 바라보며 맺고끊듯이 말했다. 《음, 알만하네.》 장철하는 신음소리처럼 말뜻이 분명치 않은 웅글은 소리를 중얼거리며 눈길을 피했다. 그러다가 별안간 고개를 들고 조급하게 말했다. 《내가 교하에서 성주 그 사람을 푸대접한것은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일을 한것이 사실이네.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가슴에 맺혀 내려가지 않기에 안도땅에 들어서기가 쉽지를 않고 한번 들어서고보니 가볍게 돌아서지지를 않아 이렇게 사람의 도리를 물으며 헤매고있네. 허나 시국을 두고 론하자면 그것은 딴 문제이네. 내가 이자리에서 자네들의 장한 모습을 보고 비록 느껴지는바가 적지를 않다 해도 그것으로 곧 내 소신을 뒤엎을 생각은 없네. 천하는 자네들 몇몇 젊은이들의 혈기에 의해서 좌우되는것이 아닐세.》 방금까지 갈팡질팡하던 장철하의 어조는 말하는 사이에 대가 꿋꿋해지고 어느 정도 뻔뻔스러워지기까지 하였다. 그런 장철하를 볼수록 차광수의 마음속에서는 역증이 치받쳤으나 그는 이미 론쟁자체에 흥분할 때는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웃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어떤 권고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자리를 빨리 떠나주시고 일후 어디서 누구에게나 여기서 보신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것이 좋겠다는것만 귀띔해드립니다. 이 말은 무슨 권고가 아닙니다.》 《그럼 위협인가?》 장철하는 울컥해서 부르짖었다. 《옛날 독립군에도 규률이 있고 비밀이 있었겠지요. 우리는 일제를 반대하여 총을 들고나서라는 우리 호소에 2천만인민이 모두 가슴을 치고 일어나는 때 유독 홀로 외면해 돌아앉아있는 선생님을 이 이상 더 친절하게 대할수는 없다고봅니다.》 《흥, 2천만 인민이 모두 일어나?》 장철하는 궁지에 몰려들수록 꿰여져나오는 자기의 말투를 자신도 주체하기 어렵다는것을 느끼며 천성처럼 코웃음을 쳤다. 차광수는 날카롭게 가로쏘아보았으나 인차 침착해지면서 마침 산턱으로 달려오는 박훈을 눈길로 가리키며 말했다. 《선생님의 태도는 좋지 못합니다. 나와의 친분관계가 저 열혈청년들의 분노를 다 가라앉혀주지 못할수도 있다는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저기 오는 사람은 박훈인데 기억이 나십니까? 기억이 나시겠지요. 그럼 잠간 만나보시고 인차 떠나십시오.》 차광수는 그길로 휘적휘적 내려가버렸다. 저만치 올라오던 박훈은 어기는 길에 차광수가 몇마디 하는 말을 듣고 인차 장철하라는것을 알아챈모양 반갑게 달려올라왔다. 몇해전 황포군관학교를 마치고 당시 화전에 있던 정의부중앙으로 찾아올 때의 모습이 방불하였다. 다만 그때는 중국관내에서 변복을 하고 나오다나니 지숙한 인상을 주었는데 지금은 아래턱에 구레나룻이 거밋거밋한데다가 누르스름하게 퇴색한 독립군군복을 입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대한 체구의 어디서나 젊은 청년의 생기가 풍겨오는것이였다. 찬바람속에 딩굴다나니 볼편의 살이 푸르죽죽하게 얼고 터실터실 갈라졌으나 어딘가 장난궂은 소년이 놀음에 정신이 팔려 추위도 배고픔도 다 잊어버린것과 같은 어떤 열중이 느껴졌다. 일순 장철하는 자기에게서 이미 다 없어진 그것들을 그가 너무나 풍부히 가지고있는데 대해 놀라움과 부러움을 함께 느꼈다. 《이사람, 박훈이》 장철하는 제먼저 소리치며 그의 손을 반갑게 잡아흔들었다. 《중대장님, 참 오래간만입니다. 교하에 계신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나왔습니까?》 《두루 일이 생겨서 그렇게 됐네. 그래 내가 교하에 있다는 말은 누구한테서 들었나?》 장철하는 박훈이가 자기 생활을 어느 정도 알고있는가 하는것이 궁금하여 눈귀를 조프리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물어놓고보니 자기라는 인간이 이제는 젊은 사람들앞에서조차 이런 롱간을 부리게 된것이 역하게 느껴졌고 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훈은 그런 눈치를 전혀 못채고 고개를 기웃하며 말하였다. 《글쎄요. 누구한테서 들었던지 딱히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그야 누구한테서 들었던지 상관이 있습니까. 조선사람치고 선생님이야기야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때 화전이랑 길림에서 활동하던 분들중 벌써 적지 않은분들이 희생도 되고 잡혀가기도 했더군요. 이번 9.18사변에 나머지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그렇게 됐네. 송암 오동진선생은 령어에 사로잡혀 벌써 몇해째 옥고를 겪고있고 우강 량기택선생은 관내로 피신하고… 량세봉이 남만에서 패병을 긁어모아 간신히 조선독립의 기치를 들고있다지만 무너지는 집을 한기둥으로 뻗치기는 어려운 형국일세.》 장철하의 어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개탄으로 번졌다. 순박한 박훈은 이윽히 장철하를 바라보더니 직판 들이댔다. 《그렇다면 중대장님은 왜 한어깨를 들이밀 생각을 못하고 교하땅에 숨어버렸습니까?》 《이사람 박군.》 하고 장철하는 갈린 목소리로 불렀다. 《나는 이미 늙었어.》 《늙다니요? 중대장님보다 훨씬 나이 많은분들도 지금 총을 메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많은데요. 총은 못멘다 하더라도 싸움을 하자면 설 자리가 없겠습니까.》 사람 좋은 박훈은 그 옛날 용맹을 날리던 중대장이 시국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으로 서있는것이 안타까운듯 호소조로 말했다. 보매 그는 누구에게도 장철하의 최근동향에 대해서 들은것 같지 않았다. 그럴수록 장철하는 몸가짐이 거북해졌다. 《여보게 박군, 이젠 그 이야기는 그만하세. 헌데 저 사람들이 바로 김성주가 일군 군산가?》 《그렇습니다. 지금 간도땅 도처에 유격대가 태여나고있습니다.》 《저가운데 독립군출신도 더러 있는가?》 《어찌다 있다고 하지만 태반이 학생출신이 아니면 로농청년들인데 사상가들이지요.》 《이사람, 아무쪼록 임자라도 잘하게. 자네까지 뒤를 잘 꼬지 못하면 우리 늙은이들은 더 욕을 보게 될테니까… 그럼 나는 가보겠네.》 《아니 어디로 가는길입니까?》 《참, 길을 좀 대주게. 내 안도땅에 볼일이 있어 들렸다가 그냥 스쳐지날수 없어 성주 모친의 병문안을 가자고 이렇게 들렸네. 대체 토기점골이라는데가 어디바루 되나?》 박훈은 잠시 생각하더니 장철하가 올라온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길을 따라 먼저 내려가십시오. 참 방금 차광수동무가 그리로 갈 소리를 했는데 같이 가시지요. 혼자 찾아가기는 어려울것입니다.》 장철하는 바쁜 훈련에 방해를 끼치는것 같아 사양하였으나 박훈은 그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훈련장쪽으로 달려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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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끗희끗한 눈벌우에 버짐자국처럼 묵은 갈대잎이 설렁거리고있었다.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는 헐벗은 야산이 밋밋한 곡선을 그으며 황량한 눈벌의 변두리를 치고 지나갔다. 어디를 보아도 쓸쓸하고 서글픈 인상을 자아낼뿐이다. 장철하는 강반석녀사의 부드럽고 인자한 모습을 생각할 때 그와 너무나 대조되는 이런곳으로 자기를 이끌고 말없이 앞서가는 차광수의 등판을 새삼스럽게 올려다보군하였다. 물론 지난날에도 강반석녀사가 거처하던 무송의 소남문거리며 팔도구의 골목길자체가 특별히 다정하고 살뜰한 인상을 준것은 아니였을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김형직선생님의 일가가 자리잡고 반일운동의 전반을 이끌어나가실뿐아니라 운동자들의 개체생활까지 따뜻이 돌봐주는 따뜻한 손길을 그 집에서 느끼게 되자 어느덧 독립운동자들의 가슴속에는 은근한 향수와 같은 정을 강반석녀사가 거처하던 그 집, 그 골목, 그 거리에서 느끼게 되였던것이다. 지금 얼어붙은 갈밭과 헐벗은 야산밖에 보이는것이 없는 거치른 벌판에 나서고보니 이런곳에 강반석녀사의 집이 있다고는 아무래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장철하에게는 차광수 저 사람이 자기에 대한 어떤 앙심때문에 일부러 이런 험한곳으로 끌어온것이나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하였다. 차광수는 차광수대로 무거운 생각에 잠겨 걷다가 얼어붙은 개울을 껑충 건너뛰더니 장철하가 개울을 건느기를 기다렸다. 장철하는 개울앞에서 잠시 주저하였다. 개울은 물론 바닥까지 얼어붙어 꺼질 걱정은 전혀 없을것이다. 그러나 차광수가 건너뛰였는데 자기가 갈대를 헤치고 도랑창에 내려섰다가 다시 풀뿌리를 휘여잡고 둔덕을 올라선다는것이 꼴불견일것 같았다. 그렇다고 젊은이흉내를 내다가 혹시 실수하여 개울에 주저앉거나 엉덩방아라도 찧는다면 그 망신은 또 어떨것인가. 그러나저러나 그 옛날 군복을 입고 내도산줄기를 주름잡아 달릴 때처럼 몸을 훌쩍 날려서 보기 좋게 개울을 건너뛴다면 그것 역시 칭찬받을 일은 못될것이다. 지금은 나이 들어 운동선상에서 물러나앉았다고 마음속으로나마 자기를 변명하고있는데 그렇게 몸이 날래고 용맹이 남아있다면 무엇때문에 천하가 왜적을 치자고 총을 들고 나서는 이때 자기만 물러나앉는단말인가. 장철하는 개울 하나를 앞에 두고 진퇴유곡에 빠져버린듯 한 자신의 처지를 새삼스럽게 통감하였다. 그는 한참 주저하다가 갈대뿌리를 움켜잡고 조심조심 개울바닥으로 내려섰다. 일단 자세를 그렇게 취하자 발밑이 솔가지면서 무릎마디가 휘청거렸다. 얼음판우에 눈가루가 덮씌워져서 별로 미끄럽지도 않는 개울바닥에서 하마트면 주저앉을번하다가 가까스로 건너편둔덕의 갈뿌리를 휘여잡고 갈밭으로 기여올라왔다. 차광수는 개울을 앞에 두고 주저하는 장철하를 잠시 지켜보더니 그다음 혼자 등을 돌려대고 휘적휘적 걸어갔다. 《장선생님.》 차광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석쉼한 목소리로 불렀다. 장철하는 말없이 고개를 쳐들어 그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부강촌에서 오시는길이라면 혹시 김성주동무를 만나지 못했습니까?》 《만났지, 내가 찾아간 바로 그 집에 있더군.》 장철하는 까닭없이 덤벼지는 자신을 쓰겁게 의식하며 조급히 대답하였다. 《말이랑 해봤습니까?》 《웬걸, 눈치를 보아하니 그 사람이 그걸 바라는것 같지 않더군.》 차광수는 피뜩 뒤를 돌아보았다. 안경알너머로 이윽히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송곳끝처럼 날카로왔다. 장철하는 그 눈빛의 압력을 피하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으로서 허둥지둥 말을 잇대였다. 《나도 처음엔 놀랐네. 그러다가 그 사람이 무엇때문에 부강촌에 와있는가 하는것이 대체로 짐작되더군. 그다음 입을 다물고 나로서는 조심하느라고 했네.》 《잘했습니다.》 차광수는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것을 확인하자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지 다시 걸음을 옮겨놓으며 이번에는 시름겨운 목소리로 물었다. 《고생하는것 같지는 않습디까?》 《왜 고생스럽지 않겠나. 오동지섣달에 남의 집 머슴을 산다는것이 헐한 일은 아닐걸세. 그런데 나로서 잘 모르겠는건 자네들이 성주 그 사람을 지도자로 높이 받드는 처지에 어떻게 되여 그런 험한곳에 가도록 하나?》 차광수는 말없이 그냥 걷기만 하였다. 장철하는 공연한것을 물었다고 생각했다. 자기 처지로 보면 주제넘은 질문인것만 틀림없다. 그런것을 느끼자 목덜미가 뜨뜻해졌다. 장철하가 어색한 분위기를 가셔보려고 털외투깃을 일으켜세우며 《날씨가 차지는군.》 하고 중얼거리는데 차광수의 괴롭게 갈리는 목소리가 울려왔다. 《혁명의 요구는 준엄한데 그것을 똑똑히 의식하는 사람도, 또 그것을 타개할 능력을 지닌 사람도 지금은 성주동무 한사람밖에 없군요.》 장철하는 차광수가 갈뿌리에 걸채여 비칠거리는것을 보며 그가 얼마나 큰 괴로움에 시달리고있는가 하는것을 짐작하였다. 그리고 김성주가 무엇때문에 그런 벽촌에 배겨있는가 하는것을 어렴풋이 짐작하였다. 괴로와하는 차광수에게 무엇인가 위로의 말을 하고싶었으나 다시금 가슴을 옥죄여드는 자신의 죄의식때문에 입을 벌리게 되지 않았다. 차광수는 꼭같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은 성주동무 혼자서 겪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지요. 우리가 각오 하나만 가지고 될 일이라면 무엇때문에 그런 일에까지 나서게 방임하겠습니까. 그러나 저마다 인민의 아들이 되자고 맹세했지만 우리는 아직 책상물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도 낯선 동네에 들어가서 그들과 한식솔처럼 말하고 생활하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주동무는 우리 혁명의 대강을 밝히는 일로부터 지어 하나의 작은 산골동네를 혁명화하는 일까지 혼자 도맡아나서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뿐인줄 아십니까. 사실…》 차광수는 무엇인가 더 긴 이야기를 벌려놓으려다가 문득 끊고 힘없이 말끝을 맺었다. 《이런 이야기나 해서 뭘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죄를 짓고있지요. 이제 어머님을 만나뵙거든 고생하더라는 이야기는 비치지 말아주십시오. 어머님은 성주동무를 그 일이 어렵고 위태롭다는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등을 떠밀다싶이 해서 떠나보내셨습니다. 그리고는 혼자 속을 태우고계십니다.》 《알겠네.》 장철하는 모두가 죄를 짓고있다는 차광수의 말속에는 분명 자기도 념두에 두고있다는것을 뚜렷이 느끼면서도 아무런 반발심이 일어나지 않는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기계적으로 대답하였다. 문득 갈밭 한끝에 연기가 모록모록 피여오르는 구새통굴뚝이 솟아올랐다. 장철하는 그것이 집이라는것을 확인하자 까닭없이 당황해졌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동네라고 할만 한것은 눈에 뜨이지 않고 한참 더 걸어나가니 옆으로 비껴서있는 야산쪽으로 치우쳐서 집서너채가 띠염띠염 떨어져 서있었다. 어느 집이나 다 얇고 엉성한 이영이 바람에 거슬려날리는 보기부터 서글픈 형상이였다. 그런 집이 동네가운데 끼이지도 못하고 거치른 갈밭속에 외따로 떨어져있다는것만으로도 극에 이른 가난과 그 어떤 생의 막바지를 련상케 하였다. 차광수가 앞에 서있는 집을 향하여 곧장 걸어가자 장철하는 어떤 무서운 진실앞에 선듯 겁기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저 집에 강녀사께서 거처하시나?》 《그렇습니다. 지금은 두 아들과 세 식구서 사시는데 우리가 늘 페를 끼치다나니 집이 비좁아서 야단입니다.》 《음-》 장철하는 신음소리처럼 웅글은 소리를 내며 마당앞에 우뚝 서버렸다. 이국 칼바람의 맹위앞에 옹송그리고 떠는듯 한 너무나 초라한 초가마가리를 지켜보느라니 나라를 위하여 모든것을 깡그리 다 바치신 강반석녀사의 생애를 직관적으로 바라보는듯 하였다. 장철하가 우두망철히 서있는데 차광수는 뚜벅뚜벅 부엌문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문고리에 미처 손을 대기 전에 웃방 바라지가 안으로부터 열리면서 《광수가 오나?》 하는 강반석녀사의 목소리가 울리여왔다. 《어서 문 닫으십시오. 바깥날씨가 꽤 찹니다.》 차광수는 스스럼없이 부엌문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아니 점심은 어떻거고 이제사 오나? 다른 동무들은 다 어데로들 갔나?》 웃방바라지는 닫기고 강녀사의 목소리는 정지간쪽에서 울려왔다. 《점심은 모두 소사하에서 하고 나왔습니다. 지금 훈련을 하고있습니다. 난 어머님께서 또 저녁을 지으실가봐 걱정하던차에 마침 손님이 오셨길래…》 《손님? 누군데?》 가볍게 설레이는 인기척이 났다. 차광수는 누구라는것을 제입으로 말하기가 싫었던지 더는 말이 없고 그대신 부엌문이 다시 열리였다. 강반석녀사께서 서둘러 신발을 더듬어신으시며 문밖에 나오시였다. 일순 장철하는 큰 충격을 받고 마음속에 외우고있던 인사말을 할 기회를 놓쳐버리고말았다. 처져내린 추녀, 사개가 물러난듯 한 시꺼멓게 퇴색한 문틀, 땅바닥에 눌어붙은듯 한 엉성한 초가마가리를 배경으로 찬바람속에 서계시는 녀사의 모습에서는 장철하가 은근한 불안속에 그리고있던 초췌하신 모습이 아니라 전이나 다름없이 단정함과 인자함이 조화롭게 결합된 단아한 녀사께서 서계시였다. 최근 몇해사이에 녀사께서 겪으신 불행과 시련이 너무나 컸기에 장철하는 녀사께서 적잖이 상하시여 그 흔적을 처처에서 찾아볼수 있을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전혀 빗나갔다. 녀사의 눈에는 여전히 그윽한 빛이 어리여있을뿐아니라 완악한 풍상속에서 닦여지고 가시여진 범접할수 없는 기품이 느껴지고 얼굴모습과 몸가짐에는 다툴수 없이 덮쳐드는 가난과 세월의 흔적이 어리여있었으나 언제 어디서 보아도 단아하고 아름답던 그 모습은 이제 젊음도 사라지고 인간세상의 변측같이 느껴지는 이 황량한 자연앞에 서계시는 지금에야 그 그윽한 천품이 더 완성감을 가지고 육박해오는듯싶었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장철하선생님이 아니십니까?》 귀에 익은 녀사의 목소리가 반가움에 떨리여나왔을 때 장철하는 이것이 현실이며 그가 여태 머리속에서 험한 시절의 변천에 깔려 풍지박산이 돼버린지 오랬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이런저런 처세를 합리화해온 그런 생활이 여전히 이 땅우에 존재하고있다는것을 확신하였다. 장철하는 머리를 깊숙이 숙이며 절하였다. 《그렇습니다. 제 장철하올시다. 그지간 사모님께서 편치 않으시다는 소식을 전해들으면서도 이제야 문안인사를 드립니다.》 《장선생님께서 이런데까지 오실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추운데 서계시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집이라는것이 너무 험해서 귀한 손님을 모실만 한데가 못됩니다만 어찌겠습니까. 우리 집이란 늘 그렇지요.》 강반석녀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추녀밑을 따라 서둘러 웃방쪽으로 가시여 방문을 여시였다. 안에는 방금 부엌으로 들어간 차광수외에도 누가 있는 모양으로 방을 거두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서 좀 거두어라.》 하고 강반석녀사께서 안에 있는 사람에게 말씀하시며 장철하를 청하시였다. 장철하는 녀사의 어려운 살림을 보게 되는것이 더욱 죄스러운 생각이 나서 주저하였으나 찬바람속에 그냥 방문을 열어놓게 할수도 없어서 무엇에 쫓겨들어가듯 발뒤축으로 신을 급히 털어벗으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흰눈이 깔린 바깥세상에서 방안으로 들어선 첫 순간에는 어둠에 눈이 익지 않아서 방안정경이 인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훈훈한 온기와 함께 잘 정리된 세간붙이들과 산뜻한 느낌이 안겨왔다. 실겅우에 얄팍한 이불가지들이 얹혀있고 저쪽 벽밑에 깨끗하게 도배를 한 궤짝이 놓여있었다. 어둑시그레하던 방안에 차츰 눈이 익자 기름대우를 낸듯 밤빛으로 알른거리는 노전이며 함경도식 정지간의 알뜰하게 부셔낸 부엌세간들이 빛을 뿌렸다. 《얘, 인사를 드려라, 네 오래비도 잘 아는 장철하선생님이시다.》 하고 강반석녀사께서 말씀하셔셔야 장철하는 바라지옆에 붙어서서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있는 처녀를 알아보았다. 《최효열의 누이동생이랍니다. 오래비 원쑤를 갚겠다고 녀자몸으로 여기까지 찾아왔군요.》 녀사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옥섬이가 얌전히 머리를 숙이면서 뭐라고 입안의 소리로 속삭였으나 장철하는 한마디도 가려듣지 못하였다. 옥섬의 목소리가 낮은데도 원인이 있지만 또다시 귀통을 한대 얻어맞은것 같은 느낌때문에 귀가 웅웅하여 도무지 남의 말을 가려듣게 되지 않았다. 얼핏 보매 아직 덜 숙성한 처녀같았다. 그러나 방금까지 바느질을 한듯 길다랗게 실이 꿰진 바늘을 옷섶에 꽂고 치마자락을 가볍게 휩싸며 다시한번 깊이 숙이는 그 녀자의 머리에 흰댕기가 들여있는것을 보자 장철하는 최효열이 마침내 놈들에게 학살되였구나 하는 준엄한 현실감과 함께 그 녀자의 온몸에서 육박해오는듯 한 복수라는 두 글자의 신성함과 엄숙성을 통감하였다. 《객지에 홀몸으로 고생이 막심하겠군. 감옥의 소식은 가끔씩이라도 오는지…》 장철하는 막연한 인사말로 궁한 자리를 겨우 모면하려다가 그 자신도 모르게 이런 어정쩡한 질문을 해놓고 스스로 당황하였다. 옥섬은 한옆에 가려놓은 누런 솜옷을 매만지며 선뜻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눈치였고 강반석녀사께서는 솜먼지가 널린 바느질자리에 물걸레를 놓아 나가시다가 고개를 드시였다. 《작년 세말에 효열이는 기어이 그놈들 손에 잘못되였답니다. 그 소식이 들어와서 이렇게…》 장철하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어린 처녀앞이 돼서가 아니라 떳떳치 못한 제 처지가 돌이켜져서 차마 조의를 말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옥섬이가 머리를 숙이며 조용히 말하였다. 《저는 나가봐야겠어요.》 장철하는 당황하여 무슨 말인가 하고싶었으나 여전히 할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구원이라도 청하듯 강반석녀사쪽을 돌아보니 녀사께서는 아까처럼 걸레를 놓아나가시며 닫기는 바라지쪽을 향해 말씀하시였다. 《뒤집에 가서 저녁차비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아라. 그리고 광수 이사람.》 하고 강반석녀사께서는 그때까지 부엌앞에 모자를 말아쥐고 우두커니 서있는 차광수에게 엄한 목소리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점심을 소사하에 시켰다면 미리 그렇다고 말을 해야지. 공연히 사람들에게 두벌일을 시켜서야 되겠나. 낟알도 그렇지, 우리 처지에 점심을 두었다 저녁에 먹은들 무슨 상관이 있을가마는 부녀회원들이 자네들을 생각해서 더운 밥을 지었는데 그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김이 오를 때 맛있게 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지금 집집마다 낟알사정이 딱하기야 하지. 그러나 나라를 광복하겠다는 대장부들이 그런 사정만 생각하다나면 언제 큰일을 쳐보겠나.》 《어머니, 그러기에 마을마다 교대교대로 돌아가며 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차광수가 당황해서 말하였다. 《말 말게, 교대교대로 돌아간다 해도 오늘은 우리 토기점골차례가 아닌가.》 《허 참, 토기점골이라는 마을이 어디 있기나 합니까. 다른 집은 볼것이 없고 그저 어머님댁과 구당비서네 집인데 두 집에서 매번 우리를 다 겪겠어요? 어머님, 너무 걱정 마십시오. 요즘 소사하의 호제회에서 활동을 잘합니다.》 차광수의 어조는 겉으로는 부드러우면서도 완강하였다. 《자네들이 아직 내 마음을 몰라주는군. 나더러 걱정을 하지 말라니, 그럼 내가 무슨 명색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단말인가. 내가 살림걱정을 하나, 병걱정을 하나? 내게 락이 있다면 나라찾는 싸움에 나도 한몫 한다는 자랑뿐이네. 내가 자네들때문에 몸을 놀리는것은 고생이 아니라 락일세.》 차광수는 부엌문앞에 서서 고개를 떨구어버렸다. 《일없네, 어서 나가보게. 구당비서네 집에서 점심을 지었겠으니 저녁을랑 그 집에서 하도록 하고 소사하에는 공연한 낟알을 없애지 않도록 미리 련락을 띄우게. 어제 그 집 아낙이 시가동네에서 의연금을 적잖이 모아오고 저렇게 군복지을 천도 구해들였네. 그리고 철주네 연예대가 선전사업을 잘해서 원호물자를 적잖이 모아왔네. 그럭저럭 이 한달은 견딤즉하니 자네들은 훈련이나 잘하게.》 슬그머니 문 닫기는 소리가 나더니 차광수는 말없이 사라졌다. 집안이 조용해지자 장철하는 몸이 졸아드는듯 숨이 답답해나고 앉음새가 거북해졌다. 《아까는 창졸간에 잘 모르겠더니 사모님신색이 역시 말이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 권고를 들으시지요.》 장철하는 외투자락을 헤치고 조끼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며 말하였다. 강반석녀사께서는 일어나시여 부엌에서 접시 하나를 집어다 그의 앞에 놓아주시고 한옆에 가려놓았던 시침을 한 군복감을 끌어당기시였다. 《내 몸이야 늘 그렇지요. 참 요즘 젊은 사람들이 고생을 합니다. 생각같아서는 끼마다 고기국을 먹이고 비단에 휘감아서 내놓고싶지만 그렇게 되지를 않는군요.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나라를 찾겠다고 눈벌에 딩굴며 돌아가는것을 보면 내 가슴이 아픕니다.》 장철하는 가슴이 쿡 찔리여 마침 켜댄 담배불을 붙이지도 못하고 멍하니 시름겨운 녀사의 안색을 지켜보았다. 녀사께서는 낭자에 찌르셨던 바느실을 뽑아 하다가 만 군복의 시침을 해나가시며 조용히 말씀을 이으시였다. 《젊은이들이 얼마나 기특합니까. 그래도 그 사람들에게 옷 한벌 해입힐 마련이 없고 낟알을 댈 사람도 흔치 않군요. 안도땅만 벗어나면 왜놈들이 날치지 큰길에 나서면 구국군이 가만 있질 않습니다. 그런 속에서 힘을 양해가는데 이고장에는 조선사람도 그닥 많지를 못해서 옷과 신도 대주기 바쁘고 세끼 따근한 밥을 지어대기도 헐치 않답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마을사람들에게 너무 페를 끼친다고 늘 불안해하며 싸움을 해서 낟알도 천도 다 풀겠다고 하니 아직 여물지 못한 부리로 바위를 쫏다가 제입을 상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주야로 그것이 근심스러워 잠을 이루지 못한답니다.》 《사모님.》 장철하는 격한 목소리로 부르짖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면서 긴 한숨과 함께 웅얼거렸다. 《전날 성주 그 사람이 교하 내집에 찾아왔댔습니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내 그때 처신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장철하는 아까 훈련장에서 박훈을 통하여 느낀간도 있어서 강반석녀사께서 그때의 이야기를 자세히는 모르시는것으로 짐작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전이나 다름없이 친절하고 인자한 태도로 자기를 대해주실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장철하는 이제는 자기의 떳떳치 못한 처사를 제입으로 다 터놓고 사과하리라고 마음먹었다. 어쩐지 김성주에 대한 의리없는 행동이 곧 나라를 배신한것 같은 정신적부담을 주었고 그것을 변명하면 할수록 자기라는 인간의 비렬성이 더 강조되는듯 하여 더는 견디기 어려웠다. 더구나 눈뜨고 바로 보기가 어려울만큼 참혹한 가난과 고통속에서도 오직 나라생각에만 골몰해있는 이제는 자기 생활과 너무나 멀리 동떨어진 순결한 세계에 들어서고보니 거름묻은 손으로 온몸을 문대고난것 같은 끈적끈적한 생각을 털어버릴수 없었다. 장철하의 어조가 달라지자 강반석녀사께서는 들을만 해서 조용히 시침을 해나가시였다. 《내 본시 성미가 삽삽한편이 못된다는것은 사모님도 잘 아시는터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성주 그 사람이 그날 교하로 내려온것은 형세가 급박해서 피신처라도 필요했던것 같은데 이 나살이나 건사한것이 주의상의 문제를 가지고 언쟁을 벌리다나니 그만 격해서 사람의 의리까지 저버렸습니다.》 장철하는 어떻게 말머리가 돌아가는지도 모르게 한참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덧 자기가 변명을 하고있다는것을 깨닫고 또다시 목덜미가 뜨뜻해졌다.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언덕길을 오르는 사람처럼 단김을 뽑으며 말을 이었다. 《성주가 떠나간 다음에사 나도 사람구실을 못했다는 생각이 납디다. 한동안은 가슴이 무거워서 잠도 오지 않고 무엇을 먹을 생각도 안나더군요. 그런차에 또 웬 젊은이가 사모님께서 보내주신 약을 가지고 오지 않았겠습니까. 내 그때 너무 기가 막혀서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고 차라리 보약이 아니라 당장 먹고죽을 부자를 보내달라고 소리치지 않았겠습니까.》 장철하의 목소리는 또다시 격해졌다. 그러나 강반석녀사께서는 여전히 아무 말씀없이 바느질만 계속하시였다. 전같으면 의당 너무 깊이 생각한다는 정도의 말씀이라도 하실법한데 아무런 반응도 보이시지 않는것이 장철하에게도 이상하게 생각되였고 그것이 은근한 압력이 되여 그의 마음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어주었다. 《내 이번에 아들잔치에 오라는 친구의 청을 받고 부강촌에 들렸지만...》 장철하가 이렇게 말을 잇자 녀사께서는 오래간만에 머리를 드시였다. 일순 장철하의 표정을 지켜보시는 녀사의 눈길에는 놀람과 의혹이 어리였으나 그것을 말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장철하는 아까 차광수한테서 들은 말이 있는것만큼 녀사께서 아드님의 신상을 념려해서 그러신다는것을 인차 짐작하였다. 그는 차광수와의 약속대로 부강촌에서 김일성동지와 상봉했다는 말을 피하기 위하여 가까스로 말머리를 돌렸다. 《내 심사가 편안찮다보니 술자리에 섭쓸리게도 되지 않고 사람들 만나는것이 싫어서 야반도주하다싶이 뛰여나왔습니다. 멀지 않은곳에 사모님께서 계시고 성주 그 사람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앉은 자리가 송구스러워서 견딜수가 없더군요. 그래 부랴부랴 교하로 돌아가려다가 문득 내 잘못을 다 털어놓으면 평소의 인자하신 성품으로 보아 사모님께서 너그러이 용납해주시리라는 한가닥 희망이 떠오릅디다. 그래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강반석녀사께서는 장철하가 부강촌을 총총히 떠났다는 말을 한 다음에는 이어 고개를 숙이시고 다시 바느질을 해나가시였다. 장철하의 말에 열이 가해질수록 그이의 안색에는 마음속깊이를 헤아릴수 없는 담담한 정적이 깃들었다. 장철하는 아무런 반응도 없는 녀사의 너무나 조용한 거동에 기가 질려 말문이 막혀버렸다. 좁은 방안에 푹 가라앉은듯 한 침묵이 질식할것만 같은 압박감을 주었다. 장철하는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이듯 고개를 내저었다. 더는 침묵의 중압을 견딜수 없다는것을 느낀 그는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이 되여 소리없이 선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인간세상과 마지막 결별하는듯 한 생각이 들었으나 솔직하게 쓸쓸한 마음을 드러내게 되지도 않았다. 그는 늘어나는 화담배로 대진이 노랗게 물든 손가락을 가늘게 떨며 안주머니를 더듬어 미리 장만해두었던 지페 한뭉치를 꺼냈다. 삿자리를 쓸며 돈뭉치를 소심하게 반짇고리옆으로 밀어내놓은 장철하는 모자를 더듬어쥐며 아까보다는 퍽 대범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보아하니 내가 사모님 마음을 공연히 부산스럽게 해드린것 같은데 또 처신을 잘못했나봅니다.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강반석녀사께서는 눈길로 삿자리우의 돈뭉치를 가리키시며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말씀의 뜻으로 볼 때는 놀랍도록 온화하신 어조였다. 장철하는 의례 예견했어야 할 질문이였으나 정작 대답하자니 어쩔수 없이 당황해지는것을 느끼며 잠시 모자를 구깃거리다가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사모님께서도 잘 아시지만 내가 본시 그렇게 악한 인간은 아닙니다. 내가 그때 성주 그 사람에게 이렇다할 도움은 못주었지만 나한테 나라생각는 마음이 전혀 없기야 하겠습니까. 이건 별게 아닙니다. 내가 지난날 사모님 손에서 밥뿐아니라 약까지 적지 않게 받아먹은 사람이요 게다가 돌아가신 김형직선생을 봐도 그렇고 또 지금은 옥중고초를 겪고있는 형권군 생각을 해서라도 사모님댁살림을 전혀 외면할수가 있습니까. 이번에 직접 와서 보니 사모님신색도 좋지 않고 성주는 여전히 집일을 볼 형편이 못되는듯 하니 나로서도 생각되는바가 많습니다. 약소하지만 약값셈치고 받아주십시오. 사모님 료량대로 일부를 갈라서 군자금으로 쓰셔도 좋겠습니다.》 《약값치고는 너무 많군요.》 하고 강반석녀사께서는 바느질감을 조용히 밀어놓으시고 한쪽무릎을 세우며 맞바로 장철하를 바라보시였다. 《사람의 허물은 재물로 가리워지지 않습니다. 이 돈을 거두십시오. 선생이 일부러 나를 찾아와서 약값을 물 생각이 있으면 그만한 돈을 내고 가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이 돈으로 인정이나 의리를 흥정하지는 마십시오. 선생도 보셨지만 우리 사람들은 힘든 싸움을 하고있고 구차한 살림을 하고있습니다. 군자금을 모으는것도 힘이 듭니다. 아직 철없는 우리 집 아이들까지 사람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자고 연설을 하고 노래를 합니다. 성주의 동무들가운데는 군자금때문에 총을 차고 부자놈의 집에 들어갔다가 아까운 목숨을 바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돈은 받기가 어렵습니다.》 《아니 그것은 무엇때문입니까? 내 돈이 그래 목숨이 아까와 내놓는 술집주인따위의 기름묻은 돈보다도 못하다는 말씀입니까?》 장철하는 선고를 받은 죄수처럼 앉은자리에서 다시한번 풀썩 무너져앉으며 신음소리를 내였다. 《지금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호소해서 우리 군대를 먹이고 입히기 위한 원호금을 모으고있습니다. 모두 궁한 살림속에서 한되박씩 되는 호좁쌀도 내고 제손으로 낳은 무명천도 가져옵니다. 나는 그 사람들이 다 애국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재물을 아낌없이 내놓은 선생을 그 사람들과 동렬에 세우고싶지를 않군요. 그 까닭은 선생이 아마 잘 알것입니다.》 장철하는 깊이 고개를 숙이였다. 조용히 울려나오는 강반석녀사의 말씀은 그가 뒤집어썼던 위선의 허울을 사정없이 벗겨내였지만 그는 발버둥 한번 칠수 없었다. 《사람이 살아가느라면 혹 잘못을 저지를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라와 상관되여서는 단 한번의 잘못도 저질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잘못을 돈으로는 메꾸지 못합니다. 목숨을 바치고도 메꾸기 어려운것이 나라를 배반한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얼마간의 재물을 가지고 자기 잘못을 굼때려고 하는것 같군요. 그것은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입니다. 나는 성주한테서 아무런 말도 들은것이 없기때문에 전같이만 생각하고 산조인을 보내드렸지요. 선생님댁에 심부름을 갔던 하연성이라는 사람이 후에 돌아와서 괴이한 소식을 전하길래 장철하선생이 그럴수가 없다고 그 사람을 꾸짖어 내보냈지만 흉한 소문이 자꾸 들어와서 귀를 틀어막아도 막을길이 없습니다. 나는 새삼스럽게 그 허물을 말하는것이 아닙니다. 제 신상이 좀 위태롭고 불편할 때는 이웃도 겨레도 돌보지 않다가 일신이 편안해지면 인심을 사보자는것은 비루한 생각입니다. 나는 선생님이 이런 돈을 내기보다는 진심으로 지난날을 뉘우치면 좋겠습니다. 진심이 있는 다음에야 나라를 위하여 성의를 바칠데가 없겠습니까. 돈은 가져가십시오. 나는 선생님의 몸을 생각해서 약을 보내드린것이니 그 값을 돈으로 받고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집안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나고마는것이지요. 군자금을 내고싶으시면 소사하에 조참위라는 사람이 호제회일을 보고있는데 그리로 가보십시오. 그러나 그먼저 성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철하는 한동안 고개를 푹 떨구고 앉은채 가로세로 비껴간 삿자리의 얽음새만 더듬어보았다. 얼핏 보매는 한결같은 결이 자세히 뜯어보니 굵고 가는가 하면 어떤것은 매듭도 있고 어떤데는 헐어서 갈라지고 가시가 돋힌것도 있었다. 장철하는 그런 가시 하나를 손가락으로 쥐여뜯었다. 그러나 손마디가 투박하여 잘 잡혀지지 않았다. 장철하는 처음엔 무심히 시작한 손장난에 차츰 신경이 곤두섰다. 삿자리의 가시 하나 제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는 숨을 씩씩거리며 손가락을 집게처럼 오그려들고 고집스럽게 가시를 움켜쥐려 하였다. 가위질할 때처럼 실룩거리는 입귀로 큼직큼직한 누런 이가 드러났다. 《길이 바쁘겠는데 그만 돌아가시지요. 내 말이 섭섭했다면 안들은셈 치십시오.》 꾸중을 들은 아이처럼 오도가도 못하고 거북하게 앉아있는 장철하를 딱한듯이 바라보시던 강반석녀사께서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시였다. 한참이나 말없이 앉아있던 장철하는 불쑥 일어났다. 일어선채로 또 잠시 우두커니 서서 제가 내놓은 돈뭉치를 바라보았다. 깨끗하게 쓸어내놓은 삿자리는 망망대해요, 그우에 댕그랗게 놓인 돈뭉치는 추한 알몸뚱이로 물에 빠져 허우적이는 제 몰골같이 생각되였다. 장철하는 별안간 참을수 없는 수치를 느끼며 허둥지둥 돈뭉치를 집어 아무렇게나 외투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인사도 하는둥마는둥 총총히 초원에 나온 장철하는 휘몰아치는 눈바람을 맞받아 향방도 없이 마구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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