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석윤기

(제13회)

제 1 편

 

21

 

차광수네 일행은 말달구지 하나를 꾸며가지고 이튿날새벽에 돈화를 떠났다. 길림에서 온 공청원 한동무까지 셋이서 떠나는데 아무래도 도중 왜놈들이나 경찰을 만날수 있기때문에 옥섬은 새각시차림으로 차광수와 내외간행색을 하기로 했으며 길림공청원은 달구지군으로 가장하였다. 련락소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한 젊은 내외의 이사짐비슷하게 달구지를 꾸미기는 했으나 옥섬이의 행장이나 차광수의 신랑행색이라는것이 그렇다고 봐서 그런지 다 어색한데다 특히 길림공청원의 말모는 솜씨는 서툴어서 단속에 걸리기만 하면 들짱이 날것 같았다. 만일 조사가 시작되는 날이면 허접스레한 이사짐밑창에 등사기 있고 등사원지에 잉크, 그리고 책이 적지 않은데다 총까지 있다.

그래서 세사람은 내내 긴장되여 아예 마호같은 큰 거리에서는 묵을 생각을 못하고 날이 저물면 일부러 큰길에서 벗어져난 으슥한 골짜기로 찾아가 외딴집에서 묵군하였다. 만일의 경우는 전투를 해서 빠져나갈 작정이였다. 그럭저럭 푸르하줄기까지는 별일없이 지나왔다. 앞으로 대포시하로 해서 량강구로 나갈것인가 어찔것인가 한참 의논하다가 량강구에 있는 반일부대가 갈갠다는 소문이 돈화까지 나돌아서 아예 대전자방향으로 돌려꺾게 된것이 신통히 전날 허재률이가 잡혀간 로정을 따라가게 되였다.

날이 어슬어슬 저물어왔다. 이제 푸르허동네가 아니면 부강촌에서 묵고 강을 건널수밖에 없을것 같았다. 밤이 좀 깊더라도 아예 강을 건늘것인가.

차광수가 말달구지 뒤를 따라가며 복잡한 궁리를 하고있는데 달구지바퀴옆에 붙어가던 옥섬이가 걸음발을 늦추더니 슬그머니 소매를 잡아당긴다.

차광수는 웬일인가싶어 고개를 들었다. 명색은 내외간이지만 길가다가 더구나 동지가 앞에 있는데서 소매를 잡아당길 처지는 아닌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옷자락을 아래로 잡아끈다. 무슨 신호라는것을 눈치챈 차광수는 일부러 태연한체하고 옥섬의 눈길을 따랐다. 길 오른편은 얼어붙은 푸르하강인데 거기에는 별것이 있을수 없었다. 왼편쪽은 수수밭이 두간두간 잇달려있고 그너머는 잎이 다진 관목숲이 펼쳐진 야산이였다. 옥섬은 지금 수수밭쪽을 힐끔힐끔 돌아본다.

어찌다 밭고랑이 성기여지면 얼음버캐가 박힌 검은 이랑이 드러나는데 그짬에 시꺼먼 사람그림자가 얼씬거렸다.

차광수는 슬그머니 바른손을 달구지저고리섶속으로 찔러넣으며 길림공청원에게 말했다.

《여보게, 날이 다 저물겠네. 좀 때려몰라구.

《짐승도 먹고야 맥을 쓰지요.

길림청년도 제딴에는 달구지군다운 말투로 한마디 응수하고 가볍게 채찍을 휘둘렀다.

이때 밭고랑에 엎드렸던 사나이가 껑충하고 행길우에 뛰여나왔다.

《손들엇!

하고 소리를 지르고 총을 내대는바람에 길림공청원은 달구지채에 바싹 다가서고 차광수는 마주 권총을 뽑아들며 달구지뒤에 몸을 붙였다. 옥섬은 처음부터 그 사나이의 동정을 일일이 지켜보고있었기때문에 달구지뒤에 몸을 꼭 숨겼다.

《허허허!

별안간 웃음소리가 터져올랐다.

놀라서 살펴보니 허재률이였다. 그는 차광수를 그러안고 볼을 비비며 돌아가다가 옥섬이의 손을 잡아흔드는가 하면 길림친구의 어깨를 꽝꽝 두드리며 《이거 어떻게 된 일이요? 어디서 이렇게 불쑥 나타났소?》 하고 누가 대답할 사이도 없이 떠들며 돌아갔다.

그러다가 차광수가 정색해서 정말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그제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져서 길 아래우를 살펴보며 제먼저 말을 때려몰았다.

《여기서 이럴새 없소. 빨리 저쪽 산기슭에 가서 숨기요.

《아니, 어떻게 된거요? 허재률이 분주하다 분주하다 하더니 과연 분주하게 노는구만.

길림공청원이 못마땅해서 말하자 허재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강낭밭옆으로 때려몰며 말했다.

《내가 나혼자 잘살자면 만사를 조용조용히 해도 다 되겠는데 임자들같이 복없는 인간들도 다 좋은 세상에서 살게 하자니 이렇게 분주하지 않소.

차광수는 그가 기껏 입심을 부리게 내버려두었다가 잎이 진 개암나무숲속에 들어가 앉아서야 이윽히 허재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허재률은 다시 달구지가 들어온 길을 되돌아나가서 넘어진 강낭짚을 일으켜세우고 바퀴자리를 꼼꼼히 손질해서 없애버린 다음 세사람앞으로 돌아왔다. 말은 분주하게 하고 돌아가지만 역시 세심하고 빈틈이 없다.

《이제 이앞으로 안도경찰놈들이 우리 최만득동무를 묶어가지고 올거요.

하고 허재률은 별안간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사람은 놀라서 그건 또 무슨 소리냐고 다그쳤다.

《사실은 나도 그렇게 끌려갈번하다가 뒤골목에서 사귄 인연때문에 겨우 어제 놓여나왔는데 최만득동무는 종시 놓아주지 않더군.

하고 그는 자기가 부강촌에서 겪은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동네를 떠날 때는 그 안영호란자가 얼굴도 내밀지 않았소. 뭐 공산주의라면 죽자고 해보자는 판이요. 그래도 그 누이동생이 동구까지 따라나와서 도중 길량식이라고 이렇게 떡까지 싸주더군. 그래 간밤부터 그걸 구워먹으며 이렇게 기다리는중 아니요.

《누구를 기다린다는거요?

차광수가 물었다.

《최만득이를 데려갈 때 제끼자는거요. 그래도 허재률이 팔자가 그리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요. 오늘점심참 좀 못되여 안도경찰 두놈과 조선놈 하나가 부강촌에 들어갔소. 필경 그자들이 최만득이를 끌어갈것 같소.

《조선놈이라는건 또 뭐요?

《그게 글쎄 알쑹달쑹하단말이요. 겉으로 봐서는 한 40 넘어보이는게 점잖게 생겼소. 회색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쓰고 개화장을 짚었소. 우사령과 붙어다닌다는 지대현이라는자가 아닌지 모르겠소. 그자가 안도경찰과도 련결되여있다니까.

차광수는 잠자코 듣고있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속은 한순간에 복잡해졌다. 연길, 화룡의 조직들에서 유격대원으로 추천한 동무들을 인차 안도로 보내라는 지시를 내려보냈는데 그 동무들은 태반이 이 부강촌을 거치게 될것이다. 옥섬이와 길림청년은 큰일났구나 해서 차광수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한참 침묵이 흐른 뒤에 차광수는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그래 어떻게 하자는거요?

《이번에 가서 그 오정혁이문제를 단단히 봐야겠소. 그 동무가 지금 어데 가있소?

《명월구에 있지. 오정혁이가 뭘 잘못한게 있소?

《제집이 있는 동네를 그런 반동소굴로 만들어놓고 전 딴데 나가 엎데있으면 어떻게 하는가말이요?

허재률은 증이 나서 소리쳤다.

《언젠가 오정혁동무도 부강촌문제를 제기한것 같소. 그러나 그때 조건에서는 부강촌이 일반적인 농춘혁명화의 한 실례로 취급되였을뿐 무장투쟁의 앞길을 직접 가로막는 암초로 제기될수는 없었소. 부강촌이 이렇게 된데는 오정혁이가 떨떨한데 문제가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가 투쟁의 거점을 안도로 정하고보니 간도와 돈화, 안도를 련결하는 길이 꼭 부강촌을 통해야만 한다는데 문제의 요점이 있는것 같소. 적들이 바로 그걸 주목하고있단말이요.

《그건 무슨 소리요?

이번에는 허재률이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의심쩍게 차광수의 컴컴한 낯빛을 지켜보았다.

차광수는 허재률의 말은 못들은듯 안경을 코등에 눌러붙이며 생각에 잠겼다.

허재률은 이마살을 찌프리고 외면하였다. 차광수가 그런 모양을 하고 생각에 잠기면 대체로 재미가 없다. 뭔가 일이 좋지 못하게 번질 때 저런 자세를 취하는것이고 그끝에는 의례 비판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 비판은 대체로 엇설수 없는 론거를 가진 매우 준절한것이였다.

아니나다를가 차광수는 허재률을 엄한 눈길로 돌아보더니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룡정에서 받은 과업은 어떻게 됐소?

《동자경동무 문제말이요? 하라는대로 다했소. 정치범석방에 대한것도 연길감옥에서 이미 나온 사람들은 대체로 장악해서 사람당 처리하게끔 각 구에 지시를 주고 앞으로 계속 감시하도록 대책을 세웠소. 벌써 몇사람은 그놈들이 되잡아넣었더군.

또 무슨 질문이 있을듯해서 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차광수는 말없이 걸었다.

(성미도 넨장, 이런 때 비판을 하자고드니 차광수가 대틀은 대틀이군.)

허재률은 속으로 편안찮은 생각이 떠올랐으나 별수없이 뒤를 따랐다.

엉성한 수수밭머리에 이르자 차광수는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거기서는 수수대에 가리워 옥섬이와 길림공청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동무들이 들으면 뭐라오. 할 말이 있으면 시원스레 하오.

허재률은 답답해서 제먼저 입을 벌렸다.

《동무 왜 점점 그 모양이 돼가오? 동무 체면이나 봐주자고 앞뒤를 재는줄 아오.

차광수는 저쪽에 있는 동무들에게 들릴가봐 목소리를 억누르면서 그럴수록 성을 가라앉히지 못해 씨근거리며 말했다.

《글쎄, 그러니 내가 참모장동무의 깊은 속이야 어떻게 짐작하겠소.

허재률은 여전히 꿰여진 대답을 하였다.

《동무가 내속은 알든 모르든 상관이 없소. 그러나 조선혁명을 할 생각이 있으면 김일성동지의 의도는 알아야 한단말이요. 내 지난번에 동무가 김일성동지를 모시고 온성나갔다온 이야기를 듣고도 의견이 있었지만 직접 김일성동지앞에서 놀아난 일이니 눈감고있었소. 그런데 이번에 룡정에서 돌아친 이야기를 들으니 참을수가 없더란말이요. 그런데 또 일이 너무 급박해서 말할 틈을 못냈지.

《그래서 지금 좋은 때를 만났겠소? 적이 언제 올지 모르는 길목에서말이요.

허재률은 기가 막히다는듯이 삼엄하게 누워있는 부강촌길을 고개짓으로 가리켰다. 그러나 차광수는 그 말에는 개의치 않고 이제는 퍽 가라앉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동무가 인단장사트렁크를 메고 개별공작을 다닐 때는 별문제라 치고 일단 일이 조직적인 성격을 띠거나 김일성동지의 방침과 관련될 때에는 무조건 심중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단말이요. 뒤골목에서 건달군들과 싸움질이나 하는 식으로 혁명을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동무는 명월구회의에 참가해서 졸았다고밖에 볼수 없소. 우리는 새로운 시대, 상비적인 무력에 의해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하는 새 시대에 들어섰소. 따라서 이제는 지난날 허재률이 영웅으로 떠받들리우던 수공업적방법을 싹 버려야 한단말이요.

《그까짓 이 인단장사트렁크야 수공업이라고까지 추어줄것도 없지 않소. 고작해야 행상군인데… 그러나저러나 너무 어마어마하게 걸지 말고 찍어서 말하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는거요? 나로서는 극상 생각해서 잘하느라고 한건데… 나도 명월구회의에 참가해서 생각하는게 있단말이요.

《그렇다면 물어보기요. 동무가 부강촌에서 빠져나올 때 사태가 엄중하다는 생각을 했소, 못했소?

《했지. 그러게 이렇게 언 밭고랑에 배를 깔고 하루밤, 하루낮을 보낸게 아니요.

《장하오. 허재률이 극상 생각했다는게 그게요?

차광수는 한심하다는듯이 되물었다. 허재률은 약이 올랐다.

《여보, 그럼 어찌라는거요? 최만득이 당장 죽겠는데 모른체하고 가라는거요?

《동무, 아직도 자기 잘못을 모르겠는가. 부강촌사태는 단지 최만득동무 한사람문제도 아니요. 지금 이 시각에도 북간도쪽에서 김일성동지를 찾아오는 동무들이 잡혔을수도 있고 또 앞으로도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수 있다고 봐야 하오. 그러나 그건 허재률이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소. 그래 동무가 최만득동무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똑똑한 생각을 했다는거요? 동무 혼자서 길목을 지키고있다가 그놈들이 둘이 아니라 대여섯놈이 몰려든다면 어떻게 하겠소. 최만득이는 결박을 당하였는데 동무가 권총을 가지고 접어들면 그놈들이 최만득이를 내버리고 내뛴다는거요?

《그야 어떻게 알겠소. 혹 둘이 올수도 있지 않소.

허재률은 삽시에 기가 죽어 우물쭈물하였다.

《동무는 옛날에 령도자를 못만나 간도천지를 헤매다니던 때의 사고방식을 못버리고있단말이요. 우리가 아직 세상에 선포하지는 못했지만 무장투쟁의 새 시대에 들어간 이상 과학적인 전술을 가지고 크고작은 모든 문제를 조직적으로 대해야 한다는것을 모르겠소? 동무는 무엇때문에 강 하나를 넘으면 대사하에 우리 조직이 있는데 달려가서 보고할 생각을 못하오? 더구나 강영진이가 먼저 빠져나갔다면 지금쯤 틀림없이 대책을 세웠을게 아니요. 동무 혼자서 길목을 매복했다가 성공할 가능성은 극히 적고 최만득이와 함께 동무자신도 잘못될 우려가 십분 있는거요. 그렇게 되면 그건 김일성동지의 유격전쟁구상에 심대한 손실을 끼치는게 아니요? 동무에게는 허재률의 목숨쯤 대단치 않는것으로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김일성동지의 생각에는 최만득이뿐아니라 허재률이도 대단히 귀중한 존재란말이요.

《너무 올리추었다 내리추었다 하지 말고 직판 말하오.

《직판 말하고 말고 할게 없소. 내 말은 이제 다했소. 동무는 곧 옥섬동무와 함께 말달구지를 끌고 대사하로 가오.

《뭐요?

허재률은 흠칫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차광수는 딱딱한 어조로 맺고 끊듯이 말했다.

《대사하에 가면 김일성동지가 나와있을거요. 사실을 다 보고하고 지시를 받소.

《그럼?

《난 그사이 저 동무를 데리고 길목을 지키겠소. 그쪽에서 손을 쓰기전에 정황이 발생하면 동무가 생각한 그 졸렬한 방법에 매달릴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두사람이고 또 인단을 파는 일이 아니라 불질을 하는 일에 들어서야 차광수가 허재률이보다 낫겠지.

《여보, 너무 직권을 휘두르지 마오. 내가 속을 모를것 같아서…》

허재률은 숨을 씩씩거리며 밭고랑을 짓이기고 돌아갔다. 차광수가 무엇때문에 경우에 맞지도 않게 어마어마한 비판을 들이대는가 했더니 결국 자기와 옥섬이를 여기서 쫓아버리자는 심산이였다. 차광수의 깊은 수에 걸려들었다는것을 깨닫자 분했으나 그의 말은 너무나 옳았다. 허재률은 억지를 쓸밖에 수가 없었다.

《그래 이것도 군사이니 그점에서는 참모장이 나보다 낫다고 하기오. 그러나 아무렴 내가 저 길림의 중대가리보다도 못하단말이요. 대사하에는 저 동무들 둘을 보내기오. 나는 못가겠소.

《동무, 그만큼 말했는데도 못알아듣겠소? 김일성동지에게 부강촌의 실태와 지금 정황을 구체적으로 보고하는것이 기본이지 여기에 남는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란말이요. 동무도 옥섬이를 데리고 가되 강을 건너서는 달구지는 떨구고 동무 혼자 달려가오. 동무의 걸음이 남달리 빠르기때문에도 동무가 가야 한단말이요. 여기에 우리가 남아있는것은 그야말로 만약의 경우에 대처한것이고 기본은 동무가 빨리 가서 김일성동지의 결론을 받는거요. 군소리하지 말고 당장 떠나오. 이건 흥정이 아니요.

허재률은 안경알너머로 엄엄하게 쏘아보는 차광수의 눈길을 피뜩 마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말았다.

얼마후 허재률은 영문을 몰라 쭈밋거리는 옥섬을 다몰아쳐서 달구지를 끌고 푸르하를 건너가고 차광수는 길림공청원과 함께 부강촌쪽으로 더 바투 접근해갔다.

 

 

22

 

 

허재률은 강을 건너 저쪽 기슭에 닿아가지고도 대사하지경으로 나서려면 고동하줄기를 타고 한참 동쪽으로 나가는편이 퍽 질러가는 폭이기때문에 달구지를 그냥 얼음판으로 때려몰았다.

옥섬은 말 한마디없이 뒤를 따랐다. 고유수에서 몇번 만나보았고 서로 소문은 다 들었지만 언제 한번 오손도손 말을 나누어볼 기회가 없었던 그들은 공교로운 정황에서 단둘이 걷게 된것이 거북하기도 하여 더구나 말을 나눌 기분이 되지 못했다. 옥섬은 그러지 않아도 뒤숭숭한 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판에 차광수를 뒤에 두고 홀로 낯선고장으로 간다는것이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한편 허재률의 복잡한 궁리속에는 지금 당장은 뒤따라오는 옥섬의 생각같은것은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고동하와 푸르하의 합수목어방에 이르러 길우에 올라섰을 때 차광수의 모든 예견은 정확했다는것이 드러났다. 으슬으슬 저물어가는 들길로 숨가쁘게 달려오는 계영춘이와 강영진이를 만났던것이다.

《이게 누구야. 허재률이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소?

분명 권총을 감춘 옆차기에 손을 찌르고 잔뜩 긴장해서 다가오던 계영춘이 이렇게 소리치며 덮쳐들고 뒤미처 강영진이가 날새와 같이 달려들어 허리를 덥석 그러안자 허재률의 무겁던 생각은 천리만리 달아났다.

《야, 오기는 오는구나, 차광수가 귀신은 귀신이다.

허재률은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며 두사람을 마주 그러안았다.

계영춘이와 옥섬이가 인사를 나누는사이 허재률은 강영진이를 통해 김일성동지께서 박훈을 비롯한 끌끌한 무장대성원들을 데리고 얼마 멀지 않은 강기슭의 빈 농막까지 나오시였으며 이들 두사람은 정찰을 위하여 한걸음 먼저 부강촌으로 나가는길이라는것을 알았다.

강영진은 그저께 부강촌에서 빠져나와 송강까지 들어갔다가 물산객주집에서 겨우 소사하 무주툰에 있는 강반석어머님의 댁을 알아가지고 찾아갔었다. 그때 마침 김일성동지께서와 각지에서 모여온 조선혁명군 성원들, 공청원들과 반제청년동맹원들은 무주툰이 군사활동을 하는데 이모저모로 불편했으므로 토기점골 갈밭속에 있는 빈집으로 자리를 옮기려고 추운 날씨에 흙매질이랑 하면서 이사준비를 하고있었다.

그럭저럭 강영진이가 토기점골까지 찾아갔을 때는 한밤중이였다. 그의 보고를 받으신 김일성동지께서는 사태의 엄중성을 간파하시고 그길로 끌끌한 무장성원들을 선발하여 떠나셨는데 방금전에 대사하를 지나 길가에 있는 빈 농막까지 오셔서 정찰보고를 기다리신다는것이였다.

《그럼 우물쭈물할새 없구만. 우리는 곧장 갈테니 동무는 어서 김일성동지한테 가라구. 저 강낭밭머리를 돌아서면 우등불이 보일거요. 길가에 누가 나와있을지도 모르오. 지금 김일성동지는 이 문제를 대단히 중요하게 보고있소.

성미가 꽤 눅진눅진한 편인 계영춘이도 허재률의 이야기를 대충 듣더니 덤비며 말하였다. 아닌게아니라 그사이에라도 차광수네한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는것이다. 허재률이 역시 새삼스럽게 사태의 엄중성을 깨닫는듯하여 달구지를 때려몰며 옥섬을 재촉했다.

계영춘이가 가리키던 강낭밭머리를 돌아 구붓하게 휘여든 길굽이를 돌아서니 저만치 대사하동네의 연기가 바라보이는데 밋밋한 둥성이아래에 과연 우등불이 타오르고있었다. 그것이 아마 빈농막인 모양이였다. 허재률이가 곧장 밭속으로 달구지를 때려몰자마자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총멘 사람들이 앞뒤에서 달려나왔다.

《어디로 가는 사람들이요?

하고 날카롭게 소리치는 사람은 장총을 비껴들었는데 자세히 보니 고유수의 김정삼이였다. 그뒤로 허리에 찬 권총을 움켜잡고 뚜벅뚜벅 틀스럽게 다가오는 사람은 박훈이였다.

박훈은 워낙 황포군관학교 시절부터 명사수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라 가죽탄띠를 엇갈아 둘러메고 목갑권총을 허리아래 느직이 걸친 품이 당장 돌격구령이라도 내릴 차비같았다.

뜻밖에 나타난 달구지군이 허재률이라는것을 알아보자 그들은 환성을 질렀다.

《이게 조화는 조화로군. 신통히 한날한시에 모여드는것을 보니 일이 괜찮게 될 모양이요.

하고 박훈은 여기서 벌어지고있는 사태를 설명하였다.

그들은 토기점골에서 소식을 듣고 그길로 곧장 부강촌으로 쳐들어갈 작정으로 길을 떠났는데 여태 김일성동지의 결론을 받지 못해 발을 얼구며 기다리고있다는것이였다.

《마침 잘 왔소. 허동무가 가서 똑똑히 보고를 하오. 뭐 명월구회의를 할 때 같아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소리를 치길래 세상에 감정이 없고 용기가 없는것은 이 박훈이 한사람인가 했더니 웬걸 정작 전투를 하자니까 모두 신중론자가 돼버렸구만. 지금이라도 부강촌을 냅다치면 혁명동지도 구원하고 총도 빼앗고 만사가 다 명월구회의정신에 딱딱 들어맞겠는데 무엇때문에 <신중> <신중> 하는가말이요.

박훈은 증이 나서 허재률이가 바로 그 《신중론자》이기나 한듯이 소리쳤다.

《누구를 그러오? 또 김정룡동무요?

허재률은 박훈이가 가리키는 농막을 향하여 발길을 돌리다가 미심결에 한마디 물었다.

《김정룡이 아니고 누가 그렇게 질기겠소? 좌우간 토기점골에서 떠날 때부터 그냥 김일성동지의 소매를 잡고 <신중> <신중> 하는데 김일성동지도 이제는 지쳐서 말도 못하는 형편이요.

허재률은 급한중에도 비죽이 웃음이 떠올랐다. 명월구회의때 안도구당비서 김정룡이 김일성동지의 연설을 듣고 너무 감격해서 질그릇같이 그슬린 얼굴에 눈물을 지으며 박수를 쳐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바로 옆에 앉았던 박훈이 역시 감격을 못이겨 김정룡의 무릎을 두들기며 목메여 방금 김일성동지께서 하신 말씀을 받아외웠다.

《총있는 사람은 총을 내고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며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여 전민족이 반일무장투쟁에 총궐기하자… 얼마나 멋이 있소. 여보, 나는 다른거 내놓을게 없으니 내 목숨을 내놓겠소!

그러던 박훈이가 김정룡이를 저쯤 험구하는것을 보니 어지간히 속이 편안찮은 모양이다.

김일성동지께서 계신다는 빈 농막으로 다가가니 허물어진 벽체사이로 우등불의 불길과 연기가 환히 번져나오는데 아닌게아니라 먼발치서부터 열이 오른 김정룡의 낯익은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일상 농민투의 소박한 말을 그것도 정 부득이 해야 몇마디씩 중얼거리는 그로서는 놀라운 정도의 열변이였다. 그런 전례없는 열변을 가지고 신중론을 주장하고있다니 더구나 고개가 기웃거려졌다.

농막이라는것은 이제 농사철이 오면 누가 손질하겠는지 지금은 이영이 다 벗겨지고 문짝도 없는데다 수수대로 엮은 벽체의 산자가 바람따라 흔들거리는 모양으로 보아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어지간히 뜯기운 꼴이였다. 자그맣게 피운 우등불을 가운데 두고 서너사람이 둘러앉았는데 등을 이쪽으로 돌려대고 앉아 진연기를 피하느라고 연신 목을 휘젓는 사람이 김정룡이 같았다.

김일성동지, 이번 일만은 나한테 타산이 좀 있습니다. 여태 손털고있다가 급한 대목에 와서 이런 말을 하는게 좀 뭣합니다만 내 본시 농민이 아닙니까.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지금이라도 부강촌문제를 푸는데는 그래도 우리 안도조직이 좀 나을것 같습니다. 내 그 안윤재도 풋낯이나 좀 압니다.

《허허허, 정룡동무, 안윤재가 정룡동무를 아는것이야 구당비서로 알겠지 허술한 농사군으로 알겠습니까.

김일성동지의 서글서글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허재률이 강력한 자력권에 끌려들듯이 펑하니 뚫린 문으로 다가가니 김일성동지께서는 부지깽이로 우등불의 밑을 천천히 헤치시는데 황황 타오르는 불길에 환히 떠오르는 그이의 얼굴에는 언제보나 다름없이 여유있는 미소가 어려있었다. 그이께서는 말씀을 이으시였다.

《누가 들어가는가 하는것은 계영춘동무가 돌아온 다음에 결정을 지읍시다. 최만득동무가 벌써 호송돼오는길이라면 부강촌에 들어가는 문제는 전혀 딴 문제입니다. 지금 박훈동무가 자꾸 부강촌을 치자고 우기는것은 최만득동무를 구원하는겸 이번 기회에 반동들의 혼을 좀 내주자는것인데 그 방법이 옳겠는지 그렇지 않으면 교섭을 하는 방법이 옳겠는지 우선 최만득동무문제부터 풀어놓고 토론해봅시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두 방법 다 썩 마음에 당기지 않습니다.

허재률은 더 문밖에서 지체할수가 없어 기척을 내고 명색만 있는 문턱을 넘어섰다.

김일성동지, 허재률이 이제야 도착했습니다.

허재률이 밀짚모자를 벗어들고 인사를 드리자 우등불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니 이게 누구요? 허재률동무가 아니요?

김일성동지께서는 학생복어깨우에 걸치고계시던 털외투를 맨봉당에 흘리시며 벌떡 일어나시였다.

《부강촌에서 이틀동안 지체하다나니 약속보다 늦어졌습니다.

《아니, 허동무도 부강촌에서 잡혔소?

김일성동지께서는 허재률의 손을 잡아 우등불곁으로 이끄시며 물으시였다.

《나라고 별수 있습니까? 내 강영진이 내뛰는것도 다 보고 최만득동무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동아운송>의 안영호덕분에 그쯤하고 나만 놓여났지요.

허재률은 제 성미대로 긴 사설을 늘어놓다가 번쩍 머리를 들고 도로 일어났다.

《그런데 김일성동지, 지금 차광수동무가 부강촌앞에서 매복을 하고있습니다. 최만득동무를 오늘중으로 압송해갈것 같습니다.

허재률이가 미처 말을 맺기전에 강건너쪽에서 총소리가 울리여왔다. 총소리는 처음에 몇방 단속적으로 울리더니 이어 어지럽게 엇갈렸다.

《이크, 벌써 시작하였군.

하고 허재률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싸움이 붙은것 같습니다.

《저기에 차광수동무가 있단말이요?

총소리에 잠시 안색이 긴장되시였던 김일성동지께서 어처구니없다는듯이 말씀하시였다.

《그럼 우린 공연히 부산을 피우며 달려온게 아니요?

?

허재률이와 김정룡이가 한꺼번에 되묻고 다른 사람들도 뗑해서 그이의 안색을 살폈다.

《됐소. 그럼 우린 앉아서 허재률동무 이야기를 마저 들어봅시다. 대체 어떻게 되여 차광수동무가 거기에 나타났소?

김일성동지께서 도로 털외투를 어깨에 걸치시며 자리에 앉으시자 허재률이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그런데 총소리가 나는걸 보니 암만해도…》

《일없소. 아무래도 총소리야 좀 나게 생겼지. 차광수가 미리 매복하고있었다면 무슨 수를 쓰는거겠지. 그러지 말고 앉소. 기왕 이야기를 시작한김에 차광수동무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렸다가 함께 가서 부강촌문제를 본격적으로 토론해봅시다. 대체 차광수동무를 어디서 만났소.

허재률은 하는수없이 도로 주저앉아 부강촌을 빠져나와서 최만득을 기다리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차광수를 만나기까지의 경위를 어지간히 헤덤비며 이야기하였다.

《그럼 옥섬동무가 여기에 왔단말이요? 참 답답하구만. 그말부터 먼저 할것이지.

김일성동지께서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곧장 밖으로 나가시였다.

옥섬은 길가에 세운 달구지옆에 붙어서서 김정삼이가 소개하는대로 박훈이와 인사를 나누고 앞뒤로 모여든 무장한 청년들에게 지금 부강촌앞에서 벌어지고있는 사태에 대해 이야기하고있었다.

총소리는 갈수록 어지럽게 울려왔다.

김일성동지께서 다가가시니 박훈은 비로소 떠날 때가 되였다고 생각하고 맞받아나와 말씀드렸다.

《총소리가 두군데서 났는데 하나는 푸르허쪽으로 멀어지더니 없어지고 하나만 부강촌방향으로 자꾸 멀어지는것 같습니다. 내가 날랜 동무들을 데리고 한걸음 먼저 달려가겠습니다.

《그만두시오. 이제 가봐야 행차후의 나발이지. 이제 차광수동무가 다 무사히 수습해가지고 올거요. 그러니 동무들은 한걸음 먼저 대사하에 가서 숙소들을 마련해보시오.

그러시고는 곧장 옥섬의 앞으로 다가가시였다.

박훈은 뗑해서 기쁨에 넘치신 그이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옥섬이가 쓰러질듯이 그이앞에 달려와 인사를 올리자 맥이 빠진 표정으로 동무들을 손짓해 불렀다.

《먼길을 오느라고 수고했소.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불쑥 나타났소?

김일성동지께서는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시여 옥섬이가 만지작거리고있는 말채찍을 받아서 김정삼이에게로 던져주며 말씀하시였다. 차광수와 토론한데 의하면 옥섬은 일정한 시기까지 돈화에 안착시키기로 되여있었던것이다.

《제가 일을 저질러서… 그래서 김일성동지의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차광수동무가 그렇게 말했단말이요?

옥섬이가 마치 철부지소녀처럼 수집음을 타며 발끝으로 길에 다져진 눈을 후벼파자 뒤따라온 허재률이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훈수를 했다.

《차광수동무가 피뜩 말하는것을 들으니 옥섬동무가 뭐 왜놈들의 총을 어떻게 했다는것 같은데 아까 그 달구지에서 꺼낸게 그 총 아니요? 그런거랑 다 말하지 않고 뭘 우물쭈물하오.

《아니 총을 어떻게 했다는거요? 일을 저질렀다는게 그 소리요?

김일성동지께서 저으기 흥미를 느끼시고 다그쳐물으시였으나 옥섬은 옆에 둘러서는 사람들때문에 점점 주눅이 들어 고개를 더 깊이 숙이고 발끝장난만 했다.

《허허, 무슨 비밀이 있는 모양이군. 그럼 그 이야기는 이따 듣기로 하고 우선 옥섬동무를 어디 따뜻한데 안내해야겠소. , 어서 헤쳐들가오.

김일성동지께서 마치 마당질에 모여든 새라도 쫓듯이 두손을 흔들어 내모는 시늉을 하시자 방금까지 전투를 한다고 긴장돼있던 청년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듯이 고개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더러는 싱글벙글 웃기도 하면서 끼리끼리 패를 지어 흩어져갔다.

이럴 때 이제는 어둑어둑해진 강낭밭머리에서 《온다―》하는 소리가 울려왔다. 아까 박훈이와 함께 길가에 숨어있던 청년들의 목소리였다.

어둠이 설핏하게 깔린 눈길우에 네사람의 모습이 까만점으로 나타나더니 이어 반달음을 놓는 형체가 뚜렷해졌다. 그들의 뒤로 총소리는 여전히 어지럽게 울려왔다.

김일성동지께서 천천히 길가로 나서시였다. 맨앞에서 달려오던 강영진이 숨을 톺으며 한옆으로 비켜서고 최만득이를 부축한 계영춘이 앞으로 나서서 차렷자세를 취했다.

김일성동지, 강을 건너자마자 적들이 나타나서 미처 련락하지 못하고 차광수동무의 지시대로 행동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시고 엉거주춤해있는 최만득의 어깨를 그러잡으시였다.

《무사히 놓여나왔구만. 어디 다친데는 없소?

《전 아무 일 없는데 차광수동지가 어떻게 됐는지…》

최만득은 저때문에 일이 크게 번진것이 미안하고 송구하여 고개를 떨구고 두손을 마주비비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껄껄 웃으시였다.

《최만득동무가 영웅이요. 무장투쟁을 하겠다고 그 먼 오가자에서 여기까지 온갖 난관을 다 물리치고 찾아왔거던. 그래 아버지랑 금실동무랑 다 잘 있소?

최만득은 로상에서 긴 말씀을 드릴수 없어 그지간 오가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짤막하게 말씀드리고 오가자사람들의 간절한 인사를 전하였다.

《변태익선생도 박창세로인도 오가자를 떠나면서 아무리 세상이 험해져도 김일성동지께서 해방된 조국으로 불러주실 날만 기다리며 살겠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김일성동지께서 무장투쟁을 벌렸으니 그날도 멀지 않았다고 모두 믿고있습니다.

《고맙소. 우리 오가자사람들의 기대에 보답합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길림에서 온 공청원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고 간단히 길림소식도 물으시였다.

그때쯤에야 강건너에서 울리던 총소리가 멎었다. 총소리가 멎으니 새로운 불안이 사람들의 가슴을 엄습하였다.

《그래 차광수동무가 어디로 갔소?

김일성동지께서는 비로소 계영춘이쪽을 돌아보시였다.

이제는 날이 다 저물어 강건너 야산우에 낫가락같이 벌거스레한 초생달이 그 무슨 흉조를 예고하듯이 솟아올랐다. 계영춘은 허름한 홑섶양복의 깃을 귀바퀴 있는데까지 일으켜세우며 뜨직뜨직 말했다.

《언제 토론해볼새가 있습니까. 우리가 가서 몇마디 말할 짬도 없이 두놈이 최만득동무를 결박해서 앞세우고 오는데 그뒤로 또 한놈이 따라오더군요. 차광수동무는 다짜고짜로 자기가 총소리를 내면 최만득동무를 데리고 뛰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는 밭고랑사이로 기여서 앞으로 나가더니 그놈들이 지나치자 뒤에서 소래기를 치며 냅다 공포를 쏘더군요. 그놈들이 얼이 훌 빠져서 땅바닥에 엎드려 차광수동무에게 불질을 하는사이 우리는 최만득동무를 끼고 뛰였는데 우리 셋이 단꺼번에 공포를 갈겨대니 그놈들은 움쩍을 못하고 차광수동무쪽으로만 쏠렸지요. 강을 건너오며 보니까 부강촌쪽에서도 총소리를 듣고 숱한 놈들이 달려나옵디다. 차광수동무는 그것들을 다 달고 부강촌 뒤산으로 해서 푸르허동네쪽으로 뛰는것 같았는데 어떻게 된 판인지… 차동무가 진짜 덜렁이는 덜렁입니다.

《됐소, 됐소. 군사에서 민첩한것은 덜렁이가 아니라 결단성이 있다는거요. , 모두들 데리고 마을로 가오. 몸을 좀 녹이고 떠납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좀 엄한 목소리로 말씀하시고 어깨에 걸치셨던 털외투를 아예 끼여입으시였다.

계영춘은 그이의 어조가 엄하기도 했지만 어쩐지 차광수한테 미안한 생각을 버릴수 없어 고개를 수굿하고있다가 걸음을 옮겨놓았다.

잠시후 빈 농막에서도 불이 꺼지고 달구지를 때려모는 김정삼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발자국소리가 멀어지자 김일성동지께서는 천천히 강기슭으로 걸어가시였다.

어느새 사위는 어둠에 묻히고 희벗하게 누워있는 강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요귀들이 장난을 치는듯 똘똘 뭉친 눈보라가 향방없이 이리 밀리고 저리 닫고 하였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것은 오직 눈보라뿐이였다.

대장간에서 설구어낸 낫가락같이 벌거스레한 초생달은 목단령산줄기의 험준한 산발아래 걸려있어서 그밑에 밋밋하게 흘러간 야산의 륜곽도 그려내지 못하였다.

《덜렁광창이라…》

김일성동지께서는 형체도 륜곽도 가려볼수 없이 그 어떤 위혁적인 침묵속에 잠겨있는듯한 대안의 컴컴한 산발을 바라보시며 길림시절부터 동무들이 남다른 사랑을 가지고 부르던 차광수의 별명을 외워보시였다.

그이께서는 아무 전제없이 무조건 차광수의 능력과 수완, 담력을 믿고싶으시였다. 허재률이의 보고를 통해 이 정황을 자신이 처리하겠다는 차광수의 결심을 인차 간파하신 그이께서는 내심 좀더 안전한 방법은 없겠는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으시였으나 정황이 너무 공교롭게 되고보니 그럴수밖에 없고 또 차광수가 거기 남아있는 한 모든 일이 다 원만히 수습되리라는 믿음이 가시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무사히 돌아온 지금 차광수를 따라간 총소리도 멎었는데 그만이 돌아오지 않고보니 크고작은 모든 일을 꼭 제손으로 처리해야만 마음을 놓는 그의 성미가 새삼스럽게 안타까우시였다.

(이제 돌아오면 든든히 오금을 박아서 안도에 꾹 눌러둬야지. 참모장이 전반사업을 봐야 한다는 생각은 하는것 같지 않거던. 지휘관이 아무데나 나서면 장차 무장투쟁을 어떻게 하겠는가.)

김일성동지께서는 마침내 무장투쟁이 일정에 오른 조선혁명의 오늘의 높이를 지향하여 차광수와 함께 걸어온 길림의 거리며 카륜, 고유수의 들길, 걸음마다 위험이 뒤따르던 왕청문과 삼원포의 아슬아슬한 밤길을 갈피없이 더듬으시였다. 이런 생각을 하는것은 공연한 불안때문이라고 세차게 도리머리를 흔드시다가도 빠작빠작 눈길을 다지시며 몇걸음 거닐지 않아서 다시금 양가대교마을에서, 료하강반에서 높이 울리던 차광수의 열변이 먼 옛일처럼 그립게 떠오르는것이였다.

어둠이 짙어갈수록 날씨는 더욱 독을 뿜었다. 살을 어이는것같은 바람이 서슬푸른 대패날처럼 얼어붙은 강판을 쌩-쌩-하고 밀어나갔다. 요귀의 장난질같던 눈보라는 어느새 거대한 대패밥처럼 타래쳐오르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질러댔다.

《이런곳에 옥섬동무는 데려와서 어떻게 하자는건가? 여기에도 차광수의 그 무슨 자기 변명같은것이 숨어있는것은 아닌가. 하기는 옥섬이가 왜놈의 총을 어떻게 했다니 모를 일이다. 하여간 지금은 우리의 신경이 쇠바줄같이 든든해야 할 때인데 모두 샌님들이다나니 색시같이 마음만 고와가지고 불필요한 자기희생을 스스로 강요하거던.

김일성동지께서는 찬바람속에 이런 말씀을 굴리시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강을 절반나마 건너가시였다.

하루빨리 유격대를 꾸리자면 중중첩첩한 난관이 앞에 가로놓여있다. 지금은 사람들이 각지에서 모여오는 단계에 있다. 그지간 조선혁명군을 비롯하여 카륜, 고유수, 오가자, 길림 등지의 공청과 반제청년동맹을 통하여 정치군사훈련을 받은 핵심들이 선발되여오고 안도에서도 지난 이태사이 자신께서 직접 키워내신 리영배며 김철희 같은 청년들이 공청생활을 거쳐 오늘은 무장활동에 참가하고있다. 안도에는 벌써 무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을 조직적인 무력으로 묶어세우고 아무때나 전투를 진행할수 있을만한 전투대오로 만들자면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할일이 산더미같다. 아직 태반의 동무들이 무기를 못가지고있을뿐아니라 무기가 있는 경우에도 사격을 할줄 모르고 사격을 할줄 아는 사람도 일정한 전투서렬을 짓고 진행하는 전투조법을 모른다. 그것을 안다는 사람은 박훈이 한사람인데 황포군관학교에서 가르쳐준 군사지식이 우리가 진행하자는 유격전쟁에 무슨 도움을 줄것인가.

그러나 어쨌든 안도는 우리가 시범단위로 정하고 조선혁명군의 지도적성원들이 다 와있으니 유격대오를 꾸리는데서나 무기를 해결하는데서 몇계단을 앞섰다고 볼수 있다. 명월구회의에서 분공을 받고 왕청, 연길, 화룡, 훈춘 등지로 떠나간 공작원들인 경우에는 사람문제나 무기문제가 다 아름차기도 하고 생소하기도 한 문제이다.

지금이야말로 과학적인 지도를 보장하는 문제가 혁명의 운명을 판가리하는 사활적인 문제로 나서고있다. 이런 때 전반적인 투쟁을 조직하고 지도해야 할 사람이 함부로 위험앞에 제몸을 내댄다는것은 좋은 일이 못된다.

《한별동무, 나 여기 있소. 어디로 가오?

타래쳐오르는 눈보라속에서 문득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이윽히 목소리의 임자를 바라보시였다.

차광수는 마치 꾸중이라도 기다리는 사람처럼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안경을 벗어서 달구지저고리안주머니에 건사하였다. 눈보라가 세찬데다 성에가 자꾸 내불려서 안경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모양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와락 차광수를 그러안으시였다.

《사람두…》

사나운 눈보라속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전우를 그러안으시는 그이의 목소리는 뜨겁게 울리였다.

《여기까지 나올건 뭐요? 내 아무러면 촌보위단한테 잘못될것 같아 그러우?

김일성동지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마주 그러안는 차광수의 목소리는 갈려서 토막토막 끊어졌다.

《여보, 당신만 용감하고 다른 사람은 뒤전에서 박수나 치는 사람이요. 어디 다친데는 없소?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러안으셨던 팔을 풀고 차광수의 어깨를 툭 치시며 아래우로 그의 몸을 살펴보시였다.

《무장투쟁을 시작하기도전에 부상부터 당하겠소. 그런데 최만득동무랑 다 무사히 돌아왔소?

《돌아왔소. 다 왔소. , 추운데 서있지 말고 어서 가기요. 가서 동무를 좀 비판해야겠소. 지금 그러지 않아도 박훈이는 부강촌을 들이치자고 하고 김정룡동무는 교섭을 하자고 의견백출인데 가만 보니 차동무가 부강촌문제에 첨예성을 더 보태놓은것 같거던.

김일성동지께서는 차광수의 한팔을 끼여잡으시고 힘찬 걸음을 옮겨놓으시며 말씀하시였다.

《나도 최만득동무때문에 부득불 걸려들어 산을 올리뛰면서도 그자들이 아득바득 접어드는것을 보고 별 생각을 다 했지요. 우리가 부강촌때문에 꽤 애를 먹을것 같단말이요.

《역시 차동무가 문제를 볼줄 알기는 아는군. 이거 간단한 문제가 아니요. 안도가 조롱박이라면 부강촌은 병모가지같은데 그놈들이 그걸 졸라매고있으니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게 됐단말이요.

《그러게말이요.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강을 다 건너 길우에 올라섰을 때 뒤에서 두세두세 조심스럽게 나누는 말소리가 몇마디 울려왔다.

차광수가 소스라쳐 권총을 뽑아들며 돌아서려는데 김일성동지께서 그의 옆구리를 다가끼시며 속삭이시였다.

《허재률이와 계영춘이요. 모르는체하고 가기요.

바람소리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눈보라는 무수한 비수묶음처럼 만물을 란도질하였다.

그래도 후더운 마음을 안고 앞뒤로 서로 옹위하며 걸어가는 밤길은 어디선가 함께 부르던 사랑하는 노래라도 울려올것 같은 포근한 정서를 몰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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