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석윤기

(제11회)

제 1 편

 

17

 

안영호오누이를 마중갔던 마차는 이튿날저녁에야 돌아왔다.

안윤재네 집에서는 아들딸을 맞이하기 위하여 잔치나 다름없는 차비를 하고 기다렸다. 딸 부금은 해마다 이맘때면 겨울방학이니 의례 돌아오게 마련이지만 영호로 말하면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걸핏하면 빠져나가자고 하기때문에 올겨울에는 어떻게나 집에 끌어들여다 혼사를 치르자는것이 안윤재내외의 속심이였다. 서울나가 중학공부를 할 때는 련애바람과 사회운동바람이 함께 나서 경찰서신세까지 져가며 속을 썩였었다. 어찌어찌해서 경찰서에서 빼내놓으니 사회운동바람은 잦아들었으나 그때 되게 맞은 련애바람은 결국 심화병이 되여 몇해를 두고 원귀처럼 묻어다녔다. 알고보니 같이 사회운동을 하던 녀학생과 장래를 약속했는데 경찰서를 다녀오고보니 그 녀자는 다른놈이 차고 어디로 종적을 감추었다는것이였다.

안윤재는 외아들이 허울만 남아서 돌아가는 꼴이 보기 싫기도 했지만 그따위 빨갱이물이 든 계집을 집에 끌어들이는것을 내쳐둘수 없었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한 그는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혼처를 물색하던중 마침 교하의 장철하가 그럴듯한 자리를 알선해주었다. 사돈될 사람은 송강에 있는 포목상으로서 장철하가 내도산에 드나들 때부터 독립군 뒤바라지를 해준 착실한 사람이였다. 정작 인연을 맺고보니 안윤재자신과도 길림에서 몇번 만나본 사람이였다. 게다가 그의 처남이 바로 안도경찰을 쥐락펴락하는 장상민이였다. 집안으로 보나 가산으로 보나 다 탐탁하였다. 거기에 규수가 룡정 영신녀학교를 올해에 졸업했는데 딸 부금의 말을 들어보면 품행이 방정하고 자색 또한 뛰여나지는 못한다 해도 훤한 편이였다.

송강에 나가 선을 본 안윤재는 신부도 마음에 들었지만 사돈댁의 집안에 반해버렸다. 그자리에는 장철하가 교하에서 일부러 나올수가 없어서 자기 대신 보낸 량강구의 지대현이도 함께 앉아있었는데 그 역시 이 혼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송강과 부강촌이 그리 멀지도 않아서 다음부터는 중매를 거침이 없이 두집사이에 몇번 사람이 드나들자 혼담은 일사천리로 진척되여 드디여 신춘에는 화촉을 밝히기로 하고 택일까지 다 해버렸다. 그런데 신랑될 영호가 말을 잘 안듣는것이였다. 본시 녀자때문에 얼이 빠진 녀석이라 처음에는 그럴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사돈댁 몰래 얼리고 쓰다듬다못해 나중에는 한 절반 강압적으로 내리누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금이를 통해 룡정에서 직접 본인당자끼리 교제를 하도록 갖은 수를 다 썼다. 몇번 만나서 해란강기슭을 거닐기도 하고 극장구경을 다니기도 한다는 소식이 딸한테서 오더니 그렇게 당나귀발통처럼 뻗치던 녀석이 어떻게 마음이 돌아섰는지 잔치날자를 받아놓았다는 편지를 받고도 가타부타 말을 안했다. 드디여 일은 농익었다고 생각한 안윤재는 소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사돈댁과 짜고 량쪽에서 아들딸을 다 불러내렸다. 하기는 신부도 마침 학교를 마쳤겠다 룡정에 남아있을 필요도 없었지만 영호가 룡정에 그냥 눌러있다면 장차 새살림을 어디다 마련할것인가 하는것도 문제였다.

안윤재생각에는 꼬박꼬박 출근을 해봐야 한달에 30원씩 받는다는 동아운송의 월급쟁이자리가 그리 탐탁치도 않았다. 게다가 한때 사회운동바람까지 쐬운 아이를 시국이 소연한 때 제꺽하면 사상사건을 빚어내군하는 말썽많은 룡정거리에 내보내고싶지 않았다. 부강촌에만도 좀 할 일이 많은가. 3.1만세후 고향 정주에서 노랑진 땅을 다 팔아 종이돈을 전대에 넣어 둘러띠고 처음 만주로 건너올 때는 쪽배를 타고 망망대해에 나선것같이 불안하기도 하였다. 아닌게아니라 남만일대로 어질어질 돌아치다가 독립군들한테 전대를 적지 않게 털리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정 죽을 고비에 맞다들면 용기도 나는 법이다. 제 주머니를 적지 않게 축내여준 당시는 위세가 뜨르르하던 독립군중대장 지대현의 주선으로 이 부강촌의 황무지를 땅값보다 몇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교섭비를 들여 사들이는데 성공하였다. 그때 지금은 우사령부대에 쫓겨 대포시하쪽에 가있는 안도의 대지주 쌍병준에게도 베개통같은 아편덩이를 몇덩지씩이나 안겨주었다. 정작 땅을 사놓고보니 그다음은 밑천이 딸려 애를 먹었지만 그럭저럭 이주민, 류랑민들을 불러들여 힘든 개간의 몇해를 보내고나니 이제는 부강촌이 그 이름과 같이 기름진 땅이 되였다.

이제 안윤재는 부강촌의 땅임자일뿐아니라 무슨 농장주비슷하기도 하고 때로 그자신이 잠자리에서 혼자 생각하는것처럼 비록 작기는 하나 부강촌이라는 나라의 제왕 같기도 한 절대적인 권리와 권위를 가지게 되였다. 동네에 안윤재의 손아귀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후에 역시 장철하의 반연으로 많지 못한 땅을 강건너에 장만해가지고 이사해온 오별장과 주야로 술에 취해 돌아가는 남칠이가 있을뿐인데 남칠이는 말할것 없고 오별장까지도 어느모로 보나 겨룰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쪽에서도 재력으로나 권력으로나 감히 안윤재와 맞설 생각을 안하고보니 이쪽에서는 오히려 맨 거지같은 이주민들을 긁어모은 농사군들 틈에서 그래도 말마디나 나눌수 있는 인간이 있어주는것이 심심찮아서 좋았다. 오별장의 아들딸이 다같이 룡정에 나가 공부를 하는데 방학때면 돌아와서 두집사이를 오고가며 노는것을 바라보는것 또한 하나의 락이였다. 다만 영호의 말을 들어보면 오별장의 아들 오정혁이 역시 한때 영호가 맞았던것 같은 사회운동바람을 맞은것 같다며 하며 그때문엔지 이 근년에는 집에 잘 나타나지도 않는다.

어쨌거나 부강촌은 안윤재의 소왕국이였다. 도시나 철도연선과 멀리 떨어져있는 이 편벽한 고장에 외계의 영향은 거의 미치지 않거나 혹은 미친다 해도 매우 늦게 그것도 길림이나 심양 혹은 룡정 같은데서 대포소리가 울렸다 하면 부강촌에는 한달쯤 지나서 모기소리만 하게 울려왔다. 안윤재는 옛날 평안감사부럽잖게 활개짓을 하며 푸르하기슭을 오르내렸다. 그런데 일제가 9.18사변을 일으키고 전 만주를 먹어치우겠다고 나섰다. 거기에 또 공산당이 지주를 타도하라고 소작인들을 충동질해서 흉흉한 소문이 그칠새없이 날아들어온다. 어제는 간도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더니 뒤미처 또 돈화쪽에서 폭동이 터졌다고 한다. 왜놈들이 쳐들어오니 국민당통치가 허물어져서 저 훈춘, 연길, 왕청쪽에서는 소작인들이 추수투쟁을 일으켜 도조를 몽땅 잘라먹었을뿐아니라 어떤 고장에서는 지주를 때려몰아 내쫓았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안윤재는 어금이를 앙다물었다. 돈과 아편덩이를 아낌없이 털어내여 지대현이를 통해 우사령에게 섬겨바치고 총을 구해들였다. 마을의 젊은것들을 뽑아 보위단을 조직하고 스스로 단장이 된 안윤재는 이렇게 해서 부강촌을 왜놈과 공산당을 다 반대하는 요새로 만들 작정이였다. 왜놈에게든 공산당에게든 부강촌에서 털리는 날이면 안윤재는 다시 이 세상에 솟아날 땅이 없다. 왜놈이 쳐들어온다면 물론 한개 동네의 보위단으로 그걸 막아내기는 어려울것이다. 그때는 우사령부대가 있지 않는가. 우사령 역시 시국에 대해 자기와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있었다. 그는 자기 휘하의 병력을 가지고 안도의 험준한 지세에 의거한다면 왜놈이 설사 10만대군을 몰고온대도 끄떡없을것이라고 장담하였다. 우사령의 고문격으로 들어앉아있는 지대현이도 한때는 한다하는 독립군 중대장으로서 남호두에서 우사령부대가 왜놈들과 첫 싸움을 할 때 훈수를 괜찮게 해서 기관총까지 빼앗았다고 한다. 그 역시 왜놈들이 좀해서는 안도땅을 범하지 못하리라고 했다. 그러니 문제는 공산당을 막는것이다.

안윤재는 공산당잡이때문에 처음 황무지를 개간할 때보다 더 왕성한 정력으로 일하였다. 그래도 일이 뜻대로 되는것 같지 않았다. 보위단에 끌어넣은것들이 다 안윤재의 땅을 부쳐먹고사는것들인데 사람을 잡아들이라면 상을 찌프린다. 군사훈련을 하라고 해도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다. 그렇다고 젊지 않은것이 매번 따라가며 잔소리를 하고 사람을 치고 때릴수야 없지 않는가.

그럴 때마다 아들이 그리웠다. 이럴 때 젊은것이 돌아와서 총을 차고 주인자리에 척 앉아있으면 감히 어느놈이 건달을 피우고 왼새끼를 꼰단말인가.

이래저래 안윤재는 이번에 성례를 올리고 그 달음으로 영호를 부강촌에 눌러앉힐 작정이였다. 그러나 아들이 말을 들어주겠는가. 이제는 혼사를 치르는것까지는 별말썽을 부릴것 같지 않지만 부강촌에 눌러앉아 보위단일을 맡아보라고 하면 펄쩍 뛸지도 모른다.

안윤재는 아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전에없이 마차차비를 잘해서 명월구정거장까지 내보내고는 푸짐한 상을 차려 아들을 맞이할 차비를 하였다.

낮에 량강구에 사람을 띄워 지대현이까지 청했다. 지대현이는 우사령이 요즘 괴악한 날씨에 담이 심하게 도져 조석으로 침을 놓고 뜸을 떠야 하기때문에 곁을 떠날수 없다고 완곡히 사양하는 대신 신랑에게 18편짜리 상등백삼 한근을 선물로 보내여왔다.

지대현이가 못오고보니 청한 손님들이라는것이 오별장 한사람을 내놓고보면 모두 집안사람이나 같았다. 거기에 오별장은 자기 딸 정란이도 같이 오는만큼 그 역시 이 집안잔치의 절반 주인은 되는셈이라 두루 분위기가 화락하였다.

그런데 정작 마차가 들이닿고 기다리던 아들딸들이 내려서 복잡한 문안인사랑 친지들의 안부들을 묻고 도중옷을 갈아입고 상앞에 마주앉게 됐을 때 보니 영호의 태도는 어찌 표표한지 마치 면도칼 같아서 말을 붙이기가 무서웠다.

《이사람, 소문을 듣자니 왜놈들이 간도땅은 다 먹었다는데 필시 룡정은 더할테지?

오별장이 이렇게 묻자 영호는 무릎을 꿇고앉아 딱딱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룡정뿐아니라 전 만주에 왜놈들이 차고넘쳤습니다.

《그래 왜놈들과 해보자는 사람은 하나도 없나?

《시세에 엇나가는것을 본도로 보는 공산당이 입으로 반일을 웨치는외에는 모두 제 밥벌이에 바빠돌아갈뿐입니다.

《그래 살기가 조련찮겠군.

《사람이란 아무리 짓밟아도 숨통만 막히지 않으면 살아가게 생겼습니다.

어찌나 격식바르게 차리고앉아 비틀린 소리만 하는지 무슨 말을 해도 두마디 안쪽에 실머리가 끊어지고말았다.

《거 <동아운송>이라는데가 <마루보시>보다 더 크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그렇게 크나?

보위단의 소대장 기득이가 이렇게 말머리를 돌리자 안영호는 돌아도 보지 않고 쌀쌀하게 말했다.

《<마루보시>는 전국에 널린 관영이나 다름없는 기업인데 <동아운송>이 <마루보시>보다 더 크다는것은 허망한 소릴세. 부강촌의 촌놈들이나 할 어리석은 수작이지.

비록 나이는 자기보다 아래지만 상전의 자식이라 괴여올리느라고 한 말을 이처럼 푸접없게 잘리우고보니 소대장이라는자는 입맛이 써서 술 한잔을 제손을 부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들이 다니는 《동아운송》이 무슨 굉장한 회사인것처럼 선전한 장본인은 원래 안윤재자신이였기때문에 그도 목덜미까지 벌개져서 외면하고 말았다.

좌석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안영호가 이렇게 나오니 술자리는 차츰 랭각되고 술맛도 써져서 한사람, 두사람 핑게를 대고 물러가기 시작하다가 곧 자리를 파하고말았다.

안윤재는 아들의 소행이 괘씸했지만 그가 하는 말이 막 틀린 소리도 아닐뿐더러 어딘지 모르게 위압도 되여 서뿔리 말을 붙이지 못하고 눈치를 흘끔흘끔 살폈다. 그런데 술자리를 거두던 식모며 안식구들이 다 사라지자 영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사이 부강촌의 형편에 대해서는 마차를 타고오면서 대강 들었습니다. 아버지 수고가 많았습니다.

《내가 수고랄게 있느냐. 그게 다 내 집일인데…》

뜻밖에 아들의 치하를 받고보니 안윤재는 방금 편안찮던 속은 어디로 가고 오히려 아들이 점점 어렵게 생각되였다.

《천하가 뒤흔들리는 판이니 제집일이라고 욕심만 부려서 모든 일이 다 잘될수도 없지요. 문제는 대세를 가려볼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아버지가 아낌없이 가산을 갈라내여 무장을 구해들인것은 아주 잘한 일입니다. 돈 몇푼이 아까와서 바들바들 떨다가 땅과 집을 몽땅 떼우고 목숨까지 잃은 지주가 간도쪽에는 많습니다.

《그런 모양이더군.

《아버지는 그래 장차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안영호는 술을 먹어서 낯색이 파릿해지고 눈꼬리가 까부장해져서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찔게 있느냐, 왜놈들이 이 산골까지는 들어오지 못할게다. 우사령도 그렇게 말하더라.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공산당만 잘 막아내면 된다.

《그건 말도 되지 않는 소립니다.

안영호는 코웃음을 탁 치며 말했다.

《왜놈들은 벌써 이런 구석진곳만 남겨놓고 전 만주를 다 타고앉았어요. 그달음으로 중국관내까지 넘보고 나아가서는 전 동양을 제패하겠다는 판인데 부강촌에 못들어와요? 우사령 같은 어리석은자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왜놈들이 당장 부강촌에 들어오지 않는것은 부강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이런 구석진곳은 차츰 두고보자는 심산에 불과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한겻도 못걸려 문질러버릴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말이냐?

안윤재는 기가 질려 표표한 아들의 기색을 살폈다.

《어찔게 없어요. 왜놈들을 막을 힘은 없어요. 우사령부대같은 오합지졸을 열개나 백개씩 갖다대도 견디지 못해요. 그러니 천하의 일은 이미 끝장이 났어요. 다만 할수 있는것은 공산당을 막아내는것밖에 없어요. 왜놈한테 먹히우면 그래도 살아나갈길이 있지만 공산당한테 먹히우면 그날로 껍데기를 싹 벗기울겁니다.

《그렇다. 그건 그렇단말이다.

부자간은 비로소 뜻이 통하여 밤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18

 

 

이튿날아침 안영호는 상범이로부터 명월구 인단장사가 좀 만나잔다는 전갈을 받고 그길로 창고에 왔다.

허재률은 거적때기를 쓰고 누워서 최만득이와 어떻게 하면 이 같잖은 감옥을 빠져나갈것인가, 답답한 궁리를 짜내다가 바깥에서 보초랑 상범이가 쑥덕거리는 소리를 듣고 벌써 안영호가 왔다는것을 눈치챘다.

《이제 온 모양이요. 저 사람이 아마 나를 괄세하지는 못할거요. 그러나 애비가 한노릇이니 제 마음대로 할수 있겠는지 그건 모르겠는데 하여간 정 험하게 되지는 않을것 같소.

《여기 보위단원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그 사람이 마음은 좋은것 같아요. 그러나 사상적립장을 다 드러내놓지는 말라요.

최만득이도 어느정도 얼굴에 화색이 돌아서 이렇게 말한다.

창고문을 여느라고 보초가 낑낑 힘을 썼다. 육중한 통나무문인데다 이제는 사개가 다 물러나서 쇠를 채우지 않아도 한번 열자면 힘이 들고 그나마 찌걱찌걱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낸다. 간밤에도 늦도록 이 창고를 빠져나갈 궁리를 해봤지만 문이 이 모양이라 도저히 불가능한것으로 락착짓고말았다.

《인단장사! 나와!

방금 문앞에서 얼씬거리던 안영호는 간곳 없고 상범이가 꽥 소리쳤다.

허재률은 고개만 돌려보고 못본체 누워있었다.

《나오라는데 귀가 멨어?

《아침부터 왜 야단이야?

허재률이도 맞받아 소리쳤다.

《야, 이것봐라! 막 행악이다.

상범은 이렇게 말하다가 뒤를 한번 힐끔 돌아보더니 참을수밖에 없다는듯 《네가 만나자던 단장 아들이 왔단말이야.》 하고 귀띔하였다.

《단장 아들이 왔으면 이리로 오라고 해!

허재률은 누운채로 소리쳤다.

《허, 저런.

상범이가 기가 차서 중얼거리는데 그를 밀치고 안영호가 나타났다.

《여전히 기세가 대단하오그려? 그러니 인단장사 허울이 인차 드러나지요. 일어나시오. 내 안영호요. 어떻게 이 모양이 됐소?

안영호는 거적때기를 들추며 상냥하게 말했다.

그제야 허재률이도 슬그머니 일어나앉으며 빙그레 웃었다.

《내 영호씨의 힘을 믿고 크게 놀아보자 했더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구만.

《여기 부강촌에서는 공산당이라면 제자식 목도 달아매는 판이요.

안영호는 쓸쓸한 미소를 띠며 한옆에 누워있는 최만득을 주의깊이 살펴보았다.

《그러니 내가 공산당이요 뭐요? 애매한 인단장사를 붙잡아놓고 너무하지 않소.

《자, 객적은 소리는 그만하고 일어나시오. 우리 집에 갑시다. 허재률씨는 부강촌이 구석진데라니까 너무 허술하게 본것 같소. 우리 아버지도 당신이 공산당이라는걸 제꺽 알아봤소.

《영호씨의 엄친께서 관상이라도 보시는 모양이요?

허재률은 꽛꽛해진 무릎을 엇갈아 펴고 절뚝절뚝 간신히 일어나는척했다.

《저 트렁크도 아예 가지고갑시다. 우리 아버지가 관상은 보지 못해도 사람의 속은 곧잘 꿰뚫어보지요. 나는 룡정에서 허재률씨를 만나 어딘가 변장을 하고 다니는 혁명가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누이동생도 그런 말을 했지만 우리는 그때 허형의 의협심과 용감성을 너무 고맙게 생각했기때문에 그런것을 캐보려고 하지도 않았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첫눈에 허형을 공산주의자로 알아봤소.

《뭘 보고 나를 공산당이라고 한단말이요?

《갑시다. 가면서 이야기합시다. 뭐 궁리야 많지요.》하고 안영호는 허재률이 옷자락을 여미고 걸어나서자 제 손으로 그의 트렁크를 들고 뒤따르며 말했다.

《앞으로 또 이런 변장을 하겠으면 리력도 비슷하게 고치는게 좋겠소. 당신의 바른손 가운데손가락의 끝마디에 콩알같은 굳은 살이 박혀있는데 그건 계속 붓대를 쥐고있는 사람에게만 생기는거요. 인단장사에게는 그따위가 생길수 없지요. 우리 아버지도 공산주의와 해보자니 눈을 밝힌단말이요.

허재률은 내심 놀랐다. 그러나 그자리에서 굽어들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되여 응수하였다.

《여보, 인단장사는 붓질을 안하는줄 아오? 나도 회계를 보고 도매상과 문서거래를 하자면 붓질을 당신만큼은 하게 된단말이요. 그리고 나도 한때는 학교에 다닌적도 있단말이요.

《자, 그만두고 어서 갑시다. 그러지 않아도 당신이 동흥중학고에 다녔다는걸 나도 아오.

허재률은 어지간히 기가 질렸다. 이자의 정체가 무언가? 그때 신세갚음을 하겠다고 약혼녀랑 누이동생이랑 같이 변해루반점에서 한상 차려놓고 자기를 청했을 때 만나본간으로는 어딘가 도시인테리같은 섬약하고 의지박약한 인간으로 느껴졌었다.

해란구당비서를 통하여 그와 련계를 맺어준 《동아운송》의 조직원의 말을 들어봐도 평소 운송부의 사업이나 생활에서는 과묵하고 정치적색채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월급쟁이인데 그래도 반일감정은 뚜렷하고 정의감도 있는 청년이라는것이였다.

지금 말하는걸 들어보면 안윤재란 그 애비도 만만치 않고 이 안영호란 인간은 더욱 기분나쁜 존재로 느껴졌다. 나오는 잡도리가 자기는 어떻게 살려줄듯한데 최만득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기부터 조심스러워진다. 서뿔리 말을 비쳤다가 농사군이 먹고 살길을 찾아간다고 내우기는 최만득에게 더 불리한 그늘을 지워놓을것도 같다. 동생이라고 한 강영진이가 내뛰였기때문에 최만득은 그러지 않아도 빠져나가기가 헐치 않게 되였다.

허재률이 복잡한 생각에 잠겨 안영호의 뒤를 터벌터벌 따라가는데 안윤재네 집과 엇비듬히 마주서있는 기와집에서 두 처녀가 반달음으로 달려나오더니 주춤 멎어선다.

《아이, 오빠, 웬 트렁크예요? 다 헐어빠진걸…》

이렇게 손벽을 치며 마주 달려오는것은 허재률이도 만나본 바로 안영호의 누이동생 부금이였다.

《낯이 익지 않니? 이 트렁크가 바로 너때문에 이 꼴이 됐다. 어서 인사를 해. 허재률씨다.

《어마나.

부금은 다시 손벽을 치더니 길다란 진자주빛 털목도리를 잡아당겨 두손에 움켜잡고 얌전히 절을 하였다.

《그사이 편안하셨어요?

《반갑습니다. 장사길을 찾아 돌아다니다나니 이렇게 부금씨네 동네에까지 흘러왔군요.

허재률이도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정란씨도 인사하십시오. 내 언젠가 말한 그 인단장사입니다.

정란이라고 불리운 부금이또래의 녀학생은 호기심이 어린 눈을 반짝반짝 빛내더니 허리를 살짝 굽히며 절을 하였다.

《오정란입니다. 부금이한테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만나뵈옵게 되여 정말 반갑습니다.

허재률은 이 처녀가 바로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공청원 오정혁의 누이동생이라는것을 눈치채고 정중히 허리굽혀 절을 하였다.

《이거 명색없는 인단장사를 이렇게 대해주니 고맙습니다.

《저희집에도 한번 놀러오십시오.

오정란은 다시한번 가볍게 허리를 굽혀보이고 부금의 손을 잡고 옆으로 비켜섰다.

《고맙습니다.

허재률은 안영호의 뒤를 따라가며 눈인사를 하였다.

부금은 정란에게 손을 끌려가면서 자꾸 이쪽을 돌아본다. 정란이 몰래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허재률이와 눈길이 마주치면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눈인사를 다시 하군하였다.

안영호는 허재률을 자기 집 사랑방에 데려다놓고 잠간 안방에 다녀오겠다고 나갔다.

아버지와 무슨 의논을 하는 모양이였다. 간간이 안윤재의 탁하게 갈린 목소리가 사랑방에까지 울려나왔다.

허재률은 담판이 힘들게 진행된다는것을 느끼였다. 보나마나 영호는 자기나 놓아보내자는 청을 드렸을것은 뻔한데 아버지는 그것마저 잘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즉 최만득의 문제는 말해볼 나위도 없는것이다.

혼자 무료하게 기다리며 방안을 살펴보니 누구의것인지 모를 금석문탑본의 족자가 한점 걸려있고 한쪽구석에 바둑판이 놓여있는외에 목침이 몇개 딩굴뿐 아무런 장식도 가구도 없는 휑한 방이였다. 시골지주의 융통성없는 성품이 그 방치장에서도 풍겨왔다.

얼마후 안채에서 부금의 목소리까지 섞여나왔다. 허재률은 쓴웃음을 짓고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오정혁이 부강촌혁명화란 상상할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가 비판은 받았지만 지금 동네분위기로 보면 역시 간단한 문제 같지를 않다. 그런데 안윤재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것은 일단 리래할수 있다 치고 신교육도 받았다는 안영호가 혁명을 그처럼 적대시하는것은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다. 아버지의 재산이나 넘겨받아서 잘살아보자는 속물인가, 공산주의에 대한 악선전에 넘어간 팔삭둥이인가? 어느쪽도 딱 맞아떨어지는 대답같지를 않았다.

뜨락에 인기척소리가 나서 허재률은 천천히 일어나앉았다.

살며시 문이 열리더니 부금이가 간단한 주안상을 차려들고 들어온다.

《아까 동무하고 같이 가시는걸 봤는데 왜 벌써 돌아왔습니까?

《허재률씨는 오빠에게만 귀한 손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저한테는 더 귀한 손님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소홀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상머리에 고개를 푹 떨구고 말하는 부금의 목소리는 떨리였다. 간신히 절반쯤 쳐드는 얼굴을 봐도 눈등이 발깃하게 물들어있고 입귀가 알릴듯말듯 푸들거렸다. 금시 울음이라도 터칠것 같았다.

《뭘 미안할게 있습니까. 난 장사길을 가다가 여기서 잡혔습니다. 이틀밤을 창고에서 묵었는데 그래도 부금씨남매를 만나서 이렇게 풀려나오니 정말 저승에서 부처를 만난 심정입니다.

부금은 허재률의 얼굴을 원망스럽게 치떠보더니 무릎을 감싼 치마자락을 꼬깃거리며 말했다.

《그런 실없는 말씀은 이젠 그만 하세요. 오히려 사람들의 웃음을 살뿐입니다. 저는 허재률씨가 순수한 인단장사였다면 오히려 슬펐을거예요.

《그건 무슨 말입니까?

허재률은 어쩐지 긴장되는것을 느끼며 물었다.

《제 생각은 구태여 말하지 않으렵니다. 우리 아버지와 오빠는 공산주의라면 질색입니다. 그들은 아마 허재률씨가 진짜 인단장사였다면 더 반갑게 맞이했을테지요. 그러나 허재률씨가 혁명가이기때문에 지금 오빠와 아버지는 다투고있답니다. , 추운데서 고생하셨는데 우선 한잔 드시고 몸을 녹이십시오. 이제 곧 오빠가 올것입니다.

부금은 자그마한 놋잔에 따끈하게 데운 약주를 따랐다.

《그만두십시오. 나는 술을 할줄 모릅니다. 그런데 오빠와 아버지는 무엇때문에 다투는가요?

《말하기도 부끄러워요.

하고 부금은 분한듯이 치마로 감싸서 일으켜세운 한쪽무릎에 턱을 고이고앉아 숨을 쌕쌕거리더니 재빨리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도 오빠도 공산주의라면 질색입니다. 그런데 오빠는 허재률씨의 구원을 받았으니 그 신세갚음을 해야 된다는것이지요. 아버지는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오빠한테 지고말거예요. 아버지가 공산당을 반대한다는것은 맹목적이고 우사령부와 안도경찰의 압력때문이지만 우리 오빠는 한때 공산주의물이 들어서 류치장신세까지 지고나온 사람이기때문에 공산주의내막을 환하게 알지요. 그러니 두분이 싸워봐야 적수가 될수 없지 않아요. 그러나 결국 오빠도 허재률씨를 은인으로서 성의있는 대접은 하지 못할거예요. 아버지뿐만아니라 온 동네가 지켜보기때문에 오빠도 립장이 난처하답니다. 저 그러지 말고 저의 오누이 립장을 봐서라도 이거 한잔 드십시오.

부금은 얼굴이 빨갛게 물들면서 부어놓은 술잔을 가리켰다.

《예, 들겠습니다. 그리고 솔직한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습니다.

허재률은 순진한 녀학생의 몸으로 립장이 옹색하여 술상을 차려들고 들어와서 권하는 부금이의 심정이 정말 고맙게 생각되여 그가 더 거북해하지 않도록 별로 잘하지도 못하는 술을 한잔 쭉 들이켰다.

허재률은 안주를 집고 부금은 다시 술을 따랐다. 안에서는 여전히 론쟁소리가 울리여나왔다.

《부금씨, 실례지만 오빠는 원래 공산주의를 신봉한적도 있다는데 어떻게 되여 오늘에 와서는 공산주의를 그처럼 미워하게 됐는가요?

부금은 치마자락을 꼬깃거릴뿐 잠시 말이 없더니 이윽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허재률씨가 공산주의자라면 이 이야기는 아마 욕으로 들리실지 모르겠어요. 또 제가 아는것이 다 정확한건 아니예요. 우리 오빠는 그에 대해서는 집안에서도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그러니 귀결에 얻어들은 소리가 많아요.

하고 부금은 미리 량해를 구하고나서야 질문에 대해 대답하였다.

《오빠는 서울 나가 중학교에 다닐 때 최태건인지 최태성인지 하는 큰 혁명가를 알게 되고 곧 그 사람의 제자 비슷하게 됐답니다. 그 사람은 일본의 무슨 대학을 다니다 나온 사람인데 공산당의 큰 인물이라더군요.

《혹 최태현이라고 하지 않습디까?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그 사람한테서 책도 빌려보고 무슨 리론에 대한 지도도 받고 하면서 오빠는 그 사람이 시키는대로 로동판에 나가 연설도 하고 야학선생질도 하고 별일을 다 했대요. 그러느라니 학교공부는 아주 돌아보지 않았지요. 그때 오빠한테는 애인이 있었답니다. 오빠는 그 애인에게 또 공산주의사상을 물들여놓았지요. 그리고는 그 최태건인지 최태현인지 하는 사람한테 소개시키고 지도를 받게 했답니다. 그후 오빠는 학교에서 동맹휴학을 조직하라는 그 사람의 지시를 받고 활동하다가 본정 경찰서에 체포되였어요. 그때 아버지가 집에 있는 돈을 몽땅 꾸려가지고 서울로 올라갔지요. 오빠는 그 최가라는 사람을 불기만하면 간단히 나올수도 있는것을 끝끝내 뻗치다나니 매도 많이 맞고 아버지는 가져간 돈이 모자라 집에서 또 돈을 부쳐보내서 교제비를 썼지요. 그렇게 해서 검사국에 넘어간것을 겨우 불기소로 빼내기는 했는데 너무 고문을 심하게 당해서 그길로 병원에 입원하지 않으면 안되게 됐답니다. 그러나 오빠가 병든것은 육체상타격에서 온것만이 아니였어요. 감옥에서 나와보니 애인이라는 녀자는 그 최가가 꾀여가지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버렸답니다. 동무들을 통해 수소문해보니 여름방학에 농촌계몽을 나간다고 데리고나가서 자취를 감추었다는겁니다. 오빠는 몇달만에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그 함경도 어디라는 농촌으로 가봤지만 최가도 그 녀자도 만날수 없었습니다. 오빠는 그때부터 허울만 남아서 졸업을 몇달 앞둔 학교도 그만두고말았지요. 금년봄에 난데없이 그 녀자한테서 편지 한장이 날아왔어요. 죄많은 자기를 용서해달라는 내용이였어요. 자기가 최가의 지시로 농촌계몽에 따라나선 때로부터 그자에게 몸을 더럽히게 된 경위를 쓰고 이제는 아무리 죄를 씻자고 해도 씻을수 없는 몸이기때문에 스스로 자기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는거였어요. 오빠는 괘씸한 생각같아서는 돌아보고싶지도 않았지만 문맥이 수상해서 찾아가보았답니다. 그랬더니 그 녀자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자그마한 어촌에서 죽은 아이 하나를 낳아놓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는겁니다. 최가는 녀자를 그렇게 못쓰게 만들어놓고 또 무슨 녀자혁명가 하나를 데리고 북선지방을 돌아가다가 상해로 달아나고 없더라나요. 오빠는 그때부터 공산주의라면 이를 간답니다.

허재률은 숨을 쉬기가 가빴다.

《부금씨, 안됐지만 그 문을 좀 열어놓지 않겠습니까?

《아니 왜 그러세요. 바깥날씨가 찬데…》

《너무 답답해서 그럽니다. 본시 술을 못하다보니…》

《그래요?

부금은 허재률의 다른 측면을 엿본것 같아 눈을 흡떴다.

《그렇습니다. 내가 인단장사랑 하고 다니니까 술을 괜찮게 할줄 알지만 사실은 보리밭머리만 지나도 취해서 쓰러진답니다.

《설마…》

부금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우고 웃었다. 허재률이도 웃었다. 그러나 허재률의 눈에는 깊은 고뇌의 빛이 어리였다. 그가 가슴이 답답하다고 한것은 실상 방금 들은 이야기에서 받은 충격때문이라는것을 부금이도 느꼈기때문에 미닫이를 방싯하게 터놓고 그의 표정만 지켜보고있었다.

《부금씨, 내 그 최태현이라는놈을 잘 압니다. 바로 우리 고향사람입니다. 작년가을에 그놈이 그 녀자혁명가인지 뭔지 하는것을 차고 우리 고향에 나타났댔습니다. 그때가 바로 오빠의 애인을 못쓰게 만들어놓고 달아난 때인것 같습니다. 올봄에 그놈은 우리 고향 청년들의 규탄을 받고 중국관내로 내뺐습니다. 그놈이 우리 고향사람들을 못쓰게 만들어놓은것도 한두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그게 모두 사실이군요.

하고 부금은 한숨을 섞어 중얼거리더니 물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공산주의자가 옳기는 옳군요?

허재률은 또다시 가슴을 쥐여뜯고싶도록 숨이 가빠오는것을 느끼였다. 그는 어떤 발작적인 웨침이 터져나오려는것을 가까스로 참고 조용히 말했다.

《부금씨, 내 솔직한 말인데 부금씨의 아버지나 오빠가 나를 공산주의자로 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확했습니다. 내가 부금씨앞에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인정하는것은 내가 완성된 공산주의자가 되여서가 아니라 공산주의를 열렬히 지향하는 사람으로서 공산주의의 영예를 내 목숨을 내대고라도 옹호해야 하겠기때문입니다. 부금씨.

하고 허재률은 열정적으로 말하였다.

《만민평등의 공산사회를 구현하기 위하여 인류의 가장 우수한 아들딸들이 자기 목숨을 티끌과 같이 내던졌습니다. 그것은 력사에 기록되여 아름다운 추억으로 우리 후손들에게 길이 전해질것입니다. 먼곳의 실례는 그만둡시다. 지금 일제가 9.18사변을 도발하고 전만주를 강점하였습니다. 누구도 일제를 향해 고함소리 한번 치지 못했습니다. 수십만 군대를 가지고있는 동북군벌들은 다 도망가거나 투항하고 돈푼이나 있는것들은 다 제 살길만 찾고 있습니다. 오직 공산주의자들만이 인민들을 조직동원하여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렸었습니다.

부금씨, 대답해보시오. 그래 이게 사실이 아닙니까? 그리고 만일 공산주의자가 나라를 찾기 위하여 목숨을 내대고 싸우는것이 사실이라면 같은 인간이 어떻게 그런 추악한 행동을 할수 있겠습니까? 공산주의란 인류의 순결한 리상이며 희망찬 미래입니다. 그렇기때문에 공산주의자란 가장 진실하고 용감하고 아름다운 인간입니다. 내가 방금 자신을 떳떳이 공산주의자라고 찍어서 말하지 못한 리유는 여기 보위단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내가 아직 그런 진실하고 아름다운 인간이 못되였기때문입니다.

부금은 불같이 쏟아져나오는 허재률의 열변에 압도되여 등을 벽에 기대고 몸을 드티려 하였다. 허줄한 밀짚모자에 인단장사트렁크를 지고 청년으로서 가장 견디기 힘드는 사회적멸시를 받으며 아무 리상도 지식도 없는 인간처럼 가장하고 고생을 사서 하며 떠돌아다니는 이 인간의 가슴에 이렇게도 큰 세계가 있었던가. 그에 비해 내 가슴에 있는것은 무엇이며 오빠의 가슴에 있는것은 무엇인가. 부금은 말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허재률은 어조를 낮추어 말을 이었다.

《슬프게도 우리 나라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청년들의 동경심을 악용하여 출세의 길을 닦아보려는 더러운 정치간상배들이 적지 않습니다. 오빠는 그런놈한테 속았습니다. 한놈의 협잡군에게 속았다고 해서 오늘 칠성판에 오른 조국을 찾겠다고 매일과 같이 동지들을 감옥과 교수대로 보내면서도 피어린 싸움을 벌리고있는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적대시한다는것은 너무나 지나친 주관이 아닙니까?

허재률은 안타까운 나머지 두손을 부금이앞에 열정적으로 흔들었다.

부금은 어떻게나 허재률의 섭섭한 마음을 위로하고싶었다. 그러나 아는것이 너무나 적었다. 그도 말못할 안타까움을 느끼며 조용히 말했다.

《저도 우리 오빠의 성격이 너무 일면적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물론 한개 어린 녀학생의 몸으로 세상일을 잘 모르기는 하지만 제 주변에도 혁명을 한다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어요. 우리 건너집 정란이의 오빠도 그런 혁명가라는 말도 있었어요. 허지만 저는 잘 판단이 가지 않아요. 오빠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저도 분해요. 어쨌든 지금 우리 오빠를 설복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오빠는 본시 의리를 중시하고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였는데 지금은 모든 정의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데 있다고 보고있어요. 그렇기때문에 지금도 아버지한테 허재률씨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증명하고있어요. 이건 허재률씨가 혁명가라는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있는 오빠로서는 모순에 찬 행동이지만 아마 자기를 구해준 은인에게 신세갚음을 한다는 의미에서 그 모순을 애써 못느끼는것처럼 하고있는것 같아요.

부금은 자기 마음속을 어떻게 드러내보일길이 없어 마침내 입을 다물고 입술을 씹었다. 안영호부자간의 언쟁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비슷하게 타협점에 도달한 모양이다.

허재률은 부금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최만득은 어떻게 할것인가. 사실 자기로 말하면 안영호가 나서서 구해주고 어찌고 하지 않아도 어떻게 하나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순박한 농촌청년인 최만득은 이 완고한 무리들속에서 빠져나올길이 없을것이였다.

《부금씨, 어쨌든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전 이렇게 허재률씨를 만날줄은 정말 몰랐어요. 전 공산주의가 왜 나쁘고 왜 좋은지 그런것은 아직 모르지만 제가 이렇게 인정 없고 도리도 모르는 인간으로 되는것이 억울하군요. 저도 앞으로 방금 허재률씨가 말씀하신 공산주의자들의 그 세계를 리해하도록 해보겠어요. 정말 저를 량해해주세요.

부금은 눈물이 글썽해서 애원했다.

마당을 건너오는 고르롭지 못한 발자국소리가 울려왔다.

《오빠가 오는가봐요.

부금은 서둘러 옷매무시를 바로잡더니 빠끔히 터놓은 미닫이를 열어제꼈다.

영호는 얼굴이 해쓱하게 질려서 열어놓은 미닫이를 다시한번 열어젖히고 거치른 동작으로 방안에 들어섰다. 그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허재률을 내려다보았다. 허재률이가 마주 올려다보자 그는 아무 말없이 앉더니 술잔에 술을 채워 허재률이앞에 하나를 밀어놓고 자신이 하나를 들었다.

허재률이가 이윽히 바라보니 들라는 뜻으로 눈짓을 해보이고는 제먼저 쭉 들이켰다. 그리고는 부금을 향해 거칠게 말했다.

《넌 들어가보아라.

《어떻게 됐어요?

부금은 새침해서 말했다.

《들어가보라는데…》

안영호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전 그럼 나가보겠어요. 허지만 오빠, 허재률씨에게 사람의 도리를 다할 의무가 부금이한테도 있다는것을 잊지 말아주세요.

부금은 신경이 곤두선 안영호를 달랠 생각으로 부드럽게 말하며 허재률에게 간절한 눈길을 보냈다. 량해를 구하는것 같기도 하고 어떤 안타까움을 호소하는것 같기도 한 그런 눈길이였다.

부금이가 미닫이를 닫고 사라지자 안영호는 다시한번 긴 한숨을 내쉬더니 술을 따랐다.

《더러운 판이요. 술이나 합시다.

《나는 술을 못하오.

하고 허재률은 술잔을 밀어내놓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당신한테 무슨 신세갚음을 해달라는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도대체 당신들이 죄없는 사람을 아무 권한도 명색도 없으면서 무엇때문에 함부로 잡아가두는거요? 그게나 말하오.

《여보, 말같지 않는 소리 하지도 마오. 지금 법과 명목이 있는 세상이요? 왜놈들은 무슨 권한과 명목이 있어서 조선을 처먹고 만주로 쳐들어왔소? 그것은 또 너무 큰 문제라 치고 당신이 전날 룡정에서 내가 봉변을 당할 때 구원해주었는데 그놈들은 왜 그런 무모한짓을 하는거요?

《그러니 당신네 부자는 왜놈들이나 거리의 부랑배와 같은 무리들이란말이요?

안영호는 눈을 이글거리며 허재률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목을 눌리운것 같은 갈린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룡정에서 만났을 때 순진한 마음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존경도 했댔소. 당신이 동흥중학교에 다닌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혹시 공산주의자가 아닐가 하는 께름직한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애써 눌러버렸소. 여기 와서 나는 당신이 공산주의자라는것을 확인했을 때 두번째 롱락당한 심정이였소. 첫번째 롱락을 어떻게 당했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더러워서 말도 하지 않겠소.

《나도 대강 들었소. 그러나 그건 공산주의자에게 롱락당한것이 아니라 협잡군에게 롱락당한것에 불과한거요.

안영호는 허재률을 쏘아보았다.

누구한테서 어느 정도의 이야기를 들었을것인가 가늠해보는듯 이글거리는 눈빛이 집요하게 허재률의 눈을 더듬는다.

이윽고 그의 입귀에는 조소같은것이 비끼였다.

《그럼 당신은 뭐요? 당신은 우리 오누이한테 의협심을 팔았지만 실상 그것은 당신의 공작상필요에 의한것이지 우리를 위한것은 아니지 않소?

《굳이 그렇지 않다고 말할것은 없소. 그런데는 어쨌단말이요?

《당신들은 그렇게 상투적으로 사람들의 순진한 마음을 롱락한단말이요.

《여보, 철없는 소리 작작하오. 털어놓고 말해서 지금 조국과 민족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소. 그런데 당신네 오누이가 죽어간단말이요 어쨌단말이요? 그러나 어쨌든 로상에서 봉변을 당하는것은 보기가 안됐기에 구원해주었는데 당신한데 무슨 보수를 요구했소 알아주기를 바랐소? 당신이 이처럼 유치한 인간인줄 알았다면 나는 애당초 알은체하지도 않았을거요. 내가 당신같은 유치한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당신의 신세를 지지 않기 위하여 그 너절한 사설감옥으로 도로 들어갔겠지만 우리는 지금 그런 천진란만성을 발휘하여 자기의 생명을 무익한 모험에 내댈 권리가 없소. 나는 가겠소. 마감으로 당신에게 한가지 묻겠는데 그 창고에 갇힌 또 한사람의 청년은 어떻게 하자는거요?

안영호는 좀 타격을 입은듯 고개를 떨구고있더니 게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경찰에서 사람이 오면 데려갈거요.

《그다음은 어떻게 되오?

《그다음은 우리도 모르오. 십중팔구는 죽이겠지요. 그 사람은 공산주의자라는것이 확정되였소.

《너절한것들!

허재률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바로 안영호옆에 놓인 인단장사트렁크를 집어드는데도 안영호는 고개를 푹 떨구고 앉아있을뿐 움직일줄 몰랐다.

바깥에 나서니 사나운 눈바람이 휘몰아쳤다. 화김에 뛰쳐나오기는 했으나 정작 길에 나서고보니 당장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할지 향방을 잡기 어려웠다. 허재률은 잠시 주춤거리다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넨장, 최만득의 명금이 그리 밭은것 같지 않았는데 일이 별스럽게 꼬이는군. 그러나저러나 그 친구가 꽤 시장하겠는데…》

허재률이 이렇게 중얼거리며 량강구쪽으로 난 길을 터벌터벌 걸어가는데 뒤로 잰 발걸음소리가 따라왔다.

돌아보니 부금이였다. 진자주빛 털목도리를 푹 둘러쓰고 사람의 눈에 뜨일가봐 뒤를 힐끔힐끔 살핀다. 온 동네가 다 아는데 그렇게 조심하는것은 아마 아버지나 오빠한테 든든히 단속을 당한 모양이다.

《정말 미안해요. 전 어떻게 사과의 말씀을 드렸으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나란히 서게 됐을 때 부금은 숨가쁘게 속삭였다.

《아까 다 한 말 아닙니까? 그것때문에 일부러 따라나왔습니까?

허재률은 비로소 부금이라는 처녀의 진정에 대해 뜨거운것을 느끼며 제 본연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예요. 푸르하기슭으로 해서 량강구에 가시지 말라는 부탁을 드리러 왔어요. 아버지가 말하는걸 들으니 인단장사가 공산당이라는 말이 벌써 우사령부와 경찰에 알려져서 목을 지킨다는군요.

《고맙소. 조심하지.

《정말 조심하세요. 요즘 우사령부대도 안도경찰도 무시무시하대요. 가는길에 주막에랑 들리지 말고 가세요. 그래서 길량식을 좀 장만해왔어요.

부금은 부끄러운듯 보자기에 싼 자그마한 꾸레미를 내민다. 받아보니 따끈따끈한 온기가 느껴졌다.

《정말 고맙소. 그러나 이런건 나한테는 그닥 필요치 않소. 부금씨도 봤지만 나는 발가벗겨서 눈구뎅이에 내굴려도 얼마든지 살아날수 있는 인간이요.

《너무 장담하지 마세요.

부금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고 말하였다. 깊고 넓은 지성과 리상의 세계를 사나이다운 가슴에 깊숙이 묻고 언제보나 웃음과 해학 속에 살아가는 이 억센 사나이를 황홀해서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한순간에 순진한 가슴을 불태울것 같은 섬광이 비꼈다. 만일 허재률이 그 불빛을 보았다면 그의 혀도 좀 굳어졌겠지만 워낙 처녀들을 바로보기를 싫어하는 그는 처녀의 한생에 한번 비낄지 말지 하는 그 귀중한 섬광은 놓쳐버리고 부금이의 심정이 고맙기만 하여 좀 실무적인 부탁을 꺼내놓았다.

《그건 두고보면 알거고… 사실 부금씨가 나를 도와줄 생각이 있으면 지금 창고에 갇혀있는 사람을 좀 도와주세요. 그 사람은 이제 경찰에 끌려간다는데 그 사설감옥제도가 어찌나 험악한지 그 전에 창고안에서 굶고 얼어죽을것 같소. 어떻게 가능하면 이걸 그 사람한테 좀 들여보내줄수 없겠소?

《그 사람과 잘 아는 사이인가요?

부금은 허재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허재률은 잠시 말없이 걷다가 침울하게 말했다.

《그렇소.

《그러니 공산당군대를 뭇자고 사방에서 모여든다는 아버지의 말이 옳았군요?

《그럴수도 있소.

부금은 고개를 푹 떨구고 걷더니 멎어섰다.

《전 돌아가겠어요. 이건 가져가세요. 창고에 갇힌 분은 내 힘껏 돕겠어요. 그러나 경찰에 끌려가는걸 막을 힘은 저한테 없어요.

《부금씨, 정말 고맙소.

허재률은 저도 모르게 부금의 손을 틀어쥐였다가 소스라쳐 놓았다. 비위살좋기로 소문한 그의 볼편도 벌개졌다. 부금이도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그저 그 사람을 부강촌에서만 살려보내주시오. 그리고 가능하면 허재률이가 기다린다고, 락심하지 말라고 좀 전해주시오.

《그럼?

부금은 번쩍 고개를 들고 허재률을 눈이 커다래서 바라보았다.

허재률은 빙그레 웃었다.

부금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또 모험을 하시려는군요. 제발 위험한짓을 하지 마세요.

《공산주의자는 동지를 구원하기 위하여 위험을 두려워 안합니다.

허재률은 힘주어 말했다. 이러한 말을 자신의 입으로 한다는것은 좀 어색하게 생각되는 점도 없지 않았으나 최태현이가 흐려놓은 공산주의에 대한 인상이 옳은것이 아님을 인식시키는 의미에서는 불가피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잠시후 두사람은 사나운 눈바람에 휘말리여 동서로 갈라졌다.

까닭모를 연연한 정이 태질하는 찬바람속에서도 따뜻한 여운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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