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석윤기

(제10회)

제 1 편

 

16

 

허재률이가 정초에 석방된 동자경을 안내하여 왕청과 연길의 당조직들과 련계를 지어준 다음 부랴부랴 돈화에 달려오니 김일성동지께서는 안도로 떠나신지 여러날 되였고 진한정이도 며칠전에 안도로 떠나고 없었다.

《늘 봐야 다리가 밭거던.

이렇게 중얼거린 허재률은 인단장사차림을 하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벌써 안도에서는 무장대가 조직되여 활동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이번에 왕청, 연길지방에는 자기가 일일이 다니며 련락을 띄웠으나 벌써 무기를 장만해가지고 안도로 떠난 동무들도 있을것이다. 뭐니뭐니해도 지금은 무장을 빨리 빼앗아메고 안도로 가는것이 제일 급한 일이였다.

늦은 아침에 진가등판을 떠난 그는 겨울날 짧은 해가 남아있을 때 120리나 되는 마호에 들어섰으며 이튿날은 벌써 요차를 거쳐 푸르하강줄기에 나섰다. 요차에서 하루밤 묵으면서 길을 량강구쪽으로 잡을것인가 대전자쪽으로 잡을것인가 망설이다가 량강구에 우사령의 구국군이 있어서 갈갠다는 소문이 있는것만큼 낯익은 대전자쪽으로 해서 곧장 안도로 들어서리라 작정하고 이튿날은 산길을 탔다. 이것은 허재률이가 타산을 잘못세운것이였다. 그전에는 주로 명월구쪽에서 안도로 오다보니 황구령, 꾀꼴령을 넘어 대전자에서 대사하쪽으로 나갈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서쪽에서 대전자방향으로 푸르하강줄기를 따라나가다가 류수촌 못미처 부강촌에서 남쪽으로 길을 꺾어야 하는데 그는 여태 인단장사행색과 아무에게나 푼푼히 하는 정중한 절, 잘 돌아가는 우스개소리덕분에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고 아무곳이나 척척 지나다녔지만 요즘은 이 어방의 정세가 험악하였다. 그런중에도 부강촌에는 지주 안윤재가 보위단을 조직하여 공산당이라는 의심만 생기면 모조리 잡아묶어다가 송강에 있는 안도경찰에 넘겨주는데 안도경찰에는 또 장상민이라는 왜놈특무가 들어박혀서 그렇게 넘겨받은 사람들을 별로 취조도 해보지 않고 죽여버렸다. 남호두에서부터 우사령을 따라온 옛독립군 지대현이가 그 장상민이와도 가깝고 안윤재와도 가깝다는 사정이 부강촌의 정세를 더 첨예화시키고있었다.

더구나 지대현의 뒤에 후꾸다가 늘인 일제특무기관의 촉수가 뻗어있다는것을 전혀 모르는 허재률은 칼바람이 앵앵하는 강가에 나서서도 지나가는 사람을 만나면 벌쭉벌쭉 웃으며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군하였다. 길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어찌다 추위에 짠뜩 몸을 옹송그리고 종종걸음을 치는 행인이 나타났지만 그런 사람들도 허재률의 절을 본체만체하며 지나쳐갔다. 그럴 때면 허재률은 고개를 기웃해보며 《밑졌군.》 하고 중얼거리군하였다.

연기가 낀것 같은 흐릿한 하늘아래 부강촌의 모습이 저만치 바라보였다.

꽁꽁 얼어붙은 강가의 모래불우에 매생이 한척을 뒤집어놓았다. 푸르하강을 건너다니는 나루배였다. 허재률은 어찌 바람이 세차게 쳐갈기는지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해 비틀거리다가 그 나루배에 다 꿰여진 인단장사트렁크를 메때리며 기대여섰다. 그러고보니 배밑창쪽은 잠풍하였다. 해가늠을 해보니 잠시 쉬고가도 저녁전에 마을에 들어서기는 어렵지 않을것 같았다.

《에라. 자빠진김에 쉬여간다고 한대 태우고 가자.

허재률은 아예 멜빵을 벗어버리고 매생이에 기대여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오늘도 새벽에 길을 떠나 산길을 100리이상이나 걸었다. 그러니 다리가 쏠만도 하였다.

김일성동지의 말을 들어보면 유격전쟁에서는 걸음을 잘 걷는게 중요하다는데 하루에 200리도 못걸어서 뻣뻣해지는 이따위 다리로 꽤 견디여내겠는가, 한심하군.

허재률이 제 다리를 두드리며 서글픈 어조로 중얼거리는데 난데없이 총소리가 울리여왔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거뭇하게 떠오르는 부강촌쪽에서 자그마한 사람형체가 돌멩이처럼 구을러오더니 200m가까이 접근되자 배옆에 서있는 허재률을 보고 주춤했다가 방향을 돌려 얼어붙은 강을 곧장 가로질러 달아났다. 흐릿한 저녁 으스름속에 어찌나 세차게 달리는지 모상을 똑똑히 가려볼수 없으나 틀림없이 소년이였다. 무엇때문에 총을 쏘았으며 아이는 무엇때문에 그렇게 죽을 기를 쓰며 달리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허재률이가 이제는 강건너 마른 풀대가 설렁거리는 둔덕밑에 사라진 소년의 모습을 더듬고있는데 총을 든 추격자들이 같은 방향에서 나타났다. 개털외투에 개털모자를 쓴 세명의 장정들이 숨을 헐썩거리며 곧장 길을 따라 달려오더니 허재률을 발견하고 우뚝 멎어섰다. 한자가 뽑아들고있던 목갑총을 바싹 겨누어들며 다가왔다.

《넌 뭐야?

말투가 처음부터 곱지를 않다. 보매 요즘 도처에 생겨나서 행패를 부리는 보위단이 아니면 지방토호의 가병일것이다.

《길가는 사람이요.

《길가는 사람? 이제 여기로 아이새끼 하나 지나갔지?

《지나갔지요.

허재률은 생각해볼것이 없이 거짓말을 하였다. 까닭은 모르지만 이자들의 소행이 방정하다 해도 그렇게 죽을 기를 써서 달아나는 아이를 사로잡히게 할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모로 보나 이자들은 도와줄만한 화상들이 아니였다.

《좋아, 그럼 상범이는 이자를 끌고 먼저 가. 넌 나하고 같이 그 아새끼를 따라가자. 제까짓게 뛰여야 벼룩이지 어딜 가. 이 앞은 우사령의 관할구역인데 빠져나갈데가 있나.

목갑총 든자는 숨을 헐썩거리며 겨우 따라온 앙바틈한자에게 허재률을 떠맡기고 달려가려 하였다.

《아니 여보시오.

일이 너절하게 됐다는것을 깨달은 허재률은 우두머리행세를 하는 목갑총 든자의 개털외투소매를 잡아당기며 능먹은 소리를 한마디 했다.

《나를 부강촌에 데려다 재우겠다면 그럴만한 집을 여기서 아예 대주고 떠나야지 이렇게 훌쩍 가버리면 나는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란말이요?

《뭐, 기다려? 기다릴것 없어. 가면 잘 대접해줄테니 걱정 말라구.

그자는 허재률의 놀아나는 모양이 어처구니없었던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새삼스럽게 행색을 뜯어보고나서 인단장사트렁크를 발로 툭 걷어찼다.

《이건 뭐야?

《밥통이지요. 이속에 대를 물려온 우리 집 재산이 다 들어있소.

《그게 뭐야?

《신생당약국제 천하일품 인단이지요. 대장님도 한알 맛보시겠소?

허재률은 제꺽 옆차기를 더듬어 빨간 인단곽을 꺼내여 섬겨바쳤다.

《아, , 난 그따위 잡스러운것은 입에 대지 않어. 상범이, 어서 끌고가라구. 젊은놈이 인단트렁크를 메고 이런데 나타난것부터 수상하다. 자식 생겨먹은게 인단장사보다는 공산당을 해먹기가 훨씬 맞춤하게 생겼어.

대장놈은 허재률을 왁살스럽게 밀어내치더니 량강구방향으로 달려갔다.

《짜식, 꾸물거리지 말고 빨랑빨랑 걸어!

상범이라는 앙바틈하게 생긴자가 총가목으로 허재률의 옆구리를 툭 치며 소리쳤다.

《아이구- 나리님, 이거 왜 이러십니까?

허재률은 일부러 엄살을 요란하게 부리며 그놈을 괴여올렸다.

《빨리 걸으란말이야. 빨갱이자식!

《허허- 나를 빨갱이로 몰다니 이건 너무하오. 내가 뭘 해먹을게 없어 빨갱이노릇을 한단말이요.

허재률은 그놈에게 떠밀려가면서도 그냥 말을 섬겼다. 상범이라는자는 손발이 몹시 시린 모양으로 팔짱을 끼고 총은 옆구리에 끼워 그러안았다. 그리고는 두툼한 솜신을 신은 발을 구르며 턱을 덜덜 떨었다. 이놈을 눈구뎅이에 구겨박고 달아날것인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오는데 이제 여기서 내뛰다가는 밤새 허허벌판을 헤매야겠으니 재미가 적을것 같았다. 그럴바에는 이놈을 따라가서 아무데서나 하루밤 자고 밝은 날 떠나리라고 셈평좋게 작정하였다. 아무렴, 허재률이가 이따위 촌보위단놈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가 하고 배포유하게 생각한 그는 옆구리로 상범의 몸을 슬쩍 건드리며 인단곽을 내밀었다.

상범은 힐끗 돌아보더니 귀찮다는듯이 상을 찌프리면서도 색스럽게 만든 곽에 눈길이 끌리였다.

《이거 하나 가지오. 형씨도 보아하니 숨이 몹시 가빠하는데 이거 한곽만 먹으면 펄펄 날게 되오.

대체 인단이라는걸 먹어봤소?

《허튼 소리지?

상범은 코를 찌글사하며 빨간 인단곽의 냄새를 맡았다.

《허 참, 내가 미쳤다고 이 추운날 인심을 써가며 거짓말을 한단말이요. 인단 한곽에 값이 얼만지 아오? 3원이요, 3!

허재률은 그자가 인단이라는 말도 못들어본 얼간이라는것을 눈치채고 량껏 바람을 불어댔다. 상범은 눈이 커다래지더니 팔짱낀 개털외투의 소매속에서 한손을 뽑아내여 인단곽을 받아쥐였다.

《요런걸 3원씩 한단말이야? 거짓말이지?

《의심스럽거든 입안에 한 두어개만 떨어뜨려넣어보란말이요. 대번에 속이 후련해지지 않나, 그게 보통보약인줄 아오.

상범은 어리둥절해서 우들우들 떨며 손바닥에 인단을 털었다. 인단곽을 처음 쥐여보는 위인이 가뜩이나 추위에 우들우들 떨며 손을 놀리자니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허재률은 친절하게 그자의 눈앞에서 인단곽의 뚜껑을 가볍게 돌려 구멍을 맞추는 방법을 대주고 손바닥에 몇알 떨어뜨려주었다.

《자, 흘리지 않도록 입안에 넣소. 삼키지 말고 다 녹을 때까지 입안에서 슬슬 굴리오. 그러면 그게 얼마짜리나 되는가 짐작이 갈게요. 저 도회지에 가면 이런걸 한알에 5전씩 하는데 한통에 100알이 들었단말이요.

《한알이 5전씩이면 100알에 5원이게.

이렇게 중얼거리던 상범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눈을 끔쩍끔쩍 하더니 허재률을 돌아보았다.

《야- 싸하는데…》

《글쎄 그렇다니까, 이제 그것 한곽만 다 자셔보오. 속탈이 있으면 아무것이나 다 떨어질테니…》

《음- 이거참…》

상범이는 인단맛에 홀려 그다음은 말도 건성하며 정신없이 걸었다.

《여보 형씨.

동네에 거의 다 왔을 때 허재률은 넌지시 말을 걸었다.

《이제 동네에 들어가면 인차 저녁을 먹게 되오?

《뭐 저녁? , 이거…》

상범은 기가 막히다는듯이 허재률을 멀뚱멀뚱 돌아보다가 방금 인단신세를 진 처지에 막 모른척할수도 없어서 뜨직뜨직 말했다.

《밥은 준단말이야. 그러나 그전에 단장님한테 문초를 받아야 해. 잘못하면 그자리에서 깜장콩알을 먹을수도 있고 안도경찰에 넘어갈수도 있지.

《아니 안도경찰에는 왜 넘어가오?

《공산당은 다 잡으라는 령이 내렸단말이야. 어찌나 공산당이 많은지 요즘은 하루 한축 끌어내가도 모자라는 판이야.

《그럼 내가 공산당이란말이요? 공산당이 인단장사를 한단말이요?

《글쎄 그런건 우리는 몰라, 잡아오라니까 잡아가지.

《누가 잡아오라고 했소? 당신들이 제멋대로 잡아가지.

《야, 이것봐라.

상범은 허재률이 따지고들자 인단곽을 안주머니에 건사하고 총을 절컥 내들었다.

《너 아까 소대장님이 말하는것 못들었어? 왜 나보고 해보는거야.

《여보 형씨.

허재률은 한풀 숙어들며 좀 부드럽게 말했다.

《형씨도 보지 않았소. 내가 무슨 공산당짓을 한게 있소? 당신들이 말을 묻는대로 대답을 잘해주었을뿐 아니요.

《그건 상관 없어. 요즘은 길가는 젊은놈은 다 잡아들이라는 단장님의 명령이야. 전날 안도경찰에서 사람이 왔는데 지금 안도에 빨갱이군대가 생겨나서 사방에서 공산당이 모여든다는거야. 이 어방을 지나가는 젊은것들은 모두 안도로 빨갱이군대를 찾아가는것들이니 다 잡아들이라는 명령이야.

《흠, 그렇댔군.

허재률은 비로소 어렴풋하게나마 사정을 리해하였다. 일은 시시하게 되였다. 문득 돈화에서 반제청년동맹원들의 강습을 할 때 은진중학교에 다니는 한 동무가 대중혁명화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일반적인 원리만 론의하다가 김일성동지의 지적을 받던 일이 생각났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때 우리는 혁명화를 어떤 순수 리론문제로만 리해할수 없다, 대중을 혁명화하느냐 못하느냐 하는데 우리 혁명의 승패가 달려있는만큼 우선 자신을 철저히 혁명화한 기초우에서 자기 가정을 혁명화하고 자기 마을을 혁명화하고 이렇게 온 나라를 혁명화해나가야 한다, 동무의 가정이나 마을의 혁명화가 그처럼 힘드는것이 결국 그곳에 들어간 동무자체가 아직 혁명화에 대한 리해와 사상적각오가 떨떨한것이 아닌가 하는 내용의 말씀을 하시였다.

그때 론의된것이 바로 부강촌문제였던것 같다. 자기는 봄명월구회의 이후로 줄곧 사처에 돌아다녔기때문에 잘 몰랐지만 부강촌문제는 그후에도 자주 제기되여 옹구당조직에서도 우수한 공작원을 두차례나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바로 옆에 완고한 군벌 우사령이 부대를 끼고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을 무조건 잡아서 경찰에 섬겨바치는 반동적인 동네가 돈화, 안도, 연길을 련결하는 삼각점의 복판에 도사리고 앉았다는것은 간단한 문제같지를 않았다. 이런 문제가 진작 알려졌다면 몇십리 돌더라도 다른 길을 잡아다닐것이 아닌가. 지금 김일성동지가 안도로 나가 유격대를 조직하고있기때문에 각 지방조직들에서 래왕이 빈번하고 벌써 안도에 유격대가 생겼다는 소문이 나돌아서 혁명적기분을 가진 청년들가운데서 찾아올 사람도 많겠는데 이 모퉁이에 얼씬하지 말아야 한다는 통보를 지방조직들에 내려보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상범이라는 땅딸보는 허재률을 어느 한 기와집으로 끌고갔다. 부강촌은 북으로 멀리 미혼진을 거쳐 로야령까지 잇달린 산줄기를 등지고 앞에는 푸르하강을 끼고있어서 한겨울 찬바람속에 옹송그리고있어도 어딘가 기름져보이는 동네였지만 기와집이라고는 두집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중에도 지금 허재률이가 끌려들어간 집은 토담을 성벽처럼 육중하게 둘러치고 토호의 집처럼 네귀에 포대까지 만들어놓은 큰 집이였다.

《여보, 이게 무슨 집이요?

허재률은 대문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집모양을 살펴보며 물었다.

《자 이게…》

상범이라는 땅딸보는 총에 떠밀리여가면서도 자기를 마치 무슨 친구 대하듯하는것이 장히 괘씸하였으나 인단 한곽을 받아먹은데다 어쩐지 흐물흐물 놀아나는 그 모양이 밉지 않고 인간적으로 위압도 되여 저도 모르게 그의 물음에 끌려들게 되였다.

《우리 단장네 집이지 누구네 집이야. 인단장사를 그렇게 돌아다녔다면서 부강촌보위단장이 무섭다는 소문도 못들었어?

《내가 왜 부강촌보위단장 소문을 못들었겠소. 그러나 집에 와보기는 처음이지. 단장이름이 뭐던가? 김상범이라고 했던가 리상범이라고 했던가?

《자 이게… 리상범이는 나란말이야, .

《참 그렇지. 저 대전자쪽에 나가면 김상범씨도 이름이 났단말이요. 그러니까 단장은 박상뭐던가?

《체, 박갈게 뭐야. 안가지, 안윤재란말이야.

《오라, 그래 안윤재였지. 가만있자, 안윤재라, 이게 누구던가?

허재률은 분명 어디선가 들은 이름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으나 창졸간에 기억이 살아나지 않았다.

땅딸보 리상범은 대문을 들어설 때까지는 제법 드센척했지만 마당에 나서자 벌써 주눅이 들어 눈길을 허둥대기 시작했다.

《여보, 단장한테 똑똑히 말하오. 길가던 인단장산데 단장님안부도 묻고 좋은 사람이라고… 젊은이는 다 잡아오라고 하기에 끌어왔지만 량민이 틀림없다고말이요.

허재률은 이자가 얼떨떨하게 굴면 정말 재미가 없을것 같아 미리 다짐을 두었다. 상범은 그래도 속이 살았다고 눈을 찔 흘겨보며 잠자코있으라고 호령을 했다.

마당에 들어서니 마차 한대가 떠날 차비를 하고있었다.

조선바지저고리에 호두만한 호박단추가 달린 황갈색 마고자를 껴입은 살집좋은 중년사나이가 마차안을 기웃이 들여다보더니 손바닥을 탁탁 털며 옆에 시립하고선 마부와 무장한 보위단원에게 못마땅한듯이 말했다.

《자네들은 그렇게 털외투를 두툼하게 껴입고있지만 그 애들이야 어디 맵시를 보느라고 그런것을 입자고 하나. 그까짓것들 실컷 맵시를 보다가 얼어보라고 내버려두고싶지만 이제 집에 들어서면 손발이 얼었소, 어쨌소, 이제 다시는 안오겠소, 어쨌소 하고 그냥 성화를 댈테니 별수가 없네. 아예 자네들이 입는 그런 털외투를 몇벌 가지고 가게. 캄캄한 밤에 마차를 타고오는데 맵시나새나… 그리고 저 앞집 오별장네 딸도 같이 온다니 아예 그 애몫도 차비해가지고 가라구.

그러면서 마고자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본 안윤재는 손을 획 내저으며 소리쳤다.

《벌써 다섯시로군. 어서 떠나게. 래일 낮까지 명월구에 가대자면 대전자에 들려 저녁요기나 하고 밤중으로 꾀꼴령을 넘어야 래일 길이 완완할걸세. 차가 들어서면 그길로 돌아서게. 밤이 좀 늦더라도 래일중으로 돌아와야 하네.

《단장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마부는 머리를 겁석해보이고 아마 호위라도 가는 모양인 보위단원이 절도있게 바로서서 대답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밤길을 갈 때는 아예 장탄을 하고 안전장치를 풀어놓고 아무때나 불질을 할수 있게 단단히 잡도리를 하라구. 지금 간도땅 어디에 가나 공산당이 없는데가 없어. 그놈들은 이제는 무기만 보면 덮치자고 든단말이야. 벌써 저 송강, 흥륭촌쪽에서는 떨떨한 경찰까지 습격을 하는 판일세.

《명심하겠습니다.

허재률의 머리속에는 한순간에 이것이 얼마전 룡정극장앞에서 만난 동아운송의 안영호네 집이라는것을 깨달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후에 경찰서에서 풀려나와 그를 만났을 때 자기 집이 부강촌에 있으며 머지 않아 누이동생이랑 같이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하였다. 그런즉 지금 마차를 내보내는것은 룡정에서 돌아오는 안영호오누이를 명월구정거장까지 마중나가는것이다.

《뭔가?

대청으로 돌아서던 안윤재는 상범이와 허재률을 보더니 호령기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50이 가까와보이는데 불깃불깃 살집이 좋은 얼굴엔 주름살 하나 없는 대신 푸릿푸릿해보이는 두툼한 입술을 꽉 앙다물고있어서 입귀엔 잔주름이 패였다. 새까만 고수머리가 치째진 눈귀까지 바투 내리덮어서 이마가 좁고 미간이 밭은게 얼핏 보매도 헐치 않은 인상을 주었다.

《예, 단장님.》 하고 상범은 똑바로 서서 서투른 동작으로 경례를 붙이더니 보고를 했다. 《아까 놓친 그 아이놈을 따라가다가 나루터에서 이런 인단장사를 만났습니다. 심문을 해보니 량민같습니다.

《량민같다는것은 어떻게 알아?

안윤재는 대청쪽으로 돌아섰던 걸음을 멈추고 허재률을 뜯어보며 따지고들었다. 상범은 대번에 허둥대기 시작했다.

《저 단장님성함도 잘 알고… 또 공산당이라면 질색을 합니다. 인단도 극상 좋은걸…》

상범이가 횡설수설하자 안윤재는 가뜩이나 뱁새눈같은 가느다란 눈귀를 쪼프리고 바투 다가왔다.

《공산당이라면 질색해? 어떻게?

《저… 우리가 공산당인가 해서… 벌벌 떠는것을 겨우 끌고왔는데… 말하는것만 봐도…》

《상범이, 네가 이놈이 말하는것을 들어보니 량민같단말인가?

《예, , 그렇습니다.

《빌어먹을것! 소대장은 어데 갔어? 기득이는 어데 갔는가말야?

《그 아이새끼를 따라갔는데요.

《떨떨한것들! 경비를 어떻게 섰으면 그런 코흘리개를 다 놓친단말인가. 그래, 네가 나를 잘 안단말이지?

《잘 알지요.

허재률은 안윤재를 업어넘긴다는것이 헐치 않다는것을 순간에 깨닫고 침착하게 말했다.

《내 말을 어디서 들었어?

《룡정에서부터 들었지요.

《룡정에서? 룡정 누구한테서 들었어?

《동아운송점에 있는 친구한테서 들었지요.

《뭐 동아운송점? 흠-》

안윤재는 좀 떨떨해졌는지 눈이 다져진 마당을 빠드득빠드득 소리를 내며 잠시 거닐더니 결단성있게 고개를 쳐들었다.

《이놈은 틀림없는 공산당이다, 창고에 집어넣어! 그리고 너 상범이 이놈!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겠어? 귀가 항아리만 해서 걸핏하면 공산당선전에 넘어간단말이야. 냉큼 끌고가지 못해!

상범은 흠칫 놀라며 차렷자세를 취했다.

《빨리 끌고가라는데… 그리고 단단히 경비를 서란말이야.

《알았습니다.

상범은 자기가 충실하고 똑똑하다는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생각되였는지 허재률을 총끝으로 우둔하게 내지르며 《빨갱이새끼야! 가자.》 하고 소리쳤다.

안윤재는 버릇처럼 손바닥을 탁탁 털더니 진저리를 한번 치고 대청마루로 올라서며 부엌쪽에 대고 소리쳤다.

《술 한상 차려오너라!

한편 허재률을 끌고 골목길로 나온 상범은 퉤- 하고 침을 내뱉었다. 기분이 나쁘다는 수작이다.

《그 단장이라는 령감이 너무하구만. 공연히 상범씨를 욕하는데 나까지 밸이 꿈틀하는군.

허재률은 절벽같은 부강촌에서 그래도 발을 붙이고설만한 돌부리는 상범이밖에 없으니 건덜건덜 놀아나는것이 장히 위험하게 생각됐지만 얼려볼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여태까지 같잖은것들이 총을 들고 돌아가는것이 우습게 생각되여 한 절반 놀음기분으로 끌려다니던 허재률은 안윤재라는 인간을 대해보고는 현실적인 위험을 느꼈던것이다.

《야, 너 입을 다물지 못하겠니. 너때문에 내가 혼나는걸 보지 못했어? 죽여버릴테다.

《상범씨야 나하고 그럴게 있소? 그 령감이 거 더럽게 노는구만. 사람을 통 몰라보거던. 상범씨도 너무 고분고분하게만 굴지 말고 할 말은 딱딱 해야 되오. 그래야 그 령감이 사람을 숙보지 못한단말이요.

《내가 뭐 할 말을 못할줄 알아?

땅딸보는 어느새 허재률의 말에 끌려들어 불평스러운 마음을 드러냈다.

《글쎄 아까도 보니까 상범씨가 말은 괜찮게 했지만 그 령감이 어디 상범씨 말을 말같이 들어요?

《그건 워낙 그런 미련한 령감태기야. 나보구만 그런줄 알아. 소대장은 아까 아새끼 하나가 도망치는바람에 두엄무지에 구겨박히기까지 했는데 뭘… 부강촌돼지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어.

《흠, 그 령감별명이 부강촌돼지요?

《너 그따위소리 함부로 하겠어?

땅딸보는 자기가 빨갱이혐의자와 할말 못할말 다 했다는것을 깨닫고 눈이 올롱해서 멎어섰다.

《이거 왜 이러오? 상범씨 처지가 딱해보여서 한 말인데 공연히 색을 머금고 그러는군.

《네따위 빨갱이가 누굴 생각해?

상범이가 막 소리치는데 옆골목에서 물항아리를 머리우에 난딱 올려놓고 두손을 엇갈아 겨드랑밑에 끼고 종종걸음을 쳐오던 아낙네가 두사람을 보더니 기겁한듯 빙판이 진 길옆으로 물러서며 서둘러 항아리를 붙잡았다.

《아이구, 아까 달아나는걸 보니 쬐꼬만 아이 같았는데 이렇게 다 자란이였구만.

30가까이 됐을 숭글숭글하게 생긴 아낙네는 투실투실한 볼이며 억실억실한 눈이며 무엇이나 다 큼직큼직하고 시원시원해보이는게 수다도 보통이 아닐것 같았다.

《헹, 보기는 잘 봤군. 그 쬐그만 아이새끼가 그새 이렇게 자랐단말이요. 남칠이는 들어왔소?

《남칠이는 왜 자꾸 찾소? 그러지 않아도 술부대가 돼서 쓰러졌는데 또 끌어내자구. 우리 집 문전에 얼씬하기만 하면 빨래방치로 얻어맞을줄 알아요.

《이 아주머니 드세다 드세다 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없군. 보위단을 건드렸다간 어떻게 되는지 아오?

《그까짓 보위단 무섭지도 않수다. 잘난 개털외투나 쓰고다니며 인간백정질이나 하는거…》

아낙네는 한마디 쓰겁게 내뱉고는 아까처럼 팔짱을 끼고 엉뎅이를 흔들며 가버렸다.

《넨장, 남칠이도 고생줄에 들었지…》

어처구니없어 바라보던 상범은 혼자 두덜거리며 빨리 걸으라고 허재률을 툭 건드렸다.

대전자에서 넘어오는 길가에 보위단의 경비막으로 쓰는 외딴집이 있고 그옆에 농쟁기를 보관하던 허름한 창고가 있었다. 이영은 다 곰삭아서 처져내리고 시꺼멓게 퇴색한 낡은 집이지만 굵직한 통나무로 우둔하게 무은 귀틀집은 오랜 푼수치고는 견고해보였다.

경비막앞에서 번을 서고있던 보초가 누구냐고 소리치자 상범은 허재률을 전에없이 왁살스럽게 떠밀치며 《공산당이야, 잡아가두래.》 하고 뇌까렸다.

《그럼, 집어넣어. 넨장, 웬 공산당이 이렇게 많아.

보초는 발을 동동 구르며 열쇠를 내밀어주고 손을 후-후- 불었다.

눈섭이며 코구멍에 성에가 하얗게 내불린게 꽤 추운 모양이다.

찌걱찌걱하며 문이 열리자 상범은 허재률의 등을 떠밀었다.

《여보, 여기다 처넣고 저녁은 언제 먹이겠소? 난 먼길을 와서 배가 고파 죽겠소.

허재률은 한발을 뻗디디고 시비를 걸었다.

《자, 이거 어디서 이런 비위좋은놈이 나졌어? 여긴 감옥이야, 감옥!

상범이가 빽하고 소리쳤다.

《여보, 감옥은 밥을 안주는줄 아오?》 그러면서 허재률은 상범을 슬쩍 한옆으로 끌어당겨 귀전에 대고 속삭였다.

《래일 단장 아들이 오거든 여기로 좀 데려다주오. 명월구 인단장사라면 아오.

《뭐야?

상범이 이렇게 소리치다가 문득 아까 안윤재앞에서 하던 허재률의 말이 생각나서 잠시 아무 질정을 못하고 서있었다.

《여, 그자식이 무슨 수작을 해?

뒤에서 보초가 이렇게 소리치는바람에 상범은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허재률을 창고안으로 떠밀어넣었다.

가뜩이나 짧은 해가 거의 다 기울어진 때라 창고안은 캄캄한데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를 아래목에서 확하고 습한 랭기가 풍겨왔다. 가름대를 세운 뙤창이 길반이나 되는 천반밑에 빠끔히 뚫려있어서 희벗한 빛이 출입문쪽을 향해 비치고있었다.

《허, 기막힌 잠자리를 잡았군.

허재률은 혼자 두덜거리다가 그래봐야 소용없다는것을 깨닫고 발더듬으로 한걸음한걸음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복판쯤 왔다고 짐작되자 뙤창을 향해 벽쪽으로 붙었다. 거적때기같은것이 발끝에 걸려 비칠거리다가 한발을 내짚으니 뭉클하고 무엇이 밟혔다. 사람이였다.

《누구야!

허재률이도 놀라서 소리쳤다.

《이리 앉으라구요.

거적을 쓰고 누워있던 사나이가 허재률의 바지가랭이를 슬쩍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당신 무슨 사람이요?

허재률은 거적때기우에 주저앉으며 다그쳐물었다.

《나 최만득이요. 저놈들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것을 눈치채면 재미없수다.

최만득은 한손을 뻗쳐 허재률의 손을 더듬어잡고 흔들면서 몸은 저쪽으로 돌아누웠다.

《지금 저놈들이 들여다보고있어요. 이옆에 자리를 잡고 누우시오.

《아니 대체 어떻게 된거요?

허재률은 아직도 무슨 도깨비에 홀린것 같은 생각을 버릴수 없어 입안의 말로 중얼거리며 인단장사트렁크를 벗었다.

《련락을 받고 인차 떠났지요.

《동무 혼자서? 리경락동무랑은 어떻게 됐소?

《처음에 모두 함께 떠날가 하다가 공주령에 최용필이 박혀있다는 소문이 있길래 패를 갈라서 떠났지요. 리경락동무와 변인섭동무가 먼저 떠나고 닷새후 그 사람들이 안도에 다 도착했겠다고 짐작될무렵에 나하고 강영진이하고 같이 떠났는데 교하에 와서 들으니까 먼저 떠난 동무들은 장춘에서 그놈들에게 체포됐다는군요.

《떨떨하게는 노는군. 그래 둘 다 잡혔단말이요?

허재률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목청을 돋구었다.

《조용하라구요.》 하고 최만득은 허재률의 무릎을 다독거리며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둘 다 잡혔지요. 한밤중에 려관을 수십명이 포위하고 접어들었는데 서로 불질을 하다가 종당에는 부상을 당해서 어쩔수없이 잡혔다는군요.

허재률은 기가 막혀 잠시 말을 잊고있다가 기진하여 자기도 인단장사트렁크를 베고 거적우에 누웠다.

《그런데 강영진이는 어데 갔소?

《도망갔소. 아까 저놈들이 경비막에 불을 때라고 불러냈지요. 아이니까 설마 진짜 공산당이야 아니겠지 생각한것 같아요. 우리가 잡힐 때도 그 애는 내 동생이라니까 별로 깐깐히 살피지 않더군요. 그틈에 그애 권총을 슬쩍 길가의 눈구뎅이에 묻어두었지요. 나갈 때 아예 총을 파가지고 안도로 내뛰기로 짰지요. 그 애야 펄펄 나는 아인데 제깐놈들이 어림있나요. 챙챙 감겨돌아가며 불을 때주니까 그놈들이 헤벌쩍해서 엉뎅이를 녹이고 있는 틈에 총을 채가지고 내뛰였지요. 뒤미처 몇놈이 총질을 하며 따라갔지만 그앤 못잡을거요.

《내 오다가 봤소.

《그래 어떻게 됐나요?

최만득은 그제야 궁금한듯 이쪽으로 돌아누웠다.

《무사할것 같소. 그러나저러나 동무들은 어떻게 잡혔소?

《어떻게 잡힐게 있나요. 이 어방을 지나는 사람은 덮어놓고 잡아들여서 며칠 두들겨패다가 공산당이 아니라는것이 확실하면 놓아주고 그렇지 않으면 안도경찰에 넘겨서 죽인다는군요. 래일쯤은 나도 안도로 넘어갈것 같아요. 우리가 잡힌지 사흘째 되는데 그사이 벌써 여섯명이나 넘어갔수다.

《허참.

허재률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다시 속궁근 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가 김일성동지를 받들고 일제와 싸울 준비를 하면서 피를 흘릴 각오도 하고 교수대에 오를 각오도 했지만 이따위 너절한 촌동네가 무장투쟁의 앞길을 막아설줄은 몰랐군. 력사의 수레바퀴가 그만 조약돌에 걸려 애를 먹는단말이야.

최만득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게 단순한 촌동네 같지 않다고 말했다.

《안도경찰에 왜놈특무가 있대요. 지금 안도경찰은 아직 왜놈의 말을 들을지 장학량의 말을 들을지 몰라 어정쩡해있는데 무슨 과장인지 하는놈이 특무가 돼서 그렇게 나쁘게 나온다는군요. 그놈이 여기 보위단장이라는 지주하고 단짝이라나요.

《참 너절하게 됐군. 그래서 최동무는 어떻게 할 계획이요?

《뭐 계획이 있나요?

《계획이 없다면 그놈들 하자는대로 끌려가서 죽는단말이요? 공청원답지 않는 말은 하지도 마오.

허재률이 전에없이 엄한 투로 말하니 최만득은 뗑해서 바라볼뿐이였다.

《뭐 그러노라면 좋은 궁리가 떠오르겠지. 그래 지금 오가자형편은 어떻소?

허재률은 말머를 돌리였다. 최만득은 잠시 대답을 않고 한숨만 쉬였다.

《왜놈들이 들어왔소?

《들어왔지요. 내내 앙심을 먹고있던 동네니까 9.18사변이 터지자 도망치는 동북군의 뒤를 따라 공주령에서 곧장 오가자로 쳐나오더군요.

《그래 어떻게 됐소? 사람들이 상했소?

《더러 상했지요. 그러나 큰일은 없었수다. 처음 동북군이 와서 동네를 한바탕 휘저어놓으니 뒤따라 왜놈들이 오리라는것을 누구나 다 짐작하게 됐지요. 그래 표가 난 사람들은 미리 오가자에서 떠났수다. 변태익로인은 변인섭동무를 김일성동지한테로 보내놓고는 인차 솔가해서 관내로 들어가고 림계산선생은 장춘으로 나가고 박창세로인형제는 북만으로 들어가고… 뿔뿔이 흩어졌지요.

《그럼 오가자의 조직은 어떻게 됐소? 조직이 다 깨졌단말이요?

허재률은 쓰고 누웠던 거적을 들치며 숨가쁘게 물었다.

《조직은 살아있수다. 박창우로인은 떠나갔지만 아들내외는 남아있지요. 박윤섭이가 반제청년동맹을 책임지고 곽병호동무가 공청을 맡고있어요. 우리 아버지도 있고 처도 부녀회사업을 하고있수다. 일을 변변히 못해서 그렇지 조직은 살아있수다.

《다행이요. 역시 오가자에 내린 뿌리가 든든하구만.

허재률은 다시 몸을 누위며 최만득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놈들의 코앞에서 이제는 지하로 들어가야 하겠으니 바쁘겠소.

《뭐 그럭저럭 견디겠지요. 그놈들이 오가자에 <리상촌>바람이 불었고 그우에 김일성동지가 와서 혁명촌으로 꾸렸다는것을 알기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세워보려고 진가촌에다 모범농촌을 꾸린답니다. 공주령의 농사시험장에서 기술자들이 나와서 벼농사도 크게 시작하고 수로공사도 어마어마하게 벌린다고 선전을 들이대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수다.

《흠-》

허재률은 흥미있다는듯이 어둠속에 눈을 번쩍거리더니 입맛을 쩝 다셨다.

《사실 오가자지방이 산지대라면 거기서도 총을 들고 한바탕 해볼수 있는건데 너무 반반하니까 야단이란말이요. 그러나저러나 오가자사람들이 대단하오. 그래 금실동무가 부녀회사업을 한단말이지? 참 굉장하오. 옥실이, 복실이도 있소?

《있지요. 지난여름에 그 애들 형제도 다 반제청년동맹에 가맹했수다.

최만득은 그사이 오가자에서 일어난 변천에 대해 뜨직뜨직 말했다. 허재률은 처음 한동안 흥미있게 듣더니 얼마 안가서 드르릉드르릉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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