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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석윤기 (제9회) 제 1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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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사람들의 다사스럽고 거치장스러운 친절과 배려속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두 사람은 눈덮인 후원의 오솔길에 나서자 비로소 가볍게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후끈한 방안에서 나오니 얼어붙은 대기는 맵짰지만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정말 이런 날 눈속을 멀리 가보고싶어요. 정갱이까지 푹푹 빠지는 눈벌을 걸어가다가 죄꼬만 짐승의 발자국같은것이라도 발견하게 되면 얼마나 재미있을가요. 그걸 그냥 따라가면 짐승의 굴이 나지겠지요?》 서향이는 빨간 털실로 뜬 벙어리장갑을 벗더니 무겁게 눈을 쓰고 아지를 드리운 정원수에서 눈 한줌을 쥐여 꽁꽁 다지며 말했다. 아이들처럼 줄을 매여 한짝씩 달아맨 장갑줄이 굽실거리는 머리칼밑에서 벗어져나와 한짝이 눈우에 끌리였다. 진한정은 그것을 집어 서향의 어깨우에 건네여놓고 줄을 머리칼밑으로 밀어넣어주며 말했다. 《언제든 황도하자쪽으로 한번 가볼가요?》 《거긴 왜요?》 《스키장이 있지요. 스키를 타봤소?》 《스키요? 호호호, 스키를 타봤으면 스키장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한정씨는 제가 스키를 탈만큼 용감해보여요?》 《그럼요. 용감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적어도 나보다는…》 《어마, 그건 무슨 뜻이예요?》 서향은 줌안에서 이제는 거의 다 녹아가는 눈덩이의 물을 흔들어뿌리며 한정을 향해 돌아섰다. 장미빛으로 물든 그 작고 길숨한 손은 눈덩이를 주무르는 사이 얼어서 몹시 시려보였다. 《장난을 그만두고 장갑을 끼시오.》 《왜 대답을 피하세요? 전 철이 들면서부터 줄곧 자신이 몹시 어리석은 겁쟁이라는 강박관념속에 살아가는데요, 밤에 불을 끄고 자다가 눈을 떠보면 벽에 걸린 옷가지나 화분의 그림자같은것이 꼭 귀신처럼 보이지요. 너무 무서워서 소리를 치고싶어도 입조차 벌릴수 없더군요. 그런데 한정씨는 무엇을 보고 저를 용감하다고 그러세요?》 진한정은 이윽히 서향이를 바라보았다. 군살이라고 하나도 없는 균형잡힌 몸매며 세련된 취미가 느껴지는 수수한 옷차림이 섬세하게 잘 다듬어진 그의 얼굴모습을 품위있게 장식하고있었다. 거기에 마음씨는 또 얼마나 깨끗하고 부드러운가, 그것은 진한정이가 장차 물려받게 된다는 루거만의 재부보다도 더 귀중한 보배였다. 《그것을 기어이 알고싶소?》 《알고싶어요.》 서향은 어린애처럼 받아외웠다. 한정은 천천히 눈우에 발자국을 옮겨놓으며 시름없이 말했다. 《그만두는게 좋을것 같은데요. 그대신 앞으로 나는 용감한 녀자다 하는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무슨 잠언 같군요. 아무 실증도 없는 공허한 말이 무슨 위안이 되겠어요.》 서향은 불만스러운듯이 턱을 쳐들고 입술을 비쭉 내밀어보이였다. 《정 그렇다면 말하지요.》 하고 진한정은 걸음을 멈추고 손을 뻗쳐 머리우에 드리운 향나무가지를 잡았다. 옆으로 비탈려 뻗어간 아지우에서 눈가루가 흩어져날렸다. 서향은 목을 움츠리고 흔들며 목덜미로 스며드는 눈가루를 털었다. 한정은 일부러 나무가지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번에는 우수수하고 눈더미와 눈가루가 한꺼번에 흩어졌다. 서향은 날쌔게 몸을 빼여 한정의 곁에 붙어서더니 《어서 말씀하세요.》 하고 졸랐다. 《서향씨의 아버지는 이름있는 선비고 한때 벼슬도 살았지요?》 《그게 뭐 어쨌어요?》 《아버지가 무섭지 않소?》 《아버지가 왜 무섭겠어요? 전 아버지와 친해요.》 《그런것 같더군요. 생각하는것은 무엇이나 아버지앞에서 다 터놓더군요.》 《그게 용감한건가요?》 서향은 시틋해서 물었다. 《다른 표현도 있지요. 그러나 당면하여 내가 제일 부럽게 생각하는것은 그것입니다.》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한정씨는 아버지한테 뭔가 터놓지 못하는것이 있다는건데 그건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그럴수 있잖아요. 어떻게 남자들이 복잡한 정신활동의 전부를 아버지한테 다 터놓을수 있겠어요.》 《내가 말하는것은 응당 터놓고 말해야 할것을 말하지 못한다는것이지요.》 서향은 비로소 신중한 표정이 되여 한정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무엇인가 한정을 괴롭히고있는 어두운 그늘이 반사되였다. 서향은 두짝의 장갑을 한데 모아쥐고 돌걸상의 눈을 쓸어냈다. 그리고는 목도리를 벗겨내여 그우에 접어깔았다. 《여기 좀 앉지 않겠어요.》 한정은 말없이 앉았다. 서향이도 나란히 앉았다. 《무슨 말씀이예요?》 한참동안이 지난 다음 서향이가 좀 서먹서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아버지와 의절하기로 결심했소.》 서향은 피뜩 돌아보더니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 다음말을 기다렸다. 그의 표정은 말없는 가운데 굳어지고 발갛게 물들었던 혈조가 하얗게 가셔졌다. 《나는 이 집을 떠나겠소.》 그래도 서향은 말없이 앉아서 끝이 촉촉하게 젖은 벙어리장갑을 주무르기만 하였다. 한정은 벌써 무엇인가 다 느낀듯한 서향의 태도를 보자 열이 올랐다. 《아버지는 나를 서향씨와 결혼시켜 진가등판의 상속자로 만들 작정이지요. 나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나는 진작부터 나의 립장을 아버지앞에 터놓아야 한다는것을 느끼고있으면서도 말을 못합니다. 그것은 오랜 인습과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한 이 집의 맹목적인 사랑을 뿌리치고 일어설 용기가 나에게 부족하기때문이지요. 그것은 서향씨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수 있습니다.》 《그건… 그건 무엇때문에 필요한것인가요? 무엇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가요?》 서향은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은 방금전의 은방울 굴리는듯 잘 울리던 그 목소리와 같은 입에서 울려나왔다고는 도저히 믿을수 없는 갈린 목소리였다. 《한집안의 효성스러운 자식이 되는것보다 훨씬 큰 자기의 의무를 느꼈기때문이지요. 그리고 겉보기는 호인같은 나의 아버지와 우리 집안이 사람들에게 끼치고있는 막대한 죄악을 깨달았기때문이지요. 나는 왜놈들에게 짓밟히는 우리 조국의 아들로서 그리고 우리 집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위하여 굶주리는 수천수만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의 청춘을 바쳐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낍니다.》 《한정씨는 공산주의자인가요?》 《그렇소. 나는 공산주의자요.》 말이 끊어졌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란히 붙어앉았던 자리가 이제는 두사람에게 바늘방석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일어나게 되지 않았고 일어나자는 말도 할수 없었다. 《서향씨.》 하고 진한정은 마침내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내가 서향씨를 사랑한다는것은 서향씨도 잘 알거요. 그리고 나도 서향씨의 사랑을 고맙게 생각하며 가장 큰 행복으로 느끼고있소. 그러나 우리 피차 피끓는 청춘으로서 우리 조국의 형편을 살펴봅시다. 새앙쥐같은 섬오랑캐 침략자들이 광활한 조국땅을 삽시간에 짓밟고 온 동북땅을 다 집어삼켰는데 수십만동북군은 변변히 저항도 못해보고 와해되였습니다. 장개석이는 <치욕과 분함을 참고 한때의 역경이 래일의 순경을 가져온다는 참을성있는 태도로써 국제련맹의 국제적판결을 기다려야 한다>고 줴치고있단말이요. 이것을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겠소.》 《아버지도 그 비슷한 말을 하더군요. 그러나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어요? 우리는 그들이 뭐라고 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수 있지 않아요.》 서향은 몸을 돌려 한정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어린애같이 천진스럽게만 보이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겉늙어보이였다. 한정은 고개를 떨구었다. 결국 자기가 여태까지 아름답게 보고 사랑한것은 하나의 신기루같은것에 지나지 않았던가. 자기는 진실과 순결에 굶주린 인생사막의 방랑자였다. 그래서 리기적이고 타산적인 녀자가 쓰고나온 미덕의 너울에 쉽게 눈이 홀린것이다. 서향이가 그런 녀자라면 그를 단념하기 위하여 그렇게도 가슴을 앓을 필요가 어데 있는가, 너는 이 너절한 현실속에 실컷 행복하게 살아보아라 하고 깨끗이 떠나버리면 될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리성적인 판단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런 리기적인 타산 역시 자기를 사랑하기때문이라는것을 느낄수록 무자비하게 인연을 끊고 일어설 용기가 움츠러들었다. 그는 힘을 다해 서향의 말을 반박하였다. 《온 민족이 불행에 빠져있을 때 우리 둘만이 누리는 행복이라는것이 무엇이겠소.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죄악이며 가장 비렬한 배신이요.》 서향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에 함빡 눈물이 괴여올랐다. 《너무하시는군요. 그러나 난 배신도 좋고 죄악도 좋아요. 실지 내가 그런 길로 굴러떨어진다 해도 한정씨를 놓아드릴수 없어요.》 《난 서향씨의 어떤 소유물이 아니요.》 진한정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것을 본 서향의 눈에서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대신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피여올랐다. 그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정이가 말하는 그 무슨 량심이며 의무며 하는것들과의 싸움에서 자기 사랑이 능히 이길수 있다는 신심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이때 몸채의 사환이 찾아나왔다. 손님이 왔다는 전갈이였다. 《가지 않겠소?》 《먼저 가보세요. 난 벌써 인사를 했어요.》 《아니 누구기에?》 《김성주선생님일거예요. 우리 마차로 같이 오셨어요.》 진한정은 왜 그 말을 이제사 하느냐고 물으려다가 서향의 복잡한 심리를 생각하여 그만두고 급히 안마당쪽으로 돌아나왔다. 큰방쪽을 기웃해보니 안식구들만 모여있고 아버지와 류충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바깥사랑채에 나간 모양이였다. 수화문앞의 간막이벽을 끼고나오니 사랑채의 서재에서 벌써 김일성동지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아버지의 갈린 목소리가 울리여나왔다. 류충제의 목소리도 간간이 섞이였다. 진한정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착잡한 마음속을 그이께 눈치채일가봐 두려웠다. 자기자신 동요하는 자기를 스스로 느끼고있고 또 계영춘이가 그런 자기를 알고있는 조건에서 김일성동지께서 자기를 함께 데리고 가주겠는가 하는것이 저으기 근심스러웠다. 방안에 들어가니 류충제가 먼저 알은체를 하며 자기가 앉은 긴걸상옆으로 손짓해 불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일어서신채로 팔선탁우에 주런이 벌려놓은 붓꽂이며 벼루며 차잔이며 연적따위들을 가리키며 무슨 말씀을 하시다가 한정을 향해 반갑게 웃음지으시였다. 《오래간만이요. 그새 잘 있었소?》 그이의 밝은 웃음과 변함없는 친근한 목소리를 들으니 어쩐지 면구한 생각이 났다. 그는 갑자기 무어라고 드릴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안에서 인사말을 웅얼웅얼하며 그이의 손을 힘있게 틀어잡았다. 그이께서는 한정의 좀 허둥거리는 표정을 너그럽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시였다. 《얼굴이 상한것 같군. 감기라도 앓은게 아니요?》 《아니, 나는 건강하오. 상하기는 성주동무가 상한것 같구만.》 《나야 좀 상할수도 있지. 그새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나니 통 잠을 못잤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스스럼없이 말씀하시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어보이시였다. 그러고보니 그이의 안색에는 피곤이 어리였으나 여전히 탄력에 넘친 생신한 기운이 풍기였다. 《얘, 너는 어디로 그리 싸다니는거냐?》 하고 진대감이 아들을 가볍게 나무라더니 김일성동지를 향해 심중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기구한 이야기로군. 나도 배를 타고 료하줄기를 따라 올라가본적이 있지만 그 고장이 그런 음침한 이야기를 만들어냄즉한고장이더군. 한데 그 이야기를 듣고보니 우리 총통이 중국사람들의 못된 이붓에미라는 말이 비슷한것 같애.》 《이제 말씀드린 그 가정의 비극처럼 동북에도 이렇게 끌끌한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 차잔이며 거북형으로 생긴 연적이며 하는것들을 줄을 지어 세워놓으시니 그것들은 마치 생명있는 전사들이 서렬을 짓고 선것 같았다. 《이사람, 앉아서 이야기하게. 그러지 않아도 피곤할텐데…》 진대감이 그이께서 펼쳐놓으신 팔선탁우의 기명들을 주의깊이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천하의 형세를 바라보자니 자연 일어서게 됩니다.》 그이께서 해학을 섞어 말씀하시니 진대감과 류충제는 그 호방한 기상에 심취되여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웃집놈팽이가 칼을 들고 담을 넘어왔습니다. 채전을 짓밟고 돼지를 도살하고 소를 끌어냅니다. 형제들이 도끼, 쇠스랑을 들고 강도를 치러 나섰습니다. 이때 이붓에미가 뒤에서 허둥지둥 달려나오며 소리쳤습니다.》 하고 그이께서 벼루를 드르륵 탁자우로 끌어내시였다. 《<얘들아, 이웃집어른은 우리 집의 귀한 손님이다. 버릇없이 굴지 말고 공손히 맞아들여라.> 이붓에미의 말에 떨떨해있는 사이에 이웃집놈팽이는 벌써 한형제를 찔러죽였습니다. 오늘 중국의 현실은 내가 오가자에서 들은 그 이야기와 신통히 비슷한것입니다.》 진대감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생각에 잠겨버렸다. 류충제는 차잔에 차를 따라서 그이앞으로 밀어놓으며 헌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이리 앉아서 차나 한잔 들게. 성주군의 변론이 길림에서 들을 때보다 더 날카로와졌군. 우리 나이먹은것들의 메마른 가슴을 사정없이 뒤흔들어주네구려.》 《왜 선생님의 가슴이 메말랐겠습니까. 또 설사 년세가 어느정도 많다 하더라도 후손들에게 나라와 겨레를 위한 바른길을 가르치는데는 나이가 문제로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허허허, 옛사람들은 아침에 도리를 깨닫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했는데 내가 목숨이 아까와 우물쭈물하는것은 아니네.》 《길림에 계실 때도 담때문에 고생을 하셨지요.》 김일성동지께서 이처럼 받쳐주시니 류충제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침을 맞기 시작했는데 효험이 있는것 같애. 침을 좀더 맞고 생각해보겠네.》 《침을 다 맞으신 다음에 또 생각하실게 있습니까? 침을 맞으시면서 아프다는 생각만 하지 말고 항일구국할 생각도 좀 해두셨다가 그다음 제꺽 일어서셔야지요.》 《허허허, 성주 성미도 몹시 급하군. 우리 중국사람들은 일을 그렇게 급히 서두르지를 않네. 이제 두고보게만 나보다 더 천천히 잡도리를 하는 사람도 많을걸세.》 《그렇게 늦잡도록 원쑤들이 가만 있겠습니까?》 《가만있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나? 동삼성만 가지고 성이 차지 않으면 몇개성쯤 더 먹어보라지. 그래야 제놈들이 그걸 새겨내나.》 진대감이 어험어험 헛기침을 깇더니 이야기에 께끼였다. 《류충제선생의 장구책을 들으니 우리 중화땅이 광할한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러나 지난 력사를 보면 저 성주군이 말하는 못된 이붓에미 같은 계집들의 치마폭에 그 광활한 중화땅이 다 휩싸인적도 한두번이 아니였지. 먼 지난날을 말할게 있나. 청말에도 그런 녀편네가 나라를 망쳐먹지 않았나.》 진대감이 이렇게 말하자 류충제는 눈을 슴뻑슴뻑하며 되물었다. 《그런즉 대감께서는 당장 의병이라도 일으킬 의향이신 모양인가요?》 《웬걸, 나는 가병들을 엄히 신칙해서 우리 집 울타리를 굳건히 지킬뿐이요. 각자가 제집을 잘 지키면 온 나라가 스스로 안녕할게 아니요.》 《억지가 보통이 아니시군.》 류충제가 어이없어하자 진대감은 시치미를 뻑 따고 말했다. 《그래도 류선생이 침을 맞아서 담을 다 고칠 때까지는 견디여낼지 알겠소. 그 다음은 류선생이 나라를 지켜줄텐데…》 《허허허, 대감께서 사람을 이렇게 골릴줄 몰랐습니다. 좌우간 성주군의 말을 듣고보니 나는 가슴이 좀 찔립니다.》 《나 역시 그렇소.》 얼마후 김일성동지께서는 두사람끼리 말씨름을 붙여놓으시고 진한정과 함께 바깥으로 나오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 안마당으로 향하시자 진한정이 따라서며 물었다. 《계영춘동무랑 만나봤소?》 《만나봤소. 진동무가 당장 떠나겠다고 한다면서 걱정하더군.》 김일성동지께서는 슬쩍 진한정의 표정을 살펴보시였다. 《걱정을 할게 뭐있소? 그 동무는 나를 아직 부자집도련님으로만 취급한단말이요.》 하늘은 파랗게 개였는데 안마당으로 해서 후원으로 나오니 눈무지우에 비죽이 고개를 내민 말라시들어진 꽃그루의 우듬지들이 풍을 만난듯 바르르 떨렸다. 잎이 다 진 매화나무가지우에서 참새가 찬바람을 맞아 깃이 부르르해져서 마치 헌 솜뭉치같은 꼴로 앉아 떨고있었다. 《날씨가 차지누만. 소한추위를 하려는 모양이요.》 김일성동지께서는 신경이 날카로와진 진한정의 마음을 눙치시려고 일부러 말머리를 딴데로 돌리시였다. 진한정은 그이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급한투로 물었다. 《여기 준비는 다 됐소. 언제 떠나겠소?》 《곧 떠나야지. 한시가 새롭소. 그런데 문제가 있단말이요. 자, 방에 들어가서 천천히 좀 토론해보기요.》 그이께서는 다시 대답을 피하시였다. 진한정의 방에 들어가 마주앉으셨을 때에야 그이께서는 정색해서 말씀하시였다. 《진동무가 보기에 아버지나 류충제선생의 견해가 어떻소?》 《어떻다니? 그런 늙은이들의 견해가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단말이요?》 진한정은 애타게 기다리던 그이의 말씀이 전혀 예상밖의것을 묻게 되자 오히려 안타깝게 반문하였다. 《그건 무슨 소리요? 내가 보건대 오늘의 정세를 놓고 동무의 아버지나 류충제선생같은 립장에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소. 그런데 그들의 힘은 결코 소홀히 할수 없는거요. 우리가 항일전쟁을 벌리면서 이러한 력량에 주목을 돌리지 않는다는것은 잘못된것이요.》 진한정은 잠자코있었다. 큰 부자인 자기 아버지를 항일전쟁의 한개 력량으로 될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그이의 말씀이 고맙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아버지나 류충제의 말이라는것은 전혀 실천이 안받침되지 않은 속궁근것이라 무엇인가에 대해 반대를 하나 찬성을 하나 그 결과는 대차없는것으로 될것이였다. 《진동무.》 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시듯 이윽히 진한정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씀하시였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말만 하고 실지 왜놈을 치는 싸움마당에 뛰여들기를 두려워하고있소. 지어 항일구국의 기치를 든 서향씨의 아버지같은 사람들도 싸움을 하려고는 하지 않소. 왜놈들이 철도연선과 도시에 머물러있으니 산으로 숨어다니고 그 산으로 왜놈들이 들어오면 더 깊은 산으로 쫓겨가는 형편이요. 우리가 하루빨리 유격대를 조직하여 왜놈들을 쳐야만 그들에게도 영향을 줄것 같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말만 하고있는 그들을 설복해서 싸움마당으로 끌어내야 하지 않겠소.》 《필요하지요.》 진한정은 무언가 불안을 예감하면서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받았다. 《그래 이번에 우리는 이렇게 말만 하는 사람들을 설복교양하는 사업에 힘을 넣자고 결심했소. 동만특위의 서기라는 사람도 그것이 걱정스러워 우리에게 그런 부탁을 각별히 해왔소. 그러니 이 일을 누가 했으면 좋겠소?》 《이제는 성주동무의 의도를 알만하오.》 하고 진한정은 좀 약이 오른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건 중요한 사업이기때문에 누구나 다 해야 할거요. 나도 하겠소. 그러나 여기서는 하지 않겠소.》 《그럼 그건 누가 하겠소? 류충제선생은 내놓고라도 동무의 아버지와 동무의 애인을 누가 교양하면 좋겠소?》 진한정은 멍하니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주하림선생은 잘 모르오. 그러나 서향씨를 보니 속이 트인 활달한 성격이고 건전한 생활의식을 가지고있소. 애국심도 높소. 물론 호사하며 자란 녀자고 또 일제침략이 그의 생활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것도 없으니 우리의 투쟁에 아직 사활적인 리해관계를 느꼈다고 보기는 어려울거요. 만일 그에게 진한정동무가 영향을 준다면 서향씨는 충분히 우리 투쟁과 자기의 운명을 일치시킬수 있는 동무요. 그렇게 되면 주대감의 소극적인 항일이 적극적인 항일로 되고 아버지의 말로만 하는 항일이 다소라도 실천이 있는 항일로 되지 않겠소?》 한정은 여전히 그이의 얼굴을 바라볼뿐 말을 못했다. 긴장으로 뭉쳐진 마른침이 꿀꺽 하고 목젖을 울리며 넘어갔다. 《동무가 왜 자꾸 이 집을 도망치자고 하는가? 그리고 누구에게나 뻔한 서향씨에 대한 사랑을 억지로 외면하자고 하는 리유가 무엇인가? 동무는 부자집 자식에다 명문가의 사위까지 되여놓으면 혁명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잘못 생각하는거요. 우리는 동무의 사상을 믿고 함께 손잡고 싸우자고 약속했소. 그때 우리는 동무가 아버지와 의절하는것을 전제로 삼은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무의 견결한 혁명정신이면 아버지도 능히, 적어도 반일애국의 길로 이끌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소. 그런데 동무는 집안에서 공산주의자로서의 자기 정체를 감추는데만 급급했을뿐 한걸음 나아가서 가정을 혁명화하려는 용기는 내지 못했소. 내가 보건대 문제는 동무가 부자집 아들이거나 명문가의 딸을 사랑한다는 그자체에 있는것이 아니라 그런 환경속에서도 견결히 싸워나가겠다는 혁명적각오가 흔들리고있는데 있소.》 진한정은 더 깊숙이 고개를 떨구었다. 《진동무, 내 생각에는 동무가 서향씨를 사랑하지 못할 리유가 하나도 없소. 서향씨나 동무나 다 같은 처지요. 진동무가 혁명을 하는데 서향씨라고 못할게 있겠소. 만일 서향씨가 혁명을 리해하고 동정하고 나아가서 혁명의 길을 함께 걷게 된다면 같은 혁명가끼리 사랑하지 못할 리유가 어데 있겠소.》 진한정은 고개를 숙인채 그이의 손을 움켜잡았다. 《고맙소. 사실 내 심정은…》 《됐소, 됐소. 내가 동무의 마음을 모르겠소. 자,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실무적인것을 좀 토의합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진한정의 손을 잡아당겨 그 손등을 가볍게 쓸어주시고나서 걸상등받이에 몸을 기대시였다. 진한정이가 옭맺혔던 마음이 풀려 어찌할바를 몰라하는 그 순진한 모습을 보니 그이께서도 한결 마음이 밝아지시였다. 《방안이랑 깨끗이 다 거두었구만.》 하고 그이께서는 새삼스럽게 잘 정돈된 책상이며 책장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시였다. 《차비를 단단히 한것 같은데 그건 좋고… 그런데 어쨌든 진동무는 당분간 여기 더 남아서 뒤일을 좀 처리해야 할것 같소. 우리는 래일새벽에 떠나겠소.》 《뒤일이 뭐요?》 진한정은 처음으로 정색해서 물었다. 《지금 일제는 만주를 침략하면서 조선사람과 중국사람사이에 싸움을 붙여놓고 그틈에 제놈들의 야망을 성취해보려고 갖은 간악한 계책을 다 꾸미고있소.》 김일성동지께서는 일제의 조선인정치범석방음모의 내막을 까밝히고나서 그에 따르는 대책에 대해 말씀하시였다. 《그러니 중국사람들속에서 사태의 진상을 알려주고 그들을 반일투쟁에 불러일으키기 위한 선전사업을 진동무가 당분간 책임져야 하겠다는거요. 이것이 첫째고 다음은 옥섬동무의 생활을 좀 돌봐주었으면 좋겠소.》 《그 돈화 서문밖의 련락소에 있는 최효열의 누이동생말이요?》 《그렇소. 이제는 오빠가 희생됐다는것을 아는 조건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 힘을 주고 살아나갈 길을 열어주어야 하겠는데 차광수동무의 말을 들어보면 안도에 가서 싸우도록 해달라고 청한다는거요. 그러나 지금 안도는 우리자체가 지하투쟁을 하면서 무장대오를 꾸려야 할 형편이니 옥섬동무를 지금부터 데려갈수는 없소. 그대신 우리가 데리고 갈수 있게 될 때까지 그 동무에게만은 무슨 일이 있어는 안되겠단말이요. 자기자신으로서는 오빠의 원쑤를 갚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있는 모양인데 그럴수록 우리가 더 잘 돌봐야 하지 않겠소. 내 생각에는 련락소를 따로 조직하고 옥섬동무는 여기 어디로 데려오든가 해서 우리 동무들 있는데서 생활하도록 했으면 좋겠소. 그래야 외로움도 덜 느낄것 같고 또 만약의 경우에 위험도 적을것 같단말이요.》 《혹시 옥섬동무를 저 서향이와 같이 있게 하면 어떻겠소?》 《서향이와?》 김일성동지께서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말씀하시였다. 《그건 진동무가 잘 생각해서 처리하시오. 만일 진동무가 안도로 떠나는 경우에 두 처녀가 함께 있게 된다면 서로 의지도 되고 또 함께 혁명을 잘할 의논도 하게 될거요. 그러나 내 짐작에 서향이도 진동무가 생각한것처럼 그렇게 안전하지만은 않을거요. 바로 코앞에 왜놈들의 특무기관이 있고 령사관이 있는데 주하림의 딸의 동태에 대해 무관심하겠소? 이것은 진동무의 가정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수 있소.》 진한정은 그이의 깊은 통찰력에 내심 새삼스럽게 감탄하며 달리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며칠후면 차광수동무가 돌아올거요. 그때까지 진동무자신의 문제를 다 처리해놓고 조중인민의 련합전선문제를 당면한 일제의 음모를 파탄시키기 위한 공작과 밀접히 결부시키면서 벌려나가야겠소. 차동무가 오면 실태가 더 빠개지겠으니 함께 토론해서 차후대책을 세우고 행동하도록 하시오. 지금이야말로 진동무가 영향력을 잘 리용해서 아버지와 애인뿐아니라 광범한 중국인민을 혁명의 편으로 끌어당기는거요.》 《알겠소.》 하고 진한정은 머리를 숙이고 대답했다. 《고맙소. 나는 사실 가정문제도 그렇고 서향이와의 관계문제도 그렇고 나로서는 혁명을 위해서 단념하노라고 했지만 괴로왔던것이 사실이요. 그런데…》 《자 됐소. 뭘 그런 이야기를 자꾸 하오. 난 계동무랑 같이 마을에 나가보겠소. 여기 조직들이 적을 코앞에 두고 독자적으로 활동하자면 많은 문제들이 나질수 있소. 나가서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문제가 있으면 풀어줘야겠소. 그사이 진동무는 서향씨와도 만나고 류충제선생과도 만나서 사업을 잘해야겠소. 서향씨를 만나는것을 그저 자기 개인일로만 생각지 마오.》 김일성동지께서는 거듭 당부하시고 나가시였다. 진한정은 그이께서 안마당을 나가신 다음에도 방문을 닫지 못하고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생각한것처럼 혁명이란 어떤 엄격한 규률과 무자비한 원칙만이 지배하는 그런 몰인정한 세계가 아니였다. 그것은 고도로 발달된 리성의 세계인 동시에 진실로 후더운 인정의 세계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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