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씨와 나
 

명예철학박사, 교수 윤이상

1.

저는 오늘 클로드 드뷔씨(Claude Achille Debussy 1862-1918)와 저와의 관계에 대해 여러분앞에서 강연해달라는 주최자의 청탁을 받고 제나름대로 이에 대한 생각을 펼쳐보이려고 합니다만 먼저 설명해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예술가도 주위환경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수 없다는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저에게는 모범으로 삼을만한 작곡가는 한사람도 없습니다. 저는 음악가로서 어떠한 집단에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자가 선생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하는 사제관계의 의미에서도 저는 한사람의 선생도 가진 일이 없습니다. 저는 자신의 음악언어를 중국과 조선의 궁중음악에서 발견하였으며 따라서 저의 음악은 어떤 선생과도 관계가 없는것입니다.

음악사적견지에서 말할 때 1960년대와 1970년대초기 저의 《음향구성》은 음렬주의이후시대의 결코 무의미하지 않는 한 조류에 속합니다. 따라서 그 조류는 아마도 죠르지 리게띠(Gyorgy Ligeti)와 크리슈또프 뻰데레쯔끼(Krzysztof Penderecki)가 그 시대에 쓴 작품과 비교될수 있을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그들의 작품은 서로 다릅니다. 그것은 저의 음향기법이 동아시아적인 음향관에 의한것이기때문입니다. 여기에서는 모든것이 개개의 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선적이면서도 상하의 움직이는 전개속에서 개개의 음은 색채와 력도속에서의 울림, 글리싼도, 트릴, 음영에 의하여 생생하게 유지됩니다. 이때 음향은 개개의 편차를 허락하면서 집단적진행과정에 형성됩니다.

저는 청년시기에 랑만파시대의 작품에 친숙하여왔으므로 유럽음악의 중심지에서 새로운 음악발전상태를 무척 알고싶었습니다. 제가 고국에 있을 때에는 우리 나라의 풍부한 음악전통을 언제나 듣고 즐겨왔습니다. 유럽에 와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조국의 전통음악에 내포되여있는 보물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세사람의 유럽작곡가를 선배로 인정하였습니다. 벨라 바르토크(Bela Bartok), 리하르드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그리고 클로드 드뷔씨였습니다. 스뜨라빈스끼의 력동은 나에게는 너무 거칠게 느껴졌고 쉔베르그(Arnold Schonberg)의 합리적계산법은 지나칠 정도로 지적 (知的)인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다른 한편 바르토크의 근원적인 힘, 슈트라우스의 관현악적풍만성, 드뷔씨의 색채감은 저를 매혹시켰습니다. 만약 지금 가장 몸가까이에 느끼는 작곡가 한사람을 지적하라고 한다면 저는 첫째로 드뷔씨를 들수 있습니다.

드뷔씨의 음악언어는 조금도 격정적인것이 아니고 친절하지도 않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그 어떤 감정이 깃들어있습니다. 외적측면에서가 아니라 내적측면에서 빛을 뿌리고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음악언어는 언제나 감정적이면서도 어떤 거리를 두고있는듯 한 느낌을 안겨줍니다. 저의 음악에 대해서도 이와 류사한것을 말할수 있을것입니다. 음향의 공간성, 상상적인 접근과 리탈, 빛과 그늘의 관계, 일종의 부동(不動)속의 동(動), 그리고 안정과 평온에 의한 전체의 인상이 드뷔씨나 저의 음악에서 류사한 효과를 나타냅니다. 이 전체적인 인상에 대한 부분에서 말하고싶은것은 드뷔씨의 경우에 있어서 거리를 둔 평온이라는 인상이 그의 음악의 일반적특징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한편 저의 음악은 부분적으로 정열적이며 신경질적인 요소를 가지고있습니다. 실례로 드뷔씨의 플류트, 비올라, 하프를 위한 쏘나타(1915)중에서 제2악장 마감부터 제3악장까지와 저의 곡 플류트, 하프,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노벨레테》(1980)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공통성은 음악의 느낌과 효과에서뿐아니라 음악언어의 령역에서도 있습니다. 드뷔씨와 저의 음악의 경우도 3부분구성, 음렬원칙, 지속적변화 그리고 이에 따르는 형식적개방에로의 경향성을 가지고있습니다. 화성적조성의 해소과정을 추진시키면서 드뷔씨는 기능적인 화성법을 기피하고있습니다. 1960년대 중엽이후 저의 경우 음악언어가 완화되여가면서 일반적으로 무조적인 음악에 조적인 요소들이 인입되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특히 드뷔씨의 피아노련습곡을 연구하였고 피아노련습곡과 또 하프와 현악합주를 위한 《무곡들》에서 연주기술적인 자극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드뷔씨의 아라베스크(Arabeske)와 저의 장식음사이에는 기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저의 음악은 총체적으로 내용과 형식모두가 더욱 정리되였고 구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뷔씨는 쉔베르그와 스뜨라빈스끼와 같이 음악사상의 소위 《혁명적》근대파로는 꼽히지 않습니다.

 

2.

유럽밖의 음악이 드뷔씨에게 준 영향에 대하여서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글을 썼습니다. 드뷔씨는 이국적인상의 효과를 얻기 위해 여러가지 음악문화의 많은 요소들을 자기 음악에 인입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동양적인 요소는 참말로 그의 아라베스크에 대한 관념의 근원을 이루고있습니다. 그의 아라베스크에 대한 원형은 그자신의 말에 의하면 동지중해에서 발생한 그레고리아송가(gregorianischer Choral)입니다. 물론 그때에는 동서음악의 진정한 융합문제는 제기되지 않았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크게 말하여 동아시아의 음악사고와 유럽의 의상을 융합시키고있습니다만 드뷔씨에게서 중요한것은 무엇보다도 이국적인 취미이며 그것을 위해 자연적, 원시적음향효과가 인입된것입니다. 드뷔씨는 《리념》이나 표제적내용과 관련된 《뜻을 가진》주제의 리용을 피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연에 흐르는것과 같은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음형들을 추구하였습니다.

드뷔씨는 라모(lean Philippe Rameau 1683-1764)와 16~18세기의 프랑스음악전통에서 중요한 자극을 받았다면 저의 출발점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그것과 가깝고도 먼것입니다. 가깝다는 뜻은 제가 작곡에서 살린것이 15세기말에 발생한것이기때문이며 멀다고 하는것은 중국과 조선의 궁중음악이 1천년이 넘는 세월 변함없이 전승되고있기때문입니다. 드뷔씨와 저의 음악에서 공통적인것은 형식의 개방성입니다. 저는 자신의 작품을 도(道)의 표명으로, 음악이 끝났어도 계속되는, 귀에 들리지 않는 음향의 구체적인 한쪼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작품은 동아시아의 의식과 불교, 도교의 추억을 담고있으며 몇개의 작품인 경우 조선의 전설과 옛이야기들을 구체적으로 상기시킵니다.

아이머트(Herbert Eimert)는 《드뷔씨의 발레곡 〈유희〉에 대한 연구》에서 적절하게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드뷔씨의 음악에서 단순한 용기에 불과한 형식의 자리에(저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만) 《리듬화된 시간》이 나타난다는것을 밝혀냈습니다. (《리듬화된 시간》이라는 표현을 이미 드뷔씨자신도 사용하였습니다.)  아이머트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드뷔씨는 형식이라는것을 장식음, 모찌브, 미사려구적수식속으로 거두어 들이는데 그것들은 감추어진 결집력이 매우 강하므로 스스로 형식을 구성하는듯이 보인다.》

음향구성은 드뷔씨의 경우 대체로 한두번 반복되므로 그것이 알기 쉽게 되여있습니다. 다른 한편 새로운것이 계속 반복되면 예견할수 없게 되며 알기 어려움이 증대됩니다. 아이머트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음렬들은 선적으로 직접적으로 곧바르게 움직인다. 이것들은 변증법적으로 구성된 형식의 용기와 그물망에서 해방되여 장식적인 물결과 같은 파도선을 형성하는데 이 파도선들은 자유롭게 운동하면서 또 새로운 파도선을 형성하여 전체적으로 파상적인 콜로라투라를 유발시킨다. 이 물결들은 아무리 력도적인 움직임을 조성해도 목적점에로 인도되지 않으며 또 이것들은 단순한 장식물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들은 흐름과 형식이 하나로 합쳐진 형태라고 할수 있다.》

아이머트는 드뷔씨의 이러한 점을 가리켜 《목적의식적이며 의사에 의하여 설정된 주제와는 인연이 없는 드뷔씨의 장식적, 식물적(植物的)구성원리》라고 지적했습니다.

드뷔씨의 아라베스크는 《단순한 파도선》속에서 움직이지만 그 파도선들은 자체안에서 순회하거나 실처럼 짜여져나오고 반복하며 계속 증식됩니다. 이 순환은 언제나 그자체가 목적이므로 목표도, 주제의 형성도, 동기적인 《작업》도 없습니다. 그 대신에 무수한 변주를 불러일으킨 동기적인 결합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주제의 결정과 사상적인 고정화로써가 아니라 자유로운 증식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은 융통성있는 형식은 영원한 변화라고 하는 드뷔씨의 원리에 의한것입니다만 그속에는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동기, 주제적인 세포가 숨어있으며 그 세포들은 어느것이나 다 《유기적인 부정확성》이라고 부르는것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정확하게 호상 관련되여있습니다.

그러나 드뷔씨는 전체적으로 음향면의 반(反)주제적인 조직화를 목표로 하는것으로서 동기, 주제를 엮는 작업이라는 합리적인 요소를 눈에 띄지 않게, 그리고 단호하게 파괴하였습니다.

종합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드뷔씨는 동기, 주제적인 부분을 일종의 음향의 조용한 움직임으로 덮어버리고 변형시켰지만 저의 경우 그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저의 음악의 출발점은 조용한 소리로 움직이면서 상하로 흔들리는 음향의 흐름입니다. 따라서 저는 개개의 음을 소위 이음적(異音的)음향(혹은 화음)으로 분해합니다. 이 다성적으로 흐르는 음향속에는 음들의 빠짐과 마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다성적특성이 하나의 일원적으로 흐르는 전체에로 정리되여갑니다. 이때 저의 주요음향기법이 정리될뿐아니라 전체의 명확한 륜곽에 대한 전망이 가능케 합니다.

드뷔씨의 아라베스크는 작곡의 수단이며 그의 작곡에서 효과를 발휘하고있습니다. 저의 음악에서 장식성은 목적으로서 실체 그자체입니다. 따라서 아라베스크는 드뷔씨에서는 얼마간 구속점이 없이 떠돌고있지만 저의 경우 주요음향기법에 통합되여 거기에 튼튼히 고착되여있습니다. 저의 《주요음》은 중심음으로서 언제나 정지음이기도 합니다. 이때 장식적으로 화려한것은 상하로 흔들리면서 계속 흐르는 음향속에 흡수됩니다. 이 과정에 주요음의 흐름은 똑똑히 구분할수 있는 륜곽을 가지고있습니다. 한편 드뷔씨의 경우 빛은 흘러 사라집니다. 아라베스크는 그것과 같이 파도모양으로 되여있습니다.

구속됨이 없이, 정지됨이 없이 흘러 사라집니다. 아이머트가 《숨을 몰아쉬고 들어올려 의지에 의하여 설정된 상박(上拍)의 결여》라고 지적한것은 리유가 없는것은 아닙니다. 그와 같은 상박을 여러분은 저의 음악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낼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도로 목적의식적이며 그 부단한 선률이 상행하는것이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 단호한 상행은 저의 음악에서는 해방을 의미하고있습니다. (이 글은 윤이상이 1986년 7월에 한 강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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