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으로 조국의 영예를 떨친

 

인민배우 백고산

 

 

인민배우 백고산(1930-1997)은 바이올린음악과 함께 한생을 살아오며 뛰여난 연주기술과 후비육성으로 조국과 민족의 영예를 떨치는데 크게 기여한 재능있는 바이올린독주가이며 교육자였다.

백고산은 주체19(1930)년 5월 27일 평양시 서성리(당시)에서 태여나 3살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며 자랐다.

토성랑주변의 이름없는 바이올린애호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의 소질이나 장래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제식민지하의 험난한 세월을 살아가자면 무엇이든 생존수단으로 삼을만한것을 익혀줘야 한다는데로부터 어린 세 아들의 어깨우에 책가방이 아니라 차례차례 바이올린통을 메웠고 입술을 깨물고 종아리를 쳐가면서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시작하게 된 동기는 어찌되였든 백고산에게는 천성적인 음악적재능이 있었다. 그는 바이올린을 잡은지 얼마 안되여 민요가락이나 동요들을 어렵지 않게 그어갔고 6살때부터는 형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거리와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바이올린을 연주하여 가정의 생계를 이어가는데 보탬을 주었다.

8살나던 주체27(1938)년 어느날, 그날도 길거리에서 바이올린을 타던 백고산은 좋은 음악학교에서 공부시켜주겠다고 하는 한 일본인 흥행업자의 얼림수에 속히워 일본땅으로 가게 되였다.

흥행업자는 어린 나이에 쉽지 않은 연주재능을 가진 그를 야외무대들에 끌고 다니며 돈벌이수단으로 삼았다. 그리고 조선곡조는 타지 못하게 하고 일본노래만 연주하라고 강요하였다. 어린 마음에도 반발심이 솟아난 백고산은 어느날 무대에 나가 일본노래가 아니라 조선민요 《아리랑》을 연주하였다. 그날 《아리랑》곡조를 끝내 다 타지 못하고 무대밖에 끌려나와 모진 매를 맞았어도 그는 조선노래를 지켰다는 자족감에 눈물을 쏟지 않았다.

그때부터 백고산은 망국노의 쓰라린 체험속에 인연이 맺어진 민요 《아리랑》을 어느 노래보다 사랑하게 되였고 일본땅의 조선동포들속에서 《아리랑》을 연주하며 그들과 함께 설음을 나누었다. 어린 백고산은 그때 일본땅에서 조선의 천재적인 소년바이올린수로 널리 소문이 났었다.

10살잡히던 주체29(1940)년부터 백고산은 6살난 동생(백도산)과 함께 순회연주생활을 하였다. 어린 그들형제는 흥행업자들이 이끄는대로 남으로는 해주, 서울, 인천, 충주, 대구, 광주, 부산까지 북으로는 순천, 함흥, 원산, 청진 등 전국각지의 어디든 안가본데 없을 정도로 돌아다녔다.

두 형제는 영화관이나 야외가설무대들에서 독주와 2중주를 하며 한시간이상의 단독공연을 하군 하였는데 멘델스존의 협주곡, 사라사데의 《집씨의 노래》, 베토벤의 메누에트, 가보트 등 유럽의 유명한 기악곡들이 주로 독주로 연주되고 2중주로는 《아리랑》, 《양산도》, 《노들강변》 등의 조선민요들이 연주되였다.

이 나날에 어린 백고산형제는 웬간한 음악가들도 올라보기 힘들다고 하는 서울의 부민관에서 피아노반주에 맞추어 연주무대를 펼치기도 하였고 때로는 자기들을 데리고 다니던 흥행업자가 공연비를 꿍져넣고 달아나버려 길거리를 방랑하며 구걸연주로 끼니를 이어간적도 있었다.

이렇게 발 가는대로 방랑연주생활을 하던 그들형제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 할빈에 이르게 되였다. 때는 백고산이 13살나던 주체32(1943)년이였다.

할빈에서 백고산은 순회공연의 나날에 얼굴을 익힌 어느 한 사람의 소개로 로씨야인 음악가부부(남편은 바이올린연주가로서 후날 옴스크음악대학 학장을 함. 안해는 피아노연주가임)를 만나게 되였다. 백고산형제의 연주를 들어 본 로씨야인 부부는 그들을 당시 할빈에서 제일 큰 극장이였던 모델극장에 소개하여 공연(1시간 20분)할수 있게 해주었고 안해는 피아노반주를 맡아주었다.

그날의 공연은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공연을 본 조선동포들은 민족적수난속에서도 쉽지 않은 재능을 익힌것이 너무도 기특하여 그들 두 형제를 얼싸안고 기뻐했으며 옷조차 변변치 못한것이 가슴아파 그들에게 새 옷을 지어입힌 이름모를 동포도 있었다고 한다. 나라를 빼앗기고 타향살이에 쪼들리며 살았어도 민족의 재간둥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동포애적마음들은 이렇듯 뜨거운것이였다.

이런속에서 백고산의 마음속엔 기량을 더욱 련마하여 바이올린으로 민족의 재능을 떨쳐보려는 강심이 굳어져갔다. 그는 9살난 동생 백도산을 홀로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로씨야인 음악가에게서 개별지도를 받기 시작하였다. 수업료를 마련하기 위하여 신문배달, 우편물배달도 하였으며 숙식비용을 마련할길 없어 이집저집 떠살이를 하면서도 이악하게 바이올린연주기술을 숙련해갔다.

그러던 주체34(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조국이 해방된 소식에 접한 백고산의 마음은 조국으로, 고향 평양으로 나래쳐갔다.

그러나 일제의 패망에 이어 국내전쟁의 불길에 휩싸인 동북지방의 엄혹한 정세로 하여 그는 귀국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주체35(1946)년 중국혁명을 지원하여 동북해방전투에 참가한 조선의용군이 할빈에 들어왔을 때 백고산은 조선의용군 3지대 선전대에 입대하였다.

16살의 애젊은 청년이였던 백고산은 선전대 대장으로 되여 전투적인 공연활동을 벌리며 동북지방의 조선동포들과 중국인민들의 해방투쟁을 크게 고무하였다.

백고산은 중국의 국내혁명전쟁이 승리적으로 결속되여가던 주체38(1949) 년 5월 그리운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은혜로운 어머니조국은 나라 없던 그 세월 어린 몸으로 전조선땅은 물론 일본과 만주를 메주밟듯 방랑하며 인생의 초행길을 파란곡절과 피눈물속에 헤쳐온 그를 넓은 품에 따뜻이 품어주었다.

조국의  품에  안긴  그  시각부터  백고산은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재생의 은인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의 각별한 사랑속에 값높고 영광넘친 새 삶을 받아안은 복동이로 되였다.

신동 백고산의 눈물겨운 류랑연주에 대하여 잘 알고계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조국에 귀국한 백고산을 갓 조직된 조선인민군협주단 관현악단 악장으로, 독주가로 내세워주시여 보람찬 음악활동을 마음껏 할수 있는 넓은 길을 열어주시였다.

백고산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창건하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품속에서 나라의 주인이 된 기쁨을 안고 새 생활을 꽃피워가는 인민들의 희열에 넘친 모습과 새 조선건설로 들끓는 벅찬 현실을 무한한 격동속에 체험하며 음악으로 조국을 빛내일 결심을 안고 보람찬 연주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주체39(1950)년 정월 초하루날 백고산은 꿈만같은 영광을 받아안게 되였다. 해방후 다섯번째 설을 맞는 그날 어버이수령님께서 조선인민군협주단의 지휘성원들과 함께 백고산을 부르시여 몸소 그의 바이올린연주를 들어주시고 연주활동에서 지침으로 되는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던것이다.

그가 연주하는 외국곡과 민요 《양산도》를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바이올린을 잘 탄다고, 발전성이 있다고 높이 평가해주시면서 음악연주에서 다른 나라의것을 하는것도 좋지만 우리 나라의것을 많이 연주해야 한다는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바이올린이라고 하면 의례히 유럽의 유명한 고전음악들을 연주해야 하는것으로 인식하고있었던 백고산은 그날 서양악기를 조선음악발전에 리용하여야 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진 어버이수령님의 가르치심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새겨안았다.

그때부터 한달이 지난 2월 어느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또다시 조선인민군협주단의 공연을 보아주시면서 백고산이 확실히 바이올린을 잘 연주한다고 치하하시며 앞으로 그를 더 공부시켜 훌륭한 연주가로 키워야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리고 그를 국내무대는 물론 외국공연무대들에도 많이 내세워 연주실천속에서 기량을 높여나가도록 세심한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사랑과 믿음으로 백고산은 주체39(1950)년 6월 첫 외국공연의 길에 올랐다. 모스크바에서 공연활동을 하던 중 조국이 전쟁의 불길에 휩싸인 소식에 접한 백고산은 예술인들과 함께 조국으로 달려나왔다. 그는 조선인민군협주단 소편대에 망라되여 서울로부터 락동강에 이르는 지역의 인민들과 전선부대 군인들속에서 위문공연활동을 벌렸다. 그 나날에 서울에서 8. 15해방전에 헤여졌던 부모형제들과도 상봉하게 되였다.

백고산은 주체40(1951)년 8월 베를린에서 진행된 제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여 3등상을 받았으며 이어 진행된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에서의 순회공연무대들에서 바이올린독주가로 활약하였다.

예술단이 귀국할 때 백고산은 어버이수령님의 은정깊은 사랑속에 모스크바에 남아 음악대학 특별연구생으로 공부하게 되였다. 그는 조국이 준엄한 시련을 겪는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한 연주가의 재능을 귀중히 여기시며 다심한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수령님의 은덕과 피흘리며 싸우는 전우들을 한시도 잊지 않고 열정을 바쳐 연주기량을 높여나갔다. 이 나날에 백고산은 로므니아의 부꾸레슈띠에서 진행된 제4차 세계청년학생축전(1953년 8월)에 참가하여 다시금 3등상을 받았으며 그후 주체44(1955)년 8월에는 와르샤와에서 진행된 제5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1등을 함으로써 조국의 영예를 크게 떨쳤다.

백고산은 주체43(1954)년에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후 국립교향악단 바이올린독주가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극장무대에서만이 아니라 전후복구건설과 사회주의건설로 들끓는 공장과 농촌, 건설장들마다에서 공연활동을 하면서 정서깊으면서도 격동적인 바이올린음악으로 근로자들의 로력투쟁을 힘있게 고무하였다.

이 나날에 백고산은 우리 인민들속에서 널리 사랑을 받은 바이올린독주곡 《고향길》(김길학 작곡)을 비롯하여 바이올린협주곡 《굴진공》(박민혁 작곡), 《용광로가 보이는 바다가에서》(김린욱 작곡) 등 많은 독주곡들의 첫 연주를 하였다.

그가 연주한 바이올린음악들은 조선중앙방송으로도 널리 보급되였는데 그 소리가 우아하고 웅글면서도 생명력이 넘쳐흐르고 예술적감화력이 강한것으로 하여 사람들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창조와 건설로 들끓던 천리마시대 인민들의 가슴마다에 아름다운 정서와 열정, 전투적기백을 안겨주었다.

백고산은 주체46(1957)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차 챠이꼽스끼명칭 국제음악콩클에서 영예상을 받았으며 조국의 영예를 빛내이기 위한 길에 자기의 예술적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한것으로 하여 공훈배우칭호를 받았다.

백고산은 1960년대의 나날에도 어버이수령님의 두터운 사랑과 신임속에 인민들을 사회주의건설에로 고무추동하는 공연활동을 적극 벌려나갔다.

이 시기에 그는 서양악기를 조선음악에 복종시킬데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명심하고 《아리랑》을 비롯하여 인민들이 사랑하는 민요들을 편곡한 바이올린음악들을 많이 연주하였다.

그러던 주체51(1962)년초 우리 음악예술을 시대와 혁명의 요구에 맞게 주체적으로 발전시켜나갈데 대한 방향을 주시고 그 실현을 위한 사업을 현명하게 령도하시던 력사적인 나날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어느 한 종합공연무대에서 백고산이 연주하는 바이올린독주곡 《아리랑》을 들으시고 보라, 서양악기인 바이올린을 가지고도 우리 민요를 연주하니 얼마나 좋은가고 못내 만족해하시며 연주활동에서 주체를 튼튼히 세울데 대한 강령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참으로 어버이수령님의 세심한 지도와 보살피심속에서 백고산은 주체성과 민족성을 구현한 바이올린음악으로 조국에 이바지하는 혁명적인 예술인으로, 바이올린과 더불어 조국의 영예를 빛내이는 세계에 공인된 관록있는 바이올린독주가로 성장할수 있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아끼고 내세우시여 관록있는 연주가로 키워오신 백고산이 한생을 바이올린과 함께 값높은 삶을 빛내가도록 이끌어주신 위대한 스승이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60(1971)년 6월 우리 식의 주체적배합관현악을 창조하시던 력사적시기에 백고산을 영화음악단(당시)의 관현악단 악장으로 내세워주시고 음악연주활동을 보다 새롭게 벌려나가도록 이끌어주시였다.

그리고 세계 그 어느 나라에도 있어본적이 없는 품위있는 녀성기악중주조를 만수대예술단에 꾸리실 때에도 그를 기술지도원으로 불러주시고 창조실천속에서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해가도록 하여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세심한 지도와 크나큰 믿음속에 백고산은 권위있는 바이올린교육자로, 국제콩클심사위원으로 자라났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예술의 위력을 세계만방에 떨쳐가시던 력사적인 나날에 친히 백고산에게 세계적인 바이올린연주가를 키울데 대한 과업을 주시고 여러차례에 걸치는 세심한 지도로 그가 성공할수 있도록 이끌어주시였다. 하여 백고산은 피타는 노력과 심혈을 기울여 신인연주가를 훌륭히 키워냈으며 그가 주체65(1976)년 유고슬라비아(당시)에서 진행된 국제콩클에서 단연 1등의 영예를 지닐수 있게 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실력으로 당을 받들고 조국의 영예를 빛내여 온 백고산을 더없이 믿고 사랑하시며 그의 높은 연주실력과 교육활동에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시였다. 그러시고 그에게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수제품바이올린을 손수 마련하시여 선물로 안겨주시고 인민배우칭호 (1977년)와 높은 국가수훈의 영예도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다심하신 사랑과 믿음속에 백고산은 환갑이 훨씬 지나도록 손에서 바이올린을 놓지 않고 평양음악무용대학(당시) 특설학부 바이올린교수로 활약하면서 재능있는 독주가후비들을 육성하는데 정력을 바쳤다.

그는 실기교육을 하면서도 바이올린음악창작에 힘을 기울여 불후의 고전적명작 《조국의 품》, 《축복의 노래》를 편곡한 바이올린독주곡들을 비롯하여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렵니다》, 《결전의 길로》 등 수십여편의 바이올린독주곡, 협주곡들과 연주교재들을 창작하여 교육과 연주실천에 도입하였다.

백고산은 실기교육에서도 남다른 특기와 높은 교육자적권위로 하여 교수집단과 제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진지한 교육자적자세와 제자들의 개성과 우점을 충분히 발양시켜나가는 다양하고 풍부한 교수방법, 과학성이 안받침된 엄격한 요구성과 높은 실력의 연주시범 등은 그의 바이올린교수의 중요한 특징이였다.

그는 또한 고지식하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을뿐아니라 섬세하고 랑만적이며 의리가 깊은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하기에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남다른 솔직성과 직무에 대한 높은 요구성, 대바르고 때묻지 않은 성품을 지닌 그를 더없이 사랑한다고 하시며 그를 자주 몸가까이 불러 사랑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며 그의 삶을 빛내여주시였다.

백고산은 위대한 장군님의 은정깊은 사랑과 믿음에 보답하기 위하여 심장이 멎는 순간까지 교육사업에 헌신하다가 주체86(1997)년 11월 26일 강의도중에 뜻밖의 급병으로 순직하였다.

백고산은 사망후에도 전사들을 한없이 아끼고 위하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속에 영생의 삶을 지니였다.

현지지도의 길에서 인민배우 백고산의 서거에 대한 소식을 보고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애석함을 금치못해하시며 백고산동무는 어려서 부모곁을 떠나 류랑하면서 고생도 많이 하였다고, 그는 조선로동당의 품에 안겨서야 참된 삶을 찾았고 재능도 꽃피웠다고 뜨겁게 추억하시였다.

그리고 그의 장례와 부고를 내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으며 그의 시신을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뜨거운 배려를 베풀어주시였다.

정녕 민족수난의 그 세월 모진 가난으로 하여 바이올린과 기구한 인연을 맺게 되였던 백고산, 그 바이올린으로 하여 수모도 많이 받았고 눈물도 많이 흘렸던 백고산은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슬하에서 참다운 삶의 기쁨과 행복을 찾았으며 온 나라가 다 알고 온 세상이 공인하는 세계적인 바이올린명인으로 성장하여 값높은 생을 보냈다.

50여년세월 바이올린음악과 함께 조선로동당을 받들고 조국의 영예를 떨치며 주체음악발전에 기여하여 온 인민배우 백고산은 오늘  조국과 인민이 뜨겁게  추억하는  애국렬사들과 나란히 영생의 대오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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