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8(2019)년 1월 19일 로동신문

 

사회주의 우리 집을 이런 참된 공민들이 떠받든다

특류영예군인의 안해가 되여 30여년세월 불같은 헌신과
애국의 길을 걸어온 회안청년탄광 부원 김춘화동무에 대한 이야기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신년사를 높이 받들고 온 나라 인민이 공화국공민의 본분을 가슴깊이 새기며 새해진군길을 다그치고있는 오늘 우리는 한생을 불사신처럼 살아온 한 녀성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게 된다. 그는 특류영예군인의 안해이며 두 아들을 조국보위초소에 세운 인민군대후방가족인 동시에 당중앙의 불빛, 사회주의불빛을 지켜선 북창의 탄부들이 존경하며 사랑하는 성실한 후방일군이고 수많은 병사들이 어머니라 부르는 원군미풍열성자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당과 수령을 위하여, 고마운 사회주의조국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 투쟁하는것은 공민으로서의 법적의무이기 전에 량심과 의리로 되여야 합니다.》

녀성으로서, 공민으로서, 당원으로서 당과 조국, 사회와 가정앞에 지닌 의무를 다하기 위해 무거운 짐을 스스로 떠안고 굴함없는 생을 이어온 북창지구청년탄광련합기업소 회안청년탄광 로동보호물자공급과 부원 김춘화동무,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 마련해주신 사회주의 우리 집을 열화같은 애국헌신으로 떠받드는 이 땅의 하많은 식솔들의 순결무구한 아름다움이 그의 모습에 어려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과 정의 화원, 인민이 대대로 만복을 누려갈 사회주의 우리 집의 한식솔이라고 떳떳이 말할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 그가 걸어온 인생의 자욱자욱에서 울려나온다.

 

나의 초소, 나의 가정

 

지금으로부터 34년전인 1985년 3월 김춘화동무는 특류영예군인 손재철동무와 가정을 이루었다.

얼마후 그는 당중앙위원회의 부름을 받았다. 나라의 방방곡곡에 사는 특류영예군인의 안해들이 그와 나란히 당중앙위원회 뜨락에 들어섰다. 그중에서 제일 애젊은 새각시, 여직껏 군당위원회마당에도 별로 들어서본적 없는 24살의 김춘화동무는 높뛰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따사로운 태양의 빛발이 온몸을 감싸안는듯 한 당중앙위원회 구내길을 꿈속인양 걸어갔다.

그들을 마중한 사람은 당중앙위원회의 책임일군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특류영예군인들과 가정을 이루고 그들의 건강을 지성껏 돌보아주며 자식들도 잘 키우고있는 동무들의 소행을 보고받으시고 은정어린 선물을 안겨주도록 하시였습니다.》

창문가로 흘러드는 눈부신 해살에 유난히 빛을 뿜는 록음기, 라지오가 달린 전축이 어깨를 들먹이기 시작한 녀인들의 가슴마다에 안겨졌다.

정말 기특한 소행이라고, 인민군대의 전투력을 강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고 하시면서 당중앙의 명의로 사랑의 선물을 마련하도록 하신 위대한 수령님, 특류영예군인들가운데는 앞을 못 보는 사람도 있는데 텔레비죤보다 소리방송과 음악을 다 들을수 있는 전축이 더 좋을것이라고 하시며 영예군인가정들에 안겨줄 선물을 친히 선정하여 당중앙위원회청사에서 수여하도록 하신 위대한 장군님의 하늘같은 믿음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으며 영예군인의 안해들은 격정의 눈물을 쏟았다.

김춘화동무의 고향은 강선이다. 국가과학원 흑색금속연구소 실험공으로 일한 그는 두해전 가을 녕원군에 시료채취작업을 나갔다가 그곳의 한 녀인으로부터 최전연초소에서 군사임무수행중 뜻밖의 일로 두눈과 두팔, 한다리를 잃고 영예군인이 되여 돌아온 녀인의 사촌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내가 한번 찾아가봐도 될가요?》

검은 안경을 끼고 입가에 미소를 담은 영예군인청년의 사진을 보다가 무심결에 한마디 하였는데 녀인은 몹시 반가와했다. 종이장에 북창군의 회안탄광(당시)지구에 사는 사촌동생의 집주소도 적어주고 략도까지 그려주었다.

그 종이장을 품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김춘화동무는 영예군인청년을 선뜻 찾아가지 못했다. 그 어떤 기대가 담겨진 녀인의 눈빛에 따뜻한 말 몇마디나 동정이 아닌 마음속진정과 실천으로 대답하기에는 아직 준비되지 못했음을 절감하기때문이였다. 인민군군인들이 최전연초소에서 목숨을 내대고 조국을 지켜가기에 자기들이 행복하게 살고있는것을 생각할 때 어제날 병사의 순결하고도 뜨거운 심장을 공연히 든장질할 권리가 없음을 깨달아서였다.

이름 못할 괴로움속에 날과 달이 흐르던 어느날 그는 책상서랍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당원증주머니를 보게 되였다. 전쟁로병이였던 아버지, 가렬한 전화의 불길속에서 당원의 영예를 지니였으며 전쟁때 입은 상처로 전후에도 모진 아픔에 시달린 아버지는 림종의 시각 자식들에게 말하였었다.

《이 아버지가 너무 빨리 간다고 슬퍼말아라. 아버지는 조국보위자의 영예를 안고 간다.》

그는 아버지의 당원증주머니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감는 마지막순간에조차 1950년대 조국보위자라는 긍지감을 안고있은 아버지가 제 딸이 조국수호의 길에 피끓는 청춘을 바친 훌륭한 청년과 일생을 같이하기를 주저한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서운해하랴. …

이렇게 그는 특류영예군인의 안해가 되였다.

하지만 아직은 첫 자욱을 내디딘데 불과한 그에게 당에서는 꿈에도 생각 못한 크나큰 영광과 믿음을 안겨준것이였다. 격정속에 당중앙위원회청사를 나서느라니 창공높이 휘날리는 조선로동당기가 의미깊게 안겨들었다. 한번 먹은 마음 변치 말고 끝까지 가라고 머나먼 생의 앞길을 축복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자애로운 손길인듯 쉬임없이 나붓기는 붉은 당기발,

김춘화동무는 숭엄한 자세로 우러렀다.

(위대한 수령님,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당에서 금싸래기처럼 아끼는 특류영예군인 손재철동무의 건강과 한생을 제가 맡아 끝까지 돌보겠습니다.)

영예군인가정, 정녕 그것은 이 땅에 태를 묻은 공민의 한사람인 그가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앞에 순결한 량심과 의리로 책임져야 할 혁명초소였다.

당중앙위원회 뜨락에서 굳은 맹세를 다지고 돌아온 날 저녁 그는 가정의 일과표를 짰다. 그가 읽어주는 일과표를 듣고나서 손재철동무는 말했다.

《꼭 군대일과같구만. 그런데 내가 이런 몸으로 아침운동을 어떻게 하겠소?》

김춘화동무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할수 있어요. 제가 있지 않나요.》

다음날 아침 이웃들은 영예군인집마당가에서 울리는 새각시의 챙챙한 구령소리를 들었다. 《하나, 둘! 하나, 둘!…》

앞을 못 보고 두팔이 없는 영예군인이 안해의 부축을 받아 성한 발과 의족을 번갈아짚으며 걷기운동을 한데 이어 선자리에서 몸통운동을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무더운 여름에도, 추운 겨울에도 그 일과는 변함이 없었다. 순수 몸단련을 위해서였던가. 육체의 많은 부분을 잃은 남편이 순간이라도 맥을 놓을세라, 마음속군복을 벗을세라 수십년세월 하루와 같이 울린 구령소리였다.

사실 아침운동이 아니라고 해도 특류영예군인인 남편을 갓난아이 대하듯 세면을 시키고 밥을 떠먹이며 옷을 입혀주는 등 그의 육체적부담은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것이였지만 김춘화동무는 달게 여기였다.

결혼초기 제일 안타까왔던것은 남편이 위염으로 식사를 조금밖에 못하는것이였다.

동네방네 다니면서 위병에 좋다는 약처방은 다 적어왔다. 삽주뿌리를 찾아 뒤산에도 오르고 해발 1, 000m가 넘는 후선유봉의 가파로운 골짜기도 샅샅이 훑었다. 하여 아침저녁으로 약초를 달이는 씁쓰무레하고 향긋한 냄새가 온 집안에 차고넘쳤다. 소화흡수에 좋은 보리차도 매일 장복시키느라고 보리를 구해다가 시루에 놓고 싹을 내여 말리운 다음 정성껏 닦아 가루로 봏았다. 또한 록두를 가루내여 돼지열에 반죽한 후 다시 록두알만큼 빚은 알약도 식전에 10알씩 꼭꼭 먹도록 하였다. 잠잘 때면 소금자루를 뜨끈하게 덥혀 배에 둘러주고 더운 돌찜질도 정상적으로 해주었다니 그런 정성이 어찌 돌우에도 꽃을 피우지 못하겠는가.

남편의 식욕이 왕성해지기 시작한 어느날 집울안에서 김치움을 파던 김춘화동무는 한쪽으로 올려쌓은 흙더미가 무너지며 덮쳐드는 바람에 비명을 지르며 의식을 잃었다. 그 소리는 집안에서 안해의 삽질, 곡괭이질소리에 귀를 강구고있던 손재철동무에게 뢰성처럼 울려왔다.

《여보, 무슨 일이요?》

벌벌 기여 토방까지 나갔지만 좀처럼 영문을 알수 없었다. 그를 둘러싼것은 숨막히는 정적뿐이였다. 그의 다급한 웨침을 듣고 달려온 마을사람들에 의해 안해는 구원되였다.

극심한 피로와 아픔으로 앓음소리를 내며 잠에 들었던 김춘화동무는 이마에 더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바람에 깨여났다. 눈을 떠보니 앞 못 보는 남편이 그의 머리우에 얼굴을 수그린채 울고있었다.

그날부터 손재철동무는 안해가 떠넣어주는 밥술을 피했다. 왜 그러는가고, 위가 또 아픈가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한동안이 지나서야 떠듬떠듬 말하는것이였다.

《안해의 일손 하나 돕지 못하는 내가 살아선 뭘하겠소. 차라리…》

순간 김춘화동무는 추상같이 웨쳤다.

《당신은 누구보다 오래오래, 더없이 행복하게 살아야 해요. 조국을 위해 한몸 내댄 사람은 그런 권리가 있는거예요.》

그것은 영예군인들을 극진히 위하시는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뜻이였으며 김춘화동무의 삶의 신조였다.

조국을 지켜 청춘을 바쳤는데 두눈이 없으면 어떻고 두팔이 없으면 또 어떻단 말인가. 이런 마음을 안고 그는 30여년세월 영예군인남편의 생을 줄기차게 떠받들어왔다. 그 나날의 하많은 수고를 그의 남편조차 다 알지 못한다.

손재철동무는 정녕 단 한번도 볼수 없었다. 이른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안해의 온몸에 줄지어 흐른 땀방울을, 시련의 시기 자기 밥사발은 비여두고 남편과 어린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다 떠먹이며 당신은 식사를 안하는가고 물으면 빈 숟갈질소리를 내던 그 갸륵한 모습을, 신병으로 앓으면서도 앞 못 보는 남편이 눈치챌세라 터져나오는 신음을 강잉히 참으며 시중을 든 사실도 어찌 알수 있으랴.

언제인가 손재철동무가 안해에게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여보, 나 1분간만이라도 눈을 뜨고 당신의 얼굴 한번 봤으면 좋겠어.》

비록 눈으로 보진 못하였어도 심장으로 느끼는 안해의 수고가 너무 고마와 터친 진정이였다. 하지만 그것이 김춘화동무에게 준 충격은 컸다.

(내 지금껏 남편을 위한다고 했지만 눈을 뜨고싶어하는 그의 심정을 다 헤아리지 못하였구나.)

그후 그는 남편을 데리고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였다. 수도의 전문병원에까지 갔지만 검사결과는 절망적이였다. 시신경이 모두 죽어 치료가 불가능한것이였다.

그는 의료일군들에게 단호히 물었다.

《남편에게 저의 한눈을 주어도 안됩니까?》

의학의 한계를 알고있는 의료일군들은 이 절절한 호소에 아무 대답을 못했다.

그날 손재철동무는 눈물을 머금고 말하였다.

《여보, 난 당신의 눈을 떼여 앞을 보고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소. 난 아오. 당신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녀성이라는걸.》

손재철동무는 올해에 예순살이 되였다. 년로보장나이가 지난 김춘화동무의 머리에도 흰서리가 내렸다.

세해전 북창지구청년탄광련합기업소 충정의 200일전투기록장의 152일전투기록에는 《축복속에 태여난 탄전의 새 가정》이라는 소식이 올랐다. 회안청년탄광 종업원인 김수련동무가 특류영예군인과 가정을 이룬것이다. 련합기업소일군들의 지성과 축복속에 마련된 뜻깊은 결혼식에서 김수련동무는 말하였다.

《저도 김춘화어머니처럼 살겠습니다.》…

김춘화동무의 소행을 우리는 예로부터 성품이 남달리 강직하고 아름다운 조선녀성의 미거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조국을 위해 한몸 내댄 영예군인들을 금방석에 앉혀 떠받들고싶어하는 우리 당의 사상과 뜻을 자기의 넋과 열정을 깡그리 바쳐 관철해온 견결한 당정책옹위자의 모습으로 숭엄히 안겨온다.

 

평남의 녀인

 

우리 나라에서는 특류영예군인의 안해라는 말자체가 직업을 대신한다. 특류영예군인들을 돌보는 일이 하도 중하기에 당에서는 안해들이 그 일만을 전적으로 맡아하도록 해당한 조치를 취해주었다.

결혼하여 이 사실을 알게 되였을 때 김춘화동무는 고맙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끝없는 당의 은덕에 보답하자면 남편을 돌보는것만으로는 부족한것 같았다.

가정을 이룬지 얼마 안되여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평안남도에서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석탄을 많이 생산하여야 한다고 교시하신 사실에 접하게 되였다. 동자질을 하면서도 그는 어버이수령님의 간곡한 음성이 들려오는것만 같아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앞 못 보는 사람의 남다른 륙감으로 안해가 안절부절 못하고있는것을 알아차린 손재철동무가 무슨 일이 있었는가고 물었다.

《제가 탄광에 일나가면 안되겠어요?》

안해가 사연을 터놓은 끝에 하는 이 물음에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자기의 시중이 문제여서가 아니라 안해의 어깨에 덧지워질 짐이 걱정스러워서였다.

다음날 김춘화동무는 어뜩새벽에 일어났다. 터밭김을 매고 빨래를 하며 약초를 달이는 등 그날 하루에 해야 할 일을 모두 찾아한 그는 남편에게 식사를 시키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낮에는 탄광에 나가 일할수 있지요?!》

손재철동무는 목이 메여와 머리를 끄덕이였다.

탄광당조직에 제기하여 승인을 받은 김춘화동무는 하늘을 날것만 같은 심정이였다.

나도 평남의 녀인이다. 그러니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대로 탄을 캐는 일도 하여야 한다. 이렇게 속다짐하며 그는 발걸음도 가벼이 일터로 향하였다. 천리마작업반운동의 봉화가 타오른 력사의 땅에서 나서자란 그는 평안남도사업을 두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평남땅의 평범한 녀인인 자신에게 주신 혁명과업으로 무겁게 받아안은것이였다.

탄광으로 출근한지 몇해후부터 그는 로동보호물자공급과에서 일하게 되였다. 탄부들의 건강증진에 돌려지는 당의 사랑과 배려는 끝없어 그는 늘 바쁘게 뛰여다녔다. 그래도 즐겁고 보람차기만 하였다.

력사에 류례없는 고난의 시기가 닥쳐왔다. 공급물자들이 점점 줄어들어 어떤 날에는 종일 빈 창고를 지킬 때도 있었다. 생각에 잠겨 퇴근길에 올랐는데 파비닐쪼박이 발에 밟혔다. 문득 탄부들이 낡은 안전모를 손질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파비닐쪼박을 소중히 집어들며 그는 자신을 꾸짖었다.

(부모가 힘들어할 때에는 자식들이 어깨를 들이밀어야 하지 않는가.)

그후부터 김춘화동무는 출퇴근길에 배낭을 지고 다니며 파비닐과 낡은 천들을 수집하였다. 그렇게 틈틈이 모은 파비닐은 공장에 보내여 탄부들의 안전모를 마련하고 낡은 천으로는 로동장갑을 만들었다. 영예군인을 돌보며 직장일을 하는 딸이 걱정스러워 강선에서 짐을 아예 싸가지고 회안땅으로 옮겨온 그의 어머니도 번갈아가며 재봉기를 돌렸다. 자기의 지성이 슴배인 안전모와 로동장갑을 탄부들에게 나누어줄 때 그는 진정 후방일군의 보람을 느꼈다.

김춘화동무는 탄광의 성실한 후방일군인 동시에 3갱 고속도굴진소대 명예대원이다.

그들부부가 첫 살림을 편 후 탄광의 한 일군이 생활에 보태라며 새끼돼지 한마리를 안고왔다. 일군이 돌아간 후 그는 새끼돼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이 새끼돼지를 잘 길러 갱지원을 가자요.》

손재철동무도 찬성이였다. 그해 공화국창건기념일을 맞으며 그들부부는 처음으로 갱지원을 갔다. 그들을 맞이한 굴진공들의 놀라움은 컸다. 탄부들앞에서 그들부부는 노래도 부르고 시도 읊었다. 그날 그들은 고속도굴진소대명부에 자기들의 이름을 올렸다.

스스로 선택한 이 길을 김춘화동무는 수십년간 변함없이 걸었다. 고속도굴진소대의 세대는 수없이 바뀌였어도 그는 영예군인남편과 함께 변함없는 명예대원으로 남아있다.

고속도굴진소대 소대장으로 오래 일한 탄광 자재공급과의 김명학동무는 그때 일을 감회깊이 더듬었다. 온 나라가 시련을 겪던 어느날 며칠째 일을 안 나오는 소대원의 집에 찾아가보려고 은근히 벼르고있는데 뜻밖에 그 소대원이 나타났다.

《소대장동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만나자부터 용서를 빌고난 소대원은 방금전에 있은 일을 이야기하는것이였다. 배를 곯는 집식구들을 위해 나무껍질이라도 벗겨올가 하여 산에 오를 차비를 하는데 김춘화동무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몇줌가량 되는 강냉이를 내놓으며 이것으로 죽을 쑤어 먹고라도 탄을 캐자고, 그래야 나라가 하루빨리 부강해진다고 하는 그의 말에 소대원은 두손을 내저었다.

《안됩니다. 제가 어떻게 영예군인집의 식량을 받는단 말입니까.》…

이처럼 알게모르게 막장에 세워준 소대원들은 그 얼마였던가. 종합갱입구에 소대별 경쟁도표가 나붙을 때마다 자기가 속한 소대의 붉은 줄을 찾아보며 밝은 미소를 짓기도 하고 안타까움으로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던 그 고결한 마음.

김명학동무는 뜨거움에 젖어 말하였다.

《내가 전기석탄공업부문일군대회에 참가하고 돌아왔을 때에도 춘화동지는 제일처럼 기뻐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깊이 관심하신 평남탄전에 사는 그에게 있어서 탄광의 일, 탄부들과 관련된 일은 곧 자기자신의 일이였다.

김춘화동무가 석탄생산에 온넋을 바쳐온 나날속에는 가슴아픈 추억도 있다. 그날도 갱에 갔다가 점심시간이 지나 집으로 돌아오던 그는 아들애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부랴부랴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도랑에 빠진 남편과 마당 한복판에 나딩구는 돼지물바께쯔, 어린 아들애가 아버지를 부여잡고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이 안겨왔다.

돼지물을 줘야 할 시간이 지나자 돼지우리에서 소동이 일어난것이였다. 돼지들이 목청을 돋구기 시작하자 손재철동무는 아들에게 돼지물을 주러 가자고 일렀다. 이미 거기에 습관된 아들애는 아버지의 한쪽어깨에 바께쯔를 걸고 돼지물을 퍼담았다. 돼지물바께쯔를 어깨에 걸고 아들애가 이끄는대로 돼지우리로 향하던 손재철동무는 그만 발을 헛짚어 도랑에 미끄러졌다. …

그날 김춘화동무는 죄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당장 일을 그만두고 당신을 잘 돌보겠어요.》

그에게 손재철동무는 말했다.

《여보, 당신이 탄광에 나가 일하는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아오? 내가 나라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데 당신까지 집에 붙잡아둔다면 그런 죄악이 어데 있겠소. 더우기 당신이야 당원이 아니요.》

남편의 절절한 이야기는 그의 심금을 울렸다. 자기의 조선로동당 입당을 지지하여 손을 높이 쳐들던 세포당원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렇다. 나는 당원이다. 누구보다 일을 많이 하고 두곱세곱 뛰여야 할 선구자이다.

이런 자각으로 그는 로동보호물자공급과 부원으로 임명된 후 과성원들을 발동하여 수십리 떨어진 곳의 돌밭을 일구고 축산토대를 강화하여 탄부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는데 적극 이바지하였으며 지난 수십년간 해마다 많은 원호물자를 마련하여 인민군군인들에게 보내주었다. 발전하는 시대의 요구에 자신을 따라세울 높은 열의를 안고 48살에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에 망라되여 대학공부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그는 과성원들의 감정과 마음을 속속들이 헤아리는 《우리 당세포위원장》이기도 하다.

사람들이여, 우리 한번 생각해보자.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을 위한 헌신에 한계가 있을수 있는가를. 하루계획을 넘쳐한 기쁨이 가슴에 차오를 때, 로력적위훈을 세운 남편의 성과속에 안해인 자기의 남모르는 수고도 깃들어있다고 은근히 자부할 때 가정과 일터, 원군길에 자기를 깡그리 바치면서도 한 일에 대해서보다 더 해야 할 일을 생각한 평남탄전의 성실한 녀인앞에 자신을 세워보시라.

2010년 가을 김춘화동무는 석탄광업복무영예훈장을 받았다. 탄광에서 오랜 기간 일한 공로자들에게 수여되는 훈장이 그의 가슴에 빛날 때 회안땅의 탄부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특류영예군인의 안해가 받은 석탄광업복무영예훈장, 그것은 열화같은 조국애, 참된 공민의 백옥같은 량심의 결정체이다.

 

혁명은 대를 이어

 

김춘화동무는 우리앞에 한장의 사진을 내놓았다. 그들부부가 인민군군관으로 자란 두 아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였다.

무릇 자식은 부모와 가정의 기쁨이고 행복이라지만 특류영예군인가정의 두 아들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맏이가 태여났을 때에도, 5년후에 둘째가 고고성을 터쳤을 때에도 그들부부는 솟구치는 격정을 금할수 없었다.

김춘화동무는 우리에게 말했다.

《저에게는 자식들이 아버지의 넋을 꿋꿋이 이어가도록 하여야겠다고 깊이 생각한 계기가 있습니다.》

맏아들인 충성이가 다섯살 나던 해 어느 휴식날에 있은 일이다. 김춘화동무가 부엌일을 하고있는데 마당가에서 충성이의 청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집에 들어가 놀자.》

조무래기들이 좋아라 방안으로 들어갔다. 잠시후 아이들이 허겁지겁 다시 밀려나왔다. 뒤따라나온 충성이가 왜 그러는가고 하자 아이들은 《너의 아버지 무서워.》라고 하며 도망치듯 가버렸다.

충성이는 그 자리에 굳어졌다. 영문을 알수 없었던것이다. 그에게는 한없이 정다운 아버지였다. 《유치원에 갔다왔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면 《오늘 유치원에서 무슨 글을 배웠니. 아버지가슴에 대고 한번 써보아라.》라고 하며 살뜰한 정을 부어주는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무섭다니…

문득 아버지의 육체가 남들과 다르다는데 생각이 미친 충성이는 어머니의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 우리 아버진 왜 앞을 못 보는가고, 두팔과 한다리는 어데 갔는가고.

그때 김춘화동무는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철없는 자식에게 너의 아버지는 비록 육체적불구이지만 조국앞에, 너희들앞에 떳떳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는것을 어떻게 말해주어야 하는가.

그날 밤부터 김춘화동무는 어린 아들에게 최전연에서 총을 잡고 조국을 지키는 인민군군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였다. 충성이의 아침일과도 영예군인남편의 일과에 맞추었다. 마당에서 손재철동무가 아침운동을 할 때면 뒤산중턱에까지 달려갔다 오며 《보천보 달리기》, 《보천보 달리기》 하고 웨치는 충성이의 랑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몇해후에는 둘째 류성이도 함께 달리였다.

장중보옥처럼 귀한 자식들이였지만 김춘화동무는 엄하게 키웠다. 일하는 법도 하나하나 배워주었다. 일손이 바쁘고 터밭과 집짐승이 많아서가 아니였다. 자식들이 군대에 나가려면 무슨 일에나 막힘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던것이다. 학교에서 영예군인의 자식이라고 남달리 대해준것을 알면 다른 아이들보다 더 채찍질해달라고 당부하군 하였다.

충성이가 북창군 읍에 있는 제1고등중학교(당시)에 다니던 어느날 김춘화동무는 아들이 보고싶어 학교에 찾아갔다. 그런데 충성이는 교실에 없었다. 사방 찾아다니던 끝에 놀음에 정신이 팔린 충성이를 보게 되였다. 근 한달만에 만나는 아들이였지만 김춘화동무는 주저없이 매를 들었다.

《넌 아버지를 잊었느냐. 아버지가 못다 지킨 조국을 네가 지켜야 하지 않느냐.》

그것은 오늘도 마음속의 군복을 벗지 않고있는 영예군인남편을 대신하여 든 매였다.

류성이가 학급아이들과 다투어 이웃들의 신소를 받았을 때에도 용서치 않았다. 그렇게 동무를 사랑할줄 모르면 이다음 어떻게 혁명동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니라고 하며.

원호물자를 안고 군인건설자들을 찾아갈 때에도 자식들을 데리고 다니였다. 순천시에 대규모의 화학공업기지가 일떠서던 때였다. 억수로 쏟아지는 비발속에서도 군인건설자들은 건설을 계속하고있었다. 방송선전차에서 회안땅의 특류영예군인가정에서 경제선동을 왔다는 말이 울려퍼지자 군인건설자들은 와와 우렁찬 함성으로 반겨주었다. 이어 그들의 경제선동이 시작되였다. 두팔이 없는 영예군인이 하모니카를 불고 어린 아들이 종주먹을 휘두르며 《결전의 길로》를 부르는 모습은 군인건설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번개가 치고 우뢰가 울었지만 그들은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나도 커서 아버지처럼, 아저씨들처럼 용감한 인민군대가 되겠습니다.》

충성이의 또랑또랑한 웨침은 온 건설장을 격동으로 끓어번지게 하였다.

그들부부가 자식들을 데리고 도안의 여러 건설장과 전력생산기지로 원군길, 경제선동의 길을 이어간데는 그들이 어려서부터 조국을 알고 사회와 집단을 위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간직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당에서는 그들부부의 자식들이 남포혁명학원에서 공부하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었다. 두 아들이 련달아 학원복을 입고 남포혁명학원으로 떠나갈 때 김춘화동무는 당중앙위원회청사에 들어서던 그날처럼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어느해 여름 남포혁명학원을 거쳐 김형직사범대학에 입학한 맏아들 충성이와 남포혁명학원에서 공부하는 둘째아들 류성이가 방학을 왔다. 끌끌하게 자란 두 아들을 보는 김춘화동무의 마음은 설레였다.

《아버지랑 이야기를 나누며 푹 쉬거라.》

이런 말을 남기고 그는 출근길에 올랐다. 그날 저녁 오랜만에 집에 온 두 아들을 생각하여 일찌기 퇴근길에 오른 김춘화동무는 집마당에 들어서다가 눈이 휘둥그래졌다. 기울어져가던 울바자가 새것처럼 일떠서고 집짐승우리곁에 쌓여있던 두엄더미도 보이지 않았던것이다. 아침에 김을 매다만 터밭도 꽃밭처럼 가꾸어져있었다. 창고쪽에서 귀익은 말소리가 났다. 다가가보니 충성이와 류성이가 창고정리를 하고있었다. 땀에 젖은 두 아들의 모습은 얼마나 미더웠던가. 지나간 일이 떠올랐다.

여러해전 탄광마을의 한 집에 부모를 잃은 2살, 6살짜리 오누이가 있다는것을 알게 된 김춘화동무는 한달음에 달려가 그들을 데려왔다. 그는 나라에서 특류영예군인인 남편에게 특별히 배려해준 찹쌀로 미음을 쑤어 몸이 허약한 애들을 정성껏 구완하였다.

1년이 지나 친척들이 사연을 알고 찾아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오누이를 데려갔다. 정이 든 애들과 헤여지는것이 서운했던지 충성이는 말했다.

《어머니가 애지중지 키웠는데 왜 보내나요?》

김춘화동무는 말했다.

《그애들이 우리 집에 와서 몸이 튼튼해졌으니 참 기쁘구나.》

또 언제인가는 터밭에서 가꾼 곡식과 정성껏 살찌운 집짐승들을 탄부들과 인민군군인들에게 보내려 하는것을 보고 류성이가 이렇게 물었다.

《누가 어머니보고 다 바치라고 했나요?》

의문이 실린 아들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김춘화동무는 대답했다.

《그런 사람은 없다. 이 엄마가 스스로 하는거란다.》…

그런 자식들이 이젠 다 자란것이였다. 자기 일손을 도와서라기보다 일을 찾아할줄 아는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그날 저녁 충성이가 집안의 오랜 가구들을 보며 생각깊이 말하는것이였다.

《어머니, 우리 집은 예전그대로군요.》

그때 김춘화동무는 빙긋이 웃었다.

《우리 집에야 당의 사랑과 은정이 꽉 차있지 않느냐. 너희들이 아버지의 넋을 꿋꿋이 잇고 우리 가정이 받은 하늘같은 은정에 보답한다면 이 어머닌 더 바랄게 없다.》

집의 벽에는 그가 여러 대회와 경축행사에 참가하여 절세위인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찍은 기념사진들과 은정어린 선물명세들이 소중한 가보로 빛나고있었다.

하기에 김춘화동무는 언제나 자기곁에 닿아있는 은혜로운 손길을 뜨겁게 느끼며 살아왔다. 너무 힘이 들어 주저앉고싶은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어느새 알고 찾아와 동무는 우리 탄광마을녀성들의 거울과 같다고, 생의 끝까지 아름다운 꽃을 계속 피워야 한다고 힘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준 북창지구청년탄광련합기업소 당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회안청년탄광 일군들…

한없이 고마운 손길에 떠받들려 그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탄생 105돐 경축행사에도 대표로 참가하였으며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를 모시고 진행된 중앙보고대회 주석단에 앉는 영광을 지니였다. 그가 경축행사에 참가하고 돌아온 날 저녁이였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남편이 제일 좋은 종이와 원주필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하는것이였다.

그가 새하얀 모조지를 앞에 놓아주자 손재철동무는 원주필을 입에 물고 한장에 한글자씩 정성을 다해 써나갔다.

경애하는 원수님 우리 가정은 우리 당의 고마운 은정에 대를 이어 보답의 길만을 걷겠습니다.》

영예군인가정의 이 신념을 안고 아들들인 손충성동무와 손류성동무는 조국보위초소에 섰으며 한생 혁명의 군복을 입고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를 충직하게 받들어갈 열의에 넘쳐있다.

몇달전 손재철, 김춘화가정에 첫 손자가 태여났다. 영예군인가정의 3대, 아직은 요람속의 갓난아이이지만 앞으로 그도 할아버지처럼, 아버지처럼 조국수호의 총대를 억세게 틀어잡으리라는것을 우리는 믿어의심치 않는다.

가정의 대, 애국의 대, 혁명의 대를 꿋꿋이 이어가기 위하여 온넋과 한생을 바치는 김춘화동무와 같은 훌륭한 어머니들의 공적은 참으로 찬양할만 한것이다.

 

*     *

 

우리 조국의 위대한 력사는 바로 매 공민들의 참되고도 아름다운 인생의 자욱자욱이 모여 이루어지고 빛난다. 탄광마을의 평범한 녀인이 사회와 집단에 얼마나 많은 보탬을 주었으며 혁명에는 또 얼마나 크게 기여하였는가. 당과 조국에 필요한 일을 스스로 찾아하는 고결한 마음, 불같은 헌신이 영웅적위훈을 낳고 우리 조국의 위대한 력사를 떠올린다.

성실한 피와 땀으로!

그가 누구이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사회주의 우리 집의 한식솔이라면 우리 조국을 세상에 빛내이기 위해 순간순간 그리고 한생토록 성실한 애국의 피와 땀을 바쳐야 할것이다.

 

본사기자 허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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