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방의 날을 그리며

 

해방후 적지 않은 항일혁명투사들은 리력서를 쓰면서 학력란에 《88군관학교》 또는 《88야영학교》라고 명기하였다.

그 당시 간부사업을 맡아보던 일군들은 간고한 유격투쟁을 해온 항일혁명투사들이 모두 군관학교졸업생들이라는 사실앞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우리 혁명의 1세들이 긍지를 가지고 자기 리력서의 학력란에 당당하게 써넣은 《88군관학교》의 실체는 무엇인가.

일군들은 그후 국제련합군시절의 군정훈련과 관련된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에 접하고서야 그 실상을 알게 되였다.

 

국제련합군이 편성된후 우리는 소부대작전과 정찰활동을 맹렬하게 벌리는 한편 군정 학습과 훈련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가 사용한 교육제강은 정규적인 군사교육기관들에서 취급한 교육내용보다 폭도 더 넓고 심도도 더 깊었습니다. 그리고 더 다방면적이였습니다. 훈련강도도 정규군사학교들보다 몇배나 더 셌습니다.

훈련강령자체가 지휘관양성을 목표로 한것만큼 군관학교를 마쳤다고 해도 무방할것입니다. 항일혁명투사들이 리력서의 학력란에 국제련합군시절을 념두에 두고 《88군관학교》나 《88야영학교》라고 써넣는것은 이런 리유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런 간판을 내건 일도 없고 졸업증 같은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몇년동안의 훈련과정을 마치고나서는 다들 현대적인 군정대학을 하나 마쳤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동무들은 그때 많은것을 배웠습니다. 군사리론도 배우고 현대정규전의 전술과 전법들도 배웠습니다.

국제련합군시절의 교육은 군사일면의 교육이 아니였습니다. 그것은 정치와 군사를 겸한 종합적인 교육과 훈련이였고 조국해방작전을 위한 준비인 동시에 해방된 조국에서의 당, 국가, 무력 건설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교육과 군사교육을 똑같이 중시하였습니다. 정치경제학, 철학 같은것도 학습하였고 당건설리론도 연구하였으며 경제운영과 관련된 교재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것이 처음부터 다 순조롭게 이루어진것은 아니였습니다.

1942년말 1943년초에 이르러 제2차 세계대전의 형세는 반파쑈력량의 편에 유리하게 기울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쓰딸린그라드에서의 쏘련군대의 대승리는 파쑈독일의 기를 꺾어놓았고 쏘독전쟁만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의 전국을 역전시켰습니다.

고대하던 조국해방의 날이 다가올수록 나에게는 일이 더미로 쌓였습니다. 그때 내가 제일 고심한 문제의 하나는 해방된 조국에 나가 새 조국 건설을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당도 창건하고 국가도 건립하고 무력건설, 경제건설, 문화건설도 하여야 하겠는데 혁명의 지휘성원이며 핵심력량인 간부가 부족한것이 제일 난문제였습니다.

우리가 그때 생각한것은 간고한 무장투쟁속에서 단련되고 검열된 항일투사들을 군사에서뿐아니라 당사업과 국가관리, 경제나 교육, 문화 그 어느 부문을 맡겨주어도 척척 해낼수 있는 만능의 간부로 키우자는것이였습니다. 나는 국제련합군에서의 군정 학습과 훈련을 통하여 이 모든것을 다 해결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초기의 훈련강령을 보면 군사훈련에 비해 정치학습비률이 낮았습니다.

나는 정치리론학습의 비중을 군사훈련보다 낮추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빠나쎈꼬대장을 만났을 때 이야기하였습니다. 아빠나쎈꼬는 국제련합군의 첫째가는 임무는 조선과 중국 동북지방의 민족혁명군사간부를 키우는것이라고 하면서 조선과 만주가 새로운 환경에 처할 때 붉은군대와 련합하여 싸울수 있도록 훈련을 다그쳐 현대전의 전략전술과 기술기재, 무기에 정통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훈련이나 군사간부양성에만 치우쳐서는 안된다, 조선이 해방된후에 새 조국을 건설하자면 자주독립국가건설의 기둥이 될 여러 분야의 간부들을 다 양성하여야 한다, 그러자면 훈련강령에서 정치상학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 그렇다고 군사훈련에서 시간을 떼내여 정치상학을 하자는것은 아니다, 훈련은 훈련대로 다하면서 그만큼 정치학습을 하자는것이라고 모를 박아 말했습니다.

아빠나쎈꼬는 옳은 의견이라고 하면서 내 주장을 긍정하였습니다.

그후 국제련합군의 군정훈련강령에서 정치학습의 비중이 현저히 높아지게 되였습니다.

우리는 군정훈련에 들어가면서 대원들에 대한 사상동원과 교양사업을 진공적으로 벌렸습니다. 당소조들과 공청조직에서 회의도 하고 신문과 벽보에 결의도 내고 구내방송으로 불기도 하였습니다.

각 지대들에서는 유능한 군정간부들로 정치상학을 담당할 강사들과 교원들을 꾸렸습니다.

국제련합군이 편성된후 원동군사령부는 정치학습담당 교원들을 위한 단기강습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영이 신통치 않았습니다. 중국말을 겨우 번지는 사람이 강의를 하는데 어찌나 서투른지 알아들을수 없더라는것이였습니다. 그후 청강생들의 반영을 고려하여 쏘련인 강사한테 중어통역원을 붙여주었습니다. 우리 동무들한테는 그런 방법도 불편했습니다. 통역을 하는데 절반시간을 소비하다나니 강의효률도 높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로어로 된 교재를 조선말로 번역한 다음 우리 실정에 맞게 강의안을 다시 짜서 정치학습을 담당한 교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초기에 정치상학에 리용한 교재들을 보면 철학이나 정치경제학 같은 일반리론과목과 함께 쏘련공산당력사와 쏘중 두 나라의 력사, 지리와 관련된것들이였습니다. 《공산당선언》이나 《레닌주의제문제》같은것을 해설한 교재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교재들은 우리 대원들의 정치적안목을 높여주는데 도움이 되는것들이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에게 쏘련과 중국의 력사는 배워주면서 조선의 력사를 배워주지 않는다든가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을 학습시키지 않는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였습니다.

우리는 실정에 맞게 조국광복회 10대강령과 창립선언,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를 비롯하여 지난날 필독문헌으로 삼아오던 몇몇 저작도 교재에 포함시키고 조선력사와 조선지리도 배워주도록 하였습니다.

그때 정치상학지도교원들이 강의안을 만드느라고 수고를 많이 하였습니다. 훈련은 훈련대로 하면서 제강을 만들고 강의까지 하다나니 늘 다른 대원들보다 바쁘게 보냈습니다.

우리 교원들의 강의술이 괜찮았습니다. 풍부한 투쟁경험을 가지고있는 투사들의 강의이니 감칠맛도 있었습니다.

안길의 강의를 여러번 들어보았는데 아주 구수했습니다. 오랜 정치일군인 그는 정치과목강의도 독특한 방법으로 하였습니다. 그의 강의는 해학과 비유로 일관되여있어서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웃음속에서 혁명의 진리를 터득하였습니다.

안길은 강의할 때 필요한 대목에서 시도 읊고 노래도 불렀습니다. 어떤 강의시간에는 옹근 1페지나 되는 레닌의 명제도 뜬금으로 줄줄 인용하였습니다.

행군중에 있는 대원들이 기진맥진해서 걸음을 잘 옮기지 못할 때면 인차 휴식구령을 내리고 북을 치거나 하모니카를 불며 대원들을 춤판에 끌어들이고 노래판에도 끌어들이는것이 바로 안길의 독특한 자질입니다. 이런 자질이 강의에서도 그대로 발양되였습니다.

림춘추는 강의도 잘했지만 학습에 대한 개별지도를 더 잘하였습니다. 그는 토론이나 론쟁을 붙여놓고 매개 청강생들의 준비정도와 배운 지식에 대한 소화정형을 다 료해하고는 필요한 개별수업을 과외시간에 조직하였습니다. 그래도 강의내용을 잘 소화하지 못하는 대원이 있으면 잠자는 시간에 그 대원의 곁에 잠자리를 옮겨가면서 개별지도를 해주었습니다.

김경석도 인기있는 강사였습니다. 말주변은 없는 사람이였지만 강의준비를 착실하게 해서 청강생들의 호감을 샀습니다. 그는 강의안을 쓸 때마다 밤을 패군했습니다. 강의안을 작성한 다음에는 꼭꼭 내 의견을 들어보군하였습니다. 아주 진지하고 직심스러운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강의안을 짤 때에 첫마디부터 마지막마디까지 몽땅 성문화하였습니다.

그때의 습관이 몸에 밴 김경석은 해방후에도 무슨 연설문이든지 꼭 제 손으로 써가지고 대중앞에 출연하군하였습니다. 보고문도 다 자기 손으로 직접 썼습니다.

교원들이 이렇게 이악하다보니 대원들의 실력이 높아지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안영과 전창철, 리봉수의 강의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프룬제군사대학 졸업생인 류아루도 강의를 잘했습니다. 류아루가 쏘련의 신형무기인 까츄샤포에 대한 강의를 하던 생각이 납니다.

나도 자주 정치강의에 출연하였습니다.

군정학습총화때에는 조선지대 대원들의 성적이 부대적으로 제일 높다는 평가를 받군하였습니다.

부대정치부에서 일하고있던 풍중운도 조선지대 대원들의 성적에 감탄하였습니다. 그는 나보고 조선동지들이 높은 성적을 쟁취하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묻기까지 하였습니다. 내가 비결이랄게 있는가,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얼굴에 찬물찜질을 해가며 열심히 공부한 덕이라고 롱삼아 말했더니 풍중운은 《이악한데서야 조선사람들을 당할수가 없지.》하면서 손을 내젓는것이였습니다.

그때 우리 동무들이 이악했던것만은 사실입니다. 조선지대 대원들이 군정 훈련과 학습에서 늘 부대의 모범으로 된것은 혁명에 대한 책임감으로부터 출발한것이였습니다.

지대의 대원들가운데는 마당거우시절의 박창순이처럼 학습을 두통거리로 여기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박락권을 들수 있습니다.

박락권은 동만에서 청년의용군에 있다가 우리가 북만동무들의 요구로 우수한 대원들과 지휘관들을 넘겨줄 때 5군에 가서 주보중의 경위대장을 한 사람입니다.

박락권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용감무쌍한 싸움군이였습니다. 그는 군사지휘관으로서의 기지도 있고 날파람도 있었습니다.

박락권은 왕청유격대에 있을 때 일본《토벌대》와 불의에 조우하여 총격전을 벌리다가 복부에 중상을 당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밖으로 흘러나오는 밸을 손으로 밀어넣으면서 기여서 유격구까지 돌아왔습니다.

박락권은 북만부대에 가서 경위대장을 할 때 호위사업을 잘해서 주보중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주보중자신도 박락권의 덕으로 아슬아슬한 고비에서 여러번 구원되였다고 합니다.

박락권의 특기가 무엇인가 하면 무기를 귀신같이 다루는것입니다. 그는 무슨 무기든지 한두번만 다루어보고는 눈을 감고서도 척척 분해결합을 하였습니다. 정말 귀신같이 손쉽게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군사리론학습만은 영 싫어했습니다. 박락권은 리론공부를 하라고 하면 쓴 약이라도 삼킨 사람처럼 얼굴부터 찡그리였습니다. 리론학습시간에는 맨 구석자리에 앉아 강사와 눈이 마주치는것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동무가 지금은 소대를 지휘하고있지만 앞으로 큰 규모의 현대전을 할 때에는 련대나 사단도 지휘할수 있다, 그런데 지금처럼 현대군사지식을 직심히 배우려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련대나 사단을 지휘하겠는가, 동무가 경험만 가지고 부대를 지휘하면 숱한 대원들이 목숨을 잃겠는데 그런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고 하였습니다.

그후부터 박락권은 모진 마음을 먹고 리론학습에 열중하였습니다. 보병전술리론을 학습하느라고 하루종일 아무르강가에 나가있는 박락권을 본 일이 있는데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있었습니다.

해방후 그를 동북지방에 파견하였습니다.

박락권은 련대를 이끌고 장춘해방전투에 참가하였습니다. 그가 장춘해방전투 같은 큰 시가전에서 련대를 훌륭히 지휘하여 승리를 거둔것은 원동기지에서 이를 악물고 전술공부를 한 덕이라고 봅니다. 앞장에서 적진으로 돌격하다가 박격포탄파편을 여러군데 맞고 전사했다는데 최후를 박락권이답게 마쳤습니다. 그는 조중인민이 다같이 기억하는 영웅으로 력사에 남아있습니다.

학습도 전투라는 말은 우리가 실지생활에서 찾아낸 진리입니다. 혁명가는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한순간도 학습을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학습을 하지 않으면 사상에 녹이 쓸고 앞을 내다볼수 없습니다.

김정일동무가 학습을 사람들을 혁명가로 키우는 사업의 첫 공정으로 보고 언제나 학습을 강화할데 대하여 강조하는것은 바로 이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대에 꾸려진 과외교양시설들과 선전선동수단들을 통해서도 대원들을 교양하였고 그들의 정치적시야를 넓혀주었습니다.

훈련기지에는 영사실과 도서실, 방송실을 가진 구락부가 있었습니다. 부대장병들은 이 구락부에서 집회도 하고 영화도 보았습니다.

부대방송시간에는 학습과 군정훈련, 일상생활에서 모범으로 내세울만한 군인들과 소대, 중대, 대대들을 널리 소개하였습니다. 국제정세와 관련된 보도도 많이 하였는데 쏘독전선소식은 매일같이 알려주었습니다.

국제련합군에서는 신문도 발간하였습니다. 지대와 중대마다에는 벽보가 있었고 소대들에는 전투속보가 있었습니다. 신문과 벽보, 전투속보는 군인들에 대한 사상교양, 도덕교양과 군정훈련준비나 총화와 관련된 내용들을 많이 실었습니다.

우리는 붉은군대창건기념일과 10월혁명기념일, 5.1절을 비롯한 명절행사들을 통해서도 대원들에 대한 혁명교양, 계급교양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부대에서는 쏘독전쟁에서 용감히 싸운 쏘련영웅들에 대한 소개를 많이 했는데 이것이 군인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희생된 혁명전우들을 추모하는 추도식도 의의있게 하여 군인들을 혁명적으로 교양하였습니다.

우리는 류영찬이 사망하였을 때에도 훈련기지에서 추도식을 하였습니다. 류영찬은 김정숙이 도천리에 가서 지하공작을 할 때 혁명조직에 흡수하여 키우다가 유격대에 데리고온 사람인데 싸움도 잘했습니다. 그는 아무르강에서 병영건설에 쓸 모래를 싣고오다가 배가 뒤집혀지는 바람에 익사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때 전선사령관들인 아빠나쎈꼬와 와뚜찐, 체르냐홉스끼의 추도식도 하였습니다.

추도식을 할 때에는 악대가 추도곡을 연주하였습니다. 부대에는 악대도 있었습니다.

련합군에서는 강연도 하고 쏘독전쟁참가자들과의 상봉모임도 종종 조직하였습니다.

우리는 원동기지에서 군사리론학습과 군사실동훈련도 맹렬하게 하였습니다. 전술훈련, 사격훈련, 수영훈련, 스키훈련, 락하산훈련, 무선통신훈련을 비롯하여 현대전에 대비한 각종 훈련을 다하였습니다.

현대전훈련에서는 전술훈련에 기본을 두고 공격과 방어 훈련을 많이 하였습니다. 동시에 병기학, 지형학, 위생학, 공병학에 대한 학습도 하고 반화학전과 관련된 지식도 주었습니다.

유격전훈련은 습격전과 매복전에 중심을 두고 진행하였습니다. 모두가 풍부한 실전경험을 가지고있었기때문에 이 훈련만 하면 성수가 나서 뛰여 들었습니다.

군사훈련을 할 때에는 무연한 들판에 천막을 치고 생활하였습니다. 그 들판에 대한 인상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내가 훈련방향을 주면 중대장, 소대장들이 제강을 짜가지고 집행하였습니다. 우리는 항일전쟁경험과 쏘독전쟁경험에 토대하여 우리 나라의 지형조건과 조선사람의 체질에 맞는 우리 식의 훈련을 하는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전술훈련은 교육강령에 따르는 한제목의 학습이 끝나면 실동훈련을 보고 그 소화정도를 평가하는 방법으로 하였습니다.

지휘관들에 대한 전술훈련은 내가 직접 집행하였습니다. 전술훈련의 목적은 매개 군인들로 하여금 몇등급이상의 높은 직무를 수행할수 있게 하자는데 있었습니다. 중대장들은 대대나 련대를 맡아 지휘하며 소대장들은 중대나 대대를 지휘하고 전사들은 소대나 중대를 능숙하게 지휘할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자는것이였습니다.

전술훈련은 소대나 중대 단위로 하였습니다. 지휘관으로 임명된 동무에게 정황을 주고 임무를 주면 그는 정황을 판단하고 결심을 채택한후 전투를 조직하고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전술훈련을 갓 시작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날 나는 중대에 내려가 전술훈련정형을 검열하였습니다. 그날은 손종준이 소대장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손종준은 자신만만하게 소대를 지휘하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앞에는 여러가지 차단물이 설치되여있고 고지우에는 증강된 적 중대력량이 있다는 정황을 새로 주었습니다. 그러자 손종준은 일선형정면돌격을 시도하였습니다. 나는 그를 계발시켜가지고 우회돌파전술을 쓰게 했습니다. 그 다음 공격을 다시 시켰습니다.

손종준이 정황에 맞지도 않는 일선형공격을 시도한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였습니다. 그것은 기계화부대를 앞세우고 부대를 일선형으로 산개시켜 공격하게 되여있는 당시의 전투규정대로 훈련을 기계적으로 시킨데 있었습니다. 그런 공격방법은 산이 많고 골짜기가 많은 우리 나라 실정에 맞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전술훈련제강들을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우리가 쌓은 유격투쟁경험에 기초하여 그것을 발전시키는 원칙에서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는 제강을 새로 만들어 훈련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나는 오진우에게 보병소대의 공격전술을 취급한 시범훈련제강을 짜게 하였습니다. 오진우는 그 당시 하사관이였지만 내 도움을 받아가며 손색없는 시범훈련제강을 작성하였습니다. 그 제강으로 지대가 다 모여 전부대적인 시범훈련을 했는데 반영이 대단히 좋았습니다. 오진우는 지대전체를 망라하는 기동훈련계획도 작성하였습니다.

사격훈련은 각이한 거리의 부동목표에 대한 사격과 이동목표, 출현목표에 대한 사격을 기본으로 하였습니다. 사격훈련장은 부대에서 20∼30리 떨어진곳에 있었습니다.

조선지대는 사격성적에서도 련합군적으로 첫손가락에 꼽히였습니다. 총은 리두익이 잘 쏘았습니다.

우리는 명사수들을 따로 뽑아 저격수훈련도 하였는데 지형학훈련과 겸해서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지정된 목표물을 명중하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어찌나 총을 많이 쏘았던지 저격수들은 병실에 돌아온 다음에도 귀에서 윙윙 소리가 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훈련을 한후 매개 저격수들에게 행군로정이 표시된 지도와 지남침을 주면서 어느 지점에 가서 새를 몇마리씩 잡아가지고 몇시 몇분까지 돌아오라는 과업을 주었습니다. 어디서 몇각도로 방향을 꺾고 어디로 돌아오라는 표시대로 하자면 옹근 하루가 걸리는데 거기다가 새까지 쏘아잡아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기본은 사격술을 익히면서 동시에 지도보는 법을 숙달시키자는것이였습니다.

우리는 원동의 훈련기지에 있을 때 스키훈련, 수영훈련도 많이 하였습니다. 조국해방의 대사변이 도래할 때 랑림산줄기나 함경산줄기 같은것을 타고앉아 유격전을 벌리자고 해도 그래,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 조국해방작전을 하자고 해도 그래 스키와 수영을 배워두어야 하였습니다.

수영훈련은 여름철에 아무르강에서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가 해양국이라는 사정을 고려하여 우리는 이 훈련에 특별한 의의를 부여하였습니다. 우리 지대의 대원들은 대다수가 바다를 보지 못하고 자라난 사람들이였습니다. 헤염을 칠줄 아는 사람이 몇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나니 다수가 강을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때는 수영훈련을 락하훈련 다음가는 힘든 훈련이라고들 하였습니다.

처음에 땅우에서 팔다리를 움직이는 련습을 시키고는 강으로 데리고 나가서 헤염을 칠줄 아는 몇몇 동무들이 시범동작을 해보이며 배워주었습니다.

물맛을 좀 보인 다음에는 강건너편까지 바줄을 늘이고 그것을 쥐고 헤염쳐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풍중운과 같은 몇몇 사람들은 아무리 훈련을 시켜도 보람이 없었습니다. 물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돌덩이처럼 가라앉군하였습니다. 풍중운은 물속에 들어갔다가 안경까지 잃어버린적이 있었습니다.

김경석이도 혼자서 수영련습을 하다가 하마트면 사고를 칠번하였습니다. 그는 물에 가라앉게 되자 강바닥을 짚으면서 벌렁벌렁 기여나왔다고 합니다.

수영을 제일 잘한 대원은 전순희였습니다. 그가 수영을 잘하게 된것은 강반에서 산 덕이였습니다. 전순희는 헤염을 칠줄 몰라서 강을 건늘 때에는 어른들한테 업혀다니군했는데 철이 들자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헤염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는 7군에서 간호원을 한 경력이 있다고 하여 훈련기지에 와서도 부대군의소 간호원으로 복무하였습니다. 전순희한테서 수영을 배운 대원들이 한두명이 아닙니다.

수영훈련을 한 다음에는 련이어 도하훈련을 하였습니다. 도하훈련은 일종의 종합훈련이라고 말할수 있었습니다. 완전무장을 한 다음 25키로메터가량 강행군을 하고나서 장구류를 휴대한채 소대별로 떼목을 하나씩 만들어 타고 강을 건넜습니다.

이 훈련에서는 락오자가 1명만 있어도 점수를 깎았습니다. 최광이네 소대는 도하훈련을 잘하는것으로 유명했지만 공정수때문에 늘 다른 소대들에 앞자리를 떼웠습니다.

공정수는 머슴살이를 하다가 유격대에 입대한 사람이였습니다. 인간으로서는 나무랄데가 없는 성품을 지니고있었으나 천성이 늘어져서 군인다운 면모가 없었습니다. 그는 한해 겨울에도 모자를 몇개씩 태웠습니다. 우등불에 바지가 타도 바빠하지 않는 느린 성미를 가진 사람이였습니다.

공정수는 5군에서 복무할 때에도 최광이네 소대에 있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최광이 그 사람때문에 속을 태우던 나머지 가고싶은데로 가라고 하면서 그를 쫓아버린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정수는 절룩거리며 그냥 부대를 따라왔습니다.

최광은 거기에 감동되였다고 합니다. 저 사람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것이다 하고 생각했다는것입니다.

나는 최광에게 가라고 쫓아도 가지 않고 혁명을 하겠다고 따라온 동무인데 사람이야 얼마나 좋은가, 좀 힘이 들더라도 공력을 들여서 도와주자고 하였습니다. 최광은 우리가 한 말을 명심하고 그에게 개별훈련을 주었습니다. 7메터나 되는 조약대에서 물에 뛰여드는 훈련을 할 때에도 공정수만은 따로 붙잡고 지도하였습니다.

나도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공정수는 물에 곧추 떨어지지 못하고 평자로 떨어져서는 배가 터진다고 아우성을 치면서도 훈련을 거듭하였습니다. 어쨌든 특색이 있는 사람이였습니다. 해방후에는 그가 우리의 부관도 하고 최용건의 호위군관도 하였으며 대대도 지휘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무르강에서 뽀트도 탔습니다. 1인용뽀트인데 《아무로치까》라고 하였습니다. 나나이인들이 그 뽀트를 잘 탔습니다. 우리 대원들은 그 배로 하바롭스크까지 갔다오는 경쟁을 하였습니다. 노는 한개만 사용하였습니다. 아무르강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수영훈련, 도하훈련과 함께 상륙전훈련도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가 세면이 바다로 되여있고 강하천이 많은 조건에서 강하천도하와 해상상륙전은 박두한 대일작전을 위해 절실히 필요한것이였습니다.

한번은 라진항을 목표로 한 상륙전훈련도 하였습니다.

수영훈련보다 더 힘든것은 락하산훈련이였습니다. 이 훈련에서는 오히려 남대원들보다 녀대원들이 더 담찼습니다. 남대원들중에는 그 훈련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만 녀대원들속에는 그런 떨보가 단 1명도 없었습니다.

락하산훈련의 첫공정은 모의훈련이였습니다. 조약대에서 톱밥을 깔아놓은 땅우로 뛰여내리는 훈련입니다. 그 다음은 회전대 같은데서 빙글빙글 도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이 훈련때 녀대원들이 멀미를 많이 했지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락하산훈련은 워로쉴로브근방의 큰 벌판에서 했는데 거기에 군용비행장이 있었습니다.

먼저 락하산을 접는 법부터 익히였습니다.

이 공정이 끝나면 50메터쯤 되는 락하탑에 올라가 펼쳐진 락하산을 타고내리는 련습을 하였습니다. 50메터구간을 내리면서 바람방향에 따라 몸을 한번 돌리는 동작을 하는데 여기에 익숙되면 비행기를 타고 락하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10∼20명 정도로 1개 승조를 무었습니다. 처음에는 1,000메터 높이에서 훈련하였고 나중에는 600메터 높이로 낮추었습니다. 보통 800메터 상공에서 락하명령을 내리군하였습니다.

비행장주변은 무연한 사탕무우밭이였습니다. 우리가 락하를 끝내면 밭일을 하던 녀성꼴호즈원들이 뛰여와서 락하산도 끌어다주고 사탕무우도 깎아주군하였습니다.

많이 뛰여내린 대원들에게는 새파란 기념마크를 주었는데 우리 지대에서는 최용진이 최고기록을 내여 기념마크를 받았습니다.

나도 여러번 락하산훈련에 참가하였습니다. 락하산훈련을 할 때에는 모자를 잃어버리는 사람, 장화를 잃는 사람, 발을 풀치는 사람, 락하산이 나무가지에 걸려 공중에 데룽데룽 매달리는 사람 등 별일이 다 있었습니다.

체중이 80키로그람이상 되거나 40키로그람이하인 대원들은 안전상 리유로 락하산훈련에 참가시키지 않았습니다. 체중이 너무 무거우면 강하속도가 빨라서 부상당할수 있고 너무 가벼우면 오히려 공중으로 자꾸 올라가 왕청같은 방향으로 날아가기때문입니다. 전순희는 체중이 가볍다나니 비행기보다 더 높이 떠올랐다가 가까스로 락하하였습니다. 김증동도 외딴곳으로만 자꾸 날아갔습니다. 그 사람 체통이 몹시 작았습니다. 허튼곳으로 날아가다가 나무에 데룽데룽 매달려있는 그를 내가 안아내렸는데 몸이 아이들처럼 가벼웠습니다.

김증동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서울과 대전 해방전투에서 위훈을 세워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았습니다.

우리는 락하산훈련을 강하훈련, 항공륙전대훈련과 배합하여 진행하였습니다. 이 훈련은 1944년 이후시기에 많이 하였습니다.

항공륙전대훈련에서는 저항하는 적을 락하하면서 소멸하는 동작, 락하하여 신속히 전개하는 동작, 적의 배후를 타격하는 동작 등을 련마하였습니다.

락하산훈련을 하고나면 체중이 줄어들고 배가 몹시 출출해나군했습니다. 훈련강도가 센데다가 쏘독전쟁이 일어난 다음부터 부대에서는 전선을 지원하느라고 식량공급량을 더 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빈땅을 일구어 부업농사를 지었습니다. 감자도 심고 콩도 심고 남새도 심어 자급자족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부업농사덕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 지대에서는 산나물을 뜯어다가 식량보탬을 하였습니다. 훈련기지주변에는 고사리, 닥지싹, 두릅을 비롯하여 산나물들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산나물로 국을 끓여먹자 부대군의소의 쏘련의사들은 파악도 없는 풀을 뜯어먹는다고 식사를 중단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먹어보고는 맛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산나물이 약재라고 하였더니 그 다음부터는 산나물만 찾았습니다.

한번은 우리 동무들과 부대의 후방부장인 유태계 쏘련군소좌가 부업밭에서 감자씨붙임을 하다가 언쟁을 벌린 일이 있습니다. 그 소좌는 우리 동무들이 감자눈을 따서 심는것을 보고 농사를 망친다고 야단을 쳤습니다. 우리 동무들은 잘되고 못되는것은 가을에 가서 보자고 하였습니다.

그해에 감자농사가 잘되였습니다. 통감자를 심은데서는 잔자갈같은것들이 달렸지만 우리 동무들이 눈을 따서 심은데서는 주먹같은 알들이 달렸습니다. 그때에야 소좌는 우리 식의 농사법을 인정하였습니다. 그해 봄에 우리 지대에서는 눈을 따내고 남은 감자를 다 삶아먹으면서도 수확은 곱으로 많이 거두어들였습니다.

우리 동무들은 수렵대를 조직하여 짐승잡이도 하고 쉬는날에는 아무르강에서 물고기잡이도 하였습니다. 그 강에 맹어가 많았습니다. 한마리의 무게가 수십키로그람이나 되는 큰놈도 있었습니다.

산란기가 되면 아무르강에 연어가 많이 올라왔습니다. 연어는 그물을 쳐서 잡아 소금에 절구었습니다. 연어알은 따로 뽑아서 절구었다가 식탁에 내놓았습니다.

짐승사냥도 하고 물고기도 많이 잡아 서부전선에 보내준 일도 있습니다.

훈련기지에서는 무선통신훈련도 하였습니다.

북만에서는 1930년대 후반기에 쏘련으로 들락날락하면서 무전기술을 배운 동무들이 있었지만 우리 지대에서는 박영순, 리을설이 림시기지에 들어와서 처음 무전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들이 워로쉴로브에 가서 석달동안 무전강습을 받고와서 다른 동무들에게 배워주었습니다. 무선통신훈련에는 남대원들인 리종산, 리오송 등과 김정숙, 박경숙, 박경옥, 김옥순, 리영숙, 왕옥환, 리재덕, 리민을 비롯하여 녀대원들이 거의다 참가하였습니다.

지난날 동남만에서 활동하던 대부분의 부대들에서는 무선통신을 활용하지 못하였습니다. 무전수들을 양성하자면 국제당이나 쏘련사람들의 신세를 져야 하는데 그게 헐치 않았습니다. 무전수가 없다보니 무전기를 여러번 로획했지만 쓸모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사령부와 각 부대들에 통신원을 두고 도보로 통신련락을 보장하였습니다. 우리 통신원들이 정말 걸음을 많이 걸었습니다. 그 한걸음한걸음이 다 사선이였습니다. 통신련락을 하다가 희생된 동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리치호는 입대후 여러해동안 우리 사령부 통신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가 사령부통신을 보장하느라고 식량고생도 하였고 적들에게 체포되여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고생도 많이 했지만 공로도 적지 않게 세웠습니다.

이렇게 인력으로 통신을 보장하자니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통신의 기동성을 보장할수 없었습니다. 이런 교훈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무선통신훈련에 특별한 의의를 부여하였습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정규무력건설은 물론, 나라의 신경인 통신기관을 설립하고 문화선전활동을 하자고 해도 통신의 골간이 될 동무들을 키워야 하였습니다.

그때 김정숙은 무선통신과 락하산훈련을 비롯한 여러가지 훈련에 참가하면서도 국내의 여러 지역에 나가 소부대활동을 적극 벌렸습니다.

무선통신훈련에서는 녀대원들이 모범이였습니다. 그들은 무선훈련에도 직심스러웠지만 스키훈련, 수영훈련, 락하산훈련, 도하훈련에도 남자들과 꼭같이 참가하였습니다. 그때의 훈련강도가 대단히 높았습니다. 쏘련군관들도 자기들이 군관학교를 다닐 때보다 몇배나 더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녀대원들은 타발 한마디 없이 모두가 훈련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락하산훈련을 시작할 때 우리는 모성들과 일부 허약한 녀대원들을 제외시키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자 녀대원들이 다 섭섭해하였습니다. 안정숙은 나를 찾아와 울면서 항변까지 하였습니다.

《훈련도 하지 않을바에야 우리 녀대원들이 무엇때문에 아이들까지 떼두고 로씨야땅에 왔겠습니까.》

안정숙은 원동으로 들어올 때 남의 집 삽짝문앞에 어린 자식을 두고온 동무였습니다. 리정인도 남의 채마막에 딸애를 떨궈두고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조국해방의 날을 앞당기는것이 사랑하는 자식들과 다시 만날수 있는 길이라고 하면서 훈련에 참가시켜달라고 강경히 요구하였습니다.

박경숙은 군인식당의 음식을 입에 전혀 대지 못하면서도 무전대앞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해산을 하고나서도 맹훈련을 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학습과 훈련에 정력적으로 참가했던지 무선소대의 교관은 조선녀자들이 정말 근면하고 이악하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박경숙은 무전기를 메고 김책을 따라 적구에 나가 몇달동안 소부대활동을 한적도 있습니다. 그가 무전을 아주 잘 쳤습니다.

김정숙도 이악하게 훈련에 참가하였습니다. 한번은 그가 발목을 풀친 일이 있었는데 퉁퉁 부어오른 발을 가지고도 스키훈련을 계속하였습니다. 내가 걱정하자 그는 종이에 싼 각사탕 하나를 꺼내주며 이걸 입에 물고 훈련을 하면 한결 숨이 덜 찹니다 하고 오히려 나를 념려해주는것이였습니다.

락하산훈련을 할 때 내가 제일 걱정한것은 몸무게가 가벼운 녀동무들이 제대로 락하하겠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제때에 산을 펴고 지정된 장소에 정확히 착지하군하였습니다. 몸무게를 불구느라고 배낭속에 벽돌을 넣고 락하훈련에 참가하는 녀대원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투사들의 청춘시절이였습니다.

해방된 조국의 래일을 위하여 모든 고난을 웃으며 뚫고나간 여기에 우리의 행복이 있었고 기쁨이 있었으며 삶의 보람이 있었습니다.

훈련강도가 센데다가 잠도 모자라고 힘도 모자랐지만 우리는 해방된 조국의 래일을 위하여 그 모든 고난과 시련을 웃으면서 이겨냈습니다.

우리 투사들은 지금도 그 시절을 귀중하게 간직하고있습니다.

사람의 한생에는 누구에게나 청춘시절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먼 후날에 가서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회상할수 있도록 그 시절을 보낸다는것은 결코 헐치 않습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한길에 일신을 깡그리 바쳐가며 피끓는 열정과 불타는 투지로 만난을 헤쳐가는 그 걸음걸음이야말로 얼마나 값높고 긍지높은 생활이겠습니까!

나는 우리의 청년들도 항일혁명에 몸바친 투사들의 그 정신을 이어 부닥치는 애로와 난관을 뚫고 조국과 혁명을 위하여 억세게 싸우리라는것을 믿어마지 않습니다.

일본과 독일이 서산락일의 길을 걷고있을 때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눈앞에 두고있던 우리는 조선혁명의 주체적력량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조국에 대한 학습에 큰 힘을 넣었습니다. 조선혁명에 대한 옳바른 리론과 전략전술, 조국의 력사와 지리, 경제와 문화, 도덕과 풍습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력독립도, 새 조국 건설도 할수 없고 혁명에 대한 자주적인 립장과 독자적인 주견도 세울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무들은 대체로 조국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많은 동무들이 만주태생이니 그럴수밖에 없었습니다. 박성철이 경상북도에서 출생하였다고 하지만 10살때인가 고향을 떠난후로는 줄곧 만주에서 살았고 리을설도 성진태생이기는 하나 어려서 두만강을 건는 다음부터는 계속 장백에서 살다가 유격대에 입대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원들에게 조선혁명의 주체로선과 자기 조국에 대한 학습을 단단히 시켜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것은 훈련기지에 조선관계서적이 부족한것이였습니다.

조선에서 출판한 책은 국내에 소부대공작을 나가는 동무들한테 과업을 주어 해결하기도 하였고 쏘련동무들에게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언제인가는 《조선지리통감》이라는 책도 얻어다 보았습니다. 그 책이 조국의 지리를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어느날 나는 림춘추에게 조선지도를 큼직하게 그려오라는 과업을 주었습니다. 지도를 그리되 이름있는 산과 강, 벌, 호수, 지하자원과 각 지방의 특산물들, 명승지들과 문화유적까지도 다 그려넣으라고 하였습니다.

림춘추는 품을 들여 지도를 그렸습니다. 흰종이 몇장을 이어붙이고 큼직하게 지도를 그려왔는데 손색이 없었습니다.

나는 정치상학시간에 이 지도를 걸어놓고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간부들과 정치교원들 앞에서 《조선혁명가들은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이날의 연설에서 나는 조선혁명가들은 조선의 력사와 지리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는것을 강조하고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몇가지 과업에 대해서도 지적하였습니다. 그후부터 국제련합군안의 모든 조선인대원들은 《조선혁명가들은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조국에 대한 학습을 심화하였습니다.

그때가 아마 추석무렵이였던것 같습니다. 그날밤 우리는 밀림우에 떠오른 밝은 달을 바라보며 조국과 고향에 대한 이야기로 밤가는줄 몰랐습니다.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원천이였습니다. 우리는 더욱 분발하여 학습과 훈련을 다그쳤습니다.

그때 항일투사들은 옹근 하나의 정규대학에서 배워야 할 과정안을 부단한 전투와 힘에 부치는 훈련을 하는 긴장한 가운데서도 훌륭히 소화하였습니다. 그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그때 흘린 땀과 노력이 해방된 조국땅에서 큰 은을 냈습니다.

해방후 우리와 같이 일한 사람들가운데는 한다하는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쏘련에서 동방근로자공산대학을 나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을 만나 이야기해보니 당건설이나 국가건설에 대해 별로 아는것이 없었습니다.

항일투사들은 무슨 일을 맡기건 막히는데가 없었습니다.

김책에게 산업부문을 맡아보라고 하였더니 엉망이 된 나라의 산업경제를 빠른 시일안에 일으켜세웠습니다. 안길에게 정규무력건설에 필요한 군사간부를 키우는 학교를 꾸리고 운영하라고 했더니 그도 그 임무를 어렵지 않게 수행하였습니다.

군중공작이나 정치사업 같은것은 유격대출신들을 당해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항일혁명투쟁전기간 언제나 혁명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밝은 래일을 내다보면서 해방된 조국의 장래를 걸머지고나갈수 있는 준비를 적극적으로 다그쳐왔습니다.

조국해방전쟁을 한창 치르고있을 때 우리가 평양시 복구건설을 위한 설계도를 작성하라고 하자 어떤 사람들은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겠는데 복구건설설계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고 하면서 어리둥절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두해후 전쟁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그 설계에 기초하여 지체없이 평양시 복구건설에 착수할수 있었습니다.

혁명가들은 오늘뿐아니라 래일까지도 멀리 내다보며 사업을 설계하고 내밀줄 알아야 합니다.

난관앞에서 우는소리를 하는것보다 곤난을 디디고 일어서서 래일을 위한 설계도를 작성하고 생활을 앞당겨 창조해나가는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시간을 앞당기고 미래를 앞당기는것은 공격정신입니다. 항일혁명의 최후승리를 내다보던 바로 그 시절에도 우리는 변함없이 혁명적 락관과 신심에 넘쳐 군정훈련을 다그치며 조국해방의 날을 앞당겨나갔습니다.

오늘의 난관을 웃음으로 헤치며 래일의 조국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않고 일하는 사람들, 사색과 탐구를 거듭해가며 후대들의 미래를 설계해가는 사람들만이 참다운 공산주의자, 열렬한 혁명가로 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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