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 당 거 우 밀 영

 

중국 동북지방에 있는 정우현의 지난날 이름은 몽강현이다.

그 현에는 패자라고 부르는 광대한 밀림의 바다가 펼쳐져있는데 그중 동쪽패자(동패자)의 밀림속에 마당거우라는 이름을 가진 고장이 있다.

바로 거기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1937년 11월하순부터 이듬해 3월하순까지 무려 4개월에 걸치는 집중적인 동기군정학습을 진행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생전에 청소년학생들이나 간부들과 군인들의 학습문제가 상정될 때마다 항일혁명시기의 학습경험을 자주 말씀해주군하시였다.

여기에 소개하는 추억담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항일혁명투쟁사 연구자들에게 들려주신 이야기의 한 단락이다.

 

1937년 겨울에는 몽강현 마당거우밀영에서 부대안의 전체 장병들이 군정학습에 주력하였습니다. 아마 한 너덧달쯤 품을 들여 학습한것 같습니다.

그해 봄에 동강밀영에서도 한달 남짓하게 집중학습을 했다는데 또 무슨 집중학습인가 하고 동무들은 좀 별나게 생각할수 있는데 여기에 이상스러울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단순한 군사집단이 아니라 정치와 군사를 다같이 중시하는 혁명군대입니다. 문과 무를 겸비해야 무장투쟁도 잘할수 있고 인민들과의 사업이라든가, 통일전선사업이라든가 적군와해사업도 잘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군인들의 교육과 교양에 많은 힘을 넣은것은 그때문이였습니다. 군인들을 육성하는데서도 힘있는 수단은 학습입니다.

동무들도 알고있는것처럼 우리는 오래전부터 사람이 모든것의 주인이며 모든것을 결정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혁명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사상의식에 있다고 보아왔습니다.

사람이 모든것을 결정한다는것은 결국 사람의 사상의식과 지적능력이 모든것을 결정한다는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사상의식과 지적능력은 학습을 통해서 부단히 높여야 합니다.

우리가 한해에 두번씩이나 집중적인 군정학습을 조직하게 된데는 몇가지 절박한 사정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본이 동양천지를 다 삼키는줄로 알고 맥을 놓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일본군은 중일전쟁을 일으킨후 중국관내의 넓은 땅덩어리를 어렵지 않게 먹어치웠습니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속에서는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그전날 나라를 찾아보겠다고 투쟁을 좀 하던 사람들조차도 뒤골방에 들어박혀 우국지사행세를 하거나 살아갈 구멍수를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우리 혁명군대오안에서도 부분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동요분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형편에서 우리가 대원들에 대한 사상교양이나 군사교육에 힘을 넣지 않는다면 주체적혁명력량을 강화할수 없었을뿐아니라 우리 혁명의 자주로선을 끝까지 배심있게 밀고나갈수 없었습니다.

국제당의 간판을 달고 나도는 이러저러한 로선이 일으키고있는 혼란도 큰 문제거리였습니다.

그 당시 국제당에 앉아있던 좌경모험주의자들은 실정에 맞지도 않는 열하원정로선을 내리먹이여 조중 두 나라 혁명에 막대한 피해를 끼치였습니다.

공산주의를 동경하는 사람들속에서는 조선공산당발기자그루빠가 작성하였다고 하는 《조선공산당 행동강령》이라는것과 김 아무개라는 사람이 국제당 제7차대회에서 한 연설문이 나돌고있었는데 인기가 괜찮았습니다. 당이 해산된 다음 옳바른 지도로선을 찾느라고 좌왕우왕하던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조선공산당 행동강령》이나 국제당대회의 연설에서 그 어떤 시사를 받으려고 노력한것은 리해할만한 일입니다.

국제당대회의 연단이나 기관잡지에서 조선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나오는것도 물론 반가운 일이였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조선공산당 발기자들이 작성한 《조선공산당 행동강령》이나 국제당대회의 연설에는 조선혁명의 실정에 맞지 않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카륜회의에서 조선혁명의 성격이 부르죠아민주주의혁명이 아니라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는것을 정식화하였으며 유격구에서 인민혁명정부로선을 관철한 경험을 가지고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우선 인민혁명군 지휘관들과 대원들에게 조선혁명의 자주로선에 관한 지식부터 똑바로 심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습니다.

내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라는 론문을 쓰고 그것을 교재로 하여 집중적인 정치학습을 조직했던 리유의 하나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나는 그 론문에서 조선혁명의 성격과 당면임무를 또다시 서술하고 조선혁명을 자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과업을 제시하였습니다.

우리는 신입대원들을 정치군사적으로 단련시키기 위해서도 군정학습을 다시금 조직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적들의 통치거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마당거우는 혁명군이 한해 겨울 군정학습을 하며 지내기에는 알맞춤한 장소였습니다.

마당거우에 들어서던 날 선발대대원들이 만들어놓은 화독에 감자를 구워먹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몽강지방도 무송이나 안도에 못지 않게 감자가 잘됩니다. 어떤 감자는 목침만해서 바가지 하나에 한알밖에 담지 못하는것도 있었습니다. 그맛도 좋았습니다.

우리는 먼저 군정간부회의를 열고 그해 겨울동안 매개 병사,지휘관들이 도달해야 할 학습목표를 정해준 다음 부대별, 조직별, 학습반별로 회의를 가지고 학습을 잘할데 대한 결의를 다지게 하였습니다. 《학습도 전투다!》라든가 《혁명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학습은 첫째가는 의무이다.》는 그때 우리가 군정학습을 시작하면서 내놓은 구호입니다. 나는 그 구호를 병실마다 큼직하게 써붙이게 하였습니다.

우리 유격대오에는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마동희, 최경화, 김영국, 강돈 같은 사람들이 비교적 유식해서 《대학생》이라는 별명을 받기는 했지만 학력이라야 소졸, 중졸 정도였습니다. 모두가 가난한 집안의 자식들이였기때문에 공부를 할래야 할수가 없었습니다. 학력으로 따지면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서철이 그중 높은 편이였는데 그도 돈이 있어서 전문학교까지 나온게 아닙니다. 사람이 하도 이악하고 직심스러운 덕에 고학으로 전문학교를 나올수 있었습니다. 우리 부대에는 박소심이나 차광수나 《대통령감》만큼 다문 박식한 사람이 많지 못했습니다.

마당거우에서 군정학습을 시작했을 때 어떤 신입대원들은 군사훈련에만 참가하고 정치상학에는 잘 참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대표적인물의 하나가 박창순이라는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제 이름 석자도 쓸줄 모르는 까막눈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걸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글은 모르지만 싸움은 남보다 더 잘할수 있다고 곧잘 큰소리를 치군했습니다. 그러다나니 학습시간도 뚜꺼먹기가 일쑤였습니다. 왜 학습에 자꾸 빠지는가고 물으면 머리속이 캄캄해서 통 글을 배워낼수 있어야지요, 차라리 그 시간에 사격련습이나 잘해두었다가 일본놈을 많이 잡는것이 상책일것 같수다 하고 대답하군하였습니다.

어느날 나는 박창순을 불러다놓고 담화를 하던 도중 앞에 서있는 고로쇠나무를 가리키며 저 나무는 무엇에 쓰면 좋겠는가고 물었습니다. 박창순은 도끼자루를 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송아지를 길러 부림소로 만들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고 다시 물었더니 코뚜레를 꿰야 합지요 하였습니다.

실농군인 박창순은 그런데서는 막히는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대답을 아주 잘했다, 동무가 농사를 지어보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야 그런 리치를 알겠는가, 혁명사업에서도 꼭같은 리치가 작용한다, 무엇이 어디에 필요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아는 사람이라야 혁명을 잘할수 있다, 모르고서는 고로쇠나무를 보고도 그것이 훌륭한 도끼자루감이라는것을 알수 없다, 적을 많이 잡는 묘리를 모르는 사람은 적을 많이 잡을수 없다, 총만 가지고서는 적을 이길수 없다, 동무가 정 공부를 못하겠다면 우리는 동무를 집으로 돌려보내겠다, 학습이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사람이 어떻게 어려운 혁명을 해낼수 있겠는가, 총을 바치고 집에 가서 농사나 짓도록 해주는수밖에 없으니 어느 길을 택하겠는가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펄쩍 뛰면서 매우 섭섭해했습니다.

혁명을 하겠다고 우리를 찾아왔던 사람인것만큼 박창순은 공부를 하기 싫다고 우리곁을 떠날수 없었습니다. 그후부터 그는 머리를 싸매고 학습에 달라붙었습니다.

신입대원들가운데는 머리타발을 하면서 학습을 게을리하는 사람이 또 한명 있었습니다. 권 무엇이라고 하는 그는 동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충고할 때마다 그것을 귀담아들을 대신 어디서 얻어들었는지 홍범도장군도 자기 같은 무식쟁이였지만 독립군대장노릇을 아주 잘했다고 하면서 글을 몰라 혁명을 못한다는게 무슨 소린가고 반박하군하였습니다. 공부를 게을리하는데서는 박창순을 찜쪄먹을 사람이였습니다. 그가 어떻게나 찔통을 부리며 애를 먹였던지 그 사람네 중대장과 정치지도원이 골머리를 앓다 못해 나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나는 그 신입대원에게 보내는 편지 한장을 써서 전령병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누구도 그 편지를 읽어주지 않도록 미리 모든 중대들에 단단히 침을 놓게 하였습니다.

전령병이 나의 편지를 전달해주자 신입대원은 당황해서 어쩔바를 몰라했습니다. 하나의 평대원으로 사령관의 편지를 받았는데 거기에 무슨 사연이 적혀있는지를 알 도리가 없었으니 야단이 아닙니까. 그는 아는 동무들을 찾아다니면서 편지를 읽어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동무들은 이구실저구실 붙여가면서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안달이난 그는 이 소대에서 저 소대에로 또 이 중대에서 저 중대에로 발이 닳게 돌아다니며 편지를 봐달라고 빌붙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 편지를 보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혼이 났겠습니까.

권동무는 하는수없이 나를 찾아와서 편지에 적힌 사연을 알려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편지를 읽어주었습니다. 거기에는 무슨 일을 몇시까지 하고 사령부에 와서 보고하라는 긴급지시가 적혀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편지를 들고온 때는 이미 지령이 적힌 시간이 퍽 지나간뒤였습니다. 사령관이 자기에게 준 과업을 집행할수 없게 된 그는 머리를 들지 못하고 진땀을 뻘뻘 흘렸습니다.

나는 자 봐라, 무식하다보니 사령관의 명령도 집행 못했다, 동무가 적구에 나가 사업할 때 내가 편지로 어떤 명령을 떨구었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면 어떻게 되였겠는가고 하였습니다

그 대원은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잘못했다고 뉘우쳤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학습에 열성을 내였는데 후날 아주 유식한 군정간부로 자라났습니다.

말이 난김에 글을 모르던 사람이 학습을 잘해서 투사로 자라난 이야기를 한가지만 더하겠습니다.

왕청시절의 우리 부대에 김만익이라는 대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꾸냥》이란 특이한 별명을 가지고있었습니다. 처녀를 중국말로 《꾸냥》이라고 합니다. 그가 살결도 맑고 얌전하고 또 곱게 생겨서 왕청사람들이 그런 별명을 달았는데 《꾸냥》답지 않게 키는 구척이나 되였습니다.

김만익은 초기에 청년의용군에 속해서 소왕청방위전투에도 참가하였습니다. 유격대에 정식으로 입대한 다음에는 최춘국이네 중대에 배속되였는데 싸움을 아주 잘했습니다. 그는 20살이 되여오도록 기차도 구경해본적이 없는 소박한 시골태생이였습니다. 사람이 어찌나 때가 묻지 않았던지 마음이 백지장같았습니다.

그가 한번은 렬차습격전투에 나갔다가 전우들을 웃긴 일이 있습니다. 김만익이 전투를 앞두고 레루장에 귀를 대고 엎드려있기때문에 전우들이 이상해서 그에게 뭘하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김만익은 응, 기차란게 뭔가 했더니 별게 아니구나, 이런 쇠덩이줄을 타고 발구처럼 미끄러다니는 쇠발구구만 하면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무식하던 김만익이도 우리한테서 글을 배우고 후날에는 중대청년간사가 되여 대원들을 깨우쳐주었습니다. 중국 동북해방전투에 참가하고 조국에 돌아온 그는 강건의 사단에서 대대장으로도 사업했고 련대장으로도 복무하였습니다.

조국해방전쟁을 취급한 우리의 책자들에 김만익이 서울과 대전을 해방하는 전투때 부대지휘를 잘했다는 내용이 소개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희생된곳이 락동강계선일것입니다. 그는 배와 목에 심한 부상을 당하고도 이틀동안 전투장을 떠나지 않고 부대를 지휘하다가 전사하였습니다.

군정학습을 성과적으로 보장하느라고 비서처와 출판소 일군들이 수고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들은 밀영에서 얼마쯤 떨어진곳에 출판소를 꾸려놓고 학습에 필요한 교재들과 참고서들을 적지 않게 찍어냈습니다. 《종소리》의 주필사업을 하던 최경화나 《서광》의 발행사업을 책임졌던 김영국은 모두 비서처의 쟁쟁한 문필가들이였습니다. 그들이 주동이 되여 《대통령감》과 함께 교재내용을 해설하는 글이나 학습에 도움이 될 문학작품들을 부지런히 써서 우리 대내출판물들에 싣기도 하고 또한 열성독자들을 발동하여 땀내가 나고 화약내가 나는 생동한 글들을 얻어내기도 하였습니다. 자습반성원들은 말할것도 없고 식자반에 망라된 대원들까지도 그해 겨울에는 신문, 잡지들에 낼 글들을 쓰느라고 이만저만 열성을 내지 않았습니다. 글을 쓰느라면 안목도 넓어지고 학습열의도 높아지는 법입니다.

정치학습의 기본문제는 혁명에서 자주성을 견지하는 문제와 혁명적신념문제,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에 관한 문제들이였습니다. 이상의 문제들은 다 중일전쟁발발후 우리 혁명앞에 조성된 엄혹한 정세의 요구를 반영한것들이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자주로선을 견지하는 문제는 조선혁명의 생명선으로 되고있었습니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이나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와 같은 문헌들이 마당거우군정학습에서 주되는 학습교재로 리용된것은 바로 그 문헌들에 혁명에 대한 우리의 자주적립장이 똑똑히 밝혀져있었기때문입니다.

우리는 마당거우에서 군사학습에도 많은 품을 들였습니다. 군사상학의 중심은 유격전법들이 종합되여있는 《유격대동작》과 《유격대상식》을 완전히 소화시키는것이였습니다. 지휘성원들은 전술학습에 주력하게 하였고 대원들은 사격훈련과 제식훈련을 기본으로 하면서 실기를 련마해나가게 하였습니다.

마당거우에서는 유격전술과 함께 정규군전술도 동시에 학습시켰습니다. 과정안에 정규군전술학습을 포함시킨것은 적을 전술적측면에서 더 깊이 파악하려는데도 있었지만 해방된 조국에서의 정규군건설이라는 대과제를 앞에 두고 그것을 담당하여야 할 우리들자신이 사전에 필요한 지식을 섭취하자

는데도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야외에서 실전의 분위기를 조성해놓고 전술연구모임을 가지였습니다. 그리고 평대원들에게도 전술학습을 시켰습니다. 지도의 가치를 모르는 신입대원들에게 지도를 보는 법도 가르쳐주고 지남침에 의한 방위판정법도 배워주었습니다.

우리는 신입대원들이 군사상학에서 배운 지식을 실전을 통해서 잘 다져나갈수 있게 이따금 전투도 조직하였습니다. 청강전자전투와 정안툰전투는 우리가 마당거우에서 군정학습을 하는 기간에 조직한 전투들이였습니다. 그때 우리 대원들은 후방물자를 해결하느라고 한차례의 매복전투도 조직하였습니다.

정안툰을 칠 때 최경화동무를 잃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발건사를 잘하지 못해서 동상을 입었던 강돈도 그후에 전사하였습니다. 최경화와 강돈은 둘 다 장백에서 입대한 대원들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보통신대원들과는 달리 장백지방에서 큼직큼직한 지하조직들을 몇개씩 맡아서 지도하다가 혁명군에 들어온 지식인출신의 전도가 촉망되는 대원들이였습니다.

최경화는 권영벽이 왕가골에 내려가서 서간도일대의 당조직과 조국광복회 조직사업을 지도할 때 찾아내여 키워낸 사람입니다. 그가 왕가골에 있을 때 어떤 활동을 했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여러번 말했기때문에 여기서 더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강돈도 우리가 서간도에 나와서 찾아내고 육성해낸 사람입니다. 강돈은 소학교 고등과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자습으로 중학강의록과 사회발전사를 떼고 일찍부터 군중계몽사업에 뛰여들어 반일애국주의교양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입니다. 그가 설립하고 지도한 야학들이 유명했습니다. 강돈은 그 야학들을 통해 수많은 혁명가들을 키워냈습니다. 우리 부대에 강돈의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리을설도 그 사람의 제자입니다. 지금은 영웅을 한명만 키워내도 크게 떠듭니다. 이런 사실을 념두에 두면 강돈은 큰 공로자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강돈은 영화동에서 조국광복회 조직에도 참가하고 반일청년회도 조직하였습니다. 그가 꾸린 조직들이 원군운동을 잘했습니다. 강돈은 십가장이라는 간판을 가지고 우리의 활동에 필요한 가치있는 군사정보들도 무시로 수집해 보내주었습니다. 강돈이 원군물자를 지고 우리를 찾아왔을 때 나는 곰의골밀영에서 그를 만나보았습니다.

강돈은 《혜산사건》이 터지자 혁명군중을 안전지대로 피신시킨 다음 마을청년들을 인솔해가지고 우리 부대에 입대하였습니다. 그가 신입대원이였지만 우리는 그를 중대선전간사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는 선전간사의 직분에 맞게 대원들에 대한 계몽사업을 아주 잘했습니다. 전문섭동무도 아마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것입니다.

강돈은 학습토론과 론쟁에 늘 열성적으로 참가하였습니다. 그는 대내출판물들에 글도 여러번 써냈습니다. 《종소리》에 실린 그의 글이 매우 인상적이였습니다. 《혜산사건》을 도발한후 장백땅에서 일제가 감행한 만행을 폭로한 글이였는데 필자의 체험이 아주 생동하게 반영되여있었습니다.

부대가 마당거우에서 군정학습을 하는 기간 나는 4사부대와의 련계를 위해 강돈을 화전현으로 보낸 일이 있습니다. 마당거우에서 화전현까지는 300리가 넘었습니다. 적의 경계도 이만저만이 아니였습니다. 내가 4사부대의 소식을 몰라서 안타까와한다는 말을 듣자 강돈은 자진해서 화전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습니다. 강돈이 화전에서 귀중한 정찰자료들을 한보따리나 가지고 돌아왔을 때 나는 그의 충실성과 용감성에 탄복하였습니다.

우리 부대가 정안툰을 칠 때에도 강돈은 수류탄으로 포대를 까부시며 앞장에서 돌격로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는 포대를 까부신 다음 방차대로 나갔다가 발에 심한 동상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밀영에 돌아오자 치료대책을 세워주었습니다.

강돈은 동상을 입은 몸이였지만 편안히 누워서 치료만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치료는 치료대로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강의도 하고 글도 가르치고 신문에 글도 써내군했습니다. 문자그대로 불면불휴였습니다. 그러다가 적들이 밀영에 쳐들어오자 총을 들고 서슴없이 전장으로 뛰여나갔습니다. 강돈은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전사하였습니다. 아까운 사람이였는데 분하게 잃었습니다.

강돈의 영웅적생애는 학습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이 혁명실천에서도 모범을 발휘하게 되고 조국과 인민의 기억속에 영생하는 위훈의 창조자가 된다는 진리를 말해줍니다. 내가 알고있는 빨찌산영웅들은 례외없이 일상생활에서 학습을 중시하는 사람들이였습니다. 학습을 게을리한 사람들속에서는 후대들앞에 모범으로 내세울만한 영웅들이 배출되지 않았습니다. 정신적량식을 풍족하게 마련하고있는 사람들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간에 반드시 혁명을 위해 큰 위훈을 세우기마련입니다. 인민무력부 간부들의 말을 들어보면 리수복영웅도 학창시절에 공부를 착실하게 했다고 합니다.

나는 학습을 잘하지 않는 사람들이 신념이 강한것을 보지 못했고 신념이 강하지 못한 사람이 혁명적의리에 충실한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사람은 학습을 많이 해야 신념도 강해지고 혁명을 하려는 열정도 높아집니다.

김정일동무가 사람은 아는것만큼 보고 듣고 느끼고 받아들인다고 한 말은 아주 의미심장한 명언입니다.

우리는 군정학습기간에 대원들의 문화적소양을 높여주는 사업도 활발히 벌리였습니다. 혁명가요보급과 오락회도 자주 조직하고 혁명적인 소설작품이나 전기실화작품들을 소개선전하는 읽은책발표모임 같은것도 자주 열어 대원들로 하여금 락천적으로 살며 투쟁하도록 하였습니다. 밀영에서 오락회가 조직되지 않는 날은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체험에 의하면 노래는 혁명적락관주의의 상징이고 혁명승리의 상징입니다. 내가 자주 말하지만 인간생활에는 시도 있고 춤도 있고 노래도 있어야 합니다. 인간생활에 시도 없고 춤도 없고 노래도 없다면 무슨 살 재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숙영지에서도 울리고 가설무대들에서도 울리고 전장에서도 울리였습니다. 노래소리가 높다는것은 사기가 높다는것을 의미하며 사기가 높은 군대는 싸움에서 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노래소리가 높아야 혁명대오가 흥하고 강해집니다. 노래소리가 높은곳에 반드시 혁명승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 생활문화에도 각별한 주의를 돌렸습니다. 정갈하지 못한 육체에서 건전한 넋을 기대할수 없는것처럼 지저분하고 산만무질서한 대오에서는 강철같은 전투력을 바랄수 없습니다. 지난날 적들은 우리 부대가 숙영한 자리, 불피운 자리만을 보고도 추격을 중지하였습니다. 그것만을 보고도 우리 군대의 규률과 질서, 전투력을 가늠할수 있었기때문이였습니다.

그런데 마당거우밀영에 들어온 초기에는 탕개를 풀어헤치고 되는대로 살아가는 중대들이 생겨나게 되였습니다. 땔나무조차 미리 해다놓지 않고 태평스럽게 지내다가 끼니때가 되여서야 밀영주변에서 아무 나무나 망탕 찍어오는 현상까지 나타나고있었습니다.

나는 밀영생활에서 온 부대가 다 따라배울수 있는 모범을 하나 만들기로 결심하고 오중흡을 불렀습니다. 그가 맡고있는 7련대 4중대는 전투력이 제일 강한 핵심중대였습니다. 오중흡에게 밀영생활에서 나타나고있는 이러저러한 부족점을 말해주었더니 그는 그것을 자기 중대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오중흡은 중대에 돌아가자 생활문화바람을 되게 일으켜 중대의 면모를 일신시켰습니다. 사흘후 다시 내앞에 나타난 그는 자기가 중대를 좀 꾸리느라고 해봤는데 한번 나와 봐달라고 하였습니다.

다음날 군정간부들을 데리고 4중대에 나가보았는데 중대의 면모가 확연히 달라진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밀영주변이 어찌나 깨끗이 정리되여있는지 흠잡을데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취사장앞에 연기가 안나는 강대를 패서 몇달 쓰고도 남을만큼 쌓아두고있었습니다.

나는 오중흡에게 중대원들의 무기를 검사해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중대를 정렬시킨 오중흡은 먼저 자기의 무기를 1소대장에게 검사시키고 합격을 받은 다음 대원들의 무기를 검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참관중에 있는 모든 군정간부들이 그와 함께 중대의 무기상태와 복장상태, 병실, 취사장, 세면장의 정돈상태를 다 검사하게 하였습니다. 참관이 끝난후 군정간부들에게 부족점을 찾은것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더니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만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후 다른 중대들에서도 4중대의 모범을 본받아 부대관리와 생활문화에서 혁신을 일으켰습니다.

마당거우밀영에서 생활문화를 세우던 이야기를 하게 되니 그때 거기서 벌어졌던 금연운동도 생각납니다. 우리 주력부대에서 두번째로 전개된 금연운동입니다. 백두산기슭에서 싸울 때 리두수가 주동이 돼서 벌리였던 제1차 금연운동은 나의 권고에 따라 벌린것이지만 마당거우밀영에서 벌어진 제2차 금연운동은 애연가들자신이 자원적으로 조직하고 벌린것이였습니다.

마당거우밀영에서 집중군정학습을 진행하면서 우리가 총적인 목표로 잡은것은 우리의 모든 장병들을 조선혁명에 쓸모있는 공산주의적혁명투사로 키워내는것이였습니다. 어떤 사회에서나 교육과 교양의 기본사명은 사람들을 당대의 사회제도를 위하여 충실히 복무하도록 키우는데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강점하고 교육하는 흉내를 좀 냈는데 그것은 조선의 청소년들을 노예로 부려먹는데 알맞춤할 정도로 길들이자는것이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조선사람들에게 고등교육을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노예로 부려먹는데는 최소한도의 실용적기능이나 가지게 하면 된다는것입니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도 있지만 학문 그자체는 대체로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써먹는가에 따라서 덕을 주기도 하고 해를 주기도 합니다.

지식이 인류에게 유익한것으로 되고 인민에게 리로운것으로 되게 하자면 교육이 사상정신적으로나 도덕의리적으로나 기술문화적으로 훌륭하게 준비된 참사람들을 육성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사상도덕교양을 잘해야 합니다. 인간애와 인민애, 조국애는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건전한 사상과 신념에서 배양됩니다. 나는 도덕품성이 저렬한 사람들이 인간을 사랑하고 인민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는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사회주의가 다른 나라 사회주의와 확연히 구별되는 점은 당과 국가가 물질본위의 경제건설에만 주력하지 않고 사람본위의 사상교양을 선행시키면서 기술실무적으로뿐아니라 정신도덕적으로도 잘 준비된 참다운 인간들을 육성해낸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제일주의자가 아니고 인간제일주의자인것만큼 우리 나라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지는것을 제일 큰 재부로 여깁니다.

마당거우밀영에서의 군정학습은 참다운 공산주의적혁명가의 풍모와 품성을 갖춘 사람들을 길러내기 위한 인간개조과정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정안툰전투를 치르고 마당거우밀영으로 돌아올 때 한 신입대원이 무기를 잃어버린 사고를 저지른 일이 있었습니다. 그 무기는 강돈의 총이였습니다. 강돈은 방차대로 나갔다가 동상을 입고 밀영으로 후송될 때 자기가 휴대하고있던 보총을 중대정치지도원인 주재일에게 맡기였습니다. 그런데 부대가 전장에서 철수할 때 무기를 수여받지 못한 한 신입대원이 짐을 덜어주려고 그가 메고있던 강돈의 총을 자기가 메겠다고 자청해나섰습니다. 정치지도원은 그의 요구대로 총을 넘겨주었습니다.

부대가 정안툰에서 퍼그나 멀리 떨어진곳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주재일은 마음씨고운 신입대원의 어깨에 총이 없는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유를 알아본즉 중간휴식장소에서 무기를 벗어놓았다가 그만 빈손으로 왔다는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신입대원과 함께 몇십리길을 되돌아가서 3시간동안이나 어둠속을 헤맸지만 종시 무기를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밀영에 돌아오자 나를 찾아와서 그 사연을 보고하고 무기를 잃어버린 신입대원에게 책벌을 주자고 제기하였습니다. 무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엄격한 책벌을 가하는것은 우리 혁명군의 규률이였습니다.

내가 어떤 책벌을 적용하였으면 좋겠는지 생각해둔것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하니 주재일은 아직 복안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돌아가서 어떤 책벌을 주었으면 좋겠는지 심사숙고해보라고 말했습니다. 무기를 잃어버린 신입대원의 실수도 엄청난것이였지만 그보다 더 엄중하다고 생각된것은 그 신입대원에게 아무런 주의도 주지 않고 무기를 그냥 맡겨버린 정치지도원자신의 경솔성과 무책임성이였습니다.

주재일은 투쟁경험도 풍부하고 매사를 심중하게 처리할줄 아는 사람이였습니다. 그처럼 매사에 용의주도하고 책임성이 높은 그가 신입대원들과의 사업에서 그런 허점을 드러냈다는것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였습니다. 내가 그에게 심사숙고할수 있는 여유를 준것은 그가 자기자신의 그릇된 처사에 대해서 깊이 반성해볼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음날아침 주재일은 나를 찾아와 책벌은 총을 분실한 신입대원이 아니라 자기가 받아야 한다고,자기의 부주의와 무책임성이 결국은 신입대원으로 하여금 사고를 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결함을 옳게 찾아냈고 자기자신을 허심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나는 지휘관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회의를 소집하고 주재일의 문제를 상정시키였습니다.

회의에서 그를 8련대 1중대 정치지도원의 직무에서 떼고 비서처 보조성원으로 보낸다는것을 결정하였습니다.

신입대원들은 그 회의소식을 큰 감동속에 받아들였습니다. 무기분실에 대한 책임을 당사자가 지지 않고 지휘관이 지고 철직되는것을 보고 그들은 혁명군대안에서의 상하관계가 얼마나 고상한 도덕의리에 따라 맺어지고있는가를 절감하게 되였습니다.

무기를 잃어버린 신입대원은 고민끝에 주재일을 찾아가 울면서 사죄하였습니다.

주재일은 그 대원앞에서도 자기를 반성하였습니다.

나는 내 과오때문에 철직당한것이지 동무때문에 화를 입은것이 아니다, 사고는 동무가 저질렀지만 그 근원은 나한테 있다, 나는 정치일군으로서 동무를 잘 도와주지 못했다, 그러고서도 사고의 책임을 전우에게 전가하자고 하였으니 동무를 대하기도 부끄럽다고 하였습니다. 그후 그는 비서처에 가서 새로운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군정학습을 결속하던 날 나는 그에게 준 책벌을 해제하고 그를 경위중대 정치지도원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사령부 후방부관의 자리에서 철직되였던 김주현도 사상수양과 학습을 잘해서 같은 시기에 련대장으로 임명되였습니다.

마당거우에서의 군정학습은 이처럼 매개 병사, 지휘관들의 정치군사적자질과 정신도덕적풍모를 높이는데서도 큰 은을 냈습니다.

우리는 륙과송전투와 쟈신즈전투가 있은후 백석탄이라는곳에서도 40일가량 군정학습을 하였습니다.

백석탄밀영에서 한달이상이나 군정학습을 하게 된 주되는 리유는 륙과송과 쟈신즈에서 200여명의 목재소로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입대한 사정과 관련되여있었습니다. 그들을 훈련시키지 않고서는 다음단계의 활동에로 넘어갈수 없었습니다.

신입대원들가운데는 문맹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혁명을 하겠다는 각오는 높았지만 대체로 의식수준이 낮았습니다. 그들중에는 농민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있는 우리 나라에서 왜 로동계급이 령도계급으로 되여야 하는가를 리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벌목로동자로 일하다가 우리 부대에 입대한 손종준도 그 당시에는 문맹자였습니다. 그는 원래 안도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격대가 한총구를 친 다음부터 손종준은 각성하였습니다. 안도에서 한총구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그 전투가 안도사람들에게 대단히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벌목로동자로 일하다가 입대한 사람이였지만 백석탄에서 군정학습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농민이 혁명의 령도계급으로 돼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농민이 로동자보다 수적으로 훨씬 더 많기때문이라는것입니다.

신입대원들의 대부분은 총을 다룰줄도 몰랐고 제식훈련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이였습니다. 인민혁명군에서는 각종 경무기만 해도 10여종이나 사용하였습니다. 일본제 기관총이 있는가 하면 독일제 기관총도 있었고 체스꼬제 기관총도 있었습니다. 보총도 여러가지 종류였고 권총은 4가지 이상이나 사용하였습니다. 유격대원이 되자면 이 모든 무기에 정통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전투에선가 일본군의 기관총을 여러정 빼앗아낸 일이 있습니다. 일본제 기관총가운데는 탄창을 우로 꽂는 기관총도 있었고 탄창을 옆으로 꽂게 되여있는 기관총도 있었습니다. 탄창을 우로 꽂는 기관총은 쏘기가 좋았지만 탄창을 옆으로 꽂게 되여있는 기관총은 사격법이 까다로왔습니다. 일본군 기관총수를 한명 생포하여 사격교범을 설명하라고 하니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그 기관총수는 아편만 먹으면 비밀을 다 말하는 사람이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아편을 주고 사격교범에 대한 비밀을 알아냈습니다.

그후 나는 기관총교범을 하나 만들어가지고 대원들을 교육하였습니다.

기관총 한종의 사격원리와 분해결합법에 정통하자고 해도 이와 같은 곡절을 겪어야 하는데 하물며 목재만 다루던 로동자들에게 군정학습을 시키지 않고서야 그들이 어떻게 훌륭한 유격대원으로 될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백룡을 시켜 적들을 이리저리 끌고다니면서 실컷 골탕을 먹이다가 백석탄으로부터 400~500리 되는곳에 따돌리게 하고 각지에 소부대들을 파견하여 예비로 저장해두었던 후방물자들과 무기들을 운반해오게 한 다음 밀영에 들어박혀 군정학습을 진행하였습니다. 우리가 수백명의 신입대원들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최현도 수십정의 무기를 보내주었습니다.

백석탄에서의 학습은 있을수 있는 정황을 예견하여 두단계로 나누어 진행하였습니다. 첫 단계는 소정된 과목을 짧은 기간에 속성으로 배워주는 단계였고 두번째 단계는 배운것을 다시 반복하여 공고화하는 단계였습니다.

우리는 구대원들의 학습목표를 지식수준을 한등급이상씩 높이며 신입대원들의 학습을 도와주는데 두었습니다. 신입대원들에게는 한달동안에 문맹을 퇴치하고 각종 무기에 정통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워주었습니다. 이런 목표를 세운 다음에는 련대와 련대사이, 중대와 중대사이, 개인과 개인사이에 경쟁을 조직하였습니다. 우리가 백석탄에서 군정학습을 시작하면서 제시한 구호는 《학습도 전투다!》와 함께 《어렵고 복잡한 때일수록 학습을 강화해야 한다》는것이였습니다.

신입대원들은 그후 모두가 문맹을 퇴치하였습니다. 그동안의 학습정형을 료해하려고 고향의 부모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게 했더니 누구나 자기의 사상감정을 우리 글로 자유롭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들은 보총과 권총, 기관총을 비롯한 각종 무기의 사용법과 분해결합법에도 정통하였습니다. 어떤 신입대원들은 대내출판물들에 글도 써냈습니다.

그해 겨울에는 구대원이건 신대원이건 할것없이 누구나 다 신문, 잡지들에 낼 글을 썼습니다.

제1기 군정학습을 총화하는 날에는 시상식도 크게 하고 오락회도 하였습니다. 학습총화에서 평가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고급시계와 금반지, 만년필 등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그해 겨울에 우리는 백석탄에서 콩비지를 많이 해먹었습니다. 밀영에서 그리 멀지 않은곳에 대포시하라는 고장이 있었는데 대포시하아래쪽에 가을하지 않은 콩밭이 있었습니다. 지방농민들의 주선으로 그 밭을 통채로 사서 콩을 가을해왔더니 다들 비지를 해먹자고 하였습니다.

백석탄밀영에는 적들의 《토벌》에 쫓겨와 사는 집이 한집 있었습니다. 나는 그 집에 있으면서 언배추시래기를 썰어넣고 콩비지를 만든 다음 주먹만큼씩 덩어리를 빚어 얼구어두었다가 식사할 때 하나씩 남비에 끓여먹군하였습니다. 하루 세끼씩 비지를 먹었는데도 싫지 않았습니다. 식량을 절약하느라고 강냉이는 조금씩 넣어 먹었는데 별맛이였습니다.

백석탄에서의 군정학습은 홍기하전투와 대마록구전투를 비롯하여 대부대선회작전을 결속하던 시기와 소부대활동시기 우리가 진행한 일련의 군사정치활동에서 큰 은을 냈습니다.

나는 그후에도 알아야 앞을 내다볼수 있다고 하면서 우리 일군들이 자신의 정치실무수준을 끊임없이 높이기 위하여 언제나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울데 대하여 늘 강조하였습니다.

오늘은 김정일동무가 내놓은 《전당이 학습하자!》라는 혁명적인 구호를 관철하는 과정에 누구나 다 배우며 일하고 일하면서 배우는 혁명적기풍이 온 나라에 차넘치게 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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