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독립려단시절의 최춘국

 

중일전쟁이 일어나던 1937년 여름에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주로 장백, 림강 지구에서 활동하면서 북만에서 떠난 독립려단이 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그 독립려단은 유격대초창기부터 우리와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동무들을 골간으로 하여 편성된 부대였다.

1935년 봄에 있은 요영구회의결정에 따라 동만지방에 있던 인민혁명군의 각 부대들이 남북만의 넓은 지역에 진출하여 중국인부대들과의 협동작전을 활발히 벌린 사실은 이미 서술한바이다. 우리도 북만에서 5군부대와의 련합작전을 하였다. 그 과정에 우리는 왕청련대와 훈춘련대의 일부 성원들을 김책, 최용건이 활동하고있는 삼강지구로 파견하였다.

북만의 전우들을 찾아 먼길을 가는 과정에 그들의 력량은 증강되여 대부대로 장성하게 되였다. 1937년 봄에 독립려단은 서간도로 나오게 되였다. 그 독립려단의 당위원회 서기이며 1련대 정치위원이 바로 최춘국이였다. 독립려단의 조선사람들은 북만의 중국인부대들과 중국인민들을 성심성의로 도와주었다. 최춘국은 워낙 왕청에서 싸울 때에도 중국인민들이나 반일부대들과의 사업을 잘하여 그들한테서 각별한 사랑과 존경을 받았었다.

서강회의후 나는 북만땅에 외따로 떨궈두었던 부대성원들을 서간도로 불렀다.

하지만 기다리고 기다리던 독립려단은 보천보전투도 끝나고 7.7사변도 퍽 지나서야 림강지구에 당도하였다.

그들의 외모를 보고 우리는 모두 놀랐다. 누구라없이 군복은 찢어져 너덜거리였고 지하족은 닳고 터져서 천으로 발을 감싸고 노끈이나 새끼오리로 동여매였다.

나는 최춘국의 해진 군복잔등을 어루만지면서 왕청시절부터 오늘까지 동무는 늘 힘든 과업을 받아안고 고생을 많이 한다고 위로하였다.

최춘국은 도착도 늦게 한데다가 오는 도중에 최인준중대장이나 박룡산소대장 같은 끌끌한 전우들을 적지 않게 잃어서 면목이 없다면서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북만땅을 떠난것이 5월초순이라니 원정행군이 여러달 걸린 셈이였다. 그들이 출발했다는 의란땅에서 압록강연안까지는 만리나 되였다. 그 머나먼 험로를 오느라니 그 과정에 무슨 일인들 없었겠는가.

림춘추는 17살적부터 보물처럼 건사해가지고 다니던 침통을 잃어버렸다고 몹시 분해하였다. 그 침통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하는 과정에 닳고 또 닳아서 허리가 잘룩해진 값진 금침도 두대나 들어있었다고 하였다.

《참, 어려운 행군이였습니다. 여기에 와서 천막들을 주런이 친것을 보니 별천지에 온것 같습니다.》

림춘추는 천막에서 자본지가 언제였던지 이제는 기억이 삭막할 정도라고 하였다.

나는 곧 후방부관을 불러 그들이 충분히 휴식할수 있도록 천막들을 내주고 전체 성원들에게 새 군복을 갈아입히게 하였다. 그러나 최춘국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저녁식사를 하기가 바쁘게 다시 나를 찾아왔다. 한잠 푹 자면서 로독을 풀라고 하였으나 오래간만에 사령관곁에 왔는데 누운들 잠이 오겠는가고 하면서 중일전쟁소식부터 물었다. 여러달동안 류혈행군을 해온 그들은 중일전쟁이 일어난줄도 모르고있다가 퍽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였다는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정세를 설명해주었다.

…9.18사변은 일본이 만주를 강점하는것으로 끝났지만 7.7사변은 그렇게 되지 않을것이다. 지금 중국인민은 일제침략군과 맞서 거국적인 항전을 벌리고있다. 장개석도 더는 항일을 회피할수 없게 되였다. 중국 공산당의 주동적인 발기로 국민당과의 항일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였다. 그에 따라 서북지방의 홍군주력은 주덕을 총사령으로 하여 국민혁명군 8로군으로 개편되였다. 홍군과 국민당군대가 합동하여 장기전을 벌리면 국력과 병력이 제한되여있는 일본은 견디여내기 어려울것이다.

지금 일본군은 위세를 떨치며 파죽지세로 나가고있지만 그들의 일장기에는 벌써부터 멸망의 흉조가 비끼고있다.

중일전쟁에 대처하여 우리는 이미 여러차례에 걸쳐 회의도 하였고 해당한 결정도 채택하였다. 회의방침에 따라 적의 배후에서 맹렬한 교란작전을 벌리며 국내혁명력량을 더욱 확대강화하면서 전민항쟁준비를 갖추는것이 우리의 과업이다. 적배후교란작전에서 우리가 활동하게 될 기본전략지대는 압록강연안일대와 남만지구이다. 중일전쟁의 기본전선이 북지전선인것만큼 일본군이 그곳에 군수물자를 조달하자면 압록강연안과 남만지구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우리는 압록강연안에서 활동하고있는것이다. 동무들도 앞으로 압록강연안이나 남만지구에서 활동하게 될것이다.…

그들은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에 참가하지 못한것을 몹시 아쉽게 여기였다.

최춘국은 북만에 가있는동안 항일련군부대들에 소속되여있는 조선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았는데 그들모두가 백두산을 몹시 그리워하더라고 하였다. 그는 의란현성전투때 최용건도 만나보았다고 하면서 그 정경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최용건은 그때 최춘국을 붙안고 동무가 김사령이 있는곳에서 왔다지, 반갑소, 김사령을 만난것만 같소, 김사령이 나와 김책을 만나려고 북만까지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백두산으로 나갔다는 소식을 들으니 나도 섭섭하오 하면서 눈물을 머금더라는것이였다.

해방후 최용건도 의란현성전투때에 최춘국을 만나던 이야기를 자주 하였다. 그 전투는 최용건이네를 비롯하여 여러 북만부대들과 동만의 부대들이 공동으로 진행한 큰 전투였다. 북만땅 여기저기에서 활동하던 부대들이 200리, 300리 밖에서 말들을 타고와서는 밤사이에 적을 치고 날 밝기전에 번개같이 철수하였다. 밤을 겁내는 적들은 병영주변과 토성 곳곳에 전등을 환하게 켜놓고있었다. 최춘국이 속한 부대전투원들이 총한방에 전등알 한개씩 모조리 깨버렸는데 그때마다 일어나는 총성과 섬광에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응전할 생각도 못하더라는것이였다.

그후 새로 조직된 독립려단은 서간도쪽으로 나오라는 우리의 지시를 받게 되였다. 그 지시가 여간 큰 충격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서간도쪽으로 나오게 된 독립려단동무들이 너무 기뻐 종일 밥을 먹지 않았다면 강건, 박길송처럼 북만에 그냥 남아있게 된 동무들은 또한 너무 락심하여 밥을 먹지 않았다는것이다.

독립려단의 남하행군은 우여곡절로 가득차있었다.

최춘국은 지시를 받은 그날로 여러곳에 흩어져있는 각 부대들에 련락을 띄운 다음 자기가 데리고있던 대원들에게 위만군경찰복을 입혀가지고 대담하게 벌판에 나가 대로행군을 하였다. 여러 전투에서 된매를 맞은 적들이 유격대를 《토벌》하겠다고 산속을 뒤지고있을 때였으므로 벌판은 텅 비여있을것이라는 타산을 했기때문이였다. 일행은 대로행군의 덕으로 단 한번의 전투도 하지 않고 한주일만에 동경성부근까지 가닿을수 있었다.

행군의 첫 시작은 순탄하였으나 그후 여러 부대가 합쳐지고 려단장 방진성이 행군대오를 지휘하게 되면서부터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림춘추, 지병학, 김홍파, 김룡근을 비롯한 여러 행군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려단장인 방진성과 려단당서기인 최춘국이 용병전술상에서 근본적으로 상치되는 견해를 가지고있은것이 문제거리였다.

동경성을 지나서부터 행군대오가 적의 대부대와 자주 조우하게 되자 최춘국은 교전을 피하고 희생을 덜기 위해 려단을 소부대로 분산시켜 제가끔 행군하게 하자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유격전의 요구에 맞는 정당한 주장이였다. 그런데 방진성은 대오를 분산시키면 다시 수습하기 어렵다, 분산되면 려단의 전투력이 약화된다, 려단은 함께 있어야 려단이지 흩어지면 려단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의 제기를 묵살해버리고 한사코 대부대행군을 고집하였다는것이다.

그러다나니 적들과 자주 맞다들게 되고 희생자수도 늘어나 부대의 활동은 이모저모로 제약을 받게 되였다. 그런데 그처럼 험한 고생에 시달리면서도 모든 대원들이 조국진군의 날만은 한사람처럼 절절하게 고대하였다. 중상당한 한 어린 대원은 최춘국의 무릎에서 숨을 거두면서 자기를 꼭 조선땅에 내다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였다고 한다. 당시의 정황에서는 도저히 실행할수 없는 유언이였다.

최춘국은 그의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재 한줌을 종이에 싸서 사무장의 배낭속에 간수하게 하였다. 그 한줌의 유골재라도 조국땅에 내다 묻어주려는것이였다.

그는 전우들의 희생을 덜기 위해 풀밭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는 100여필의 군마들을 감쪽같이 끌어다가 타고가자고 제기하였다.

…우리는 이미 적들에게 로출되였다. 갈라져서 행군했어야 자취를 감출수 있었겠는데 당신이 허락하지 않은탓으로 우리는 화를 면할수 없게 되였고 결국 숱한 전우들까지 잃게 되였다. 지금처럼 행동해서는 더 큰 피해를 당하게 된다. 적들이 우리를 포위하지 못하게 신속히 빠져야 한다. 놈들이 우리를 추격하는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끌려오게 만들어야 한다. 기마행군을 하게 되면 우리는 주동에 서서 놈들을 마음대로 끌고다니다가 족쳐버릴수 있다. 지금처럼 계속 피동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는 부대가 전멸되고만다.…

방진성은 그 제의도 거절해버리였다. 기마행군은 자살행위라는것이였다. 아무리 설복을 해도 요지부동이였다. 최춘국의 제안은 결국 려단당위원회에까지 상정되였다.

당위원회의 모든 성원들은 최춘국의 전술적방안을 지지하였다. 로획한 100여필의 군마에 부상병들과 허약자들을 태우고 부대는 남하행군을 계속하였다. 말을 타지 않은 사람들은 군마에 짐을 얹고 맨몸으로 걸었다. 그런즉 행군속도가 빨라지지 않을수 없었다.

추격하던 적들은 최춘국의 예견대로 까마득히 떨어져 끌려오는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려단은 관지부근에 와서 뒤따르던 적들을 소탕해버렸다. 그후 군마들은 각을 떠서 식량으로 썼다.

부대는 기마행군의 덕으로 한동안 숨을 돌릴수 있었으나 돈화-할바령간 철도연선에 이르러 또다시 난관에 봉착하였다. 철도연선이 온통 적군으로 뒤덮여있었던것이다.

려단장은 뒤로 물러서는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하면서 퇴각을 주장하였다.

최춘국은 압록강을 향하여 한걸음이라도 앞으로 나가야지 뒤로 물러서서야 되겠는가, 퇴로에서 적을 만나면 더욱 위험하다, 놈들은 분명 우리의 뒤로 증원부대를 파했을것이라고 하면서 그 의견을 반대하였다. 그러자 려단장은 이런 정황에서 어떻게 전진하느냐고 하면서 성을 벌컥 냈다.

그들이 론쟁을 한창 하고있을 때 근처의 도로로는 위만군의 한개 부대가 행군해가고있었다. 최춘국은 그 행군종대들을 보자 위만군의 뒤를 따라가는것이 상책이라고 하였다.

려단장은 대뜸 눈이 둥그래져서 적을 따라가다니 그건 무슨 소린가고 하였다.

최춘국은 설명하였다.

…저 위만군놈들은 지금 포를 끌어가느라고 주변을 살필 경황이 없다. 설사 뒤따르는 우리를 본다 해도 제편인줄 알지 대낮에 유격대가 버젓이 자기들을 따라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할것이다. 그러니 적의 뒤를 따라가다가 철도연선지대를 통과한 다음 슬그머니 산속으로 들어가자.…

려단장도 그 주장만은 반대하지 못하였다.

최춘국의 제안을 따른 덕에 려단은 철길계선을 별고없이 통과할수 있었다. 하지만 적의 대소《토벌》부대들과의 조우와 교전은 그후에도 계속되였다. 표하부근에서는 500여명의 적들과 맞다들어 련 이틀간이나 혈전을 벌리기도 하였다. 그 전투에서 적지 않은 대원들이 배낭을 잃었는데 자기를 조국땅에 묻어달라던 어린 대원의 유골재를 건사한 사무장의 배낭도 거기서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최춘국은 시시각각으로 조여드는 적들의 포위속에서 려단을 구원해낼수 있는 유일한 출로는 소부대분산행군밖에 없다는것을 다시금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려단장 방진성은 이번에도 그렇게 하면 한두개 중대는 살아날지 모르나 려단은 전멸된다, 저만 살겠다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자는가, 살려면 다같이 살고 죽으려면 다같이 죽어야 한다고 우기였다.

려단당위원회는 다시금 두사람의 주장을 진지하게 토의하였다.

려단장의 우유부단한 행동에 분노한 최춘국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불같은 말을 연방 내뿜었다.

…여기 이자리에 자기만 살겠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우리는 누구나 죽는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목적지까지 가닿기전에 헛되이 죽을수는 없다. 그토록 조국땅에 가고싶어하는 사람들을 중도에서 다 잃는다면 우리 지휘관들은 그 죄를 무엇으로 씻을수 있겠는가? 한두 지휘관의 우둔한 처사때문에 대원들을 죽이고 우리자신도 죽고나면 항일대전은 누가 하며 혁명은 누가 하겠는가. 려단력량을 보존해가지고 서간도까지 나가려면 분산행군으로 넘어가는수밖에 없다.…

회의에 참가한 거의 모든 지휘관들은 대부대행군만을 한사코 고집해온 려단장을 모험주의자로 규탄하고 비판하였다. 몇몇 사람들은 동지애의 외피를 쓴 비겁분자라는 락인까지 찍었다고 한다. 사실상 방진성이 후날 적에게 귀순한것을 보면 비겁분자라는 락인이 무근거한것은 아니였던것 같다. 물론 방진성은 스스로 찾아가 귀순한것이 아니라 적에게 체포된후 위협공갈과 회유기만에 굴복하여 귀순하였다. 그렇지만 그 과정은 어찌되였든 투항과 변절의 싹은 그의 일상생활에서 종종 나타나군하던 신념과 의지의 박약과 비겁성에서 오래전부터 움텄을것이라고 생각한다. 방진성은 려단이 분산되여 전투력있는 구분대들과 유능한 지휘관들이 곁에서 떠나게 되면 자기의 신변이 위태로와질것을 생각하여 겁을 먹고있었던것이 분명하였다.

려단당위원회 표하회의가 있은 다음부터 독립려단은 비로소 분산행군으로 넘어가 적의 봉쇄를 돌파할수 있었다.

그런데 방진성은 동지들의 충고를 종시 삭이지 못하였다. 그는 최춘국을 몹시 고깝게 생각하였다.

방진성은 정규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구동북군 장교출신인데다 직급상에 있어서도 려단의 지휘권을 가진 사람이였다. 그와 대조적으로 최춘국은 소학교정도의 교육조차 받아본적없는 최하층출신이였다. 그는 유격대에 입대한 다음에야 글을 배우고 군사를 배우면서 성장한 지휘관이였다. 하지만 인재나 인물의 우렬이 결코 학력에만 있지 않다는것을 방진성은 몰랐다. 방진성이 스스로 자기를 회개하게 된것은 며칠후에 있은 송화강도하전투때였다고 한다. 분산행군을 하던 려단은 그때 이미 대오를 다시 집결하여 대부대로 행군하고있었다. 대렬은 석양이 비끼였을 때 나루훈부근의 송화강에 당도하였다. 장마비로 엄청나게 불어난 송화강은 바다같이 넓어진데다 물결까지 사나왔다. 적들이 나타나기전에 빨리 강을 건너야 하겠는데 도강기재는 대여섯명이 겨우 탈수 있는 매생이 하나뿐이였다. 그것으로 도강을 하다나니 적지 않은 인원들은 날이 샐녘까지도 강을 건느지 못하였다. 도하한 대원들이나 도하하지 못한 대원들이나 다같이 가슴을 조이며 느리게 움직이는 매생이와 밝아오는 하늘을 불안스럽게 바라보고있었다.

이런 때에 적들이 나타났다. 최춘국은 10여명의 날파람있는 대원들을 데리고 맞받아나가며 자기가 적들을 유인해갈테니 어서 강을 건너 류수하자부근의 숲속에 들어가있어달라고 하였다. 그가 적들을 유인해간 덕으로 나루터에 남은 사람들은 강을 무사히 건늘수 있었다. 려단은 류수하자부근에 당도하여 며칠동안 최춘국이네 결사대원들을 기다리였다. 최춘국은 나흘만에야 결사대전원을 데리고 나타났다. 어떻게 구했는지 식량까지 한짐씩 지고왔다.

방진성은 그때에야 비로소 최춘국의 어깨를 붙잡고 사죄하였다.

독립려단의 북만지구에서의 활동과 남하행군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무엇보다 기뻤던것은 그 려단의 전체 성원들이 우리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자기의 임무를 잘 수행하였다는것과 그들이 우리곁을 떠날 때보다 무척 성장하였다는것이였다.

그 본보기가 바로 최춘국이였다. 물론 그는 우리곁에 있을 때에도 유격전술에 능한 군사지휘관이였고 나무랄데없는 정치일군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독립려단의 북만에서의 활동과 남하행군과정에 그의 군사적재능과 지휘능력은 원숙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어릴적부터 남의 집 머슴을 살았고 철도공사장에서 잔뼈가 굵어진 최춘국은 유격대에 들어온후 눈썰미가 빨라서 사격동작과 제식동작 같은것도 인차 터득하였다. 그의 품성과 능력에서 좋은 인상을 받은 나는 그를 중대정치지도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때 최춘국은 울상이 되여 아직 여러모로 준비가 부족한 자기가 어떻게 남들을 가르치는 정치지도원을 할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자신있는 일은 그저 왜놈과 그 앞잡이들을 족치는 일뿐이니 평대원으로 남아있게 해달라고 사정하였다.

나는 그에게 나라를 사랑하고 일제를 증오하는 동무의 그 마음을 대원들의 가슴에 심어주라, 그러면 정치지도원으로서 자기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는것으로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첩 하나를 주면서 그 첫페지에 《땅에다 글을 쓰면서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라고 써주었다.

그후부터 최춘국은 학습과 훈련에서 남다른 열성을 보이였다. 그는 우리 글을 배우면서 동시에 한문까지 자습하였다.

그가 성급히 한문까지 넘보게 된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어느날 최춘국은 이정화령이란 말의 뜻을 몰라 나를 찾아왔다. 내가 뜻과 음을 풀어가며 이정화령이 무엇인가를 설명해주자 그는 《거참 한문이라는게 신기합니다. 서당공부를 못한게 후회됩니다.》하고 중얼거리였다.

최춘국은 배낭속에 늘 옥편을 넣어가지고 다니였다.

소왕청방위전투가 90일이상 걸린 전투였고 또 그 싸움이 아주 간고한 싸움이였다는것은 앞에서도 서술하였다. 그런데 최춘국은 그 90일사이에도 한문공부를 중단하지 않았다.

한번은 내가 최춘국이네 중대의 주둔지인 셋째섬에 찾아가서 그에게 정치지도원은 춤도 출줄 알고 노래도 잘 불러야 중대를 생기발랄하고 락천적인 중대로 꾸려나갈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다음부터 최춘국은 밤마다 밖에 나가 남몰래 춤련습을 하였다. 그가 얼마나 련습에 열중했던지 어느날 어뜩새벽에 그 광경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 중대작식대원 고현숙이 중대장에게 달려와 겁에 질린 소리로 정치지도원동지가 정신이 이상한것 같다고 귀띔하였다. 중대장은 그 바람에 허리가 부러지게 웃었다. 이것은 후날 셋째섬의 유명한 일화로 되였다.

최춘국이 그처럼 성실하고 직심스러운 사람이였기때문에 나는 사실 동만유격구에서 싸울 때에도 어려운 임무가 제기되면 그것을 늘 그의 중대에 맡기군하였다.

5,000여명의 적과 무려 90여일간에 걸친 치렬한 싸움을 하던 마촌작전 당시에도 최춘국이네 2중대가 기둥중대였다. 내가 적의 배후를 치기 위해 근거지를 떠나는 경우에는 반드시 최춘국에게 근거지방어임무를 맡기였으며 그러면 그는 어김없이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다.

그러한 믿음으로 하여 자연히 내가 없는 빈자리에는 최춘국을 남겨두게 되고 내가 미처 갈수 없는 중요한 지점들에는 그를 보내게 되는것이 어느덧 하나의 상례로 되였다. 나와 최춘국이 인간적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면서도 늘 멀리 떨어져서 생활하게 된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나는 최춘국의 성장한 모습을 보면서 항일대전의 풍운속에서 뛰여난 군사적재능을 발휘하고있는 여러 전우들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최현, 안길, 김책, 최용건, 리학만, 허형식, 강건…

적들이 현상금을 걸고있는 항일의 명장들가운데는 황포군관학교 교원까지 한 최용건을 내놓고는 정규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군사교육은 커녕 몇년전까지만 하여도 군인으로 되리라고 생각조차 해본적이 없는 사람들이였다. 그러한 사람들이 얼마나 재능있는 군사지휘관으로, 능숙한 정치일군들로 자라났는가!

나는 초연에 그슬린 최춘국의 미더운 모습을 보며 생각하였다.

(이미 우리에게는 능히 하나의 전략적지대를 맡길수 있는 믿음직한 인재들이 충분히 마련되여있다. 앞으로 때가 오면 이들에게 부대를 맡겨 동무는 함경북도로 가라, 동무는 랑림산줄기로 나가라, 동무는 태백산쪽으로 뻗어나가라는 식으로 조국해방작전을 위한 임무를 줄수 있을것이다. 국내각지로 나간 부대들에 호응하여 곳곳의 생산유격대들과 인민들이 들고 일어난다면 일제는 패망하고 우리는 종국적승리를 이룩할수 있을것이다.)

독립려단이 도착한 그날밤 나는 왕청시절에 셋째섬의 2중대에 나갔을 때처럼 오래간만에 최춘국과 함께 천막안에 누웠다. 감회깊은 잠자리였다. 우리는 밤이 지새는줄도 모르고 회포를 나누었다. 그날밤 최춘국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백두산쪽으로 간다는 생각만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마 중도에서 모두 쓰러졌을겁니다. 기어이 살아서 조국땅을 밟아야겠다고 생각하니 죽을 고비에 들어섰을 때에도 살아날 구멍수가 보이고 지쳐 쓰러졌다가도 일어날 기운이 생기더군요. 왕청에서 싸울 때 고향 온성땅을 몇번 밟아보고는 이 몇해어간에 조국땅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조국의 흙냄새를 맡아보고싶습니다.》

나는 그 말에 가슴이 저려 그의 손을 꽉 그러잡으며 그렇게 조국을 그리워하는 동무에게 조국땅을 인차 밟아볼 기회를 주지 못할것 같다고 말하였다. 결국 나는 하루나 이틀이 지나서 해주자던 이야기를 그 밤으로 하지 않을수 없었다.

당시 동만과 남만에서 활동하던 항일련군 부대들에서는 군정간부의 부족때문에 애를 먹고있었다. 적의 《토벌》로 인하여 남만부대가 당한 손실은 파국적인것이였다. 적들이 《남만의 공비는 완전히 숙청되고 치안은 확보되였다.》고 떠들만치 1군의 유격투쟁은 난관을 겪고있었다.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전략적으로 더더욱 중요해진 남만에서 유격투쟁을 확대강화하려면 우선 유능한 군사정치일군들을 보강해야만 하였다. 더구나 남만부대에서는 조국안사장의 희생으로 하여 지휘관들에 대한 경위사업을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하는것이 당면한 현안문제로 나서고있었다. 군이나 사단의 친위대, 핵심부대로 되여야 할 경위부대에는 두말할것도 없이 가장 유능한 군정간부들과 단련된 전투원들을 두어야 한다는것이 지휘관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위증민은 그러한 실정을 고려하여 이미 봄부터 최춘국이네 려단이 오게 되면 고스란히 자기네한테 넘겨달라고 요구해왔다.

남만부대의 어려운 형편도 잘 알고 남만유격투쟁의 전략적의의도 잘 알며 위증민의 고충과 심정도 잘 아는 나로서는 그 간절한 청을 마다할수 없었다.

내가 소망을 풀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자 최춘국은 오히려 나를 위로하면서 혁명의 요구라면 또 떠나야지요, 그렇지만 너무 상심마십시오, 곁에 와있을 날도 있을게고 조국땅을 밟을 날도 이제 있게 되겠지요라고 말하는것이였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소. 사실 왕청때부터 같이 지내던 동무들만이라도 내곁에 두고싶지만 로위(위증민)가 그런 사람들을 더 욕심내고 있소.》

독립려단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위증민은 이튿날로 나를 찾아와 의미심장하게 말하였다.

《독립려단동무들의 말을 듣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대의 흥망은 역시 지휘관에게 달려있습니다. 지휘관이 떨떨하면 부대가 망합니다. 방진성은 려단장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경위련대를 맡기려고 했는데 그 계획을 철회해야 할것 같습니다. 쏘련에서는 공민전쟁때 짜리군대출신장교들의 덕을 많이 보았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런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경위련대를 통솔할만한 군정간부 하나도 구하기 힘들게 되였으니 정말 답답합니다.》

그 푸념에는 역시 우리 조선사람들가운데서 련대장감과 련대정치위원감을 내달라는 속마음이 깔려있었다.

그날 진행한 독립려단의 행군총화에서는 려단행군을 령활하게 지휘해온 최춘국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 행군에서 모범을 보인 전투원들을 표창하였다. 반면에 방진성과 그를 추종한 지휘관들은 응당한 비판을 받았다. 나는 모임을 결속할 때 우리가 수적으로 우세한 적과 싸우는데서 유격전술을 용의주도하게 활용하는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데 대하여 강조하였다.

…우리가 유격전을 하지 않고 정규전을 한다면 그것은 제비가 하늘을 날아다니지 않고 땅을 밟고다니며 먹이사냥을 하는것과 같은 어리석은짓이다. 옛 병법에도 싸울것인가 싸우지 말아야 할것인가를 아는자가 승리자로 된다고 했고 적이 이길수 없도록 만들어놓고 적을 이길수 있는 기회를 노리는자가 싸움을 잘하는자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디에 가서 어떤 적과 맞다들든 령활한 유격전술로 이길수 있는 싸움을 하여야 한다.…

그날의 행군총화에는 위증민을 비롯한 중국인 지휘관들과 대원들도 참가하였기때문에 나는 연설을 조선말로도 하고 중국말로도 하였다.

행군총화가 있은뒤 우리는 경위련대를 하나 새로 편성하였다. 련대장으로는 우리 부대의 경위중대장이던 리동학을 임명하고 정치위원으로는 최춘국을 임명하였다. 림춘추도 위증민의 곁에 가서 그의 병치료를 도와주게 하였다. 독립려단에 소속되여있던 다른 사람들도 다 보내주었다. 결국 위증민은 소원대로 가장 유능하고 우수한 조선인군정간부들과 끌끌한 전투원들로 무어진 경위련대를 가지게 되였다.

위증민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으나 경위련대에 넘어간 사람들중에는 우리곁에 있으려던 소원을 성취하지 못해 섭섭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지어 림춘추까지도 국내에 들어간 정치공작조에 자기를 파견해줄것을 간청하였다.

며칠후 새로 편성된 경위련대는 위증민과 함께 남만의 휘남지구를 향해 떠나갔다. 출발전야에 최춘국은 작별차로 나를 찾아왔다. 추석이 갓 지난 때의 달밤이였다. 우리는 사령부천막옆의 풀밭에 앉아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동무는 북만의 신들메도 풀어볼 사이없이 또 남만으로 떠나게 됐구만.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자꾸 멀리로 보내군해서 안됐소.》

《원, 무슨 말씀입니까. 저를 그만큼 믿어주시니 힘이 생길뿐입니다.》

《휘남은 적들의 경계가 삼엄한 고장이라는데 아무쪼록 몸을 조심하오. 온성에서 도선장파출소를 칠 때처럼 모험을 하거나 덤비지는 말아야겠소.》

온성의 도선장파출소습격사건이란 1935년초 최춘국이 중대원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가서 장덕나루를 들이친 전투를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오래전부터 구상하고있던 국내진공작전을 위해 시범적으로 진행한 전투였다.

도선장에 자리잡고있는 파출소는 두만강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단속통제하는것을 기본업무로 삼고있었는데 거기에 틀고 앉아있는 경관놈들이 어찌나 못되게 구는지 온성쪽에서 도선장을 거쳐 원군물자를 날라오는 지하조직성원들이 번번이 진땀을 뽑거나 통제물자를 압수당하군하였다. 온성의 지하혁명조직에서는 도선장파출소놈들을 되게 혼내줬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기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최춘국의 중대에 그곳 도선장파출소를 습격할데 대한 전투임무를 주었다.

어뜩새벽에 전투원들과 함께 얼어붙은 두만강을 은밀히 건너간 최춘국은 대원들을 파출소주변에 배치해놓고 혼자서 파출소안에 들어갔다. 경관 한명이 당번을 서고있는 정황이여서 싸움은 총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서도 쉽게 치를수 있었다. 그런데 그 경관이 난로불을 제때에 피우지 않았다고 심부름군소년에게 발길질을 하는 바람에 최춘국은 그만 자제력을 잃고 그를 쏴갈기였다. 그통에 도강등록을 하려고 파출소앞마당에 모여있던 인민들앞에서 선동연설 한마디 못한채 총총히 돌아오고말았다.

경관 한놈을 쏴눕힌 크지 않은 전투였으나 그 전투가 일으킨 파문은 아주 컸다. 유격대가 불과 몇명의 전투원들로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국경초소를 치는 판이니 이제 무슨 큰 사변이 일어날지 모른다는것이였다. 그것은 그후 활발히 전개된 압록강, 두만강 대안의 적들에 대한 소탕작전의 신호로 되였다.

《그땐 제가 설익었댔지요. 덤벼치지 않고 좀더 신중했더라면 인민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선동연설을 하는건데… 그만 덤비는통에 기본목적을 놓쳤단 말입니다.》

최춘국은 그때 정치사업을 하지 못한것을 분하게 여겼다.

《대담하게 행동하는것은 좋으나 지휘관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용의주도해야 하오. 이제는 련대의 운명만이 아니라 군사령부의 운명까지 맡아안고있는데 매사에 신중해야겠소. 쓸데없는 모험은 금물이라는것을 명심하시오. 동무는 조국광복의 대업을 위해서도 반드시 살아서 우리곁에 돌아와야 하오. 조국해방작전을 할 때는 무조건 동무들을 데려오겠소. 보천보전투에 참가시키지 못한 빚을 그때 몇배로 갚지.》

그 말이 효력을 냈던지 최춘국은 북만에 파견되던 때와는 달리 기쁜 낯으로 내곁을 떠났다. 그는 남만에 가서도 우리와의 밀접한 련계밑에 맡겨진 혁명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다. 나는 최춘국을 남만으로 보낼 때 환인, 즙안, 통화를 중심으로 압록강연안일대에서 활동하는 독립군들에 대한 포섭공작을 하라는 과업을 주었는데 그는 그 과업을 실행하는데서도 좋은 실적을 올리였다. 위증민은 나에게 통신을 보내올적마다 경위련대의 활약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고 통보해주군하였다. 그가 통신원을 통해 보내온 소식들가운데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최춘국이 편지 한장으로 수백명의 위만군을 쥐락펴락하였다는 이야기다.

련대를 이끌고 적들의 한 군사요충지근처를 지나가다가 정찰을 통하여 그곳에 수백명의 위만군과 위만군경찰만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춘국은 위만군부대장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보냈다.

…우리는 중국사람들을 원쑤로 생각지도 않고 또 원쑤로 만들고싶지도 않다. 당신들과 싸울 생각이 없으니 당신들도 우리를 건드리지 말라. 우리에게는 지금 휴식이 필요하다. 푸르허에 들려 당신네 토성안에서 잠간 쉬다가 가려고 하는데 방해하지 말것을 경고하는바이다.…

이것은 유격대와는 될수록 총질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위만군의 정신상태를 충분히 가늠하고 써보낸 편지였다.

위만군측에서는 련락병을 보내여 혁명군의 요구를 다 들어줄테니 30분간만 기다려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혁명군이 30분을 기다리는 사이 위만군부대는 성시를 비우고 뒤산으로 피하였다. 저들이 성안에 있으면서 유격대를 들여놓았다가는 후날 일본군의 추궁을 면할 구실이 없겠기때문이였다.

최춘국의 련대는 성안에 들어가 휴식도 하고 인민들에게 정치사업도 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뒤산에 오른 위만군들은 초조해하며 연방 휘파람을 불어댔다. 일본군이 나타날가봐 불안스럽기는 한데 유격대를 보고 감히 떠나가라는 말을 할수 없으니 자기네의 딱하고 초조한 심정을 알아달라는 신호였다.

최춘국은 부대에 출발명령을 내리고 위만군부대장에게 짤막한 인사쪽지를 남기였다.

…잘 쉬고가게 해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우리를 벗으로 알고 도와주기를 바란다. 조중인민들의 공동의 원쑤 일본제국주의는 반드시 패망하고 조중인민은 반드시 승리하게 될것이다.…

최춘국은 그런 수법으로 수많은 위만군들을 쥐락펴락하면서 그들을 반일에로 돌려세웠다. 놀라운것은 위만군부대장들에게 보낸 그런 중문편지들의 대부분을 그가 직접 썼다는 사실이다.

그는 1930년대 후반기의 첫시작부터 마감까지 줄창 남북만광야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항일련군의 중국인유격부대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래서 중국의 인민들과 혁명동지들로부터 국제주의전사로 떠받들리웠다. 중국의 벗들은 가는곳마다에서 깊은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와 조중친선을 위해 바친 그의 공적을 찬양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최춘국으로 하여금 온 남북만이 다 아는 당대의 이름난 항일맹장으로 되게 하였는가?

항일혁명시절의 순간순간은 보통때의 하루나 한달, 지어는 10년과 맞먹을 정도로 사람들을 몰라보게 변모시켜주었다. 떡쇠가 불속에서 강쇠로 단련되듯이 지난날의 까막눈들과 벌거숭이들, 천덕꾸러기들이 혁명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속에서 투사로, 영웅으로, 선각자로 자라나 사회를 개조하고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는 주인공으로 되였다.

최춘국은 바로 이 혁명에 온 넋과 육신을 다 바친 사람이며 투쟁을 통하여 자기자신을 부단히 단련시켜온 사람이다.

여기에 최춘국의 인간미를 보여주는 한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8.15해방후 최춘국이 결혼을 하고 갓 살림을 시작했을 때 그 집을 방문했던 림춘추가 부인에게 롱담삼아 남편이 마음에 드는가고 물은적이 있었다. 부인은 수집게 웃으면서 자기 남편이 정말 유격투쟁을 했는가고 되물었다. 그런 다음 며칠전 최춘국이네 부대 운동회날에 있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날은 군무자가족들도 초청을 받고 운동회구경을 나갔다. 최춘국의 안해도 역시 명절옷차림으로 운동회구경을 하였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최춘국은 몹시 언짢은 기색으로 안해에게 물었다.

《당신은 옷이 그렇게도 없소? 온 부대가 모인곳에 하필 베옷을 입고 나오다니…》

안해는 《베옷》이라는 말에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모시옷을 천한 베옷으로 보았으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그건 베옷이 아니라 모시옷이라는거예요. 여름철옷으로는 그보다 더 좋은 옷이 없답니다.》

《그렇소?!》

최춘국은 얼굴을 붉히며 당황해하였다. 그리고는 안해에게 잘못을 사죄하였다.

최춘국의 안해는 그날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렇게 어질디어진 사람이 무슨 담을 가지고 왜놈들과 싸웠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림춘추는 그 이야기를 듣고나서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였다. 그리고는 정색해서 말했다.

《부인이 남편을 옳게 보았습니다. 최춘국동무는 정말 마음이 어질고 순진한 사람입니다. 온성의 도선장파출소습격전투때 순사놈한테서 얻어맞고 코피를 흘리는 심부름군아이의 코피를 씻어주지 못하고 온것을 몇해동안이나 두고두고 가슴아파하며 괴로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남편은 또한 무한정 강한 사람입니다. 그의 왼쪽다리를 잘 살펴보면 상처자리가 있을것입니다. 탄알에 다리뼈가 부서진걸 내가 마취제도 없이 수술하고 봉합을 했는데 그는 신음소리 한마디 내지 않고 무서운 아픔을 참아냈습니다. 인민들과 동지들 앞에서는 순한 양같고 적들앞에서는 호랑이 같고 난관앞에서는 강철같은 사람이 바로 부인의 남편입니다. 앞으로 오래 살아가느라면 얼마나 강한 사람인가 하는것도 알게 될것입니다.》

림춘추의 말과는 달리 앞날이 구만리 같을것 같던 그들의 부부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이 발발한 때로부터 한달 남짓하게 지난 때인 1950년 7월 30일 제12보병사단을 이끌고 안동해방전투를 지휘하던 사단장 최춘국은 안동시가를 지척에 둔곳에서 그만 중상을 당하였다. 참모장 지병학이 최춘국의 곁으로 달려갔을 때 그는 길옆에 세워놓은 승용차안에 누워있었다. 운명이 이미 경각에 다달은 때였다. 지병학의 거듭되는 부름에 가까스로 눈을 뜬 최춘국은 군의에게 자기 생명을 5분만 더 연장시켜달라고 간청하였다. 그 최후의 5분동안에 사단장은 모지름을 써가며 안동의 적을 완전히 포위섬멸할 자기의 작전적의도를 참모장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내 대신 동무가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을 끝까지 완수해줄것을 부탁하오.》

이것이 지병학의 손을 잡고 최춘국이 운명하면서 남긴 유언이였다.

최춘국이 전사했다는 비보에 접한 그날 내 눈앞에는 왼쪽다리를 약간 절면서 걸어다니던 그의 모습이 너무도 선명하게 어려와서 그가 전사하였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그의 왼쪽다리는 항일전장에서 뼈가 부서진탓으로 조금 짧아졌다. 하지만 그는 그 불편한 다리로 수만리길을 걸어다니였다. 해방직후에는 보안간부훈련소 분소장의 중책을 맡고 훈련생들이 도하훈련을 하면 그들과 함께 도하훈련도 하고 산악훈련을 하면 험한 벼랑도 함께 타고 넘으면서 나라의 군사력강화에 헌신하였다.

애젊은 시절에 최춘국이 문턱넘듯 넘나들며 적들을 벌벌 떨게 하던 두만강변의 그의 고향 온성거리에 지금은 그의 동상이 군복을 입은 항일혁명시절의 모습그대로 서있다.

동상제작자들은 최춘국의 모습과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려고 그의 부인을 찾아갔다.

《최춘국동지에 대한 추억가운데서 제일 인상적인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부인에게 던진 첫 질문은 이런것이였다.

《특별히 인상적이라고 할게 별로 없습니다. 있다면 말수더구가 적은것이라고나 할가요. 결혼생활 몇해동안에 그이가 한 말을 모두 합친대야 아마 백마디도 안될테니까요. 차라리 성미가 우락부락해서 내 뺨이라도 한대 때렸으면 추억에라도 남을텐데…》

최춘국의 안해는 추억에 남을만한 부부생활의 세부가 없는데 대하여 사뭇 아쉬워하였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뜻있는 말을 하였다.

《우리 둘째를 한번 만나보시우. 그 애가 신통히 아버지모상을 닮았습니다. 양순하지요. 더 잘 닮자면 억센 맛도 있어야겠는데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꼭 그렇게 키우자고 합니다.》

결혼초기와는 달리 부인은 자기 남편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를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그렇다. 끝없이 유하고 끝없이 억센 사람, 이것이 항일의 용장 최춘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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