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단결의 시위

 

조직이 꾸려지고 늘어나는데 따라 우리는 실천투쟁에 들어갔다.

그 서막으로 된것이 1928년 여름에 있은 길림육문중학교 동맹휴학이였다.

그때까지 육문중학교에서는 식당과 재정관리, 도서관운영에 이르기까지 학교관리운영에서 제기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진보적인 교원들과 학생들의 민주주의적의사에 따라 순조롭게 풀어나가고있었다. 교내에서의 우리의 활동도 큰 구속을 받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진행되였다. 이것은 육문중학교 학생들이 학교교무위원회와의 협동밑에 투쟁을 통하여 쟁취한 열매였다.

그런데 군벌들의 조종을 받고있던 반동교원들은 교직원, 학생들의 공동의 노력에 의하여 정착된 이 민주주의적질서를 조금도 달가와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이 질서를 파괴하고 학교운영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자기들의 의사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하였다.

교육청이 파견한 육문중학교 교원들가운데는 후각이 예민한 군벌의 앞잡이들이 있었다. 교무주임, 훈육주임, 체육주임과 같은 반동교원들은 모두 적의 특무기관에 매수된자들이였다. 그들은 군벌정권을 추종하는 지주, 관료출신의 보수적인 학생들과 불량청년들을 내세워 학생들의 사상동향과 혁명조직들의 움직임을 무시로 내탐하였다.

1928년 여름에 우리는 교내에서 일제의 강도적인 제2차 산동출병과 제남에서의 학살만행을 규탄하는 대중적인 항의운동을 매일과 같이 벌리였다.

산동출병은 다나까의 대중국외교의 시금석으로 불리우고있는 주요한 사건이다.

일본이 산동지방에 처음으로 출병한것은 1927년 5월 다나까 기이찌내각이 성립된 직후였다. 그때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은 장작림의 봉천군을 추격하여 산동반도일대에 진출하고있었다. 다나까내각은 북벌군의 진격으로부터 자기들의 손때를 묻혀가며 길들인 장작림군벌을 옹호하기 위하여 일본인의 생명,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밑에 려순주둔군 2,000명을 청도에 파견하였으며 그후 다시 본토에서 2,000명의 증원군을 뽑아 산동지방에 파병하였다.

1차 출병으로 북벌이 정지되고 장개석이 산동지방 일본거류민들의 생명재산의 안전을 담보했기때문에 일본군은 그해 가을에 산동에서 철병하였다.

그러나 1928년 봄에 북벌혁명이 재개되자 파쑈적인 다나까내각은 2차로 출병을 결정하고 천진주둔군과 본토의 구마모도사단 5,000명을 동원하여 산동반도의 철도연선들을 차지하고 청도와 제남을 점령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장개석의 국민혁명군도 제남에 입성하였다. 두 나라 군대사이에는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일본점령군은 제남에서 수많은 중국인들을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국민당정부의 외교관도 일본군에 의하여 살해되였다.

3차에 걸치는 일제의 파렴치한 산동출병은 조중인민들속에서 배일감정을 폭발적으로 야기시키였다.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