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희기자가 다시 쓰는 평양일기

 

2008. 10. 23 《통일뉴스》

 

항일유격대체취 남아있는 백두산밀영

 

1년중 한달도 채 되지 않는다는 맑은 날씨를 만나 천지를 볼수 있었다.

천지는 쉽게 그 쪽빛을 보이지 않는다는데 어린아이의 해맑음처럼 푸른 하늘아래 푸른빛모두를 다 드러내고있었다.

스무번 넘게 백두산에 왔다는 북측안내원들조차 《내가 천지에 온중 가장 날씨가 좋다.》며 《착한분들만 오셨나보다.》고 한다. 참관단들은 서로 《3대가 덕을 쌓은 모양》이라며 서로에게 축하를 건넨다. 생전에 좋은 일을 한것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날씨가 좋아 미안하기까지 하다고 하는이도 있다.

백두산천지를 직접 본 나는 그 크기에 놀랐다. 천지를 사진으로만 봤지 얼마나 큰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기에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크기에 당황했다.

가만히 선채로 고개를 돌려 오른쪽부터 왼쪽까지 돌려도 다 들어오는것이 아니라 몸을 180°는 돌려야 볼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지 않는 한 그 거대한 웅장함을 카메라로 도저히 다 찍을수 없어보인다. 그저 이 황홀경을 눈으로 찍어낼수밖에.

《안양군포의왕청년쎈터》의 유승현사무국장은 백두산천지를 보고 《이건 산이 아니야. 너무 좋다. 너무 좋아 표현을 못하겠어.》 했다. 그래도 한마디로 표현을 해달라고 조르자 《심장같다.》고 한다.

《엉? 웬 심장?》

황당하다는 나의 표정에 《간보다는 낫잖아요!》 한다.

분명 간이니 심장이니 하는것보다는 생명과도 비길수 있는 벅찬 감동이라는것을 표현하고싶었을것이다.

《원숭이엉덩이는 빨개, 빨간것은 사과…》로 시작해서 높으면 백두산으로 끝나는 노래는 우리가 어려서 가장 처음 배우는 노래가 아닐가?

꼭 처음 배우는 노래가 아니라도 인식이 형성되기 전 배운 노래다보니 무의식적으로도 백두산은 우리 가슴속에 정말 높은 우리의 산이다.

또 《보안법》이 《막걸리보안법》이라고 불리던 엄혹했던 시절 화가 신학철씨는 자신이 그린 《모내기》가 《북녘의 농촌을 미화했다.》는 리유로 《보안법》위반혐의로 기소돼 《대법원》의 유죄확정판결을 받은바 있다. 신씨는 고향마을을 그린것이라며 그림의 일부와 거의 비슷한 고향마을사진까지 제시했으나 《보안법》은 그를 외면했다. .

이처럼 북녘사람, 마을 등 어느것을 마음속으로 그려도 《보안법》이 눈을 치켜뜨고있으나 웬일인지 백두산은 우리 땅이라며 아무리 그리고그려도 용납이 됐다. 그만큼 백두산은 북녘의 혁명의 성산일뿐아니라 남녘에도 민족의 성산인것이다.

기온은 령하 7℃나 된다지만 구름 한점없이 날씨가 워낙 좋은탓에 일행은 천지에서 한시간여나 머물렀다. 이전에 왔던 백두산참관단들은 기온이 령하 10℃까지 떨어지고 비바람까지 몰아치는통에 채 10분도 머물지 못했다는데 이에 비하면 우리 일행은 정말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수 없다.

특히 북녘주민들에게도 백두산에 가는것은 굉장히 영예로운 일이라고 한다.

대학생이 되면 모든 학생들이 력사적인 현장이기때문에 단체로 답사를 가지만 중고등학생의 경우 아주 소수 학생들만 뽑혀서 이곳에 올수 있다고 하니 이처럼 쉽게 백두산에 오르고 천지를 보는것이 보통 운은 아니다.

대니얼 고든감독의 다큐영화 《어떤 나라》에도 보면 집단체조를 하던 두 녀학생이 백두산답사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오랜 기차려행에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꿈에 그리던 백두산을 오르는 기쁨이 아주 잘 표현돼있다.

《그냥 이곳에 살고싶다.》는이들도 있었지만 다음 일정이 있기에 일행은 아쉬움을 품은채 천지를 뒤로 할수밖에 없었다.

 

만병초이야기

 

천지에서 내려와 다음 사적지로 가는 도중 점심시간이 되자 평평한 평지에서 도시락을 펼쳐놓고 먹는다. 백두산에서의 도시락이란 얼마나 랑만적인 식사인가.

샌드위치, 밥, 닭알, 고기반찬 등으로 구성된 도시락은 소박하지만 따뜻한 느낌이 났고 풀밭에서 백두산봉우리를 배경으로 하고 식사를 한 일은 아주 오래동안 잊지 못할 기억일게다.

식사를 마치고난 뒤 누군가가 주변의 풀들이 만병초라고 한다. 만가지병에 다 효험이 있어서 만병초라고 하는데 백두산에는 이와 관련한 전설이 있다.

평양이라는 이름이 생기기도 전 아득한 옛날 모란봉기슭 화목동마을에 몹쓸 병이 휩쓸었다. 괴이하게도 환자마다 서로 다른 병을 앓아 마을사람들을 괴롭히는 가운데 건강한 사람이라고는 마을이름과 같은 《화목》이라는 총각 하나뿐이였다.

화목이는 부모님을 다 잃고 갈 곳없이 쓰러진 아이였으나 가난하지만 온갖 정성을 다하는 이 마을사람들의 정성으로 살아났고 이곳에 정착을 하게 된것이다. 그는 은혜를 평생 잊지 않기 위해 이름도 그저 셋째라고 불리던것을 화목이라고 고친것이다.

때문에 온 마을이 불행에 빠진것을 두고만 볼수 없어 죽는 한이 있어도 약초를 구하겠다고 다짐하고 한달이 넘도록 약을 구하러 헤매군 했다.

그러다가 또 쓰러진 그는 한 로인의 도움으로 다시 목숨을 구하게 됐고 그 로인은 백두산의 만병초라면 마을사람들의 질병을 모두 낫도록 해줄것이라고 알려준다. 그러나 만병초는 사람들이 쉽게 나을수 있는 병에도 함부로 뽑아다 써서 단 한뿌리밖에 남지 않았고 크게 노한 하늘은 백두산수호신에게 《다시는 누구도 명약초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엄하게 다스리라.》고 명해 쉽게 접근을 할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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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봉

수호신은 폭풍우가 치도록 하고 호랑이가 나타나도록 하는 등 만병초를 구하러 오는 사람들을 모두 물리쳐내 화목이 정도는 절대 접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였다. 그런데도 화목이는 마을사람들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목숨을 내놔야 한다는 상황에서 과감히 결단을 내려 자신을 희생했다. 이에 감복한 백두산수호신은 만병초를 내주고 마을사람들을 살리게 했다고.

사람들을 살린 후 화목이는 백두산에 다시 그 약초를 심었고 그의 정성에 백두산에 다시 뿌리내린 약초는 그후 숱한 씨를 뿌려 백두산기슭은 약초로 덮이게 되였다. 사람들은 이 풀로 여러가지 병들을 다 고치게 되자 어느때부터인지 이 풀을 만병초라고 부르게 된것이다.

지난 2002년 북녘의 문학예술출판사에서 출간된 《백두산의 옛 전설》에서 리빈 작가는 《물론 오늘날 만병초라는 이름이 많은 병을 고친다는 의미에서 불리우는것이 아닌것은 확실하나 이런 전설을 낳을만 한 약효는 충분히 가지고있다.》고 말한다.

 

백두산밀영

 

일행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이 탄생하셨고 김일성주석과 항일투사들이 거점을 삼았던 기지가 있는 백두산밀영으로 향했다. 백두산에는 유난히 마가목이라는 나무가 많은데 이는 기관지와 천식에 좋다고 한다.

한시간여를 달린 후 도착한 백두산밀영은 울창한 나무들사이에 위치하고있다. 백두산밀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는 《정일봉》이라고 쓴 봉우리가 보인다.

정일봉의 한 글자 무게는 100t이 넘고 길이는 6. 5m, 높이는 7m에 이른다. 글자의 평균깊이는 70cm인데 가장 깊은것은 1m에 이른다.

이곳에는 김일성주석께서 김정일국방위원장의 탄생 50돐을 맞아 직접 쓰신 송시비가 있다.

 

백두산마루에 정일봉 솟아있고

소백수 푸른물은 굽이쳐 흐르누나

광명성 탄생하여 어느덧 쉰돐인가

문무충효 겸비하니 모두다 우러르네

만민이 칭송하는 그 마음 한결같아

우렁찬 환호소리 하늘땅을 뒤흔든다

 

이 송시비는 216t에 이르며 모양은 인민들의 한결같은 마음을 휘날리는 붉은 기발로 형상화한것이라고 한다.

주변에는 너무도 맑은 소백수가 흐르고있다. 북녘안내원은 《이곳은 공기가 너무 맑고 좋아 1분에 6발자국을 걷는 사람이라면 12발자국까지 걸을수 있다.》며 《여러분들이 느리게 걸으셔도 보채지 않는 리유다.》고 말했다.

사령부와 생가에 이르러 북측안내원은 《이곳은 장군님의 생가이기때문에 누구든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지 악한 마음을 가지면 백두산이 노해 불벼락을 내릴것이다.》고 말했다.

이곳에는 1936년 9월 사령부와 함께 지은 유격대원들이 산속에서 학습 등을 하며 묵던 숙소가 있다. 숙소는 방이 2칸인데 큰방은 김일성주석이, 작은 방은 대원들이 썼다고 한다. 방안에는 세계지도가 걸려있으며 《모두다 공부하자, 지식은 황금보다 유력하다.》, 《모두다 조선혁명의 심장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 등의 구호가 적혀있다. 대원들은 전투중에도 정세공부 등 학습에도 소홀하지 않고 무기관리 등 전투준비에도 철저했던것이다. .

해설강사에 따르면 김일성주석은 소부대활동지도로 바삐 지내다가 돌아와 1942년 6월에 처음으로 김정일국방위원장을 보셨다고 한다.

김일성주석은 백두산에서 태여난 아드님을 잘 키워 혁명의 대를 잇도록 하겠다며 백두산에서 지킨 붉은기를 후대들이 들고나가도록 해야 할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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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영 숙소내부모습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어머님이신 김정숙녀사께서도 아드님을 백두산의 아들로 키우시기 위해 《반달가》, 《고드름가》 같은 민요를 들려주며 조국애를 키워주시였고 말과 글을 가르칠 때에도 광복을 이뤄야 할 조선에 대하여서부터 가르치시였다고 한다. 첫돌때에도 색동옷이 아니라 김일성주석의 전투복을 줄여 입히셨고 유격대원들은 첫돌을 맞은 선물로 놀이감 등을 전달했다고 한다. 백두산밀영고향집에는 당시 유격대원들이 선물한 놀이감과 김정숙녀사께서 쓰시던 살림도구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숙소근처에는 항일유격대원들이 사용하던 박우물이 남아있다. 박으로 우물물을 길었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박우물에는 산삼, 웅담 등이 함유돼 한번 마시면 십년은 젊어진다고 한다.

어찌 또 이를 그냥 지나갈가? 십년은 젊어진다는 말에 일행은 줄을 서서 모두 박우물의 물을 마셨다. 누군가 나에게 박우물의 맛을 표현해보라고 하지만 합당한 말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저 항일투쟁을 위해 이름도 없이 몸바쳐싸운분들을 잠시나마 떠올릴수밖에.

 

구호나무

 

다음장소로 이동을 하는데 우리와는 다른 표현을 발견했다.

나무 곳곳에 《산불근절》, 《산림애호》라고 적혀있다. 우리는 대개 《자연보호》, 《산불조심》 등으로 표현을 하는데 의미는 같지만 표현한 단어가 조금 다르다.

북녘은 수십년동안 지속된 미국과의 대결로 늘 전시체제에 있기때문에 그런지 비행기내의 《박띠를 매시오》며 《산불근절》 등 다소 강한 표현이 많다.

2000년초부터 북녘에 들어왔다는 한 인사는 《그나마 요즘엔 많이 부드러워졌다.》며 《이제는 볼수 없지만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미제의 각을 뜨자> 같은 표현에 놀라기도 했다.》고 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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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관속에 보관돼있는 구호나무

참관을 마치고 내려오던중 나는 우연한 기회에 구호나무를 볼수 있었다.

일정이 빠듯했던탓에 모든이들이 다 볼수는 없었는데 함께 간 북녘의 안내원이 《저쪽으로 가면 구호나무를 볼수 있다.》고 귀띔을 해줘 재빨리 가본것이였다.

구호나무는 항일투쟁을 하던 유격대원들이 자신의 각오와 조국광복의 념원 등을 나무에 써둔것으로 유리로 만든 관에 넣어 소중히 보관하고있다.

구호나무는 전국적으로 몇천개에 이르나 시간이 흐르면서 글자가 거의 보이지 않기때문에 아직도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은것들이 많다고 한다.

구호나무에는 《조선아 백두광명성탄생을 알린다》, 《조선아 백두성 솟았다》, 《조국광복 만세》 등의 내용이 적혀있다.

사실 구호나무의 글씨는 달필이 아닌데 이는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애국심 하나로 유격대원으로 들어온이들이 대부분 배움이 부족한이들이기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오히려 많이 배운이들은 다들 자기 살길 찾기에 바빴으나 이름없는이들이 앞을 다투어 백두산으로 들어온것이란다.

 

백두산서 가장 경치좋은 삼지연

 

일행은 다음 방문지인 삼지연혁명전적지로 향했다.

한시간여되는 길인데 뻐스 내옆자리에는 지난해 5월 평양방문당시 우리 조 안내원이였던 전경수안내원이 자리를 하고있다.

《전경수안내원은 남쪽에 와보신적이 있어요?》

《2001년 하고 2003년 2번 남녘에 갔었지.》

《오셨을 때 느낌이 어땠나요?》

《음식, 땅 모두 낯설었지. 영어천지고 꼭 우리 땅이 아닌듯 했지.》

낯설고 물설은 곳에서 당황했을듯 한 그 모습이 떠올라 괜스레 안스러웠다. 다음번에 남녘에 오면 내가 반갑게 맞아주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번에 오시면 꼭 저를 찾으세요. 남녘사람 아무나 잡고 <통일뉴스>에 련락 좀 해달라고 하면 제가 전경수안내원님 계신 곳으로 가면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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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지연혁명전적지의 동상, 진군하는

항일유격대원들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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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지연대기념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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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이 기념사진을 찍으신 두그루 봇나무,

일행도 이곳에서 줄을 서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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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지연군의 학생소년궁전, 지역별로 방과후

 교육기관인 학생소년궁전이 있다.

 

(정말 순진한건지 멍청한것인지 모르겠다는 막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아니 찾아달라고 하면 찾아주는줄 아나? 만나고싶은이들 말해도 찾아주지 않더구만.》

(아 그렇지. 지금은 이렇게 만나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수 있어도 《한국》에 와서는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하는구나. 《국정원》에서도 가만있을리 없고 누가 북녘에서 온 사람이 찾는 사람을 찾아줄것인가.)

《그럼 오셔서 조금 낯설고 어색하더라도 남녘에서 관광도 좀 하시고 푹 쉬다 가시면 되잖아요.》

《우리가 남녘 가면 감옥살이하러 가는것입니다.》

《예? 감옥이요?》

《남녘에 가면 우리가 호텔방안에만 갇혀있습니다. 식당이라도 갈라치면 우리 북녘사람 한사람당 두세명이 민망할 정도로 따라와 옆에 서있으니 밥도 제대로 넘기기가 쉽지 않지요. 남녘에서는 <자유>라고 하지만 저희에게는 감옥 그자체입니다.》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었다. 우리가 북녘에 가서 《여기도 가고싶다.》, 《저기도 가고싶다.》, 《밤에 호텔밖에 나가서 평양시내를 마음껏 돌아다니고싶다.》는 식으로 많은 제기를 하군 하는데 오히려 북녘대표단이 남녘에 오면 주민들과의 접촉은 커녕 호텔방안에만 갇혀있어야 한다고.

밥을 먹을 때도 식탁 바로 옆에 서서 지키고있다니 신변보호를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남녘에 온 손님들을 감옥살이를 시키는것은 좀 심하지 않은지, 아니면 무엇이 두렵기에 그들을 그리 막아대는지 착잡하기만 하다.

그러는 사이 일행은 삼지연에 도착했다.

저 멀리 북녘의 학생들로 보이는 한 무리가 붉은 기발을 들고 이곳 삼지연혁명전적지를 방문하고있다.

일부 언론에서 남녘의 백두산관광 등이 가시화됐을 때 백두산코스가 삼지연중심부를 통과할뿐더러 백두산천지, 리명수폭포 등은 북녘주민들도 많이 찾고있으며 매년 수십만명의 혁명전적지답사행군대가 이곳을 찾기때문에 북측은 남측관광객과의 조우를 막기 위해 주민들을 이주시키거나 답사대의 답사시기를 조정할것이라는 관측을 내놓은바 있다. .

그러나 북측안내원들은 《우리는 백두산을 모두 개방한다고 나섰는데 오히려 문을 걸어 잠근 쪽은 남녘이 아닙니까?》 한다. 실지 적어도 우리 참관단이 백두산을 방문했을 때는 북녘답사대들과 조우를 했을뿐아니라 주민들은 우리가 탄 뻐스를 발견하고서는 언제나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군 했다.

어쨌거나 하루라도 빨리 금강산관광재개는 물론 내가 본 백두산천지를 많은 사람이 볼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삼지연은 100만년전 백두산의 화산분출로 인한 용암이 흐르던 강을 막아 세개의 호수가 생긴데서 유래했다.

이곳은 백두산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고 할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삼지연못가는 1939년 5월 조선인민혁명군주력부대가 무산지구에로 진출하던 길에 잠시 휴식을 취한 곳이다. 김일성주석의 동상이 세워져있고 주변에는 대홍단전투에서 용맹을 떨치는 항일유격대원의 모습, 대원들이 마을에 오는것을 환영하는 주민들의 모습 등을 형상화한 조각들이 김일성주석의 동상주변에 펼쳐져있다.

이는 1939년 무산지구전투승리 40주년을 기념해 조성된것이라고 한다.

김일성주석은 무산지구전투를 앞두고 휴식을 취하면서 혁명이 승리하면 이곳을 인민의 문화휴양지로 꾸리자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봉화탑은 혁명의 불꽃을 상징하는데 탑의 높이는 50m에 이른다.

삼지연대기념비의 비문에는 《조국진군 그날부터 오늘까지의 삼지연못가에 남긴 불멸의 혁명내용》을 적고있다는것이 해설강사의 설명이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삼지연대기념비가 국보적의의를 갖고있는 세계적인 걸작이라고 평가하셨다고 한다.

20대청년장군의 시절을 형상화했다는 김일성주석의 동상뒤로는 백두산이 펼쳐져있다. .

삼지연혁명전적지에는 김일성주석이 기념사진을 찍으신 두그루 봇나무(자작나무)도 있다. 삼지연호수를 뒤로 하고 서있는 봇나무는 너무도 아름다워 일행은 서로 김일성주석이 사진을 찍으셨다는 자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해설강사는 설명을 마친 후 《조국이 통일된 다음에 다시 만납시다.》라고 말한다. .

숙소인 베개봉호텔로 이동중 북녘에 이런 곳이 있을가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마을이 나타났다. 유럽의 전원마을을 련상시키는 이곳은 삼지연스키장주변의 콘도 등 관광단지였다. 작은 집들이 잔뜩 지어져있는것이 금강산의 온정리보다도 훨씬 더 고급스럽고 잘 정돈된 분위기였다.

생각보다 관광단지가 크다고 느낄 찰나 북측안내원은 《이곳은 삼지연군의 마을입니다. 옆에 보이는것이 학생소년궁전입니다.》라고 설명한다.

(아! 북녘어린이들의 방과후 교육을 책임지는 학생소년궁전이구나.)

흔히 북녘의 학생소년궁전이나 창광유치원 같은 곳을 참관하고난 후 일부는 《이곳은 평양이니까 좋은 시설의 방과후 교육기관이 있는것이다.》, 《출신성분이 좋은 아이들만 이런 교육을 받을수 있는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군 한다.

그때마다 북측안내원들은 《학생소년궁전의 경우 평양에 2개, 각 도시별로 하나씩 있어서 지역별로 언제든 아이들이 하교후 원하는 교육을 무상으로 받을수 있다.》고 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설마 정말 지역별로 다 있는것일가 하고 나조차도 가끔 의심을 하군 하는데 삼지연군에 있는 학생소년궁전은 그런 의심을 말끔히 씻어주는 존재였다.

어린이를 나라의 《왕》으로 떠받드는 북녘에서 어린이들에 대한 교육열은 대단해 학생소년궁전이 세워지기 어려울 정도로 인구가 작은 곳은 학생소년회관이 건립된다고 한다. 학생소년회관은 학생소년궁전과 기능은 같지만 배울수 있는 과목인 소조수와 학생수가 적다고 한다.

아이들 학원비를 벌기 위해 파출부를 나가야 할 정도로 사교육문제가 심각한 우리들은 학생소년궁전이나 회관이 부러울수밖에.

숙소인 베개봉호텔은 베개모양처럼 납작한 봉우리인 베개봉이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있다. 우리 일행은 신관의 1층부터 5층까지 방을 배정받았다.

이곳은 저녁 6시부터 7시까지 그리고 새벽에도 아침 6시부터 7시까지만 따뜻한 물이 나오니 그 시간에 맞춰 씻어야 한다.

일부 불만스러워하는이들도 있다. 그러나 양각도호텔처럼 사람이 많은것도 아니고 우리도 에네르기절약을 위해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일정한 시간에만 운행하는것처럼 어떻게 보면 불필요한 에네르기소비를 최소화하는 합리적인 모습이다.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후 하나둘씩 1층 19호실로 모였다. 이곳에서는 력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행사가 열린다.

오늘이 일요일인만큼 《평화 3 000》 신부님들은 신도들과 함께 이곳에서 천주교미사를 올린다고 한다. 어쩌면 북녘 백두산에서의 미사는 처음이 아닐가?

이날 집전은 곽동철신부가 한다. 미사는 간소하지만 진지하고 엄숙하게 진행됐다. .

곽동철신부는 《35년 사제생활을 하고 10군데 본당 주임생활도 했는데 이렇게 백두산에서 미사를 드리는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며 《일부는 <좌파빨갱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방북은 믿음의 실천이며 더 큰 믿음이다.》고 말했다.

박창일신부는 《오늘은 특별한 미사를 올린다. 교회가 진정 평화와 민족화해의 도구가 되도록 이끌어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며 남북화해의 존재로 자리매김하도록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올린다. 이런 우리의 몸짓과 정성이 아름답게 보이길 바란다.》며 기도했다.

미사가 끝난 시간은 6시 30분. 7시부터 저녁식사시간이지만 그보다 따뜻한 물이 7시까지만 나오기때문에 어서 서둘러야 한다.

그러나 내 방까지 가는 시간 또 이것저것 주섬주섬 정리하고 하다보니 남은 시간은 10분정도. 그래도 설마 딱 7시에 찬물이 나오겠어? 한  5분정도는 더 나오겠지 하는 맘으로 씻기 시작했다. 후다닥 씻기 시작했는데 정확히 7시부터 딱 찬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남녘은 《코리안타임》이니 뭐니 하지만 이곳은 정말 약속을 칼같이 지킨다.

세수만 하면 되기에 찬물로 씻는데 그동안 라태하고 게으른 모습을 보인것에 일침을 놓기라도 하듯 물이 어찌나 찬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다.

서두른다고는 했지만 저녁식사시간에 늦어 다른이들은 이미 만찬을 즐기고있다. .

저녁식사는 이 지역의 자랑인 감자료리들, 삼지연지역은 해발고도가 워낙 높기때문에 고랭지채소도 어렵고 거의 유일하다싶이 농사를 짓는 작물이 감자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이곳에선 주식으로 감자를 먹는데 감자료리만 해도 200여가지가 넘게 개발됐다고 하니 대단하다는 탄사가 절로 난다.

우리 식탁에도 찐감자, 감자죽, 감자국, 감자채볶음, 언감자국수 등 감자관련 료리가 10여가지나 나왔다.

이중에서도 언감자국수는 김일성주석의 항일무장투쟁시절 화전민들이 유격대원들이 먹을수 있도록 감자를 묻어놓았고 얼어버린 감자를 가루내 만들어먹던 국수라고 한다.

김일성주석은 그때를 잊지 않기 위해 언감자국수를 즐겨 드셨다고 한다.

남녘에도 김일성주석과 함께 언감자국수를 먹었다는이들이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음식은 유명세를 탔지만 사진조차도 구할수 없어서 상상력을 동원할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언감자국수를 맛보게 되다니 음식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내겐 더할나위 없는 기쁨이였다.

거무스름할 정도로 진한 갈색을 띠고있는 면은 꼬들꼬들하지만 찰진 기는 별로 없어 쉽게 끊어졌다. 언감자국수는 들깨국물로 맛을 냈는데 맛은 물론 영양학적으로도 우수해 어른들의 영양식품으로도 손색이 없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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