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희기자의 다시 쓰는 평양일기

 

2008. 10. 10 《통일뉴스》

 

 

인천공항에서 출발한지 한시간남짓, 벌써 평양비행장에 도착했다.

남녘에서 방북증명서를 보고 신원조회를 했던것처럼 북녘에서도 비행기에서 내리기 직전 초청자명단과 비교를 해가면서 조회를 하고 허가된 이들만 북녘땅을 밟을수 있다. 때문에 초청장을 받지 못한 승무원 등은 평양비행장에까지는 왔어도 비행기에서 내려서 사진을 찍거나 할순 없다. 지난 2005년 10월 5 000여명이 《아리랑》을 참관하기 위해 한달여간 남과 북을 오가던 《아시아나》전세기 승무원들은 《같이 가서 구경하자.》는 참관객들에게 《아! 저희도 내리고싶어요!》했었다.

이번 승무원들도 내리지 못하긴 마찬가지, 참관단들도 확인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북측 초청자명단순서대로 내려야 했다. 이미 남녘에서부터 내가 내려야 할 순서 등을 알고 갔기에 북측에서의 확인작업도 별문제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러나 사실 난 속으로 비행기에서 내리기 직전 평양비행장에서 뭔가의 이벤트가 있기를 막연히 바랐는데 너무 아무 일이 없어 서운한 맘까지 들었다.

지난 방북시 초청자명단을 대조하던이가 이전 방북시 안면이 있었던 리동혁안내원으로 그는 나를 보자마자 《시집갔나?》 안부를 물었고 《아직》이라고 답했었다.

이에 그는 《문제있구만…》했다.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받게 된 인사치고 너무 황당하긴 했지만 그만큼 잊지 못할 기억이기때문에 이번에도 뭔가 새로운 기사거리가 있었으면 하고 바란것이다. 이도 아니라면 리동혁안내원과의 재회쯤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image

평양비행장에 도착한 《평화 3 000》방북단

하지만 거의 마지막번호인 나까지 아무일없이 신원조회는 끝이 났고 일행은 바로 평양비행장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북녘에 초청된 인사들은 북측립장에서 보면 통일을 위해 분단의 벽을 넘어온 손님들이기때문에 지금 찍힌 이 기념사진은 《로동신문》에 실릴수도 있다.

일행은 짐을 찾고는 바로 조별로 뻐스에 올라 평양시내로 향했다.

30명당 한조로 나뉘여 뻐스 한대씩을 차지하고 이동을 하는데 우리 조와 함께 하는 북측안내원은 총 3명, 장충성당 신도회의 김철웅(프란체스코)부회장과 민화협의 박용호안내원, 리어금(데리사)안내원 등이다.

 

일년여만에 다시 찾은 평양시내

 

일년여만에 찾은 평양시내는 놀랄만큼 또 바뀐 모습이였다. 지난 2007년 5월 방문당시 시내곳곳에는 건설공사가 한창이였던만큼 건물들과 빌딩숲이 생겼고 거리와 건물은 모두 말쑥했다. 거리곳곳에는 청량음료 등을 파는 거리매대가 자리하고 영화관에는 《유산》, 《꽃파는 처녀》 등의 영화포스터가 걸려있으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함!》이라고 적힌 전차 등이 거리를 오가고있다. 창밖에는 어린아이의 바지를 입혀주는 아버지, 손을 잡고 산보를 하는 남녀, 분주히 목적지를 향해 오가는이들 등 활기찬 평양시민들모습에 1분1초가 새롭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대동강에는 모래채취선이 떠있고 평양대극장을 비롯 주요건물들에 대한 개건사업이 한창이다. 북녘은 김일성주석탄생 100주년을 맞는 2012년을 강성대국의 해로 맞이하기 위해 우선 인민들이 주로 리용하는 옥류관, 청류관 등 식당과 평양대극장 등 공연시설 등을 먼저 재정비한다는 기사를 읽은바 있다.

마치 이곳이 평양이 아니라 유럽의 한 전원도시라는 착각이 들만큼 평양시내와 대동강의 모습은 아름다왔다.

창밖을 내다보던중 내옆에 앉은 북측 박용호안내원은 내 이름표를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아, 통일뉴스기자구만, 근데 언제부터 일했나? 왜 한번도 못 봤지?》 한다.

순간 멈칫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낯선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온 나는 편안하게 인사를 하며 다가오는이를 의심하고있었다.

《통일뉴스를 아세요?》

《아 아다마다…》 하면서 그는 《통일뉴스》가 지난 몇차례 방북취재왔을 때 자신이 안내를 맡았다면서 아는체를 해왔다.

나는 오히려 그가 너무 많이 아는것에 의심쩍어하면서 말을 줄이고있었다.

 

만수대언덕에서 꼭 마주치는 신혼부부들

 

그러던중 첫번째 방문지인 만수대언덕에 도착했다. 화창한 날씨에 이곳은 꾸준히 주민들이 방문해 꽃을 두고갔으며 여느때와 다름없이 신혼부부들을 볼수 있었다. 우리는 례식장을 찾아가면 결혼을 막 마친 신혼부부를 볼수 있지만 북녘에서는 신혼부부를 가장 많이 만날수 있는 장소가 바로 만수대언덕이 아닐가 한다.

image

만수대언덕에서는 결혼식을 막 마친 신혼부부들을

쉽게 만나볼수 있다.

 

처음 방북당시만 해도 이곳에서 신혼부부를 발견했을 때 《난 정말 운이 좋구나, 이곳에서 신혼부부를 다 만나고…》하며 진심어린 축하인사를 건넸으나 갈 때마다 어김없이 신혼부부들을 만나게 되면서 기쁨이 줄어든게 사실이다. 남녘에서도 커플들이 달갑지 않은 로처녀의 눈에 북녘 커플들이라고 뭐 예뻐보이는것은 아니다.

어찌됐건간에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우리가 부모에게 의지하고 하소연하는것처럼 북녘에서는 김일성주석을 《어버이》라고 부르며 이곳을 찾는다.

때문에 이곳은 언제나 신혼부부들과 꽃을 들고 찾아온 주민들을 볼수 있다.

꽃다발정도가 아니라 커다란 꽃바구니도 꽤 많이 보인다. 꽃바구니모양은 우리와 다른 형식인데 붉은 꽃이 많고 붉은 리봉에 황금색글씨가 적혀있다. 사회주의국가에서 붉은색은 혁명을 의미한다던데 그래서인지 꽃은 물론이고 구호도 붉은색으로 씌여있는것이 많다.

내가 어렸을적만 해도 흑인들을 깜둥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대다수였지만 이제는 《세계화》시대인만큼 더이상 깜둥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는 몰상식하게 북녘에 대해서는 《빨갱이》라는 원색적인 표현을 쓰고있다.

중남미에서 붉은색은 정열의 상징이며 산타클로스할아버지도 붉은색옷만을 입고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만큼 자본주의의 《상징》인 코카콜라도 붉은 옷을 입고있으며 사랑을 전하는 헌혈표시나 적십자표시도 모두 빨간색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월드컵 4강《신화》를 일구는데 일조한 우리 국민모두도 붉은 옷만을 입었는데도 유독 북녘의 붉은색에 색안경을 끼고있는것은 아닐가.

꽃바구니를 자세히 보니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많은 인원이 다녀간듯 하다. 김일성종합대학은 창립 62주년을 맞았고 이 기쁨을 함께 하기 위해 이곳을 다녀갔다고 했다.

순간 박용호안내원이 《통일뉴스》측 관계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사진까지 찍고있다. 알고보니 박용호안내원은 북 민화협의 언론분야를 담당하기때문에 북녘을 방문하는 남녘의 기자들을 자주 접하고 그러다보니 친한터였다. 그쪽에서는 열린 마음으로 친근감을 표현한것인데 나는 오히려 마음을 닫고 경계를 한 꼴이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남북관계에서도 우리 사회는 마음을 열 생각은 하지도 않은채 어려서부터 세뇌된대로 무조건 《북은 나쁘다.》는 생각만 갖고 계속 오해만을 하고있다. 최근 심화되고있는 남남갈등도 다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고 선입견에 파묻혀 다른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하기때문에 더 심각해진것이 아닐가싶다.

눈과 귀를 닫고 못질에 용접까지 해대던것을 이제는 그만둬야 한다는것을 알면서도 사실 나부터도 그만둔다고 쉽게 말하기 어렵다. 그만큼 우리의 선입견은 무섭고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것이다.

《박용호안내원님, 잠간이나마 의심했던것 죄송합니다.》

 

환영오찬, 《통일과 민족번영을 위해 건배하자》

 

양각도호텔에는 백두밀영의 대형벽화가 그려진 식당에서 우리 《평화 3 000》참관단의 환영오찬이 준비돼있었다.

image

남측 《평화 3 000》과 초청측인 북측

조선카톨릭교협회와의 환영오찬.

장재언 조선카톨릭교협회 위원장은 환영사에서 《이번 방북기간동안 민족의 성산 백두산을 답사하는 <평화 3 000>참관단은 조국의 자주통일과 번영에 기여하는 계기가 될것이다.》며 《10. 4선언 받들고 조국통일 앞당기기 위하여 노력하자.》고 말했다.

이에 《평화 3 000》 신명자리사장은 답사를 통해 《그동안 <평화 3 000>이 진행한 콩우유공장, 두부공장, 평양축구장건립 등은 서로에 대한 동포애적믿음이 있었기때문이다.》며

《6. 15, 10. 4선언에 기초해 남북공동번영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화답했다.

장위원장과 신리사장은 《통일과 민족번영을 위해 건배하자》며 참가자들에게 건배를 제안했다.

꽃같이 고운 접대원들은 연두색조선옷(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완두콩국, 다랑어즙구이, 소발통장수곰 등으로 이루어진 료리를 차례로 내왔다.

아직은 점심시간으로 술을 한잔 하기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은 북녘의 환대와 어려운 시기에 북녘에 왔다는 기쁨으로 몇차례고 술잔을 주고받았다.

기분만 생각한다면야 계속 오찬을 즐기며 술자리를 이어가고싶지만 빡빡한 오후일정으로 자리를 급히 정리하고 바로 만경대고향집참관에 나섰다.

 

만경대고향집 참관

 

이곳 역시 많은 북의 주민들이 계속해서 참관하며 꽃을 바치고있다. 특별한 기념일이나 행사가 없어도 늘 헌화하며 참관을 하고있는것이다.

만경대고향집은 김일성주석이 탄생하시여 어린시절을 보내신 곳으로 북녘을 방문한 인사들의 방문필수코스로 자리잡고있다. 이곳은 1947년 사적지로 지정된 뒤 60여년동안 약 1억 1 800만명이 방문을 했다고 한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민주로동당》이 만경대고향집과 주체사상탑방문을 놓고 서로 《가지 않았냐.》, 《가지 않았다.》는 공방을 계속하게 한 유명한 장소중 하나이다.

유럽에 가면 자신의 종교와는 맞지 않아도 바티칸성당에 가서 례를 갖추고 타이나 일본에 가면 절에 가 인사를 한다. 웰남의 호지명묘에 가면 사회주의자가 아니더라도 그 나라의 국민들이 칭송하는 위인에 대한 례를 갖추기 위해 관광객들은 모두 모자를 벗고 정숙한 차림으로 들어가 인사를 올린다. 가보진 않았지만 레닌, 쓰딸린, 모택동 등의 무덤을 가게 되면 분명 반바지차림은 출입이 금지될것이고 대부분 사진촬영도 금지될것이며 조용히 참배를 하고 나와야 할것이다.

거길 참배를 하고 나왔다고 해서 그 종교나 사상에 심취됐다고 말할순 없다. 그저 방문한 나라의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고있는 인물과 종교이기때문에 우리가 방문해서 그에 걸맞는 례를 갖추는것일뿐이기때문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평양에 방문을 했으면 평양에서의 례를 따라야 한다는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곳에 갔다고 해서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이들은 동남아려행은커녕 가까운 동네근처 산에 있는 절에도 한번 가보지 않았는지 묻고싶다.

관악산의 연주암에는 주말이면 등산객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기나긴 줄을 선다. 나도 그렇고 연주암의 주지스님도 그렇고 이들이 모두 불교신자라고 생각하는 바보는 없을것이다. 마찬가지로 만경대고향집을 참관하는 사람들을 색안경을 끼고 《국가안보에 위협을 하는 인물》이라고 보는 사람은 그자신이 바로 바보임을 증명하는것이다.

만경대고향집은 《통일부》에서 규정한 참관제한구역도 아니고 북녘을 방문하는 세계인들 1억만명이 넘게 방문한 곳인데 북녘에 가고서도 가지 못한것은 오히려 박근혜 전 대표에게도 안타까운 일이다.

못 갈 곳을 간것도 아니고 갔다고 해서 박근혜 전 대표가 갑자기 보수를 버리고 진보세력이 됐다고 보는이도 하나 없을텐데 왜 그리 변명에 급급한지 내가 다 답답하다.

 

쑥섬, 통일전선탑

 

다음 참관일정은 쑥섬사적지이다. 쑥섬은 대동강내에 삼각형모양의 섬으로 면적은 38만㎡이다. 예로부터 쑥이 많아 봉래섬이라고도 불린 이곳은 1948년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평양모란봉극장에서 력사적인 대민족회의인 남북련석회의가 진행된 뒤 지도부성원들과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다시한번 모여 회의를 진행한 곳이다.

image

쑥섬에 있는 통일전선탑

남북련석회의에는 북과 남의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가를 했다.

해설강사는 《남녘에서는 40개 정당과 사회단체가 참가를 했는데 이는 거의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참여한것이다.》며 《1948년 5월 10일 남녘의 단독선거로 그동안 한강토, 한민족이였던 땅이 영원히 두개로 분렬되려는것을 막기 위해 지도부성원들이 5월 2일에 이곳에 모여 협의를 한것》이라고 설명했다.

쑥섬사적지에는 남북련석회의를 기념하기 위한 통일전선탑과 당시 대표자들이 타고 건넜던 나루배, 당시 회의를 했던 장소 등이 보존돼있다.

해설강사에 따르면 통일전선탑은 조국해방 45돐을 맞아 처음 진행했던 《범민족대회》를 맞아 1990년 8월 10일에 제막식을 했단다.

기념탑은 탑신, 기단, 비문판으로 구성돼있는데 탑신에는 김일성주석의 친필로 된 《통일전선탑》이라는 글발이 새겨져있고 기단 맨우에는 42년만에 기념비가 만들어진것을 기념하기 위해 42송이의 목란꽃이 그려져있다.

기단은 56개의 화강석이 모여 만들어진것인데 이는 당시 참석했던 56개의 정당과 사회단체를 의미한다. 이 탑은 높이 13. 5m에 무게는 550t에 이른다.

김일성주석은 1989년 10월 7일 이곳을 현지지도하시면서 40여년전을 가볍게 회고, 당시 참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시면서 나라의 통일에 기여한이들을 모두 후대에 알리기 위해 기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탑의 뒤면에는 참여정당, 사회단체들과 주요 참석자들의 명단이 적혀있다. 이들중 홍명희, 백남운선생은 회의가 끝난 후 북에 남았고 나머지 인사들은 모두 남으로 내려왔다가 1950년 9월 후퇴당시 모두 입북을 했다. 이들은 대부분 북녘 애국렬사릉에 묻혔으며 조국통일상을 수상했다고 해설강사는 설명했다.

비문판에는 김일성주석께서 하신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정견이 서로 다른 수많은 정당, 사회단체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대하여 론의하고 견해의 일치를 본 일은 일찌기 없었습니다. 남북련석회의는 우리 민족의 력사에 국토완정과 민족통일의 기치하에 각계각층의 애국적인사들을 묶어세운 위대한 회합으로 영원히 기록될것입니다.》라는 말씀이 새겨져있다.

우연일가? 몇번 평양을 방문한 나도 쑥섬은 처음인데 마침 김규식선생의 증손자인 김희상씨가 참가한 이번 참관단이 쑥섬을 방문한것이다.

그는 《주변의 권유로 오게 됐다.》며 《북녘에서 증조할아버지가 애국렬사릉에 묻히는 등 높이 평가되고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좀더 듣고싶었지만 바쁜 일정에 이후 남녘에 돌아가서 이야기를 한번 나눴으면 좋겠다는 약속을 했다. 나중에라도 인터뷰를 꼭 추진할 참이다.

 

지금의 통일노력보다 훨씬 나은 48년 남북련석회의

 

당시 쑥섬을 련결하는 다리가 없어 평천리 나루터에서 이곳까지 타고왔다는 나루배도 그대로 전시돼있다. 나루배는 20명정도가 탈수 있다고 한다.

또 편안하게 모여앉아 회의를 했다는 돗자리, 잠시 휴식을 즐긴 원두막 등도 그대로 보존돼있다.

당시 회의는 웃옷까지 벗은채로 편안하게 진행됐다는데 김일성주석은 조국과 민족이 있어야 당파도 있고 주의주장도 있는것이라며 애국애족의 마음이 모인다면 이루지 못할것이 무엇이겠느냐고 말씀하셨단다.

최근에는 사람들이 흑이 아니면 무조건 백이여야 하고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적이라는 생각을 갖고있다. 때문에 《대통령》을 하는 동안 무조건 내 사람을 심어놓기에 급급하고 또 새 《정권》이 들어설 경우 내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실력이나 직책, 임기 등

image

1948년 당시 남북련석회의 대표자들이 쑥섬에 타고들어왔던 나루배

에 관계없이 무조건 배척하고만 본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지만 어느샌가 우리는 편가르기에 정신이 팔려있는것이다.

예전에 한 《통일뉴스》기자가 결혼을 하는데 시골에서 대절뻐스가 한대 왔다. 그 뻐스이름은 다름아닌 《통일관광》이였는데 별것도 아니지만 난 그 사실이 너무 재미있고 신기했었다.

《아 통일뉴스기자가 통일관광 타고와서 이렇게 결혼을 하니 통일에 대한 신심이 드높겠다.》 뭐 이런 식으로 떠들며 사람들과 익살을 떨었었다.

그런데 한분이 하시는 말. 《그런데 이 뻐스의 통일은 좀 다른 냄새가 나지 않냐?》

그러고보니 필체며 글씨색이 소위 보수적인 느낌을 주는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도 또 놀란것은 똑같은 《통일》이라는 단어인데 글씨체나 모양만 보고 진보적이다, 보수적이다라고 가르는것이다. 그것은 특별히 배워서 그런것도 아니고 아주 오래전부터 저절로 학습이 된것이라 아주 미묘한 차이로도 금방 구분해낼수 있다.

그러나 일반인이 본다면? 난 통일이라는 단어에 민감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것을 구분해내기 어려울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남북민간교류협의회》, 《민족문화교류재단》, 《민족통일중앙협의회》,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민족화합운동련합》, 《통일교육문화원》, 《민족통일촉진회》, 《통일을 여는 사람들》, 《통일코리아21》 등 통일관련단체가 어찌나 많은지 단체의 성격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는 보수단체와 진보단체의 이름이 비슷한 경우도 흔하다. 이들 단체는 이름도 비슷하고 통일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쓰이기때문에 일반인들은 모두 통일을 위해 일하는 단체인가보다 하는것이다.

물론 각자가 바라는대로 통일을 위해 노력을 하는것이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에 정말 황당한것은 똑같이 통일을 하자는 단체가 허구한 날 싸우니 정말 리해할수 없을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뿐만이 아니라 소위 진보세력간에도 자신들의 리해주장에 따라 다른 목소리를 내는것은 리해하기 어렵다. 지난 《대선》때 나는 《민주로동당》의 의석이 대폭 준것이 너무 아까왔다. 물론 《진보신당》은 또 나름의 립장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진보정당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기치를 내걸고 보수정당들과 싸우는데 힘을 합쳐도 모자란 판에 그것을 또 나누다니 세상을 바꾸긴 하겠지만 《민주로동당》과 《진보신당》이 나눠진만큼 이들이 말하는 좋은 세상이 오기까지는 두배이상의 시간이 걸릴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image

남북련석회의당시 대표자들이 모여앉아 회의를 했던 돗자리(왼쪽)와

참가자들이 휴식을 즐긴 원두막(오른쪽) 등이 그대로 보존돼있다.

이런 가운데 남북련석회의는 사상과 정당, 당파를 떠나 조국과 민족이 먼저라며 큰 틀에서 합의를 이루었다니 지금의 통일을 위한 노력보다 몇십배는 낫지 않나싶다.

회의장소 건너편에는 142년 됐다는 버드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의 쌍가지 그늘아래서 남북련석회의의 참석자들이 오찬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나무는 지난해 있었던 큰물피해로 가지가 하나 잘려 이제는 외가지가 되였다.

대동강숭어회, 어죽, 녹두묵 등으로 대접을

받은 가운데 김구선생은 환담중 《만경대에 방문해보니 (김일성주석의) 부모님 묘비에 갓이 없더라.》고 말했단다.

이에 김일성주석은 조국이 분렬되고 혁명투쟁당시 산에서 함께 싸우던 동지들과 그 가족들이 낯선 나라에서조차 제대로 묻히지 못했는데 어찌 우리 부모님만 모셔오겠느냐고 만류했었는데 그후 주변의 거듭되는 간청으로 만경대로 모셔오긴 했으나 묘를 화려하게 꾸미자는 의견을 듣고 그것은 부모님들의 뜻과도 맞지 않으니 검소하게 꾸미라고 지시했다고 김구에게 말씀하셨단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우리민족끼리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E-mail) : urimanager@silibank.com 홈페지내용에 관한 문의(E-mail) : uriminzok@silibank.com
Copyright © 2003 - 2013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gotop
 
기사종합
 
도서, 잡지
 
영화, 음악
 
독자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