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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아동문학》 주체97(2008)년 제12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류 경 철
학교에서 돌아오던 철명이와 동길이는 마을로 향하던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마을쪽에서 갑자기 경쾌한 노래소리가 도간도간 들려왔기때문이였다. 두 아이는 냅다달려 마을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둔덕우에 올라섰다. 양어장확장공사장입구에 서있는 방송차에서 울려나오는 노래소리였다. 헐떡숨을 몰아쉬는 아이들의 두눈은 둥그래졌다. 아침까지만 해도 어설픈 형태만 잡혀있던 넓은 양어장이 한나절새에 네모반듯한 제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고있었던것이다. 바둑판같은 공사장의 곳곳에서 마을사람들은 법석 끓으며 통이 큰 일판을 벌리고있었다. 《히야! 굉장한데. 온 마을이 달라붙었구나.》 사과알처럼 얼굴이 동그스름한 철명이의 입에서 감탄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철명아, 저것이 끝나면 우리 마을은 더 아름답고 살기 좋아지겠지?》 철명이보다 반뽐정도 키가 커보이는 동길이가 몸을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아, 그럼 보려마. 한폭의 그림같지 않니? 》 《정말 그래!》 그들은 가슴뿌듯하게 들이쉰 숨을 후ㅡ 내쉬며 자기네 고향마을을 새삼스레 둘러보았다. 《참, 동길아. 우리도 아버지, 어머니들처럼 마을을 위해 뭔가 할수 있지 않니?》 철명이가 마을뒤산의 과수원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 생각 좀 해보자.》 동길이도 큰눈을 꺼벅거리며 고개를 기웃했다. 철명이는 마을과 산언덕, 과수원을 둘러보며 궁리해보았다. 하지만 신통한 생각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뭘할가? 어른들이 생각못한것이여야 될거고… 또 뭔가 새로운것이여야겠는데…》 《그러게 말이야. 아하, 생각난다. 풍력발전기! 어때?》 동길이가 기발한 생각이라는듯 얼굴에 웃음을 함뿍 담고 철명이를 돌아보았다. 《풍력발전기?! 글쎄 그것도 좋은데 저 발전소에서 전기가 꽝꽝 나오겠는데 뭐.》 《그래두 우리 힘으로 일쿤 전기불밑에서 공부를 하면 더 멋있지 않니?》 《아니야. 뭔가 새로운것이여야 해. 꼭 필요되는것 말이야.》 곁에 선 감살구나무를 주먹으로 툭툭 치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철명이가 갑자기 머리를 버쩍 들었다. 《가만, 동길아. 왕다래! 왕다래를 심는게 어때?》 《왕다래?!ㅡ》 《응. 우리 마을에 이젠 감살구나무랑 각종 과일나무들이 다 있는데 왕다래만은 없지 않니?》 《응. 정말 그렇구나. 새 품종의 왕다래나무가 나왔다는 말은 들었어.》 《응. 한알이 주먹만 한게 정말 굉장하대. 왕다래까지 주렁지면 우리 마을은 더 멋있을거야.》 철명이가 동길이의 눈앞에 제 주먹을 쳐들어보이며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헌데 왕다래나무라는건 구경도 못했는데 그걸 어디서 가져오겠니?》 호기심에 끌린 동길이가 철명이옆에 바싹 다가들며 물었다. 그러자 철명이는 스르시 눈을 감고 느물느물 웃었다. 《음ㅡ 저기 어디더라. 오! 양천리라는 곳에서 새로 재배한다고 했던것 같애. 틀림없어.》 자기네 앞집에서 사는 처녀애가 지난 가을에 이모집에 갔다와서 자랑을 굉장하게 했던것이다. 《아니, 그 먼델…》 《체, 먼것이 문제니. 나무만 있다면야 백리라도 갔다와야지 뭐. 자, 소뿔은 단김에 뽑으랬다고 마침 래일이 일요일이니 당장 갔다오자.》 《응, 그러자.》 동길이도 고개를 끄덕이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철명이는 떠날 준비를 해가지고 동길이네 집으로 향했다. (이 편지를 가지고 가면 네댓그루는 줄거야. 아니, 열그루라도 줄수 있어.) 철명이는 편지를 넣은 솜옷 웃주머니에 손을 넣어 제대로 있는가를 다시 확인하였다. 엊저녁에 그 처녀애가 우리 마을에도 왕다래풍경을 펼쳐놓겠다는 철명이의 말에 너무 감동되여 편지를 두장씩이나 써주었던것이다. 하늘에선 진눈까비가 푸실푸실 내렸지만 철명이의 마음은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올해의 마지막눈일지도 모르는 눈송이들은 땅에 떨어지자 인차 물로 흘러내리였다. 과수원만 아니라 집집마다에서 자라는 과일나무들에 필요한 질소비료 같은 미량원소가 포함된 눈이여서 철명이는 좋기만 하였다. 《동길아!》 철명이가 소리치며 동길이네 집 뜨락으로 들어섰다. 문을 벌컥 열고 토방에 나서던 동길이가 철명이의 차림새를 살펴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너 오늘 가서 애기를 업고 오려니? 왕다래나무를 가져오는데 무슨 모포를 지고가니?》 그제야 철명이는 손으로 어깨너머 모포귀퉁이를 툭툭 치며 히쭉 웃어보였다. 《오는 길에 나무가 얼기라도 하면 어쩌니. 그래서 오늘은 <애기엄마>가 돼보자는거야.》 뜨락에 내려서서 눈내리는 찌뿌둥한 하늘을 쳐다보던 동길이가 으쓸해서 긴 목을 움츠리며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철명아, 난 아무래도 같이 못 갈것 같애.》 《뭐? 못가겠다구?… 왜?》 《오늘 해주에서 삼촌이 오거던. 그래 마중가야겠기에…》 딱한 표정을 짓는 동길이의 얼굴을 바라보는 철명이의 얼굴에는 언듯 서운한 기색이 비껴지났다. 《그럼 할수없지 뭐. 오래간만에 오는 삼촌인데. 동길아, 걱정마. 나 혼자 갔다오겠어.》 그러자 동길이가 날씨가 풀린 다음 다음주 일요일에 같이 가자고 했으나 철명이는 기어코 떠날 자기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이제 내 꼭 왕다래나무를 가져올테니 그새 심을 준비나 하렴.》 동길이의 집을 나선 철명이는 큰길에 나서서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가던 도중 지나가던 자동차를 잡아타서 길을 단축한 그는 해가 기울무렵엔 양천리에 들어설수 있었다. 이어 인차 왕다래집주인도 찾을수 있었다. 철명이가 내미는 편지와 찾아온 사연을 다 듣고난 그 애 이모네는 너무도 기특하여 왕다래나무를 두그루씩이나 떠주었다. 여러곳에서 와서 가져가다나니 그 집에도 여분이 없었던것이다. 철명이는 너무 기뻐 고맙다고 몇번이나 인사를 하였는지 모른다. 《가서 잘 키우거라.》 《예, 알겠어요. 우리 마을에두 꼭 왕다래가 주렁지게 하겠으니 두고보세요.》 철명이는 먼길을 걸었지만 힘겨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음은 훨훨 날아갈것만 같았다. 짙은 구름속으로 들락날락하던 해가 서켠으로 한참 기울자 바람이 터졌다. 비지땀을 줄줄 흘리며 걷던 철명이는 나무뿌리가 얼가봐 제 솜옷까지 벗어 모포우에 덧씌워주었다. 오는 도중에도 마음씨 고운 운전사아저씨를 만나 차를 타고 마을어구에 들어섰을 때에는 날이 어두워졌다. 저 멀리 불빛이 흘러나오는 집들을 바라보며 걷는데 문득 앞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ㅡ 명ㅡ 아ㅡ》 번뜩이는 전지불빛과 함께 연거퍼 불러대는 소리는 분명 동길이의 목소리였다. 《오, 동길이ㅡ 나야, 나ㅡ》 철명이는 너무 반가와 전지불빛을 향해 반달음을 놓았다. 《철명아, 수고했어. 근데 이건 뭐니? 누가 보면 애기엄마인줄 알겠다야.》 《하하, 애기나무를 업었으니 애기엄마가 맞지 뭐.》 《정말 그렇구나, 응.》 《하하하.》 한껏 터치는 두 아이의 웃음소리는 불빛밝은 마을 하늘가로 랑랑히 퍼져갔다. 《자, 받어. 우리 삼촌이 가져온 기념품이야.》 동길이는 고급학습장과 원주필을 철명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그들은 자기 집 뜨락에 각각 한그루씩 왕다래나무를 심었다. 철명이는 나무둘레에 하얀 조약돌까지 곱게 깔아주며 조용히 속삭이였다. 《왕다래나무야, 잘 자라거라. 그래서 아버지장군님께서 우리 마을에 오시는 날 제일 크고 탐스러운 열매를 선참으로 정히 드리자. 응.》 철명이가 애어린 나무에 볼을 대고 살며시 부비는데 동생 봄순이가 사뿐사뿐 다가왔다. 《오빠, 이 나무에 정말 왕다래가 열리나?》 《그럼. 봄순아, 너 주먹만 한 왕추리 먹어봤지?》 그러자 봄순이는 입을 짭짭 다시다가 앵두입술을 나풀거렸다. 《응. 새콤달달한게 정말 맛있었어.》 《하지만 왕다랜 더 꿀맛이야. 크기는 또 얼마나 큰지 한알이 닭알만큼씩 커.》 철명이는 이미 제가 먹어본듯이 입을 다시며 제 주먹을 봄순이의 눈앞에 흔들어보였다. 《아마 한알만 먹어두 봄순이의 배가 너구리배처럼 볼록해질수도 있어. 그땐 제일 큰걸루 봄순이한테 줄테야.》 《야! 빨리 먹어봤으면 좋겠네.》 봄순이는 두손바닥을 찰싹 마주치며 콩당콩당 뛰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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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따스한 봄빛이 넘쳐흘러 고향마을은 과일꽃향기속에 잠겨들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철명이는 책가방을 놓기 바쁘게 호미를 들고 왕다래나무에 달라붙었다. 이제는 다래나무에도 봄물이 올라 파릇파릇 새잎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가 한창 풀도 뽑고 북도 주는데 동길이가 불쑥 뜨락에 들어섰다. 다짜고짜로 다래나무앞에 앉아 새파란 잎들을 세여보던 동길이가 입을 열었다. 《철명아, 너의 집 다래나문 벌써 잎이 열세개나 돋았구나. 헌데 우리 집의건 겨우 다섯잎밖에 안 돋았어. 에익…》 동길이는 입을 실룩거리며 뜨락의 과일나무들을 부러운 눈길로 둘러보았다. 철명이는 이마에 송골송골 내돋은 땀방울을 훔치며 말했다. 《애기처럼 정성다해 가꾸면 잎이 더 무성해질거야.》 《정말 왕다래가 열리긴 열릴가?》 《그럼, 우리 잘 가꿔보자.》 이렇게 말하는 철명이의 얼굴에 신심이 가득 어려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공부를 끝마치고 흥얼흥얼 코노래를 부르며 집뜨락에 들어서던 철명이는 우뚝 굳어지고말았다. 아니 글쎄 어미염소가 하얀 수염을 흔들며 한창 돋아나기 시작한 다래나무잎을 냠냠 뜯어먹고있는것이 아닌가. 책가방을 팽개친 철명이는 번개같이 달려가 어미염소의 불룩한 아래배를 힘껏 걷어찼다. 신발이 벗겨져 저만큼 날아갔다. 《이놈의 염소새끼, 정신나가지 않았어?》 순간 불에 덴 송아지처럼 와들짝 놀란 염소가 매해ㅡ 다급한 울음소리를 내며 쿵당쿵당 부엌문쪽으로 달아났다. 부엌문이 벌컥 열리며 어머니가 뛰여나왔다. 한쪽신발이 벗겨진채 염소를 노려보며 주먹까지 부르쥐고 씩씩대는 철명이를 띄여본 어머니가 푸념을 해댔다. 《염소가 축구공이냐? 당장 새끼를 낳겠는데 락태하면 어쩔려구그래?》 《체, 어머닌 정말… 고삔 왜 똑바로 매놓지 못했어요, 씨.》 《어쩌겠니. 봄순이가 매놓았다는게 그 모양인걸.》 《에익, 요거. 봄순이 어데 갔어. 맹꽁이같은거.》 주위를 흘겨보던 철명이는 무거운 배를 콩짚우에 드리우고 털썩 누운 염소를 보자 그리로 어정어정 다가갔다. 다가오는 철명이를 가느스름하게 뜬 노란 눈으로 질겁해서 보며 염소는 《매애해ㅡ》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가는 소리로 애처롭게 울어대는 염소를 보니 철명이는 발로 걷어찬 자기 행동이 후회되였다. 《에참, 매매야. 하필이면 애기나무잎을 뜯어먹을건 뭐니?》 철명이는 아무래도 염소가 어느때든지 나머지다래나무잎까지 다 뜯어먹어치울것 같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는 방안에 들어가 오늘 내준 숙제를 먼저 다하고 밖으로 나왔다. 잠간 서있던 그는 창고에 들어가 나무각자며 판자들을 꺼내다놓고 톱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비지땀을 뻘뻘 흘리며 다래나무둘레에 울타리를 치는데 한쪽어깨에 반두를 멘 동길이가 불쑥 나타났다. 《철명아, 뭘하니?》 《글쎄 우리 염소가 다래나무잎을 세개씩이나 뜯어먹었어. 잎이 없이야 자랄수 있니? 너두 빨리 가서 <위수구역>을 만들려마.》 철명이의 말에 동길이가 빈정거렸다. 《체, 풀먹는 염소가 철조망을 친들 안 뜯어먹겠니? 우리 염소는 령리해서 다래나무잎은 절대로 안 먹어.》 동길이는 괜한 수고라는듯 입을 비죽거리며 돌아섰다. 하지만 그것은 동길이의 괜한 장담이였다. 그로부터 한달이 지난 어느날 그만 우리를 뛰쳐나온 돼지가 뜨락에 심어놓은 왕다래나무를 순간에 죽탕쳐놓았던것이다. 잎이란 잎은 말짱 뜯어먹다못해 줄기까지 아삭아삭 다 짓씹어놓았던것이다. 그것을 본 두 아이는 너무도 억이 막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것 봐라. 내가 뭐라고 했니?》 철명이는 금시 눈물이 나올것만 같아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왕다래나무를 잘 가꾸어 고향마을에 새롭고 이채로운 멋진 풍경을 펼치자고 지금까지 애지중지 가꿔왔는데 도중에 동길이의 다래나무가 죽고말았으니 철명이의 마음은 알알하기만 했다. 《철명아, 다래나무를 가지러 다시 가는게 어때? 이번엔 나도 꼭 갈테야.》 동길이는 큰 눈을 데룩거리며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 집에서 또 주겠다고 하겠니? 렴치없이…》 그 집 주인에게 꼭 왕다래나무를 키워내겠다고 맹세까지 하고 돌아온 철명이로서는 이제 다시 가서 또 달라고 할 체면이 있을것 같지 못했다. 그보다는 그 집에 더이상 남에게 줄 나무가 없었던것이다. 《동길아, 할수 없어. 우리 집 왕다래나무를 같이 키우자. 한그루가 아직 살아있으니 잘 가꾸면 그게 자라서 너의 집이랑 온 마을에 쭉쭉 퍼져갈거야.》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니? 왕다랜지 왕다린지 정말 헐치 않구나.》 동길이는 시무룩해서 터벌터벌 걸음을 옮겼다. 며칠후 철명이와 동길이는 다래나무에 진거름을 한바께쯔 묻어주고 덧거름을 줄 개바닥흙을 가지러 개울가에 나갔다. 해님이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무렵 돌아오는 철명이의 마음은 즐겁기만 했다. 《동길아, 빨리 가자. 이걸 듬뿍 주면 오늘 밤에 한뽐은 더 클지도 몰라.》 《그럼. 며칠새 잎이 다래덕대를 쫙 덮을수 있어.》 두 아이가 흐뭇해서 마을길에 들어섰을 때였다. 마을쪽에서 봄순이가 할딱거리며 뛰여왔다. 《오빠, 큰일났어.》 《무슨 일이냐?》 《다래나무가 글쎄… 막 죽어가.》 《뭐라구?》 철명이의 어깨에서 개바닥흙배낭이 털썩 떨어져내렸다. 주먹을 부르쥐고 집으로 달려간 두 아이는 대번에 눈이 둥그래서 우뚝 굳어지고말았다. 싱싱하던 다래나무잎들이 새들새들 말라들고있었던것이다. 《이거 어떻게 된거야. 다른 살구나무잎이랑 강냉이잎들은 시퍼렇게 독을 쓰며 자라는데…》 철명이는 앞이 캄캄하여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말았다. 학교에 갈 때나 집으로 들어설 때면 푸른 잎들을 한들거리며 정답게 바래주고 맞아주던 사랑스런 다래나무였다. 철명이는 너무도 안타까와 후줄근해진 다래나무잎들을 안타까이 바라보기만 했다. 《왜 이럴가. 원인이 뭘가?》 동길이가 머밋거리며 철명이앞에 다가와 물었다. 《철명아, 과수반장아저씨한테 찾아가봐야 하지 않을가?》 《아니야. 우리 손으로 키우자고 하지 않았니. 일단 시작한 일인데 우리 힘으로 끝까지 살려내야 해. 동길아, 참고서를 가지러 군학생도서관에 가자.》 철명이가 벌떡 일어나 떠날 차비를 서두르자 동길이는 큰 눈만 뜨부럭거리며 해가 기울어지는 하늘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철명아, 인차 어두워지겠는데 그 먼델 언제 가겠니? 래일 가지 않을래?》 《뭐? 래일? 다래나무가 당장 죽어가는데 래일이 뭐냐. 빨리 가자.》 그러자 동길이는 심드렁해서 머리를 저었다. 《에참, 이러다간 왕다래는커녕 좀다래도 못따낼것 같구나.》 《그럼 뭐 새로운걸 한다는게 밥먹듯 쉬운줄 알았니?》 《그래두 이거야 어디… 철명아, 다래나무는 너나 가꾸어라. 난 암만해두 다른걸 하겠어.》 《아니, 그건 왜?》 《이거야 어디 자라는지 마는지 잘 알리지도 않는 나무인데다 이렇게까지 힘드니까 맥살이 나서…》 동길이는 퇴마루에 퍼더버리고 앉아버렸다. 《그럼 넌 뭘하면 좋겠니?》 《난 풍력발전기를 만들어볼테야. 그럼 볼만할거야.》 《에이, 너 좋을대로 하렴.》 야속한 눈길로 동길이를 바라보던 철명이는 군학생도서관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에이참, 비겁쟁이같은거.… 내 혼자서라도 기어이 왕다래를 살릴테야. 두고봐.) 그날 밤중으로 돌아온 그는 뿌리옆에 콱 묻어놓은 진거름을 다 거두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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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다래가 열렸다. 왕다래가 열렸다!》 철명이는 너무 좋아 어쩔줄을 몰라했다. 드디여 첫 열매들이 달리기 시작한것이다. 걸상을 가져다놓은 철명이가 그우에 올라서서 하나둘 세여보니 팥알만 한 열매들이 스물두알이나 되였다. 처마를 마주한 널직한 덕대우로 넝쿨을 뻗으며 쭉쭉 뻗어올라가는 왕다래나무잎새들을 바라보는 철명이의 마음은 즐겁고 기쁘기만 했다. 어린 나무를 떠다심은 해에는 열매가 안 달리더니 올해엔 단번에 스물두알이나 달렸다. 래년엔 아마 백알 더 달릴것이다. 그다음엔 또 얼마나 더 달릴지 아직은 모른다. 《야, 멋있구나! 다래나무야, 정말 고맙다.》 철명이는 기쁨에 겨워 다래넝쿨을 쓸어보고 또 쓸어보았다. 정말이지 막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싶었다. 그 순간 철명이의 눈앞에는 진눈까비속을 헤치며 애기나무를 업고 오던 날과 참고서를 가지러 군학생도서관으로 달리던 안타깝고 힘겨웁던 그날들이 새삼스레 안겨왔다. 그 참고서를 보고서야 다래나무에 진거름을 너무 많이 주어 새들새들 말라들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그 나날들을 이겨낸 보람이 있어 오늘은 이렇게 소중한 첫 열매가 맺혀 철명이의 기쁨은 하늘에 닿을것만 같았다. 철명이는 그 기쁜 소식을 알려주러 동길이네 집으로 달려갔다. 헐떡거리며 뜨락에 들어서니 뜻밖에도 마을아이들이 가득 모여있었다. 웬일인가 하여 눈여겨 살펴보니 마당구석 퇴수가 나가는 곳에 커다란 웅뎅이를 팠는데 돌까지 빙 둘러싸여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황새가 게구멍을 들여다보듯이 물웅뎅이안을 들여다보고있었다. 철명이가 아이들을 비집고들어서니 웅뎅이곁에 엎드린 동길이가 사기나서 주절거리였다. 《자, 봐라. 이 고기새끼들이 지금은 손가락만 해도 한달만 있으면 내 팔따시만 해져. 아무려면 한철에만 먹는 과일나무에 비하겠니? 이것들이 새끼를 쳐서 펄떡거릴 땐 너희들도 일년내내 생선국을 먹을수 있단 말이야.》 그 말을 들으며 철명이는 고개를 돌려 대문곁에 세운 긴 장대기우를 쳐다보았다. 거기엔 풍력발전기가 매달려있었는데 세가닥날개가 이따금 생각나면 맥없이 한바퀴씩 돌아가군 하는것이였다. 철명이의 귀가에는 숙제를 제대로 안하고 풍력발전기를 만든다면서 떠들어대던 동길이의 말이 또렷이 들려왔다. 《이제 이 풍력발전기가 쌩쌩 돌아갈 땐 얼마나 멋있는줄 아니? 남새온실이랑 돼지우리까지 뜨뜻하게 덥힐수 있어. 아무려면 멍청히 서있는 과일나무에 비하겠니?》 철명이는 어처구니가 없어 동길이쪽에 대고 찔 눈을 흘기고는 그 자리를 슬며시 뜨고말았다. (풍력발전긴 저 모양을 해놓고 또 이젠 물고기?!…) 터벌터벌 집으로 향하는 철명이의 머리속엔 동길이에 대한 고까운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애였다. 처음엔 땅우에서 움트던 《왕다래꿈》이 《풍력발전기날개》가 되여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이번엔 《물고기지느러미》가 되여 물속에서 헤염치고있으니.… 이제 물고기기르기마저 재미없어지면 뭘 또 하겠다고 할가. 저 물고기새끼라도 착실히 길렀으면 좋으련만 저것도 믿을것이 못된다. 우리 집 왕다래나무도 자기가 키우던것처럼 죽거나 그러다 말겠거니 했는데 드디여 열매가 달리는것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래서 저런 《웅뎅이양어장》을 만든것이 틀림없었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랬다고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내밀어보자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이걸 했다,저걸 했다 부산스레 돌아가니 참.… 그러다나니 학생의 기본임무인 공부까지도 점점 뒤떨어지고있었다. 어제 친 수학시험에서 처음으로 4점을 맞고 머리를 들지 못하던 동길이였다. (에참, 동화에서 나오는 《귀가 큰 토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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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명이네 집 뜨락엔 왕다래향기가 가득히 넘쳐흘렀다. 게다가 학급동무들이며 마을아이들까지 가득 몰려와 뜨락이 좁다하게 붐비면서 흥성거렸다. 철명이가 그렇게 애써 가꾼 왕다래를 수확한다니 구경온 애들이였다. 그중에는 이미전에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와서 무르익어가는 왕다래를 손가락으로 하나, 둘 세여보던 애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마치 왕다래를 처음 보는 애들처럼 희한해서 복작거리고있었다. 그속에는 봄순이랑 자기 이모에게 편지를 써서 애기나무를 구해오게 한 처녀애도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큼직한 왕다래가 한알씩 쥐여져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닭알만큼 큰 다래를 짜개서 서로 나누어 맛보기도 하였다. 어떤 아이들은 너무 맛있어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면서 연방 감탄을 해댔다. 《야! 맛있다. 이렇게 크고 맛있는 왕다래는 난생 처음이야. 야! 철명인 정말 대단한 애로구나.》 《그렇지 않구. 끝끝내 자기 힘으로 해냈으니말이야.》 《야! 이건 너무 맛있어서 혀바닥이 통채로 넘어가겠다고 하는데 이럴 땐 어쩌면 좋니, 응?》 그 애가 입을 항ㅡ벌리고 두손가락으로 혀를 집어당기는 흉내를 내자 와그르르ㅡ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좋아하는 애들을 바라보며 철명이는 너무 기뻐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스물두알이 맺혔던 열매에서 웬일인지 자라면서 여섯알이 맥없이 떨어져나가 열여섯알밖에 달리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몰랐다. 자기가 키우는 다래가 산에서 따먹던 대추알만 한 다래가 아니라 점점 커져 살구알만큼 커지고 지어는 복숭아만치 커가는것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던 철명이였다. 그런데 숱한 아이들이 몰려와 제일처럼 기뻐하는것을 보니 철명이의 몸과 마음은 하늘로 둥둥 떠가는것만 같았다. 방금전 아이들은 동길이네 집 물고기를 구경하고는 도리머리질을 하며 우르르 철명이네 집으로 밀려왔던것이다. 동길이네 집 《양어장》에서는 이제야 겨우 애기손바닥만 한 댓마리의 물고기들이 드문드문 떠다녔기때문이였다. 동무들은 저저마다 철명이를 에워싸고 축하도 해주고 목마에 태워 빙글빙글 돌기까지 했다. 《철명인 앞으로 큰 사람이 될수 있어.》 동무들속에 끼워 그 모습을 부럽게 바라보는 동길이앞으로 봄순이가 쪼르르 다가왔다. 《동길오빠, 물고기 얼마나 컸나?》 동길이는 차마 떳떳이 말해주지 못하는것이 창피한지 머리를 숙이고말았다. 두주일도 못되여 또 물고기기르기를 집어치운 동길이였기때문이다. 이때 관리위원장아저씨가 뜨락에 들어서며 큰 소리로 말했다. 《철명아, 네가 공부도 착실히 하고 과외도서랑 많이 읽더니 우리 마을에 새로운 풍경을 안아왔구나. 그러나 그보다두 이렇게 끝까지 큰 열매를 가꿔낸 네 마음이 더 아름답구 통이 크구나.》 그 말에 아이들은 더욱더 환성을 올리며 왁작거렸다. 철명이의 가슴은 간절한 그리움으로 설레였다. (난 앞으로 공부를 더 잘할테야. 그래서 아버지장군님께 큰 기쁨을 드릴테야. 야! 이 기쁜 날 아버지장군님께서 오시였으면…) 보름달처럼 밝게 웃음짓는 철명이의 가슴속엔 벌써 더 크고 훌륭한 열매를 가꿔갈 아름다운 꿈이 끝없이끝없이 펼쳐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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