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지 《아동문학》 주체97(2008)년 제11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최 영 호
1
둥그런 상에 오종종 모여앉아 문제풀이에 여념이 없는 학습반애들을 한명한명 둘러보는 지성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어리였다. 창문쪽 맨 끝에 앉은 영학이ㅡ 그는 분단적으로 세손가락안에 꼽히는 최우등생이다. 그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은 용팔이와 남혁이는 공부는 영학이만 못하지만 무슨 일에서나 꾸준하고 직심스러운 애들이다. 그뿐인가. 그 맞은편에 참하게 앉아있는 진옥이는 소년단반에 한명밖에 없는 처녀애이며 서른명 학급애들의 학습을 총책임진 학습담당분단위원이다. 이쯤되면 우리 5소년단반의 실력이 상당한 축에 속한다고 내놓고 소리칠만 하였다. 이제 여기 모인 다섯명이 머리를 싸매고 달라붙는다면 우리 소년단반이 능히 5점최우등 소년단반이 되여 학급에서 1등으로 될것이다. 얼마전에 학교에서는 학급별 학과경연을 조직했는데 담임선생님은 실력을 높이기 위해 소년단반별 경쟁을 조직하였던것이다. 지성이는 자연히 마음이 흥그러워져 앞에 앉은 용팔이에게 말을 건넸다. 《용팔아, 모를 문제가 없니?》 《글쎄… 세번째 응용문제가 좀 까리까리하긴 한데…》 《세번째 응용문제?… 그 문제야 <최우등생의 벗>을 보면 쉽게 풀수 있겠는데 그러누나.》 《글쎄 그러니까 문제지 뭐. 학교도서실에서도 그 책을 빌려보자면 조련치 않다는데… 아 제목그대로 최우등생들의 벗이라는 그 책이 이 우등생하고도 벗이 되자고 할게 뭐야.》 지성이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학과경연을 앞두고 학교안의 많은 학생들이 저저마다 그런 참고서들에 《욕심》을 내고있었던것이다. 《용팔아, 너무 걱정말아. 내 이제 그 책을 구해다 여기 이 책상우에 척 펼쳐놓는걸 봐. 아 <최우등생의 벗>뿐이겠니. <수재의 벗>, <인재의 벗>해서 벗자가 붙은 책은 다 구해오겠어.》 《<인재의 벗>이라는 책은 없어.》 용팔이가 눈이 올롱해서 반박했다. 《나두 알아. 하지만 만들어서라도 얻어오겠다니까. 널 위해서…》 《뭘?》 하하하!… 학습반실에 웃음보가 터졌다. 《챠, 이런…그저 우리 지성이, 아니 우리 소년단반장이 제일이라니까.》 용팔이는 엄지손가락까지 펴보이며 벙싯거렸다. 《뭘 그러니. 그쯤한걸 가지구.…》 지성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럴만도 하였다. 도일보사 기자로 있는 외삼촌에게 부탁 한마디만 하면 그런 책들을 손에 넣는것쯤은 뒤산 솔밭에서 솔방울 한가방 채워오기보다 더 쉬운 일이였으니까.… 설사 쉬운 일이 아니래도 그렇다. 용팔이를 위하고 소년단반을 위한 일인데 어데 가선들 그런 책 한두권쯤이야 구해오지 못하겠는가. 이때 다소곳이 앉아있던 진옥이가 느닷없는 물음을 던져왔다. 《지성동무, 그런데 천수동무가 왜 아직 학습반에 안 올가?》 《음, 그 앤 오늘 읍에 좀 갔다오겠다고 했어.》 《읍에?… 거긴 왜?》 진옥이의 쌍까풀진 고운 눈이 동그래졌다. 《글쎄… 볼일이 있어 갔겠지 뭐. 인츰 이사도 가야 하니까 준비할게 좀 많겠니? 사실 우리도 짬이 나는대로 도와주었으면 좋겠는데 학과경연이 눈앞에 왔으니 그럴수는 없는 노릇이고… 할수 없지 뭐. 떠나는 날 온 소년단반이 떨쳐나서 기념품도 듬뿍 안겨주고 짐꾸리는거랑 도와주기로 하고 지금은 그저 시간이나 푼푼히 보장해주는수밖에…》 《지성동무, 내 생각엔 그것보다도 그 동무의 학습에 더 관심을 돌렸으면 좋겠어.》 《뭐, 뭐라구?》 이번에는 지성이의 눈이 왕밤알만 해졌다. 《지성동무도 알다싶이 천수동무야 입원치료를 받느라고 거의 한달동안이나 수업에 못 참가하지 않았니.》 물론 그랬었다. 자기 아버지의 자전거를 몰래 꺼내타고 돌아치다가 불쑥 나타난 뜨락또르와 골받이를 할번 했던것이다. 글쎄 오죽이나 급했으면 뜨락또르를 향해 《비키라요, 비키라요!》하면서 목이 터지도록 고함을 쳐댔겠는가. 길옆의 개울창에 구겨박혀 오른팔뼈에 금이나 간것이 천만다행이였다. 그때문에 시오리나 떨어진 읍병원에서 침대생활을 했는데 무엇때문에 진옥이는 그 일을 꼬집어 상기시킨담… 《그래서?…》 지성이는 퉁명스레 되물었다. 《아이참,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 그런 동무니까 학습반에도 더 잘 참가시키고 학습방조도 더 잘해서 하루빨리 여기 모인 동무들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거지 뭐.》 《…》 지성이는 어이가 없었다. 글쎄 단 며칠동안에 한달동안의 밀린 학습을 보충시켜 여기 애들의 수준으로 올려세운다는게 어디 말이 되는가. 여느때라면 또 모르겠다. 학과경연을 앞두고 5소년단반애들의 전반수준을 올리기에도 숨이 가쁜 이때 당장 떠날 애의 학습수준까지 걷어안고 언제 관심을 돌려준단 말인가. 솔직한 말로 그럴 겨를이면 용팔이나 남혁이의 문제풀이라도 한문제 더 봐주는게 옳은 일일것이다. 《진옥동무, 물론 동무말대로 천수의 성적도 끌어올리면야 좋지 뭐. 하지만 당장 떠날 애를 놓고 학습반에 꼭꼭 나오라, 밀린 학습을 보충받아라 할 필요가 있겠니? 천수도 그래 우리도 그래 서로 딱하기만 할텐데… 그러니 그 애일은 그 애한테 맡기고 실력이 약한 남혁동무만 좀 맡아주면 좋겠어. 아, 이번 경쟁에서 우리 소년단반이 1등을 해야 할게 아니가.》 《누가 뭐 1등을 하지 말자니? 밀린 학습도 보충시키고 1등도 하면 더 좋다 그 소리지 뭐. 난 반장동무가 천수동무의 학습에도 응당한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해!》 《됐어, 됐어!》 지성이는 홰홰 손을 내저었다. 머리칼은 길어도 생각은 짧은게 처녀애들이라더니 소학반때부터 중학반 2학년생이 된 오늘까지 한책상에서 공부해온 진옥이가 이렇게까지 생각이 밭은 애인줄은 미처 몰랐다. 뭐 밀린 학습도 보충하고 1등도 하면 더 좋다고?… 그렇게 되면 좋은줄 누가 모르나, 하지만 욕심도 지나치면 손해를 보는 법이다. 털어놓고 말해서 천수 본인도 썩 달가와하지 않는 보충학습을 괜히 옆에서들 붙잡아 시킬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원래 머리가 나쁜 애도 아닌지라 새 학교에 가서도 얼마든지 봉창할수 있을텐데 말이다. 그런데도 진옥이는 저만이 책임성이 있는듯이 보충학습, 보충학습 하면서… 쳇, 학습담당위원이면 단가. 저도 우리 5소년단반의 한 성원이면서 말이야. 지성이는 이불깃은 안중에도 없이 무턱대고 발을 펴려 하는 진옥이의 외고집이 여간 불만스럽지 않았다.
2
《따르릉ㅡ》 첫번째 수업시간이 끝나기 바쁘게 영학이가 지성이를 교실밖으로 불러냈다. 《지성아, 너 소문 들었니?》 《무슨 소문?》 《글쎄 천수네 탐사마을이 말이야, 아예 통채로 옮겨간다질 않니.》 《뭐? 어디로?》 지성이는 맑은 날 천둥소리를 들은것만치나 놀랐다. 《글쎄 그건 딱히 모르겠는데 새 광맥탐사때문에 여기 탐사중대가 몽땅 철수해간대.》 《그래?…》 지성이의 목소리는 순간에 모기소리만 해졌다. 천수네 집을 비롯해서 고작 여섯채밖에 안되는 마을이긴 했지만 자기네 마을과 나란히 이웃하고있던 그 밤나무골동네(탐사마을의 별칭이다.)가 다 없어져버린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속이 허전해왔던것이다. 허전한 마음은 그것뿐이 아니였다. 《영학아, 그럼 천수네만이 아니라 진옥이네도 이사를 가야 한다는 소리로구나, 그렇지?》 《진옥이는 뭐 탐사대가족이 아닌가 뭐, 그 애 아버진 탐사중대 부중대장인데… 아마 이번에도 그 애들은 서로 같은 마을로 이사를 갈거야.》 영학이는 뻔한걸 묻는다는듯 눈을 흘기였다. (같은 마을로?… 음, 그래서 진옥이가 그처럼 극성이댔구나.) 지성이의 머리속에는 불현듯 이틀전에 있었던 일이 맑은 수정천가에 비낀 그림자처럼 우렷이 떠올랐다. …온몸에 저녁해빛을 받으며 탐사대마을로 향하는 지성이의 발걸음은 나는듯이 가벼웠다. (천수가 이걸 받으면 너무 좋아 껑충껑충 뛸거야.) 지성이는 손에 들려있는 아령을 내려다보며 흐뭇한 웃음을 피워올렸다. 오래동안 팔을 쓰지 못해 팔목이 새다리만큼이나 가늘어지고 팔힘도 연필 한자루가 무거울정도로 약해졌다면서 엉너리를 쳐대던 천수의 그 노죽스러운 모습이 눈에 삼삼히 보이는듯 했다. 이제는 그런 《익살》도 통하지 않게 되였다. 이 아령으로 아침저녁 직심스레 팔힘키우기를 하면 한달만에는 알 도리가 있을것이기때문이였다. 아마 몇달후에는 새 학교에서 상대가 없는 팔씨름군으로 큰소리를 탕탕 칠런지도 모른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흥그러워진 지성이는 자기의 발걸음이 언제 천수네 집앞에 와멎었는지 알지 못했다. 어깨를 으쓱이며 뜰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대문안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또랑또랑 울렸다. 《…그러니 그 <수재의 벗>때문에 학습반에도 안 나온단 말이니?》 틀림없는 진옥이의 목소리였다. 《그럼 어쩌겠니, 한달동안 수업엔 빠졌지, 그렇다고 시험공부에 눈코뜰새 없는 학습반애들에게 매달리기도 뭣하지. 혼자서라도 참고서를 놓고 밀린 학습을 보충하는수밖에…》 이런 퉁명스러운 대꾸를 해대는것은 천수가 분명했다. 그러고보면 진옥이가 천수네 집에까지 찾아다니며 학습반이요, 보충학습이요 들볶아대는 모양이였다. 애두 참, 그만큼 말했는데 아직도?… 지성이는 속이 좋지 않았다. 그러거나말거나 진옥이의 챙챙한 목소리는 그냥그냥 귀전에 날아와박혔다. 《그렇다고 배우지도 못한걸 어떻게 혼자서 보충한다고 그러니?》 《왜 못해? 그 책엔 풀이방법이며 풀이답까지 다 나와있는데두?…》 천수는 여전히 시답지 않은 어조로 대꾸했다. 《그래도 동무들의 도움을 받는거만이야 하겠니?》 《동무들의 도움… 흥, 족제비도 낯이 있대. 그렇지 않아도 이 팔때문에 지성이랑 소년단반동무들에게 미안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이제 또 밀린 학습때문에 그들의 귀중한 시간을 뺏는단 말이냐? 아니, 그렇게는 할수 없어.》 천수는 만만치 않게 뿔을 세웠다. 당장 이사짐을 싸게 되였는데 지꿎게 따라다니며 성화를 먹이니 뿔이 돋을만도 했다. 지성이는 반쯤 열린 대문사이로 안의 동정을 살폈다. (엉?…) 천수의 랭랭한 태도에 서리맞은 호박잎이 됐으리라 생각했던 진옥이가 웬걸, 생글생글 웃으며 천수의 팔을 끄당기고있었다. 토방우에 올라앉은 그의 앞에는 어느새 교과서와 학습장까지 척 펼쳐져있었다. 《천수동무, 그러지 말고 어서 공부를 하자. 난 동무가 여기에 앉기 전엔 이 팔을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어!》 《진옥동무, 나라고 왜 동무들과 같이 공부하고싶은 생각이 없겠니. 하지만 다른 애들 생각도 해야지 제 생각만 해서야 되겠니? 나야 여길 인차 떠나야겠는데 난 동무가 이럴새며는 용팔이나 남혁이의 학습을 더 도와주었으면 좋겠어!》 지성이는 그러는 천수가 말할나위없이 고마왔다. 산이 높으면 그림자도 크다더니 역시 키가 크니 생각하는 품이 또한 넓었다. 그런데도 진옥이는 여전히 한본새로 달구어댄다. 《그러게 학습반은 학습반대로 하고 저녁마다 둘이서 따로 공부를 하자는데도 그러누나.》 지성이는 선뜻 리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왜 저렇게 극성이람, 학습담당분단위원이 돼서? 아니 그런것 같지도 않다. 천수가 이제는 다른 학교, 다른 분단 애나 다름없다는것을 그라고 모를수가 없는것이다. 그렇다면 왜? 참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다. 지성이는 마구 뒤엉킨 실퉁구리라도 마주한듯 머리를 기웃거리며 한동안이나 대문앞에 서있었다.… 좀해서 풀릴것 같지 않던 그날의 실퉁구리가 영학이의 《정보》 한마디에 단박 매듭풀린 타래실이 되여 슬슬 풀려나왔다. 뭐 같은 마을로 이사를 간다고? 그러니 한학교에 가서 공부하게 된다는 소리가 아닌가. 음! 그랬댔구나. 바로 그래서 진옥이가 그처럼 천수의 밀린 학습에 관심이 높고 열성이 높댔구나… 지성이는 진옥이의 심정이 충분히 리해되였다. 사실말해서 함께 이사해간 동무가 공부를 못해 남들의 뒤소리를 들을 때 옆에서 얼굴이 따끔거리지 않을 애가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그 동무라는게 자기가 학습담당위원으로 있으면서 직접 학습방조를 맡았던 그런 애라는게 알려지기까지 하면 그 망신스러움은 이루 더 말할나위가 없게 된다. (에잇 새침데기같은거! 그러면 그렇다고 속시원히 말이라도 할것이지…) 지성이는 옆에 있는 영학에게로 돌아섰다. 《영학아, 우리가 준비하는 기념품 말이야. 아무래도 한조 더 준비해야겠어.》 《아니, 그건?… 음 알만해. 진옥이것도 말이지?》 역시 《베아링머리》가 달랐다. 소년단반장의 의도를 척척 알아맞히니까. 남보다 공부를 잘하는게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영학아, 천수도 그래, 진옥이도 그래 우리 소년단반동무들이 눈이 펀해가지고 그냥 떠나보낼수야 있니?》 《아, 그렇지 않구!… 용팔이와 남혁이도 가만있지 않을거야.》 《그리고 말이야. 오늘부터라도 천수의 학습을 좀 도와주어야겠어. 까놓고 말해서 진옥이가 우릴 얼마나 섭섭히 생각하겠니. 제 공부만 공부라고 떠나는 자기들 생각은 손톱눈만큼도 안한다고 말이야.》 《지성아, 넌 어쩌면… 넌 정말 좋은 동무야.》 영학이는 두눈이 초롱초롱해서 지성이를 쳐다보았다. 《뭘…》 지성이는 발기스레 딸기물이 오르는 얼굴을 슬며시 외로 틀었다. 《따릉 따르릉…》 두번째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지성이와 영학이는 약속이나 한듯 동시에 교실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였다.
3
《아니 지성아, 넌 공부는 안하고 웬 종이장난질이냐?》 부엌에서 올라온 어머니가 한구들 널어놓은 종이말이며 갖가지 크기의 마분지쪼각들을 보고 하는 나무람이였다. 《쳇, 어머닌 알지도 못하면서… 이게 장난일게 뭐예요. 외삼촌이 보내준 책에 겉표지를 해씌우는건데… 자, 어때요?》 지성이는 하얀 마분지표지우에 덧글로 진하게 제목까지 써넣은 책들을 보란듯이 어머니앞으로 내밀었다. 《최우등생의 벗》, 《수재의 벗》… 《음, 멋있구나. 그런데 … 표지가 너무 두텁지 않니?》 《이쯤은 돼야 해요. 온 학습반이 다 돌려가며 볼건데요 뭐.…》 《아니, 그렇게 힘들게 구한것을 학습반공동용으로 내놓아도 일없겠니?》 어머니는 놀라운 표정으로 지성이를 쳐다보았다. 그럴수밖에 없었다. 출장지에 가있는 외삼촌에게 두번세번 줄을 놓아 부탁하느라고 어지간한 품을 들인것을 어머니가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하지만 지성이는 어머니의 속마음을 너무나도 빤드름히 알고있었다. 집안에서나 밖에서나 제것만 제것이라고 꽁지고 돌아가는것을 제일 싫어하는 어머니였던것이다. 아무것이나 동무들과 나누어 써버릇해야 큰 사람이 될수 있다고 버릇처럼 외우군 하는 어머니인것이였다. 그런 어머니가 짐짓 놀라운 표정을 지으시는것은 이 아들의 속이 어느정도 여물었는지 슬쩍 뚱기쳐보는것이였다. 쳇 아무려면 중학교 2학년생인 내가 그쯤한것도 가려보지 못할가?… 이때 밖에서 지성이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성아!… 지성이 있니?》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어제끼니 난데없이 용팔이가 뜨락에 우뚝 서있는것이 아닌가. 《아니, 네가 어떻게?…》 《지성아, 너 진옥이 어디 갔는지 모르니?》 《진옥이?…》 지성이는 밑도끝도 없는 물음에 얼떠름해있다가 인츰 말을 이었다. 《그 앤 아침에 읍에 있는 제 사촌언니한테 가는것 같던데…》 그랬었다. 아침달리기를 하다가 피끗 마주쳤을 때 읍상점판매원으로 있는 자기 언니에게 가는 길이라면서 반달음을 놓던 생각이 났다. 《에ㅡ 맹꽁이같은거!》 용팔이의 입에서는 대바람에 이런 말이 튀여나왔다. 지성이는 그 말이 몹시 거슬리게 들렸다. 왜서 진옥이가 맹꽁이란 말인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오늘 같은 일요일날 자기 언니한테 학용품이랑 가지러 갈수도 있는거지 뭘 그러니. 이제 새 학교에 가서 공부해야겠는데…》 그렇지만 용팔이는 코웃음을 쳐댔다. 《헹, 바로 그래서 맹꽁이라는거야. 아, 지금껏 뭘하고 맹하니 앉아있다가 부디 이사짐을 싸는 날 읍에 가는가 말이야.》 《이사짐?…》 지성이는 두눈이 둥그래졌다. 《진옥이네가 오늘 이사를 간대. 지금 그 애 아버지랑 이사짐을 다 싸놓고 눈이 새까매서 찾고있어. 얼마나 속상해하는지 아니?》 《아니 그 애넨 며칠후에 천수네랑 다같이 떠난다더니?》 《아, 가는 곳이 다른데 같이 떠나긴 어떻게 같이 떠난다고 그래… 진옥이 아버진 중대장으로 임명되여 다른 탐사중대로 간단 말이야.》 《뭘? 아니, 그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엉?》 지성이는 지금 하는 용팔이의 말이 사실인지, 며칠전에 들은 영학이의 말이 옳은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명백히 결심을 내릴수 있었다. 한시바삐 진옥이네 집으로 달려가야 한다는것이였다. 그것도 혼자서가 아니라 온 소년단반을 다 데리고 말이다. 《용팔아, 너 이제 당장 애들한테 가서 알려라. 준비한것들을 가지고 진옥이네 집에 모일것! 알겠지? 자, 어서!》 지성이는 물쏟듯 내리엮고는 제 먼저 대문밖으로 달려나갔다. 얼마 안있어 진옥이네 집은 헐레벌떡 달려온 애들로 붐비였다. 《너희들이 웬일이냐?》 토방우에 쌓아놓은 이사짐들에 하나하나 덧끈을 조여매던 진옥이 아버지가 묻는 말이였다. 《진옥이 아버지, 우리가 도울게 뭐 없나요?》 《음, 너희들이 이사를 도와주러 왔구나. 그런데 어쩐다? 할일이 별로 없는데… 가만, 너희들 지금이 학습반을 할 시간이 아니냐?》 《일없어요. 아, 함께 공부하던 동무가 떠나가는데 그까짓 학습반이 대수나요?》 지성이는 이렇게 말하고나서 큼직한 트렁크를 닁큼 집어들었다.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한듯 애들이 일시에 이사짐무지에 달라붙었다. 그리고는 제마끔 자동차가 서있는 곳으로 짐들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진옥이 아버지는 그러는 애들을 바라보며 더 말릴념을 못했다. 《원 애들두. 그런데 신새벽에 나간 이 애는 어디 가서 여적 안 들어온담?》 《진옥인 새 학교에 가서 쓸 학용품때문에 읍에 있는 사촌언니한테 갔대요.》 용팔이가 지성이에게서 들은것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뭐 읍에?… 헛 참!》 《근데 진옥인 오늘 이사하는걸 모르나요?》 《알지. 사실은 아직 며칠 있다갈것으로 예정되였는데 갑자기 그쪽으로 가는 자동차편이 있다고 어제 련락이 왔지. 이사날자가 갑자기 달라지니 그 앤 뭔가 급해하더니…》 이때 《진옥이가 온다!》 하는 누군가의 웨침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눈길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정말로 얼굴에 땀방울이 보송보송한 진옥이가 할싹할싹 토끼숨을 톺으며 대문안으로 들어섰다. 손에는 자그마한 꾸레미를 들었는데 첫눈에도 책꾸레미라는것이 헨둥하니 알리였다. 《아니 얘, 넌 오전중으로 떠나야 한다는걸 뻔히 알면서도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느냐? 동무들이 학습반도 못하고 이렇게 다들 와서 도와주는데 한가스레 제 볼장만 보러 다녀?…》 진옥이의 얼굴이 빨갛게 고추빛으로 변했다. 지성이는 진옥이 아버지가 너무한것 같았다. 오죽했으면 이른아침부터 시오리길을 달려갔다 왔겠는가. 《진옥이 아버지, 됐어요. 우린 모두 진옥동무를 바래주자고 왔는데요 뭐.》 지성이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애들이 모두 진옥에게로 모여들었다. 진옥이는 자기를 빙 둘러싼 그들모두에게 방긋이 웃음을 지어보였다. 《정말 고마워!…》 정다운 눈길로 동무들을 둘러보던 진옥이는 문득 천수에게서 시선을 멈추더니 들고온 꾸레미를 그의 앞으로 쑥 내밀었다. 《천수동무, 이걸 받아. 동물 주자고 참고서들을 좀 구해왔는데 학습에 도움이 되겠는지 모르겠어.…》 《아니, 이건?…》 놀란것은 천수뿐이 아니였다. 모두의 눈이 대번에 화등잔만큼씩이나 둥그래졌다. 진옥이는 두눈만 연신 껌벅거리고 서있는 천수에게 꾸레미를 안겨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동무가 보고싶어하던 그 <수재의 벗>만은 종시 못 구했어. 대학공부를 하는 우리 언니한테도 그 책만은 없더구나. 정말 안됐어!…》 《진옥동무, 제발 이러지 말아. 벌써 며칠째나 밤늦도록 내 공부를 도와준것만도 미안한데 자꾸 이러면 난 뭐가 되라는거니?…》 천수가 진옥이의 손을 꼭 잡으며 하는 말이였다. 《아이참, 천수동무두! 뭐가 되긴 뭐가 되겠니. 최우등생이 되여야지!…》 지성이는 자기의 눈과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눈앞에 펼쳐지는것이, 귀에 들리는것이 모두 너무나 뜻밖의 일들이였던것이다. 그러니 진옥이는 자기가 쓸 학용품때문이 아니라 천수가 볼 참고서때문에 읍거리로 달려갔었단 말인가. 갑자기 이사차가 들이닥친다니 신새벽에… 그건 그거고 천수의 학습을 여러날째 밤늦게까지 도왔다는건 또 무슨 소리인가… 지성이는 선뜻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였지만 저도 모르게 가슴이 후더워오름을 느끼였다. 진옥이의 말은 계속되였다. 《천수동무! 우리 약속하지 않았니. 서로 돕고 배워줄래기를 하면서 이번 학년엔 꼭 최우등생이 되자고… 그런데 이젠 학교가 달라지고 소년단반이 달라진다고 그 약속도 달라져서야 되겠니?… 난 어디 가서든지 동무가 5점최우등생이 되였다는 소식을 꼭 기다리겠어!》 순간 지성이는 불덩이를 안은듯 가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 진옥이는 바로 그런 동무였구나. 남아있는 애든 떠나는 애든 가림없이 모두가 공부를 잘하도록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동무, 어디에 가나 아버지장군님께 기쁨드릴 5점꽃만을 피워가도록 진정으로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참 좋은 동무!…
천수가 더는 우리 소년단반애가 아니라는, 그 애때문에 소년단반의 전반성적에 지장을 받을수 있다는 꾀바른 타산만 앞세우면서 진옥이의 진정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자신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에잇, 난 정말 생각이 짧은 애야. 기껏 동무를 위한다는게 아령따위나 생각해내고 그래도 뭐 나이상 좋은 동무가 없는듯 어깨를 으쓱거려?…) 지성이는 진짜 좋은 동무가 어떤 동무인지 똑똑히 깨달았다. 《천수야, <수재의 벗> 책은 걱정말아. 내 오늘 가지고 갈게. 그걸 보며 함께 공부를 하자. 그리고 새 학교에 갈 때도 그 책을 가지고 가. 거기 가서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5점최우등생이 되여야 할게 아니니!》 《정말 고맙구나. 우리 동무들은 모두가 참 좋은 동무들이구나.》 천수는 눈물이 글썽해서 지성이의 두손을 꼭 감아쥐였다. 영학이와 용팔이, 남혁이들이 그 우에 자기들의 손을 덧놓았다. 높이 떠오른 둥근해도 따사로운 빛을 한껏 뿌려주었다. 정말이지 모든것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참 좋은 여름날의 하루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