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지 《아동문학》 주체97(2008)년 제10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제 2 회)
용일의 가슴은 갑자기 널뛰듯 오르내렸다. 방금전 학교마당에 들이닥치던 놈들의 자동차들이 얼른얼른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유격대의 맹활약에 악이 받친 놈들이 범골에 있다는 유격대를 《토벌》해보겠다고 그래서 령길의 눈까지 친줄이야.… 벼락이나 콱 맞을 놈들.… 이걸 어쩌면 좋담. 용일은 놀란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하였다. 《다시한번 묻겠는데 우릴 도와주고 살겠소 아니면 죽겠소?》 《그럼 똑똑히 들어둬라. 공화국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렵지 않다.》 드르릉 울려나오는 소리에 용일은 흠칫 놀랐다. 퍽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용일은 서둘러 부엌바닥에 내려섰다. 문틈에 눈을 바투 가져다댔던 그는 그만 그 자리에 굳어지고말았다.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였으나 얼굴을 버젓이 쳐들고 서있는 사람은 틀림없는 석찬의 아버지였다. 그 애 아버지가 어떻게 되여 놈들의 손에 붙잡히였을가? 석찬이가 이걸 안다면… 《당장 끌어갓!》 용일은 악쓰듯 꽥 지르는 소리에 정신을 펄쩍 차렸다. 잠시후, 맞은쪽의 출입문이 열리더니 텁석부리 《치안대》부대장이 이번에는 고문으로 형체를 알아볼수 없게 된 웬 사람을 앞세우고 들어섰다.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다니, 개놈들… 부르르 몸을 떨던 용일은 갑자기 종잡을수 없이 마음이 불안해졌다. 짐승같이 악착스런 놈들이니 우리 아버지라고 가만두었을가.… 텁석부리가 안심해도 된다고 주절댔지만 악마의 소굴같은 곳에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어이 알랴. 《우린 임자가 임무를 받고 마을에 남았던 지하조직원이라는걸 다 알고있어. 마지막기회를 줄테니 잘 생각해보라구.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고 살겠는가 아니면…》 텁석부리는 혀아래소리를 내며 제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개같은 놈, 그만 짖어라. 네놈의 정체를 미처 가려보지 못한것이 한스럽다.…》 텁석부리를 꾸짖는 추상같은 목소리에 용일은 칼끝이 와닿은듯 가슴이 섬찍해졌다. (내가 잘못 들었을게야. 목소리 비슷한 사람이 얼마나 많다구. 텁석부리는 아버지를 잘 대해주고 인차 나가게 된다고 장담까지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뻗대야 이젠 소용없어. 아마 래일 아침 유격대를 〈토벌〉하러 간다는 정보도 이젠 알려줄 사람도 없을걸. 그건 그거구 에미도 없는 애를 고아로 만들텐가. 자식을 생각해서라두 맘을 돌려먹는게 좋아.》 텁석부리가 씨벌여대는 소리였다. 《닥쳐라. 더러운 놈.》 《흥, 다 임잘 생각해서 하는 소리야. 새끼란 놈은 그래두 애빌 구원해보겠다구 우리 일까지 도와주겠다는데 애비란건 새끼생각을 꼬물만치도 안하거던. 왜, 곧이 들리지 않나? 그럼 그 애를 당장이라도 만나게 해줄가? 응, 흐흐흐…》 용일은 외마디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물러나고말았다. 틀림없는 아버지였다. 손에 들었던 장작개비가 맥없이 떨어지며 발등을 아프게 때렸다. 텁석부리놈이 저런 나쁜 놈인줄은… 그런데도 난 눈이 멀어서 저런 놈한테 땔나무까지 갖다바치러 오다니… 아 이걸 어쩌면 좋은가. 용일은 절망에 사로잡혀 어깨를 떨다가 허둥지둥 나들문을 향했다. 문고리를 잡으려다가 주춤 멈춰서고말았다. 확신에 찬 아버지의 준절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던것이다. 《네놈이 그런다고 내가 넘어갈줄 아느냐? 내 아들을 욕되게 하지 말아.》 용일은 눈물이 왈칵 솟구쳐오르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와락 달려가 놈들앞을 가로막고 따지고싶었다. 그따위 거짓말은 걷어치우라요. 내가 언제 그랬나요.… 다음순간 그는 주춤했다. 그놈을 따라다니며 조른것은 사실이 아닌가. 《좋다. 정 그렇다면 소원대루 해주지. 이제 당장 깜장콩알을 안겼으면 좋겠지만 미군고문관님의 말씀도 계셔서 래일까지 놔두겠다. 지옥문을 열기 전에 너희네 범골유격대가 우리 미군어른들한테 어떻게 녹아나는가 봐두는것도 나쁘진 않지.》 텁석부리놈이 씨벌였다. 갑자기 발밑에 딛고선 땅이 핑그르 거꾸로 돌아가는듯 싶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방안에 아무도 없었다. 흉악한 원쑤놈들에 대한 끝없는 저주와 때늦은 후회의 눈물이 두볼을 적시였다. 부르쥔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치던 용일은 불쑥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렇다. 아버지가 못다한 일을 내가 해야 해. 범골의 유격대를 《토벌》하러 간다는 원쑤놈들의 자동차들이 박달령을 넘어가게 할순 없구말구… 용일은 마을쪽을 향해 허둥지둥 내달렸다. 차거운 달빛아래 얼어붙은 마을이 눈앞에 희붐히 보였다. 동구길에 들어서던 그는 우뚝 멈춰섰다. 먼발치에 석찬네 집이 우렷이 보였다. 허지만 이제 무슨 낯으로 석찬이를 찾아가며 만나면 무어라 말하랴. 용일은 피터지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순간 번개불같은것이 펑끗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는 주먹을 부르쥐고 집을 향해 달음질쳤다.
3
흰눈을 들쓴 박달령은 교교한 달빛아래 불안스레 숨을 죽이고 서있었다. (령길의 눈을 치면 무사히 넘어갈줄 알구? 어디 골탕 먹어봐라. 개놈들!) 령길 좌우켠에 무덕무덕 쌓여있는 눈무지들사이로 걸음을 재촉하며 용일은 속으로 벼르었다. 령마루에 올라 얼마간 내려가던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전쟁전 석찬이와 함께 텁석부리놈을 도와주었던 급하게 꺾어든 굽인돌이길이였다. 느닷없이 그때 일이 돌이켜져 주먹을 불끈 틀어쥐였다. 간악한 원쑤놈을 기어이 복수해야 했다. 용일은 령길 아래쪽의 샘물터로 향했다. 오솔길을 따라 골짜기로 내려가면 너럭바위밑에 샘터가 있었다. 전쟁전 산림보호원(당시)인 아버지와 함께 어린 나무모에 줄 물을 길어가기도 했고 일을 마친 후 시원히 세면도 했었다. 불쑥 석찬의 아버지가 했다던 말이 떠올랐다. 《…나라가 없었다면…》옳지, 이제야 생각났다. 우리 아버지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 《용일아, 제 한몸을 먼저 생각하는건 백성된 도리가 아니다. 아버지나 너나 나라가 선 후에야 사람다운 생활을 찾지 않았느냐.…》 아버지는 몸이 불편해하는 자기를 걱정해줄 때마다 늘 이렇게 말하군 했었다. (이젠 알았어요. 아버지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그리고 원쑤놈들의 고문에도 왜 굴함없이 싸우시는지. 나도 아버지의 아들답게, 공화국의 소년단원답게 놈들과 싸울테예요.) 용일은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씽씽 령길을 톺아올랐다. …힘든줄도 시간가는줄도 몰랐다. 물이 가득 담긴 물통 든 손에 힘을 주며 령길을 오르던 용일은 갑자기 머리칼이 쭈빗 일어서는것을 느꼈다. 령길 웃켠에서 분명 인적기가 났던것이다. 용일은 길섶으로 얼른 몸을 숨기였다. (텁석부리놈이 눈치채고 뒤쫓아온게 아닐가?) 금시 온몸은 긴장으로 옥죄여졌다. 검은 그림자는 차츰 가까와졌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였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귀가에 들리는듯싶었다. 만약 원쑤놈들이라면… 주먹을 틀어쥐며 앞을 쏘아보던 그는 입밖으로 소리를 내지를번 했다. 달빛에 드러난것은 석찬이와 낯익은 아이들의 모습이였던것이다. 한밤중에 이곳에 나타난것도 놀라왔지만 손에 손마다 물통 같은것을 들고있는것이 더 놀라왔다. 《석찬이가 정말 신통한 수를 생각해냈거던. 잉!》 감탄하듯 말하는 애는 성길이였다. 《내가 생각해낸게 아니라 텁석부리〈치안대〉부대장놈이 귀띔해준거야. 하하.… 전쟁전에 용일이와 함께 우린…》 《그만둬. 그 애이름만 들어도 기분잡친다.》 누군가 볼부은 소리로 말허리를 가로챘다. 《사실 그 애는 잘 모르니 그러는거야. 그앨 속이고 비밀을 뽑아내려는 텁석부리놈이 악독한 놈이지. 나도 차근차근 깨우쳐주고 잘 도왔어야 했는데 그렇게 할수 없었어.》 석찬이가 나직한 소리로 두둔해주었다. 용일은 더는 그 자리에 있을수 없었다. 《석찬아!》 《아니? 이게 누구야, 용일아!》 석찬이가 깜짝 놀라며 마주 다가왔다. 《난… 별욕을 다 들어도 싸. 내가 어리석었어. 난… 난…》 용일은 고개를 떨구며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됐어. 그만하렴. 그런데 널 여기서 만나게 될줄은 정말 몰랐구나. 자식두…》 석찬은 용일의 손에 들린 물통을 보고 사연을 알아차린듯 어깨를 툭 쳤다. 방금전 애들은 굽인돌이령길우에 난데없이 생겨난 얼음판과 맞다들려 고개를 기웃거리던 참이였다. 잠시후 용일에게서 긴박한 사연을 알게 된 석찬은 급히 한 아이를 범골로 떠나보냈다. 그는 이미 인민유격대와 련계를 가지고있었던것이다. 몇시간전에도 유격대 련락지점에 갔다가 돌아오던길에 나무짐을 지고 읍으로 가던 용일을 만났던것이다. 《용일아, 그것 보렴.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면 큰일도 할수 있지 않니. 우린 놈들의짓이 미심쩍어서 골탕먹일 궁리는 했지만 그런 흉계를 꾸민줄은 몰랐어.》 석찬은 용일의 손을 힘있게 잡아흔들었다. 용일은 오랜만에야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듯 개운해짐을 느꼈다. 《석찬아.》 그는 석찬의 아버지 생각이 떠오르자 머뭇거리다가 종시 입을 열지 못했다. 《왜 또 그러니?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툭 털어놓으렴.》 석찬은 달빛에 파르스름해진 용일의 얼굴을 바라보며 싱긋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 애도 아버지소식을 알게 되면 아무 말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버릴것이 뻔했다. 《너희 아버지가… 석찬아, 마음을 굳게 가지렴.》 용일은 석찬을 똑바로 바라보며 위로해주었다. 《우리 아버지가? 그래 어떻게 됐다니?》 용일은 입술을 감빨다가 겨우 말꼬리를 이었다. 《놈들에게 붙잡혀서 감방에… 놈들이 심문하는걸 내 눈으로 봤어.》 《그건… 나두 알고있어.》 《뭐?!》 용일은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석찬인 이미 알구있단다.》 옆에서 누군가 귀띔해주었다. 《?!》 《우리 아버진 며칠전에 임무를 맡고 정찰하러 내려왔다가 돌아가지 못했어. 그후 내가 유격대와 련계를 가지게 됐단다.》 조용히 울리는 목소리였지만 용일의 가슴속을 쩌릿하게 파고들었다. 아버지가 놈들에게 붙잡힌줄 알면서도 아무 내색도 않고 원쑤놈들과의 싸움의 길에 흔연히 나선 석찬이… 그전에는 공부에서나 놀음놀이에서 어슷비슷했지만 지금의 그는 까마득한 높이에 서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감방에서 써보낸 쪽지편지에 조국이 있어야 가정의 행복도 꽃펴날수 있다고 하시며 아버지장군님의 아들, 공화국의 소년단원답게 원쑤놈들과 용감히 싸워야 한다고 당부하셨단다.》 용일은 젖어드는 눈굽만 슴벅이다가 고개를 푹 숙여버리였다. 래일이면 아버지들이 총살당한다는 말을 끝내 입밖에 낼수 없었다. 《용일아, 넌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고있었는지 몰랐지?》 《난 좀전에야 알았어. 놈들이 심문하면서 지껄이더구나.》 석찬은 용일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우리 아버지가 만나야 할 사람은 너희 아버지였대. 놈들은 너희 아버지를 고문도 하고 꾀이기도 했지만 끝내 굽어들지 않자 마지막으로 널 리용하려고까지 했었다지 않니. 련락원아저씨가 오늘 말해주었어.》 (그래서 석찬의 할머니가 집에 오군 했었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용일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것을 느꼈다. 《석찬아! 그런데 난…》 《그만하렴. 이젠 다 지나간 일인데… 이제부터 정신을 차리고 잘 싸우면 되지 않니.》 석찬이가 용일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벙긋 웃어보였다. 《자, 오늘밤엔 우리도 원쑤놈들을 쳐부시는 꼬마유격대원들이다! 샘물터를 향해 앞으롯!》 용일은 앞장에서 눈길을 헤치는 석찬을 뒤따랐다. 그뒤로 애들이 저저마다 물통들을 절렁거리며 따랐다. 《물 한통에 자동차 한대다!》 《그럼 난 자동차 두대!》 용일은 어느새 령길우에 생긴 얼음판에 들어섰다가 앗 소리도 칠새없이 엉덩방아를 쿵 찧고말았다. 《하하… 용일이는 얼음판 만드는 멋진 수만 생각해내는줄 알았더니 딱소리나게 시험할줄도 아는데.》 성길이가 두발을 하늘로 쳐들고 버둥거리는 용일이를 놀려주며 까불댔다. 《용일아, 우리 마음들이 합쳐져 생긴 이 얼음판에서 원쑤놈들은 영낙없이 벼랑신세를 지게 될거야.》 석찬은 달빛에 번뜩 빛을 뿌리는 얼음판을 가리키며 통쾌하게 웃었다. 《오늘은 정말 좋은 밤이구나. 달도 밝고 우리 마음도 즐겁고…》 성길이가 옆에서 읊조리듯 한마디 했다. 쉬임없이 밤하늘길을 미끄러져가던 둥근달도 밝은 빛을 한껏 뿌려주며 벙글벙글 웃고있었다. 그들이 령길우의 얼음판에 눈이며 마른 풀검불로 감쪽같이 위장을 하고났을 때는 동녘하늘이 불그스레 물드는 새벽이였다. 《들리지? 틀림없이 자동차소리야!》 령마루쪽에 귀기울이던 석찬이가 다급히 속삭이였다. 그들은 날쌔게 길섶에 몸을 숨겼다. 부릉부릉… 추위에 얼어붙은 새벽대기를 헤가르며 선두차가 내려오고있었다. 그뒤로 한대 또 한대… 적재함우에서는 미군놈들과 괴뢰군놈들이 웅크리고앉아 새벽추위에 떨고있었다. (우리 생각대로 될가?) 선두차가 령길우에 접어들자 용일의 마음은 조마조마해났다. 박달나무뒤에 몸을 숨긴 석찬이도 초조한듯 엉치를 들썩거렸다. 그 순간 위장한 얼음판우에 들어섰던 선두차가 령길아래로 미끄러져내려가기 시작했다. 다급히 제동기를 밟았는지 꽁무니가 픽 돌았다. 그러나 다음순간 덜컥 한바퀴 굴더니 벼랑아래로 쾅 나떨어지고말았다. 꼬리를 물었던 다음차도 벼랑아래 곤두박혔다. 요란한 폭발소리가 골짜기를 뒤흔들었다. 아우성소리와 비명소리를 삼키며 삼단같은 불길이 치솟았다. 얼음판우에 들어서려던 세번째 차만이 겨우 산턱에 대가리를 처박으며 멎어섰다. 적재함우의 놈들이 흙탕물 튕기듯 사방에 휘뿌려졌다. 령길은 삽시에 수라장으로 변했다. 《만세!》 용일은 숨어있다는것도 까맣게 잊고 벌떡 일어섰다. 이때였다. 《땅!》 한방의 야무진 총소리가 박달령의 하늘가로 울려퍼졌다. 뒤이어 우뢰처럼 몰방으로 터지는 총소리, 수류탄 터지는 소리… 《유격대아저씨들이다!》 눈이 휘둥그래졌던 성길이가 먼저 영문을 알아차리고 환성을 올렸다. 바위와 나무들에 의지하여 몰사격을 퍼붓는 유격대아저씨들의 털모자를 쓴 모습들이 언듯언듯 보였다. 《받아라, 원쑤놈들아. 이건 아버지들의 몫, 이건 내 몫이다.》 용일은 흥분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눈속에서 돌멩이를 찾아들었다. 《텅…텅…텅…》 누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통을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용일이도 얼른 옆에 뒹구는 물통을 찾아들었다. 《텅…텅…텅…》 여기저기서 울리는 물통 두드리는 소리가 산골짜기를 들었다놓았다. 요행 살아남아 산턱밑에 붙으려던 놈들은 별안간 울리는 요란한 소리에 기겁을 하며 갈팡질팡했다. 원쑤놈들의 숨통을 끊는 마지막총소리의 메아리가 사라져갈무렵. 갑자기 령너머 읍쪽에서도 자지러진 총소리와 요란한 폭발소리가 들려왔다. 용일은 놀란 마음을 걷잡지 못하며 령너머쪽에 귀를 기울였다. 《얘들아!》 누군가가 용일이네를 향해 달려왔다. 유격대에 련락을 보냈던 아이였다. 《저 소리는 우리 유격대가 읍거리를 치고 갇혔던 사람들을 구원하는 소리란다. 텁석부리놈이랑 원쑤놈들은 불벼락을 맞고 한놈도 살아나지 못할거야. 얘들아, 대장아저씨가 우리를 얼마나 칭찬했는지 아니? 용일이가 놈들의 흉계를 제때에 알려주고 또 놈들을 얼음판에 붙잡아놓았기때문에 모조리 족칠수 있었다고 말이야. 왜들 이렇게 서있기만 하니. 자, 어서 가야지. 아버지들을 만나러…》 용일은 신바람난 그 애가 무어라 말을 계속했지만 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구원되다니… 불시에 눈시울이 달아오르며 눈앞이 뽀얗게 흐려왔다. 유격대가 아버지를 구원해준다고 석찬이가 말하더니 그것이 사실로 될줄이야.… 그런데 난 그걸 믿지 않고 집안에 닥친 불행만을 생각던 나머지 원쑤에게까지 빌붙고 나중에는 나라의 은덕도, 소년단원의 명예와 량심마저 저버릴번 했었지.… 용일은 동녘하늘에서 붉게 타오르기 시작하는 아침노을을 이윽토록 바라보며 젖어드는 눈을 슴벅이였다. 얼마나 애타게 고대하던 이날인가. 《용일아!》 석찬이가 곁에 다가서며 품속에서 꺼내든 붉은넥타이를 쥐여주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울렁이고 희망이 샘솟는 붉은넥타이였다. 《어서 우리의 마음이 담긴 붉은넥타이를 힘있게 날리자!》 용일은 북받쳐오르는 격정을 이기지 못해 와락 그의 어깨를 껴안았다. 《석찬아!》 용일은 석찬에게서 받아든 붉은넥타이를 단정히 목에 둘렀다. 그리고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밝아오는 조국땅에 노을빛으로 붉게 타는 넥타이를 펄펄 날려라 …
석찬이와 함께 아니, 온 학급애들과 함께 목청껏 부르던 《소년단행진곡》이였다. 애들이 목소리를 합쳤다. 용일이와 나란히 서서 《소년단행진곡》을 씩씩하게 부르는 애들의 가슴마다에서도 붉은넥타이가 바람에 자랑차게 휘날렸다. 박달령의 하늘우로 눈부신 빛을 뿌리며 솟아오른 아침해도 바람에 나붓기는 붉은넥타이를 더욱 붉게 물들여주고있었다.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