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아동문학》 주체97(2008)년 제9호에 실린 글

 

  ◇동 화◇

 

      

                        

                                                           윤 학 복

 

해가 지는 서쪽바다로 가고 또 가느라면 크고 거치른 섬에 부딪치게 된답니다.

섬에서는 여우를 조상으로 섬기는 난쟁이도적들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섬이름도 여우섬이였지요.

난쟁이도적들은 바다건너 동쪽나라에 쳐들어가 수많은 사람들을 붙잡아왔습니다.

제놈들대신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굽는 종으로 만들려고 말이지요.

그들속에는 안해와 함께 끌려온 한 젊은이도 있었습니다.

어느날 바다에 내몰렸던 젊은이는 풍랑에 휘말려 영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날 불행한 그의 안해는 귀여운 딸을 낳았답니다. 어머니는 딸에게 순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지요.

순아는 날마다 어머니가 바다로 나가면 저혼자 놀아야 했습니다. 그 애는 아장아장 바다가를 다니면서 파도에 밀려나온 조가비도 줏고 모래성도 쌓군 하였습니다. 그것도 싫어지면 모래불에 꼬챙이로 끄적끄적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애는 놀랍게도 보기드문 그림의 신동이 틀림없었습니다.

이제 겨우 다섯살잡이의 솜씨로는 너무도 훌륭했던것입니다. 그래서 그 애가 그림을 그릴 때면 해님도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고 바람마저 숨을 딱 죽인채 정신없이 지켜보군 했답니다.

만일 그때 누구든지 해님이나 바람에게 《너희들 저 애보다 더 뛰여난 재간둥일 본적이 있니?》 라고 묻는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할것입니다.

《아니, 없단다. 넓은 세상을 다 굽어보았어두 넓디넓은 세상을 다 돌아보았어두.》 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어머니는 귀여운 딸에게 그런 놀라운 재주가 있는줄 몰랐습니다. 해종일 바다일에 시달리다가 어두워야 돌아오군 했으니까요.

어머니는 허둥지둥 달려오는 순아를 덥석안고 입맞춰주군 했으나 아쉽게도 어스름때문에 그림은 볼수 없었습니다. 그대신 밤이면 심술쟁이파도가 철썩철썩 모래불을 핥으면서 순아가 낮동안 그려놓은 그림들을 깡그리 집어삼키군 했지요.

순아가 일곱살이 되자 사람들이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저 애한테 붓과 종이를 사주시오. 틀림없이 뛰여난 화공이 될거요.》

어머니는 기뻐서 눈물이 글썽해졌습니다. 그러나 붓도 종이도 사주지 못했습니다.

《순아야, 그림을 그리지 말렴. 여긴 무서운 세상이란다.》 하고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뿔이 고우면 머리를 잘라가고 털이 고우면 가죽을 벗겨내지. 이다음 바다건너 내 나라로 돌아간 다음에… 》

《엄마, 난 여우섬에서 태여났는데두? 나도 동쪽나라로 돌아가야 하나?》

어머니는 순아를 꼭 껴안고 깨우쳐주었습니다.

《종달새알은 오리둥지에 떨어져도 종달새로 까나서 날아간단다. 그건 태여날 때에 엄마새한테서 종달새의 넋을 이어받기때문이지. 그 넋은 종달새의 피속에서 숨쉬면서 〈넌 종달새란다. 종달새란다.〉라고 끊임없이 속삭인단다. 만일 그 넋마저 잠들어버리면 종달새는 오리둥지에 남아 바보처럼 오리노릇을 하게 되지. 순아야, 넌 절대로 넋을 빼앗긴 바보종달새가 되여선 안돼!》

순아는 고개를 끄떡이군 했지만 그 뜻을 다 알수는 없었습니다.

그 앤 아직 너무도 어렸던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데만 정신을 쏟아부었지요.

발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소문은 차차 널리 퍼졌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웬 늙은 난쟁이가 순아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한동안 순아가 그림그리는것을 지켜보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얘야, 넌 왜 모래불에 그림을 그리니? 엄마가 붓과 종이를 사주지 않던?》

순아는 아무말없이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늙은 난쟁이는 벌쭉 웃더니 순아의 손을 잡았습니다.

《나하고 같이 가자. 내가 종이랑 붓이랑 많이 사주지. 난 아이들한테 그림을 가르치는 늙은이란다. 너처럼 재간있는 아이들을 사랑하지.》

도래굽이엔 어느새 세마리의 하늘소가 끄는 마차가 와있었습니다. 마차는 순아를 태우고 어떤 낯모를 집앞에 가 멎었습니다. 삐죽삐죽 날카로운 가시나무들이 빈틈없이 에워싸고있는 집이였습니다. 이상한건 아무리 보아도 드나드는 문이 전혀 없는것이였습니다.

《안녕들한가? 벗들!》

늙은 난쟁이가 인사라도 하듯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가시투성이나무들이 대답이나 하듯 와슬렁거리더니 가지들을 치켜들고 길을 내주었습니다.

《이 나무는〈난쟁이의 벗〉이라는 나무야.》

늙은 난쟁이가 우쭐렁거리였습니다.

《아주 신기하고 기특한 나무지. 우리 난쟁이들한테밖에는 절대로 길을 열어주지 않으니까. 자, 바싹 따라서거라. 그러지 않다간 널 마구 찔러죽일수도 있다.》

순아는 늙은 난쟁이에게 이끌려 가까스로 《난쟁이의 벗》들옆을 지났습니다.

방안에 들어서니 하얀 종이퉁구리가 천정이 꾹 닿게 쌓여있었습니다. 번쩍이는 사기단지, 구리항아리들에는 크고작은 붓들이 잔뜩 꽂혀있었지요.

문이 열리더니 배뚱뚱이난쟁이가 까만 윤이 흐르는 자개박이함을 엄숙히 받쳐들고 왔습니다. 그는 어찌나 키가 작고 뚱뚱했던지 꼭 배불뚝이 물독같았습니다.

늙은 난쟁이는 함뚜껑을 열더니 누런 황금빛붓을 꺼냈습니다.

《이건 신기한 마술붓이란다. 이 붓으로 그림을 그리기만 하면 새는 노래하고 꽃에서는 향기가 풍기게 되지. 헌데 아무한테서나 그런 마술을 부리는게 아니야. 세상에서 일등가는 화공의 손에서만 그런 조화를 일으키게 되지.

귀여운 애야, 네가 그런 화공이 될수 있을게다. 넌 아주 뛰여난 재간을 가졌거던.

하지만… 이 마술붓의 주인이 되려면 아직 멀었어. 집생각, 엄마생각 죄다 버리고 그림공부만 해야 한단다. 그렇게 할수 있겠니? 살아있는 그림을 그려내기 전에는 여길 떠나지 않겠다는걸 약속해라.》

《그럼 그때까지 엄마를 보지 못하나요? 싫어요, 엄마가 없으면 난 싫어요.》

순아가 울먹거리자 늙은 난쟁이는《네 엄마가 널 훌륭한 화공으로 키워달라고 내게 부탁했단다. 그렇게 되면 널 만나러 오겠다고 했거던…》 하고 말했습니다.

《엄마가요?…》

《그럼.》

순아는 더 생각할 사이없이 고개를 끄떡이고말았습니다.

늙은 난쟁이는 흡족해서 순아의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이제부턴 날 〈나리님〉이라고 불러라. 여기선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가만, 너에게도 아주 이쁜 새 이름을 하나 지어주어야지. 그렇지, 에― 〈황금망아지〉라고 하자꾸나. 흐흐흐… 참 들을수록 귀맛좋은 이름인걸…》

이렇게 되여 순아는 그 이상한 집에서 그림을 배우게 되였습니다. 그에게 그림을 배워주는건 물론 난쟁이《나리님》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번도 제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매일 아침 난쟁이뚱뚱보를 시켜서 종이와 붓을 가져다주게 할뿐이였습니다.

《오늘은 여기에 고운 꽃과 싱싱한 대나무를 그려라. 미리 말해두지만 훌륭한 화공이란 스스로 솜씨를 익히는 법이야. 물고기가 헤염을 배우듯, 새가 나래질을 익히듯 말이야. 헌데 … 한장이라도 되는대로 그렸다간 좋지 않을줄 알어!》 사실 그건 공연한 위협이였습니다.

순아야말로 한장한장의 그림속에 온넋을 깡그리 쏟아부을줄 아는 참된 화공이였던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침에 그린 꽃보다는 점심에 그린 꽃이 더 고왔고 점심때에 그린 대나무보다는 저녁때에 그린것이 더 생신했습니다. 아마도 순아의 그림솜씨가 그토록 빨리 늘어나기때문이겠지요.

저녁이면 《나리님》과 뚱뚱보가 와서 그림들을 걷어가군 하였습니다.

그들은 저도 몰래 벌쭉거렸지만 한번도 칭찬은 하지 않았습니다.

《에! 아직 서툴어. 아직 멀었어. 마술붓을 잡자면 어림도 없어.》

어느날 《나리님》은 큰 잔치를 차리고 숱한 난쟁이들을 청해왔습니다. 그날은 《나리님》의 생일이였던것입니다.

뚱뚱보는《나리님》에게 황금으로 만든 새조롱을 섬겨바쳤습니다.

그속에는 처음 보는 하얀새 한마리가 갇혀있었습니다.

《이 새는〈아침새〉라고 부르지요.》 뚱뚱보가 아양을 떨었습니다.

《세상은 넓다지만 오직 바다건너 동쪽나라에서만 사는 새랍니다. 아주 아름답고 진귀한 새올시다.》

《헌데… 왜 노래를 부르지 않느냐? 우리 여우섬이 싫다는거냐?》

《헤헤… 왜 지저귀지 않겠소이까. 이렇게 하면 되옵니다.》 뚱뚱보는 킬킬대며 길다란 꼬챙이로 조롱속의 새를 쿡쿡 찔렀습니다.

아침새는 이쪽저쪽 피하다 못해 마침내 구슬프게 울었습니다.

《아! 과연 희한한 노래소리군.》

흥이 난 《나리님》과 난쟁이들이 연거퍼 큰 잔으로 술을 퍼마셨습니다. 그다음 순아를 불렀습니다.

《자! 어서 이 아침새를 그려라. 헌데… 이렇게 우는 새가 아니라 춤추는 새를 그려야 한다. 여우섬의 황금조롱이 좋아 춤추는 아침새를 말이다.》

순아는 새조롱을 들고왔으나 그림을 그릴수 없었습니다. 아침새의 눈에서 구슬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기때문입니다.

《아침새야, 넌 왜 그리 슬피 우니? 난 널 찔러대지 않는단다.》

아침새가 대답했습니다.

《난 아파서 우는게 아니란다. 바다건너 동쪽나라엔 솔동산이 있고 솔동산엔 내가 까난 보금자리가 있지. 난 엄마랑 동생들도 모르게 잡혀왔단다. 아! 엄마를 빼앗기고 조롱속에 갇혀서 어떻게 사니?》

아침새는 슬픔을 이길수 없었던지 새조롱을 마구 짓쪼았습니다. 순아의 눈에도 어느덧 맑은것이 고였습니다.

언제인가 어머니가 들려주던 종달새의 이야기가 생각났던것입니다.

순아는 얼른 큰 붓에 빨간색을 듬뿍 묻혀 아침새의 몸뚱이에 발라주고 꼼짝 말고 누워있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새가 조롱을 쾅쾅 들이받다가 죽었다고 소리쳤습니다. 《나리님》과 뚱뚱보가 비틀비틀 다가왔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여 쓰러진 새를 보더니 퉤! 하고 열쇠를 던져주었습니다.

《에! 지독한 새새끼. 어서 썩기 전에 내던져.》

순아는 얼른 새장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아침새야, 어서 엄마를 찾아가렴. 나도 너처럼… 동쪽나라 소녀란다.》

포르릉 날아나온 아침새는 열어제낀 창문턱에 살짝 앉았습니다.

《고마와, 그런데 넌 왜 난쟁이들의 집에서 사니? 네 엄만 어데 있니?》

순아는 그저 머리를 흔들고는 얼른 창문을 닫아주었습니다.

훨훨 날아 엄마를 찾아가는 새를 보니 못 견디게 어머니생각이 났습니다.

꼽아보니 순아는 벌써 세해째나 엄마를 보지 못했던것입니다.

《엄만 왜 그사이 한번도 날 찾아오지 않을가? 혹시…》

더럭 겁이 난 순아는 엄마한테 다녀오겠다고 졸라댔습니다.

《그―으래?》《나리님》이 머리를 끄덕끄덕했습니다.

《그럼 약속대로 해야지. 이봐, 얼른 마술붓을 가져와! 새가 울고 꽃이 향기를 풍기면야 엄마한테 보내주고말고.》

순아는 떨리는 손으로 마술붓을 잡고 정성껏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마술붓은 야속하게도 아무런 조화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어때? 아직 멀었다는걸 알만 하겠지.》

《나리님》과 뚱뚱보가 깨고소한듯 서로들 눈을 끔쩍거렸습니다.

《이제부턴 일년에 한번씩만 이 마술붓으로 시험을 칠테다. 그렇다고 도망갈 생각은 말어. 우리 〈난쟁이의 벗〉들이 널 절대로 내놓지 않을테니까.》

순아는 그때에야 자기 역시 조롱속의 새처럼 갇힌 신세라는걸 깨달았습니다.

순아는 붓을 내던졌습니다. 어머니를 만나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겠다고 소리쳤지요. 《나리님》은 사납게 눈을 굴리였습니다. 그렇지만 별수 없었던지 뚱뚱보를 마주보며 벌쭉 웃었습니다.

《좋아! 그럼 당장 마차를 보내서 네 엄마를 이리로 모셔오자꾸나.》

순아는 온종일 가슴을 조이며 기다렸습니다.

그 애는 온몸이 귀로 변한듯 지나가는 마차소리에도 와뜰와뜰 놀라군 하였습니다.

마침내 마차가 돌아왔습니다. 뚱뚱보가 훌쩍 뛰여내렸습니다.

《불쌍한 애야, 이 일을 어쩌냐. 네 엄만 그사이 널 버리고 어디론가 시집가버렸구나. 돈많은 난쟁이부자를 따라서…》

순아는 날카로운 칼에 찔린듯 악! 소리를 쳤습니다.

뚱뚱보는 제가 더 분하다는듯 탕탕 가슴을 쳤습니다.

《몹쓸년이지요. 이렇게 고운 애를 버리다니… 천벌을 받아야 하구말구요.》

《얘야, 차라리 콱 잊어버리렴.》

《나리님》이 동정하듯 말했습니다.

《제 딸을 내버린 그따위년을 다시는 엄마라고 부르지 말어. 이젠 아예 여기서 살자꾸나.》

순아는 덫에 치인 어린 새처럼 파들파들 떨기만 하였습니다. 닷새가 지나도록 순아는 밥한술 먹지 않았습니다.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았지요.

그 애는 마치 눈물도 없이 타버리는 초불같았습니다.

순아의 동정만 엿보던 《나리님》이 급해맞았던지 말을 걸었습니다.

《사흘후 여우섬의 궁전앞에서 그림그리기경기가 있단다. 1등 한 화공에겐 큰 여우를 상으로 주지. 헌데… 그건 그저 여우가 아니라 황금으로 만든 금여우란다. 금여우상만 타면 너한테 당장 마술붓을 선물로 주지.》

《거기엔… 누구나… 모두 오나요?》

순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나리님》은 반가와서 제꺽 주어섬겼습니다.

《그렇지 않구. 여우섬의 임금님과 부자들은 물론 백성놈들까지 말이다. 1등만 하면 네이름이 온 여우섬에 뜨르르하게 될게다. 에― 물론 〈황금망아지〉라는 이름 말이다.》

순아는 그제야 머리를 끄떡했습니다. 마술붓이나 금여우가 탐나서는 아니였습니다. 다만 그곳에서 혹시 어머니를 만날수 있지 않을가 해서였지요.

붓을 들자 맨 먼저 떠오른건 역시 어머니의 모습이였습니다. 순아는 저도 몰래 정신없이 붓을 놀렸습니다. 종이우에는 어느덧 그리운 어머니의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순아는 그림을 부둥켜안으며 폴싹 주저앉고말았습니다.

《엄마, 엄만 정말 날 난쟁이들한테 버리고 시집갔나요? 그건 거짓말이지요? 네? 어서 대답해줘요.》

순아의 두볼을 타고 방울방울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눈물은 그림속의 어머니얼굴에도 떨어져서는 가느다란 자욱으로 번져갔습니다. 그러자 그림속의 어머니도 마치 눈물을 흘리는것 같았습니다.

(순아야! 믿지 말아. 어머니는 자식을 버리지 않는단다!)

그때 난데없이 푸드득! 세찬 나래질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열어젖힌 창문으로 낯익은 아침새가 날아든것입니다.

《바로 그저께…》 하고 아침새가 말했습니다.

《난 어느 바다가를 날아가다가 한 어머니를 보았어. 무섭게 여위고 지친 녀인이였지만 눈으로는 사람들을 더듬으며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있었단다. 난 그 녀인이 누굴 찾는지 대뜸 알았어.》

《어… 어떻게?》

순아는 웬일인지 가슴이 활랑거려 말을 이을수가 없었습니다.

《그야 간단하지. 그 녀인은 꼭 너처럼 생겼거던. 그리고 비청비청하면서도 〈순아야, 내 딸아, 어디 있니?〉하고 울먹이는 소리도 들었단다. 엄만 지금 널 찾아 온 여우섬을 헤매고있어.》

아침새는 잠시 숨을 돌리더니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이자 지나온 거리에선 네가 그린 그림들을 파는걸 보았어. 나를 찔러대던 뚱뚱보가〈자! 황금망아지의 그림 사시오. 유명한 황금망아지의 그림이요. 한장에 금돈 스무잎이요.〉이렇게 웨치지 않겠니? 넌 왜 엄마의 품을 떠나 고약한 난쟁이들의 종노릇을 하니?》

순아가 무어라고 대답할수 있었겠나요. 그 애는 너무도 억이 막혀서 잠시 멍청해졌답니다.

이제는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나리님》이나 뚱뚱보는 결코 《은인》이 아니였습니다.

뛰여난 재주를 가진 순아를 꾀여다가 가두어놓고 큰 돈벌이를 하고있었던것입니다. 놈들은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순아를 어머니와 영영 갈라놓은 다음 피땀을 깡그리 짜낼 작정으로 무서운 거짓말까지 꾸며냈답니다.

《아침새야, 난 하마트면… 넋을 빼앗긴 바보종달새가 될번 했구나.》

비로소 모든것을 깨달은 순아가 두주먹을 그러쥐며 말했습니다.

《더는 속지 않을테야! 나한테서 엄마를 뺏으려던 놈들, 날 황금망아지로 만들려던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줄테야!》

아침새를 떠나보낸 순아는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꼬박 이틀밤을 새우며 순아가 무엇을 그렸을가요.《나리님》이 들여다보려 했지만 순아는 딱 잡아뗐습니다.

《안돼요. 그림이 다 된 다음… 내다 건 다음에 보세요.》

《나리님》은 놀라 눈이 퀭해졌지만 곧 제나름으로 벌쭉거렸습니다.

《알만해. 날 깜짝 놀라게 하려는거지. 어쨌든 1등만 하면 돼.》

약속된 날이 오자 여우섬의 궁전앞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커다란 양산을 드리우고 화려하게 꾸민 단우에는 많은 시중군들까지 거느린 난쟁이왕이 위엄을 뽐내며 앉아있었습니다. 그앞에는 제노라하는 난쟁이화공들의 그림들이 주런이 걸려있었답니다.

순아는 겨우 한쪽구석켠에 그림을 걸어놓은 다음 하얀 천을 살며시 벗겼습니다. 맨 처음 순아의 그림을 찾아온건 사람들이 아니라 벌과 나비였습니다. 활짝 핀 그림속의 꽃송이에 앉아보려고 다투어 날아온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역시 그림이기때문에 저마끔 비비닥대다가는 할수없이 날아오르군 했지요.

깜짝 놀란 사람들이 순아의 그림앞에 소낙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한꺼번에 입을 딱 벌린채 얼어붙은듯 굳어지고말았답니다.

조롱을 박차고 날아오른 하얀새가 바다건너 아름다운 꽃동산으로 훨훨 날아가고있었습니다. 눈이 시도록 하이얀 몸뚱이와 흑진주같은 눈…

귀를 기울이면 바람을 헤가르는 억센 나래의 퍼덕임소리가 분명히 들려왔습니다.

《그림의 신동에게 영광을!》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합창이나 하듯 소리쳤습니다.

《이 그림은 분명 넋이 있는 그림이요. 그림속에 생을 불어넣은 화공에게 마땅히 1등상을 주어야 하오!》

《오호!》

난쟁이왕이 금여우를 추켜들며 연설이나 하듯 떠들었습니다.

《우리 여우섬에 금여우상보다 더 큰 상이 없는게 한이로다. 이 그림을 그린 화공은 보나마나 우리 여우섬에서도 그중 키가 작은 진짜난쟁이가 틀림없으렷다. 대체 저 희한한 새의 이름은 무엇인고?》

《이 새는 아침새예요.》

순아가 주저없이 대답했습니다.

《이 새는 여우섬이 아니라 바다건너 동쪽나라에서만 사는 새랍니다. 그건 동쪽나라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기때문이지요.

난 바로 그 동쪽나라의 소녀예요. 여우섬의 난쟁이도 황금망아지도 아니예요! 나를 어서 내 나라로, 어머니한테로 돌려보내줘요.》

난쟁이왕은 그만 날콩씹은 상이 되였습니다. 놈은 들었던 금여우를 슬그머니 내려놓았습니다. 그다음 《나리님》을 불렀습니다.

《이 어리석은 놈아, 감히 동쪽나라의 계집애를 내세워 우리 난쟁이화공들이 넙치신세가 되게 하다니… 저년이 내앞에 무릎을 꿇게 하든가 아니면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도록 병신으로 만들어버려라.》

《페…페하!》

《나리님》이 웅얼거렸습니다.

《저 년은 내 돈벌이밑천이올시다. 황금알을 낳는 망아지나 같습니다. 그러니 가두어놓고…》

《닥쳐라! 새란 조롱속에 가둘수는 있어도 넋은 길들이지 못하는 법이야. 그럼 너한테 금여우가 아니라 금승냥이를 상으로 줄테다. 헌데 감쪽같이…》

물론 순아는 이런 꿍꿍이속을 짐작조차 할수 없었습니다.

교활한 난쟁이왕이 제법 웃음까지 띄우고 떠벌였던것입니다.

《에― 이 그림은 물론… 아주 훌륭하다. 다만 정말 네가 그린것인지 그게 좀 의심쩍단말이다.

그러니 내앞에서 다시한번 그림을 그리도록 해라. 그럼 너의 소원도 들어주고말고.》

난쟁이왕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나리님》이 마술붓을 들고 다가왔습니다.

《얘야, 이젠 네가 이 마술붓의 주인이 될만 하다. 이걸로 그리면야 흐흐… 틀림없이 살아있는 그림이 될게다.》

순아는 얼결에 마술붓을 받아들었습니다.

그때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둥― 하고 울려퍼졌습니다.

순아는 얼른 그림을 그리려고 붓을 꼭 거머잡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어 《앗.》 하고 비명을 지르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붓자루에 작은 쇠가시가 박혀있어 손가락을 콕 찔렀던것입니다. 쇠가시엔 무서운 독이 있어 금시에 손이 퉁퉁 붓기 시작했습니다. 순아는 끝내 붓을 떨구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말았습니다.

《무슨 일이냐?》

뻔뻔스러운 난쟁이왕이 시치미를 떼고 호통쳤습니다.

《저 소녀화공이 왜 붓을 내던지고 저렇듯 괴이한 앙탈을 부리는고?》

《임금님, 뻔한 일이옵니다.》

난쟁이왕의 옆에 있던 졸개들이 때를 놓칠세라 발라맞추었습니다.

《저 당돌한 계집애는 화공이 아니라 금여우를 탐내던 협잡군이 분명하옵니다. 임금님께서 직접 그림을 그려보라 하시니 급해맞아 엄살을 부리고있소이다.》

《오, 요망한 계집이로다.》 난쟁이왕이 뇌까렸습니다.

《감히 임금인 나를 속이려들다니… 저 간사한 계집애의 손목을 잘라라!》

그때 떠들썩하는 사람들을 헤치며 한 녀인이 달려나왔습니다.

순아를 찾아오던 어머니가 뒤늦게야 다달은것입니다. 어머니는 정신잃은 순아의 상처에서 주저없이 입으로 독을 빨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시커멓게 퍼져가던 독물이 다 빠지고 빨간 피가 배여나올 때까지 말이지요. 마침내 순아가 눈을 떴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쓰러졌습니다. 무서운 독물이 터갈라진 입술의 상처를 통해 온몸에 퍼졌던것입니다. 억이 막힌 순아가 몸부림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숨을 거두기 전에 어머니는 순아에게 붓 한자루를 쥐여주었습니다.

《이건 너를 찾으면 주려고… 엄마가 마련한 붓이란다. 네가 이 붓으로 내 나라의 산천을 그리는걸 꼭 보려고 했었는데… 엄만 끝내 널 지켜주지 못하는구나. 어떡하든 꼭… 살아서 그리운 내 나라로 돌아가렴.》

순아는 오래오래 섧디섧게 울었습니다. 이제 그 애한테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것입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훌륭한 화공이 되려던 꿈도…

그 애는 무서운 난쟁이나라에서 황금망아지라는 놀림을 받으며 더이상 살고싶지 않았습니다.

비칠거리며 바다가로 나간 순아는 시퍼런 파도가 철썩철썩 때리는 낭떠러지끝에 나섰습니다. 어머니가 남겨준 붓을 꺼내여 마지막으로 볼에 꼭 대보았습니다.

《엄마, 용서하세요. 엄마의 부탁대로… 죽더라도 바다건너 내 나라에 돌아가서 죽고싶지만… 나 혼자 건느기엔 바다가 너무 깊고 너무 넓어요. 아, 차라리 엄마를 따라갈래요.》

바로 그때 숨가쁘게 날아온 아침새가 순아의 머리우를 빙빙 돌았습니다.

《순아야, 빨리 가자. 지금 모두 마중간단다.》

《어데루?》

순아가 멍하니 되물었습니다.

아침새는 놀란듯 순아를 굽어보았습니다.

《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난쟁이화공들을 납작하게 만든 네 소문은 이미 바다건너 동쪽나라에까지 전해졌단다. 동쪽나라 사람들은 너를 데려가려고 신기한 무지개다리를 만들었지. 지금 그 무지개다리가 바다를 건너오고있단다. 자! 보렴.》

고개를 돌린 순아는 금시 두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동쪽하늘 한끝에서 오색찬란한 무지개다리가 불쑥 나타났던것입니다.

아름다운 황금빛구름에 휘감겨 아득히 멀고도 넓은 바다를 빛살처럼 꿰질러온 다리는 어두운 여우섬 한끝에 우르릉― 한끝을 박았습니다.

깜짝 놀란 난쟁이왕과 졸개들이 얼이 빠져 갈팡질팡했습니다.

억울하게 끌려왔던 사람들이 기쁨에 넘쳐 달려왔습니다. 부둥켜안고 울고 웃으며 다투어 무지개다리에 올랐습니다.

순아는 어느새 무지개다리우에 올랐는지 몰랐습니다.

무지개다리는 그들을 싣고 하늘과 바다를 씽씽 주름잡기 시작했습니다.

시꺼먼 여우섬이 점점 작아지고 멀어지다 사라졌습니다.

둥둥― 하얀 구름장들이 손에 잡힐듯 가까이로 떠갔습니다. 드디여 무지개다리 저편으로 푸른 산이 우줄우줄 마주왔습니다. 순아가 처음 보는 동쪽나라 땅이… 하지만 그걸 한번 보자마자 갑자기 가슴이 찌르르해지면서 울컥 눈물이 솟구치는건 무슨 까닭일가요. 산처럼 커다란 그림판이 바다가에 우뚝 서있었습니다.

그밑에는 집채같은 글씨로 《어서 오렴, 내 딸아, 그립던 아들들아!》라고 씌여있었습니다. 그림속 녀인의 눈물에 젖은 눈매랑 두팔벌려 반기는 모습이랑 어쩌면 신통히도 돌아가신 어머니같을가요.

발을 동동 구르던 순아는 끝내 왈칵 울음을 터쳤습니다.

《어머니! 엄마야!―》

떨어졌던 엄마의 품에 안긴 아이가 끅끅 흐느껴울며 설음을 토하듯 순아는 몸부림쳤습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순아는 어느사이 아버지처럼 믿음직하고 어머니처럼 다정한 사람들속에 둘러싸인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넌 뛰여난 그림재간을 가진 애라지?》

누군가가 살뜰하게 말을 건늬였습니다.

《어서 마음놓고 그림을 그리렴. 이제는 어떤 놈도 널 황금망아지라고 업신여기지 못할게다.》

그러자 다섯, 여섯… 모두 열마리의 아침새들이 하얀 종이두루마리를 물고 날아오더니 순아의 앞에 펼쳐놓았습니다. 순아가 구원해준 아침새의 형제들이였습니다.

순아는 품속에서 고이 간직했던 붓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러나 선뜻 그림은 그리지 못했습니다.

아― 순아를 제일 사랑해주고 순아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어머니도 종내 풀어주지 못한 소원을 누가 이처럼 살뜰히 풀어주는것일가요?

《지금까지 난 여우섬에서 일등가는 화공으로 불리웠댔어요.》

순아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그건 내가 그린 그림들이 여우섬의 새나 꽃보다는 더 고왔기때문이지요.

하지만 내 나라의 산천은… 사람들은 그림보다 훨씬 더 아름다와요. 아니, 내 나라는 온통으로 커다란… 살아있는 그림이예요. 난 아무리해도 이보다 더 훌륭한 그림은 그려내지 못할거예요. 아! 내 나라 어머니의 품!》

흐느끼며 그어가는 순아의 붓을 따라 아침새 훨훨나는 푸른 하늘이며 어델 보나 고향처럼 유정한 산천이 하나, 둘 종이우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더운 눈물이 뜨거운 구슬처럼 종이우에 뚝뚝 떨어졌습니다.

순아의 눈물에 젖은 그림들은 으쓱으쓱 춤을 추는가싶더니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놀랍게도 벼이삭이 춤을 추는 누런 벌과 살진 고기떼가 뛰노는 맑은 강, 과일향기 그윽한 언덕들로 변하면서 그림들을 꽉 채웠습니다.

드디여 순아가 그토록 소원하던 살아있는 그림이 펼쳐진것입니다. 그 신비로운 강산에서는 서로 도와 더 큰 행복을 가꾸어가는 화목한 사람들의 노래소리가 오래오래 울려퍼졌습니다.

 

아침새 훨훨나는 자유론 강산이여

우리들의 운명을 지켜주는 어머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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