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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아동문학》 주체97(2008)년 제9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제 1 회)
이해 겨울은 추위할아버지가 심술궂은 마음을 먹기라도 한듯 류달리 일찍 들이닥쳤다. 엊그제는 때이른 첫눈이 펑펑 쏟아지더니 저녁에 잡아들며 날씨가 꽤 사나와졌다. 저 멀리 북쪽에서 뻗어내린 산발 어디에선가 터진 하늬바람은 박달령을 넘어 홰홰 휘파람소리까지 내지르며 웅기중기 널린 산골마을에도 기승스레 달려들었다. 노루꼬리만치나 짧다는 겨울해가 서산마루우로 기울어지는무렵이였다. 열서넛나이에 알맞추 만든 지게를 진 소년이 눈에 묻힌 비탈길을 헤치며 산을 내리고있었다. 하얀 토끼털귀걸이를 낀 둥글넙적한 얼굴은 발깃하니 달아있었다. 지게우에 수북이 얹힌 나무단들에 어지간히 맥을 뽑은것이였다. 《깍, 깍.》 별안간 까치 우짖는 소리에 얼른 고개를 쳐들었다. 키높이 자란 백양나무우듬지에서 까치 한마리가 긴 꽁지를 달싹거리고있었다. (우리 아버지한테서 기쁜 소식이 왔으면 얼마나 좋을가. 몸도 편치 않으신데다 감방안은 춥기까지 할테지.…) 용일은 물기가 번져가는 둥근 눈을 슴벅이다가 고개를 떨구고말았다. 며칠전 벼락같이 덤벼든 《치안대》놈들이 아버지를 꽁꽁 묶어 끌어갔던것이다. (아버지없이 나 혼자 어떻게 살아?…) 그날 빈 방에 홀로 남은 용일은 몸부림치며 흐느꼈다. 왜놈세상에서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 이제는 아버지마저 잘못되는가싶어 하늘이 무너진듯 앞이 캄캄했다. (아버지, 조금만 참으세요. 내가 어떻게든 아버지를 꼭 빼내오고야 말테예요.) 용일은 사랑하는 아버지가 갇혀있을 《치안대》감방이 있는 멀리 읍쪽에 눈길을 보냈다. 뽀드득 뽀드득 시름겨운 그의 마음엔 아랑곳없이 발밑에서는 사뭇 귀맛좋은 눈밟는 소리만 났다. 그전같으면 장난치지 않고는 못 배길터이지만 지금은 덤덤히 걷기만 한다. 하얀 눈판우로 시선을 달리던 그는 문득 한자리에 서버렸다. (가만, 이 나무짐을 져다주면 어떻게 될가?) 불쑥 뛰여든 생각에 흠칫 놀랐으나 차츰 얼굴이 밝아졌다. 날씨도 추운 때 저희네 방에 불 땔 나무를 가져왔다면 아마 히죽벌쭉할테지. 그 기회에 아버지를 내보내달라고 또다시 졸라볼테야. 용일은 제딴에도 궁냥이 그럴듯싶어 도툼한 입술을 벙싯 열었다. 부랴부랴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들여보낼 밥보자기를 나무단속에 찔러넣었다. 마당밖을 나서자 종종걸음을 놓았다. 지게가 들썩거리며 어깨를 파고드는것도 몰랐다. 갑자기 누군가 잡아당기기라도 한듯 절로 걸음이 떠졌다. 길옆에 마주보이는 외따로 서있는 집이 석찬네 집이였던것이다. 금시라도 그 애가 앞을 막아나서며 따지고들것 같아 조마조마해서 훔쳐보았다. 그들은 소꿉시절부터 한마을에서 자란 딱친구였다. 그런데 뜻밖의 불행을 당한 지금 자기 마음을 알아주고 동정해줄 대신 어제날의 분단위원장티만 내며 타이르려들줄 미처 몰랐었다. 《용일아, 아버지를 생각하는 네 마음은 나두 다 알아. 그렇지만 자꾸 찾아다닌다고 그놈들이 내놓아줄상싶니?》 엊그제 아버지에게 들여보낼 솜저고리를 보자기에 싸는 그에게 석찬이는 이렇게 말했었다. 《이제 그놈들이 불벼락을 맞고 쫓겨갈 날이 오지 않나 두고봐. 너 범골의 인민유격대가 금천면을 치고 갇혔던 사람들을 모두 구원했다는 소릴 못 들었니?… 너도 희망을 가지고 용기를 내렴.》 그새 아버지생각에만 매달려 세상형편과 담을 쌓았던 용일은 금시 눈이 둥그래졌다. 석찬이 말대로만 된다면야 정말이지 얼마나 좋을가. 허나 유격대가 읍거리를 칠 날은 언제이겠는지.… 게다가 놈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죄없는 사람들을 마구 끌어다 총살해버리는 살벌한 판에 아버지가 무사하리라고 어떻게 장담하며 마음을 놓을수 있담. 용일은 석찬이 몰래 가는숨을 호 내쉬였다. 《용일아, 우리도 힘을 합치면 유격대아저씨들처럼 놈들과 싸울수 있을거야. 마음 든든히 먹고 나서면 새힘도 솟고 아버질 구원하게 될 날도 빨리 오리라 생각해. 성길이와 삼돌이도 잡혀간 식구들의 원쑤를 갚겠다고 나섰단다. 너도 찬성이라면 래일 밤에 백양나무밑으로 나오렴.》 뜻밖의 말에 눈이 둥그래졌던 용일이가 소스라쳐 굳어진것은 그 애가 돌아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지금 이 순간도 용일은 그 애 권고대로 백양나무밑이 아니라 읍으로 향한것이 내심 꺼리끼지 않는것은 아니였다. 아마 텁석부리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요구하던거며 지금 지고가는 나무단을 어디로 가져가는지를 석찬이가 안다면 주먹을 부르쥐고 덤벼들지도 몰랐다. 용일은 허둥지둥 마을을 벗어나서야 모두숨을 내쉬였다. 하지만 이 모든것이 전혀 상상할수 없었던 기이한 상봉에서부터 시작되였다는것은 석찬이도 알고있는 사실이였다. 아버지가 붙잡혀간 다음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용일은 아침 일찌기 읍거리에 들어섰다. 《우리 아버질 놔줘요. 우리 아버지에게 무슨 죄가 있나요?》 용일은 놈들에게 들이대고 따지고싶었다. 그가 《치안대》놈들이 둥지틀고있는 건물의 어느 한 방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였다. 용일은 그만 어리둥절해져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술병이며 닭의 다리가 놓인 책상과 마주앉아 아침추렴에 여념이 없는 《치안대》부대장이라는 텁석부리가 너무도 낯익은 사람이였던것이다. 용일은 활줄처럼 팽팽하던 마음의 탕개가 스르르 풀리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봄날의 아지랑이가 눈앞에 피여나듯 어쩌면 희망이 보이는듯싶었다. 그 순간에는 전쟁전 소비조합상점 인수원이던 그가 어떻게 되여 불쑥 《치안대》부대장이 되여 나타났는지 미처 생각해볼 경황도 없었다. 전쟁전에 그 사람을 알게 된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그때도 눈이 많이 온 추운 겨울날이였다. 석찬이와 함께 박달령을 넘던 용일은 령길 중턱의 굽이길에서 뒤번져진 달구지와 맞다들렸었다. 전날에 녹은 눈이 밤새 령길을 눈얼음판으로 만들어놓았던것이다. 바퀴 떨어진 달구지는 벼랑턱 나무밑둥에 걸려있었고 령길우에는 소비조합상품인듯 신발짝이며 천퉁구리들이 널려있었다. 하마트면 달구지가 령길아래 깎아지른 수십길 절벽아래 미끄러떨어져 박살날번 했었다. 구레나룻이 터부룩한 인수원이 달구지를 붙잡고 애쓰는것을 본 그들은 달려가 달구지도 바로세워주고 널려진 상품들도 거두어주었으며 길우에 생긴 눈얼음판도 까버렸었다. 《이거 참, 너희들이 아니였으면 나 혼자 어쩔번 했니. 정말 고맙다. 나한테 놀러들 오너라. 혹시 너희들을 도울 일이 생길지 알겠느냐.…》 구레나룻 인수원은 기특한듯 어깨를 두드려주며 집안형편을 일일이 묻기까지 했다. 도움받을 일이 생기면 찾아오라며 친절하게 대해주던 사람인데 아무렴 생판 모른다고 딱 잡아떼기야 할라구.… 눈물이 글썽해진 용일에게서 사연을 듣고난 그는 무척 측은한 기색을 지었다. 《너희 집 일이 정말 안되였구나. 일이 그렇게 되다니… 그 사람이 너희 아버진줄은 정말 몰랐는걸.》 한동안 무언가 생각을 굴리는듯 말을 끊었던 구레나룻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내 맘 같아선 당장 내보내주고싶다만 우에 상급이 있고 너희 아버지도 큰 혐의를 받고있는 형편이니 별수 없구나. 허지만 너무 걱정말아라. 신세는 신세루 갚으랬는데 내가 힘써보자꾸나. 사실… 아버지가 빨리 풀려나가는가, 못 나가는가 하는건 너한테도 달렸는데…》 《나한테 달렸다구요?》 용일은 눈이 사발만 해져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럼, 바루 너한테 말이지. 네가 아는걸 죄다 솔직히 말해준다면 말이다. 례를 들면 너희 아버지에게 찾아오던 사람들이 있을수 있을텐데 그가 어떤 사람이고 아버지를 언제 찾아왔댔는가, 아버지가 자주 다니던 곳은 어딘가 하는걸 말이지.… 이건 다 너희 아버지가 죄없다는걸 증명하기 위해서란다.》 《?!…》 용일은 그의 말에 더럭 의심이 들었지만 설마하는 생각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흉한 마음을 먹을수는 없는 법이다. 《만약 그게 네 맘에 안 든다면 그만두어도 무방하다. 그런데 내 생각은 이렇다. 너희 아버지가 어머니 없는 널 키우느라 맘고생인들 얼마나 했느냐. 그런 아버지가 오늘 이런 변을 당했는데 자식이라는게 이런 때 부모생각 못하면야 그게 무슨 효자이고 자식의 도리라 하겠니?》 구레나룻은 설레설레 고개를 젓기까지 했다. 그러나 용일은 말해줄래야 별로 말할것도 없었다. 한것은 우선 이즈음 아버지를 찾아왔던 사람들이라고는 빌려갔던 도끼를 돌려주러 마을끝에서 찾아왔던 석찬네 할머니밖에 없었고 다음으로 아버지가 다리 아픈것이 도져 읍거리의 약방에 약을 지으러 몇번 다녀온것밖에 더는 없었기때문이였다. 《아, 지금 당장 말해달라는건 아니다. 생각나는게 있거든 아무때구 일없다. 그게 그리 중요한건 아니니까.…》 텁석부리는 용일이가 제 속심을 알아챌가봐 겁나는듯 흔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건만 집으로 돌아오는 용일의 마음은 엉킨 실꾸리를 앞에 놓은 때처럼 무거웠다. 이제 그의 호의를 마다하고 시침을 뻑 따고있으면 아버지일은 어떻게 될가.… 그렇다고 무슨 말을 해준담.… 용일은 이 며칠새 있은 일들이 꿈속의 일이여서 깨여나면 모든것이 예전대로 되여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랴싶었다. 읍으로 향하는 큰 길에 들어섰던 그는 주춤 그 자리에 멈춰섰다. 박달령에서 내려오는 신작로쪽에 웬 아이 하나가 나타났던것이다. 토끼털모자를 꾹 눌러쓴 석찬이였다. 부디 피하자고 하면 외통길에서 맞다들린다더니 이제는 감출수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내막을 알게 될텐데 할 말은 해야 했다. 불에 덴 소처럼 펄펄 뛰겠으면 뛰고 별의별 흉한 감투를 씌우겠으면 씌우라지. 용일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마음을 도사려먹으니 널뛰듯 하던 가슴도 차츰 진정되였다. 《너 용일이구나. 마침 잘 만났어. 지금 막 지나오면서 보니까 령길의 눈을 다 쳤던데 너 무슨 눈치를 챈게 없니? 글쎄 놈들이 무슨 도깨비바람이 불어서 령길의 눈을 다 쳤담.…》 석찬은 두리두리한 눈에 미심쩍은 표정을 담은채 긴장해서 지켜보았다. 나무짐을 띄여보고 뭐라 할가봐 가슴조였던 용일은 조금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무슨 눈치를 채지 못했는가고 묻는건?… 아버지일때문에 몇번 찾아다닌걸 가지고 이젠 다르게 보는 소리가 아니야?… 《나야 요즘 아버지일때문에 언제 그런것까지 다 살필 형편이 됐니?》 용일은 시쁘둥해져 석찬을 힐끔 흘겨보았다. 《또 아버지소리냐?…》 석찬은 한심한듯 이마살을 찌프렸다. 용일은 슬그머니 밸주머니가 불어올랐다. 《체, 너무 저 혼자 제일인체 하지 말아. 난 뭐 생각이 없는 아이인줄 아니? 너도 알다싶이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없이 나를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을 하고 난 아버지사랑을 좀 적게 받으며 자랐니. 그런데 아버지가 지금…》 용일은 갑자기 목이 메여올라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것은 석찬이도 잘 알고있는 사실이였다. 어머니없는 설음을 알세라 왼심쓰던 아버지였다. 언제보나 깨끗이 빨아 풀을 먹이고 다림발까지 선 옷을 입혔고 겨울에는 썰매도 제일 멋지게 만들어주었었다. 어디 그뿐이랴. 비오는 날 5리도 넘는 학교에 알뜰한 솜씨로 엮은 벼짚 도롱이를 들고 찾아왔던 일은 석찬이도 잊지 않고있는 일이였다. 《용일네 아버지, 아이들은 비를 맞아야 빨리 큰댔어요.》 석찬이가 용일을 놀려주며 까불어대자 《우리 용일이가 감기라도 들면 어쩔려구. 그러면 큰일이지.》하며 눈을 끔벅이던 아버지였다. 눈보라치는 추운 겨울날 두툼한 솜옷을 입혀 보내지 못한것이 마음에 걸려 용일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발을 얼구며 마당가에 나와서서 기다렸던 일도 한해전의 일이였다. 《…그런데 아버지를 내놓아줄 때까지 가만 앉아 기다리기만 하면 그게 무슨 자식이라 할수 있니.… 넌 그런 념려없으니 다 모를거야. 내가 요즘 밤잠을 제대로 자는줄 아니?》 《내가 모른다구?… 에잇.》 석찬은 무슨 말인지 할듯말듯 입술을 움씰거렸다. 그러나 인차 단념한듯 손을 홱 내저었다. (헹, 할 소리가 없겠지.…) 용일은 속으로 코웃음쳤다. 그도 그럴것이 그애 아버지는 유격대가 있는 산에 들어갔으니 자기가 겪는 고충은 맛볼래야 맛볼수도 없을것이였다. 《그 나무짐은 뭐냐?》 말머리를 돌리던 석찬은 스스로 떠오른 생각에 깜짝 놀란듯 낯빛이 얼음처럼 창백해졌다. 《좋도록 생각하렴. 아버질 구원하자니 별수 있니?》 용일은 석찬을 외면한채 대꾸했다. 《너 그것두 말이라구 하니? 소년단원인 네가 어쩌면 그런 생각을 다… 그래서 어제 밤에도 안나오구. 넌 그렇게 하는게 아버지를 위한다고 생각했니? 에익, 차라리 바위돌하고 주먹질 하는게 낫지.》 석찬은 지게짬사이로 새여나온 장작개비 하나가 눈에 띄우자 발길로 탁 걷어차버렸다. 《그럼?!…》 용일은 모욕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꾹 참았다. 어제밤 애들이 백양나무아래 모인다는것을 알고도 읍으로 갔던것도 사실이니 할 말이 없었다. 석찬은 애써 참는듯 한동안 숨만 씨근거리더니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렴. 전쟁전에 우린 얼마나 보람차고 떳떳하게 소년단생활을 해왔니? 그런데…》 용일은 석찬의 진정이 느껴져 슬며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석찬의 말처럼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던 지난날이였다. 이해처럼 눈이 많이 내린 날이면 마을애들과 함께 령길의 눈도 치고 《소년단행진곡》을 씩씩하게 부르며 마을로 들어서군 했다. 그럴 때면 동네 조무래기들도 여기저기서 달려나와 제 형들의 꽁무니에 매달려서 해죽거리며 노래를 따라부르군 했다. 《제법이거던. 공화국의 나어린 영웅들이라. 아무렴, 노래에서처럼 너희들은 모두가 장군님의 아들, 나라의 아들이구말구.》 마당가에 서있던 아버지도 대견한 눈길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용일아, 넌 잘못 생각하고있어. 텁석부리 그놈은 정체를 숨기고 소비조합에 기여들었던 나쁜 놈이래. 그놈이 널 꼬이느라 그러는줄 왜 모르니? 그리고 네가 빌붙는다고 아버지를 내놓아줄것 같으면 뭣때메 붙잡아갔겠니?》 석찬의 숨소리가 차츰 높아갔다. 허나 굽어들고싶은 생각은 없었다. 《난 내 생각이 있으니까 더 상관 말렴.》 용일은 딱 자르고나서 지게에 어깨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똑똑히 알아둬. 너는 자기한테 아버지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를 낳아 키운 아버지, 어머니도 나라가 없었다면 어떻게 될번 했니. 우린들 학교에서 마음껏 배우며 자랐을테야? 이건 우리 아버지가 나와 헤여지면서 해주신 말씀이야.》
텅빈 신작로에 홀로 남은 용일은 한동안 멍하니 서서 움직일줄 몰랐다. 이 비슷한 말을 어디서 또 들었던가. 웬일인지 석찬의 말마디들이 가슴속을 자꾸만 파고들어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문득 텁석부리 《치안대》부대장의 능글스러운 얼굴이 징그럽게 떠올랐다. 음충맞은 눈으로 내려다보며 알지 못할 웃음을 짓는 그는 과연 어떤 자일가, 만약 석찬의 말이 옳다면… 용일은 갑자기 몸이 오싹해지는것을 느꼈다.
2
용일은 자기가 언제 읍거리에 들어섰는지 알지 못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군용자동차들이 눈가루를 뽀얗게 말아올리며 미친듯이 옆을 지나갔다. 적재함들마다 철갑모를 뒤집어쓰고 무장을 갖춘 미군놈들과 괴뢰군놈들이 빼곡이 앉아있었다. 한대, 또 한대… 놈들의 자동차들은 읍학교 운동장으로 달려들어가더니 덜컥덜컥 멎어섰다. 《헹!》 용일은 교실로 몰려가는 놈들을 향해 사납게 눈총을 쏘았다. 이 땅우에 전쟁의 검은구름을 몰아온 미제놈들이 증오스러웠고 단란하던 가정에 불행을 들씌운 원쑤놈들이 저주스러웠다. 보초소를 통과하자 어느새 《치안대》가 든 건물이 나졌다. 텁석부리를 만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뒤설레였다. 이제 나무짐을 지고 나타난걸 보면 뭐라 할가. 《그녀석 생각이 제법인걸. 그 성의를 봐서라두 오늘은 무슨 마련을 봐야 할가보구만. 전번에 뭘 좀 알아봐달라구 부탁한걸 아직두 모르쇠하고있는게 좀 섭섭하긴 해두 말이야.》하고 어깨를 두드려줄지도 몰라. 그러면 바싹 달라붙어 졸라대야지.… 용일은 제 생각에 옴해 주위에 여느때와 달리 긴장한 공기가 떠도는것도 채 느끼지 못했다. 《치안대》놈들이 총들을 절컥거리며 건물안을 분주히 들락날락하고있었다. 텁석부리 《치안대》부대장도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웬일일가?) 아궁이앞에 지게를 벗어놓던 용일은 저도 모르게 창문틈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래일 아침 유격대가 있는 지점까지 길안내를 해준다는것만 약속하면 우린 당신의 생명을 담보할뿐더러 자기 임무를 끝낸 즉시 집으로 돌려보내주겠소.》 누군가를 심문하고있는 모양이였다. (래일 아침 유격대를?…)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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