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아동문학》 주체97(2008)년 제7호에 실린 글

 

  ◇동 화◇

 

전국군중문학작품현상모집 2등 당선작품

        

                      리 진 혁

 

손가락도 길고 짧듯이 아동백화점 학용품매대의 지우개들 역시 그 모양이나 성미가 모두 달랐습니다.

둥그렇게 생긴 지우개가 있는가 하면 네모나게 생긴 지우개도 있었고 성미가 급한 지우개가 있는가 하면 잔잔한 호수처럼 얌전한 지우개도 있었지요. 바로 이들속에 우리의 주인공들인 삭삭이와 석석이가 있었습니다.

 

1
 

생긴 모양이 길죽하고 성미가 시원시원한 석석이는 앞으로 훌륭한 일을 하고싶었습니다. 그러자면 이름난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나는 꼭 훌륭한 사람을 만날테야. 이 아동백화점보다 더 훌륭하고 멋진 집을 설계하는 그런 사람한테 가야지.》

또 어떤 때는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혹시 어느 재간있는 미술가와 함께 일해도 괜찮지 뭐. 그와 함께 그린 그림이 미술박물관에 척 걸리면 얼마나 보람과 긍지가 클가. 어쨌든 세상에 한번 태여났으면 재간있는 사람을 만나 훌륭하고 보람있는 일을 해야 할텐데…》

《정말 그래.》

성미가 사근사근하고 얌전하여 삭삭이라고 불리우는 지우개가 말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갓 소학교에 입학한 나어린 학생이 학용품매대에 나타났습니다.

지우개들은 은근히 (누구를 데려갈가?) 하는 호기심을 안고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체, 저런 꼬마는 안돼.》하고 석석이는 목을 움츠리고 다른 지우개들뒤에 서있었지요.

그런데 소년은 뜻밖에도 석석이를 가리키는것이 아니겠어요.

《난 이 지우개가 마음에 들어요.》하고 말입니다. 석석이는 대뜸 풀이 죽었습니다.

《젠장, 이름난 미술가나 건축가에게 가려고 했는데…》

하지만 어찌겠습니까?

지우개야 주인을 제 마음대로 고를수 없지 않습니까. 석석이는 할수없이 그 소학교학생을 따라갔습니다. 그 애와 함께 석석이가 간 곳은 어느 학교 미술소조실이였습니다.

소년은 하얀 종이를 그림판에 척 붙이고 앉아 선생님이 교탁에 세워놓은 박제품꿩을 열심히 그려나갔습니다.

그가 그리고있는 그림을 보신 선생님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가르쳐주셨답니다.

《꿩의 목이 지내 길어졌어요. 마치 타조같지 않아요.》

그러자 소년은 석석이를 들고 길어진 꿩의 목을 석석 지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형편없이 짧아졌습니다.

《이번엔 너무 짧아졌어요.》

소년은 또 석석 지웠습니다.

석석이는 혀를 차며 한숨을 쉬였습니다.

《에이, 될성부른 나물 떡잎부터 안다고 이런 엉터리같은 애곁에서 한생을 속절없이 보내게 됐구나.》

저녁에 집으로 돌아갈 때 소년은 필갑을 책가방 맨우에 놓았답니다.

《옳지, 좋은 기회다.》

석석이는 살금살금 필갑안을 빠져나왔습니다.

소년이 가방을 달싹이며 달려갈 때 석석이는 용감하게 밖으로 뛰여내렸습니다.

 

2
 

석석이가 길가에서 한참이나 가쁜숨을 들이쉬고있는데 한떼의 아이들이 오구작작거리며 걸어오고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주오는 키큰 아저씨에게 약속이나 한듯 꾸벅 인사를 하였습니다.

《설계가아저씨, 안녕하십니까?》

《오냐, 너희들이냐.》

설계가아저씨는 웃음을 함뿍 담고 아이들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아저씨, 아저씨가 우리 학교를 설계하였다지요.》

《암, 그럼. 너희들의 학교랑 아동백화점이랑 내가 설계를 했지.》

《야!》

아이들은 저저마다 박수를 치며 기뻐하였습니다.

순간 석석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됐어. 이제라도 저 이름난 설계가를 따라가야 해. 그래야 보람있게 살수 있거던.》

석석이는 뽀르르 굴러가 설계가아저씨의 발등에 살짝 올라섰습니다.

《아니 이런, 새 지우개로구나. 어떤 애가 흘렸을가?》

설계가아저씨는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멀리 사라져버린 뒤였습니다.

그날부터 석석이는 이름난 건축가의 설계탁에 앉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설계가아저씨는 석석이를 쓰는 일이 별로 없었답니다.

설계를 해도 석석이를 한두번 쓰는것이 고작이였습니다.

어떤 때는 연필만 매만지며 생각만 굴릴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루이틀 지나자 석석이는 짜증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훌륭한 설계가라는 사람이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였구나.》

석석이는 하도 속이 상해 함께 사는 연필에게 물었습니다.

《얘. 연필아, 저 설계가아저씨가 아동백화점을 설계한 그 설계가가 맞긴 맞아?》

《그래, 그렇다고 하더라. 나도 여기에 새로와서 잘 모르겠다.》

《넌 언제 여기로 왔니?》

《이젠 한두달 잘됐을거야. 그런데 난 아직도 큰 설계를 해본적이 없어. 그저 초안만 몇장 그려보았을뿐이야.》

《그래?!》

지우개는 억이 막혔습니다.

그러자 설계지우에 앉아있던 제도자가 그들의 말에 끼여들었습니다.

《그게 뭐 그리 놀라우냐. 어떤 때는 한달동안을 머리속에서 구상하는데… 하지만 설계를 시작하면 단숨에 쭉쭉… 그땐 막 뻐근해.》

제도자는 은근히 자랑을 담아 주인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하지만 석석이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차비 삼년에 제떡 쉰다고 그렇게 느려서야 언제 멋진 설계를 해볼텐가. 다른 애들은 지금 한창 본때있게 일할텐데. 에이, 난 이런 재미없는 사람은 싫어.)

석석이는 씽― 하고 설계탁을 뛰여내렸습니다.

《잘들 있어. 난 더 훌륭한 사람을 찾아갈테니.》

석석이는 연필과 제도자가 미처 말릴새도 없이 설계실을 빠져나왔습니다.

 

3
 

《어디로 갈가?》

석석이는 딱히 짚이는데가 없어 공원소로길에 서있었습니다.

이때 석쉼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아니 이런, 새 지우개인데… 어떤 애가 흘린게지.》

석석이가 올려다보니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가 도수높은 안경너머로 내려다보고있었습니다.

《내 막내손자한테나 가져다 주어야지.》

할아버지는 석석이를 웃주머니에 건사하였습니다.

《뭐, 막내손자? 그 애는 어떤 애일가?》

석석이는 몹시 궁금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정작 막내손자를 만나보니 유치원꼬마였습니다.

석석이는 눈앞이 다 아뜩해졌어요.

이제야 겨우 글씨련습을 시작한, 그것도 한창 건너긋기, 내려긋기를 배우는 철부지어린애였으니까요.

《체, 점점 만나는 사람이란… 난 정말 복이 없구나.》

석석이는 한숨을 후 내그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막내손자에게 석석이를 쥐여주며 말했습니다.

《얘 옥돌아, 이 지우개를 정히 써야 한다.》

막내손자는 《야, 새 지우개로구나. 할아버지, 고마워요.》하며 손벽을 짜르르 쳤습니다.

석석이는 입을 삐죽거렸습니다.

석석이는 또다시 달아날 기회를 엿보았으나 막내손자 옥돌이가 얼마나 깐깐히 지우개를 건사하는지 달아날수 없었습니다.

석석이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꿈이고 뭐고 다 깨여진 사발이다.》

 

4
 

그러던 어느날.

그날은 할아버지의 생일날이였습니다.

할아버지의 집으로는 숱한 손자손녀들이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기념품들을 안고 찾아왔습니다. 그중에서도 할아버지를 제일 기쁘게 한 애는 전국아동미술전람회에서 1등을 한 외손자였습니다.

1등표창장을 받아든 할아버지는 너무도 대견하여 손자를 쓸어주고 꼭 안아주며 기쁨을 금치 못해하였습니다.

《우리 꼬마미술가가 정말 용타. 네가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을 가져왔구나.》

필갑속에서 이 소리를 들은 석석이는 귀가 번쩍 열리였습니다.

《난 왜 저런 애를 만나지 못했을가?》

그는 이제라도 저런 애와 함께 살고싶었습니다. 아니, 그 애의 지우개가 되리라고 결심하였습니다.

밤이 이슥해지도록 잠을 안 자고 기회를 엿보던 석석이는 슬그머니 옥돌이의 필갑에서 나와 방바닥에 내려섰습니다.

오가는 식구들의 발길에 채울 때마다 꼬마미술가의 책가방으로 슬쩍슬쩍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꼬마미술가의 책가방속으로 쏙 들어갔습니다.

금시 필갑뚜껑을 열고 그속으로 들어서려는데 필갑안에서 《누구야!》하는 야무진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몸집이 석석이 절반만 한 작은 지우개가 두눈을 부릅뜨고 마주서있었습니다.

《넌 누군데 남의 집에 함부로 뛰여드는 거냐?》

석석이는 엉거주춤 서서 뒤머리를 뻑뻑 긁으며 말하였습니다.

《난 석석이라고 부르는 지우개다. 나도 너희들처럼 멋진 그림을 그리고싶어 찾아왔어.》

《뭐?! 석석이라구.》

순간 마주섰던 지우개가 석석이의 두손을 잡고 콩콩 뛰며 기뻐하였습니다.

《야, 석석아. 날 모르겠니. 나 삭삭이야, 아동백화점에서 헤여진 삭삭이.》

《뭐?》

깜짝 놀란 석석이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습니다. 어제날의 오동오동하던 삭삭이의 모습은 찾을 길 없었지만 그 하얀 살결과 언제나 성실해보이던 눈매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그래, 너 정말 삭삭이가 옳구나.》

삭삭이와 석석이는 한참동안이나 손을 마주잡고 놓을줄 몰랐습니다.

이윽고 석석이가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였습니다.

《넌 정말 좋겠구나. 재간둥이꼬마미술가를 만나서…》

《하하, 그 꼬마미술가가 누군지 알아? 바로 네가 처음 만났던 그 학생이란다.》

《뭐라구?!》

석석이는 다시한번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 그때 그 학생이 너를 잃어버린 후에 우리 아동백화점에 다시 왔더구나. 그래서 내가 그의 지우개로 된거야. 처음엔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한장의 그림을 위해 지우고 지우고 또 지우고. 그러나 나날이 늘어나는 그의 그림솜씨를 보니 얼마나 보람있던지 모르겠더구나. 나는 그가 훌륭한 미술가로 자라는데 한몫 하고싶었어. 그래서 힘자라는껏 그를 도와주었지 뭐.》

《정말 그 애가 내가 처음 만났던 애였단 말이야?》

석석이는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정말이지 믿어지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찬찬히 꼬마미술가를 살펴보니 정말 자기가 처음으로 만났던 그 애가 분명하였습니다.

석석이는 정말 아쉬웠습니다. 꼬마미술가를 몰라본 자기가 말이예요.

석석이의 두볼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어떤 눈물인가구요.

뛰여난 재간을 가진 훌륭한 사람만 찾아다니던 어리석었던 자신에 대한 원망의 눈물이였지요.

《난… 보람있게 사는것이 처음부터 훌륭한 주인을 만나야만 이루어질수 있다고 생각했댔어. 그런데…》 머리를 떨구고 눈물만 뚝뚝 떨구는 석석이에게 삭삭이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석석아, 보람이란 노력하는데 있는거야.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훌륭한 열매를 가꿀 때만이 참된 긍지와 기쁨을 맛보게 된단다. 너도 이제라도 옥돌이가 최우등생으로 되도록 잘 도와줘.》

석석이는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였습니다.

《정말 그래. 나도 너처럼 이제라도 보람있게 살테야. 할아버지의 막내손자를 잘 도와줄테야.》

삭삭이와 석석이는 두손을 굳게 잡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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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석석이는 어떻게 되였을가요.

물론 석석이도 삭삭이처럼 보람있게 살았답니다. 할아버지의 막내손자 옥돌이가 최우등생이 되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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