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아동문학》 주체97(2008)년 제6호에 실린 글

 

  □ 단편소설 □

 

전국군중문학작품현상모집 1등 당선작품

        

                      류금석

 

늦잠꾸러기가 한 열명쯤 있다고 하면 그중 여덟이나 아홉은 아이들일것이다.

순호도 올해 열살난 아이인데 역시 기가 막힌 늦잠꾸러기였다.

아침마다 아버지가 둬번 그리고 어머니가 서너번, 나중엔 《좀 더 재우자꾸나.》를 입버릇처럼 외우시는 할머니까지도 《얘 순호야, 허리 아프지 않니?》하며 엉치를 툭툭 두드려서야 꿈지럭꿈지럭 잠을 깨군 했다.

오늘 아침도 순호는 그 순서를 다 거치고서야 게슴츠레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제일먼저 보인것이 창문옆 책장유리에 어릉거리는 아침해빛이였다.

시간은 5분전 7시…

겨울날 이 시간이면 어둑컴컴할 때인데 지금은 해까지 떴다.

겨울은 밤이 길고 여름은 낮이 길기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 해답은 자연교과서에 다 있다.

그러니까 이것두 자연실험이로구나.

불쑥 떠오르는 생각에 순호는 히쭉 웃음을 지었다.

세면을 하려고 마당에 나서니 수도가에서 벌써 아버지가 세면하고있었다.

푸파, 푸파…

세면하는 소리가 요란하기도 했다.

힘도 요란하게 세고 일도 요란하게 잘하는 아버지…

분조장인 아버지는 첫새벽에 들에 나갔다가 지금 아침식사하러 들어온 참이였다.

모내기를 시작한지 오늘까지 닷새째, 농장에서는 제일로 바쁜 때였다.

《벌써 한 절반은 먹어놨구나.》

닭모이를 주다말고 마을앞 청산벌을 내다보며 할머니가 하시는 소리였다.

《그래요, 푸푸― 귀한 봄철을 놓치지 말자고 다들 얼마나 열성인지…》

세면을 하는중에 아버지가 하는 대답이였다.

《그렇겠지, 봄날에 하루 놀면 겨울엔 열흘 굶는다는걸 누가 모를라구…》

순호는 하품을 하다 말고 히히 소리내여 웃었다.

《이 녀석, 왜 웃는거냐? 엉?》

벌써 짐작이 가는듯 할머니는 짐짓 을러메면서도 웃는 얼굴이였다.

순호도 싱글벙글 웃으며 아버지가 떠준 세면물앞에 가앉았다.

《푸푸― 할머닌 우리 나라 속담중에 그거 하나밖에 모르나요? 요전날도 말하시더니…》

그러자 할머니는 남은 모이를 닭무리를 향해 훌 쏟아주며 말씀하는것이였다.

《그랬으면 어쨌단 말이냐. 그게 얼마나 쓰이는데가 많구 또 얼마나 신통한 속담이라구.

조선속담 그른데 없다는 말두 그래서 생겨난거야.》

할머니의 그 말에 장단을 맞추는듯 넓디넓은 벌에서는 뜨락또르며 모내는기계의 소리가 정답게 울려오고있었다.

《봐라, 얼마나 듣기 좋은 소리냐. 저 소리가 꼭 우리 마을의 노래소리 같지 않느냐.》

불그레 달아오른 얼굴을 수건으로 문지르며 아버지가 하는 말이였다.

순호는 턱아래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닦을념도 하지 않고 푸르러가는 벌을 홀린듯 바라보고있었다.

이제 한 15년쯤 지나면 순호네 또래가 주인이 될 고향벌…

그때 가면 이 벌의 주인이 되여 콤퓨터로 농사하리라 굳게 결심하고있는 순호였다.

 

×

 

(쓰이는데가 많다구?…)

학교 가던 길에 순호는 할머니의 그 속담이 다시 생각났다.

농사군들 내놓고 또 누구한테 맞는 속담이란말인가? 한참 머리를 기웃거리고 눈을 깜박거렸으나 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순호야―》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쿠!》

와뜰 놀라 돌아보니 작은 눈을 머루처럼 동그랗게 떠올린 한학급의 홍만이가 원래 긴 목을 더 길게 빼들고 서있었다.

둘러멘 가방 한 귀퉁이로는 늘 그랬던것처럼 포충망자루가 쑥 삐여져나와있었다.

커서 생물학자가 되겠다는 홍만이였다. 생물학자가 되겠다는건 좋은 일인데 가끔 끔찍한 관찰을 벌려놓는것으로 하여 순호한테 꼴을 먹군 하는 홍만이였다. 례를 들면 개구리는 오래동안 굶어도 죽지 않는다는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확인해보겠다면서 멋있게 살이 찐 참개구리를 조롱속에 가두어놓고는 아무것도 먹이지 않고 들여다보기만 하는 그러루한것이였다.

그러다가 보호해야 할 개구리가 죽으면 어쩔려구…

그런데 오늘은 또 아침부터 왜 이렇게 고아대는거야?

《넌 내가 귀머거린줄 아니.》

순호가 퉁명스럽게 내쏘았지만 홍만이는 제 하고픈 소리만 했다.

《넌 잠자리 흉내내니? 머리를 갸웃갸웃 하면서…》

홍만이는 제편에서 잠자리흉내를 내보였다.

《하하하, 네가 딱 잠자리 같구나야!》

깔깔 웃던 순호는 문득 이상한것을 발견하였다.

홍만이의 왼쪽귀박죽이 어제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주 빨갛고 게다가 조금 붓기까지 한것이였다.

《건 뭐냐? 누가 깨물어줬니?》

그러자 홍만이는 히쭉 웃더니 순호의 귀가까이에 입을 갖다댔다.

《혼자만 알고있어, 망신스러운 사연이야.…》

소곤소곤…

홍만이의 《망신스러운 사연》은 그닥 길지 않았지만 밸이 끊어지게 우스운 사연이였다.

순호는 배를 그러안고 한참이나 웃어댔다.

지나가던 논물관리공할아버지가 《이 녀석들 제정신이냐? 공부시간이 다되여오는데 학교엔 가지 않고 길바닥에서 품놓구 웃고있냐?》라고 질책하지 않았더라면 그냥그냥 웃었을것이다.

두 아이는 부랴부랴 학교로 달려갔다.

교실에 들어가 앉았는데 홍만이가 순호보다 앞에 앉다나니 그 빨간 귀박죽이 얼른 눈에 띄였다.

그걸 보자 순호의 웃음집이 또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첫 시간은 수학인데 마침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했다.

《먼저 어제 배웠던 문제들을 다시한번 복습하겠습니다.》

순호는 그 문제들을 휑하니 꿰고있었다.

자다가 깨여나도 그 즉시로 풀수 있는 문제이니 복습하지 않아도 아무 일 없을것이다.

(마침이구나! 그 짬에 난 좀 재미나게 놀아보자.)

선생님은 무엇인가 설명을 시작했다.

순호는 수첩에서 찢어낸 종이장에 이렇게 썼다.

《리홍만개구리박사동지앞, 내가 이제 재미난 작문을 써보내겠으니 심사해주기 바람.》

순호는 앞자리에 앉은 재남이의 잔등을 쿡쿡 찔렀다.

《왜 그래? 아프구나야.》

《얘, 홍만이한테 이걸 좀…》

《넌 선생님설명 안 듣니?》

순호는 히쭉 웃으며 속으로 대답했다.

(수학머리 없는 너희들이나 들어라, 난 다 알거던.)

재남이는 시끄럽다는듯 눈알을 한바퀴 굴리면서 쪽지를 전해주었다.

쪽지를 본 홍만이가 궁금해서 돌아보자 순호는 눈을 끔쩍해보이고나서 재미난 작문을 쓰기 시작했다.

…숙제하기 싫어서 끙끙거리던 《생물박사》홍만이의 귀에 유치원동생들의 숨박곡질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홍남이 찜.》

《옥별이 찜.》

홍만이는 참지 못하고 밖으로 달려나갔습니다.

《얘들아, 나두 같이 놀자!》

홍남이랑 옥별이랑은 깔깔 웃었습니다.

글쎄 소학교 4학년생형님이 자기들하고 숨박곡질을 하겠다니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그래도 마음 고운 동생들은 홍만형님을 자기들의 놀음에 받아주었습니다.

사기가 난 홍만이는 숨박곡질이 시작되자마자 허둥지둥 숨을 곳을 찾다가 그만에야 닭장옆에 숨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겠습니까?

원래부터 몹시 사나왔던 수닭놈이 제집옆에 숨은 홍만이의 귀박죽을 힘껏 쪼아주는게 아니겠습니까? 나쁜 놈!…

《아가가!》

소리를 지르며 물러나던 홍만이는 반대쪽 귀박죽으로 당콩섶에 돋은 옹두라지를 되게 들이 받았습니다.

《아이쿠!》

그래서 홍만이의 귀박죽은 빨간색으로 변하고 조금 살이 붓기까지 했습니다.

재미난 《작문》은 여기서 끝났다.

그것이 바로 홍만이가 털어놓은 《망신스러운 사연》이였다.

무엇 하나 보태지도 덜지도 않은 사실그대로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선생님의 설명이 끝을 맺고있었다.

그러거나말거나 순호는 저 혼자 싱글거리며 또다시 쪽지편지를 만들어 재남이에게 넘겨주었다.

《왜 자꾸 그래? 내가 뭐 우편통신원이야?》

또 잔등을 찔리운 재남이가 한 세바퀴쯤 눈알을 굴리며 편지를 넘겨주는 순간에야 순호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가려들었다.

《다들 알았습니까?》

《예―》

모두가 한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우렁찬 그 대답속에는 순호의 목소리도 당당하게 끼여있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구태여 복습하지 않아도 자다가 벌떡 깨여나서도 얼마든지 식은죽먹기로 풀수 있는 문제인데…

하지만 그것은 결코 식은죽이 아니였다. 말하자면 속살은 무척 맛있는데 깨기가 아주 힘든 가래열매와 같은것이였다.

 

×

 

그 어떤 시간이든 시간마다 자기의 내용을 가지고있다.

재미나는 시간, 심심한 시간, 졸리는 시간, 기분 나쁜 시간…

그런데 어떤 아이에게는 즐거운 시간이 되고 또 어떤 아이들에게는 눈물 찔끔 나게 하는 시간도 있으니 그것이 바로 시험을 치르는 시간이다.

공부 잘한 아이들은 얼굴에 싱글싱글 웃음을 담고 입술을 움직움직하면서 부지런히 써나가는데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얼굴이 시뻘개서 씨근씨근 가쁜숨을 내몰며 끙끙 속앓이를 하는 시간…

순호가 바로 오늘 그런 봉변을 당했다. 사실 오늘은 이래저래 뜻깊고도 기분이 좋아야 할 날이였다.

아버지네 분조가 농장적으로 제일먼저 모내기를 끝내게 된 동시에 순호네가 4학년생이 된 후 두달동안 배운것을 중간총화하는 날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순호는 아버지의 저녁밥에다가 제일 맛있는 《반찬》으로 자기의 5점 맞은 자랑을 끼워가지고(그는 5점을 장담하고있었다.) 모내기전투장으로 나가기로 약속했다는것이였다.

그런데 그 즐거움이 그만 물거품으로 바뀔줄이야.…

일은 수학시험때부터 시작되였다.

국어며 자연이며 다른 과목들은 자신있게 쳤는데 글쎄 수학시험에서는 전혀 배우지 못한 문제가 하나 나온것이였다.

(이게 뭐야. 시험문제가 잘못됐구나?)

그런데 웬걸 재남이며 만길이며 다른 아이들은 머리를 수굿하고 앉아서 열심히 풀어나가고있는것이 아닌가.

참다못해 순호는 재남이의 잔등을 쿡 찌르려다가 아뿔싸 하고 아프지 않게 살살 긁었다.

《재남아, 재남아, 이거 배운 문제가?》

재남이는 슬며시 머리를 돌리고 한번 지그시 쏘아보더니 머리만 끄떡끄떡했다.

《언제? 언제?》

그러자 쏘아보는 눈에 좀 더 힘을 주더니 흥 하고 코방귀를 뀌는것이였다.

《왜 그래?》

순호가 따져묻자 재남이는 단마디로 툭 내쏘았다.

《어제 그 시간에 말이야.》

그다음에는 삑 돌아앉아버리고마는것이였다.

《어제 그 시간? 어제 그 시간?…

그게 대체 언제라는거야?》

하지만 아무리 쥐여짜도 생각나질 않았다.

그만에야 순호의 얼굴은 홍만이의 귀박죽보다 더 시뻘개졌다.

그때부터 30분간 그 문제를 붙안고 엎치락 뒤치락 씨름질을 했지만 종내 풀지 못한채 시험지를 내고말았다.

이거 내 머리가 제일 나쁘다는거 아니야?…

눈물까지 찔금 솟아올랐지만 그래도 그것만은 믿고싶지 않았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런데 왜?

시험이 끝난 다음 동무들에게 물어보니 글쎄 자기가 《자다가 깨여나서도》 풀수 있었던 그 문제가 아닌가?

수자와 방식을 묘하게 변화시켜놓았을뿐 답도 꼭같은 문제였다.

《아이쿠!》

머리를 싸쥐였던 순호는 문득 눈이 둥그래졌다.

그런데 왜 나는 못 풀었을가? 다른 애들은 어떻게 알고 풀었을가?

수학문제풀이에서는 자기이상 없듯이 뽐내던 내가, 선생님의 칭찬을 늘 독차지해오던 이 순호가 이게 무슨 망신이람…

순호는 모든 동무들이 다 자기를 비웃는것 같아 쥐구멍에라도 찾아들고싶었다.

순호의 얼굴은 시험을 칠 때보다 더 시뻘개졌다.

시험점수를 불러주시던 선생님이 순호차례에서는 고개를 드시였다.

《순호학생? 어떻게 된건가요? 그 누구도 못푼걸 저 혼자 풀었다면 모르겠는데… 정 반대이구만요?》

《…》

《혹시 문제복습하는 시간에 딴생각을 한게 아니예요?》

문제복습하는 시간? 딴생각?…

순호는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라졌던 기억이 핑끗 불꽃을 튕기며 날아들었다.

옳아, 바로 어제 홍만이에게 《작문》을 써보낸 바로 그 시간!

《옳습니다. 딴장난을 했습니다.》

그것은 앞자리에 앉은 재남이의 대답이였다.

재남이는 얼른 일어나 그 시간에 있은 일에 대하여, 자기가 《우편통신원》이 되였던 그 일에 대하여 미주알고주알 다 일러바쳤다.

뒤따라 홍만이가 일어나 아직까지 책상안에 숨어있던 그 《작문》쪽지를 선생님에게 바치고 선생님이 그것을 읽기까지 하는 바람에 깔깔, 까르르 웃음판이 벌어지고야말았다.

그 바람에 원래 짤막한 순호의 목이 아예 움츠러진 자라목이 되고말았다.

 

×

 

맑게 개인 초여름의 저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서쪽하늘을 곱게 물들인 노을, 그 노을빛이 반사되여 붉고붉은 논판마다에서 한들한들 춤추는 애기모들…

선들선들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며 귀맛 좋게 울리는 개구리의 울음소리들…

그러나 순호의 마음은 처뚱처뚱 비내리는 저녁처럼 울적해있었다.

글쎄 모처럼 들고가는 아버지의 저녁밥속에 맛없는 4점짜리 《반찬》을 담아들고 가게 되였으니 왜 그렇지 않겠는가?

이럴줄 알았으면 흰소리라도 치지 말았을걸…

(에이 참, 고 문제가 딱 나올건 뭐람?…)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때문이 아니였다.

(에이 참, 홍만이 그 자식은 왜 귀박죽 쪼인 소리를 했냐 말이야.)

순호가 가지고 온 밥과 반찬을 풀밭에 펼쳐놓고 수저를 든 아버지를 바라보고있는데 그만 아버지의 물음이 그의 가슴을 쿡 찔렀다.

《그래, 오늘 시험을 잘 췄겠지?》

순호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어떻게 된 일이냐?》

순호는 아버지에게 시험에서 4점을 맞게 된 어쩔수 없는 사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떠듬떠듬 이어가는 순호의 사연을 다 듣고난 아버지는 입을 쩝쩝 다시며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허엇 참, 오늘 저녁은 특별히 맛나게 먹을줄 알았더니 에― 다 틀렸군.》

아버지는 모내는기계가 고장났을 때보다 더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숟가락까지 놓아버리는것이였다.

《아버지!―》

순호는 다급히 숟가락을 들어 아버지의 손에 쥐여주었다.

《에이 참, 내가 내… 에이 참.》

순호는 단박에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버지, 난 꼭 봉창할테예요. 다음번 시험에선 꼭…》

그러자 아버지가 숟가락을 다시 받아들며 물었다.

《그래 넌 알고있니, 무엇이 잘못됐는지?》

순호는 고개를 푹 떨군채 혀아래소리로 대답했다.

《홍만이가 귀쪼인 소리를 안했으면…

아니 아니 내가 그따위 〈작문〉만 쓰지 않았다면…》

《틀렸다.》

아버지의 단호한 목소리가 귀청을 띠끔하게 울렸다.

《넌 본질을 모르고있다. 수학문제의 본질보다 더 중요한것을…》

중요한 본질? 그게 뭘가?

순호는 긴장해지는 마음으로 두눈을 부지런히 깜박거렸다.

아버지는 그 두눈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다시 물었다.

《순호야, 흘러갔던 물이 다시 돌아오는걸 봤니?》

흘러갔던 물이 거꾸로?…

본적이 없었다.

없는것은 물론 세상에 있을 법도 안한 일이였다.

글쎄 흘러갔던 물이 되돌아오다니?

아버지가 너누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것처럼 한번 지나만 가면 영영 되돌아오지 않는게 바로 시간이야. 네가 어제 장난질로 보낸 시간도 물론이구… 봉창을 한다구? 똑똑히 들어라.

네가 잃어버린 그 몇분때문에 이다음에 커서 네가 이 청산벌의 주인이 될 때 얼마나 큰 값을 치르어야 하는지 넌 아마 다 모를게다. 네가 시험시간에 진땀을 빼는것과는 대비도 되지 않는 뼈저린 괴로움으로 가슴을 치며 살게 될수 있다는걸 말이다. 그때 가선 아무리 후회해도 어쩌는수 없어, 이미 때가 늦었으니까.》

순호는 벅차게 안겨드는 깨달음으로 하여 눈을 꼭 감았다.

그것은 작은 가슴이 큰 박동으로 두근두근 뛰게 하는 커다란 깨달음이였다.

문득 순호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아버지, 생각났어요.》

《뭐가 말이냐?》

할머니가 하나밖에 모르는듯 늘 말씀하군 하시던 그 속담…

봄날에 하루 놀면 겨울에 열흘 굶는다.

그게 우리한테두 맞는 속담이구나! 나한테두 꼭 맞는구나.

순호의 말을 듣자 아버지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래, 너희들한테두 꼭 맞는 속담이다. 농촌에서 봄철이 제일 바쁘고 중요한 때인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는 너희때와 같은 배움의 첫시절이 가장 귀중한 시절로 되는것이란다. 그러니 그 시절에…》

아버지가 더 말하지 않아도 순호의 머리속에서는 벌써 그다음 말마디들이 샘처럼 퐁퐁 솟구쳐오르고있었다.

배움의 첫 시절에 한순간을 놓치면 이 나라의 주인이 될 그때에 가선 가슴아픈 후회의 백날, 천날이 차례지게 된다는것을…

귀중한것을 알게 된 순호의 마음속에 마침내 아름다운 저녁풍경이 고요히 젖어들기 시작하였다.

 

×

 

아이들이라고 해서 다 늦잠꾸러기가 아니다.

오늘 아침도 순호는 여느때보다 한시간이나 빨리 잠을 깼다.

눈을 뜨자 제일먼저 보인것이 창문옆 책장에 꽂혀있는 자기의 책들이였다. 순호는 얼른 자리를 차고 일어나 교과서와 참고서를 꺼내들었다.

순호가 발꿈치를 쳐들고 밖을 내다보니 역시 높다란 문화주택 대돌우에 선 홍만이가 손을 흔들고있었다.

오늘부터 그들은 청산벌이 환히 내다보이는 언덕우에서 함께 새벽공부를 하기로 약속했던것이다.

홍만이도 다시는 숙제공부를 집어치우고 동생들의 숨박곡질에 뛰여드는 일이 없을것이라고 다짐을 했다.

그렇다고 수닭한테 귀박죽을 쪼이는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으리라고는 장담할수 없다.

어쨌든 수닭은 사나운 놈이니까…

순호는 책을 흔들며 크게 소리쳤다.

《홍만아―》

홍만이도 마구 손을 흔들었다.

《순호야―》

닭모이를 주던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칭찬했다.

《그래그래, 될성부른 나무는 첫싹때부터 알아본다고 했지.》

역시 우리 나라 속담은 그른데 없이 꼭 들어맞는 신통한 속담이였다.

마을앞 청산벌에서도 가을이 오면 알찬 열매를 맺게 될 어린 모들이 푸르싱싱 자라고있었다.

대원수님께서 그리도 사랑하셨던 청산벌, 이제 멀지 않아 순호네 또래들이 당당한 주인이 될 때엔 콤퓨터로 농사지은 풍년벌을 자랑스레 굽어보리라. 쌀로써 내 나라를 받들고 아버지장군님의 강성대국을 더욱 빛내이게 될 사랑하는 고향벌…

순호의 첫 시절은 이렇게 흘러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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