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 화◇
말하는 벙어리장갑
홍 병 호
겨울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참 좋은 계절입니다. 눈사람만들기, 썰매타기, 눈싸움, 연띄우기, 팽이치기, 정말 재미나는 놀음이 많고많은 신바람나는 계절입니다. 하얀눈이 퐁퐁 내리는 겨울은 또한 강아지들이 좋아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눈이 오면 아이들 못지 않게 강아지들은 마치 제 세상이나 만난듯이 깡충깡충 뛰여다닙니다. 소학교 1학년에 다니는 남수가 처음으로 맞는 겨울방학이였습니다. 겨울이 오자 어머니는 알락달락한 고운 꽃천으로 장갑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남수에게 줄 벙어리장갑이였습니다. 사실 상점에 가면 장갑은 얼마든지 있었답니다. 그러나 남수는 어머니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이 장갑이 더 좋았어요. 얼마나 곱고 깜찍하게 생겼는지 아세요. 어머니는 어깨에 척 메고다닐수 있게 장갑에 곱고고운 색끈까지 달아주었답니다. 어느날이였어요. 남수는 썰매를 끌고 마당에 나섰습니다. 강아지가 살래살래 꼬리를 저으며 따라섰어요. 남수의 앞가슴에서 깜찍하게 생긴 장갑이 대롱대롱 매달려 춤을 추고있었습니다. (엉, 저게 뭘가? 우리 주인은 나밖엔 고와하는게 없는데.) 강아지의 눈이 깜빡거렸어요. 《얘, 네 이름이 뭐냐?》 강아지가 장갑을 보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얘, 넌 나처럼 깡충깡충 뛸수 있니?》 강아지가 또 물었습니다. 역시 대답이 없었습니다. 《넌 나처럼 소리칠수 있니?》 그래도 대답이 없습니다. 이때였어요. 《얘 바둑아, 아무리 물어봐야 그건 대답을 못해. 그건 벙어리장갑이야. 넌 벙어리가 말하는것을 봤니?》 감나무우둠지에 앉아있던 까치가 말했어요. 《뭐 벙어리장갑?》 강아지는 빤히 올려다보았어요. 알락달락 벙어리장갑이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흔들 춤을 춥니다. 강아지는 질투가 나서 껑충 뛰여오르며 벙어리장갑을 막 물려고 했어요. 남수가 그러면 안된다는듯 발을 탕 굴렀습니다. 강아지는 옆으로 달아나며 놀려댔습니다. 《벙어리, 벙어리.》 얼음판에서는 벌써 아이들이 썰매를 쌩쌩 몰아가고있었습니다. 남수도 벙어리장갑을 착 끼고 썰매에 앉았어요. 꼬챙이를 콱 박으며 쌩 앞으로 달립니다. 썰매를 따라 강아지도 깡충깡충 따라 다닙니다. 그러다가 얼음판에 미끄러지면서 네다리를 활 벌리고 미끄럼을 타기도 하면서 말이예요. 흥얼흥얼 코노래까지 부르며 신바람나게 썰매를 타던 남수가 갑자기 멈춰섰습니다. 철남이가 썰매에 앉아 울고있었으니까요. 철남이는 유치원에 다니는 앞집 애랍니다. 남수는 썰매에서 내려 철남이에게로 다가갔어요. 그 애 손은 빨간 도마도알 같았습니다. 《철남아, 너 손이 얼었구나.》 썰매타는데 정신이 팔리다나니 손이 꽁꽁 얼었던거예요. 남수는 꽁꽁 곱아든 그 애의 두손을 호호 입김으로 녹여주고 자기의 장갑을 벗어 착 끼워주었어요. 철남이의 손이 쑥 들어갔습니다. 철남이는 눈이 둥그래서 남수형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얼음판이 미끄러워 아기작아기작 뒤따르던 강아지가 짖어댔습니다. 《야, 이 벙어리장갑아. 넌 왜 남에게 가있니? 어서 남수에게 돌아와.》 강아지는 성이 나서 짖어댔습니다. 벙어리장갑은 아무말도 없었습니다. 이때 은행나무우듬지에 앉아 썰매타는 아이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박새가 말했어요. 《얘 바둑아, 저러다 너희 주인도 손이 꽁꽁 얼겠다야.》 그러거나 말거나 남수는 철남이를 썰매에 태웠어요. 그의 잔등을 두손으로 밀며 앞으로 나갑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해가 퍼지자 갓 얼어붙은 얼음판이 질벅질벅 녹기 시작했습니다. 《철남아, 이젠 그만하고 들어가자꾸나.》 남수가 철남이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철남이는 썰매만 씽씽 몰아갔습니다. 그러다가 무엇엔가 걸렸는지 《앗》하며 앞으로 푹 꼬꾸라졌어요. 남수가 얼른 달려가보니 온통 물주머니가 되였습니다. 장갑은 물론 앞가슴과 바지에서도 물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철남이를 집에 보내고 썰매를 어깨에 멘 남수가 마당으로 들어설 때였습니다. 마당에 있던 누나가 못마땅한 눈으로 남수를 흘겨보았습니다. 《남수야, 넌 그게 뭐냐?》 남수는 그 자리에 딱 굳어졌어요. 벙어리장갑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너 오늘 아침에 끼고나간 장갑을 하루도 못가서 푹 적셨구나.》 이때 어머니가 남수를 바라보며 근심어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남수야, 장갑을 적시면 손이 언단다. 손이 얼면 어떻게 글을 쓰겠니?》 남수는 아무 대답도 못했습니다. 강아지가 벙어리장갑에게 말했습니다. 《장갑아, 네가 사실대로 말하렴. 남수가 적신것이 아니라구.》 벙어리장갑은 물방울만 똑똑 떨구며 아무 말도 없습니다. 그날 밤 남수 어머니는 푹 젖은 벙어리장갑을 꼭 짜서 따끈따끈한 구들아래목에 놓고 밤새워 말리워주었습니다. × 다음날이였습니다. 남수는 학습반에 가서 동무들과 방학숙제를 하고 타박타박 집으로 돌아오고있었습니다. 남수는 공원의 의자에 앉아 도서관으로 그림책을 빌리러 간 영남이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나무의자에는 눈녹은 물이 질벅하게 고여있었습니다. 남수는 장갑을 낀채 의자를 뻑 닦았습니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동화그림책을 펼쳐들었어요. 조금후였습니다. 꼬마들이 공원에서 놀려고 왁 밀려왔습니다. 다른 의자로 옮겨가던 남수는 오똑 걸음을 멈췄어요. 그 의자에도 물이 있었으니까요. 남수는 그 의자의 물도 닦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툭》하는 소리와 함께 남수의 장갑이 조금 찢어졌습니다. 《엉?》 의자의 못이 조금 솟아올라와있었던거예요. 남수는 돌맹이를 찾아 못을 쾅쾅 박았어요. 그 소리에 소나무가지우에 앉아있던 박새가 깜짝 놀라 어디론가 포르릉 날아가려다 내려다보았습니다. 《엉, 저 애가... 저 앤 참 좋은 애구나.》 남수는 다른 의자들도 깨끗이 닦아놓고 못이 솟아있는가도 살펴보았어요. (어쩌면 저렇게 살뜰할가?) 이때였어요. 《어험》하는 기침소리와 함께 웬 할아버지 한분이 지팽이를 짚으며 공원으로 들어섰습니다. 할아버지는 남수를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허허, 뉘집 손주인지 참 용쿠나.》 할아버지는 의자에 앉으며 대견스레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이날 남수가 집에 들어설 때였어요. 방안문이 벌컥 열리며 누나가 나오더니 대뜸 《남수야, 이건 또 뭐냐?》하며 남수의 벙어리장갑을 보고 놀랐습니다. 《저, 이건...》 남수는 장갑을 얼른 등뒤로 감추었습니다. 《넌 뭐야. 어제는 적셔오구 오늘은 찢어먹구, 넌 왜 그렇게 벌차니.》 남수가 아무 대답도 못하는데 마당에 있던 강아지가 또 장갑을 보고 짖어댔습니다. 《장갑아, 어떻게 된 일이야. 네가 사실대로 말하렴.》 벙어리장갑은 아무말도 없었습니다. 《에이 참 답답해. 벙어리가 되여 말도 못하니.》 벙어리장갑은 한숨만 폭폭 내쉬였습니다. 이때 직장에서 퇴근해오시던 어머니가 남수를 바라보며 말했어요. 《넌 새 장갑을 이틀도 못돼서 그렇게 만들었니. 원 애두.》 그날 밤 남수 어머니는 한뜸두뜸 벙어리장갑을 기워주었습니다. × 밤새도록 함박눈이 펑펑 내렸어요. 밖은 온통 눈부신 은빛세상으로 변했습니다. 눈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집지붕에도 길가에도 전기줄에도 모두 눈뿐입니다. 남수는 학교마당의 눈을 치려고 눈가래를 메고 집을 나섰습니다. 학교로 가던 그는 공원옆을 지나다가 오똑 걸음을 멈췄어요. 큰 소나무밑에 웬 작은새가 날개를 파드득파드득거리고있었으니까요. 얼른 다가가보니 작은 박새였습니다. (왜 이렇게 되였을가?) 날개죽지에서는 피가 흐르고있었어요. 새매에게 쫓기던 새 같았습니다. 남수는 어린 박새가 불쌍하여 조심히 두손으로 받쳐들었습니다. 박새는 남수의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파드득파드득거렸습니다. 그러나 남수의 낯익은 얼굴을 보고는 얌전해졌습니다. 남수는 추워서 떠는 박새를 자기의 따뜻한 장갑속에 쑥 넣었어요. 집으로 돌아온 남수는 박새의 날개에 약도 발라주고 상한 날개에는 붕대도 곱게 감아주었습니다. 《엄마가 널 얼마나 찾겠니?》 남수는 따뜻한 방에 놓아주고싶었습니다. 그러나 엄마박새가 찾으며 애쓸것을 생각해서 다시 공원으로 데리고왔습니다. 강아지도 남수의 뒤를 졸졸 따라왔습니다. 남수는 박새가 추워할가봐 장갑속에 넣어 공원의 소나무가지우에 올려놓았어요. 그리고는 학교마당의 눈을 치려고 급히 떠났습니다. 《멍멍멍》 강아지가 나무를 올려다보며 짖어댔습니다. 《남수가 왜 장갑을 두고갔을가?》 강아지는 혼자서 웅얼웅얼거렸습니다. 《장갑아, 넌 거기서 뭘하니?》 강아지가 장갑을 올려다보며 물었습니다. 《난 어머니를 기다려.》 그 소리에 강아지는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벙어리라고 한마디 말도 없던 장갑속에서 말소리가 났으니 말예요. 《뭐 어머니를 기다린다구. 어머니는 일나가셨는데.》 그러자 벙어리장갑속에서 또 말소리가 들려왔어요. 《우리 엄만 꼭 날 찾아올거야.》 《얘, 그러지 말고 빨리 내려와. 남수한테 어서 가자.》 《난 안내려갈테야. 추워서 혼자서는 못가.》 《뭐뭐 추워서 못간다구.》 《그래그래.》 강아지는 벙어리장갑과 계속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다가 혼자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녁무렵이였습니다. 남수네 학급 담임선생님이 학습반을 돌아보고 오는중에 공원옆을 지나고있었습니다. 이때 어디선가 도란도란 노래소리가 울려왔어요.
어머니 어머니 나 여기 있어요 어서어서 오세요 빨리 오세요
누군가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있었습니다. 《누가 노래를 부를가?》 선생님은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또 같은 노래소리가 들려왔어요. 노래소리는 큰 소나무가지우에 있는 벙어리장갑속에서 울려나오는게 아니겠어요. 《아니, 벙어리장갑이 노래를 하다니?》 선생님은 신기해서 머리를 기웃거렸어요. 《누구의 장갑일가?》 《남수의 장갑이예요.》 벙어리장갑속에서 또 이런 말이 울려나왔어요. 선생님은 다시 물었습니다. 《남수라니?》 《전번에 유치원에 다니는 철남이의 언손을 녹여주고 장갑을 끼워준 애 말예요. 자기는 욕을 먹으면서도.》 《남수한테 그런 일이 있었니?》 《그리고 공원의 의자에 눈녹은 물을 닦아내고 솟아있는 못을 돌맹이로 쾅쾅 박아주던 아이 말예요.》 《남수가 그런 일도 했니?》 이때였어요. 어디선가 박새 한마리가 포르릉 날아왔어요. 무엇을 찾는지 장갑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우짖었습니다. 그러자 이것보세요. 《엄마, 나 여기 있어요.》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박새 한마리가 벙어리장갑속에서 발랑발랑 기여나왔습니다. 꼬마박새의 날개에는 붕대가 감겨져있었습니다. 꼬마박새는 엄마곁으로 포릉포릉 날아갔어요.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머리를 끄덕이였습니다. 조금 있더니 박새는 꼬마박새와 함께 포르릉 날아갔습니다. 선생님은 소나무가지우에서 장갑을 내리웠습니다. 남수가 저녁에 집안으로 들어설 때였어요. 《지금 오니?》 누나가 물었습니다. 《응.》 남수는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남수의 한쪽손에는 장갑이 없었습니다. 《너 장갑을 어떻게 했니?》 《장갑?!》 남수는 장갑을 까맣게 잊고있었어요. 그때에야 아침에 있은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아차.》 남수는 머리를 싸쥐였습니다. 《너 어머니가 만들어준 장갑을 잃어버린게로구나.》 《잃어버린게 아니라 사실은...》 남수는 더 말을 못했습니다. 《남수야, 엄마가 장갑을 열개, 스무개 만들어주어도 네 손에야 당하겠니.》 누나가 안타까와 말했습니다. 이때였어요. 《남수 어머니 계십니까?》 밖에서 누군가 찾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누구세요?》 방문을 열던 누나가 머리숙여 인사를 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어서 들어오십시오.》 뜻밖에도 남수의 담임선생님이였습니다. (선생님이 우리 집엘 어떻게?) 남수는 얼른 일어나 꾸뻑 인사를 했어요. 선생님은 남수 어머니와도 인사를 나누며 방에 들어오셨어요. 선생님은 가방을 열더니 알락달락한 벙어리장갑 한쪽을 꺼내놓으셨습니다. 《이 장갑은 남수학생의것이지요?》 장갑을 내려다보던 남수는 벙긋 웃었습니다. 《예, 제 장갑입니다.》 《우리 남수는 잃어버렸는데 선생님은 어디서 찾으셨어요?》 남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공원의 소나무에서 찾았답니다.》 《공원의 소나무에서요? 선생님, 이거 미안합니다. 우리 남수가 벌차서 선생님께 수고를 끼쳤군요.》 남수 어머니는 근심이 섞인 말로 말했습니다. 《아니예요. 남수 어머니, 남수학생은 착한 일을 많이 했답니다.》 《착한 일이라니요.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선생님은 웃으시며 말씀하셨어요. 《남수 어머니, 이 벙어리장갑이 다 말해주었답니다.》 (벙어리장갑이 말을 하다니?) 남수는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선생님은 남수가 유치원에 다니는 철남이의 언손을 녹여주고 장갑을 끼워준 일이며 공원의자의 물을 닦아내고 솟아오른 못을 박아놓은 일이며 날개를 상한 박새에게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 자기 장갑에 넣고 소나무가지우에 걸어놓아 엄지박새와 만나게 해준 일이랑 다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응, 그런 일이 있었느냐? 그런데 이 엄마에게는 왜 말을 하지 않았니?》 어머니는 남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습니다. 《우리 남수가 이젠 다 컸구나. 속도 깊구. 정말 용타.》 누나도 남수의 손을 다정히 잡으며 말했어요. 《남수야, 이 누난 그런것도 모르고 욕만 했구나.》 선생님은 남수의 손에 벙어리장갑을 쥐여주며 말했습니다. 《보세요. 착한 일은 언제나 알려지게 된답니다. 남수학생이 한 착한 일은 말못하는 벙어리장갑도 다 말하지 않았나요.》 선생님의 말씀에 온 집안은 하하하 웃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