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96(2007)년 4월 19일 《청년전위》에 실린 글

 

   

준엄한 날에나 평화로운 날에나

 

사랑이 크면 아픔도 크다는 말이 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혁명의 길에서 뜻을 같이한 동지들이 희생되였을 때 누구보다 가슴아파하시며 눈물도 많이 흘리군 하시였으며 그를 위한 온갖 조치를 다 취해주시였다.

그 숭고한 의리심은 준엄한 날에나 평화로운 날에나 한결같으시였다.

주체40(1951)년 8월, 당시 정주에 자리잡고있던 김일성종합대학 개교식에 참가하기 위하여 깊은 밤에 대령강을 건느던 허헌선생이 불의에 달려든 적들의 야간폭격에 뜻밖에 희생되였을 때였다.

허헌선생으로 말하면 어버이수령님의 두터운 신임속에 남조선로동당 위원장(당시)으로 활동하다가 북반부로 들어온 후 주체37(1948)년 남북총선거때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되고 그해 9월 공화국이 창건되면서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 되였으며 이밖에도 법제위원회 위원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 성원,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의 중책을 지니고 사업하게 되였다. 그리고 주체38(1949)년부터는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거되는 영광을 받아안게 되였다.

그가 희생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좀처럼 이 놀라운 소식을 믿을수가 없으시였다. 거듭 알아보시고 틀림이 없다는것을 확인하신 그이께서는 비통한 심정을 금치 못하시며 그의 시체를 찾기 위한 긴급조치를 취해주시였다.

무섭게 사품치는 강물속에서 이미 바다로 떠내려갔을지도 모르는 시체를 찾는다는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잠시도 지체할수 없으시였다.

그가 어떤 동지인가. 조국통일과 민족의 번영을 위하여 그처럼 헌신하던 동지를 어떻게 강물속에 그대로 내버려둘수 있단말인가.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정녕 그렇게 할수가 없으시였다. 하기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현지에 나가있는 일군들로부터 더는 허헌선생을 찾을길이 없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바다가 아무리 넓다 한들 우리 당이 아끼고 사랑하던 허헌동지를 못찾는다는거야 말이 되는가,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야 한다, 바다밑을 다 뒤져서라도 꼭 찾아야 한다고 간곡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전선상황이 매우 어려운 속에서도 수천명의 군인들과 많은 배들을 동원하도록 친히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여 해당 일군들에게 강에서만 찾지 말고 바다에서도 찾고 혹시 물에 밀려 북쪽으로 떠내려갔을수도 있으니 남쪽바다에서만 찾지 말고 북쪽바다에서도 기어이 찾으라고 당부하시였다.

허헌선생이 희생된지 16일만에 드디여 어버이수령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정주북쪽 앞바다에서 그를 찾아내고야말았다.

하지만 동지를 생각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은 끝이 없었으니 이 16일동안 비통함을 금치 못해하시던 그이께서는 그를 찾으신 다음에는 또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것이 가슴아프시여 더없이 애석해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허헌선생의 딸을 위로하시며 동무는 자기 가슴이 제일 아프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마 자신이 더 가슴아플지도 모른다고 하시며 지난 정월에는 김책동무가 갔고 …이번에는 동무의 아버지가 가고… 이렇게 내가 아끼고 믿던분들이… 라고 끝내 말끝을 맺지 못하시는것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장례식날 영구가 안치되여있는 모란봉지하극장에 친히 나오시였다.

적들의 대규모적인 《하기공세》가 개시되여 전선상황이 매우 긴급한 때에 최고사령부를 잠시도 뜨실수 없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 몸소 나오신데 대하여 일군들이 송구한 마음으로 말씀올리였을 때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시며 아니라고, 아무리 어떻다 한들 허헌선생이 마지막으로 가는 길에 내가 나오지 않을수 없다고, 나오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어서 나왔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맨앞에서 몸소 령구를 메시고 모란봉지하극장의 높은 계단을 오르시였다.

둘러보면 세상에 령도자는 많아도 이렇듯 수령이 전사의 령구를 메고 걸은 일이 그 어디에 있었던가.

정녕 우리 수령님께서 지니신 혁명적의리의 깊이는 그 무엇으로써도 잴수 없는 무한대한것이였으니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사랑하는 전사와의 영원한 작별이 못내 애석하시여 그날 저녁 또다시 허헌선생의 묘를 찾으시였다.

고인에 대한 추억과 애석함으로 가슴을 적시시며 오래도록 분묘를 바라보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윽고 일군들에게 새로 판 자리가 보이지 않게 잔디를 더 입혀야겠다고, 미제놈들이 어떤짓을 할지 모르니 잔디를 잘 입히라고 간곡히 당부하시며 또다시 눈굽을 찍으시였다.

예로부터 눈물을 모르는것이 장수의 상징이라고 일러왔고 또 세상에 유명하다는 무사들, 장군들이 눈물을 아낀것은 사실이다.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신 우리 수령님께서도 조련해서는 전사들앞에서 눈물을 보이시지 않으셨다.

하지만 사랑하는 전사들의 희생을 두고서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시였으니 정녕 이렇듯 뜨겁고 숭고한 의리를 지니신 어버이수령님의 그 사랑의 품이 있어 전사는 죽어서도 다시 안기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세월은 멀리도 흘렀다.

하지만 먼저 떠나간 혁명전사를 생각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간절해만 갔다.

어느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기념일을 앞두고는 공화국이 걸어온 지난날을 더듬으시다가 허헌선생을 추억하시면서 그의 혈육과 명절을 함께 쇠였으면 좋겠다고 하시며 몸가까이 불러도 주시고 현지지도의 길에서 허헌선생의 자취가 어려있는 장소를 지나실 때면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허헌선생은 애국심이 강한 참으로 좋은분이였다고 감회깊이 추억하시며 그를 잃으신 애석함을 금치 못해하시였다.

바로 이것이 혁명적의리를 최고의 높이에서 지니고계신 어버이수령님의 태양같이 따사롭고 넓고 넓은 사랑의 품이였다.

태양의 품에 안아 영생의 언덕에 세운 전사가 어쩌 허헌선생뿐이랴.

항일의 그날에는 놈들과의 격전으로 안장하지 못한 전우의 시신이 걱정되시여 100여리 허리치는 눈길을 되돌아가시여 정히 안장해주시고 애지중지 키워오신 사랑하는 전사를 잃은것이 너무도 가슴아프시여 깊은 밤 밀영의 고깔불앞에서 눈물속에 한자 또 한자 희생된 전사의 추도문을 쓰시던 우리 수령님,

건국의 그날에는 건군의 길에서 희생된 전사와의 마지막작별이 그리도 가슴아프시여 눈물속에 그의 령구를 메고나가시기도 하시고 준엄한 전화의 나날에는 갑자기 사망한 한 전사의 령구를 급히 딴곳에 옮기게 하시고 놈들의 손에 전사의 시신이 잘못될세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의 시신을 지키는 호위병들을 따로 두게도 하시고 당에 충실했던 한 지식인이 사망하였을 때는 세상에 없는 관례로 고인의 가슴에 영웅메달까지 달아주신 인민의 어버이,

어버이수령님 천품으로 지니신 이 혁명적의리에 떠받들려 영생의 삶을 누리는 전사가 어찌 이들뿐이랴.

대성산혁명렬사릉과 애국렬사릉은 물론 이르는 곳마다에 세워진 투사들과 영웅전사들, 애국렬사들의 동상과 석상들 그리고 도시와 농촌, 거리와 마을, 공장과 농장, 각급 학교와 유치원, 탁아소, 역들에 붙여진 사랑하는 전사들의 이름마다에는 그들이 세운 빛나는 위훈과 업적을 후손만대에 길이 전하시려는 우리 수령님의 한없이 숭고한 의리가 깃들어있는것이다.

동지적사랑은 의리의 힘으로 영원히 이어진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숭고한 혁명적의리로 동지적사랑을 영원한 사랑으로 꽃피워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에 의하여 반일독립의 총을 들고 싸우던 리관린할머니가 주체68(1979)년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있을 때였다.

그가 일찌기 조선녀성의 애국적기개와 용맹을 떨친 일이 못내 기특하시여 수십년세월 애쓰시여 그를 끝내 찾아내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의 건강이 걱정되시여 입원치료를 받도록 하시고 자주 전화를 거시여 그의 건강상태를 알아보시였다.

리관린은 어버이수령님의 그 사랑이 너무도 고마와 건강이 회복되여가자 수령님을 다시 뵈옵고싶은 심정을 터놓았다.

해당 일군들로부터 보고를 받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로인의 건강이 회복되였다니 기쁜 일이라고하시면서 일군들에게 내가 리관린선생을 찾아가야지 그 로인이 나를 찾아오게 해서는 안된다고, 내가 시간을 내여 찾아가 만나보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때로부터 얼마후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친히 병원에 나오시였다.

뜻밖의 일에 접한 할머니는 《수령님!…》하고는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나라일이 그처럼 바쁘신 가운데서도 매일같이 치료정형을 알아보시고 오늘은 또 이렇듯 친히 병원에까지 찾아오신 어버이수령님,

그 고마움에 목이 메여 흐느끼는 할머니의 마음을 눅잦혀주시며 어느 약이 효과가 큰가, 어떤 음식이 구미에 맞는가 등 일일이 알아보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제 퇴원하시면 어디서 지내고싶은가고 물으시였다.

고향 삭주에 가겠다는 할머니의 대답을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고향도 좋지만 여기 평양에 그냥 계시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자신께서 그동안 어머니를 모시지 못한것만 해도 그런데 오래동안 애써 찾아온 어머니를 멀리 보내놓으면 섭섭하지 않겠는가고 하시면서 이제는 내가 어머니를 모시겠습니다, 우리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돌봐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수난의 풍운속에 행방마저 알수 없게 되였던 옛 독립운동자 리관린, 처녀의 몸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한 길에 솔선 나섰던 그의 소행을 평생토록 잊지 않으시고 영원한 축복속에 여생을 보내도록 하시려는 은정넘친 이 말씀,

숭고한 혁명적의리가 그대로 차넘치는 어버이수령님의 그 말씀앞에 리관린할머니는 물론 동행한 성원들모두가 뜨거운것을 삼켰다.

세월이 흐르면 기억이 삭막해지고 정도 떠진다고들 한다.

하지만 혁명의 길에서 심장에 새기신 동지들에 대한 우리 수령님의 생각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간절하시였으니 혁명적의리의 화신으로서의 수령님의 절세의 위인상을 그대로 절감하게 하는 이런 이야기들 그 얼마나 많은가.

소년시절에 나눈 사랑을 잊지 않으시고 나의 첫 동지라고 불러주시며 그의 자식들에게까지 대를 이어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신 이야기며 소년시절의 옛스승을 잊지 않으시고 조국에 개선하시여 그부터 찾아주신 이야기…

참으로 어버이수령님처럼 의리깊으신분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다. 

 

본사기자 원 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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