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주체102(2013)년 제9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안 용 근
(제 2 회)
3
회령손님이 떠나가자 녀사께서는 진옥이를 데리고 월석리로 향하시였다.
손님과 한나절은 고향이야기로 회포를 나누시리라 생각했던 진옥은 의아한 빛을 감추지 못한채 녀사의 뒤를 따랐다.
녀사께서는 늘 입고다니시는 흰 옥당목저고리에 검정치마를 받쳐입으시고 자그마한 보꾸레미를 드신채 바람에 옷고름을 날리시며 앞서 걸으시였다.
진옥은 녀사께서 갑자기 월석리를 찾으실 때에는 무슨 중요한 일이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댔는데 지금 곰곰히 더듬어보면 사업상용무가 있는것같지는 않았다.
짚이는것이 있다면 오늘 장마당에서 유근성로인이 무심히 막내딸잔치를 래일 한다는것을 알린것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근성로인의 막내딸 잔치때문에?!)
생각이 여기에 미친 진옥은 금시 기쁨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분망하신 녀사께서 피로도 푸실겸 잔치구경도 하시고 가을소풍도 할수 있으시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십분 그럴만도 했다.
진옥은 녀사를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구름 한점 없는 청청한 날씨다.
지나는 곳마다 풍요한 들에서 농민들이 부르는 노래소리가 소슬바람을 타고 구성지게 들려온다. 벼가을이 한창이였다.
무명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인 농민들이 해빛을 받아 번쩍이는 낫을 휘두르며 아름이 벌게 벼를 베여눕힌다. 둔덕진 저쪽, 옹기종기 모여앉은 집집의 처마밑에는 고추타래가 불붙는듯 보이고 잘 익은 박들은 어서 켜달라는듯 덩실 지붕우에 앉아있다.
어디선가 시큼한 두엄냄새가 풍겨왔다.
장군님께서 주신 땅을 살붙이처럼 여기는 이 고장 농민들이 벌써 다음해농사차비를 착실하게 하고있는것이였다.
시원한 길이 벌판가운데로 가리마처럼 곧게 뻗어갔다.
김정숙녀사께서 자주 다니시는 뜻깊은 길이다.
그러고보면 이 길도 녀사의 거룩한 발자욱에 의하여 생겨난것처럼 생각된다.
어느덧 월석리로 들어서는 길목이 나졌다. 가을 해빛은 더욱 따사롭게 머리우에서 재글거리고 황금물결은 굼니며 와실렁댄다.
솨-스슬렁… 솨-스슬렁…
들의 한끝에서부터 한끝으로 파도쳐 굼니는 벼이삭들은 일제히 녀사께로 고개숙여 달음쳐오는것만 같았다. 진옥의 가슴은 젖어들었다. 비쳐오는 모든것- 알알이 영근 이삭이며 기쁨에 젖어 부르는 농민들의 노래소리며 새빨갛게 익은 고추며 지붕우의 박들까지도 새로운 의미를 담고있는것만 같았다.
월석리에 들어서신 녀사께서는 등너머에 있는 천수답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시였다. 그쪽으로는 나지막한 산들이 기복을 이루면서 대동강과 잇닿아있었다.
《?…》
녀사께서 마을쪽으로 가지 않으시고 경사진 천수답쪽으로 방향을 돌리시자 진옥은 의아했다. 하지만 이내 의혹이 풀렸다. 산기슭 둔덕진 그곳에서는 월석리를 비롯한 린근마을의 풍경이며 오곡백과 주렁진 풍요한 들이 한눈에 바라보이여 소풍할겸 부감하기에는 그저그만일것이였다.
진옥은 탄력있게 걸음을 옮기시는 녀사를 따라 천수답 두렁길에 들어섰다. 두렁길은 오불꼬불 기복도 심했다.
어느덧 녀사의 얼굴에는 땀발이 돋기 시작하였다.
한참 그렇게 오르시던 녀사께서 무춤 걸음을 멈추시였다. 가을을 끝낸 논판의 한구석에 벼이삭이 떨어진것이 눈에 띄였다.
녀사께서는 물속에 반나마 잠겨있는 그 벼이삭을 한동안 바라보시다가 끌리듯 그리로 가시였다. 그러시고는 허리를 굽히시여 벼이삭을 주으시였다. 댓걸음앞에 또 한이삭이 달구지바퀴자리에 짓뭉개져있었다. 녀사께서는 신발이 젖는것도 모르시고 거기에도 가시여 그 이삭까지 들고나오시였다.
진옥이도 녀사를 따라 몇개의 이삭을 주어들었다. 벼단을 나르다 흘린것이 분명했다.
녀사께서는 진옥이가 주은 벼이삭까지 물에 씻으시여 보자기에 정히 싸시였다.
진옥이는 녀사께서 진탕속에 박힌 한두이삭의 낟알을 보석보다 더 중히 여기시는데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럴수록 풍년바람에 낟알 귀한줄 모르는 논 임자를 속으로 나무람하였다.
진옥은 녀사를 모시고 달구지길로 나섰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가시던 녀사께서는 주위를 돌아보시며 무엇인가를 찾으시였다. 그러시던 녀사의 눈빛이 빛나시였다.
《저기 표말이 있군요.》
아닌게아니라 좀 떨어진 둔덕에 《유근성 논 1 700평》이라고 쓴 표말이 박혀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주인의 남다른 관심이 있어서 그런지 까만 글발이 저녁해빛에 윤기를 번쩍이고있었다.
녀사께서는 표말을 한동안 보시다가 진옥이를 보시며 의미있게 웃으시였다.
그이께서는 감회깊은 얼굴이시였다.
진옥은 녀사께서 유근성로인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며 장마당에서 그를 다시 만났던 일을 회고하시는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을사람들이 몹시 보고싶구만요. 작년에 아무리 일이 바빠도 여기 천수답에 물을 댈 생각을 했어야 할걸 그랬어요. 그랬으면 마을사람들을 만나보기도 떳떳한데…》
《네? 물이라니요?》
진옥은 산이나 다름없는 이 높은 곳에 물을 댄다는 소리에 귀가 번쩍 트이였다.
《이 천수답일대에 물을 댄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 고장 농민들이 금년엔 맞춤한 비에 례년에 드문 소출을 내긴 했지만 해마다 비가 그렇게 와줄수야 없지 않나요.》
《그렇지만 물이 어디 있습니까. 더우기 이렇게 높은 곳에…》
《그러게 방도를 찾아보자는거예요. 벼알모두가 한알같이 여물자면 물이 있어야 해요.》
《네! 아니, 그럼?!…》
《겸사겸사해서 나왔어요. 진옥에게 미리 말하면 아까 잉어를 손질할 때처럼 또 와락와락할가봐…》
녀사께서는 기꺼우신듯 한손으로 입을 막으시며 크게 웃으시였다.
(그래서 서둘러 월석리로 나오셨구나!)
이 순간 진옥은 장마당에서 근성로인의 쌀자루에서 알차게 여물지 못한 쌀알을 보시고 안색을 흐리시던 녀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면 녀사께서 장마당에 나오신것이 단순히 회령손님때문만이 아니시였다.
그때 벌써 녀사께서는 인민들의 생활형편을 료해하시면서 보다 유족하고 행복한 생활을 할수 있는 방도를 모색하신것이리라. 진옥은 녀사께서 가을소풍을 나오신줄로만 알았던 자기가 얼마나 경망스럽게 생각되였는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녀사께서는 천수답일대의 여기저기를 다니시며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기도 하시고 작은 수첩에 포전략도를 그리고 필요한 부호들과 수자들을 적어넣기도 하시였다.
그 일을 끝내신 녀사께서는 좀더 높은 곳으로 오르시여 주위를 둘러보시였다.
이윽고 녀사께서는 결심을 내리신듯 천수답아래쪽 나무숲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거기로는 아무런 길도 없었다. 개버들이 뒤엉켜 헤쳐나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한동안 그렇게 걸으니 진펄이 나졌다.
진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녀사를 이런 곳으로 더는 가시게 할수 없었다. 그런데 벌써 녀사께서 신발을 벗어들고 성큼성큼 진펄로 들어서시는것이였다.
《거긴 위험해요. 제가 갔다오겠어요. 아니, 그럼 제 뒤로 해서 오세요!》
급해난 진옥이는 미처 신발도 벗지 못한채 녀사의 뒤를 따랐다.
《진옥이, 천천히- 덤비지 마세요. 내가 밟은 자리로 따라와야 빠지지 않아요. 가만, 내 손을 잡아요.》
진옥이는 어망결에 그이의 손을 잡았다. 한쪽발이 쑥 들어갔던것이다. 그러자 녀사께서는 즐겁게 웃으시며 진옥이를 얼른 수렁진 곳에서 건져주시였다. 한참 신고를 해서야 진펄을 지날수 있었다.
《이젠 됐어요. 저 산기슭을 따라 물길을 내고 양수기를 설치하면 강물을 끌어올릴수 있어요. 그러면 이 습지대가 작은 호수로 될거예요. 그 물이면 이곳 천수답들을 얼마든지 적실수 있을거예요.…》
녀사께서는 너무도 기쁘시여 온 얼굴에 웃음을 함뿍 담으신채 진옥이의 두손을 꼭 잡으시였다.
그러시고는 감탕에 빠졌던 신발을 닦을념도 없이 재촉하시였다.
《빨리 가자요. 마을사람들과 의논도 해보고 돌아가서 장군님께 말씀올려 양수기를 해결받도록 해야겠어요. 그렇게만 되면 이 천수답에서도 하나같이 영근 쌀알들이… 생각 좀 해보세요. 농민들이 얼마나 기뻐하겠나.》
녀사께서는 밝은 미소를 띠우신채 개변될 월석리의 전경에 대하여, 이 고장 인민들의 행복한 생활에 대하여 그림을 놓고 설명하듯이 들려주시였다. 어찌나 구수하고 감칠맛있게 이야기하시는지 진옥은 무연히 펼쳐진 논과 밭에서 가을바람에 일렁이고 속삭이는 낟알들이 풍기는 독특한 향취가 금시 감각되는듯 하였고 뒤동산엔 백과주렁진 아담하고 정가로운 농촌마을에서 보람찬 새생활을 누리게 될 농민들의 행복한 모습이 황홀하게 안겨왔다.
그럴수록 그 생활, 그 기쁨을 마련하시려 심혈을 바쳐가시는 녀사의 수고가 가슴에 파고들었다.
녀사를 따라 마을로 찾아가는 진옥은 그이에 대하여 더 깊이 알게 되는 오늘이 위대한 인간의 위대한 성품을 따라배우게 되는 귀중한 하루이라는 생각으로 가슴이 후더워났다.
4
녀사께서 리일군들과 함께 천수답일대를 돌아보시면서 물댈 방도와 위치들을 의논하신 다음 유근성로인의 집을 찾으셨을 때는 장미빛노을이 어둠에 서서히 엷어지고있을무렵이였다.
번듯한 근성로인의 집은 솟을대문까지 있는 기와집이였다. 올농한기에 새로 지었다고들 했다.
마당안에 벼낟가리가 우중충한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있는것이 보였다.
녀사께서 솟을대문안으로 들어섰을 때 로인은 굽을사 한 허리에 한손을 얹고 다른 한손은 활활 내저으며 떡을 치는 앞마당에도 가보고 고기를 손질하는 뒤마당에도 가보느라고 야단이였다. 그때마다 부엌에서 한창 지짐을 지지던 마누라한테 살그머니 다녀야지 지짐에 재티가 앉는다고 혀차는 소리를 듣고도 로인은 그저 제풀에 허허 하고 웃을뿐이였다. 어쨌든 그는 집안팎이 좁다하게 다녔다.
김정숙녀사께서는 집안의 잔치분위기를 감득하시다가 진옥이에게서 보자기를 받아드시고 벼낟가리곁으로 다가가시였다. 그 벼이삭들을 아무도 모르게 두시려는것이였다. 옹색해할 로인네의 심정이 헤아려지시여서였다.
그때 부엌으로 장작을 안고 들어가던 근성로인이 인기척을 느끼고 이쪽을 살피였다. 그러다가 녀사께서 계시는 곳으로 한걸음한걸음 다가왔다.
잔치준비를 도우러 오는 이웃들과는 아무래도 행색이 다른 모양이였다.
어정어정 다가오던 로인이 우뚝 멈춰섰다. 로인의 희슥한 눈섭이 꿈틀하더니 입귀가 실룩거린다. 로인의 가슴팍에서 장작개비들이 와르르 발밑으로 떨어졌다.
《아니, 녀사께서 어떻게 이런델… 제가 너무 불민하여 여러모로 녀사께서 걱정하시게 한것만도 죄송하기 그지없는데 이렇게 찾아오시기까지…》
너무 기쁘고 당황하여 한다는 인사가 이렇게 되고말았다.
《말씀을 낮추어주십시오. 잔치준비를 한다기에 지나는 길에 들렸습니다.》
녀사께서는 어쩔수없이 반나마 펼쳐진 벼이삭을 싼 보자기를 급히 드신채 근성로인앞으로 다가가시였다.
유근성로인은 너무도 황송하여 어쩔줄을 몰라했다. 녀사께서 집에 왔다 가신 다음에야 누구라는것을 알고 인사 한마디 변변히 못한 자신을 두고 얼마나 후회막심해했던가. 그런데 오늘 장마당에서 만나뵈왔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너무 소탈하고 겸허하시니 도무지 인사를 차릴수 없었다.
《정말 찹쌀까지 보내주시여… 조상대대로 찹쌀 구경 못하고 살아온 이 고장에 저렇게 떡치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이 황송함을 어디에 비기겠소이까. 그렇지 않아도 와주셨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바라고 바랐소만 외람된 생각이 앞서서 차마…》
로인의 말을 듣는 진옥이의 눈앞에는 녀사의 집에서 보았던 알알이 백옥처럼 희디흰 찹쌀이 방불히 떠올랐다.
그렇다면 녀사께서 그 쌀을?…
김정숙동지께 자기들이 지은 찹쌀밥 한그릇이라도 올리고싶은 고향마을사람들의 간절한 소원을 담은 그 찹쌀, 토스레옷 한벌 못해드리고 떠나보낸 아픈 가슴을 조금이나마 풀어보려고 천리길을 달려온 회령할아버지의 지극한 마음이 그대로 어려있는 햇찹쌀, 아! 저 로인이 그 사연을 알게 된다면…
진옥이의 눈가에는 뜨거운것이 솟구쳐올랐다.
로인은 격하여 말을 더듬거렸다.
《제땅에서 지은 낟알로 이렇게 로적가리를 하늘높이 쌓고보니 어느 하루도 잊은 날이 없었수다. 펴이는 살림에 번듯한 기와집을 짓고… 오늘은 막내딸잔치상까지 세상 부럼없이 차려놓았수다. 어서 방으로 들어가십시다.》
로인은 녀사의 뒤에서 그이를 안으로 안내하였다.
진옥이는 문득 이태전에 왔을 때 본 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였다. 그때 로인은 몹시 부끄러운 기색으로 굴속처럼 컴컴한 방에 제먼저 들어가 주섬주섬 방을 치워가며 미안한 인사를 늘어놓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얼굴에 노상 흡족한 웃음을 띠우고 허리까지 젖히며 걷는 로인의 몸에는 젊은 기운이 내솟고있었다.
마루에 올라서며 로인은 갑자기 안에 대고 녀사께서 오셨음을 소리쳐알리였다. 일가친척들을 그이께 인사올리게 하려는것이였다.
확 열려진 문으로 일가친척이 우르르 달려나왔다. 일하다 급기야 뛰쳐나온 그들은 옷자락에 손들을 서둘러 문대고는 허리를 굽석하며 달려와 녀사의 손을 덥석덥석 잡는다. 저저마다 올리는 인사투가 각이했으나 모두가 그립던 혈육을 만난것처럼 반가와하고 은인에 대한 고마움으로 목메여하였다. 모두가 눈가에 눈물이 그렁하니 고이였다.
로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일가친척들을 대신하여 숙연히 머리숙이였다.
녀사께서는 로인의 손을 잡으시며 거듭 만류하시였다.
그 바람에 녀사께서 들고계시던 보자기에서 벼이삭이 땅에 흘러내렸다. 이젠 별수 없게 되였다. 녀사께서는 방긋이 웃음지으며 허리를 숙여 벼이삭을 주어드시였다. 눈들이 녀사의 손길을 따랐다.
녀사께서는 얼굴을 붉히시였다.
《?!…》
모두 의아한 표정이였다.
《로인님, 오다가 저… 논에서 주은 벼이삭이예요. 누군가 날라올 때 떨군것 같더군요.》
《아니, 벼이삭이라니?!》
황망히 벼이삭을 받아드는 로인의 손은 경련이 인듯 부들부들 떨렸다. 차돌처럼 여문 벼알들이 로인을 빤히 올려다보는것만 같았다.
로인의 가슴속에서는 세찬 회오의 바람이 일었다.
한줌도 되나마나한 벼! 이것은 풍작이룬 자기네 낟알더미에 비하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것이였다. 하지만 녀사께서는 그것을 몇천몇만섬의 낟알무게로 느끼시며 소중히 여기시는것이 아닌가.
그런데 농군인 자기는 논밭에 널린 벼이삭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
한알의 낟알의 무게를 알게 하시려고, 그것들이 모두 허실없이 밥상우에 놓이게 하시려고 녀사께서 예까지 들고오셨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벼이삭을 받은 로인의 손바닥우에 무엇인가 툭 하고 떨어졌다. 눈물이였다.
로인은 젖은 눈길을 들어 녀사를 우러렀다.
엷은 저녁노을이 어린 녀사의 얼굴은 더없이 아름답고 유순하고 인정미 넘쳐보이였다.
로인은 갑자기 꺾이우듯 허리를 굽히며 녀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저는 농사군의 자격이 없소이다. 한생을 땅에 명줄을 걸고 살면서도 낟알을 중히 여길줄 몰랐소이다.》
《이러지 마십시오. 로인님, 그저 지나다 눈에 띄여서 가져온겁니다.》
녀사께서는 범상하신듯 로인의 옹이진 손을 따뜻이 쓸어주시며 인정미 흐르는 웃음을 지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옹색해진 그들의 마음을 풀어주시려는듯 신랑에 대해서도 물으시고 잔치에 대해서도 의논을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잔치상을 좀 보자고 하시였다.
《?!》
유근성로인은 당황하여 어쩔줄 몰랐다.
(낟알 귀한줄도 모르면서 상만 요란히 차렸으니 녀사께 무슨 낯으로 그것을 보여드린담.)
로인은 녀사께서 들어오시도록 웃방문을 열어드리면서도 내내 녀사의 안색을 살피였다. 눈앞에서는 녀사께서 들고오신 벼이삭이 그냥 얼른거린다.
웃방으로 들어가신 녀사께서는 미소를 띠우시고 잔치상을 살펴보시였다. 그리 요란하지는 않아도 있을것은 다 있는것 같다. 통닭이며 큼직큼직한 사과며 밤, 대추, 송편 등이 보기 좋게 놓여있었고 벽에는 제법 화려한 병풍까지 둘렀다. 게다가 한쪽옆에는 큰 거울이며 솥이며 금강산을 그린 풍경화 등 살림에 쓰일 물건들이 가득했다.
녀사께서는 그것이 더 기쁘시였다. 그저 흥청하게 차리기만 한것이 아니라 살림살이에 필요한 물건들을 아담하게 장만한것이다.
그이께서는 나날이 늘어나는 우리 인민의 윤택한 생활모습을 유근성로인의 집에서도 보는듯 한 기분이시였다. 그이께서는 거울을 만져보시며 로인에게 미소를 담으시고 말씀하시였다.
《거울도 크고 좋은걸 마련했군요, 이 솥이랑…》
《예, 이웃들이 글쎄 제 딸 잔치를 축하한다면서 하나씩 들고온것이 이렇게 한살림 됐습니다.》
《이렇게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인민이 이렇게 잔치도 잘 차리고 잘살게 하기 위하여 장군님께서 세월의 눈비를 다 맞으시며 싸우신거예요.
장군님께서 이 잔치상을 보시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정말 기쁩니다.》
그때에야 굳어졌던 로인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장군님께서 기뻐하시고 녀사께서 기뻐하시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녀사의 그 말씀이 정말 고맙기 그지없었다. 코마루가 쩡해오며 눈굽이 뜨거워났다. 로인에게 있어서 오늘은 기쁜 날이면서도 눈물도 많은 날이였다.
녀사의 그 미소, 그 자애깊으신 모습을 마주하는 진옥의 눈앞에는 순간 잊지 못할 화폭이 또 떠올랐다.
찬장에 당실하니 놓였던 밥그릇, 잡곡밥… 진옥이의 눈가에 맺혔던 맑은 눈물은 발그레 달아오른 그의 두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 진옥이도 잘 보아두라요. 네, 호…》
젖어든 가슴을 봄빛처럼 덥혀주시는 녀사의 맑은 웃음소리에 눈물로 아롱진 진옥이의 얼굴에도 방긋이 웃음이 떠올랐다. 진옥이는 눈물을 닦을념도 않고 녀사를 우러렀다.
기쁨과 만족으로 밝게 웃으시는 녀사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붉은 노을이 한껏 어려있었다.
5
가을이 왔다. 1949년의 풍년가을이다. 산에도 들에도 머리숙인 누런 황금이삭이 싱그러운 가을바람에 흐늘흐늘 춤을 추는 대풍년이 왔다.
산굽이를 돌아 아득히 뻗은 새로 닦은 큰길로는 집채같은 벼단을 실은 수레들이 줄지어 늘어섰는데 이마전에 붉은 꽃을 단 누렁황소들도 왈랑절랑 소방울을 울려대며 풍년타령에 성수난 주인들의 흥취를 한껏 돋군다.
천수답기슭에 아늑히 자리잡은 호수가에선 오늘도 물장난에 시간가는줄 모르는 마을의 쪼무래기들이 까맣게들 탄 잔등에 모래짐들을 담뿍 둘러쓰고는 처절썩 물속에 뛰여들어 자맥질을 해댄다.
떼지어 푸른 수풀속을 떠다니는 양떼들도 무르익은 가을풍치에 취했는지 잔디밭에 허리를 쭉 펴고 엎드려 목동총각의 피리소리에 귀기울인다.
부르릉, 부르릉 용을 쓰는 자동차에 빨갛게 익은 사과들을 담아싣고 도시로 떠나는 운전사총각의 희떠운 인사에 익살스런 웃음으로 화답하는 과수원처녀들의 경쾌한 웃음소리는 풍년든 산야에 멀리멀리 울려퍼진다.
《참 좋은 때지. 내 평생에 이런 복을 받았으니.》
근성로인은 입에 물었던 담배물주리를 신바닥에 툭툭 털면서 흐뭇한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는 옆에 놓인 초물모자를 머리에 꾹 눌러쓰고는 허리를 쭉 펴고 일어섰다.
《와와.》
소를 멈추는 소리에 뒤이어 벼단을 산더미처럼 실은 소달구지가 소방울소리를 왈랑절랑 울리며 근성로인이 있는 버드나무옆에 와섰다.
《아버지, 오늘도 안 오시나봐요. 인젠 들어갑시다.》
《허 그녀석, 일에나 정신담을것이지… 빨리 가거라.… 자식, 음.》
근성로인은 짐짓 위엄있는 얼굴을 짓더니 큰기침을 깇으며 재촉한다. 사위인 철수는 《이랴, 쩌쩌.》하고 혀차는 소리를 내며 달구지를 몰아갔다.
달구지소리와 함께 철수의 구성진 흥타령이 풍년든 벌판으로 메아리쳐갔다.
근성로인은 대견한듯 빙그레 웃는다. 소 한마리 든적 없던 그의 집뜨락에 저렇듯 누렁황소를 몰아 외양간에 들여세우던 날 근성로인은 실로 얼마나 감격의 눈물을 머금었던가.… 생각할수록 그 은혜, 그 사랑에 목이 메여올라 근성로인은 붉어오르는 눈을 썩썩 문지르고 또 고개길을 바라보았다.
(아니, 언제나 오시려나, 이렇게 대풍이 들었는데…)
근성로인은 만민이 환희에 넘친 이 풍년가을에 녀사께서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동구길로 들어서실것만 같았다. 농사도 풍년이겠다, 마을도 번듯하겠다, 신작로도 깨끗하겠다, 이쯤하면 장군님과 녀사를 제고장에 모셔도 부끄러울것 같지 않았다.
로인은 어느 하루도 녀사께서 떠나며 하시던 말씀을 잊은적이 없었다.
《아버님, 해마다 만풍년을 이룩하세요. 논벌마다 풍년이삭이 설레일 때 장군님을 모시고 이곳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땐 아버님이랑 마을사람들이 더 잘살터인데 장군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로인은 하루에도 몇번씩 동구길까지 나가 평양과 잇닿은 길목을 하염없이 지켜보군 했다.
그러다 기다리기에 지쳐서 어둠이 깃든 동구밖길을 스적스적 걸어들어올 때마다 그는 또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공장과 농촌, 도시와 마을… 위대한 장군님과 녀사께서 가셔야 할 길, 해야 할 일 그 얼마이시기에 그리 쉬이 오실수 있으랴. 차라리 자기가 지은 곡식을 위대한 장군님과 김정숙녀사께 가져다 보여드리는것이 도리에 맞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그것도 당치 않는 생각같았다.
자기가 지은 곡식을 가져간다 해도 고작해야 쌀몇되박밖에 질수 없는데 저 많은 쌀낟가리는 어찌 보여드리며 또 저 출렁이는 호수는 어찌 보여드리랴. 녀사께서 하신 말씀대로 양수장을 만들고 물을 끌어올려 호수까지 만들었으니 물없이 고생하던 이 논들에 알알이 터지게 여문 벼이삭이 저렇듯 머리숙이고 일렁대지 않는가! 녀사께서 다녀오시던 그 고개길을 바라보며…
마치도 이 만풍년을 안겨주신 김정숙녀사를 기다리는 로인의 마음을 알아서인지 아니, 이 나라 농민들의 소원을 담았는지…묵직한 벼이삭을 어루쓰다듬는 로인은 제혼자 타이르듯 말한다.
《여 이것들아, 너희들의 마음을 내사 다 안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내 마음은 오죽한줄 아느냐.… 꼭 오실것이다. 너희들을 보러 꼭 오실것이란 말이다.》
그 말에 대답하는듯 벼이삭들은 쏴 하고 잔물결을 일으킨다.
《저, 로인님.》
자기를 찾는 소리에 로인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두어걸음앞에 웬 처녀가 숨을 톺으며 서있었다.
《아, 할아버님이시군요!·그간 안녕하셨어요?》
《아니, 이게 뉘시우. 녀사와 함께 오셨던…》
로인은 진옥의 손을 덥석 잡으며 기뻐 어쩔줄을 몰라했다. 진옥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진옥의 얼굴은 온통 땀발이 내배였다. 무슨 급한 일로 달려온 모양이였다.
《그런데 어델 이렇게 급히…》
《할아버님, 기뻐하세요. 위대한 장군님께서 지금 이 일대에 대한 현지지도를 하고계십니다. 곧 월석리에도 들리실수 있다는 소식이예요.》
진옥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로인은 조급히 묻는다.
《아니, 장군님께서?! 정말 장군님께서 우리 마을로 오신단 말이요? 그럼 녀사께서도 함께 오시겠구만.…》
희색이 만면해진 로인의 눈이 대번에 빛난다.
《그럼 그렇겠지. 작년에도 오시였던 녀사께서 올해엔 장군님과 함께 풍년벌로 오시겠다고 약속하시여서 나는 이렇게 매일 벌에서 살고있소다.》
진옥은 그 무엇인가 안타까운 사연을 묵새기듯 마른침만 삼켜가며 조용히 말했다.
《할아버지, 녀사께서도 방금 할아버지와 하신 약속을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그이께서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월석리에 가신다는 소식을 저더러 먼저 가 일러주라고 하셨습니다. 할아버지와 마을사람들이 혹시 벌에 있겠으니 장군님을 뵈옵지 못할가봐 빠짐없이 이르라고…》
진옥이는 끝내 흐느끼고야말았다.
그의 눈앞에는 방금 자기를 떠나보내시던 녀사의 그 모습이 어려왔던것이다. 병석에 계시면서도 그 다감한 얼굴에 웃음을 담으시던 녀사께서 진옥의 두손을 꼭 잡으시고 간절히 속삭이던 그 말씀.
《진옥이, 내가 가지 못하여 그 로인이랑 퍽 섭섭해하실테니 잘 말해줘요. 오늘은 일이 좀… 아니, 오늘은 못 가지만 다음부턴 풍년든 가을마다 꼭 찾아가겠다고… 이 정숙이는 그들과 함께 벼가을도 하고 그 낟알의 향기도 함께…》
녀사께서는 고추타래 빨갛게 익은 월석리를 눈앞에 그리시는듯, 황금파도 물결치는 천수답을 보시는듯 잠시 말씀을 멈추시고 방긋이 웃으시였다.
《그리고 장군님을 만나뵙게 되면 제가 앓는다는 말을 하지 마세요. 꼭 약속하자요. 장군님께서 그 풍년벌을 마음껏 돌아보시고 기뻐하시게…》
아! 김정숙동지.
항일전의 기나긴 나날에 어혈진 병세가 도지면서 생명을 위협하고있는 그 순간에조차…
진옥이는 줄터진 구슬마냥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념도 못하고 억센 로인의 두손을 잡은채 흐느꼈다.
《아니, 웬일이오다. 혹시 녀사께서 못 오시는게 아니요? 엉?…》
《아니, 아니예요. 녀사께선 꼭 오셔요. 녀사께선 꼭 로인님을 찾아오실거예요. 그이께서는 꼭 풍년벌에 오실거예요.》
진옥이의 그 말소리에 벼이삭들도 기쁨에 겨워서 노래를 부르며 고개길을 향해 설레인다.
《암, 그래야지요. 여부가 있나요.
아참, 월석리에 대통운이 텄수다. 풍년벌에 위대한 장군님과 녀사를 모시게 됐으니.》
로인은 너무 기뻐 채수염을 하늘에 날리며 두팔을 벌리고 빙 돌았다. 금방이라도 춤출 기세다. 갑자기 벌 한가운데서 환호성이 터져올랐다. 벼가을 하던 농민들이 두손을 번쩍 머리우에 올리고 저쪽으로 왁 밀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진옥이도 근성로인도 위대한 장군님께서 월석리에 오셨음을 깨닫고 그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토실토실해진 청제비들이 벌판을 가로세로 썰며 연신 지지배배, 지지배배 읊조린다. 청명한 하늘아래 오곡이 물결치는 들판을 누비며 위대한 장군님을 모신 승용차가 포전길로 들어오는것이 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밝은 미소를 담으시고 차에서 내리시였다.
그러자 아이, 어른 할것없이 온 동네가 위대한 장군님께로 물밀듯이 밀려갔다.
《만세! 만세!》
순간에 위대한 장군님과 농민들이 한데 뭉쳐졌다.
진옥이의 가슴은 격동으로 들끓었다.
(아, 김정숙동지, 바로 저 순간을 안아오시려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다 바치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 보십니까, 저 장엄한 모습을!
산천도 기쁨에 흐느끼는데 어찌하여 녀사께서는 못 오십니까.… 아니, 녀사께선 바로 이 자리에 계십니다.
저 감격의 눈물짓는 농민들속에, 해빛보다 밝은 웃음을 띠우신 위대한 장군님의 몸가까이에, 저 기쁨안고 출렁이는 풍년이삭들의 파도속에 녀사께서는
함께 계십니다!)
싱그러운 가을, 풍년든 9월의 벌은 또 한번 굼니며 파도친다. 바람에 구수한 낟알의 향기가 가슴벌게 풍겨온다.
진옥이는 조용히 속삭인다.
아, 벌이여 벌이여
풍년든 조선의 벌이여
해마다 9월이 오면
잊지 말고 날리여라
너의 그 짙은 향기를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께서
안아오신 사랑의 향기
특유한 낟알의 향기를!
주체75(1986)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