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주체102(2013)년 제9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안 용 근
(제 1 회)
1
평양교외에 있는 장마당은 점심때가 되여오면서 더욱 번잡해졌다. 이고 지고 든 형형색색의 사람들의 물결이 장마당주변 골목에까지 범람하며
떠들썩 붐빈다. 뒤늦게 온 축들은 그 골목자리도 다행이라는듯 서둘러 앉으며 가지고온 물건들을 슬금슬금 펴놓는다. 가을장이여서 그렇다고 하지만
해방을 맞은지 세번째 되는 이해 가을의 장마당은 류별나게 인산인해다. 게다가 하얀 쌀이며 새빨간 사과며 누런 배며 김이 문문 나는 팥죽동이며
기름이 찰찰 도는 떡함지며 구수한 군밤냄새며… 어느것이나 사람들의 구미를 부쩍 돋군다.
어디서 웃음이 담긴 목소리들이 터져오른다.
《해- 해방이 좋긴 좋구나. 우리같은 잠뱅이들이 흰쌀밥에 고기국을 먹게 됐으니 천지개벽일세. 여보게들, 이 좋은 날에 우리 춤이나 출가,
허허허…》
흰 모시두루마기를 입고 선술집앞에서 담소를 하고있던 로인들이 흥취가 올라 들썩들썩했다.
엉거주춤 로인들이 춤을 출 기세로 일어서자 구경군들이 모여들었다.
《아, 아주버니, 닭알깨지는 소리가 뭐 북소린줄 아시우. 저런, 저 저, 또 밟네, 쯧쯧…》
입심 센 아낙네의 기겁한 넉두리가 혼잡을 누르며 청높게 울렸다. 누군가 닭알꾸레미를 다쳐놓은 모양이다. 그래도 흔한데서 인심이 나온다고 그닥 가시박힌 소리는 아니다.
봄비는 사람들속에 끼여든 진옥이는 손수건으로 이마전에 송골송골 내돋힌 땀을 찍어내며 수산물매대쪽으로 바쁜 걸음을 놓았다. 그는 지금 반찬감을 사러 장마당에 들어서는참이다. 좀전에 김정숙동지께서 회령에서 온 손님과 같이 점심식사를 하시게 된다는것을 알았던것이다.
해방후 김정숙동지의 따뜻한 손길에 받들리여 고아의 설음을 털어버리고 녀맹일군으로까지 자라난 진옥은 그러지 않아도 몹시 바쁘게 지내시는 그이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고싶어 이렇게 몰래 장에 나왔던것이다.
무슨 일로 회령에서 손님이 왔는지는 딱히 몰라도 그이의 고향에서 오신 손님이니만치 진옥이로서도 자연 마음이 갔다. 얼마나 그리운 고향이랴. 해방이 된지도 몇해 잘되는 지금조차 늘 일에만 다몰리다보니 한번도 가보시지 못하는 그이를 보고 진옥이는 늘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고향에서 손님이 왔다는걸 보니 분명 그립던 친척일것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 이르신대로 평양시안의 녀성들의 문맹퇴치정형을 료해한 진옥은 그 바람으로 부리나케 장마당에 달려왔다.
웅성거리는 장터에서는 별의별 옷감을 다 걸어놓고 사람들을 불러대는 장사군들의 구성진 목청이 진옥이를 사로잡았다. 순간 진옥이의 눈앞엔 늘 입고다니시는 색날은 녀사의 검은 저고리가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돈지갑에 손이 갔다. 불룩한 돈지갑에서 어제 생활비로 받은 지전이 자르륵자르륵하고 기분좋게 속삭인다. 언제나 진옥이를 친부모보다 더 사랑해주고 아끼시는 그이의 마음에 무언가 조금이라도 보답하고픈 진정이 봄물처럼 어려왔다.
그러나 진옥은 이내 도리질하며 검은 눈을 내리 깐채 장군들앞을 그냥 지나쳤다. 또 나무람하실 김정숙동지의 모습이 부지중 눈앞에 떠올라서였다.
(언제면 녀사께서도 풍족한 생활을 하시겠는지.)
장마당의 흥청한 기분속에서도 어째서인지 한숨이 호- 나갔다.
수산물 파는데는 사람이 많았다. 한동안 기다려야만 했다. 시계를 보니 열두시가 거의 되였다. 오늘 오후에는 손님이 오기에 녀사께서 별로 다른 사업을 예견하지 않을것 같았지만 점심때가 가까와오니 자연 마음이 조급해났다. 진옥은 잉어며 숭어를 비롯한 몇가지 반찬감을 사들자 오던 길로 돌아섰다.
쌀파는 장사군들앞을 지나려던 진옥은 귀익은 목소리가 들려와 걸음을 늦췄다.
《그러니까 금년엔 농사가 잘됐단 말씀이군요.》
《네, 잘됐다마다요. 마을이 생긴이래 처음 보는 대풍이 들었쉐다.》
《아 아니, 그러지 말고 어서 편히 앉아 말씀하세요.》
웬 로인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시는분은 분명 김정숙동지이시였다.
(녀사께서 어떻게 여길 나오셨을가? 손님맞을 준비때문에 걱정되시여 나오신것이 아닌가?)
진옥은 말없이 온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미리 말씀울렸더라면 저렇게 바쁜 걸음을 하시지 않았겠는데…
진옥은 사람들의 물결을 헤가르며 그이께로 다가갔다.
그이와 마주앉은 로인은 쌀자루를 펼쳐놓은채 황송한 몸가짐을 하고있었다. 아마 햇쌀을 팔려고 나왔다가 김정숙동지를 뵈온듯싶었다. 몹시 낯이 익었다. 그러나 딱히 어디서 만났던지 짚이는데가 없다.
《벌써 두해째 제땅을 걸구는데다 올해는 비까지 맞춤하게 와서… 천수답이 많은 우리 고장도 인젠 먹을 걱정을 모르게 됐수다.》
로인은 자리를 고쳐앉으며 채수염을 연신 내리쓴다.
《참, 막내딸은 시집갔는가요?》
《우리 수연이요? 그 애가 랠 잔치를 하지오다. 녀사께서 우리 집을 다녀가신 후 사처에서 혼처가 나섰수다. 글쎄 돌쩌귀에 불이 다 날 지경이였다니깐요. 오늘 이렇게 먼저 바시미한 쌀을 팔아 잔치상 차리는데 좀 보탤가 해서 왔습니다. 하하…》
로인은 눈굽을 훔치며 호방하게 웃기까지 한다.
그이께서 자기 집에 다녀가심으로 하여 별치 않게 생긴 딸의 인품까지 부쩍 올라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였다.
진옥은 그제야 낯익은 로인이 월석리의 근성로인 임을 알아보았다.
해방된 이듬해 초에 있은 일이 생각났다. 그때 그이께서는 농촌형편을 알아보시기 위해 진옥이와 함께 월석리를 찾으시였다.
천수답이 많은 월석리에서는 농사도 잘 안된데다 지주 최기택놈때문에 지난 가을부터 내밀어온 3. 7제투쟁도 잘되지 않고있었다. 그래서 베여놓은지 오랜 벼들을 탈곡하지 못하고 서리를 맞히고있다가 겨울이 되자 눈속에 묻히게 되였다고 한다. 최기택놈은 포악하고 교활한 놈이였다.
새해에 들어서면서 농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 김정숙동지께서 월석리로 나가시였던것이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한 로인의 집을 찾으시였다. 고삭은 초가이영이 나들문 절반까지 내려와 덮여있는 집이였다.
그이께서는 마주 나오는 로인앞으로 다가가시며 공손히 인사를 드리였다. 유근성이라고 불리우는 로인이였다.
《로인님, 마을형편을 좀 알자고 왔습니다.》
지나는 길손으로만 알고 범상히 맞던 근성로인은 마을형편을 알려고 먼길을 우정 왔다는것을 알자 희슥한 눈섭을 꿈틀 곤두세웠다.
검은색무명치마에 흰 옥당목저고리를 받쳐입으시고 흰 버선에 까만 고무신을 신은 보통차림새였으나 영채도는 눈길이며 부드럽고 인정이 흐르는 말씨며 소박한 인사차림에는 어딘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그 어떤 체취를 느끼게 하였다.
로인은 황황히 그이를 집안으로 안내하려 했다. 요즘 우에서 간부들이 농민들의 생활형편을 알아보러 내려왔다더니 이 부인도 그래서 온것 같았다.
유근성로인은 문을 열고 방안으로 먼저 들어섰다. 루추한 방에 그이를 모실 일이 자못 걱정되여 대충 치우자는것이였다.
그런데 녀사께서는 로인의 옹색해하는 심정을 헤아리신듯 바깔이 좋다고 하시면서 퇴마루우에 허물없이 앉으시는것이였다. 미처 자리를 깔아드릴 사이도 없었다. 이러는 사이 마을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녀사께서는 그들모두와 일일이 인사를 나누신 다음 마을농사형편이며 3. 7제투쟁정형에 대하여 하나하나 알아보시였다. 처음에는 그저 한두마디씩 물어보는 말에나 대답하던 농민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저들의 억울한 심정이며 땅에 대한 절절한 소원을 터쳐놓기 시작하였다.
전후사연을 다 들으신 녀사께서는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월석리에 나와보기를 썩 잘했다고 생각하시였다.
《…여러분! 지주는 우리 농민들의 원쑤입니다. 본래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의것입니다. 절대로 지주놈의 꾀임에 속지 마십시오.
다른 곳에서는 모두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3. 7제투쟁을 벌려 지주놈들이 발악하지 못하도록 손발을 얽어매놓았습니다.
지금은 땅을 달라는 진정서를 장군님께 올리고있습니다.》
녀사의 말씀에 모두 주먹을 불끈불끈 쥐였다.
《옳수다! 우리가 너무 어리석었습니다.》
《땅을 달라는 진정서를 올립시다.》
《지난해것두 빨리 타작을 합시다. 까짓거, 최기택놈이 달려들면 도리깨로 면상을 후려칩시다.》
농민들이 기세를 올리며 떠들어대자 유근성로인의 울대뼈도 오르내리였다. 정말 쥐면 한줌안에도 안 찰 지주 최기택놈때문에 허리도 못 펴고 살아온 지난날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그러나 그놈은 조금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던가. 그런데 마을에 온 소박한 녀인이 그놈을 보잘것 없는 추물로 만들어버린다.
보통분이 아니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얼마나 인정이 넘치시는 모습인가. 모든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하고싶었고 조언도 듣고싶었다. 그래서 유근성로인은 집안일에 이르기까지 죄다 말씀드리고 물어도 보았다.
아닌게아니라 녀사께서는 무랍없이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앞이 탁 트이는 말씀도 해주시는것이였다. 이야기가 깊어감에 따라 로인은 어려움도 잊고 다 자란 막내딸 혼사걱정도 털어놓게 되였다.
녀사께서는 그 일에 대해서도 함께 의논해주시며 집짐승도 기르고 농사도 잘 지어 딸잔치상을 남부럽지 않게 차리라고 차근차근 일깨워주시였다.…
진옥은 감회가 새로왔다. 2년도 못되는 사이에 로인네의 살림살이가 펴이여 쌀을 팔 여유가 생긴데다 걱정많던 딸의 성례까지 치른다지 않는가. 어째서인지 마음이 장마당분위기처럼 흥청흥청한게 기쁘기 그지없다.
《이 쌀은 햇쌀이구만요. 얼마나 기쁘시겠어요. 이렇게 벼농사까지 잘했으니…》
녀사께서는 무등 기쁘시여 로인앞에 있는 새하얀 쌀을 줌에 쥐여보시였다. 줌안의 쌀들이 자르르 소리를 내며 자루안에 쏟아져내린다.
녀사께서는 그 소리가 듣기 좋으신지 이번에는 좀더 손을 높이 드시여 쌀을 흘리시였다. 그러자 쌀알 부딪치는 소리가 싸라락싸라락 더 크게 들려왔다. 녀사께서는 미소를 띠우신채 또 한번 그렇게 해보시였다. 그러시던 녀사의 안색이 서서히 어두워지시였다.
녀사를 우러르며 노상 웃음을 짓고 흡족해있던 로인은 웬일인가싶어 당황한 기색을 지었다.
《아버님, 쌀알들이 한결같이 영글지 못했군요.》
어찌나 서운한 어조로 말씀하시는지 진옥의 가슴이 다 저리여왔다. 진옥이는 쌀자루가까이로 다가가서야 녀사께서 서운해하시는 리유를 알수 있었다. 새하얀 쌀에 파르스름한 쌀알이 뉘처럼 드문드문 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네, 그닥 씨원치는 못합니다만 그래도 전년에 비하문야…》
그러던 로인은 갑자기 말허리를 끊었다. 녀사께서 그 쌀이 그닥 충실치 못한것으로 해서 근심하신다는것을 깨달은것이다.
로인은 천수답에서 난 쌀을 먼저 팔려고 잘된 쌀을 깔고앉아있다가 녀사께서 그만 걱정하시게 한것같아 몹시 후회되였다. 로인은 사실대로 말씀올려 녀사의 마음을 가볍게 하여드리고싶었다.
《이 쌀은 천수답에서 난거웨다. 상담에서 난 쌀이야 이럴리 있나요. 자, 이걸 보시우다. 이 쌀이 어떤가.》
로인은 깔고앉았던 다른 쌀자루의 목을 풀어헤쳤다. 아구리가 쩍 벌어진 자루안에는 정말 떡가루같이 하얗고 소담하게 잘 여문 햇쌀들이 일매지게 윤기가 돌았다.
녀사의 안광이 일순 빛나시였다.
《아니?! 그럼 이 쌀은 상답에서 난것이겠습니다?》
《네, 녀사께서 다녀가신 후 봄에 우린 논만도 3 700평을 분여받았쉐다. 그중 상답이 2 000평, 천수답이 1 700평…》
《네- 그렇군요.》
녀사께서는 다소 마음을 놓으시는 표정을 지으셨다. 그러나 안색은 아까와 같이 밝지 못하시였다.
《그래도 천수답에서 여직 낟알이 이렇게 익어보기는 처음이지오다. 비가 어디 와주어야지요. 해마다 물때문에 논바닥만 마른게 아니라 농군들의 가슴이 더 바작바작 말랐지오다. 근데 올해엔 어떻수. 비가 좀 적은감은 있어도 논바닥이 마르지 않았수다. 아, 글쎄 동네가 생긴이래 첨 보는 대풍이라니깐. 래년부턴 우리도 찹쌀을 심어보려 합니다. 그렇게 되면 실로 부러울게 없지요.》
어느 사이 로인은 또 풍년자랑으로 넘어갔다. 로인에게는 그 이상 바랄것이 없는상싶었다.
로인과 헤여진 녀사께서는 진옥이를 보시고 무척 반가와하시였다. 녀사를 대신하여 저자보러 왔다는 진옥이의 말에 녀사께서는 그 마음이 고마우시여 밝은 웃음을 띠우셨다.
《나도 회령에서 오신 할아버지께 평양에서 유명하다는 대동강숭어국을 대접하고싶어 이렇게 장에 왔는데 진옥인 정말 어쩌면 그렇게 내 마음을 잘 알아요. 할아버지가 이 펄펄뛰는 생선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자, 그럼 오늘 점심은 우리 집에 가 하자요, 집구경도 할겸.…》
진옥이의 손을 꼭 잡으신 녀사께서는 웅성웅성 붐비는 장터를 더 돌아보시고 댁으로 향하시였다.
어느 사이에 점심때가 다 되였던것이다.
2
댁으로 돌아오신 김정숙녀사께서는 점심을 서두르시였다. 녀사께서는 뭔가 돕지 못해 애쓰는 진옥이의 마음을 헤아리시여 오늘 점심은 진옥이가 가져온 물고기와 반찬감들로 국도 끓이고 반찬도 준비하시였다.
녀사께서 기쁜 안색을 짓고계시니 진옥의 마음도 즐거워났다.
진옥은 생긋 웃으며 팔소매를 걷어올리고 녀사를 도우러 한발 부엌으로 들어섰다. 그러던 진옥은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버렸다. 부엌세간들이 너무도 평범하였기때문이였다. 어디서나 흔히 볼수 있는 찬장, 크고작은 질그릇들과 놋그릇들, 윤이 흐르는 솔이며 노란 바가지…
어느 사이 즐겁던 마음은 초불 굳어지듯 얼어붙었다.
진옥이는 녀사께서 나라가 해방된지 세해째나 되는 오늘까지도 검소한 생활을 하고계신다는데 대하여 자주 들었지만 눈으로 직접 부엌세간을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였다.
너무도 뜻밖이였다.
쪼박쪼박 찢기는듯 한 아픔이 마음을 괴롭혔다. 녀사를 흠모하여 따르면서도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돌봐드리지 못했다는 자책이 때늦게 뼈저린 후회로 갈마들었다. 꼬집어놓도록 자신이 미워났다. 회칠 잉어를 손질하려고 식칼을 들기는 했지만 생각은 자꾸만 거기에 갔다. 부지중 한숨이 새여나갔다.
진옥은 한동안 초점없는 눈길로 잉어를 뒤척이기만 하다가 머리를 푹 숙이고서서 제 성미대로 와락와락 씻어 손질하기 시작했다.
녀사께서도 그것이 진옥의 성미때문만이 아님을 아시는것 같았다.
그러나 무슨 말로 설명할수도 없으시였다. 어쩐지 그 행동이 오히려 더 사랑스럽게 생각되시였다.
녀사께서는 자애로운 눈길로 진옥이를 바라보시다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신것처럼 말머리를 돌리시였다.
《참 진옥이, 내 좋은걸 보여줄가?》
《좋은거라니요?》
녀사께서는 대답대신 행주치마에 젖은 손을 문대시더니 방으로 들어가시였다.
진옥은 호기심이 앞서 녀사의 뒤를 따랐다. 방아래목에 쌀자루같은것이 놓여있었다.
녀사께서는 그리로 가시더니 그 자루의 목을 푸시였다.
녀사의 손길을 따르던 진옥은 갑자기 눈이 둥그래지며 환성을 올렸다.
《아이 , 햇찹쌀이구만요!》
《호호, 진옥이도 찰떡생각이 나는 모양이지?》
녀사께서는 햇찹쌀을 두손에 담아보시며 기쁨을 금치 못해하시였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 났어요, 네? 어디서요?》
진옥은 궁금증이 앞서 다우쳐물었다.
《회령에서 온 손님이 가져온거예요. 글쎄 분여받은 땅을 논으로 풀어 지은 찹쌀이라고 하면서…》
녀사께서는 갑자기 말끝을 흐리시였다. 그러시다가 어린시절 한마을에서 살던 할아버지가 찹쌀 한짐을 지고 찾아왔던 이야기를 천천히 하시였다.
《글쎄 이 무거운걸 지고 그 먼데서 오는 법이 어디 있는가구 나무람하자 그 할아버지는 어린시절 떠나보내면서도 토스레옷 한벌 해주지 못하고 새 짚신 한컬레 얹어주지 못한것이 늘 후회됐다고 하면서 이 쌀을 받아야 괴로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수 있다잖겠어요. 그리고는 기어이 회령으로 같이 가자구 막무가내겠지요. 글쎄 내가 뭐라고…》
진옥은 녀사의 말씀을 들으며 모든것을 짐작하였다. 그러면서도 차라리 잘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기회에 녀사께서 고향 회령에 한번 다녀오셨으면 하고 바랐다.
녀사께서 어찌나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시는지 한번 가본 일이 없는 진옥에게도 회령은 손금보듯 환한 곳이였다.
해방이 되여 누구나 고향을 찾고 부모형제, 친척, 친우들을 만나러 여기저기 안 가는데 없는데 녀사께서도 이번 기회에 회령으로 가신다면 얼마나 좋으랴. 기약없이 헤여진 조카의 생사여부도 거기 가면 알수 있을것이였다. 백살구꽃 하얗게 핀다는 오산덕기슭도 거니시고 어린시절 배고픔을 참으시며 칡뿌리 캐러 다니셨다는 오솔길도 밟으시며…
생각할수록 오래동안 헤여졌던 고향과 상봉하는 녀사의 모습이 가슴뜨겁게 안겨왔다.
《하지만 어떡하겠어요, 아직 나라가 갈라져있지, 안팎의 정세도 그렇지, 어떻게 제 고향만 찾아가겠어요. 그래서 회령손님을 저의 집으로 초청했어요. 섭섭해할 마음을 풀어주자구요.》
《아니, 그럼!》
일시에 모든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모처럼 마련된 이 기회마저 사양하시면 언제 시간을 내시겠는가.
《그래도 이번에야 꼭 가셔야지요. 녀사께서도 그렇지만 고향사람들이…》
진옥은 고향사람들의 기다리는 심정을 빗대서라도 어떻게 하나 녀사의 마음을 움직이고싶었다.
《또 녀사라고 하는구만요. 언제부터 그렇게 부르지 말라는데… 왜 자기 언니나 다름없는 사람을 녀사라고 자꾸 불러요?》
《저…》
《이제부턴 언니라고 불러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고도 그저 〈동무〉, 〈언니〉, … 이렇게 부르라고 하라요. 그것이 얼마나 정답고 친근해요. 꼭 그렇게 하지요?》
진옥은 갑자기 목이 메면서 말이 나가지 않았다. 긍정도 할수 없고 부정도 할수 없었다. 더우기 녀사께서 이런 말로 고향으로 갈것을 지꿏게 고집하는 자기의 청을 밀막아버리는것이라고 생각되여 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무한정 침묵을 지킬수도 없는 일이여서 그저 두어번 숙인 머리를 까닥까닥했다.
진옥은 자기의 힘으로는 더는 이 문제를 해결할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는 사이 밥이 다 되였다.
녀사께서는 얼른 시계를 보시고 솣뚜껑을 여시였다. 구수한 밥냄새와 향긋한 숭어국냄새가 부엌안에 가득찼다.
진옥이는 그릇들을 내리려고 찬장을 열었다. 순간 진옥이의 시선은 찬장안에 거울처럼 윤기도는 밥바리에 멎었다,
밥바리를 내리우려고 밥보깨를 여는 순간 거기에 잡곡이 다문다문 섞여있는 얼마 되지 않는 밥이 담겨져있는것을 보았다.
(아니, 이 풍년든 해에 잡곡밥을 잡수시다니?)
진옥은 아연한 눈길로 밥바리를 들여다보았다.
《뭘 그리 들여다봐요.》
녀사께서는 진옥의 어깨를 가볍게 다치며 웃으시였다.
진옥은 이내 열적은 표정을 지으며 따라웃기는 했지만 눈물이 솟구치는것을 간신히 참았다.
《산에서 싸울 때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좋아요. 우리 인민들이 활기에 넘쳐 나날이 풍족한 생활을 하는걸 보면 정말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군 해요.》
진옥이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녀사의 말씀이 온 공간에 메아리치는것만 같았다.
진옥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방안에 들어와 무의식적으로 방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눈앞이 자꾸만 뿌잇해왔다. 무엇인가 손끝에 닿는다. 머리를 드니 회령손님이 지고왔다는 쌀자루가 눈에 띄였다. 알수 없는 힘이 진옥의 눈길을 오래도록 그리로 끌었다. 이렇게 들어온 쌀은 그 얼마이던가.
우리 인민이 올린 지성어린 쌀을 쌓으면 저택정원도 모자랄것이다. 그 많은 쌀은 모두 건국에 이바지하는 사업에 다시 돌려주신다는것을 진옥은 너무도 잘 알고있다. 하지만 이 순간을 당하여 풍년든 이해에 하루 아니, 한끼만이라도 햇쌀밥을 해잡수지 않으시고 잡곡으로 끼니를 에우신다는 이 사실앞에 가슴 에이는듯 한 아픔과 갈마드는 자책을 쉬이 눅잦힐수 없었다.
이래저래 울적해진 진옥은 쌀자루안의 하얀 쌀만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는 진옥의 눈가에는 저도 모르게 맑은 눈물이 가랑가랑 맺혀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