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주체102(2013)년 제7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권정웅
(제1회)
밤.
비가 내리고있다.
며칠전부터 줄창 내리는데 좀처럼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있다. 여느때같으면 소쩍새가 울무렵이건만 숲이 온통 물안개에 잠겨있다.
집무탁에서 물러나신 김일성동지께서는 팔을 쭉쭉 벌리면서 가슴을 내밀기도 하고 창문가에 다가서서는 숨을 깊이 들이쉬기도 하시였다. 오래동안 사색에 잠기여있거나 펜을 들고 몇시간씩 글을 쓰노라면 어깨가 무거워지고 자리가 편안치 않아지신다. 그럴 때면 이렇게 오금을 놀리며 방안을 거닐거나 창가에 다가서서 심호흡을 하면 인차 기분이 맑아지면서 이제 써야 할 다음장면들이 선히 떠오르군 하시는것이였다.
방금전까지 그이께서는 조국통일과 관련한 중대한 문건을 보시고 그에 수표를 하시였다. 며칠동안 시간을 끌며 생각하던것인데 그것을 락착짓고보니 기분이 한결 개운해지시였다.
그이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집필에 대한 구상을 다시 더듬고계시였다. 6권까지 출판에 넘기였으니 이제는 다음권을 준비해야 하시였다. 항일혁명편은 앞으로 한권이나 두권을 더 쓰는것으로 끝낼 계획인것이다. 이제 중요한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그에 따르는 하바롭스크회의였다. 정세의 급격한 변화에 의하여 항일혁명의 전략적방침들을 새로 정하고 그에 따라 적극적으로 정치, 군사적활동을 전개한 대목인것이다.
회고록이라고 해야 다른 사람들처럼 세상에 대고 그 어떤 놀라운 말을 하거나 이전에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희귀한 자료를 꺼내보이자는것도 아닌것이다. 그저 이전에 있었던 실지사실을 그냥 그대로 서술하자는것이니까 별로 고심할것은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어지간히 흐르다보니 기억이 삭막한것도 적지 않고 또 어떤것은 당사자들과 토론해야 할것도 있었으나 그나마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당시형편으로서는 항일혁명투쟁에 대해서 그것을 낱낱이 적어둘수도 없었거니와 이제는 그 관계자들이 얼마 남지도 않은것이 가장 큰 고충이다. 그러니 더더욱 자신께서 어떻게 하나 당시의 사적을 얼마간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것이 지금 내고있는 《세기와 더불어》이다.
두해전에 1, 2권을 내놓았으니 붓을 들기는 그 전전해였으니까 벌써 헐잡아도 5년이라는 세월이 휘딱 지나간셈이다.
어쨌든 서둘러야 하였다. 마음은 거침없이 앞으로 달려나가는데 붓이 따라서지 못한다. 그런대로 한절한절 톺아나가서 그것이 장으로 묶어지고 그것이 또 한권의 책으로 완성되면 그 쾌감이란 이루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인것이다. 이에 대한 기분을 어떤 사람들은 산모의 진통에 비기고있는데 정작 체험해보니 그것도 일리가 있다는 수긍이 가신다.
하기야 진통이 없는 새생명이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한동안 사색에 잠기시였던 김일성동지께서는 창가에서 물러서서 집무탁이 놓인 곳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그러시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시였다.
《그렇지. 그때일은 김책이가 잘 알고있지, 김책이!》
이렇게 혼자소리를 뇌이시며 그이께서는 집무탁 한쪽옆에 놓인 가방을 집어드시였다. 거기에는 항상 금고에 보관하시던 김책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꺼내시였다. 봉투안에서는 눈부시게 흰 종이에 싼 사진 한장이 나타났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잠시동안 사진을 들여다보시다가 집무탁으로 다가가 탁상등앞으로 그 사진을 썩 내대시였다.
김책이와 둘이 서서 찍은것인데 그것을 보는 순간 공화국을 창건한 뜻깊은 한해를 보내면서 몇몇 일군들과 함께 사진을 찍던 일이 생동하게 떠오르시였다. 김책은 원래 사진찍는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하공작을 오래 한 사람들의 체질이고 또한 굳어진 감정일수도 있었다. 그래 그런지 사진을 찍을만 한 자연스러운 기회가 생기는 경우에도 그는 되도록이면 그것을 거절하거나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 그가 우리곁을 떠난 후에도 참고가 될만 한 사진자료를 몇장밖에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김책은 어찌된 일인지 성근히 응해나서면서 매우 기뻐했었다. 그래 그랬던지 항상 근엄해있기마련이였던 그 얼굴에도 어딘가 모르게 환희가 비껴있었던것이다.
《김책동무!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이 하바롭스크였지.》
방안이 울릴만큼 그이께서는 높은 음성으로 물으시였다.
《옳습니다. 1940년 겨울 새해를 얼마 앞두고 하바롭스크교외 숲속에 있는 숙소에서였지요.》
《그래, 내 기억이 틀리지 않소. 그때 어떤 동무들은 시내의 어느 려관에 그냥 있자고 하는걸 내가 한사코 우겨서 우리 동무들이 교외에 있는 귀틀집을 꾸리고 거기에 류숙했었지.》
《옳습니다. 제가 그때 찾아간 곳이 분명 송진내가 풍기는 귀틀집이였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대번에 흥분을 일으켜 마음을 진정할수가 없으시였다. 사진을 손에 든 그이께서는 방안을 계속 거닐으시였다.
몇마디의 대화는 분명히 환상이 가져온것이였다. 하지만 그 장면이 어떻게나 현실에서처럼 생동하였던지 벌써 반세기가 넘은 아득한 옛날 그때장면을 직접 당하는것 같으시였다.
회고록의 순차를 더듬어나가다보니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관련한 정세의 요구에 맞게 대일전략을 세우던 사실을 써야 하였다. 그것을 위해 군정간부회의가 있었고 국제당이 주관해서 쏘련이나 중국동지들과도 협의하기 위해 하바롭스크에 모이게 되였던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상기하기 위해 김책을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회의본래의 용무보다 한 전우를, 이를테면 한명의 혁명동지를 처음 만나게 된 그 장면을 회상하게 되신것이다.
×
숙소의 아침.
훈훈한 방안은 사뭇 고요에 잠기였다. 문을 열고 바깥에 나서기만 하면 씨비리의 사나운 바람이 당장 옷자락을 뜯어갈길것처럼 갈개고있지만 김일성동지께서 계시는 이곳 숙영소는 완전히 딴세상같이 아늑하였다. 그리 넓지 않은 방안 한복판에 철판으로 말아붙인 난로가 벌겋게 달아있고 한켠에 놓인 책상우에는 책들이 몇권 쌓여있었다. 그리고 책상 한옆벽에는 커다란 조선지도가 걸려있었다. 그러다보니 결국 백두산밀영이나 그외 다른 곳에서 흔히 볼수 있었던 사령부의 숙영소와 별로 다를바가 없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벌써 여기서 닷새째 바쁜 시간을 보내고계시였다. 쏘련동지들은 아무리 바빠도 한 열흘은 푹 쉬면서 그동안의 피곤을 풀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지만 그렇게 할 여유가 없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창문을 통해 비쳐드는 아침해살을 받으며 근간출판물들을 뒤적이고계시였다. 《쁘라우다》를 비롯한 이러저러한 신문들과 잡지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현재 절정을 향해 치닫고있는 유럽전쟁에 대해 보도하고있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것은 파죽지세로 나가고있는 도이췰란드의 공격이며 그를 하루빨리 저지시키지 못한다면 인류에게 커다란 재난을 가져오게 되리라는 편집자의 의도가 잘 나타나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전쟁이란 우연과 우연의 교차이며 련속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전쟁은 힘의 첨예한 대결로서 그 어떤 우연이나 기적을 바랄수 없는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론리야 어쨌든 지금 유럽에서 대두한 파쑈의 광란 그리고 동방에서의 일본의 침략전쟁의 확대, 이것을 저지해야 하며 하루빨리 완전히 제압하여야 하였다. 정의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항일혁명투쟁, 다시말해서 조선민족해방투쟁의 새로운 전략이 작성되여야 할것이였다.
우리 혁명을 이제 어떻게 더 적극화하여 승리로써 결속할것인가 하는 중대사가 눈앞에 놓여있다고 아니할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절박한 력사적과제를 안고있기때문에 이번 여기에 모이게 된 국제당이나 쏘련군부 그리고 동북지구에서 무장활동한 중국의 지휘성원들과의 상봉은 신중한 고려가 돌려지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동북의 흑룡강연안에서 활동한 동지들가운데는 우리 조선동지들도 있을것이였다.
그래 결국 김일성동지께서는 요새 하루하루를 깊은 사색의 세계에 잠기지 않을수 없으시였다.
바람소리가 숲을 흔들어놓았다. 마치 바다가 세차게 설레이는것처럼 와 하고 북에서 남으로 대기를 몰아가면서 나무가지들이며 꽁꽁 얼어붙은 눈무지들을 사정없이 후려치고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들어올리였던 신문장을 탁자우에 내려놓고 창문쪽으로 시선을 돌리시였다. 지동치는듯 한 바람소리와 함께 아스라하니 들려오는 인적기를 느끼시였던것이다. 잠시 귀를 강구었지만 다음순간에는 아무런 기미도 감각할수 없으시였다.
그러다보니 결국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있는 심리가 불러온 명백치 않은 환각이 아니였던가싶다.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그리신 그이께서는 다시 신문을 집어들고 글줄로 시선을 달리기 시작하시였다. 한데 단 1분도 되지 않았는데 분명히 마당쪽에서 둔탁한 발걸음소리가 들리였다. 고개를 번쩍 드는데 나들문쪽에서 손기척소리가 나는것과 함께 문이 쩍 열리였다.
《사령관동지, 경위대원 리을설이 말씀드릴만 합니까?》
《뭐요, 어서 말하오.》
《김책동지가 오셨습니다.》
《뭐, 김책이…》
《저기 지금…》
김일성동지께서는 급히 벽장으로 다가가 외투를 벗기시였다.
(김책이가 왔단 말이지,… 얼마나 기다렸기에…)
밖으로 나가는것과 함께 눈보라가 뽀앟게 앞을 가린 숲가를 바라보시였다. 숲속으로 감겨돌아간 좁다란 길쪽에 언뜩언뜩 사람그림자같은것이 나타났다 사라지군 한다.
그이께서는 리을설이더러 앞서라고 하고는 그의 뒤를 따라 달리다싶이 걸으시였다. 새벽녘에 자동차나 겨우 나들 정도로 한길의 눈을 치는것을 보았었는데 사나운 바람때문에 이제는 그 흔적조차 가려볼수 없게 되였다.
이윽해서 거리가 가까와지자 세명으로 이루어진 저쪽방문객은 모두 손을 들어 흔들며 뭐라고 고함을 치면서 달려오고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방한모를 벗어들고 그 생눈우를 달려나가고계시였다.
잠시후 량쪽에서는 일제히 걸음을 뚝 멈추었다. 거리는 불과 4~5메터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서로 주고받는 대화도 없고 어느 누구 하나 손이나 발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마치 빚어세운것처럼 그렇게 사뭇 고정되여버렸다. 그것도 단 몇초동안…
《김일성동지!》
《김책동무!》
요란하고 감격에 겨운 고함소리가 추위에 짓눌렸던 숲속의 정적을 깨치는것과 동시에 사람들을 사정없이 한덩어리로 융합시켜놓았다. 처음에는 서로 허리를 굽혀보이더니 다음에는 와락 달려들어 어깨를 부둥켜안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해빛에 그슬려져 거밋거밋해진 볼에 대고 얼마간 얼굴을 맞비비시더니 다음에는 어깨를 잡고 한걸음 물러나 저쪽을 찬찬히 여겨보시는것이였다. 그런 후에 또다시 포옹! 그러기를 두세번 거듭…
《장군님!》
《김책이.》
같은 소리가 여러번 반복되였다.
이렇게 감격적인 상봉이 이루어지고나서 김책의 일행은 자세를 바로하고 서서 오래동안 그리워하면서 만나뵈올 기회가 없었다는것, 그런데 이번에 어찌어찌 기회가 생겨서 이렇게 인사를 나누게 되였다는것 그리고 만난김에 서로 속을 터놓고 앞날에 대한 작전을 잘 의논하자는것 등 마음속을 털어놓는것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대화를 하면서도 김책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시였다. 후리후리한 키에 준수한 얼굴, 그가 터놓는 이야기들에는 이국살이 10여년간 언제나 백두산을 그리워했다는 절절한 심리가 짙게 어려있었다. 사나이다운 훤칠한 체구는 물론이지만 김책의 특유의 빛나는 그 눈이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였다. 웃음은 적고 언제나 긴장이 어린 입모습이라든가 고집스럽게 생긴 턱이 남성미를 한껏 강조해주었다. 총체적인 인상은 산전수전 다 겪을대로 겪은 능숙하고 강의한 군사지휘관이라는것을 잘 나타내고있었다.
김책은 동해안의 성진바다가에서 나서 부모를 따라 간도로 건너갔다. 거기서 공산주의운동에 참가했다가 서울감옥에서 몇해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두만강을 건너 독립운동자들을 수없이 찾아다니였다.
이를테면 혁명의 령도자를 찾아 끝없이 헤매인 과거사를 상세히 펼쳐놓았다.
《그러니 결국 나라는 인간은 이제 40이 멀지 않았으니 반생이 아니라 거의 한생을 방황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결과에 오늘은 이렇게 김일성동지를 만나는 영광을 지니였단 말입니다.》
김책은 눈물이 글썽해서 고개를 숙이였다.
《하하하.》 호탕한 그이의 웃음소리가 방안을 울리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지나치게 긴장된 분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나직이 그러나 무게있게 계속하시였다.
《지난 세월이 반생이 아니라 한생이였다 한들 그것을 어찌 헛된 일로 보겠습니까. 그러한 로정이 있었길래 우리는 오늘 이렇게 뜻깊은 상봉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이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난로우에 놓인 주전자를 기울여 차를 부어 권하시였다.
그날 밤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김책이 든 숙소를 방문하시였다.
김책은 인사차림을 하고나서 자리에 앉자 거침없이 속을 터놓았다.
《김일성동지! 이번에 여기 와서 저는 너무나 뜻밖의 정황에 부딪쳐 놀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글쎄 한심합니다. 우리더러 반일무장투쟁의 규모와 방식에 대해서 새로운 방도를 찾아보라는 의견을 받을것이라고 합니다. 국제당대표가 귀띔했습니다. 이건 정말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우리에게 무슨 결함이라도 있다는건가요?》
김책은 벌써부터 흥분해서 가슴을 들먹이였다.
《나에게도 그와 같은 말이 있길래 명백히 대답을 주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저편의 말에 의하면 쏘련이 서방에서 밀려오는 침략도 막아내기 힘든데 동방에서 또 하나의 전역을 펴게 되면 력량이 분산되고 적들의 협공에 들수 있다는거지요. 일제는 우리가 쏘련의 사촉으로 무장투쟁을 하고있다고 걸고듭니다. 그래 우리는 단마디로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국제혁명에도 유익하고 우리에게도 유익한 길을 택할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립장이다라고 말입니다. 이제 며칠후에 정식으로 면담이 있게 될것 같은데 그때에 우리의 립장을 명백히 그리고 철저히 표명할 작정입니다.》
《그렇습니까? 아! 참말.》
김책은 뜨거운 김을 내불고나서 신중히 뒤를 이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이 김책이 김일성동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큰 고민에 빠질번 했습니다.
이건 정말 하늘이 도왔다고나 할수 있는 행운입니다.》
김책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그가 이때 얼마나 흥분했던지 다른쪽팔이 후들후들 떨기까지 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책의 팔을 붙잡고 말씀하시였다.
《우리 밖에 나가 숲속을 거닐어보지 않겠습니까. 눈보라치는 날 숲속을 걷는것도 재미가 괜찮을수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하시지 않는다면 김책은 가슴을 두드리며 울음을 터칠것 같았다.
《눈보라치는 밤인데도 말이지요.》 김책은 뜻밖이라는듯 의아한 눈길로 우러러보았다.
《그러면 뭐랍니까. 우리야 늘 그런 길에 습관되여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여 김일성동지께서는 벽에 걸어놓았던 털외투를 벗겨들게 되시였다. 김책은 어느새 외투앞섶을 여미고나서 잠시 기다리고섰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휘장을 내리드리운 안방으로 훌쩍 들어갔다 나왔다. 그의 손에는 보자기에 싼 꾸레미가 하나 들려있었다.
그는 김일성동지앞에서 보자기를 펼치였다. 보자기안에서는 흰 종이에 싼 큼직한 물건이 하나 나졌다. 다시 종이를 벗기니 그안에서는 보기에도 듬직하고 따스하게 생긴 털신 한컬레가 나타났다.
《장군님! 이것을 신어보십시오. 혹시 작지 않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약간 주저하다가 계속했다. 《장군님을 만나면 무슨 기념으로 될만 한것을 내놓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적당한것이 있어야지요. 처음에는 모젤권총, 그다음에는 담배물주리 또 그다음에는 만년필, 이렇게 톺아나가다가 그래도 이것이 그중 쓸모가 있을것 같아서…》
《아! 그렇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털신을 들어 이모저모로 살펴보며 말씀하시였다.
《정말 성의가 대단합니다. 이 털은 오소리털같습니다. 뜨뜻하겠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이런걸 하나 구해볼가 생각하던중인데 마침 잘됐습니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기념으로 되자면 두고두고 오래 보존할수 있어야 하는건데 이건 고작해야 한해겨울 신으면 끝이 날것 같습니다.》
《나는 이것이 마음에 듭니다. 아무데도 쓸모없는 무용지물을 백년을 두고본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렇게 몸에 닿는것이 제일입니다.
이건 얼음강판에서도 발을 덥혀주는것이니 이보다 더 크고 의의있는 기념품이 어데 또 있겠습니까. 정말 만족입니다.》
이렇게 대화를 계속하시면서 그이께서는 털신을 신은 발을 천천히 옮겨 이깔나무숲속 숫눈길을 걸으시였다. 밤이 깊었는데도 눈보라는 전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무밑둥이에서부터 소소리높은 우듬지에 이르기까지 모래알같은 깔깔한 눈가루를 들씌우면서 바람은 계속 기승을 부리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푹신한 감각을 느끼면서 걸음을 끝없이 내짚어나가시였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퍼올린 혁명동지의 뜨거운 정을 느끼게 되고보니 더이상 그 고마움을 표현할길이 없으시였다.
김책은 어깨가 닿을만치 김일성동지에게 가까이 다가서서 걸었다. 그러면서 뜨거운 입김을 후후 내불더니 또다시 말을 떼였다.
《저는 각오를 든든히 다지였습니다. 그 각오란 도대체 무엇인가? 저는 이번 기회에 김일성동지를 만났으니 평생소원이 풀린셈이니까 굳게 다짐하였습니다. 절대로 이제부터는 김일성동지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10여년동안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하다보니 입에서 신물이 날 지경입니다. 저는 이제부터 죽으나사나 백두산에 나가 김일성동지 수하에서 활동하겠습니다. 그러다가 적탄이 이 가슴을 뚫는다 해도 백두산줄기를 베고 숨지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렇게 해도 일없겠지요? 장군님, 이것은 진심입니다.》
잠간 기다렸지만 김책은 더이상 말할것이 없는것 같았다. 그래 김일성동지께서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김책의 손을 굳게 잡으며 말씀하시였다.
《자! 우리 그런 의미에서 손을 잡읍시다.》
굳게 겹쳐진 손바닥들에서 온기가 흘렀다. 그다음에는 서로 어깨를 껴안고 포옹하였다.
한동안 떨어질줄 모르더니 이윽해서 또 걸음을 옮기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가슴속에서 쿵쿵 심장이 울리는것을 감각하면서 걸으시였다.
벌써 아득한 옛일로 되였다. 길림시절 청년학생들속에서 혁명활동을 시작하여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바로 오늘처럼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밤 송화강가를 거닐다가 차광수와 포옹을 하고 얼음강판우에서 한참 딩굴던 생각이 나시였다. 그다음에는 험하고 먼길을 찾아가 산비탈오두막에서 김혁이를 만나 부둥켜안고 혁명앞에 다진 맹세를 변치 말자고 언약하던 일.…
가는 곳마다에서 동지를 찾았고 동지를 만났으며 조국을 해방하고 내 나라에 리상사회를 건설하자고 동지와 언약하지 않았던가.…
얼마간 더 걸어가다가 김일성동지께서 흥분을 누르며 김책의 팔을 붙잡으시였다.
《김책동무! 내 오늘 우리의 상봉을 기념해서 노래를 하나 부를테니 들어보겠습니까?》
《찬성입니다. 쌍수를 들어 찬성입니다. 이런 때는 축배 한잔이 제격일수 있는데 노래로 대신할수도 있지요.》
《그렇습니까,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잠간 고요에 잠기였던 숲을 흔들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김책이켠으로 돌아서서 걸음을 멈추시였다. 그리고나서 노래를 시작하시였다.
내 고향을 떠나올 때 나의 어머니
문앞에서 눈물흘리며 잘 다녀오라
하시던 말씀 아 귀에 쟁쟁해
…
노래선률에 따라 김책의 어깨가 세차게 흔들리였다. 그것때문인지 김책은 완전히 무아몽중에 빠지고말았다. 고향의 어머니얼굴이 눈앞에 언뜩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에 뒤이어 정다운 식구들 그리고 고향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것으로 해서 노래가 얼마나 더 계속되였는지 알지 못하였다.
《이제는 오래지 않아 새날이 밝겠는데 그만 돌아가 좀 쉽시다.》
김일성동지께서 어깨를 흔들어서야 김책은 정신을 차렸다. 그제서야 김책은 그이의 품에 안겨 꿈인지 생시인지 알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무심중 털신을 잠간 내려다보고있다가 손목시계를 풀어 김책의 손목에 채워주시였다.
《그게 뭡니까?》 김책이 물었다.
《난 김책동무에게 줄것을 아무것도 준비한것이 없습니다. 내가 차던 시계인데 좋은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간은 잘 맞습니다.》
《이건 너무합니다.… 그런데 이건 옆에 라침판이 달린거군요. 아, 이건 참 뜻이 깊습니다. 방향을 언제나 정확하게 가리고 때를 놓치지 말라는거 아닙니까.》
《기념으로 된다면 좋겠습니다.》
얼마후 김일성동지께서는 김책이와 헤여져 숙소로 돌아오시였다.
난로옆에 놓은 털신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피여올랐다. 아무리 여겨보았대야 별로 특이한 점을 찾아볼수 없는 평범한 하나의 털신이였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이모저모로 돌려가며 그것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시였다.
세상사람 그 누구나 몸차림에서 신발을 중히 여기는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산중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리고 그것이 눈보라 만리길을 가야 하는 사람이고보면 그 의의를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것이다.
…량강구마을어구에 있는 객주집, 철주동생과 언 두부 한모를 사이에 놓고 아직 익숙되지 못한 술을 한잔씩 마시자고 할 때 동생은 보자기에 싼 꾸레미를 펼쳐놓았다.
《그게 뭐냐?》
《어머니가 형이 오면 주어보내라고 한거야요.》
《그건 로동화가 아니냐.》
《그래요. 그런데 이안에…》
철주동생은 새까만색의 신 한컬레를 가지런히 방바닥에 내놓았다. 그것을 집어들고 잠간 들여다보고있던 김일성동지께서는 어머님의 다심한 정이 온몸에 사품쳐흐르는것을 주체할길 없어 그저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 하려고 하시였다.
《겨울에 좋겠구나.》
짤막한 이 한마디에 얼마나 큰뜻이 실렸던지 말마디들이 매번 떨리였다.
하지만 그 신이 그해 겨울 로흑산등판 마로인의 부엌아궁앞에서 끝내 굳게 닫긴 그이의 울음을 터치고야말았던것이다. 꽁꽁 얼어들고 눈투성이가 된 신을 아궁앞에서 말리고있는데 문뜩 어머님생각이 나시였던것이다.
어머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한컬레의 신, 그런데 지금은 계시지 않는 어머님을 대신하여 동생 철주가 이것을 보자기에 싸들고 량강구까지 찾아왔었지.…
눈등이 달아오르는것을 겨우 참으면서 얼마나 말랐는가 알아보기 위해 신바닥을 만져보니 거기에 감촉이 매우 부드러운 그 무엇이 깔려있다는것을 알게 되시였다. 손가락으로 우벼 끄집어내보니 바닥에서는 머리카락을 넣어 바늘로 촘촘히 누빈 깔개가 나타났던것이다. 순간 그이의 뇌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한가닥 생각이 떠오르시였다. 량강구객주집에서 동생이 이 신발을 내놓으며 《어머니가요, 엄마가…》 왜 그러는지 자꾸 갑자르며 말을 못하는데 동생의 동작을 여겨보니 어색하게 머리를 자꾸 쓸어만지였던것이다.
그러고보니 어머님께서 자신의 머리태를 잘라 신창에 깔았다는 사연이 가슴을 헤집고 달려들었다.
신깔개를 손에 든 그이께서는 한쪽손으로 가슴을 움켜잡고 몸을 떠시였다. 널름거리는 불길우에는 어머님의 얼굴이 얼른얼른하였다. 뜨거운것이 눈굽을 넘어 볼을 타고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어머님의 머리태로 만든 신깔개, 그것과는 생김새도 다르고 발에 와닿게 된 사연도 각이한데 어쩌면 이다지도 가슴을 설레이게 되는지 알수 없으시였다.
난로옆에 놓인 털신이 다 말랐을것이라고 보아질무렵 김일성동지께서는 자리를 떠서 창가로 다가가시였다.
동쪽하늘에 려명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미구에 불덩이같은 태양이 솟아오를것이였다.
그이께서는 김책을 만난 기쁨으로 해서 한밤중에, 그것도 눈보라 울부짖는 숲속에서 노래를 부르게도 되고 또 그가 기념으로 준 신 한컬레때문에 어머님을 절절하게 회상하게 된 가슴뻐근한 이 한밤을 환희와 긍지에 넘쳐 돌이켜보면서 혼자소리를 무심히 뇌이게 되시였다.
《혁명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최대의 기쁨으로 되는것, 그것은 곧 혁명동지를 얻는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