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102(2013)년 제3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박 경 철
1
신랑신부를 태운 뻐스는 은덕원 종업원들과 마을사람들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읍을 떠났다. 뻐스안에 빼곡이 들어찬 길손들의 눈길이 앞자리에 앉아있는 신랑신부에게로 쏠렸다.
운전사는 어느새 록음기를 동작시켰다.
《도시처녀 시집와요》의 경쾌한 노래선률이 울리는 속에 뻐스는 명산리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때는 4월 하순이라 봄볕이 한창 무르녹는 아름다운 산과 들이 차창밖으로 흘러간다.
길가에는 연분홍살구꽃이 활짝 피여나고 양지쪽엔 잔디가 새파랗게 돋아났는데 배부르게 이랑을 지어놓은 강냉이포전에서는 벌써 영양단지모옮겨심기가 한창이다. 종다리며 제비들이 춤을 추며 날아예는 맑은 하늘에선 따스한 봄볕이 재글재글 내려쪼인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채 차창밖의 이 모든 봄풍경을 살며시 내다보는 신부 최정옥의 마음은 꼭 꿈을 꾸고있는것만 같았다.
그의 눈앞에는 오늘에로 이어진 지난날들이 야릇한 흥분속에 삼삼히 떠올랐다.
3년전 초여름이였다. 그때 정옥은 읍거리에 자리잡고있는 은덕원에서 리발사로 일하고있었다. 그날도 그는 자기의 7번자리에서 손님봉사에 여념이 없었다. 오후 서너시쯤 되였을 때였다.
《7번자리로 가세요.》
기다림칸옆에 있는 1번자리에서 리발하는 반장의 목소리와 함께 한 청년이 책을 든채 갓 리발이 끝난 7번자리로 다가왔다.
바위처럼 단단해보이는 몸에 이마가 넓고 사색적인 눈이 빛나는 30전의 팔팔한 청년이였다. 그가 입고있는 학생복과 모자에 단 전문학교모표를 보면서 정옥은 이 청년이 갓 농업전문학교에 입학한 제대군인학생임을 짐작했다.
청년이 자리에 앉자 정옥은 그의 머리형태부터 재빨리 살펴보았다. 햇내기리발사라면 매우 깎기 힘든 머리형태였다. 허나 이미 고급리발기술을 소유하고있는 정옥인지라 자신이 있었다. 그는 좀 뚱뚱해보이는 몸을 잽싸게 움직이며 능란한 솜씨로 정성다해 머리를 깎아나갔다.
이윽고 손님의 머리까지 다 빨고난 정옥은 건발기로 젖은 머리칼을 말리우며 살살 빗질을 했다.
드디여 모든 리발작업이 끝났다. 잠시후 정옥은 거울에 자기의 머리를 이리저리 비쳐보던 손님의 눈이 별안간 번쩍 빛나는것을 보았다. 잇달아 손님은 정옥의 봉긋한 가슴우에 걸려있는 동그란 봉사마크를 여겨보고나서 웨치듯이 말했다.
《정옥동무, 제가 머리를 깎던중 제일 잘 깎았습니다. 그야말로 마음에 꼭 듭니다. 고맙습니다.》
손님은 굳어진 버릇인듯 거수경례까지 힘차게 붙이고 돌아섰다. 정옥은 한순간 당황해났으나 손님이 자기의 이름까지 부르며 그처럼 기뻐하니 자기도 기쁘고 즐거워나는것이였다.
그때로부터 한달가까이 날이 흐른 어느날이였다. 무심결에 자리에 와앉는 손님을 대하던 정옥은 은근히 놀랐다. 전번에 제 마음에 꼭 들게 머리를 깎아주었다고 깍듯이 인사까지 하고 돌아갔던 그 제대군인학생이 아닌가. 그런데 또 그의 머리를 깎게 될줄이야. 아무래도 이상하여 정옥은 그날 저녁 반장한테 슬며시 물어보았다.
《그 제대군인학생 말이예요. 어떻게 돼서 또 저한테 맞다들렸는지 모르겠어요.》
반장은 호함진 얼굴에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수수께끼란 말이지. 호호, 실은 그 청년이 7번자리의 리발사가 자기 머리를 마음에 꼭 들게 깎아준다고 하면서 차례를 미루면서라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게 해달라고 곡진히 부탁하길래 내가 그렇게 들여보낸거야.》
《예?! 어마나, 참…》
정옥의 크고 시원한 눈가에 감탄과 놀라움의 빛이 물결쳐갔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자기의 두손을 내려다보았다. 그후에도 청년은 꼭꼭 정옥이한테서 머리를 깎군 하였다. 그 과정에 정옥은 그의 이름이 곽경수라는것, 읍에서 30여리 떨어진 명산농장에 집이 있다는것 등을 알게 되였다.
올해 봄이였다. 한달에 한번씩 어김없이 찾아와 즐겁게 머리를 맡기군 하던 경수가 웬일인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새 그와 허물없고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여버린 정옥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지내본데 의하면 경수는 말이 적으면서도 웅심깊고 열정적이며 진실한 청년이였다.
(어찌된 일일가? 전번에 졸업시험을 친다더니 배치받고 아예 명산농장으로 간게 아닐가?)
리발을 하면서도 이따금 창밖을 내다보며 저으기 서운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저녁 퇴근하려고 은덕원을 나서는데 뜻밖에도 자전거손잡이를 잡은 경수가 서있는것이 아닌가. 자전거짐틀에는 두툼한 보자기에 정히 싼 비닐통이 무겁게 실려있었다. 정옥은 무척 반가운김에 저도 모르게 《경수동지…》하고 불렀다.
《정옥동무, 이거 정말 안됐습니다. 졸업식을 마치고 명산농장으로 배치되여가면서 꼭 들리자고 했는데 갑자기 다른 일이 생겨서… 이제라도 작별인사를 하자고 찾아왔습니다.》
허전하던 정옥의 가슴이 갑자기 그들먹해지고 눈굽까지 시큰해났다.
《그럼 마지막으로 리발을 해드려야겠군요.》
경수의 더부룩한 머리를 재빨리 일별해보고난 정옥이 하는 말이였다.
《그럼 요걸 잠간만 잡아주시오.》
경수가 자전거손잡이를 정옥이한테 넘겨주더니 뒤쪽으로 돌아가 짐틀의 비닐통이 상하지 않게 조심히 버티개를 세웠다. 정옥의 호기심어린 눈길이 그 비닐통에로 쏠리자 경수는 우선우선하게 입을 열었다.
《이건 유기농법에 리용할 우렝이랍니다. 이미 이 농법을 많이 리용하고있는 이웃군 신성리와 련계를 가지고 짬짬이 우렝이양식법을 연구해왔는데 이제부터 우리 농장에도 널리 퍼치자고 가져오는 길입니다. 이번에 배치되자마자 기술원까지 되고보니 할일이 참 많다는걸 느끼게 되는군요.》
경수는 머리를 깎으면서도 이것저것 농사와 관련한 많은 이야기들을 정열적으로 하였다. 리발을 끝낸 후 어둠속을 나란히 걷던 정옥은 어느덧 경수와 갈라져야 할 갈림길에 이르렀다.
《이젠 정말 마지막이군요. 그새 정말 신세를 많이 졌는데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왜 마지막이라구 해요? 읍에 나오는 기회들이 있을텐데 그때마다 들리면 되지 않나요.》
《그때두 정옥동무가 리발사로 그냥 있겠습니까?…》
경수의 목소리가 별안간 가볍게 떨렸다. 그 어떤 격한 심정을 억제하지 못해하는듯싶던 그는 무슨 말인가 더 할듯말듯 하더니 휙 돌아서서 냅다 자전거를 몰아가는것이였다.
(?…)
정옥은 한자리에 굳어진듯 서버렸다, 오래도록 망연히…
며칠후 정옥이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니 한인민반에서 살다가 몇년전에 명산리로 시집간 박아주머니가 와있었다. 그는 정옥을 보자 좀전에 아버지, 어머니와 무슨 말이 있었던듯 경수네 가정에 대해 쭈욱 내리엮는것이였다.
《본인은 지내봐서 알것이고 부림소관리공을 하는 어머니는 물론 누이동생까지 일을 잘하여 해마다 최고로력일을 내군 하는 실농군집이야. 특히 누이동생이 얼마나 이악하고 자존심이 강한지 몰라.… 이런 집과 혼사를 맺으면 정옥이한테 좋으면 좋았지 나쁠게 하나두 없다고 봐.…》
정옥의 머리가 점점 숙어지고 얼굴에는 진한 딸기물이 퍼져갔다. 사실 정옥은 지금껏 시집가는 문제에 대하여서는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그는 나이가 되였지만 모든걸 잊고 맡은 일에만 전심전력하였다. 그는 처녀시절의 하루하루를 귀중히 여겼고 인민의 봉사자로서 보람있게 보내려고 애썼다. 그의 부모들은 무슨 처녀가 봐둔 총각 하나 없이 일밖에 모르는가고 늘 지청구였었다.
정옥은 공연히 웃옷앞자락만 만지작거리며 부모의 눈치를 은근히 살폈다.
마음이 동하는지 아버지, 어머니가 다 희색이 만면하여 오히려 딸쪽을 건네다본다. 그제야 정옥은 자기도 경수를 마음에 두고있다는것을 불현듯 깨달았으나 《난 몰라요.》밖에 더 다른 말을 못하고말았다.
박아주머니는 춤이라도 출듯이 기뻐하며 제잡담 두손으로 량무릎을 탁 치는것이였다.
《됐어!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구 서로 사랑하면서두 고백을 못한게 분명하다니까.》
이렇게 되여 한주일이 지난 오늘은 결혼식까지 하게 되였던것이다.…
높고낮은 몇고개를 넘자 드디여 명산땅이 나타났다. 수려한 산기슭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시집이 점점 가까와지자 정옥의 심장은 더욱 쿵쿵 방아를 찧었다.
과연 내가 농사군이 될수 있을가. 시집은 군은 물론 도일보에도 크게 소개된 실농군의 집이라는데…
뻐스는 정옥의 이런 걱정은 아랑곳없이 빵빵― 경적소리를 울리며 집앞에까지 움씰움씰 들어가 신랑신부를 내리우고 다시 길을 떠났다.
열려진 차창으로 길손들이 손을 흔들어주고 집대문밖에서는 마을사람들과 작업반일군들 지어 농장일군들까지 떨쳐나와 신랑신부를 맞아준다.
그속에 리당비서와 관리위원장까지 끼워있는걸 보면 과연 이 집이 농장적으로 으뜸가는 실농군집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수 있었다.
정옥은 남편과 함께 시부모에게 깊숙이 절을 한 다음 리당비서와 관리위원장한테도 인사를 하였다.
마당에서는 젊은축들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분위기를 한껏 돋구었다. 어느덧 결혼식이 끝나갈무렵 관리위원장이 기분좋은 얼굴을 정옥이한테 돌린채 물었다.
《그래 새색시는 이제 무슨 일을 할셈인가? 우리 농장에 고급리발사가 왔다고 모두들 기뻐하는데…》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리발사를 시켜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정옥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연분홍빛저고리고름끝만 만지작거렸다.
엊그제 본가집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론의가 있었었다. 그때 아버지는 이렇게 훈시했다.
《농장으로 시집갈바에야 손에 흙을 묻히며 농사일을 해야지. 더구나 그 집은 실농군집으로 온 농장에 소문이 자자한 집이 아니냐. 그런 집의 당당한 한식솔이 되자면 뭐니뭐니해두 농사일부터 잘해야 한다구 본다.》
정옥이도 이미 그럴 결심이여서 어머니는 비록 아쉬워했지만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따르겠노라고 했었다.…
정옥은 숙였던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담담한 어조로 자기의 그 결심을 그대로 터놓았다.
《전 농사일을 제일로 사랑하는 실농군집의 진짜 한식솔이 된 다음에야 리발사를 해도 하겠습니다.》
순간 온 방안이 떠나갈듯 한 박수소리가 터져올랐다. 정옥의 가슴은 한껏 달아올랐다.
2
며칠후 정옥은 명산리 3작업반 2분조(시누이네 분조)에 배치되여 첫 출근을 했다.
그날 아침 온 집안이 잔치날 못지 않게 흥성거렸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꼭같이 대견한 눈길로 며느리를 바라보며 좋아서 어쩔줄 몰라했다.
남편은 강쇠같은 손으로 백도라지처럼 하얗고 매끈한 정옥이의 연약한 손을 꽉 잡아 흔들어주기까지 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기뻐한것은 경이였다.
그는 정옥의 팔에 스스럼없이 매달리며 물었다.
《형님, 농사일을 꽤 해낼것 같애요?》
《하지 않으문. 두고보라요, 나두 누이같은 혁신자가 되지 않나.》
《아이참, 나같은게 무슨 혁신자겠어요. 적어도 하루에 이백프로, 삼백프로씩 꽝꽝 해내야 혁신자지. 난 겨우 백프로를 넘어서거던요. 하지만 결심품고 이악하게 달라붙으면 돼요. 난 형님이 하루빨리 혁신자가 되고 실농군이 됐으면 해요.》
《호호, 누인 참 몸은 제비같은데 욕심은 황소같애. 좌우간 잘해볼테야.》
정옥은 씨원씨원하게 대꾸했다.
어느덧 강냉이영양단지모옮겨심기가 끝나고 모내기가 시작되였다.
분조논 한가운데 《모두다 모내기전투에로!》라는 힘찬 구호판이 세워져있고 그 주위로 붉은 기발들이 힘차게 펄럭이고있었다. 올해초에 받은 새형의 뜨락또르가 마치 적진으로 돌입하는 땅크마냥 감탕을 짓뭉개며 논배미마다 반듯이 써레를 쳐나가고 써레를 앞세운 논배미들에서는 다기능모내는기계가 통통통 고르로운 동음을 울리면서 재봉질하듯 잽싸게 푸른 수를 놓아가고있었다. 그 다기능모내는기계로 말하면 경수가 요 며칠사이에 이전의 모내는기계를 개조한것인데 작업능률을 1.2배나 높일수 있게 되여있었다.
정옥은 어뜩새벽에 일어나 일찌기 밥을 먹고 시누이와 나란히 들로 나가군 했다. 그리고는 모내는기계에 모를 날라주기도 하고 이따금 손모내기를 하기도 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였다.
요새는 너무 피곤하여 저녁술을 놓기 바쁘게 굳잠에 곯아떨어졌고 아침에도 제시간에 깨기 힘들어했다. 그래도 며느리란 자각에 이끌려 겨우 몸을 일으키고나면 벌써 시어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더 누워있으라고 정옥의 등을 떠밀군 했다.
그리고 며느리가 밥그릇을 다 내는것을 보고서야 자기도 밥사발을 비웠다. 쉴참에 먹으라고 사탕 같은것을 싸서 작업복주머니에 꼭꼭 넣어주기도 했다.
시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며느리가 입맛을 잃을세라 바쁜 짬을 내여 명산강가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왔고 아침저녁 염소젖을 짜서 끓여주기도 했다. 밤이면 웃방에서 남편이 아래방사람들이 들을세라 조용조용히 정옥의 아픈 허리를 두드려주며 되려 안해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때면 정옥은 시집의 큰애기가 되여버린듯 하여 얼굴을 붉히면서 몸둘바를 몰라했다. 하지만 욕망처럼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시집이 부어주는 사랑을 고스란히 받는수밖에 없었다.
《경이 형님은 참 좋은 시집을 만났어. 온 집안이 며느리 생각으로 그렇게 극성이니 난 막 시샘나서 죽겠다니까.》
어느날 작업쉴참에 분조의 한 젊은 녀인이 부러워하는 말이였다.
《정말 그래요. 하루빨리 실농군집의 한식솔이 되라고 시집의 사랑이 그처럼 뜨거운것 같애요. 거기에 보답을 해야겠는데 생각뿐이니… 아이참, 배가 왜 이렇게 아플가?》
정옥은 속이 메슥메슥하고 토할것만 같아 얼른 그 자리를 피했다. 며칠전부터 그는 몸에서 이상한 증상을 느껴오는터였다.
모내기가 끝나자 분조는 가래골에서 콩파종을 하였다. 정옥은 호미로 판 작은 구멍에 콩알이 알맞게 떨어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 어떤 구멍에는 한알 떨어지고 또 어떤 구멍에는 대여섯알씩 콱 떨어지군 했다. 그러면 할수없이 콩알을 솎아내야 하였다.
앞서나가던 분조원들이 손등으로 입을 가리우며 정옥의 이랑에 몇포기씩 콩알을 박아주군 하여 그럭저럭 그들의 뒤를 따라가고있었다.
정옥은 끊어지는것 같은 허리를 잠간 펴고 앞을 내다보았다. 채양이 긴 하얀 체육모를 쓰고 하늘색작업복을 가뜬히 입은 경이가 제비처럼 날렵하게 움직이며 맨 앞장에서 나가고있었다.
오른손으로 콩콩 구멍을 파고 왼손으로 알맞게 종자를 떨구며 묻는 솜씨가 마치 기계가 움직이는것 같았고 춤을 추듯 률동적이였다. 시누이와 자기사이의 간격은 20여메터나 잘되여보였다.
(참, 몸은 호릿한데 일은 세괃게 해제낀다니까. 어디서 저런 힘이 나는지. 난 정말… 시누이보다 몸은 더 뚱뚱해가지고도 이렇게 거부기걸음을 하고있으니…)
호― 한숨을 내긋고난 정옥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조금만 참자. 이제 15분만 견지하면 휴식시간이 될텐데.)
정옥은 팔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고 다시 허리를 꺾었다. 잠시후 코앞에서 돌멩이에 호미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드니 경이가 허리를 펴고있었다. 자기 이랑을 다 나가고 형님의 이랑을 마중나온것이였다. 정옥은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눈길로 시누이를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말았다.
《자, 이젠 휴식을 하고 마저들 심읍시다.》
분조장아바이의 석쉼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 말이 떨어지자 분조원들은 밭머리 펑퍼짐한 곳에 자리를 잡고 빙 둘러앉았다.
녀인들이 모여앉으면 의례히 그러하듯이 곧 이야기판이 벌어졌다. 기술원이 정옥을 생각해서인지 우렝이시험포전을 우리 2분조에 정했다느니 또 누구네 집에서는 어미토끼가 새끼를 열마리나 낳았다느니 등등… 분조장만이 나팔통같은 마라초담배를 구수하게 빨며 아낙네들의 입씨름에 묵묵히 속심판을 서고있었다.
정옥은 앉아있기도 베찬듯 한켠에 있는 뽕나무에 기대여 스르르 눈을 감았다.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천길 미궁속에라도 떨어지는듯 한 환각이 왔다. 정옥은 요즘 속이 후리후리하고 온몸이 무겁고 힘든 원인을 알고있었다. 어느새 이것을 눈치챈 시어머니가 《정 힘들면 며칠 쉬려무나.》하면서 분조장한테 제기하겠다는걸 말렸었다. 이제 와서 보니 괜히 말리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 머리 한구석에 뾰족이 싹트는것이였다.
(허튼 생각.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된다고 벌써부터 응석을 부린단 말인가, 안돼.)
휴식이 끝나고 작업이 시작되자 정옥은 입술을 옥문채 제일먼저 몸을 일으켰다.
힘들고 바쁜 날은 쉬임없이 흘렀다.
정옥이네 집은 주변에 우거진 과일나무들과 나날이 푸르싱싱 자라오르는 강냉이, 줄당콩, 호박 등 그속에 점점 깊숙이 빠져들고있었다. 감자포기들은 벌써 목화송이같은 꽃송이들을 머리에 이고 이랑이 안 보이게 어우러져있었다. 귀기울이면 땅이 툭툭 터갈라지면서 감자알 크는 소리마저 들리는듯싶었다.
하지가 지나자 정옥이네 분조는 앞그루로 심었던 밀, 보리, 감자가을을 와닥닥 끝내고 키큰모를 심었다.
이미 푸른 옷을 떨쳐입은 산과 들은 뻐꾸기와 후투디의 구성진 울음소리를 민요가락처럼 울리면서 자기의 모습을 더욱더 검푸르게 단장하고있었다.
정옥은 요즘 시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냉이포전에서 강냉이김매기를 하고있었다.
하루정량은 스무이랑을 매는것이였다.
매일 정량을 미달하군 하는 정옥은 벌써 여러차례나 분조장한테서 듣기 좋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오늘은 어떻게 하나 정량을 수행하리라 속으로 벼르며 호미에 힘을 주었다.
스무이랑건너에서는 하얀 체육모를 쓴 경이가 김을 매면서 속도있게 나가고있었다.
정옥은 낮 12시까지 허리 몇번 못 펴고 부지런히 손을 놀렸으나 일곱이랑밖에 매지 못했다.
그는 손맥이 탁 풀렸다.
(안되겠어. 힘껏 하느라 하는데도 안되는걸 어쩌나…)
잇달은 한숨소리, 점심을 먹고 나오니 뜻밖에도 제 이랑의 김이 말끔히 없어졌다. 누가 맨것만은 틀림없는데 도무지 누구인지 알수 없었다. 혹시 누이가 아니, 누인 무딘 호미날을 벼려주겠다고 점심을 먹자마자 수리분조에 갔다가 방금 돌아오지 않았는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정옥은 저쪽개울가 풀판에서 소를 먹이다가 1분조쪽으로 황황히 사라져버리는 시아버지를 발견했다.
(아니, 그럼 시아버지가?…)
정옥의 가슴이 철렁해났다. 온몸이 화끈 달아오르고 거무스레 탄 이마에는 진땀까지 빠질빠질 내돋았다. 오후에는 시누이가 도와주었다. 그들은 한이랑씩 더 맸다.
정옥은 작업총화시간에 분조장으로부터 오래간만에 정량을 넘쳐수행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매일 이 시간이면 동정어린 눈길로 정옥을 지켜보던 분조원들이 하나같이 기쁨을 감추지 못해하였다. 하지만 정옥의 마음은 개운치 못했다.
분조원들은 모르지만 시집식구들의 도움이 있어 오늘 칭찬을 받은것이 아닌가.
그날 저녁 설겆이를 끝낸 정옥은 시름한 표정으로 웃방에 들어와앉았다. 농업과학기술잡지책을 펴놓고 열심히 들여다보던 남편이 웬일인가싶어 물었다.
《여보, 왜 그러오? 어데 아프오?》
정옥은 천천히 머리를 흔들고나서 오늘 있은 일을 나직이 터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여보, 이래가지고 제가 꽤 실농군집의 한식솔이 될수 있을가요? 차라리 리발사로 일하는 편이…》
《무슨 소릴 하는거요. 한번 먹은 결심을 그렇게 쉽게 굽히려 해서야 무슨 큰일을 하겠소. 난 당신이 결혼식날 다진 그 결심을 한시도 잊지 말고 살길 바랄뿐이요.》
남편의 말은 정옥에게 다소 힘을 주었고 오늘 있은 일을 인차 잊어버리게 하였다.
3
어느날 아침이였다. 분조장이 작업조직을 하면서 오늘은 김매기를 기본으로 하면서 가래골에 흐르는 실개천의 바닥을 퍼올리고 뚝에 돌을 입히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나서 정옥이에게는 다른 일을 맡기였다.
정옥이가 받은 단독임무는 우렝이시험포전에 울바자를 두르는 일이였다.
임무를 주고난 분조장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 녀인을 향해 《남숙아주머니두 정옥동무와 일하는것이 좋겠소.》라고 이르는것이였다.
이때 정옥의 곁에 앉아있던 누군가의 입에서 이런 속삭임이 새여나왔다.
《애개개, 혼자서도 할수 있는 일인데 새각시를 생각해서 한사람 더 붙여주누만.》
그 소리를 듣자마자 정옥은 튕기듯이 몸을 솟구었다.
《분조장동지, 저 혼자 하겠습니다. 한사람몫인데 어떻게 두사람이…》
《음, 하긴 정옥동무 혼자서도 얼마든지 해낼수 있을테니 그렇게 하오. 자, 그럼 이젠 일들을 시작합시다.》
분조장이 호기있게 소리치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옥은 울바자감을 가지러 작업반으로 향하였다.
울바자감은 혼자 나르기에는 좀 많은 량이였다.
정옥은 할수없이 오전에는 울바자감을 나르기로 하였다.
더위가 한창 시작된지라 시간이 갈수록 날씨는 몹시 더웠다. 바람조차 불지 않아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흐르고 숨이 헉헉 막혀왔다. 그러나 정옥은 이를 악물고 울바자감들을 이고지고 걸음을 옮기였다. 이렇게 하기를 그 몇번…
어느덧 마지막울바자감들을 이고지고 겨우 시험포전에 이르렀을 때 점심시간을 알리는 고동소리가 멀리서 가늘게 울려왔다.
불시에 배가 고프고 온몸이 나른해왔다. 그러나 계획대로 오전에 다 날랐다는 안도감에 정옥은 천천히 시집으로 향했다. 점심식사를 끝낸 후 설겆이를 하려는데 시어머니가 황급히 며느리의 손에서 행주를 빼앗으며 웃방으로 떠밀었다.
《아이구야, 오전내껏 왔다갔다하느라 힘들었겠는데 어서 좀 쉬고 나가거라.》
하긴 너무도 힘들고 피곤하여 정옥은 웃방벽에 기댄채 눈을 감았다. 그는 누가 가만히 흔들어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여보, 일나갈 시간이 되였소.》
남편의 말이였다.
《예, 나가겠어요.》
주섬주섬 차비하다가 살펴보니 시집은 별로 조용했다. 시집식구들은 벌써 일터로 나가고 정옥이 혼자 남아있었던것이다. 웬일인지 긴장감이 스르르 풀리며 또다시 피곤이 엄습해왔다.
(어쩔가? 조금만 더 쉬고 나갈가? 어쨌든 저녁까지 일을 끝내면 되겠지.)
정옥은 방바닥에 누워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갑자기 마당가에서 개가 컹컹 짖어대는 바람에 정옥은 후닥닥 깨여났다. 마당가를 맴돌던 누렁개가 따르릉 종소리를 울리면서 자전거를 타고 집앞을 지나가는 웬 낯선 사람을 향해 짖어대는 소리였다.
정옥은 얼른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이걸 어쩌나.…)
정옥은 덤벼치듯 자리에서 일어나 시험포전으로 달려갔다. 그는 서툰 솜씨로 시험포전곁에 앉아 울바자를 엮기 시작했다.
이런 일을 많이 해보지 못해서인지 일자리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시간은 퍼그나 흘러갔다. 이러다가는 저녁때까지 울바자를 둘러칠것 같지 못했다.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낮잠을 잔것이 몹시 후회되였다.
정옥의 가슴은 등잔심지타듯 빠질빠질 타들었다.
잠시 손을 멈추고 우렝이들이 떠다니는 논판속을 들여다보던 정옥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자리에서 움쭉 일어났다. 그리고는 절반정도의 구간에는 엮은것으로 둘러치고 나머지구간엔 울바자감을 그냥 촘촘히 꽂아나갔다. 이렇게라도 하면 분조장이 또 듣기 좋은 비판으로 넘길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분조장은 작업총화에서 큰소리로 정옥을 질책했다.
《오늘은 말 좀 해야겠습니다. 사실 정옥동무가 맡은 일은 큰 기술을 요구하는 일도 아닌데 왜 그렇게 형식적으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엮지 않고 세워놓은 울바자같은거야 쉽게 나자빠지고말지요. 그렇게 되면 기술원동무가 우리 농장의 유기농법발전을 위해 애써 구해온 우렝이들이 류실된다는걸 생각해보았습니까. 남편의 그 수고를 생각해서라두 이렇게 일하면 안될 정옥동무가 정말 섭섭합니다. 난 그래두 정옥동무를 실농군집의 한식솔로 믿고있었는데 이제 보니 진짜 한식솔이 못되는군요.》
정옥은 그만 한방망이 되게 얻어맞은것처럼 정신이 아찔해나는것을 느꼈다. 실농군집의 한식솔이라는 말이 칼로 심장을 도려내듯 아프게 들리였다. 자기때문에 실농군집이 말밥에 올랐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죄여들었다. 작업총화가 끝나자 정옥은 머리를 짓수굿한채 경이의 뒤에서 묵묵히 걸었다.
지금 누이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괴로울가?
남달리 자존심이 강한 그 성미에 용케도 자신을 이겨내는것 같았다. 그들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에 이르렀다. 집식구들모두가 저녁상을 차려놓은채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경이야, 오늘 분조에서 무슨 일이 있은게 아니냐?》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딸의 낯색에서 이상한 감촉을 받은듯 물었다.
정옥은 들이쉬던 숨을 딱 멈추고말았다. 온몸이 돌덩이처럼 굳어지는듯 했다. 그럴 때 시누이의 얼굴에 웃음이 어리며 집안이 떠나갈듯 한 명랑하면서도 어리광스러운 목소리가 튀여나왔다.
《호호, 아버지두 참. 요샌 점점 더 걱정이 많아지네. 아무렴 나나 형님이 맡은 일을 제대로 못했을라구요. 자, 어서들 식사나 하시자요. 난 막 배고파죽겠는데. 밥먹고 내 얼른 옆집에 책 빌리러 갔다오겠어요. 자, 형님두 어서 식사하시자요.》
경이가 제 먼저 밥상에 다가앉으며 형님을 끄당긴다.
《허허, 난 또 무슨 일이 생겼나 했구나.》
식사후 웃방으로 올라온 정옥은 저도 모르게 《호―》 하고 안도의 숨을 내그었다. 허나 그것은 한순간이였다.
손에 쥔 책을 펼칠념도 안하고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겼던 남편이 슬그머니 일어나 주섬주섬 작업복을 입는것이였다.
《여보, 당신두 차비를 하오. 어서 시험포전으로 나가기요.》
정옥은 바늘에라도 찔린것처럼 와뜰 놀랐다.
(다 알고있었구나.…)
《내 다 들었소. 분조장의 말이 백번 옳구말구. 실농군집의 진짜 한식솔이 되자면 오늘과 같은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하오. 만일 계속된다면 당신은…》
정옥은 그만 서러운 눈물이 왈칵 솟아나 고개를 떨구고말았다. 뜨겁던 심장이 한순간에 얼음덩이처럼 차겁게 식어드는듯 했다. 언제 봐야 말이 적고 인정미가 있는것처럼 느껴지던 남편한테도 이런 매정하고 모진 모퉁이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치밀어올랐다.
정옥은 입술을 꼭 깨문채 방바닥만 뚫어지게 보았다.
《물론 다 내탓이요. 처음부터 제발로 걸어나가도록 요구성을 높이지 못하고 그저 힘들거라고 걱정만 했으니… 우리 비판은 이따 하구 빨리 시험포전으로 나가 잘못된 일을 바로잡기요, 어서.》
그제야 정옥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남편의 손에 이끌리듯 몸을 솟구었다. 뜨거운 정이 전류마냥 온몸의 피줄을 타고 찌르르 흘렀다.
밖은 캄캄하게 어두웠다.
그들이 불달지 않은 홰불망치를 들고 시험포전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는 두개의 홰불망치가 황황 타오르고있었다. 그것을 배경으로 두사람이 얼른거렸다. 그들을 눈여겨보던 정옥은 《아―》 하고 외마디소리를 지를번 했다. 분조장과 시누이였던것이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싱그러운 밤공기를 헤가르며 또렷이 들려왔다.
《분조장동진 왜 쉬지 않고 나왔어요? 이 일이야 우리 집사람들이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니나요.》
《허허, 경이가 언제 그런 리기주의자가 됐나? 어째서 이 일이 경이네 식구들에게만 한한 일이겠나. 내가 분조장구실을 쓰게 하지 못하여 오늘 일이 이렇게 됐는데 비단이불에 누운들 잠이 올상싶으냐?》
《안예요. 실은 제가 지금껏 곁에서 형님을 진정으로 돕지 못했어요.》
《됐다됐어. 갓 시집와서 손에 선 농사일을 하자니 그럴수 있지. 경이 형님이 그만하면 용해. 농장 리발사가 되는것두 마다하고 시집오자마자 인차 농사일을 시작했지. 일을 배우려는 열성두 아주 높거던. 내 오늘 네 형님을 좀 과하게 질책한것은 다 하루빨리 실농군집의 당당한 한식솔이 되라는것이지 다른게 아니야. 자, 속도를 높이자구.》
정옥은 그만 가슴이 뭉클 울려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버리고말았다.
아,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속에서 내가 일하고있는가!
남의 잘못을 제것으로 받아안으며 이밤 스스로 일터에 나온 저들에 비해볼 때 나는 얼마나 한심한가. 난 정말 맹꽁이야. 남편이 아니였다면 여기 나올 생각조차 못했을것이니 이제 더이상 이런 고마운 사람들의 짐이 될수 없어. 그들의 어깨우에 얹혀살아선 안된단 말이야.…
《엉? 뛰는이우에 나는이가 있다더니 여보, 우리도 빨리 일을 시작하기요.》
남편이 급히 홰불망치에 불을 달아 논머리에 꽂자 사위는 더욱 환하게 밝아졌다.
4
정옥은 요즘 안산골에서 풀베기작업을 하고있었다. 풀판이 좋은 안산골은 해마다 온 농장이 달라붙어 경쟁적으로 풀베기를 하는 곳이다.
아침이면 농장원들이 큼직한 밥보자기와 선들선들 날이 선 낫을 둬가락씩 허리에 차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곳에 모여든다.
《모두다 풀베기전투에로!》라는 구호판이 골로 들어가는 첫 어구에 세워져있었다. 그곁에는 분조별풀베기경쟁도표판들과 이동속보판들도 보였다.
뜨락또르들이 연방 안산골을 들락날락하며 살진 풀단들을 산더미같이 실어나른다.
리당비서, 관리위원장을 비롯한 농장일군들과 작업반일군들까지 풀베기에 총동원되였다. 정옥은 그속에 남편이 없는것이 좀 서운했으나 차라리 그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수는 김매기가 끝나자 관리위원회의 조치에 따라 작업반에 유기질복합비료생산기지를 시범적으로 꾸리는 일을 맡아하고있었다.
현재 분조경쟁도표판에 그려진 정옥의 풀베기실적도표가 맨 꼬리에 처져있으니 남편이 이걸 본다면 얼마나 섭섭해하랴.
정옥은 시누이와 함께 그중 풀판이 좋은 안산골의 동쪽막바지에서 벌써 한달가까이 풀을 베고있는데 아직 풀베기정량을 다 못하고있었다.
정옥은 기어이 정량을 수행하려고 오늘도 몇번이나 입술을 감쳐물며 낫을 휘둘러댔다.
점심시간이 가까와오도록 풀베기에 옴해있던 그는 잠간 허리를 펴고 산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고향땅처럼 정든 명산리다.
정옥은 그림처럼 펼쳐진 명산리를 한동안 바라보며 이 땅을 더욱 살기 좋은 고장으로 꾸려가리라 마음다졌다. 그런데 난 이게 뭐람. 아직 하루 풀베기정량도 못하고있으니…
정옥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와락와락 풀들을 쓸어눕혔다.
《아가…》
왼손 두번째손가락에서 앵두빛같은 피가 흘러나오고있었다. 덤벼치다가 손을 벤것이였다.
정옥은 황급히 손수건을 찢어 벤 부위를 동여맸다. 리발사시절의 그 백도라지같던 손이 한해여름사이에 거무스레 타고 여기저기 트고 뭉툭해진데다가 상처까지 처매니 정말 꼴불견이였다.
허지만 땅을 다루고 곡식을 가꾸는 손이라는 긍지감이 가슴 그들먹이 차올랐다.
정옥은 상처의 아픔도 잊고 다시 풀을 베여나갔다. 얼마후 샘터에서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12시가 넘었어요. 어서 내려와요.》
시누이의 목소리였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야참, 왜 이렇게 속도가 나지 않을가? 시누인 코노래를 부르며 낫질을 해도 자기 정량을 거뿐히 해치우는데 난 왜 거부기걸음일가?)
낫은 면도날처럼 잘 들었다. 새벽마다 시아버지가 품들여 갈아주군 하는 낫이였다. 낫에 문제가 있는것이 아니라 정옥이 자기한테 문제가 있었다.
정옥은 얼마 무디지 않고 번들거리는 낫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거듭 찾는 소리가 울려와서야 스적스적 샘터로 향했다.
경이가 점심보자기를 펴놓고 기다리고있었다.
《형님, 어서 앉아요. 자, 이 샘물부터 한모금 들어요. 얼마나 찬지 이발이 쑥 빠지는것 같애요.》
경이가 고뿌에 찰랑찰랑 맑은 샘물을 떠서 내밀었다. 정옥은 시원하게 샘물은 들이켰지만 밥술은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몇술 뜨는둥마는둥하다가 숟가락을 놓고말았다.
《형님, 어데 편치 않아요?》
정옥은 대답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인차 낫을 들고 일어났다.
며칠이 지났다. 이른아침이 되자 정옥은 버릇처럼 맨먼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한순간에 잠기운이 싹 사라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키고나서 서둘러 가마에 불을 지피고 쌀을 일기 시작했다.
뒤따라 일어난 시집식구들은 모두 뒤산으로 새벽풀베기를 떠났다. 세대별풀베기에서도 정옥이네 시집이 단연 앞장서나가고있는것이였다. 경수도 낮에는 작업반에 나가 일하지만 아침저녁 꼭꼭 풀을 베군 하였다. 잠시후 뒤산에 올랐던 시집식구들이 이슬이 뚝뚝 떨어지는 탐스런 풀단들을 지고 집마당에 들어섰다. 그러는 사이에 아침상이 차려지고 모두 맛나게 식사를 한 다음 새로운 활력에 넘쳐 일터로 향한다. 그때 싱갱이질하는것과 같은 소리가 마당가에 울렸다.
《글쎄 이제부턴 어머니가 아침밥을 지으라는데두요. 형님은 저와 함께 풀을 베야 해요. 힘들어도 자꾸 풀을 베야 낫질솜씨가 늘거던요. 오빠두 군사복무를 할 때 반복훈련이 중요했다고 말하지 않나요.》
정옥은 대뜸 시누이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래, 풀을 베야지. 한단이라도 더 베여봐야 낫질솜씨가 늘게 아닌가. 지금 풀베기에서 속도가 나지 않는건 낫질이 서툴러서가 아닌가. 이 단순한걸 왜 생각을 못했담.
정옥은 이런 생각을 하며 그들앞에 나섰다.
《누이말이 옳아요. 이제부턴 제가 산에 갈테니 어머니는 밥을 지으세요. 일없지요?》
《아서라, 힘든데 산엔 뭘. 그러지 않아도 해종일 풀과 씨름할텐데 새벽부터 이슬 찰게 있느냐. 몸두 정상이 아니지 않느냐.》
시어머니는 단박 며느리걱정부터 하려든다.
《어머니, 일없어요. 저두 하루빨리 정량을 수행해야 할게 아니예요. 그러자면 낫질에 익숙돼야 하거던요. 앞으로 가을걷이를 잘하기 위해서두 이건 꼭 필요하다구봐요.》
《원참, 경이하구 같이 일하더니 점점 꼭같아진다니까…》
시어머니는 대문가에 한동안 서서 동갑내기처럼 어깨나란히 산으로 향하는 딸과 며느리의 뒤모습을 정찬 눈길로 바라본다.
안산골은 날이 갈수록 풀베기전투로 더욱 세차게 끓어번졌다. 군에서 달려왔는지 방송선전차까지 나타나 힘찬 경제선동으로 전투원들의 사기를 부쩍 높여주었다. 이동속보판에는 혁신자들의 이름이 날마다, 시간마다 바뀌여졌다. 정옥은 낫자루에 더욱 힘을 주어 바싹 다그어댔다. 손바닥에 생긴 콩알같은 물집은 이미 대여섯개나 터져버렸다. 손등에는 풀벌레한테 쏘인 자리가 수다하게 생겨났다.
그래도 아픈 감각은 별로 오지 않았다. 그의 온 신경은 풀베기에 쏠려있었다. 시누이가 잠간만이라도 도와주겠다고 온걸 돌려보냈으나 자기가 맡은 정량은 도저히 오를수 없는 신비경의 령마루처럼 느껴졌다.
정옥이 퍼그나 늦어 집마당에 들어서니 시누이가 아직 자지 않고 숫돌앞에 앉아 썩썩 낫을 갈고있었다. 그옆에는 시집식구들의 낫이 잘 닦은 무기처럼 주런이 놓여있었다. 정옥은 불쑥 련민의 정이 솟구쳐올라 시누이곁에 이끌리듯 다가가 앉았다.
《누이, 언제부터 한번 묻자던것인데 누인 어째서 농장원이 되였어요? 다른 그 어떤 일을 맡아도 막힘없이 척척 해낼것 같은데…》
경이는 뜻밖에 아름찬 물음을 받은듯 인차 대답을 못했다. 어디선가 풀벌레들이 찌르륵거리는 소리만 울려올뿐 마당에는 정적이 깃들었다. 이윽해서야 경이는 깊은 생각이 실린 어조로 입을 열었다.
《글쎄, 나두 아직은 내가 왜 농장원이 되였을가 하는 물음에 다는 대답 못해요. 그러나 한가지 명백한것은 대대로 농사를 지어오며 쌀로써 조국이라는 크나큰 집을 받들어온 우리 집의 진짜 한식솔로 살고싶은 마음이 절 고향땅에 붙잡아둔가봐요.》
《…》
《전 어려서부터 땅을 다루는 아버지, 어머니의 껄껄한 손에 이끌려 자랐어요. 부모님은 농장에서 제일 부지런하고 일밖에 모르는분들이였어요. 눈비오나 바람이 부나 사시절 들에 살며 오직 곡식을 가꾸는것밖에는 인생의 보람을 모르는듯싶은 그들을 볼 때마다 전 생각이 많아지군 했어요. 왜 우리 부모는 세상의 하많은 일들가운데서 부디 농사일을 하면서 살가? 아마 농촌에서 태여났기때문일거야.… 철없던 그 시절은 멀리 흘러가고 어느덧 중학교졸업을 앞둔 그때 저한테도 꿈이 참 많았어요. 온 세상의 모든 일을 다 해보고싶었다고 할가. 이런 때 군대에 나간 오빠한테서 편지가 왔어요.
〈난 네가 아버지, 어머니처럼 농사를 지었으면 한다. 이 오빠두 제대되면 꼭 고향으로 돌아가 곡식을 가꾸는 일에 한생을 바치려구 한다.〉
전 오빠의 그 마음을 인차 리해할수가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날이였어요. 그날은 아버지의 생일이였는데 새벽 일찍 들에 나간 아버지가 날이 환히 밝았는데도 돌아오시지 않는것이 아니겠어요. 제가 아버지를 찾으러 들로 나가니 아버지는 진거름을 져나르고있었어요. 아버지가 요즘 지력이 낮다고 끼니때마다 외우군 하던 그 논배미였어요. 전 아버지한테서 지게작시미를 빼앗으며 아버진 오늘이 무슨 날이란걸 잊었어요, 어머니가 아까부터 기다리고있는데 식구들 생각도 좀 해줘야지요 하고 섭섭한 어조로 말했어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들어갈념을 하지 않고 논두렁에 걸터앉아 이마에 내돋은 땀을 씻더니 목갈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시는것이였어요.
〈경이야, 난 어제 밤 한잠도 자지 못했구나. 우리 장군님께서 또다시 농촌을 찾으시였다는 보도를 듣고 어디 잠이 와야 말이지. 농민들이 농사를 잘 짓지 못한탓에 우리 장군님께서 험한 포전길을 걷게 하고있다는 죄책감에서 도저히 벗어날수가 없더구나. 그리고도 장군님과 한식솔이라고 곧잘 외우고있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 진정으로 장군님과 한식솔이라면 그 한식솔의 가장과 같으신 우리 장군님께서 제일 심려하시는 농사문제를 한몸 다 바쳐 하루빨리 풀어드려야 할게 아니냐.…〉아버지의 말씀은 한순간에 저의 심장을 꽉 틀어잡고 세차게 흔들어주었어요. 전 그때에야 아버지, 어머니가 왜 그토록 농사일에 심혈을 기울이며 한생을 다 바쳐가는가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되였고 왜 오빠가 제대되면 고향으로 돌아와 곡식을 가꾸겠다고 했는지 그 깊은 마음도 알게 되였어요. 아직은 이런 훌륭한 가정의 한식솔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얼굴까지 붉혔어요. 이때부터 농사일은 저의 가슴속에 이 세상 제일 크고 소중한 일로, 사회를 위해 가장 유익하게 이바지할수 있는 일로 굳건히 자리잡게 되였던거예요.》
이야기를 끝낸 경이의 눈에서는 샘물방울같은것이 반짝이고있었다.
《누이, 어쩌면…》
정옥은 격해진 마음으로 경이의 두손을 보물처럼 꼭 감싸쥐였다.
(내 이젠 다 알았어. 누이의 그 크지 않은 몸에서 솟구쳐오르는 억센 힘과 뜨거운 열정이 어디에 뿌리를 둔것인가를…)
정옥은 그날 밤 자정이 넘도록 잠 못들고 뒤치락거리기만 했다. 얼마나 훌륭한 집의 한식솔로 자기가 살고있는가 하는 생각 아니, 아직은 그렇게 살지 못하고있다는 생각으로 속이 서운해났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든 그는 갑자기 솨― 하고 울리는 비소리에 이내 눈을 떴다. 창문을 여니 뜻하지 않은 비가 내리고있었다. 그렇지만 아침식사를 끝내기 바쁘게 경이와 함께 안산골로 향했다.
비가 내린다고 하여 풀베기를 중단할수 없었다.
정옥은 비옷 앞자락을 꼭 졸라매고 걸싸게 낫질을 해나갔다. 비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잡관목들과 갖가지 풀들이 연방 쓰러지며 품에 안긴다.
그때마다 얼굴이 선득선득해났지만 이를 악물고 그것들을 두무릎으로 꾹꾹 눌러 큼직큼직한 단을 묶어나갔다.
비는 점점 더 억수로 쏟아지고 곁들어 바람까지 휘갈개쳤다. 비옷을 썼다고는 하지만 정옥의 몸은 이미 물참봉이 되고말았다. 일부 단위들에서는 철수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산판을 떠나는 전투원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형님― 힘들지 않아요?―》
경이가 정옥을 향해 손나팔을 하고 소리쳤다.
《일없―어어―》
《춥지―않아요?―》
《춥지도―않아―》
되려 정옥이쪽에서 새힘 솟는 소리를 웨쳐보낸다.
《누이―우리 노래를 부르자요.― 내가 선창을 뗄게 따라해―》
정옥은 힘을 가다듬으며 노래를 불렀다.
정옥이가 부르는 노래는 어느새 합창으로 변하여 온 산판에 울려퍼졌다.
비는 저녁녘에야 멎었다. 하늘은 씻은듯이 개이고 산봉우리며 골짜기들은 유난히도 청신하고 수려해보였다. 정옥은 경이와 함께 번쩍이는 풀단들을 뜨락또르길까지 날라내렸다. 일을 끝낸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나란히 서서 땀과 비물로 뒤범벅이 된 머리칼을 손빗질해넘기며 서산에 타오르는 감빛노을을 감개무량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문득 경쾌한 발동소리와 함께 뜨락또르가 나타났다. 운전수의 곁에는 분조장이 그리고 적재함에는 작업반에 유기질복합비료생산기지를 성과적으로 꾸린 경수가 앉아있었다. 뜨락또르가 멎기 바쁘게 분조장이 먼저 뛰여내렸다. 그는 정옥과 경이의 손을 부여잡고 감기에 걸리지 않았는가부터 물었다. 둘은 마주보며 활짝 웃어보였다. 이어 분조장이 그들이 벤 풀을 계량하기 시작했다. 불쑥 분조장의 큰 주먹이 머리우로 솟구쳐올랐다.
《정옥동무가 드디여 정량을 초과완수했소.》
《야, 우리 형님이 제일이야!》
경이는 어느새 춤추듯 뛰여다니며 주변에서 산꽃 한묶음을 꺾어왔다. 그것을 분조장이 정옥의 가슴에 안겨주었다.
《정옥동무, 난 꼭 이렇게 되리라고 믿었소.》
경수도 무척 사랑스러운 눈길을 정옥이에게 주며 한쪽눈을 끔뻑해보인다. 그 눈길은 마치 《당신 이제야 우리 집의 한식솔답구만.》하고 칭찬하는듯싶었다. 분조장이 팔을 걷고나섰다.
《자, 우리가 풀을 실을 동안 형님과 시누이는 저기 앉아 쉬라구요.》
그러나 경이와 정옥이도 다같이 달라붙어 풀단들을 실었다. 얼마후 여러 분조원들이 벤 풀도 적재함이 넘쳐나도록 실은 뜨락또르가 발동소리 드높이 안산골을 빠져나갔다. 정옥은 그지없이 개운한 마음으로 경이와 함께 퇴근길에 올랐다.
그들이 안산골어귀에 다달았을 때 새로 쓴 속보앞에 많은 사람들이 몰켜서서 웅성거리고있었다.
《아니, 최정옥이란 녀자가 대체 누구요? 신입농장원이 벌써… 이건 정말 쉽지 않은 기적이로군!》
《거 있잖소, 실농군집며느리! 읍에서 리발사로 일하다가 올봄에 시집왔는데 1년도 못되여 이렇게 혁신자로 속보에 나는걸 보면 녀자가 보통 아닌것 같쉐다.》
《옳아요. 저렇게 농장일을 잘하는걸 보니 실농군집 한식솔이 분명해요. 이제는 진짜 우리 집 한식솔이 되였다고 그 집에선 밤새껏 웃음꽃이 필거예요.》
순간 정옥은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형언할수 없는 크나큰 격정이 가슴터질듯이 부풀어올랐다.
우리 집 한식솔!
그는 입속말로 소중히 불러보았다.
이것은 단순히 한가정의 사랑스러운 한 성원이라는 말이 아니였다. 세대를 이어 이 땅에 깨끗한 량심과 고귀한 땀방울을 묻으며 쌀로써 사회주의조국을 받들어가는 우리 집―실농군집의 당당한 한식솔이라는 말이며 우리 인민의 친근한 어버이이신 경애하는 원수님의 한식솔이라는 고귀한 칭호가 아니겠는가. 그의 가슴속에서는 형언할수 없는 세찬 격랑이 일어번지고있었다.
이때 누군가가 정옥의 손을 꼭 쥐였다. 경이였다. 그의 눈은 축하의 뜻을 함뿍 담고 밝게 웃고있었다.
(누이, 난 아직 멀었어. 달리고 또 달려야 해.)
시누이를 마주보는 정옥의 마음속에는 이런 웨침이 뜨겁게 울리고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