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102(2013)년 제1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리 광 철

 

꽃잎같은 하얀 눈송이들이 건물들의 지붕이며 도로며 산과 강, 주변의 포전들에 소복소복 내려앉았다. 그래서인지 12월을 가까이하고있는 북방의 초겨울치고는 별로 포근한감을 주었다.

김정순은 소담스런 눈송이들이 아롱져내리는 창가에서 눈길을 떼며 황아바이를 바라보았다.

책상을 마주한 나이 쉰을 훨씬 넘긴 황성국아바이는 가끔 금테안경을 추스르며 주런이 펴놓은 문서들을 들여다보고있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종이장 번지는 소리와 전자수산기를 다독이는 소리만이 침묵이 무겁게 드리운 조용한 방안에 울려퍼졌다.

정순은 지금 황성국아바이에게서 자재창고장사업을 인계받고있는중이였다.

깍지낀 두손을 책상우에 올려놓고 대조문건이 넘어오기를 묵묵히 기다리던 정순은 슬며시 아바이를 건너다보았다. 희슥희슥한 머리를 약간 숙일사 하고 앉아 흘러내리는 안경을 추슬러올리며 그 무엇인가를 잡아내려는듯 두툼한 문서장에 온넋을 기울이고있는 아바이이다. 그런 아바이를 보니 별로 측은해보이며 이상야릇한 생각이 든다.

아바이는 창고장사업을 인계하고 계획사업을 보는 부서에 가게 되였다.

많은 사람들이 아바이의 조동문제를 두고 좋게 말하고있었으나 일부 사람들은 쉬쉬하며 뒤말들을 내돌렸다. 성격이 꼬장꼬장한 사람이여서 틀렸다느니, 미운 돌 발에 채운다고 마가을 락엽신세가 되였다는것이다.

하여튼 공장의 종합자재창고에서 30년나마 구두쇠, 막대기로 소문났던 황성국아바이의 조동은 많은 사람들의 화제거리가 되였다.

창고장직무가 그리 대단한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살아가는데서 절실히 필요하고 요구되는 물자들을 직접 다루는것으로 하여 뭇사람들의 인기를 끄는 직업인듯싶다.

그런데 김정순은 지금 전혀 예상치 않았던 (초급당비서방에서 창고장으로 임명받을 땐 정말 놀랐었다.) 창고장후임으로 점잖게 앉아있는것이다.

과안의 많은 사람들이 눈들을 커다랗게 뜨고 처녀창고장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그럴수록 정순은 새 직무에 대한 희열보다도 자기자신만이 알고있는 사생활의 울타리를 누가 넘겨다볼세라 위구심을 느꼈다.

그것이 두렵기도 하였다.

중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도의 어느 한 대학에서 통신으로 공부할 때 정순은 한 제대군인대학생을 알게 되였다. 대학에서 수재로 이름날리던 정순은 총대를 펜으로 바꿔쥔 그 청년의 뜨거운 열정에 끌려 마침내 그의 학습을 도와주는 방조자가 되였다. 실험실과 강의실들에 그들의 자욱이 깊이 새겨지게 되였다.

정순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공장자재과에 배치를 받은지 며칠이 지난 어느날 정순은 자재를 받으러 도에 올라가게 되였다.

도에 올라간 정순은 거리에서 우연히 그 청년과 반갑게 상봉하였다. 인사말이 오고간 후에 그 청년은 이렇게 물었다.

《동무네 과장 말이요, 사람이 어떻소?》

정순은 그에게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풍채좋고 살결이 흰편인 나이가 지긋한 김장혁과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 지내보지 못해서 별로… 그런데 왜 그러세요? 혹시 아는 사이인가요?》

《나야 뭐, 우리 아버님과 막역한 사이여서…》

정순은 그때 그의 말에 방긋이 웃고말았다.

퍽 후날에 가서야 도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인 그 동무의 아버지와 장혁과장은 돌격대생활을 함께 한 사이라는것과 자재예산문제로 내려왔던 그 동무의 아버지가 과장을 따로 만났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따로 만나 무슨 얘기가 오갔든지간에 어쨌든 그때부터 장혁과장은 정순이를 그전과는 다르게 각별히 대해주었다.

길거리에서 정순을 보면 그냥 스쳐지나지 않고 찾아서 함께 걷군 하였고 그럴 때마다 생활상이나 사업상애로들을 친절하게 물어주었으며 풀어주려고 마음썼다.

바람이 등을 약간만 밀어줘도 올리막길이 헐하다고 정순은 그후 인수원, 계산원, 통계원을 거쳐 오늘날엔 창고장이 된것이다.

의자를 밀어놓는 소리와 함께 다 대조한 문건철을 자기앞으로 밀어놓았을 때에야 정순은 생각에서 깨여나 원주필을 집어들었다.

이때 《수고합니다.》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후방부사람이 들어섰다.

그는 정순이와 시선이 마주치자 외투에 묻은 눈을 가만가만 털며 의미있는 눈짓을 했다.

《아바이, 아무리 바빠도 인사를 받아야지요.》

그가 너스레를 떨어서야 문서장에서 눈길을 뗀 아바이는 머리를 끄덕이는것으로 인사를 받았다.

《철판을 출고해야겠습니다.》

후방부사람은 별로 큰소리로 말했다.

《래일 와보게. 난 과장한테서 그런 지시를 받지 못했네.》

데면스러운 아바이의 말에 후방부사람은 느슨하게 웃음을 지으며 달라붙었다.

《그러지 말고 바빠서 그러는데 출고 좀 합시다.》

《정 바쁘면 래일 와보게.》

《차 이런, 아바이, 거 뭐 마지막날까지 그럽니까?》

무슨 말을 할듯 두툼한 입귀를 실룩거리던 아바이는 책상우에 널려진 서류들을 주섬주섬 거두기 시작하였다.

《1호창고 현품부터 인계받소.》

황아바이는 후방부사람을 지나치며 정순에게 무뚝뚝하게 이르고는 스적스적 나가버렸다.

아바이가 문을 닫고 나가자 방안은 대뜸 썰렁해보였다.

《아 아바이, 참 이건…》

두팔을 허공에 내저으며 아바이를 몇걸음 따라서던 후방부사람은 문이 닫김과 함께 그 자리에 무춤 서버렸다.

후방부사람은 쓰거운듯 입만 다시다가 씽 나가버렸다.

정순은 무겁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에서는 눈꽃이 그냥 날리고있었다.

(아바인 정말…)

구름이 무겁게 드리운 하늘가를 바라보느라니 황아바이와 첫인상을 익히게 되였던 지난날의 일이 더듬어졌다.

자재과에 배치받은지 얼마 안되였던 어느날 정순은 오래간만에 집을 다녀가는 출가한 언니에게서 딱한 부탁을 받게 되였다.

제대군관인 아저씨의 이름으로 새집을 배정받았는데 장판지와 도색감을 좀 해결해달라는것이였다.

정순은 그때까지만도 낯이 설었던 과장에게 사정이야기를 해서 큰마음을 먹고 써준 글쪽지를 받게 되였다.

그래서 날것 같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창고로 달려가 처음으로 아바이와 마주서게 되였다.

아바이는 정순이가 두손으로 받쳐 내미는 그것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더니 얼굴이 서서히 대리석처럼 굳어지며 건설중에 있는 공장합숙을 꾸리는데 필요한 계약량밖에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것이였다.

《아이 창고장동지, 과장동지두 깊이 생각던 끝에 써준건데 좀…》

이렇게 처녀의 자존심을 누르고 매달려보았으나 소귀에 경읽기였다.

한부서에서 일하면서도 처음으로 되는 부탁을 대하는 아바이의 태도는 그때 정순에게 몹시 불쾌한 인상을 새겨주었다.

그날 할수없이 빈손으로 돌아서게 된 정순은 섭섭해서 떠나는 언니를 바래주고 집에 들어와 온밤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때부터 정순은 옳은 처사라고 생각하면서도 황아바이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있었다.

경우가 이러하니 누가 아바이를 좋다고 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며 사무실을 나선 정순은 자재과청사앞에 ㄱ자로 길게 자리잡은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아바이가 들어간 1호창고의 둔중한 철문은 활짝 열려져있었다.

4층으로 넓은 당반을 층층 매놓은 창고안엔 덕대마다 물자들이 일매진 규모로 빼곡이 들어차있었다.

정순은 과에서 여적 일하면서도 이렇게 창고안에 들어와보기는(그것도 주인의 립장에서) 처음이였다.

새 직무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품종별 물자들의 수량을 확인하는 아바이의 뒤를 따라걸었다.

아바이는 자기가 대주는 수량을 정순이가 새 장부에 기입할 때마다 《세여봐라. 그래두 다시 확인을 해야 돼.》하고 분부하는것을 잊지 않았다.

아바이의 뒤를 따라 품종들을 재확인해나가던 정순은 아바이의 일솜씨에 입을 딱 벌렸다.

품종마다 꼭같은 명찰표가 두개씩 붙어있었던것이다.

《아바이, 꼭 이렇게 명찰표를 두개씩이나 붙여놔야 하나요? 과에서 출고전표가 나오면 그대로 내주면 되겠는데…》

그러나 황아바이는 이런 불만쯤에는 개의치도 않았다.

《그래두 그걸 붙여놓는게 실수가 없더라. 그게 경험이야. 혹시 착오가 생기거나 이런저런 리유로 꼭 써야 할 곳이 아닌 다른 곳에 내보낼수 있지.

출고량에서 초과되여나갈수 있거던.》

아바이의 물감장사같은 습관은 다소 리해되였지만 현존수량만 확인하면 그만인 정순에게는 그 꼭같은 명찰표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인계는 받아야 하니 어쩔수없이 피대실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명찰표들을 뒤집어보느라 눈을 쪼프리고 신경을 곱으로 써야 하였다. 수십종에 달하는 자재들의 수량을 이렇게 재확인하는데 옹근 하루해를 보냈다.

그날 저녁 퇴근길에 오른 정순은 우연히 장혁과장과 나란히 걷게 되였다.

장혁과장은 성숙한 친딸의 응석을 받듯 정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때로는 제 흥에 겨워 웃기도 하면서 예전처럼 허물없이 대해주었다.

정순은 다소 어려움도 잊고 자기가 자재창고장이 됐다니까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처음에는 아예 믿으려 하지 않더라는 말까지 하였다. 그러자 과장은 《그래, 어머니두 놀라긴 놀랐을거야.》 하며 껄껄 웃었다.

《그건 그렇고… 정순동무, 대학에서 함께 공부하던 그 제대군인동무한테서 소식이 오군 하오?》

《예, 종종…》 하고 말끝을 못 맺는 정순의 두볼에 빨갛게 홍조가 피여올랐다.

《동무두 이젠 무슨 마련을 봐야 하지 않을가?》

《아이참, 과장동지두…》

정순은 숫저운 소녀마냥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마음속에 웅크리고있는, 이제 곧 다가오고야말 그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 기다려지던 그때와는 다르게 탄력이 넘치는 온몸에 전류처럼 쩌릿이 와닿았다. 물론 과장의 굵다란 웃음소리가 싫지는 않았다.

다음날 날씨는 여전히 쾌청하였으나 때때로 차겁고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성국아바이보다 한발 앞서 출근한 정순은 사무실창문들을 활짝 열어놓고 방청소를 말끔히 해치웠다.

정순의 인사를 받으며 사무실에 들어선 황아바이의 낯색이 별로 좋아보이지 않아 정순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바이, 오늘 무슨 일이 있은게지요?》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고 다가앉은 아바이는 주머니에서 출고표들을 꺼내여 도장을 찍어나갔다.

《내 아침에 과장하구 좀 다툼이 있었네. 글쎄 기본생산에 쓰려고 들여온 국가자재인 철판을 출고하라는게 아니겠나. 그래 난 주지 못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좀 다투었네.》

정순은 고개를 갸웃하고 아바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때 문이 열리며 후방부사람이 찬기운을 몰고 뛰여들다싶이 들어섰다. 그는 시뜻하게 아바이를 일별하고는 정순에게 종이쪽지를 쑥 내밀었다. 자재과장이 쓴 철판을 출고해주라는 종이쪽지였다.

(이젠 밤낮이 바뀌였으니…) 하는 투가 그의 가벼운 행동에 그대로 나타났다.

정순은 얼른 아바이의 눈치를 살피고는 아바이에게 다가가 주저하며 종이쪽지를 주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정순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였다.

그러나 역시 구두쇠아바이였다.

무엇인가 깊이 생각던 끝에 종이쪽지를 후방부사람앞에 밀어놓았다.

《아니, 이건 뭡니까?》

후방부사람이 눈살을 꼿꼿이 세웠다. 어제부터 쌓인 감정이 송곳처럼 올려미는 모양이였다.

《아바이, 난 뭐 할일이 없어서 어제부터 창고에 다닌줄 아십니까? 아바이하고는 진짜 일해먹기 조련치 않구만요.》

후방부사람의 말에 아바이는 자리에서 움쭉 일어섰다.

《그러니 동문 날더러 어쩌라는건가, 엉?》

아바이의 날카로운 눈빛이 후방부사람의 얼굴을 파고들었다.

《몰라서 묻습니까?》

《안돼, 2미리철판 6천평방은 엄연히 기본생산에 쓰려고 들여온 국가자재야. 나도 또 누구도 제 마음대로 내줄 권리가 없소.》

《쿵.》하고 책상 울리는 소리가 팽팽해진 방안의 공기를 깨뜨리며 둔중하게 울렸다.

후방부사람은 박아세운듯 석고처럼 굳어져 움직일줄 몰랐다.

따분한 이 방의 싱갱이싸움은 예전처럼 승패가 결정된셈이다.

정순은 곁에서 속을 바재이며 까딱없이 앉아있었으나 심장만은 서서히 안정을 찾으며 고동치고있었다.

장혁과장이 들어선것은 바로 이때였다.

후방부사람에게 뭐라고 질책하는 그의 굵은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순은 고개를 쳐들었다.

분을 새기지 못한 후방부사람은 벌거우리 상기된 얼굴로 휭하니 밖으로 나가고말았다.

《아바이, 이거 정말 안됐습니다. 우리가 사업조직을 잘못하다나니 아바이를 마감날까지 욕보이누만요. 저 동무 탓할게 없습니다. 다 나때문에…》

과장이 돌아가자 아바이는 말없이 색바랜 모자를 벗겨쓰고 밖으로 나갔다.

빈방에 혼자 남게 된 정순은 어수선해지는 감정으로 책상우의 문서들을 둘러보았다.

(아바이는 지금 어쩌고있을가?…) 하는 생각은 정순을 그 자리에 그냥 앉아있지 못하게 하였다.

정순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솜옷이 걸린 벽앞으로 다가갔다.

아바이는 창고건물과 잇닿은 외중천기슭녘에 쭈그리고앉아 떵떵 무엇인가를 두드리고있었다.

(오죽 속이 상하면 저럴가?)

아바이의 등뒤로 조심조심 다가간 정순은 다시금 고개를 수그리였다.

아바이는 중망치를 힘겹게 멨다치며 양철판쪼박들을 수첩장만 하게 잘라내고있었다.

망치를 빗때렸는지 흰 붕대가 감긴 손가락에 빨간 피가 슴배여나오고있었다.

《왜 왔느냐? 추운데 들어가있지.》

아바이는 퍼그나 잘라낸 철판쪼각들을 하나하나 주어서 한곳에 모아놓았다.

정순은 대뜸 그것이 명찰표감이라는것을 알았다.

《이걸 건사했다가 자재들이 들어오면 쓰거라.》

일을 다 끝낸 아바이는 납작한 돌을 찾아서 장갑을 깔고앉았다. 고심의 빛을 찾아볼수 없다.

정순은 황아바이에게 무엇인가 위로의 말을 해주고싶었으나 전혀 다른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바이, 창고일이 정말 헐치 않겠어요.》

정순은 공구들을 철판쪼박무지옆에 모아놓고 아바이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 힘든거야 없지. 뜨거운 용해장에서 쇠를 녹이는데야 비하겠니? 하지만 이 일두 헐치는 않아. 정순아, 저기를 좀 보렴. 저기 저 구호말이다.

〈우리 장군님과 끝까지 뜻을 같이하자!〉

내겐 요즘 저 구호를 보면 볼수록 그 뜻이 새로와져서 생각이 많아진다.

자재창고라는것이 그 누가 선사해준 안락한 엄페호가 아니지. 저 한종한종엔 바로 저 구호의 사상이 맥박치고있어. 창고장 하면 누구나 쉽게 말하지, 물자를 손아귀에 쥐고있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그들중에는 국가창고를 맡고 그것을 개인매점처럼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들도 없질 않지.

우린 장군님의 뜻과 어긋나는 어두운 곳으로 국가의 귀한 재산을 빼돌릴 권한이 당초에 없다고 생각해야 돼. 그 귀한 자재에 선심이나 선의의 보자기를 씌우려 해선 안돼.

비법인줄 알면서도 지령이나 전표라고 나라의 재산을 망탕 흘려보낸다면 그런 허수아비가 또 어디 있겠나. 그래서 이 단순한 리치를 모르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싱거운 싸움을 하게 되는거야. 늘쌍 내가 이기니까 정말 싱거운 싸움이지, 허허허…》

아바이는 처음으로 시원하고 호방스럽게 웃었다.

언제봐야 과묵하고 말이 없던 사람! 그러나 누구나 쉬이 표현하는 곧은목이 아닌 응당 그래야 할 우리 시대 인간특유의 랑만이 넘치는 시원한 웃음이였다.

정순의 얼굴에도 맑은 웃음이 함뿍 어렸다. 온몸에 전류같은것이 쩌릿이 흘러들면서 가슴속엔 뜨거움이 꽉 들어차는것을 느꼈다.

《시작부터 그렇게 근심하는걸 보니 마음이 놓여. 자, 이젠 추워오는데 그만 들어가자구. 또 일을 봐야지.》

아바이는 자리를 일며 정순의 잔등을 두드려주었다. 아바이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며 정순은 그처럼 보기 싫던 명찰들을 가슴에 꼭 감싸안았다.

그것이 아바이의 마지막당부처럼 느껴져서 허리를 구부정하고 눈길우에 자욱을 찍어나가는 아바이를 점도록 바라보았다. 웃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비난을 받으면서도 원칙앞에서는 한치의 양보를 모르는 아바이의 청렴결백한 마음이 그를 무한히 감동시켰다.

퇴근녘에 정순은 과장방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저녁마감시간에 자기를 꼭 만나고 가라는 과장의 말이 떠올랐던것이다.

의문을 품고 들어선 그를 과장은 미더운 눈길로 맞아주었다.

《인계를 받았소? 그럼 이제부턴 창고장이라고 불러야겠구만, 허허.》

장혁과장은 정순의 손을 잡고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책상으로 다가가 빼람에서 종이쪽지를 꺼내놓았다.

《창고장동무, 난 래일부터 도에 출장을 가서 며칠 있겠는데 래일 이걸 출고해주. 인제야 한시름 덜게 됐군.》

《?》

종이쪽지를 받아들고 살펴보는 정순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운이 서서히 내비치였다.

《아니, 이건…》

《음, 그럴만 한 일이 있소.》하고 말하는 과장의 얼굴에는 대뜸 그늘이 비꼈다.

《후방부창고의 기와가 낡아서 말이 아니요. 그래서 좀 도와주자는거요. 우리도 앞으로 후방부신셀 지겠는데 외면할순 없지 않소.》

정순은 갑자기 차거운 물에 뛰여들었을 때와 같이 온몸이 오싹해졌다.

두어깨가 옥죄여들면서 숨쉬기가 가빠났다.

(그랬구나. 그래서 내가 창고장으로 필요했는가.…

성국아바이는 자리를 옮기고… 장혁과장은 지금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정순의 얼굴은 삽시에 달아올랐다.

《과장동지!》

정순은 이렇게 첫말을 떼여놓고 목이 꽉 메여 더 잇지 못하였다.

무엇인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항변같은것이 치밀어올라서는 그대로 눈물이 되여 책상우에 방울져 흘러내렸다.

(과장동지, 누구나 창고장이라는 직분을 가지고 체면이나 사리사욕에 빠져 원칙을 줴버리면 창고는 해서 뭘하고 그런 창고가 열백개 있다 한들 필요가 뭐예요. 그처럼 귀중한 재부가 줄줄 새여나가는 껍데기창고를 가지고 우리 장군님 그토록 념원하시는 강성국가건설을 무엇으로 어떻게 담보하겠나요. 오늘날 진정으로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애국의 한마음을 변함없이 간직하고 일하는 사람이 아닐가요?

성국아바이는 선군시대의 애국자라고 말할수 있어요. 당에서 믿고 맡겨준 귀중한 재산을 제 살점처럼 생각하고 아끼고 쪼개쓰려는 아바이의 정신세계는 얼마나 순결하고 아름답습니까.

원칙밖에 모르는 아바이의 성격을 다스린다고 정대를 대면 그것이야말로 조국을 받드는 기둥에 도끼를 내두르는것이 아니겠나요.)

이런 생각을 하던 정순은 흐느끼듯 숨을 톺으며 말을 이었다.

《용서하십시오, 과장동지, 전 과장동지의 지령이 처음이지만 받아들일수 없습니다. 무엇때문에 과장동지가 아바이를 내보내고 마음을 놓으며 무엇때문에 이 종이쪽지를 저의 손에 쥐여주시는지 리해할수 있습니다. 리해하기때문에 저는 접수할수 없습니다.》

정순은 종이쪽지를 책상우에 내려놓고 얼굴을 싸쥐며 밖으로 달려나왔다. 이때 문밖에서 딱 마주친것이 바로 그 청년의 아버지인 부위원장이였다.

《동무의 이름이 정순이라고 했더라?》

그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정순을 인차 알아보았다.

나의 사진을 보았으리라고 생각한 정순은 이 공교로운 첫 대면에 변변히 인사도 못하고 급히 층계를 내려섰다.

부위원장은 어깨를 들먹이며 멀어져가는 처녀의 뒤모습을 의아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한동안 괴로움에 싸여 모대기던 정순은 창고로 걸음을 내짚었다.

아바이는 여전히 장부를 펼쳐놓고 인계준비를 서두르고있었다.

이미 단호한 결심이 굳어진 정순은 망설이거나 주저함이 없이 사무실문을 열고 아바이곁으로 다가갔다.

《아바이, 전… 전 창고장을…》

《아니, 너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 있었니?》

아바이는 의문이 짙게 실린 눈으로 정순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건 더 묻지 마세요. 어쨌든 전 정말 인계받을 자격이 없어요.》

정순은 아바이의 얼굴을 외면하며 손수건으로 눈굽을 훔쳤다.

《정순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자 방금 과장방에서 도부위원장동지가 전화를 걸어왔댔다. 아마 과장에게서 무슨 일인지 알아본것 같구나. 우리가 일을 잘한다고 하더구나. 난 지금 마음이 놓인다. 너는 공부도 많이 한 대학졸업생이니 능력으로 말하면 얼마든지 해낼수 있다고 본다.

너는 여기서, 나는 다른 초소에서 서로가 보람있게 일하면 되지 않겠니.》

《그래두 안돼요. 어째서 아바이가 창고에서 물러나셔야 하나요. 전 못하겠어요. 아바이가 나가시면 전… 흑…》

정순은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꼈다.

이때 문이 열리며 초급당비서가 밝게 웃는 얼굴로 들어서더니 정순의 물결치듯 오르내리는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었다.

《아니, 이거 우리 창고장이 오늘 왜 이러나, 응?》

정순은 초급당비서를 일별하고는 눈굽을 훔쳤다.

《초급당비서동지, 아바이를 창고에서 내보내는건 잘된 일같지 않습니다. 전 정말…》

《정순아, 사실은…》

아바이는 정순에게 뭐라 말할듯 하더니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말았다.

그의 눈가에는 맑은것이 고여있었다.

초급당비서는 정순이와 마주서서 그루를 박아 조용조용 말을 했다.

《정순동무, 황성국동무가 당조직에 찾아와서 창고장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달라고 제기한건 오래전의 일이였소. 오늘날 이 거창한 변혁의 시대에 우리 장군님의 사랑이 어린 늘어나는 물자들에 대한 자신의 장악능력이 따라서지 못한다는거요.

교체문제는 이렇게 돼서 이루어진거요. 동무를 믿고 말이요. 동무도 국가적리익의 견지에서 솔직하게 말해보시오. 그래도 못하겠소?》

《!》

정순은 대답없이 한참이나 초급당비서와 황아바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황아바이가 보내주는 믿음의 눈길을 정순은 고맙게 감수하였다.

《초급당비서동지! 아바이!》

정순은 초급당비서의 넓은 가슴에 슬며시 얼굴을 묻었다.

아바이의 눈물고인 눈가에도 밝은 미소가 어리였다.

한동안이 흐른 뒤 그들은 어깨나란히 퇴근길에 올랐다.

동켠하늘에 솟아오른 쟁반같은 둥근달이 유난히 빛을 뿌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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