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101(2012)년 제11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황 병 철
1
대극장앞거리는 하루일을 마치고 퇴근길에 오른 사람들로 흥성이였다.
웃고떠들며 지나가는 청년들, 무엇을 생각하는지 고개를 숙인채 이따금 안경을 추스르며 묵묵히 걸음만 옮기는 사람, 대극장공원의자에 앉아 책을 보는 대학생, 누구를 기다리는지 초조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 처녀…
태남은 자기앞에 펼쳐진 이 모든 광경을 외면하고 저 멀리 강안도로쪽에만 눈길을 주었다. 조금전에 은심이가 뛰여간 길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일가?
그는 벌써 이 물음을 자신에게 몇번째나 하였는지 모른다.
문득 무엇인가 매끈매끈한감이 손에 미쳐왔다.
그는 눈길을 아래로 떨구었다. 극장표 2강이 손에 쥐여져있었다. 소대장이 준것이였다.
오늘 소대는 창전거리 8호동살림집 30층 내부미장을 전부 끝냈다. 소대장은 모두 수고들 했는데 오늘은 일찌기 들어가 푹 쉬라면서도 태남에게는 극장표 2장을 쥐여주었었다.
이 한장은…
남은 표 한장을 들고 영문을 몰라하는 태남에게 소대장은 은심을 가리키며 눈을 끔쩍였다.
《은심동무와 함께 가라는거요. 마침 오늘 그 동무네 공장에서도 휴식을 한다던데…》
소대장은 말을 마치기 바쁘게 무슨 바쁜 일이 있는지 인차 자리를 떴다.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후두둑 방망이질을 해댔다. 그러지 않아도 그는 오늘 은심이를 만나 자기의 속을 터놓을 결심이였다.《난 동무를 사랑하오.》라고… 그런데 일이 이렇게 저절로 척척 맞아떨어질줄이야. 그는 휴계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허, 그렇게 차려입으니 딴사람같군그래.》
《미남자지.》
곁에서 소대원들이 혀를 차며 하는 소리였다.
《야! 정말 멋진데요.》
소대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 봉철이까지 놀라운 눈길로 바라보며 감탄을 터뜨리는 바람에 태남은 《쪼고만게.》하고 그의 이마를 툭 튕겨주고는 도망치듯 밖으로 나오고말았다.
저녁이 되여오자 한낮의 더위는 약해지고 제법 선선한 바람이 대동강쪽에서 불어왔다.
《야! 벌써 30층을 올렸구만.》
《챠, 이 친구 며칠동안 출장갔다오더니 밤중이구만. 30층은 자네가 출장떠난 다음날인 한주일전에 다 올라갔단 말이야.》
가던 걸음을 멈추고 목을 뒤로 한껏 젖힌채 아득히 솟아오른 살림집건설장을 바라보며 하는 사람들의 감탄의 목소리가 태남의 가슴을 흐뭇하게 해주었다.
얼마후 눈앞에 은심이가 나타났다. 그가 늘 입고다니는 달린옷차림이였다.
보는 사람들의 기분을 맑게 해주던 연한 하늘색갈의 옷이 용접불빛으로 하여 눈같이 하얗게 보였다.
그들은 어깨나란히 유보도에 들어섰다. 시원하면서도 비릿한 냄새가 바람결을 타고 실려왔다. 사람들이 많았다.
돌계단우에 올방자를 틀고앉아 낚시대를 드리우고있는 사람들, 그곁에서 호기심어린 눈으로 구경하는 사람들, 소곤소곤 속삭이는 청춘남녀들… 오고가는 사람들이 그들의 곁을 지나서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군 했다.
《정말 곱지?》하고 저들끼리 소곤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은심이를 두고 하는 말이였다. 태남은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쑥스러웠다. 처녀옆에서 걷는 자기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짝이 기운다는 소리로 들려왔다.
대극장앞마당 가로등아래에 이르자 태남은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숙인채 자기의 발끝만 내려다보고있는 은심의 단아한 모습이 태남의 가슴을 물결처럼 설레이게 했다.
쿵쿵… 가슴속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은심동무…》 더 말이 나가지 않았다. 의혹에 찬 처녀의 눈과 마주치자 더 당황해지기만 했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람. 병사 오태남, 제대군인답게 앞으롯!
태남은 허리를 폈다.
《은심동무, 난 동무가 마음에 드오. 동무만 반대없다면 난…》
《어머나…》
당황함과 놀라움, 환희가 처녀의 얼굴에 서로 엇갈려 지나갔다. 그것도 한순간, 그 모든것이 처녀의 얼굴에서 서서히 꺼져내렸다.
처녀가 입을 열었다, 건설장을 떠나서 여기로 오면서 처음으로 한 말이였다. 그런데… 그런 말이 튀여나올줄이야.
은심은 앞에 드리운 수건끝을 손가락에 감아쥐고는 강안도로쪽으로 뛰여갔다.
태남은 멀어져가는 처녀의 뒤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귀가에는 방금전에 처녀가 남겨놓고간 말이 공명을 일으켰다.
《전… 태남동지가 생각하는 그런 처녀가… 아니랍니다.》
그런 처녀가 아니다? 왜?
도무지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은심이야말로 온 소대가 입을 모아 자랑하는 처녀가 아닌가. 일솜씨에서나 마음씨에서나 나무랄데 없는 처녀라고 모두가 칭찬하는 처녀인데…
그에게는 문득 은심이를 처음 알게 된 때로부터 지난 두달동안에 있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날도 첫 일과는 하루작업분담으로부터 시작되였다.…
《골조타입조에선 오늘까지 6층타입을 끝낸다고 하오. 그러니 우린 어떻게 하나 3층내부미장을 무조건 끝내야 하오. 그리구… 어서 들어오우.》
작업분담을 마친 소대장이 불쑥 휴계실문을 열고 밖에 대고 한 말이였다.
소대원들의 얼굴마다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누구야?
글쎄, 누가 새로 오는 모양이지 하는 기색들이였다. 문가에 그 주인공이 나타났다.
진곤색작업복을 입고 요즘 처녀들속에서 류행되는 화려한 머리수건으로 머리를 맵시나게 감싼 처녀가 손에 안전모를 들고 주저하며 방안에 들어섰다.
《인사들 하오. 기초식품공장에서 일하는 동문데 오늘부터 우리 소대에서 함께 일하게 되오. 지원자인것만큼 공장에서 낮일을 할 땐 저녁에 나오고 밤일을 할 땐 낮에 나오게 되오.》
소대장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방안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많이 배워주세요.》
고개를 쳐든 처녀를 보는 순간 모두가 놀랐다.
한주일전부터 작업장에 와서 누구에게라없이 이가 시릴만큼 시원한 옥류약수를 따라주던 처녀였던것이다.
《야! 은심동무.》
누군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처녀에게 다가갔다. 봉철이였다. 처녀가 이곳에 올 때마다 모래도 날라주고 물도 떠다주며 봉철이가 하는 일을 도와주더니 어느새 무랍없는 사이가 된것 같았다.
《많이 도와줘요.》
처녀가 박속같은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지었다.
《아, 그럼요. 나만 믿으라요.》
봉철이가 뻐기듯 배를 쑥 내밀며 장담하는통에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다. 태남은 그들처럼 웃을수가 없었다.
은심이, 어딘가 퍽 귀에 익은 이름이였다.
어디서 들었던가.
아무리 생각을 굴려야 떠오르지 않았다.
《태남동문 오늘부터 이 은심동무와 한조가 되여 미장을 해야겠소.》
소대장이 처녀를 가리키며 한 말이였다.
태남은 얼떠름해졌다.
나와 한조?
《은심동문 옆방에 가서 천천히 작업준비나 하오.》
소대장은 은심을 옆방으로 안내했다.
《태남동문 좋겠구만.》
《처녀앞에서 얼굴도 들지 못하는 사람이니 이번 기회에 때벗이를 하라고 우정 붙여놓았구만.》
소대원들이 시물시물 웃으며 하는 말이였다.
태남은 고개를 수그리고말았다. 그런 말이 나올만도 했다.
며칠전인가 웬 처녀가 매 소대원들에게 물을 권하고 자리를 뜬 뒤였다. 봉철이가 시쁘둥한 기색을 짓고 태남에게 다가왔다.
《좀 웃기두 하고 말도 하라요. 태남동지가 너무도 뚝해있으니까 그 처녀두 멋적은지 여기로는 오려고 하지 않아요. 처녀들에게 관심을 좀 두란 말이예요.》
봉철이가 처녀가 나간 문쪽을 바라보며 볼이 부어 한 말이였다.
봉철의 말처럼 나에게 오려고 하지 않은 처녀와 이젠 한조가 되였다?
어쨌든 싫지는 않았다. 태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밖을 나서던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가만, 그런데 처녀가 어떻게 꼭 나와 한조가 되였는가, 소대장의 선심인가?
그는 자기의 생각을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흘리고말았다.
《제가 왜 꼭… 그 동무와 한조가 돼야 합니까?》
《허, 저 친구 좋으면 그저 좋다구 할것이지.》
《그러게 복속에서 복을 모른다니.》
옆에서들 이죽거리는 소리였다. 한바탕 떠들썩하던 방안의 분위기는 소대장의 다음말로 하여 단번에 물뿌린듯 조용해지고말았다.
《그건 은심동무한테 물어보오. 자긴 꼭 소대에서 기능이 제일 높은 태남동무와 한조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떼질하는데 난들 어쩌겠소.》
하, 태남은 입을 딱 벌리고말았다.
지난주에 현장에 나와 소대원들에게 물을 권하면서도 나에겐 오지도 않던 처녀자신이 나와 한조가 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믿어지지부터 않았다.
봉철이 말처럼 우리 작업장에 와서도 나를 피하기만 하던 처녀가 무엇때문에 꼭 나와 한조가 되게 해달라고 제기한단 말인가. 혹시…
태남은 자기가 잘못 듣지 않았는가 하여 소대원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놀라운 빛이 어린 눈들이 자기를 바라보고있다.
그러니 사실이구나.
《저 처녀가 보통이 아닌데.》 태남은 그 누군가의 말을 들으며 문밖을 나섰다.
현장에서는 처녀가 어느새 통에 모래며 세멘트를 넣고 혼합하고있었다. 태남은 미장작업준비를 했다. 벽면에 어느 두께만큼 미장할것인가를 가늠해보기도 하고 가끔 가다 삐여져나온 돌(골조타입때 휘틀짬으로 새여나와 굳어진 혼합물속의 돌)을 망치로 까기도 했다.
미장칼과 미장판을 들고 돌아선 태남은 저도 모르게 이마살을 찡그렸다. 처녀가 아직도 혼합물을 이기느라 삽질을 하고있었다. 그가 쥔 삽의 날이 통안의 혼합물속에 묻혀 옴지락거리고있었다.
여느때라면 이미 혼합물이 준비되여 내가 미장판을 내밀기를 기다리고있었으련만.
태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미장조들에선 벌써 미장이 한창이고있었다.
태남은 처녀의 삽을 툭 나꿔챘다. 얼결에 삽을 빼앗긴 처녀가 태남을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는 처녀의 눈길을 못 본척 하고 돌아서서는 솜씨있게 삽질을 해댔다.
혼합물이 와락와락 뒤번져졌다. 처음엔 바람이 불면 날라갈것 같이 푸실푸실하던 혼합물이 잘 이겨져서 어느새 찰떡같이 깝진깝진해졌다.
《어머나!》
이마에 송골송골 내배인 땀을 장갑을 낀 손등으로 뻑 문대면서 허리를 펴던 태남은 감동에 젖은 처녀의 눈과 마주쳤다. 순간 처녀는 언제 그랬던가싶게 새침한 기색을 짓고 눈을 내리깔았다.
처녀들이란 참, 금방 감탄하는듯 하다가도 또 어느새 새침해지고…
《혼합물!》
그는 미장판을 내밀었다. 혼합물이 담겨졌다. 한칼에 발라버릴 량이였다. 단번에 쭉 밀고나서 또다시 미장판을 내밀었다. 또 그렇게 담겨졌다. 그는 단번에 발라버리고나서 미장판을 내밀며 《좀더 많이.》하고 구령치듯 했다. 속이 타들었다. 다른 조들에선 벌써 벽면미장을 절반나마 제끼고있었다.
미장판에 혼합물이 담겨졌다. 또 그 본새였다. 그는 처녀에게 피뜩 눈길을 주었다. 처녀의 깔끔한 눈길이 마주보고있었다.
《뭘 어떻게 하라는거예요?》하고 묻는듯 한 눈길이였다.
태남은 미장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어쩔바를 몰라하는 처녀에게서 삽을 받아들고 다시금 혼합물을 와락와락 뒤집고나서 한삽을 푹 떴다.
《초벌미장땐 이렇게 떠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바닥에 놓여있는 나무미장칼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을 계속했다.
《저 나무칼을 쥐고 마감할 땐 동무가 주던것처럼 주면 됩니다.》
한숨이 절로 나갔다.
이건 유치원아이들한테나 할 이런 강의를 하면서 언제 미장을 다 한단 말인가.
《알겠어요.》
삽을 받아든 처녀의 대답은 차겁게 들렸다. 태남에게는 그의 대답이 아리숭했다.
자기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소린지, 반발심인지 종잡을수가 없었다.
침묵, 지루한 침묵속에 작업이 진행되였다. 마치도 침묵을 지키기로 서로 약속하기라도 한듯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느덧 벽체미장이 다 끝나고 천정미장을 할 차례였다. 벽체미장과 달리 천정미장은 발판우에 올라서서 하는 작업인것만큼 미장공과 조력공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이제는 조력공이 혼합물을 삽으로 떠서 미장공에게 날렵하게 던져야 했다. 솜씨있는 조력공들은 미장공에게 깝진깝진한 혼합물을 삽날우에서 한번 뒤번진 다음 재치있게 올려던지군 했다. 그러면 미장공들은 그것을 미장판으로 받아서 미장을 했다.
미장공과 조력공사이에 호흡을 같이하고 마음이 하나로 되게 하는 공정이라고 할가.
어떤 사람들은 그 작업모습을 홀린듯이 바라보다가 하나의 예술이라고까지 감탄했었다.
태남은 미장판을 내밀었다.
처녀는 삽으로 혼합물을 떠서는 머밋거리기만 했다.
손에 쥔 삽을 내려다보다가는 우를 올려다보고…
자기가 꽤 올려던질수 있을가 하고 바재이는것 같았다.
《일없습니다, 겁을 먹지 말고 침착하게 하면 됩니다.》
태남은 일부러 얼굴에 웃음을 짓기까지 했다. 그의 긴장성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헌데, 이거라구야. 처녀의 다음말은 태남을 아연하게 했다.
《받을수 있겠어요?》
누굴 보구 하는 소리야, 날 보구?
어처구니가 없었다. 처녀는 지금 자기자신이 아닌 이 오태남을 걱정하고있지 않는가.
군사복무시절에 수많은 사회주의대건설전투에 참가한 이 미장공을…
이런 경우를 가리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른다고 하는가.
《동무걱정이나 하… 이쿠…》
태남은 손에 들고있던 미장판을 떨구고말았다. 혼합물이 눈언저리며 입술에까지 날아와붙었던것이다. 입안에선 모래알이 씹히기까지 했다. 작업복은 더 말이 아니였다.
《에익…》 저도 모르게 튀여나온 소리였다.
아차, 태남은 입술을 깨물었다. 금방 입밖으로 튀여나오려던 말마디들이 입안에서 맹렬하게 발버둥치는듯 하더니 스르르 봄눈녹듯 잦아들고말았다. 태남을 바라보던 처녀의 눈가에 당황한 빛이 어리였다. 태남의 얼굴은 숯불처럼 달아올랐다.
그래도 이 건설장에 스스로 달려나온 처녀가 아닌가. 처음 해보는 일이 그렇지. 그것도 리해 못해.
《무슨 일이예요? 태남동진 왜 그렇게 됐어요?》
어느새 방에 들어선 봉철이가 호두알만큼 커진 눈으로 태남을 바라보며 한 말이였다.
태남은 그를 마주보기만 했다.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때문에…》
처녀는 얼굴에 울상을 짓고 어쩔바를 몰라했다. 아마도 일이 이렇게까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였다. 그제야 영문을 깨달았는지 봉철이가 배를 그러쥐고 웃어댔다. 태남이도 웃지 않을수가 없었다.
《일없어요. 일하다가 그럴수도 있지요 뭐. 태남동지, 안그래요?》
태남은 봉철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그제야 은심이도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태남은 그들의 모습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언제봐야 은심인 봉철에게 친절했다. 그와는 주고받는 이야기도 자연스러웠고 때로는 온 작업장이 떠나가게 서로 웃기도 했다.
나하고는 왜 그렇게 되지 않는지, 하긴 소대원들 말처럼 처녀에게 너무도 무뚝뚝하니 그럴수밖에…
태남은 웃옷을 벗었다. 옷을 펴들고 혼합물을 털어버리려던 그의 손이 굳어졌다. 그는 옷을 조심히 싸들고 혼합물통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옷을 펴서는 손으로 하나하나 혼합물을 털어냈다.
《고까짓게 얼마나 되겠다고 그래요.》
등뒤에서 들려오는 은심의 조심스런 목소리였다.
은심이의 말에 봉철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 많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 한삽의 혼합물이 모여서 우리가 건설하는 8호동 살림집이 되구 이 창전거리살림집들이 일떠서거던요.》
태남은 귀를 기울였다.
이 한삽의 혼합물이 모여 창전거리살림집이 된단 말이지.
봉철의 말이 옳다. 우리 건설자들은 누구나 그렇게 일을 한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머나먼 전선시찰의 길에서 쌓이신 피로를 푸실 사이도 없이 우리 살림집건설장을 찾아주시였다.
그날의 그 영광을 가슴에 안고사는 우리 건설자들이다.
《어때요, 우리 태남동지가?》
은심에게 뻐기듯 하는 봉철의 말엔 태남이도 얼굴을 붉히지 않을수가 없았다.
태남은 등뒤로 그 누군가의 눈길을 느꼈다. 그것은 은심의 감동에 젖은 눈길이였다. 어쩐지 쑥스러웠다. 마치도 처녀앞에서 자기를 돋보이려고 한것 같은감이 들었다.
《봉철이, 뭘해? 작업준비!》
태남은 이 난처한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소리쳤다.
《예?! 예.》
봉철이가 화닥닥 놀라 방에서 뛰여나갔다. 그러면서도 은심에게 한쪽눈을 끔쩍이는것을 잊지 않았다. 태남은 옷을 말아서 구석에 놓아두었다. 아무래도 빨아야 할 옷이므로 일이 끝난 후에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저… 이걸…》
태남은 고개를 돌렸다. 처녀가 고개를 숙인채 눈같이 하얀 수건을 들고 서있었다.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태남은 부러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그날 처녀는 매번 혼합물을 퍼들고 발판아래까지 바투 다가가서 떠주는수밖에 없었다. 한번 혼합물을 떠주고 처녀가 다시 통으로 가기도 전에 태남은 빈 미장판을 들고 기다리군 했다. 처녀의 숨가쁜 소리가 태남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의 얼굴은 익은 꽈리알같이 빨갛게 상기되여있었다. 작업은 퍼그나 시간이 지나서야 끝나게 되였다.
퇴근차림을 하고 작업복을 놓아두었던 곳에 간 태남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줄 몰랐다. 아무리 봐야 있어야 할 옷이 없었다. 혹시 은심이가?
2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하여 휴계실에 들어선 그는 자기의 옷장문을 열다가 주춤했다. 차곡차곡 정히 개여져있는 옷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적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옷을 펼쳐들었다. 작업복이였다. 전날 혼합물로 매닥질되여 구석에 놓아두었던 그 옷이였다. 코허리가 찡해났다.
어제 저녁 이곳에서 일을 마치고 곧장 공장으로 갔을 처녀가 언제 이 옷을 빨아서 다림질까지 할수 있었을가.
처녀의 손길이 미친 옷이 잔잔하던 그의 가슴속에 알지 못할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은심이를 찾아 문밖을 나섰다. 작업장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은심의 모습은 찾을수가 없었다.
(이제 오겠지. 그가 오기 전에 작업준비를 다 해놓자.)
태남은 혼합물을 날라다가 물을 붓고 잽싸게 삽을 놀려댔다. 어느덧 통안에 혼합물이 무드기 쌓였다. 새로 혼합할 모래와 세멘트는 물론이고 물도 떠다놓았다. 더 손댈것이 없는가 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더는 할일이 없었다. 이만 하면 은심의 일감을 덜어준셈이다. 이제 은심이가 오면 혼합물을 떠주기만 하면 된다.
자박자박, 발자국소리가 났다. 은심이가 오는것 같았다.
태남은 아무 일도 없은듯 문을 등지고 돌아서서 벽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방안에 들어서서 눈앞에 펼쳐진것을 보고는 어떻게 할가? 놀라겠지. 아마 《어마나, 어느새 벌써… 미안해요.》하고 말할지도 몰라.
태남에게는 머루알같은 처녀의 눈에 담겨질 놀라움과 기쁨이, 량쪽볼에 패여져들어간 보조개 띤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발자국소리가 문앞에서 멎어섰다. 기다리던 은심이가 온것이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던 태남은 굳어지고말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허거픈 웃음이 절로 나갔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은심이가 아닌 봉철이였던것이다. 봉철의 인상이 태남의 눈길을 끌었다. 전에없이 시무룩한 기색이였다.
《왜 그래? 아침부터…》
《은심동문…》
《무슨 일이야? 말을 해야 알지.》
태남은 봉철의 어깨를 잡아 자기쪽으로 홱 나꿔챘다. 은심이에게 일이 생긴게 분명했다.
《저기…》
태남은 영문도 모른채 봉철이가 가리키는 베란다로 나갔다.
거리가 좁다하게 사람들의 물결이 쉴새없이 흐르는 저기 옥류교며 창전거리… 출근길에 오른 사람들이다. 모래를 가득 싣고 건설장에 들어서는 대형화물자동차들, 량껏 팔을 빼드는 기중기차들…
《뭘 보라는거야?》
태남은 봉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 저기요.…》
봉철의 손길을 따라 아래로 눈길을 주던 태남은 굳어졌다. 산처럼 쌓인 모래더미옆에서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모래를 치고있는 녀인, 그가 바로 은심이였던것이다.
《경비원아바이가 그러는데 은심동무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여기에 왔대요. 그러니 공장에서 일을 끝내기가 바쁘게 온게 아니겠어요. 헌데 모래는 왜 칠가요? 그것도 채를 멀찍이 두고 삽질을 하는게 좀 별나지 않아요. 채를 모래무지앞에 바싹 대고 치면 퍽 헐하겠는데…》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날 저녁 늦게 봉철이와 함께 건설장을 나서던 태남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속보판앞에 있는 대낮같이 밝은 야외 등 아래서 웬 녀인과 남자가 서로 다툼질을 하고있었던것이다. 아니, 다툼질이라기보다는 녀인은 무엇인가 사정을 하고있었고 남자는 난 모른다는듯이 손을 홰홰 내저으며 그를 피해가려고만 했다. 남자는 태남이네도 잘 알고있는 려단직관원이였다. 그런데 저 녀인은?…
그들에게 다가가던 태남은 그 자리에 주춤했다. 그는 자기가 잘못 보지 않았는가 하여 눈을 부비기까지 했다.
《글쎄 그건 그런게 아닙니다. 제발 좀 지워주세요.》하며 직관원의 팔을 붙잡고 안타까이 사정하는 녀인은 다름아닌 은심이였던것이다.
《동무, 이건 내 혼자 생각하고 하는게 아니란 말이요.》
직관원은 말을 끝내기가 바쁘게 어느새 처녀를 피해 달아나듯 했다.
《직관원동지!》
안타까움에 젖은 은심의 목소리가 태남의 귀가에 돌처럼 날아와박혔다.
직관원보고는 왜 저럴가.
도무지 영문을 알수가 없었다. 생각같아선 당장에 그에게 가서 묻고싶었다. 그의 안타까운 고충을 풀어주고싶었다.
《데거!》
처녀가 뛰여간쪽을 정신없이 바라보고있던 태남은 곁에서 울리는 봉철의 감탄에 고개를 돌렸다.
《왜 그…》
말을 맺을수가 없었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머리에 이고 땀을 씻는 처녀의 모습, 그는 분명 은심이였다. 그가 입고있는 곤청색바탕에 가로세로 건너간 격자무늬옷까지도 실물 그대로였다.
《이른새벽 남먼저 건설장에 달려나와 많은 모래를 쳐서 미장작업을 보장한 송은심동무를 소리높이 자랑한다.》
《건설장의 자랑》이라는 제목아래 속보에 씌여진 글이였다. 이제는 리해가 갔다. 은심이가 왜 직관원의 팔을 붙잡고 그리도 안타까이 사정을 했는지.
속보에 씌여진 내용은 태남이도 잘 아는 사실이였다. 항상 자기보다 먼저 건설장에 나와서는 모래더미옆에서 모래를 치는 은심을 그는 한두번만 보지 않았었다. 공장에서 밤일을 하고 또 건설장으로 나와 일한다는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감동이 큰것만큼 걱정도 없지 않았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계속 그렇게 일하다가 쓰러지면 어쩌랴 하는 생각때문이였다.
요즘 은심의 조력일이 확실히 달라졌다. 이전처럼 혼합물삽을 놓고 바재이거나 혼합물을 휘뿌리는 일은 언제 있었던가싶을 정도였다.
속보에 씌여진 글을 다시금 읽던 태남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눈길을 멈추었다.
송은심, 분명 귀에 익은 이름이였다.
어디서 들었던가, 어디서… 아.
태남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언젠가 아침 일찌기 출근하기 위해 집문을 나서려던 때였다.
《얘 태남아, 오늘 저녁 6시에 지하철도 승리역앞에 잊지 말고 나와야 한다. 옷차람이랑 깨끗이 하구 말이다.》
아들을 바래주던 어머니가 한 말이였다.
《거긴 왜요?》
《왜라니? 내 어제 저녁 말하지 않았느냐. 처녀를 봐야 한다구 말이다. 처녀가 인물곱구 마음씨 또한 비단같다구 온 공장에 칭찬이 자자하다더라. 이름은 송은심, 어떻냐. 나도 그 시간에 역에 나가마.》
뻐꾹뻐꾹, 집 벽시계에서 울리는 소리가 태남을 정신차리게 했다. 벽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있었다. 태남은 서둘렀다.
《어머니, 난 지금 시간이 없어요.》
《아니, 얘 태남아.…》
《어머니, 시간이 없어서 그러니 처녀네 집에 잘 말해주세요. 나가지 못한다고…》
태남은 문을 열고 나왔다. 오늘미장과제를 다 끝내려면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면서도 방금 어머니가 한 말이 귀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처럼 온 공장에 칭찬이 자자한 처녀라면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다만 그렇게 오다가다 한번 만나보고 일생을 약속하는 그런 일은 하고싶지 않았다.
모든것은 이번 창전거리건설을 다 끝낸 다음에…
이것은 제대배낭을 풀어놓고 건설에 참가하면서 그가 품은 결심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약속했다던 처녀가 혹시 은심동무가 아닐가. 아니아니, 세상에 같은 이름이 어디 한둘이라구.…
《내가 어제 아침 일찌기 출근하다가 모래를 치는 은심동무에게 물었어요. 왜 매일 모래를 치는가구요. 미장모래가 떨어질가봐 그러는가고 했더니 삽질이 서툴러서 련습중이라지 않겠어요. 자기때문에 태남동지 실적이 떨어진다면서…》
쿵, 무엇인가 가슴속 흉벽을 두드렸다.
나때문에, 난 그런것도 모르고…
태남은 처녀가 뛰여간쪽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태남동지, 어딜 가요?》하는 봉철의 다급한 소리도 멀어졌다. 산처럼 쌓인 모래더미옆에 은심이가 있었다. 모래를 치고있었다. 안깐힘을 쓰느라 할딱이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가슴이 뭉클했다. 그는 무작정 삽을 쥔 처녀의 손을 덥석 거머쥐였다.
《어마나!》
깜짝 놀란 은심이가 그 자리에 풀싹 주저앉았다.
《그만하십시오.》
태남은 처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태남동지두 속보를 보셨겠지요?》
태남은 말없이 고개만 끄떡였다.
《전 어떡하면 좋아요. 전 사실 그러자고 모래를 친게 아니였어요.》
태남은 처녀의 얼굴을 새삼스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뭘 그럽니까. 동무가 새벽마다 모래를 친거야 사실이 아닙니까.》
자기의 량심을 놓고 자책하고 고민하고있는 은심이가 돋보였다.
3
다음날 태남은 미장계획을 훨씬 넘쳐수행하였다. 자기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처녀가 어느 순간에 알아맞히고 치차처럼 보조를 맞춰주는지 태남은 곁눈 한번 팔새없이 성수가 나서 일을 했다. 저녁총화시간에는 소대장의 입이 귀밑까지 벌어졌다.
《이거 오늘 어떻게 된거요?》
가뜩이나 오금이 쏴서 가만있지 못하는 소대원들이 가만있을리 없었다.
《하, 미장칼에 날개가 돋혔지요.》
《그게 한마음 됐다는거요.》
《어마나!》
은심이가 얼굴을 싸쥐고 달아났다. 그것이 더욱 재미있는지 모두가 폭소를 터쳤다. 태남이도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태남의 작업실적은 나날이 높아졌다. 이제는 온 소대가 그것을 너무도 응당한것으로 여기게 되였다. 드디여 30층, 마감층미장을 마무리 하는 날이 왔다.
오늘은 온 소대가 여느때보다 더 바삐 움직였다. 한 벽체미장을 끝내기가 바쁘게 어느새 작업공구들이 다음방으로 옮겨졌다. 태남이도 한방미장을 끝내기가 바쁘게 공구들을 정리했다. 봉철이까지 와서 혼합물통이며 삽 등 공구들을 모아 다음방으로 옮겨갔다. 모래와 세멘트, 물 등을 다 날라다 혼합해놓도록 은심이가 오지 않았다.
《내가 갔다올게요.》
봉철이가 급히 방을 나섰다.
《아이쿠.》
문밖에서 봉철이가 아부재기를 치는 소리였다.
《어마나, 어디 다치지 않았어요?》
은심의 당황한 목소리가 태남의 귀가에 활촉처럼 날아들어왔다. 봉철이가 문밖을 나서다가 은심이와 부딪친것 같았다.
《하하.》
태남이가 급히 문밖을 나서기도 전에 봉철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날아들었다.
《으응, 깜짝 놀랐네. 동문 정말, 호호.》
까르르 터치는 은심의 웃음소리에 태남은 돌아서고말았다.
헛참 엉큼하기란, 애들처럼 엄살을 부리면서 무슨 장난질이람.
태남은 미장칼을 집어들었다. 오늘중으로 30층 내부미장을 끝내려면 서둘러야 했다.
《그게 뭐예요?》
등뒤에서 들리는 호기심에 가득찬 봉철의 목소리였다. 종이장이 발락발락 펼쳐지는 소리가 났다.
태남은 돌아섰다. 그리고는 놀랐다. 은심의 손에 들려진 종이장우에 세멘트가 담겨져있었던것이다. 한줌이나 될가말가 한 량이였다.
《작업장을 정리하다가 모은거예요.》
혼합물통안에 세멘트를 쏟으며 하는 은심의 말이였다.
《야! 은심동문 이거예요.》
봉철이가 엄지손가락을 처녀앞에 쳐들었다.
《아이참 봉철동무두, 사실… 그런게 아니예요. 태남동지랑 옷에 묻은 혼합물을 털어내는것을 보고 전 이 세멘트 한줌이 얼마나 귀한가를 알았어요. 전 위대한 장군님께서 살림집건설장을 찾으셨던 영광의 그날을 잊지 않고 늘 가슴속에 안고사는 동무들의 마음을 따르자면 아직도 멀었어요.》
태남은 처녀의 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웃을 때마다 패이군 하는 량볼우물, 머루알같이 반짝이는 눈…
매일과 같이 보아온 모습이였건만 새로와보였다.
그의 눈길은 저도 모르게 혼합물통으로 갔다. 한줌 될가말가 한 세멘트가 눈에 띄웠다. 금방 은심이가 쏟아놓은것이였다. 모래를 두고 혼합을 해도 단번에 발라버릴 량밖에 되지 않을 세멘트, 그 한줌 세멘트에 처녀의 모습이 다 비껴있었다.
문득 무엇인가 그의 머리에 고패치듯 하는것이 있었다.
내가 사랑해야 할 처녀가 바로 저런 처녀가 아닐가. 아니, 벌써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있는것 같다.
그는 미장을 시작했다. 미장칼에서 불이 이는듯 했다. 전투는 어느덧 날이 어둡기 전에 끝이 났다. 드디여 30층, 마감층내부미장이 전부 끝났다.…
태남은 손에 쥐여진 극장표를 내려다보았다. 줌안에서 얼마나 시달림을 받았는지 꼬깃꼬깃 볼품없이 돼버리고말았다. 이제는 더는 필요없이 된 표였다. 표가 스스로 발치로 떨어졌다. 서늘한 바람이 기다리기라도 한듯 슬슬 저기 어둠속으로 날아갔다. 태남은 그것을 흥심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처녀도 저렇게 떠나갔다. 왜 그랬을가, 왜?
다음날 작업이 끝나기가 바쁘게 태남은 처녀와 마주섰다.
태남이와 마주선 처녀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여있었다.
《툭 털어놓고 이야기하기요. 물론 내가 동무의 마음에 차지 않을수도 있소. 허지만 난 모르겠단 말이요. 도대체 그런 처녀가 못된다는건 무슨 소리요?》
태남은 숨을 헐떡였다. 대답을 듣기 전에는 일이 손에 잡힐것 같지 않았다.
그제야 은심은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머루알같이 반짝이던 그의 눈가에 물기가 번쩍였다.
《태남동지, 절… 용서해주세요. 전 태남동지랑 소대원들의 마음을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 그걸 받아들일수가…》
《글쎄 왜 받아들일수가 없는가 말이요?》
태남은 처녀의 말을 자르며 격하게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엔 그의 말을 침착하게 들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처녀의 눈가에 안타까움이, 괴로움이 실려있었다.
태남은 그제야 자기를 깨달았다. 얼굴이 모닥불을 뒤집어쓴듯 했다.
내가 제정신인가, 처녀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아무에게나 함부로 말할수 없는 처녀의 비밀을…
그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내가 너무도 렴치없이…》
《아니, 그런게 아닙니다. 제 얘길 들으면 태남동진… 놀랄겁니다. 제가 바로 언젠가 승리역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처녀랍니다.》
태남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럴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설마 했던 처녀, 그 처녀가 은심이였단 말인가.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가.
태남은 은심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날 밤 전 잠들수가 없었습니다. 처녀로서 한 총각에게서 거절을 당했으니까요. 반발심이 일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총각이길래… 그래서 전 이곳에 왔던겁니다. 하루가 다르게 키돋움하며 오르는 살림집들을 보면서 어떻게 이리도 빨리 올라갈가 생각도 많았습니다.
전… 오늘에야 똑똑히 알았습니다. 그것은 경애하는 장군님을 완공된 창전거리살림집에 하루빨리 모시고싶은 이곳 건설자들의 뜨거운 마음이였습니다. 사랑이였습니다. 그 마음이, 자기의것에 대한 크나큰 사랑이 이 땅에 새로운 기적, 새로운 위훈을 낳게 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전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혁신자인 태남동지의 사랑은 물론 나란히 앉아 공연을 관람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어제 그만…》
태남은 속이 뭉클했다. 그는 자기앞에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있는 처녀를 정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진정 그들은 조국을 사랑할줄 아는 우리 시대의 청년들이였다.
눈뿌리 아득하게 솟아오른 건설장꼭대기에서 용접불꽃이 쏟아져내렸다. 마치도 축복의 꽃보라인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