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101(2012)년 제7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박 윤
1
현춘녀는 자기의 오레미인 용희에 대해 그처럼 엄청난 소문이 돌게 되리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넘겨짚는데는 찢어지도록 가랭이가 넓은 어느 아낙네의 입에서 새여나왔는지 딱히 알수 없지만 벌써 소문은 이곳 자그마한 벌말과 앞벌 건너 아담한 주택들이 늘어선 갱말의 지경을 넘어서고있었다.
벌말과 갱말을 합쳐 큰벌작업반이라고 불렀다.
이 큰벌작업반의 전용희반장과 현지로 내려온 농업과학원의 박인철연구사가 서로 사랑하고있지 않는가 하는 쉬쉬한 소문이였다.
처녀총각시절 련인들이 서로 입에 올리기조차 숨가빠하며 가슴들먹이고 얼굴 붉혀 고백하던 사랑이라는 말이 용희와 인철연구사 사이에 불리워졌을 때 춘녀는 쉰고개를 바라보는 년장자로서 《소문이란 참, 흥.》 하고 푸수해보이는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마흔고개에 들어선 그들에게서 사랑이라는 말은 어딘가 쑥스러움을 자아냈던것이다.
그러나 표현은 어떻든 그들사이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있다고 자처하는 춘녀도 이 소문때문에 속이 조마조마해지군 했다.
그는 매끈하게 미장을 한 토방우에 걸터앉아 방금 부루를 씻느라 물기에 젖은 손을 마른수건에 뻑뻑 문지르고나서 어두운 눈빛으로 건너편 용희네 집쪽을 바라보았다.
문득 작은 키에 언제봐야 웃는듯 한 반달같은 고운 눈이며 갱핏해보이는 갸름한 얼굴과 걸음을 걸을 때면 고무공처럼 통통 튀여오르는듯 한 용희의 자그마한 모습이 눈앞에 얼른거렸다.
그는 세해전에 남편을 잃었다. 그의 남편인 춘식은 춘녀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였다.
피할수 없는 난치의 병이 한창 젊은 그의 온몸을 감아버렸던것이다.
용희는 열살잡이에 이른 아들 광남이를 데리고 억척같이 일어섰다.
한가정도 아닌 작업반을 붙안고 몸에 부치도록 새처럼 마을과 벌을 날아다녔다.
가정을 돌보고 마을을 보살피며 작업반을 이끌어나갔다.
이 작고 연약한 녀인은 남편에 대한 사랑을 깡그리 농사일과 마을사람들에게 쏟아부었다.
작업반의 축산분조가 새롭게 일신됐고 태양열온실이며 현대적인 목욕탕, 시대의 미감에 맞게 일매지게 꾸려진 탈곡장과 작업반실, 농업과학기술지식선전실이 일떠섰다.
부지런한 가정주부의 손끝에서 세간이 늘듯 피가 나도록 이악스런 그의 살림살이에서 농장살림이 늘어났고 큰벌작업반이 리적으로 손꼽히게 유족해졌다.
큰벌사람들은 가정일의 크고작은 좋은 일엔 누구나 그의 팔을 잡아끌었고 용희를 떠난 큰벌을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평범하고 례사롭게만 흘러가던 그의 생활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한달전, 용희의 뒤를 따라 작업반마당으로 큰키에 듬직한 체격을 가진, 잘생긴 마흔고개를 갓 넘긴듯 한 중년의 사나이가 들어섰다.
어글어글한 눈매, 좀해서는 쉽게 열릴것 같지 않는 과묵해보이는 두툼한 입…
그가 바로 미생물과학자인 박인철연구사였다.
그날 용희는 별로 들뜬 기분이였다. 아니, 자기가 마치 오래도록 기다리던 사람이 온듯싶었다.
용희는 자그마한 몸을 어디에 세울지 몰라 팽이처럼 돌아쳤다.
작업반실과 조금 떨어진 축산분조 관리공방인 춘녀네 휴계실을 내주었다가 한참도 못되여 태양열온실옆에 꾸려진 조용한 방을 내느라 분주탕을 피웠다.
《아-휴, 누이, 축산분조는 안되겠어요. 돼지가 꿀꿀대지 게사니가 곽-곽대지. 그러니 연구사선생의 방으로선 여기가 적합해요, 조용하고 해빛밝고. 어때요, 누이생각엔? 안성맞춤하지요?》
용희는 만족한듯 고운 눈으로 보며 춘녀에게 물었다.
《연구사선생님들이란 늘 사색하는분들이니까 조용해야지 뭐. 좋을듯 해, 여기가!》
춘녀는 별스레 좋아하는 용희를 바라보고나서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여기가 연구사선생님의 연구소예요. 숙소는 여기다 정하고 식사는 아무래도 내가 맡아야겠어요. 리합숙까지 오고갈 시간은 없는거구.》
그 말에 춘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작업반일을 붙안구 돌아가재두 힘들텐데 식사는 다른 집에 맡기지 뭐.》
춘녀는 그러지 않아도 바쁜 용희가 제 어깨에 스스로 짐만 잔뜩 걸머지는것만 같아 걱정스러웠다.
《아니예요. 귀한분인걸요.》
용희는 천천히 도리머리를 젓고나서 나직하나 생각깊은 어조로 말했다.
《미생물에 의한 생물활성비료는 높은 수준에 오른 비료라고 말할수 있어요.
광남이 아버지가 해보겠다고 달라붙었던 분야예요.》
언젠가 동생 춘식이가 고심하며 연구해오던 일이 생각되자 춘녀는 용희의 마음이 리해되였다.
《누이, 이제부터 연구사선생의 사색에 방해가 되지 않게 게사니랑 오리랑 저쪽으로 몰아주세요.》
용희는 온실 반대켠 작업반실쪽을 가리켰다.
그의 세심한 마음에 춘녀는 절로 웃음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말래두.》
인철연구사가 온 후부터 용희의 생활에서는 확실히 변화가 일어났다.
용희의 옷차림이 달라졌다.
깨끗하게 다림발이 선 허리가 잘룩해보이는 봄철옷들이 퍽 단정한감을 주었다. 목으로 흘러내린 약간 굽실한 머리모양새와 연하게 화장을 한 얼굴은 싱싱한 젊음을 자아냈다.
언젠가 자기를 쳐다보는 춘녀의 덩둘한 눈길과 마주치자 용희는 얼른 제 차림새를 휘둘러보고나서 《화장이랑 너무 진해요?》 하고 되려 묻기까지 했다.
《요새 광남이 엄마가 어떻게 된거야?》
한껏 의아해진 춘녀의 얼굴을 띄여보자 용희는 한참만에야 정색해서 말했다.
《연구사선생한텐 내가 큰벌사람들의 거울처럼 보일테니까요. 지켜봐요, 그가 우리 농장원들을 말이예요.》
무슨 일이나 작업반을 먼저 생각하는 용희의 마음에 춘녀는 너무도 단순하게 의문을 가졌던 자기의 생각에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아침에 작업반모임이 끝나면 용희는 인철과 함께 벌로 나가군 했다. 그들이 벌에서 돌아올 때면 포전에서 파낸 흙들을 넣은 비닐봉지를 한가득 들고 들어와서는 마당에 주런이 세워놓군 했다.
《진흙》, 《질흙》, 《질메흙》…
춘녀는 봉지에 씌여진 글을 보고 매 필지의 시료라는것을 대뜸 알아차렸다.
날마다 시료들이 늘어나 마당 한구석에 쌓아졌다.
점심시간이 가까와오자 춘녀는 돼지물을 주려고나섰다.
솨- 수도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춘녀는 얼른 초롱을 땅바닥에 내려놓은채 잠시 기다렸다.
인철연구사가 빨래를 하는 시간이였다.
조용한 점심참이면 그는 남들이 볼가봐 몹시 주저하는 눈길로 수도를 틀어놓고는 황급히 빨래를 해치우군 했다.
집떠나 생활하는 사람들이 다 그러하지만 그래도 자기 작업반농사를 위해 내려온 연구사라는 고마운 생각에 끌리여 언젠가 춘녀는 저도 모르게 팔을 걷어올리고 그에게 다가섰다. 하지만 인철은 종시 빨래감을 선뜻 내맡기려 하지 않았다.
뜻밖의 일에 무안을 당한듯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수굿한채 어쩔바를 몰라하며 몹시 옹색해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춘녀는 오히려 자신이 자리를 피해주군 하였다.
갑자기 수도물소리가 뚝 멎었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뜻밖에도 나직하나 절절한 호소가 깔린 용희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부턴 빨래감이 있으면 저에게 주세요. 약속하세요. 우리 큰벌의 녀인들이 그렇게 인정이 없는 녀자들이 아니예요. 우리 고장에 와서 이 고장 녀인들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인철동문 어떻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바치겠나요? 믿어주세요.》
《사실 난… 이젠 습관이 돼서 그런거요. 다르게 생각진… 마시오.》
변명에 가까운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새여나왔다.
이어 사락-사락- 하는 빨래감을 비벼대는 귀맛좋은 소리가 가락맞게 울려왔다.
용희의 빨래질솜씨이다.
잠시후 머리를 수굿한 인철이 물묻은 손을 매만지며 게면쩍은 표정으로 나타났다.
얼굴색이 감빛이 되였다.
춘녀는 그가 매우 순박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대뜸 들었다.
다음날 점심참에 용희는 다림발이 선 반듯한 그의 작업복을 가져와 그의 손에 들려주었다.
《다림질까지야 뭐… 작업복인데. 수고를 끼쳐 미안하오.》
인철은 어줍은 표정을 짓고는 송구스레 받아든 작업복을 이윽히 내려다보았다.
《제대로 다렸는지 모르겠어요. 인철동무야 나라의 농업발전을 위해 뛰고 또 뛰는 연구사가 아니나요? 우리 큰벌사람들이 지켜보거던요. 미래를 내닫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라고 할가.
어쨌든 몸차림도 닮으려고 한답니다.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빨래랑 다림질할거랑 있으면 제게 맡기세요. 녀자들이란 남자들에 대해서 그만한 정도의 아량은 각오하고있답니다, 호호.》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용희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탈곡장의 추녀높은 지붕으로 울려갔다.
(난 속이 좁은 녀자야. 용흰 역시 남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질줄 알거던.)
춘녀는 용희가 고맙게 생각되였다. 아니, 작업반이라는 큰 살림을 떠인 사람이 다르다는 은근한 존경심이 사뭇 들었다.
그후부터 동정을 자아내던 연구사의 빨래하는 모습은 다시 볼수 없었다.
요사이 용희는 연구사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침 작업조직이 끝나고 관리위원회에 들려 볼일을 보고 돌아와 작업반의 미진된 일감을 처리하고나서 여가시간이 생기는 짬이면 그는 인철의 일손을 거들군 했다.
두사람이 맞붙어앉아 시꺼먼 가루를 반죽하고 나무함에 넣어 띄우기도 하며 돌아갈 때면 연구사와 조수이런듯 더없이 다정해보였다.
붉은 저녁노을이 큰벌과 백은산을 빨갛게 태우는 저녁무렵 온 논판을 꽉 메운 오리며 게사니들을 몰고 들어설 때면 춘녀는 가끔 활기에 넘친 용희와 머리 하나만큼 큰 인철이 나란히 걸으며 시험포전에서 돌아오는 다정한 모습을 볼수 있었다. 논벌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일손을 멈춘채 부럽게 바라보았고 의미있는 시선으로 서로 마주보는 축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춘녀는 까닭 모르게 종잡을수 없는 불안이 가슴속으로 스며들고있음을 느끼군 했다.
하지만 춘녀의 불안에는 아랑곳없이 그들의 사이는 소문처럼 점점 더 다정해지는것 같았다.
2
춘녀는 방금 씻은 첫물부루가 담긴 그릇을 보자기에 쌌다.
그리고는 방안으로 들어가 외출복을 갈아입었다.
밖으로 나오려던 그는 방구석에 놓인 통안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도토리알만 한 우렝이들이 물속에서 아물거렸다.
용희가 군에서 떼를 쓰며 가져다가 시범적으로 도입하려고 키우고있는 우렝이들이다.
별로 눈에 띄게 큰 리익도 없고 키우기가 까다롭다고 도리질하는 축들도 있지만 용희가 한사코 우겨 여러 집에 나뉘여 키우고있는것이다.
《새 방법이 나오면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해서는 안돼요. 다른 고장에서는 리익을 보고있는데 우리도 빨리 자기의것으로 만들어야 해요. 알곡생산을 늘이자면 다른 길은 없어요.》
언제나 남보다 앞서나가고싶어하는 용희의 마음을 잘 알고있는 춘녀는 그를 돕고싶어 솔선 맡아나선것이다.
부엌으로 내려간 춘녀는 꾸려놓았던 오리알꾸레미를 부루보자기속에 밀어넣었다. 인철연구사의 식사를 보장하느라 왼심을 써오는 용희에게 무엇이든 보태고싶은 생각도 들고 집을 떠나 고생하는 연구사에게 첫물부루를 대접해주고싶기도 했다.
큰길에 나서니 벌바람에 목언저리가 선뜩해났다.
큰벌을 가로질러간 수암천의 물길을 따라 연기발같은 물안개가 구물구물 서려돌며 물오른 버들가지며 묵은 풀들이 수북한 제방뚝을 어루쓸었다.
길가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춘녀는 갱말쪽으로 곧추 뻗은 논뚝길에 접어들었다.
그가 수암천의 다리를 건느려는데 《고모!》 하는 챙챙한 목소리에 잇달아 사내애가 등에 진 가방을 달싹거리며 마주달려왔다.
《천천히 오렴, 넘어지겠다.》
춘녀는 얼른 마주다가갔다. 용희의 아들 광남이다.
《벌써 가니?》
《청소당번이예요.》
《그래, 아침밥은 먹었니?》
《응.》
그 애는 동그래진 까만 눈으로 마주올려다본다.
꼭 제 아버지를 닮았다.
《엄만 연구사선생님이랑 같이할거예요. 큰고모, 나랑 엄마랑 콤퓨터를 배워요. 연구사선생님은 날보구 잘한대요. 재미있어요.》
광남은 비밀이라도 알려주듯 발뒤꿈치를 살짝 들고 귀가에 입을 바싹 가져다댔다.
《엄마가 연구사선생님을 꼭 붙잡아두겠대요. 콤퓨터 다 배우구 이 큰벌에 칠 새 비료가 많이많이 나올 때까지 오래오래… 해해.》
《광남인 좋겠구나.》
춘녀는 새물새물 웃고있는 광남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주저앉아 어린것을 따뜻이 그러안았다.
딱히 무엇이라 이름할수 없는 허전한 감정이 밀려들면서 마음속 한구석이 떨어져나가는것만 같은 느낌에 그는 어망결에 어린것의 몸을 더욱 꼭 그러안았다.
잠시후 어린것을 놓아준 춘녀는 그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어서 가렴, 늦지 않게.》
왜서인지 목소리가 떨려났다.
이윽고 춘녀는 용희네 집 대문에 들어섰다.
등때기에 흰 점이 박힌 개가 컹 하고 짖으려다 꼬리를 저으며 다가선다.
창가에서 용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요즘 대기온도가 급작스레 올라가니 미생물들의 활성도 심해질거예요. 모판에랑 또 필지마다 뿌린 종균들이 자기 특성을 나타내지 않을가요?》
《조급하기란, 우물을 통채로 마시겠구만, 허허. 반장동무 머리엔 온통… 꼭 연구사같구만.》
인철의 웃음에 젖은 우선우선한 목소리가 즐겁게 울려왔다.
《조바심이 나면서 자꾸 기다려지는걸요. 이제 우리 큰벌이 인철동무의 덕을 단단히 볼거예요. 그리구 이번에 시험적으로 인철동무랑 함께 착상해낸 두줄모아심기를 한번 해볼 생각이예요. 아마 숱한 땅이 거저 생길거예요. 다 인철동무가 틔워줬기때문이예요.》
용희의 한껏 들뜬 목소리다.
그가 몹시 흥분했다는것이 알렸다.
《사실 용희동무가 그 문제때문에 늘 사색하구 고민하고있었기때문에 쉽게 착상할수 있었던거요.
이것도 부침땅면적이 제한된 조건에서 알곡생산을 늘이는 방도의 하나가 아니겠소.》
인철연구사도 자못 흥분했는지 갈린듯 한 목소리다.
춘녀는 해빛이 비쳐드는 토방우에 걸터앉았다.
춘녀의 눈앞에는 며칠전 일이 떠올랐다.
며칠전 그들 두사람이 작업반 강냉이밭에 머리를 맞대고앉아 열성스레 뭔가 토론하고있었다.
용희가 삽으로 밭을 뚜져 이랑을 지어놓고 금까지 그어가며 열성껏 설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날 오리며 게사니무리를 몰고나왔던 춘녀는 그들에게 방해가 될가봐 다른 길로 조용히 지나쳤었다.
그런데 다음날 오후에 기사장을 비롯해서 관리위원회 일군들과 기술원들이 그 밭머리에 몰려들었다.
용희가 그들앞에서 설명을 했다. 그에게 무엇인가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용희의 대답에 이어 모두의 박수소리가 터졌다.
그날 저녁 용희반장이 대단한 발견을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큰벌은 물론 온 리에 자자하게 퍼졌다.
이 큰벌에서만도 수천평의 땅을 거저 얻는것이라니 이런 희한한 발견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워낙 용희를 무척 좋아하던 큰벌사람들인지라 이번일을 두고 모두가 제일처럼 기뻐하였다.
《용희동무, 작업반일도 돌볼래, 짬마다 내 연구도 방조할래 정말 미안하오.》
인철연구사의 진심어린 목소리가 울려왔다. 어글어글한 눈매며 진중한 표정을 지은 그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런 말씀 마세요. 그게 어디 인철동무의 일이라고만 생각하세요. 우리 큰벌을 위한 일이구 또…》
무슨 말인가 더 하려다가 용희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소. 사실 난 큰벌에 와서 모든것이 번듯하게 꾸려진걸 보구 용희동무에 대해 감동이 컸소. 저 작은 녀인이 무슨 힘에 작업반이랑 마을을 저렇듯 멋지게 꾸렸을가 하구말이요.》
《용희가 어떤 녀자라구.》
춘녀는 자기가 인철연구사와 마주앉아있기라도 하듯 중얼거리고나서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해놓고보니 긍지감이 생겨요. 그런데 온실만은… 맨처음 태양열온실을 꾸렸을 땐 대단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달이 가구 해가 가니 별스레 작아진것 같은게 후회가 돼요. 가을에 가서 더 크게 지을 생각이예요. 축산을 늘이자고 해도 그렇구 또 반원들에게 남새를 공급하자고 해도…
제가 너무 욕심을 부리는건 아니예요?》
그는 얼굴이 발깃해져 어줍은 표정으로 인철을 쳐다보았다.
인철은 아무말없이 덤덤히 앉아있었다.
그의 생각깊은 얼굴을 쳐다보던 용희가 문득 입을 열었다.
《참, 이번에 새로 개발한 미생물의 이름을 어떻게 달 생각이예요?》
《이름이라… 하긴 새로운 창조물이니까… 동무가 지어보오.》
《제가요? 난 우리 고장의 이름을 따서 큰벌이라고 달았으면 해요.》
《큰벌이라… 좋구만. 용희동문 확실히 욕심꾸러기요.》
두사람은 소리내여 웃었다.
《인철동무, 꼭 해내자요. 힘을 내세요. 제가 힘껏 돕겠어요. 대신 많이 배워주세요, 인철동무가 없어도 내 손으로 배양을 해서 키울수 있게 말이예요. 약속하지요?》
살뜰한 정이 흘러넘치는 용희의 목소리다.
《용희동문 벌써 배우고있지 않소. 미생물을 전문하는 연구사처럼 말이요. 무섭게 달라붙어 때론 나보다 앞서나가고있다는 생각이 들군 하오, 허허.》
잠시후 용희가 웃방에서 여러권의 책을 가지고 나와 그앞에 내려놓았다.
《이건 저의 남편이 우리 큰벌에서 미생물연구를 하면서 적어놓은 시험일지들이예요. 큰벌에 재배하는 벼와 강냉이의 품종에 따르는 시험수치들이 년도별, 필지별로 정확히 기록되여있어요. 참고해주세요.》
춘녀는 별안간 눈굽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자 춘식의 모습이 불현듯 눈앞에 떠오르면서 가슴이 불로 지지듯 달아올랐다.
10여년전 어느 봄날.
농업대학을 졸업한 춘식이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은 낯선 처녀를 데리고 벌말에 찾아왔다.
그날 늦어서야 집에 들어서던 춘녀는 애인까지 데리고 나타난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고향에 왔으니 잘됐구나.》
입가에 피여나는 웃음을 지은채 그는 처녀를 살며시 여겨보았다.
《용희, 인사하오. 우리 누님이요.》
처녀가 언듯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날 저녁 춘녀는 팽이처럼 돌며 부엌동자질을 재빨리 해치우는 처녀를 지켜보며 춘식에게 조용히 물었다.
《무얼 보구 사랑했니?》
준수해보이는 얼굴이며 보기 좋은 체격, 사내다운 름름한 동생에 비해 기울어보이는것 같아 서운한 생각이 없지 않았다.
《누이, 용흰 나보다 이만큼 커요.》
누나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춘식은 벌씬 웃으며 자기 머리우로 한손을 높이 들어보였다.
그리고나서 가만히 속살거리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학박사원생이던 춘식은 대학도서관에 늘 붙어살았다. 그때마다 그 처녀는 그의 눈에 띄우군 했다. 언제나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걷군 하던 처녀, 그는 주위세계에 무관심한듯 책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어느날 춘식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였다.
이웃군의 어느 한 농장에서 일하는 처녀였다.
제대되여 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일하면서 대학에 다닌다는것이였다.
처녀가 제대군인이라는것도 놀라왔지만 농업전문학교까지 졸업한 그가 일하면서 대학을 다닌다는 그것이 몹시 돋보였다. 그것도 한생 벌과 함께 살아야 하는 농사에 뜻을 두고 스스로 그 길에 나선 처녀의 마음이 더없이 소중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직 우리에게는 어려운것이 많아요. 하지만 기적이 일어나고있어요. 우리 장군님의 최첨단돌파사상의 불길이 온 나라에 타번지고있어요. 이제 우리 농업부문에서도 비약이 일어날거예요. 그래요, 머지않아 우리의 농업은 최첨단과학기술에 기초하여 언제나 높고 안전한 최고의 수확만을 낼거예요. 전 확신해요. 그래서 서슴없이 이 길에 뛰여든거예요. 제가 너무 엄청난 꿈을 꾸는지 모르겠어요.》
처녀는 제대군인이여서인지 사내들처럼 씨원씨원하게 말하고는 생긋 웃었다.
춘식은 그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자그마한 꾸밈도 거짓도 없는 진실을 온몸으로 느꼈다.
《꿈이 클수록 날개가 커야 높이 날을수 있지. 우리 서로 배우며 그 날개를 키워봅시다.》
춘식은 그지없이 황홀한 미래를 안은 처녀의 마음에 스스로 이끌려들어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렇게 되여 난 랑만적이고 열정적인 꿈많은 처녀를 사랑하게 되였어요.》
춘식은 그날 춘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그후 춘식은 미생물연구를 시작하였다.
결혼식날 그들은 모를 낸 푸르른 벌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한쌍의 수리개가 유유히 푸른 하늘을 날아예고있었다.
그 수리개를 바라보던 춘식은 흥분에 들떠 주먹을 흔들며 즉흥시를 읊었다.
하늘을 나는 저 수리개처럼
이 큰벌은 우리 한생 날아옐 가없는 하늘
부모들이 살아온 땅
우리가 살며 미래가 살
한없이 소중한 고향땅이여!
내 너를 세상이 부럽도록 꾸려가리
여기서 내 한생의 행복을 찾으리
그때부터 춘식은 늘쌍 미생물실험실과 벌에 나가 살았다.
그 이듬해 아들 광남이가 태여났다.…
생각에서 깨여난 춘녀는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부엌문을 조용히 열어 들고온 꾸레미를 살며시 밀어놓고는 대문을 나섰다.
동생은 비록 성공하지 못하고 갔지만 연구사선생이나 용희가 그걸 완성해서 이 큰벌에 도입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생각이 미치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3
퇴근시간이 다 지나도록 용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강냉이밭가녁에 모여든 사람들은 기다리기에 지쳐 벌말과 갱말의 큰길들과 작업반쪽으로 향한 길쪽을 초조하게 지켜보고들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뒤짐을 진채 밭머리를 거닐던 장근우가 얼굴이 벌깃해져 손짓까지 해가며 목청을 높이였다.
《아니, 이 바쁜 때 대학이 다 뭐요. 작업반적으로 네명인데 우리 분조가 두사람이나 됩니다. 야 창실아, 넌 이젠 시집갈 나이인데…》
장근우가 기가 막힌듯 말을 끊으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분조인원이 두명이나 빠진게 아쉬운 모양이다.
《분조장동지! 전 가겠어요. 배우겠단 말입니다. 반장동지두 처녀시절에 일하면서 대학을 다녔어요.》
장근우가 말을 잇기도 전에 창실이가 장근우를 똑바로 쳐다보며 내쏘았다.
《작년엔 우렝이요 뭐요 하며 붕 떠다니더니 이젠 대학공부를 하겠단 말이지. 얘, 땅에 발을 딱 붙여야지 그렇지 않다간 시집도 못 간다.》
《분조장동지가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됩니다.》
이러는 창실의 눈에 대번에 뿌연것이 서려돌았다. 긴 속눈섭이 가볍게 떨렸다.
《분조장은 괜히… 지금 안 배우면 언제 배우겠수, 나이들면 후회할텐데.》
춘녀가 장근우의 처사에 심기가 올라 한마디 하고는 창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작년 여름에 용희가 가져온 우렝이를 마름이 성한 골개논에 놓아주겠다며 몽땅 걷어안고 제 분조의 논으로 가져갔다.
제 삼촌이 사는 이웃 대성리에는 우렝이로 김을 잡는다며 어린애처럼 좋아하던 처녀다.
어느결에 우렝이에 정이 붙었는지 아침저녁 그 논에 붙어살았다. 그러다가 장마철에는 우렝이가 걱정되여 용희와 함께 온밤 찬비를 맞으며 새우군 했다.
《처녀가 총각한테 끌려야지 밤낮 여기에 박혀서… 우렝이와 살겠어?》
그가 어찌나 우렝이에 정신이 팔렸던지 그때 장근우가 창실이에게 한 말이였다.
헌데 창실이의 말이 더 걸작이였다.
《우렝이도 좋지만 그보다도 이걸 연구해낸 과학자를 사랑해요.》
이런 창실이여서 용희가 그를 대학에 추천했다는 소리가 돌았다.
한참후에야 용희가 나타났다.
왜서인지 얼굴색이 몹시 어두웠다. 여직껏 갱말의 2분조모판에 연구사와 함께 있다가 오는 길이라니 그쪽 일이 시원치 않다는것을 누구나 다 짐작하였다.
갱말쪽에서 머리를 수굿한채 걸어오는 인철의 모습이 보였다.
용희는 밭머리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몹시 미안한 기색을 지어보였다.
《반장동무, 거 대학문제말이우다. 우리 분조는 두사람이나 빠지게 됐으니…》
장근우는 용희의 서늘한 눈길과 마주치자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분조장동무, 두사람이 아니라 지망자가 더 있으면 전 다 보내고싶어요. 모두가 배워야 해요. 더구나 분조장동무와 같은 초급일군들이 앞장에 서야 합니다. 농장원들은 시키는 일이나 하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을 버려야 해요. 일년 열두달 가도 농업과학기술서적을 한권도 읽지 않던 그런 시대는 지나갔어요. 지금은 과학과 기술의 시대라는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장근우는 퉁을 맞은것이 면구스러운지 헛기침을 둬번 깇고나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 분조장동무가 로력문제때문에 걱정하는것 같은데 제가 현장에 나가 그들의 몫을 하겠습니다.》
뜻밖의 제의에 모두가 뒤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인철연구사였다.
인철은 피로에 지친 충혈된 눈을 슴벅이며 사람들에게 벌씬 웃어보였다.
춘녀는 자기도 짬짬이 이들을 도와 분조에 나가리라 마음먹었다.
모임이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춘녀가 큰길에 나서려는데 장근우가 그의 어깨를 언듯 건드렸다.
잠시후 두사람이 남게 되자 장근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거… 혹시 반장이 다른 생각을 하는게 아니요? 연구사하구 말이우다.》
춘녀는 흠칫 몸을 떨며 한걸음 물러섰다. 그는 눈이 대뜸 화등잔만 해져 장근우를 쳐다보았다.
《왜 놀라오? 눈치가 그리 무딘것 같진 않은데…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가 모든걸 리해해주어야지요. 듣자니 연구사선생두 반장일엔 극성이라는데…》
장근우는 의미있게 눈을 끔쩍해보이고는 걸음을 내짚었다.
춘녀는 그 자리에 박힌듯 서버렸다.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지만…
춘녀는 무겁게 밀려드는 생각을 랭철한 리성을 가지고 곰곰히 돌이켜보았다. 물론 장근우의 말을 그대로 믿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연구사에 대한 용희의 친절한 극성은 사실이 아닌가?
그토록 그가 큰벌과 큰벌사람들을 위해 애쓰며 연구사의 연구성과를 이곳에 남먼저 도입하고 싶어하고 미생물에 대한 지식을 배우려고 아글타글 애쓰는것이 과연 사랑때문이란 말인가?
그는 도리머리를 저었다. 믿고싶지 않았다. 다음순간 정말 그들이 사랑한다면 하는 마음의 소리에 흠칫 멎어섰다.
그러자 두려움이 갈마들면서 어쩐지 십년나마 오레미, 누이하며 같이 살아온 용희와의 사이가 아득히 멀어져 남이 되고말것 같은 서운한 생각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춘녀는 지꿎게 갈마드는 생각을 털어버리며 작업반마당에 들어섰다.
서늘한 그늘이 드리운 탈곡장에 창실이며 광필이 등 청년들이 주런이 앉아 용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있다. 모두 대학에 갈 청년들이다. 바람결을 타고 용희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바쁜 철이예요. 한사람의 로력도 귀해요. 우리 농촌이 할일이 얼마나 많아요? 먹는 문제때문에 그토록 마음쓰시던 우리 장군님의 뜻을 실현하자고 해도 그래, 큰벌을 살기 좋은 고장으로 꾸리자고 해도 배워야 해요.
사실 난 장근우분조장 말대로 이제 시집갈 나이에 이른 창실이랑 남숙이는 보내고싶지 않아요.
그러나 제 고향뿐아니라 우리 사회주의농촌을 더 훌륭히 꾸려야 할 의무가 모두의 어깨에 지워졌기에 서슴없이 보내는거예요. 그러니 시간을 아껴 부지런히 배워요.
자, 이건 작업반에서 학교로 떠나는 동무들을 위해 마련했어요. 고향사람들의 부탁이라는걸 잊지 말구 받아주세요.》
용희가 청년들의 가슴에 책꾸레미를 안겨주었다.
모두가 감동어린 눈으로 용희를 바라보았다.
(용희, 넌 어쩜… 젊은이들의 마음을 알거던.)
잠시후 용희가 축산분조마당으로 들어섰다.
《참 누이, 언제부터 부탁하려댔는데… 좀 늦었군요.》
춘녀는 오리먹이를 쏟아주고나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누이, 저 새끼오리들을 스무마리쯤 따로 잘 키워주세요. 인철동무가 떠날 때 보낼수 있게 말이예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가겠는데. 과학원가금연구소 박사선생님에게 보낼거예요. 비육도가 높은 새 품종의 오리들과 바꿔오겠어요. 그걸 가져다 더 많이, 본때있게 키워보자요. 참, 새로 나온 오리기르기와 돼지비육도 높이는 방법들이예요. 인철동무가 구해줬어요.》
용희는 춘녀의 손에 이 자료를 쥐여주며 웃음이 남실거리는 고운 눈을 쪼프린채 즐겁게 웃었다.
《인철연구사가 인츰 가나?》
춘녀는 손에 든 책을 얼떠름히 내려다보며 저도모르게 중얼거렸다.
《참 누이두, 그럼 큰벌에서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용희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춘녀도 절로 웃음이 나서 따라웃었다.
그는 작업반실로 가는 용희의 뒤모습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새 품종의 오리라… 그건 어느때 벌써 다 알아뒀을가?)
그는 깨여난지 열흘남짓한 깃털이 보르르한 오리들을 즐겁게 내려다보았다.
×
아침에 용희는 집에서 사용하던 콤퓨터를 연구사가 있는 방에 내왔다.
요새 큰벌에서는 콤퓨터를 배우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던것이다. 저녁이면 창실이를 비롯해서 이번에 일하면서 배우는 대학에 입학한 네명의 청년들이 용희네 집에 밀려왔다. 용희는 이들이 불편없이 배울수 있도록 조용한 방에 콤퓨터를 가져다놓은것이다. 어린 광남이도 어른들과 함께 배우게 된것이 좋은지 밤이면 연구사가 있는 곳으로 나왔다.
《얼마나 좋은 기회예요. 연구사선생이 이 큰벌에 와있는 기간 모두가 배우자요. 우리 고장을 우리 손으로 더 훌륭히 꾸리기 위해서 말이예요.》
아침 조회시간에 용희가 반원들에게 절절히 호소했던것이다.
《용희동문 역시 욕심쟁이요. 이 큰벌마을을 위해 밤이면 큰 짐을 또 내 어깨에 지우니 말이요!》
인철이 껄껄 웃으며 즐겁게 하는 롱질에 용희는 얼굴이 빨개져 몹시 미안한 어조로 그러나 은근한 자랑을 담고 말했다.
《정말 그렇군요. 그러나 어찌겠어요, 욕심을 자꾸 부리고싶은걸… 대신 연구사선생님이 무리하지 않게 시간을 꼭 지키도록 하겠어요.》
《아니, 용희동무의 욕심이라면 내 뭐나 다 들어주겠소. 사실 용희동무나 또 큰벌사람들이 새 기술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는걸 보니 난 오히려 힘든줄 모르겠구만. 내 욕심두 커진단 말이요. 허허.》
작업반사람들은 자기들의 반장과 연구사사이에 오가는 유쾌한 이야기를 즐겁게 들으며 용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반장은 확실이 실력가형이거던.》
《우렝이두 그래 또 사람들을 깜짝 놀래운 창안도 그래, 우리 반장은 언제나 앞서나가야 좋아하거던.》
사람들은 저희끼리 이런 말을 나누며 현장으로 나갔다. 모내기가 시작된것이다.
춘녀는 한마당되는 오리며 게사니들을 방풍재를 둘러친 모판곁의 수암천가로 몰아갔다.
파란 비취색하늘이 비껴든 수암천의 소연한 물소리가 냉이며 가막살이며 쑥들이 깃털처럼 만문한 잎사귀를 한들거리며 파랗게 돋아난 개울너머로 간간이 울려갔다.
모판 한가운데 인철연구사와 용희며 모판관리공들이 네모방정한 모판을 내려다보며 모를 쥔 손을 열정적으로 흔들어대는 모습이 보였다.
《반장동무! 여길 보오. 〈큰벌〉미생물을 시비한 모판들과 얼마나 대조적이요? 차이가 나기 시작했소. 벼잎색갈을 보오, 그리고 뿌리개수도 벌써 다르지 않소. 새로 연구한 미생물이 토양에 흡착되기 시작했소.》
거의 환성에 가까운 인철의 목소리였다.
《어디? 정말 그렇군요. 며칠전에도 알리지 않았는데… 이젠 됐군요, 됐단 말이예요.》
기쁨에 넘친 용희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춘녀는 허둥거리며 모판에 다가가 방풍재를 꽉 부여잡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숨막힐듯 한 환희가 벅차오름을 느꼈다.
모판관리공들도 그의 손에서 벼모를 받아들고보더니 환성을 질렀다.
인철은 한웅큼되게 뜬 모를 보물처럼 정히 싸들었다.
《반장동무, 질량검사를 해봅시다!》
4
춘녀는 밤늦어 불빛 환한 갱말의 용희네 집으로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별들이 도글도글 끓는 하늘중천에 귤쪽같은 상현달이 삐쭉한 끝으로 구름장을 헤집으며 솟아나왔다.
달빛에 모내기를 한 논판들과 갈아엎은 시꺼먼 논판들이 침침하니 드러났다.
끓어넘는듯 한 개구리울음소리가 논판을 가득 채웠다.
춘녀는 날개죽지와 다리를 비끄러맨 오리를 든 손을 가볍게 흔들며 걸음을 내짚었다.
오늘 낮에 장근우분조에서 일하며 보니 연구사의 기색이 이상했다.
모보식작업을 하던 장근우가 모짐을 진 연구사의 손을 덥석 잡으며 《연구사동무, 고맙수다, 이렇게 도와주어서.》 하고 진심으로 고마운 인사를 할 때 인철은 화독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얼른 숙여버렸다.
《인사야 용희동무에게 해야지요. 이 큰벌이 좋은 반장동무를 만났습니다.》
소박하면서도 진심이 느껴지는 그의 말에 마음이 흥그러워진 춘녀는 보식하던 손을 멈추고 장근우를 쳐다보았다.
장근우는 흘끔 춘녀를 쳐다보고는 그때 생각이 떠올랐는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저녁해가 명월산을 내려앉을무렵 모짐을 지던 인철이 없어졌다.
누구나 그에 대해 관심하는 사람이 없는듯 했다.
그러나 춘녀는 그가 몹시 고통스러워하고있음을 알아차렸다.
저녁바람에 선뜩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그는 가끔 손수건을 꺼내여 이마의 땀을 훔쳤고 사람들을 피해 모짐을 진채 구석쪽에 앉았다가 오는것을 감촉했던것이다.
춘녀는 납덩이처럼 매여달리는 근심에 싸여 용희네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책을 읽던 용희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며 의아해 바라보았다.
《연구사선생한테 대접해주라구. 우리 마을에 내려와 밤낮 고생하는데.》
춘녀는 들고온 오리를 부엌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누이.》
《광남이랑은?》
춘녀는 별스레 근심에 싸여있는 용희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인철동무가 몹시 불편해해요. 그런데두 광남이랑 콤퓨터 배우러 갔어요.》
《광남이가 연구사선생을 무척 따르는 모양이더라.》
언젠가 그 애가 하던 말이 떠올라 흔연스레 한마디 내비쳤다. 춘녀는 컴컴한 낯빛으로 있는 용희를 보자 연구사의 병이 심하다는것을 짐작했다.
《요새 너무 무리했어요, 낮에는 포전에서 일하고 늦도록 광남이랑 큰벌사람들에게 콤퓨터를 배워주고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 책을 읽고… 무쇠인들 견디여내겠어요? 그 앤 인철동무가 온 담부턴 습관이 달라졌어요. 콤퓨터에 어찌나 정신이 팔렸는지 초저녁잠이 많던 버릇이 싹 없어졌어요.》
용희는 그 애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조용히 웃고나서 춘녀를 바라보았다.
《그 녀석이 제 아범 닮아 머리가 좋으니까 제꺽 배울거야.》
춘녀는 마음이 흥그러워졌다. 그는 여직 벼르었던 인철에 대한 용희의 마음을 떠보고싶어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광남 에미 생각엔… 연구사가 어떻니?》
춘녀는 그 말이 자기로서도 힘들게 끄집어낸것임을 느끼며 긴장해졌다.
그는 언듯 눈길을 들어 춘녀를 보고나서 생각깊은 어조로 대답했다.
《쉽지 않은 사람이예요. 앞날에 대한 리상과 포부가 가슴에 차넘치는 동무예요. 그의 머리엔 오직 세계를 딛고 올라설 크나큰 의지가 가득차있어요.
그는 늘 말끝마다 이 지구라는 땅덩어리에는 많은 나라가 있다, 그중에서 우리 나라처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분들을 모시고 사는 나라는 없다, 그런 인민이여서 마땅히 맨 앞장에서 달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타는 노력을 해야 한다, 배워야 한다 하구 말하군 해요. 난 그를 꼭 붙잡아두고싶은 욕심이지요 뭐. 그의 성과를 우리 큰벌에 맨먼저 도입하구싶구 우리 큰벌이 맨앞장에 서서 나가고싶어져요.》
용희의 목소리가 격정에 젖어 가볍게 떨렸다.
그의 가슴에 그들먹이 차넘치는 흥분이 자기의 가슴으로 흘러드는것만 같아 춘녀는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용희는 인철연구사와 별로 짝지지 않을거야. 하긴 그런 사람한테 반하지 않을 녀자가 어디 있을라구.)
《누이, 이건 광남이가 쓴 일기예요. 제법 제 속생각을 그려낼줄 알거던요.》
용희는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요사이 선생님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듣군 한다.
선생님은 앞으로 농사도 다 콤퓨터로 조종하는 농업정보화가 실현된다고 한다. 나는 아직 어려 정보공학에 대해 잘 모르지만 듣고보면 꿈처럼 황홀한 우리 큰벌이 눈에 보이는것만 같다.
그날이 멀고 가까운것도 우리들에게 달려있다고했다. 어릴 때 아버지도 이런 이야기를 해주신적이 있다.
요새 엄마도 달라졌다. 전보담 책을 더 많이 읽는다. 선생님에게 아이들처럼 자꾸 묻군 한다.
나는 선생님이 우리와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어마나, 애가 이런 말까지 쓰다니…》
용희가 소리내여 웃었다. 불빛속에 발깃해진 갸름한 얼굴이 드러났다. 별로 점직해하는 그를 못 본척 한채 고개를 돌렸다.
《그 녀석이 엉뚱하구나. 애들 말이라고 해서 귀등으로 흘려선 안돼. 애들의 말도 들을 때가 있는거야. 난 가겠네.》
춘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희는 인츰 인철에게 가보겠노라며 대문밖을 따라나오며 바래워주었다.
다음날 아침 온 작업반이 뒤숭숭해서 술렁거렸다.
용희가 이른새벽에 쌍은리로 약을 가지러 떠났다는것이다.
며칠전부터 아픔을 참아가던 인철연구사가 새벽에 종시 쓰러졌던것이다.
왕진왔던 진료소소장이 산꿀이 좋다고 하는 말을 듣고 산이 많은 고장인 쌍은리로 떠났다고 했다.
거기까지는 30리길이다. 새벽에 떠났으니 빨리 돌아서야 점심전에나 들어설것이다.
춘녀는 부엌을 오락가락하며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탕을 피웠다.
오늘 광남이네가 등산을 간다. 어제 저녁부터 연구사곁에서 밤을 새운 용희가 새벽에 떠났으니 등산준비를 해줄리 만무한노릇이다.
아침에 작업반에 나가서야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집으로 돌아와 광남이의 등산준비로 땀을 뽑고있다.
해가 중천에 이른무렵에야 갑작스레 만든 음식들을 그 애의 가방에 꾸려넣어주었다. 용희에 대한 야속함이 서려돌았다.
《고모, 난 일없어요. 선생님이 빨리 나았으면…》
다행히도 광남이가 불이 일듯이 단 자기의 가슴을 식혀준다.
어느해였던지 용희가 앓는 남편을 위해 밤길을 다녀오던 생각이 났다.
용희는 점심전에 들어섰다. 왕복 60리길을 한겻에 다녀오느라 콩알같은 물집이 발바닥에 생겼고 물벼락을 뒤집어쓴듯 화락하니 젖었다.
열이 떨어지고 한결 나아진 몸을 벽에 기대고앉은 인철이 땀주머니가 되여 들어서는 용희를 한동안 쳐다보더니 뿌옇게 흐려진 눈을 방바닥에 박았다.
《용희동무, 정말 고맙소. 뭐라 해야 할지…》
용희는 그앞에 바투 다가가 죄스러운 목소리로 나직이 속삭였다.
《다 제탓이예요, 제가 너무 욕심만 부렸으니…》
용희는 산꿀을 탄 물을 인철의 손에 들려주며 속눈섭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가볍게 훔쳤다.
저녁녘에 등산갔던 광남이가 돌아왔다.
그는 벽에 기대앉은 인철이를 근심스레 바라보더니 가방에서 무엇인가 꺼내여 내밀었다.
《선생님, 잡숫고 빨리 일어나세요.》
춘녀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아침에 그가 만들어준 만두밥이였다.
광남이가 저는 먹지 않고 인철연구사를 위해 고스란히 가져온것이다.
《글쎄 광남이가 연구사선생을 생각해서 그대로 가져왔구만.》
춘녀가 목이 꺽 메여 한마디했다.
용희도 짐작이 가는지 춘녀와 광남을 번갈아볼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광남이가 불쑥 인철에게 감겨들었다.
《얘, 선생님이 힘들어하신다.》
용희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그러나 말릴 생각은 잊은채 웃고있었다. 그 어린것의 엉뚱한 행동에 용희는 수십리를 달려온 피로도 잊은채 눈물이 글썽해져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큰벌마을이 흥해지려는지 며칠째 좋은 일만 연줄연줄 생겨났다.
큰벌에 내려온 경영위원회 기사장이 모내기한 논들과 모판들을 차례로 돌아보고나서 《큰벌》미생물을 먹인 모판들이 리상적인 수치를 기록했다며 인철연구사에게 굽석 인사까지 하고나서 그의 손을 오래도록 잡았다.
그 희한하고도 이례적인 순간을 목격한 큰벌사람들이 입을 딱 벌리고 경탄의 눈길을 보냈다.
용희는 눈물이 가랑가랑 맺힌 눈을 떨구고 입을 옥물었고 인철은 벌판쪽에 시선을 준채 입귀를 실룩거렸다.
그들을 지켜보던 기사장도 사람좋은 얼굴에 우뚝 선 코를 벌름거리며 손등으로 눈굽을 쑥 문질렀다.
오늘 낮에는 큰벌이 벅적 끓었다.
작년 늦가을부터 종자로 보관했던 우렝이들을 큰벌의 수암천가녁에 붙은 골개논들에 모두 놓아주었다.
벌말이나 갱말의 우렝이들이 쏟아져나왔지만 뭐니뭐니해도 창실이가 길러낸 우렝이들이 제일 컸다. 그는 제가 기른것을 장근우분조인 자기 분조의 풀이 많아 말썽이던 골개논들에 쏟아넣었다.
밤알같은 우렝이들을 내려다보던 장근우가 입이 함박만 해서 창실이를 분조의 우렝이책임자로 하겠다고 용희한테 우겨대는통에 창실이한테 보기좋게 퉁을 맞았다.
《언젠 우렝이같은건 보지도 않더니 이젠 날 책임자로 추천하나요?》
온 벌판이 떠나갈듯 한 웃음이 터졌다.
《우렝이루 김두 잡구 이제 큰벌에 미생물비료까지 쏟아져나와 그 덕을 보는 날엔 우리 큰벌에 쌀사태가 쏟아질거예요. 멀지 않았어요. 두고보세요.》
용희가 그들먹이 차오르는 격정을 이기지 못해 흥분해서 웨쳤다.
사람들은 누구나 말없이 용희를 바라보고있었다.
×
오늘은 인철연구사가 떠나는 날이다.
큰벌을 휘감은 김발같은 안개가 포전길을 꽉 메우며 구물구물 흘러간다.
눅눅하고도 슴슴한 안개가 싱그런 풀냄새를 감싸안고 몰려와 얼굴이며 목언저리를 감돈다.
춘녀는 쉰고개에 이른 풍만해보이는 몸집을 흔들며 걸음을 재촉했다.
머리에 인 오리를 담은 통이 묵직했지만 그는 작업반을 향해 내처 걸었다.
인철연구사가 떠날 때 보내려던 청뒹오리들이다. 그때는 자그마한 새끼들이였는데 이젠 다자란 어미들이다.
휘젓는 손끝에서 김발같은 안개가 흩날린다.
작업반마당에 사람들이 몰켜서있는것이 설핀 안개발사이로 보였다. 가까와질수록 배낭을 진 인철연구사의 자못 서운한 기색이 어린 얼굴과 그의 손을 꼭 잡은 용희의 웃는 얼굴도 보였다.
《용희동무, 사실 난 주저앉을 생각을 했댔습니다. 그때마다 동무의 높은 열정과 지향, 더우기 큰벌과 마을사람들에 대한 동무의 무한한 사랑에 큰힘을 얻었습니다. 이제 〈큰벌〉미생물이 활성화되여 토양에 익숙되는 그때 다시 내려오겠습니다.》
《인철동무, 꼭 오십시오. 가정을 떠나 오직 과학연구에만 묵묵히 전심전력해온 인철동무의 뜨거운 과학세계에 전 큰힘을 얻었습니다. 참…》
용희는 춘녀가 가져온 오리를 담은 통을 받아들었다.
《이걸 가져가세요. 가금학박사인 아주머니에게 보내는겁니다. 약속대로 비육도가 높은 새 품종의 오리를 보내주세요.》
《허, 새로 육종한 비육오리를 토종오리와 바꾼다는건… 이거 우리 집사람이 손해보는게 아닐가요? 하하.》
《그거야 이미 아주머니랑 약속한게 아니예요.》
《아무튼 동문 욕심꾸러기요, 하하.》
《인철동무, 다음부턴 어떻게 시간을 내서라도 꼭 집에 가보세요. 녀자들이란… 집 떠난 남편을 무척 기다린답니다.》
인철의 귀가에 머리를 가져다대고 속살거리듯 하는 용희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춘녀는 얼결에 장근우를 쳐다보았다.
그의 황동빛얼굴이 이지러지더니 약간 거무룩한 입귀로 김빠진 소리가 새여나왔다.
《허-》
장근우는 자기의 실책을 깨달은듯 어처구니없이 웃더니 입을 쩝 다셨다.
《연구사선생, 또 오시우. 우릴 잊지 말구…》
그다음 무엇이라 말하는지 춘녀는 한마디도 가려들을수 없었다.
《그땐 이 장근우가 분조장을 못할거우다. 허, 겨드랑이에 깃털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놈이 날고있는 반장을 어떻게 따라가겠수. 초급일군이라는게…》
잠시후 사람들은 인철연구사를 바래우며 작업반마당을 나섰다.
춘녀는 뜨거운 마음으로 연구사를 따라서는 용희를 이윽히 바라보았다.
(용희, 나만이 아니라 우리 큰벌사람들모두가 널 사랑한다.
너에 대해 큰벌에 헛소문은 났지만 아마 이번일을 두고 진짜소문이 날거야. 우리모두가 너를 사랑한다고…)
춘녀는 이런 생각에 눈굽이 쩌릿이 젖어들었다.
큰벌을 가로질러 흐르는 수암천가에서 한무리의 새떼가 날아오르더니 파란 하늘을 향해 억세게 날개를 젓는다.
춘녀는 그 새무리를 이윽히 지켜보았다.
맨 선두에서 나는 새는 용희처럼 생각되였고 그 무리속에 자기도 있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꼭 그렇게 생각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