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101(2012)년 제6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박 춘 학
모임에 참가했다가 자기 사무실로 돌아온 리학만부소장은 이윽토록 뒤짐을 지고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있었다. 아니, 초점없는 그의 시선은 신록이 짙어가는 창밖의 풍경이 아니라 제 마음속을 헤집고있었다.
방금전이다. 소장방에서 연구소의 중간시험공장을 갱신하는 사업을 빠른 시일에 결속하기 위한 일군들의 모임이 있었다.
모임에는 연구소의 책임일군들과 각 연구실의 실장들, 공장장과 책임기사가 참가했다. 머리에 흰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소장이 자리에 앉은채로 모임의 취지를 알리고 《공장장동무, 그간에 한 사업을 보고하시오.》라고 했다.
쇠물에 절은듯 얼굴이 검스레하고 거쿨져보이는 공장장이 일어나 사업일지를 펼쳐들었다. 그는 최신형의 콤퓨터와 CNC공작기계를 받아온 정형이며 공장의 기본건물확장공사와 부속설비제작 등 지금까지 진행한 일들을 렬거했다.
그가 말을 마치자 소장이 물었다.
《이달안으로 기계설비들을 다 가동시킬수 있겠소?》
공장장이 대답에 앞서 학만부소장을 흘낏 건너다보고나서 목소리를 낮추며 더듬거리였다.
《보충할 전동기만… 들여오면…》
기가 죽고 꼬리가 짤린 어정쩡한 대답에 소장이 머리를 기웃했다. 그는 학만에게 무슨 말인가 할듯 하더니 참아넘기고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공장일군들과 로동자동무들이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지혜를 모으고 내부예비를 탐구동원하여 아름찬 과업을 기어이 해제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할일은 많습니다. 어떻게 하나 우린 자체의 힘으로 해내야 합니다. 그러자면 여기 모인 일군들이 저 공장장동무처럼 일해야겠습니다.》
모두가 공장장을 바라보았다. 학만은 이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이 야속했다. 연구소의 행정사업을 맡아하는 부소장으로서 이번일에 한몫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새로 들여와야 할 전동기문제를 솔선 맡아나섰던것인데 일이 뜻대로 펴이지 않아 속타게 되였던것이다.
사람들이 뭐라겠는가? 저 학만부소장도 인젠 늙었지… 전같으면 단숨에 해제낄 일도 앉아뭉개니…
비난의 얄궂은 목소리가 연방 귀전에 울리는것같았다.
자기가 기계연구사 박진에게 임무를 주어 떠나보내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학만은 자못 진중한 어조로 말했었다.
《중간시험공장을 갱신하는 사업에 여러명이 동원되오. 동무에게도 한가지 맡기려는데 다른 의견이 없겠소?》
머리를 수굿하고 듣고있던 박진이 고개를 세웠다.
《우리 연구소를 위한 일인데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선선한 대답이 마음에 드는듯 학만이 입가에 웃음을 담으며 머리를 끄덕이였다.
《××공장에 가 현실연구과제를 수행하면서 전동기를 몇대 받아와야겠소. 계획은 물려있는 상태요. 빨리 받아와야 할텐데… 아마 우리보다 바쁜 대상들이 많은 모양이요. 하지만 지난 시기 우리 연구사들이 그 공장의 제품생산에서 걸린 기술적문제들을 풀어준 일이 있기때문에 공장책임일군들에게 우리의 딱한 사정을 말하면 모른다고는 안할거요.》
《알겠습니다.》
학만은 신심에 넘쳐있는 박진을 쳐다보고는 사업수첩을 펼쳤다.
학만은 《적소.》 하며 전동기의 용량별대수를 불러주었다. 다 적고난 박진은 쉬운 일같지 않아 눈을 슴벅이며 머리를 기웃거렸다. 그의 심중을 헤아린듯 학만이 짐짓 배포유한 낯색을 해보였다.
《쉬운 일이면 동무에게 맡기겠소? 한번 솜씰 보이오. 내 옆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포를 쏘아주겠으니.… 하여튼 빠른 기일에 받아와야 하겠소.》
학만은 젊은이들처럼 싱긋 웃어보이며 신심을 돋구어주었다.
《난 동무가 잘할수 있으리라고 믿소.》
《고맙습니다. 힘껏 해보겠습니다.》
학만은 기대에 찬 눈으로 젊은 연구사를 쳐다보았다.
3일후 박진은 어머니가 성의껏 꾸려준 도중식사와 현실연구에 필요한 자료들을 넣은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가 마당에 따라나와 옷섶을 여며주며 당부했다.
《얘야, 맡은 일을 잘하고 돌아오너라.》
《명심하겠어요, 어머니.》
박진은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에그, 언제면 제 색시가 알뜰살뜰 보살피며 바래우고 마중하는걸 보겠는지…)
어머니는 느닷없이 젖어드는 눈으로 멀어져가는 아들의 뒤모습을 점도록 바라보았다.
×
박진이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떠나간지도 한달이 넘고있었다.
학만은 바쁜 사업에 부대끼는 속에서도 이제나 저제나 전동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였다. 지원포까지 쏴주었는데도 기쁜 소식은 날아들지 않았다.
아무리 책임적이고 성실한 사람이라 해도 생산이 긴장한 때이니 제품을 빨리 받아오기가 헐치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지원포를 계속 쏘아야 한다. 그런데 누구에게 어떻게 쏜다?
학만의 뇌리에 벙끗 비쳐드는것이 있었다. 자기가 연구소로 조동되여오기 전에 공업대학에서 교원을 할 때의 일이 떠올랐던것이다.
그렇지.…
그의 안개서린 기억의 갈피에 제자들의 어설픈 모습들이 자맥질하듯 언뜻거리였다. 그러는 속에 한 제자의 얼굴이 덤불속의 박꽃처럼 또렷이 안겨왔다. 그가 바로 지금 박진이 가있는 공장을 담당한 지도일군이 아닌가. 그의 도움을 받으리라.…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보던 학만은 한참만에야 그를 찾아 전화를 련결할수 있었다.
《제 리학만입니다.》
송수화기를 통해 흘러드는 목소리.
《아니, 선생님이 어떻게… 그새 안녕하셨습니까?》
《정말 오래간만이구만. 시간을 내서라도 좀 들리군 하오. 보고싶어 그러오.》
《새겨듣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았습니까?》
《사실은 우리 연구소에서 도움받을 일이 생겨 그러오.》
《연구소를 돕는 일이자 나라의 과학기술발전을 위한것인데 팔걷고 나서야지요. 무엇인지 말씀하십시오.》
학만은 사연을 말했다. 그 일군은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그 정형을 알려주겠노라고 하였다.
그 일군이 ××공장 지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지배인의 대답이 석연치 않았다.
《계획에 물린것이라도 더 바쁜 대상도 있고 하니 좀 늦어질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도 최선을 다 하고있습니다.》
《어찌겠소. 지배인동무, 좀 도와주시구려. 옛 스승의 부탁인데… 어떻게 내부예비를 탐구동원해서라도 보장해주십시오. 눈을 꾹 감고 한번만 도와주시오.》
《허참… 좌우간 알았습니다.》
그 일군은 전화를 하고나서 학만에게 알리였다.
《선생님, 지배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생산이 좀 긴장하지만 어떻게든 도와줄겁니다.》
학만은 저으기 흥분하며 그의 말꼬리를 물었다.
《틀림없겠지요?》
《예, 그 지배인은 고집기가 좀 있긴 해도 한다면 하는 일군입니다.》
《알겠소. 정말 고맙소.》
학만은 기분이 둥 떠서 흥얼흥얼 코노래를 불렀다. 전동기를 받아오면 이 부소장이 늙긴 했어도 일을 제낀다는것을 다들 알게 될테지…
그의 가슴은 기대와 자부로 부풀고있었다. 하건만 일이 뜻대로 펴이지 않았다. 제자와 전화련계를 한지도 퍼그나 오래되였지만 박진이 전동기를 인수했다는 소식은 없었다.
학만은 생각다못해 전화로 제자를 다시 찾았다.
스승으로서 체면이 깎이는것 같았지만 별수 없는 노릇이였다.
《안녕하오? 사업에 바쁘겠는데 이렇게 다시 찾아서 안됐소.》
《무슨 말씀을… 전동기때문에 그러시겠지요?》
《아직까지 좋은 소식이 없구만.》
《제 며칠전에 지배인한테 알아봤는데 인츰 해결해주겠답니다.》
《그렇소? 그럼 저리 자동차를 보내도 일없겠는지…》
《그렇게 하십시오. 좀 다가붙어 보채야 합니다. 우는 애기 젖준단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알만 하오.》
학만은 흐려졌던 기분이 다시 맑아졌다. 이틀후 그는 연구소의 화물자동차를 ××공장으로 출발시켰다.
그로부터 며칠후였다.
학만이 습관대로 30분 먼저 출근하여 청사를 돌아보았다. 구내길에 우거진 넓은잎정향나무가 파란 가지들에 연보라빛꽃송이를 듬뿍듬뿍 피워물고 향기를 뿜어대고있었다.
이윽고 사무실로 돌아와 푹신한 의자에 몸을 실은 학만은 몸도 마음도 날을듯 한 기분이였다.
새시대의 과학기술발전추세에 맞게 중간시험공장을 갱신하면 나라의 경제건설에 필요한 기계제품생산에 큰 기여로 되리라.…
그가 흐뭇한 명상의 노을속에 잠겨있는데 《똑똑》 출입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였다.
《예- 들어오시오.》
대답을 주기 바쁘게 얼굴이 동실한 청년이 들어왔다. 전동기를 실어오려고 떠났던 운전사였다.
《아- 빨리 왔구만. 수고가 많았겠소.》
학만이 기쁨에 겨워 불쑥 일어서는데 운전사는 입을 꾹 다물고 대꾸를 안했다.
《왜 그러고있소? 여기 와앉소.》
학만이 앞상곁의 걸상을 내밀어주며 아량을 보이는데 운전사가 볼부은 소리를 했다.
《못 실어왔습니다.》
《뭐요?》
전동기를 실어오지 못했다는 소리에 학만의 몸이 졸지에 굳어지고 얼굴에 어리였던 미소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왜 못 실어왔소?》
《공장에서 해결해준 전동기를 박진선생이 다 반환했으니 어떻게 실어오겠습니까?》
맑은 날의 벼락이라 학만은 억이 막혀 한참이나 운전사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왜 반환했다우?》
《까닭은 모르겠습니다.》
《내가 한 말을 정확히 전달했소?》
《두세번 곱씹어 말해도 들은척 안했습니다.》
학만은 더 묻지 않고 원탁에 다가가 노르끼레한 약곽에서 혈압내림알약을 손바닥에 털어내여 입에 넣고 유리고뿌에 보온병의 물을 따라 꿀꺽꿀꺽 넘기였다. 그리고는 자기 자리에 와앉으며 운전사에게 일렀다.
《알겠소. 가보시오.》
운전사는 꾸뻑 인사하고 방에서 나갔다. 학만이 송수화기를 잡아들고 전화기번호판단추를 꾹꾹 누르고나서 《부소장이요. 왔다가시오.》라고 했다.
얼마 안있어 도드라진 이마에 눈정기가 도는 기계연구실장이 방에 들어왔다. 학만이 저으기 갈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동차가 허탕쳤소. 공장에서 해결해준 전동기를 박진동무가 다 반환했다누만.》
《예?!》
실장의 눈이 화등잔같이 되였다.
부소장이 애써 받아오게 한것을 반환하다니?…
그는 부소장을 보기가 딱했다. 흥분으로 하여 관자노리의 피줄이 불어나고 목소리가 떨리는 그를 어떻게 위로하고 진정시켜야 할지 궁리가 나지 않았다.
두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마주하고있었다.
《그 동무를 소환하시오.》
고요를 깨뜨리며 울리는 소리에 실장이 흠칫했다.
《부소장동지, 좀더 기다려보지 않겠습니까? 매사에 신중하고 맡은 일을 책임적으로 하는 그 동무가 다른 대책이 없이 그러지는 않았을겁니다.》
《나도 그런 생각이 없지 않소. 하지만 그 동무의 현실연구기간이 이삼일이면 마감이요. 빨리 돌아와 연구과제를 수행하도록 하시오.》
부소장은 짐짓 흥분을 누르며 나직이 말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는 짙은 불만과 날이 선 추궁의 빛이 어리였다.
실장은 자기 실의 임무이기도 한 이 일이 성사되지 못하는것 같아 난처했지만 부소장의 단호한 결심에 맞대세울 말마디가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다가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
박진은 소환되였다. 연구소정문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형언할수 없는 부드럽고 따스한 정에 휩싸였다. 접수실에 앉아 직일을 서는 말쑥하고 아련한 처녀연구사가 머리를 까딱이며 밝은 웃음을 보내였다.
알른알른한 복도와 층계, 연구사들이 출입문을 열어놓고 콤퓨터나 설계도판을 마주하고 탐구에 여념이 없다.
박진은 그 모습들이 눈에 익고 몸에 배인것이였지만 감흥이 새로왔다.
그가 부소장방에 손기척을 하자 들어오라는 대답소리가 울려나왔다. 박진은 성큼 마주 나서며 반겨줄 부소장을 눈앞에 그려보며 방으로 들어갔다.
《부소장동지, 안녕하십니까?》
정담아 보내는 인사였건만 학만은 앉은자리에서 흘끔 띠여보고 느슨하게 《수고했소.》 하고는 책상우의 문서를 뒤적이는것이였다. 생각밖으로 서먹해지는 분위기에 박진은 주춤 멈춰서며 어설프게 물었다.
《저를 찾았습니까?》
《그렇소.》
《너무 지체되여 그럽니까?》
학만이 눈길을 마주 세우며 반문했다.
《어려운 때이니 지체될수도 있소. 그런데 받아놓은 전동기는 왜 반환했소?》
《알아보니 그것들은 새로 건설한 방직공장에서 가져가게 된것들이였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하지만 조절이나 추가라는 말도 있지 않소?》
《전… 그렇게 할수 없었습니다. 공민의 량심이 있지 않습니까?》
학만은 입을 다물었다. 젊은 연구사가 공민의 량심을 꺼드는것이 참으로 뜻밖이였던것이다. 생각없이 어슬녘에 골목길을 걷다가 담벽에 이마를 부딪친 심경이였다.
그는 지금껏 사업이나 생활과정에 공민이란 말에 뜻을 담아 생각해보았거나 입에 올려본적이 별로 없었다.
어느해인가 있은 일이 뇌리에 피끗거리였다.
《여보, 당신 공민증 주세요.》
안해가 하는 말이였다.
《그건 뭣하러?》
《상점에서 세대별공급과 관련하여 필요하대요. 인민반장이 밖에서 기다려요.》
《어데 뒀는지 모르겠소. 좀 찾아보우.》
《제 공민증 둔데야 제가 알아야지 누가 알겠어요?》
안해가 여기저기를 뒤져 공민증을 찾아쥐고 혼자 하는 말이 곱지 않았다.
《공민증 중한줄 모르는분이 어떻게 공민의 본분을 제대로 지킬가?》
학만은 회상이 시답지 않은듯 머리를 저었다.
그런 일이 있었기로서니 내가 사업을 태공했거나 생활을 잘못했는가? 아니, 그런 일은 없었고 있을수도 없다. 그런데 저 연구사는 괜히 공민의 량심을 꺼들며 마음을 찌르는걸가.
학만이 어지간히 꼬인 눈초리로 박진을 쳐다보았다.
《알만 하오. 공민으로서 국가의 법규정과 질서를 지키겠다는건데 생각이 기특하오. 하지만 우리는 당장 중간시험공장을 갱신해야 한단 말이요. 시간이 없다는걸 동무도 알지 않소. 그런데 받아놓은 전동기를 돌려주다니…》
박진이 피뜩 눈시울을 들어올렸다.
《부소장동지, 그렇지만 어떻게 그렇게야…》
부소장을 바라보는 박진의 눈이 타는듯 번뜩이였다. 그는 입을 다물었으나 마음속에서는 꿈틀꿈틀 솟구치며 준렬히 웨치는것이 있었다.
《그가 누구이건 공민이라면 사회공동의 요구와 리익을 옹호고수하는데서 책임을 느껴야 하며 법규정과 질서를 자각적으로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박진은 자신이 웨치는 소리가 귀전에 쟁쟁히 울려오는것만 같았다.
학만은 젊은 연구사의 태도에 인츰 말머리를 돌리였다.
《론쟁을 하려는게 아니요. 한가지 명백한것은 동무가 이번 일을 감당해낼수 없다는것이요.》
단호한 부소장의 말에 박진은 낭떠러지에서 굴러내리는것 같아 몸이 오싹했다. 그는 한발 다가서며 말했다.
《부소장동지, 왜 그렇게만 생각하십니까? 저를 믿어주십시오.》
간절한 청이건만 학만은 마주 세웠던 눈길을 거두며 도리머리를 저었다.
《동무는 현실연구도 끝났으니 연구과제를 수행하시오. 바쁜 고비나 넘기고 내가 공장에 직접 가든가 다른 사람을 보내겠소.》
부소장의 음성은 높지 않았으나 얼굴에는 노기와 고집의 빛이 짙었다. 박진은 그의 방에서 나와 자기 연구실로 돌아왔다. 책상을 마주하고 앉으니 불뭉치같이 치미는 분을 누를수 없었다.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다니…
혁명전사는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는 죽을 권리도 없다. 이것은 내가 눈보라 울부짖는 겨울밤 별무리를 벗삼으며 최전연초소군무를 서고 험한 산발을 톺아넘으며 수백리 행군을 다그치는 병사시절부터 가슴에 품고 다져온 의지이고 신념이 아니였던가.
박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제꼈다. 정원에 실실이 휘늘어진 버들숲에서 매미들이 승벽내기로 울어댄다. 저것들은 어찌하여 저다지도 애가 끓게 울어댄단 말인가.
중천에 해가 쟁글대며 열기를 뿜어대는 한낮이였다. 몇명의 연구사들이 점심을 먹고 마당가의 단풍나무밑에 둘러앉아 휴식의 한때를 즐기고있었다.
한 연구사가 《박진동무, 몸이 축갔구만. 외지에서 고생이 많은게지…》 하고 말을 걸었다.
《고생이야 뭘… 난 이번에 과업을 한가지 수행하지 못하고 돌아오니 동무들 보기 낯이 뜨겁소.》
《우리도 들었네만 너무 마음쓰지 말라구.》
다른 목소리가 끼여들었다.
《그 이야긴 그만하고 박진동무를 위해 이번 일요일에 국수집에나 가세. 다들 어때?》
《좋은 의견이요.》
모두 기뻐하는데 박진이 진심으로 인사했다.
《고맙소. 그동안 우리 어머니가 감기에 걸려 자리에 누웠을 때 동무들이 여러번 병문안을 했더군.》
《별소릴 다 하는군. 서로 돕는거야 우리 식 생활기풍이 아닌가. 그런데 한가지 의견이 있소. 고마움에 대한 인사는 기본 영란동무에게 해야 하오. 그가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서 때식도 끓여 대접하고 약도 제시간에 드시도록 했소. 그런데 그에게는 한마디의 인사도 없나?》
《이 친구 코막고 답답하군. 그런 인사는 아무데서나 막 하나? 달빛이 물결을 타고 춤추는 시내가의 둔덕에 나란히 앉아 속삭이며 하는거지.》
누군가의 말에 영란연구사가 얼굴을 붉혔다.
《어머니가 칭찬하시더군. 마음씨도 곱고 일도 깐지고 알뜰하게 한다고 말이요.》
진심어린 말에 모두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은 머지않아 박진이와 영란연구사가 행복한 가정을 이루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던것이다.
다음날 오후 기계연구실에서 월사업총화모임이 있었다.
박진이 그간 현실연구정형을 보고했다. 모두 진중한 자세로 듣고있었다.
실장은 보고가 끝나자 박진이 제출한 현실연구자료들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다들 읽어보시오. ㅌ기계설계에 리용할 가치가 있소. 들끓는 생산현장에 들어가야 이런 귀중한 자료를 잡아쥘수 있단 말이요. 현실연구를 잘했소.》
실장은 더없이 만족해하였다.
전동기문제는 론의되지 않았다. 여유있게 사색하며 제기되는 일처리를 능란하게 하는 실장이 개별적으로 자초지종 물을것이 분명했다.
×
박진이 ㅌ기계설계에 달라붙은지 며칠째 되는 어느날 연구소정문에 화물자동차 한대가 와 멈춰섰다. 운전칸에서 얼굴이 검붉은 중년사나이와 예쁘장한 젊은 녀인이 내렸다.
접수대기실로 들어온 그들은 《소장동지를 만나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연구소에서 쓸 전동기를 싣고왔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소장동지가 안계시니 내 곧 부소장동지를 찾겠습니다.》
전동기를 싣고왔다는 소식에 학만은 송어 뛰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는듯 문밖을 나섰다.
(아무렴, 그럴테지. 우에서 준 지시인데 제 아무리 코대 센 지배인이라도 수염을 뻑 쓸고있을수 없지.)
그는 층계를 내려 접수대기실로 갔다.
《제 부소장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공장 직장장입니다. 이 동무는 려관 관리원입니다.》
《그렇습니까? 자, 어서 들어가십시다.》
학만은 손님들을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해빛에 반짝거리는 밤색의 량수책상과 그앞에 놓인 긴 앞상, 책상우에 무둑히 쌓인 과학기술도서들, 기동상태에 있는 콤퓨터, 창턱에 놓인 하얀 사기화분에는 진분홍꽃송이들이 호함지다.
손님들은 어딘가 류다르고 새삼스러운 기분에 젖어 방안을 살피였다.
학만의 흥그러워진 목소리가 그들의 기분을 흔들어깨웠다.
《그런데 어떻게 되여 동무들이 수고로운 걸음을 했습니까?》
물음에 직장장이 범상히 대꾸했다.
《수고랄게 없습니다. 박진연구사가 기계공업발전을 위해 애쓰는데 저희들이 좀 도우면 안되나요?》
듣기에 좋은 말이긴 하지만 그 속내를 알수 없어 학만이 《허허.》 하고 웃었다.
직장장이 말을 이었다.
《박진연구사는 우리 공장에 와서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박진연구사는 짬시간마다 우리 직장에 들려 로동자들의 기술학습도 도와주고 전동기조립도 함께 하면서 기술자, 기능공들의 콤퓨터학습을 성심성의로 도와주었습니다.
그가 우리 나라에서 이룩된 과학기술성과들을 해설할 때면 굉장했습니다. 우리 직장뿐아니라 온 공장 사람들이 모여들군 했지요. 그래서인지 모두가 그를 따랐지요.
결국은 이렇게 그를 도와나서게 되였습니다.》
묵묵히 듣고있던 학만이 《음- 그렇게 되여 싣고왔구만.》 하며 감격해하였다.
직장장이 머리를 끄덕이며 생각깊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실 연구사동무는 쉽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차례진 전동기의 내막을 알고는 전동기인수를 거절했습니다. 공장책임일군이 문제될게 없으니 연구소에서 먼저 가져가라고 했지만 끝내 듣지 않고 방직공장에 전동기들을 돌려주었지요.…》
그때 박진은 생각이 많았다. 막상 전동기를 받고보니 이 공장에 와서 보고 들은것들이 눈에 삼삼하고 귀에 쟁쟁했다.
어느날 박진이 지배인실에 들어가니 한 공장의 자재인수원이 목청을 돋구며 지배인에게 따지고있었다.
《지배인동지, 우리 공장에서 받게 된것 가운데서 일부를 왜 딴데 돌립니까?》
지배인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사업수첩에 무엇인가 적으면서 례사롭게 대답했다.
《낸들 어쩌겠소. 거기서 더 급하다니…》
《이 공장엔 공급질서도 없습니까?》
《누가 없다고 했소?》
《지배인동지는 중요한 기업소를 책임진 일군인것만큼 마땅히 책임적으로 공급해야 하지 않습니까? 지배인동지의 그릇된 일처리때문에 우리 공장이 지장을 받고있습니다.》
《허- 걸고들지 마오. 동무가 한번 이 자리에 앉아보오. 생산량은 많지 않은데 저마끔 먼저 내라구 조르고 을러메니 달라는 사람은 애국자같고 못 주는 이 지배인은 무엇같소?》
지배인은 자재인수원에게 슬쩍 웃어보이며 나직이 말했다.
《며칠만 참소.》
자재인수원은 더 할말을 찾지 못한듯 입을 꾹 다물고있다가 씽하니 방에서 나갔다. 지배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듯 무게있고 여유있는 손동작으로 송수화기를 잡아들었다.
《기사장을 찾소.》
그는 송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문가에 서있는 박진을 쳐다보았다.
《연구사동무군, 조급해말고 기다리오.》
박진이 몇번이나 들어온 소리였다.
어느날 지배인방에서 나온 그가 말없이 공장구내를 걷고있는데 조립직장장이 전에없이 웃으며 다가와 귀속말로 속삭이는것이였다.
《공장에서 연구소를 도와주자고 결심을 한 모양이요. 그러니 인차 해결될거요. 그럼 난 회의가 있어서…》
그는 말꼬리를 뒤에 달고 청사안으로 사라졌다.
박진은 가슴이 울렁거리였다. 꿈결에 크고 아름다운 꽃송이들을 한아름 안아보는 심정이였다. 전동기를 받게 되였으니 부소장이 준 임무를 수행한 셈이고 더욱 기쁜것은 현실연구의 소득이 큰것이였다.
연구소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들끓는 공장에 오니 눈이 번쩍 뜨이고 가슴이 탁 트이는것만 같았다.
현장기사들이나 기능공들은 제품제작에서 개선해야 할 이런저런 기술적문제들을 말해주었다.
그런 속에서 박진은 자기가 연구과제로 맡아 설계하는 ㅌ기계의 효률과 능률을 더 높일수 있는 실마리도 잡아쥐게 되였던것이다.
그는 날을듯 한 기분으로 공장정문을 나와 여유있는 걸음으로 려관을 향해 갔다. 그러던 그는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환희로 달아오른 가슴 한구석이 선뜩해났다. 무엇때문일가.
전동기를 받는데서 어딘가 정당치 못한것이 있지 않는가.
려관방에 들어선 그는 책상에 앉아 턱을 고이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기의 량심에 묻고싶었다.
이것이 과연 옳은 처사일가.
나는 지금껏 누가 보건말건 량심적으로 살아왔다. 깨끗한 량심을 간직했기에 나라와 인민앞에 부끄럽지 않았고 연구사로서의 보람과 긍지를 안고 사는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아니!
박진은 분연히 자리를 차고 일어나 먹물같은 창밖을 내다보며 새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아침 일찍 려관에서 나와 공장으로 걸음을 다그쳤다. 퍼그나 먼 거리여서 시간이 걸리였다.
조립직장마당에 이르니 로동자들이 연구소에 보낼 전동기들을 자동차에 실으려고 서두르고있었다. 직장장이 박진에게 눈을 끔뻑해보이며 손으로 전동기들을 가리켰다.
박진은 그에 아랑곳 않고 로동자들을 둘러보았다.
《이거 수고를 끼쳐 미안합니다. 저것들을 자동차에 싣지 마십시오.》
아닌밤중에 홍두깨같은 소리에 로동자들의 눈이 둥그래졌다. 직장장도 영문을 몰라 박진의 얼굴만 지켜보았다.
박진은 그러는 그들에게 가깝게 다가섰다.
《동무들이 성심성의로 생산한 이 전동기들을 공급순차에 따라 받게 된 기업소에 책임적으로 정확히 보내줍시다. 이렇게 하는것은 나라와 공장의 주인인 동무들이 지켜야 할 도리이고 의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로동자들은 그의 말을 듣고 심정이 리해되여 머리를 끄덕이였다.…
직장장은 학만부소장을 쳐다보며 이런 말로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
《오랜 기간 전동기를 해결받으려고 애쓰다가 빈손으로 공장정문을 나가는 박진연구사의 모습을 지켜보는 저희들은 생각이 깊었답니다.》
학만은 직장장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있었다.
그러나 가슴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충격으로 하여 은근히 달아오르고있었다.
려관관리원이 학만의 얼굴을 쳐다보며 이야기의 문을 열었다.
《박진선생은 아침에 려관을 나섰다가 어슬무렵에야 돌아오군 했어요.》
이렇게 말꼭지를 뗀 그는 박진에게 있은 일을 감회깊게 들려주는것이였다.
어느날 밤이였다. 고층살림집들의 창들에서 밝게 빛나던 불빛도 차츰 자취를 감추고 거리에 오가는 사람도 뜸해지고 려관으로 찾아드는 손님도 없었다.
밤근무를 서던 관리원이 조용히 접수실에서 나와 제기된것들이 없는가 돌아보려는데 갑자기 려관에 깃든 고요를 깨뜨리며 박진이 불룩한 마대를 등에 지고 가까스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것이 아닌가. 그는 눈이 둥그래서 마주보는 관리원에게 웃어보이려고 했지만 그럴수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허공에서 떨어지는듯 아찔해났던것이다. 그는 가까스로 마대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 푹 쓰러졌다.
관리원이 달려가 그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다급히 사람들을 불렀다.
제일먼저 달려온 한 청년이 성큼 다가들어 박진의 몸을 일으켜 자기 가슴에 껴안으며 《빨리 의사를 부르시오.》 하고 청을 돋구었다.
얼굴생김이 말쑥하고 의젓해보이는 중년녀인이 둘러선 사람들을 비집고 나와 환자에게 다가섰다. 어느 군인민병원 내과의사인데 도인민병원에 환자를 후송하고 려관에 들고있었던것이다.
그는 의사특유의 시선으로 박진의 눈동자를 유심히 살피고 손목을 잡아 맥을 짚어보았다. 그리고는 위생가방에서 약곽을 꺼내들고 그안에서 하얀 알약을 집어내여 환자의 혀밑에 밀어넣어주었다. 그런지 얼마 안있어 박진이 《후-》 꼬리긴숨을 내쉬였다.
사람들이 그를 부축해가지고 의사와 함께 그의 방으로 올라갔다.
일은 이렇게 된것이였다.
그날 아침에 박진은 시에서 60여리 떨어진 어느 한 공장으로 갔었다.
훤칠한 이마에 눈이 서글서글한 지배인은 그가 찾아온 사연을 말하자 이윽히 생각을 더듬더니 《알겠습니다. 도와드려야지요. 창고장한테 전화를 걸어주겠으니 창고에 가보십시오.》라고 하는것이였다. 박진은 더없이 고마왔다. 그는 설레는 가슴으로 지배인방에서 나와 공장구내의 뒤켠에 자리잡은 창고로 갔다.
창고앞에 쉰고개를 넘었을가싶은 아바이가 나와서고 그의 곁에 빨간 수건을 머리에 쓴 젊은 녀인이 서있었다.
박진이 자기 소개를 하자 아바이가 소탈하고 구김새없는 표정으로 맞아주었다.
《창고장입니다, 이 동문 창고원이고. 지배인동지한테서 지시가 있었습니다. 들어가봅시다.》
창고안으로 앞서 들어가던 아바이가 무춤 멈춰서며 《저거요.》 하고 손을 들어 가리켰다.
구석바닥에 거밋한 전동기가 항아리모양으로 웅크리고있었다. 그것을 본 박진이 벌씬 입을 벌리며 기뻐했다. 아바이가 창고원에게 일렀다.
《페기한지 오랜것이니 해체하기가 조련찮을거요. 동무가 도와드리오.》
《알겠어요.》
창고원이 대답하자 아바이가 《도와드리면 좋겠는데 급한 일이 있어놔서…》 하며 미안해하는것이였다.
《일없습니다. 이렇게 페기된 전동기를 넘겨준것만 해도 고마운데… 어서 가보십시오.》
박진이 창고장과 인사를 나누는데 잠간 자리를 떴던 창고원이 전동기를 해체할수 있는 공구들을 가지고왔다.
진심으로 되는 고마움을 표시한 박진은 웃도리를 벗어놓고 나사틀개를 집어들었다. 오랜기간 돌리지 않아서인지 볼트가 잘 풀려나오지 않았다.
한동안 시간이 흘러서야 박진은 전동기를 해체할수 있었다.
박진의 이마와 볼로 땀이 흘러내리였다. 곁에서 공구를 섬겨주던 창고원이 그에게 수건을 내밀어주며 귀띔했다.
《좀 쉴겸 식사하고 오자요.》
박진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오후 2시…
《하- 이거 미안하게 됐군요. 저때문에… 어서 가 식사하십시오.》
《같이 갑시다. 식당에 말해뒀어요.》
《내 걱정 말고 얼른 가십시오.》
《선생님을 놔두고 밥이 목으로 넘어가겠어요?》
《바빠 그럽니다. 래일 아침에 이걸 싣고가야 합니다.》
《원참, 발등에 불이 달렸군요.》
《그렇게 됐나봅니다.》
박진이 더 할말이 없어 그러는데 창고원이 그의 옹색한 처지를 받아주었다.
《정 그렇다면 손댄김에 마저 제낍시다.》
창고원도 점심식사를 단념하고 다가붙었다. 그들은 해체한 전동기에서 동선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회수한 동선과 기타 필요한 회수품들을 마대에 넣고나니 저녁무렵이 되였다.
박진은 짐을 짊어지고 공장정문을 나섰다.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뻐스정류소를 바라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정류소에 거의 당도했는데 그만에야 마지막차가 떠나가고있었다.
두팔을 늘어뜨리고 사라져버리는 뻐스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박진은 입술을 사려물고 어깨에 멘 짐끈을 부여잡으며 힘있게 발걸음을 떼였다.
하늘가에 흩어진 구름송이들을 장미빛으로 물들이던 저녁노을이 사라지고 땅거미가 깃들기 시작했다.
절반가량 왔을가 한데 이제는 다 말라버린듯 가슴과 등골로 흘러내리던 땀도 발이 끊기고 온몸에 기운이 빠져 짐을 진채로 땅속으로 잦아들것만 같았다.
하지만 박진은 어떻게 하나 목적지에 가닿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걷고걸어 려관에 들어섰던것이다.…
자리에 누웠던 박진은 퍼그나 시간이 흘러서야 눈을 떴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해빛에 방안이 밝아졌다. 어제 자기가 공장에 갔던 일이며 려관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둘러싸고 술렁대던 모습들이 엷은 안개속의 풍경처럼 눈앞에 얼른거리였다.
침대에서 일어나 찬물에 세면을 하니 머리는 거뜬한데 가슴과 다리는 여전히 떨렸다.
식당에 내려가 따끈한 배추국에 밥을 먹으니 몸이 후끈해나고 진해버렸던 힘이 되살아나는듯 하였다.
박진은 식사를 하고 려관마당에 나와 가슴을 펴고 숙연히 머리를 들었다.
눈부신 해빛을 받아 설레이는 가로수들, 화려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누비며 오가는 사람들, 달리는 뻐스, 무궤도전차들…
새아침을 맞은 거리는 풍만하고 아름다운 정서를 자아내고있었다.
박진은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했다. 차사업소에 들려 ××공장방향으로 가는 차편에 그간 수집한것들을 싣고가 친숙해진 직장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전동기를 조립하리라.…
그가 려관마당을 벗어나려는 순간이였다. 뒤에서 《연구사선생-》 하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려관관리원이 《전보 왔어요-》 하며 종종 걸음으로 다가오고있었다. 박진이 그에게서 전보용지를 받아서 보니 뜻밖에도 이런 글이 찍혀있었다.
《즉시 돌아올것.》
…
려관관리원의 이야기를 듣는 학만의 숨결이 높아지고있었다. 관리원이 눈을 삼박이며 말을 이었다.
《박진선생은 낮차로 떠났어요. 저희들은 연구사선생이 돌아오기를 손꼽아기다렸지만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달안으로 연구소에 전동기를 싣고가야 한다던 선생의 말이 저희들의 가슴에 얹혀돌았어요. 그래서 려관에 묵고있는 한 운전사에게 부탁하여 선생님이 수집해놓은것들을 싣고 공장에 갔답니다.》
곁에서 듣고있던 직장장이 그의 말에 끈을 달았다.
《우린 며칠간의 과외작업으로 려관에서 싣고온것들을 소재규격별로 재생하여 전동기조립에 달라붙었습니다. 사실을 알게 된 공장책임일군도 제 일처럼 여기고 부족되는 소재를 기꺼이 보장해주었답니다. 려관에선 후방사업을 들이대구요.》
직장장이 하던 말을 멈추며 관리원을 슬쩍 넘겨보았다. 관리원이 생글거리며 받아주었다.
《정말이예요. 재미나고 힘이 솟았어요.》
《이런… 려관일도 바쁘겠는데 그런 수고까지…》
학만이 송구해하는데 관리원이 금시 정색을 하며 마주보았다.
《부소장동지, 박진연구사선생은 우리 려관에서 쓰는 물을 효과있게 쓰면서 랑비를 없애도록 자동흐름식보조설비를 멋지게 꾸려주었어요. 연구사선생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시공도 하면서 저희들과 함께 밤을 지새우군 했답니다.
다들 말하지요. 저런 선생을 데리고 사업하는 일군들은 얼마나 좋을가 하고 말예요. 부소장동지, 출장오시면 우리 려관에 드십시오. 식사랑 잠자리랑 잘해드리겠습니다.》
학만은 저으기 달아오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말만 들어도 고맙군요. 려관동무들이나 직장동무들에게 고맙다는 저의 인사를 꼭 전해주십시오.》
학만이 말을 마치는데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송수화기를 드니 귀에 선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공장 지배인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제 부소장입니다.》
《우리 동무들이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제 방에 와있습니다. 전동기를 보내주어 감사합니다.》
《제가 받을 감사가 아닙니다. 박진연구사가 받아야지요. 저는 이번에 그 연구사한테서 많은것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그 동무처럼 국가적립장에서 높은 책임감을 가지고 사업했더라면 더 많은 제품을 생산했겠는데 하고 가슴깊이 반성했습니다.》
지배인과 대화하는 학만의 목소리가 떨리고 가슴속에서는 뜨겁고 묵직한것이 쿵쿵 울리고있었다.
아, 박진은 바로 그런 새 세대 지식인이였구나.
저렇게 소탈하고 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존경과 사랑을 받는 그를 나는 어찌하여 그리도 모질게 꾸짖고 괴롭혔는가.
나라의 번영과 부흥을 위해 바치는 그의 깨끗한 량심, 불같은 마음을 보지 못했다.
어째서? 그 고결한 품성을 소중히 여길만 한 정신적높이에 내가 서있지 못한탓이지.…
학만은 박진을 찾으려고 기계연구실에 전화를 걸었다. 누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때에야 롱구장에서 점심시간마다 각 연구실별 대항경기가 진행된다는것을 학만은 새삼스럽게 상기하였다.
그는 가볍게 몸을 일으키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간 기다려주십시오. 우리 박진동무를 만나봐야지요? 제 곧 데려오겠습니다.》
그 말에 직장장과 관리원의 얼굴에 담뿍 환희의 빛이 어리였다.
우리 박진동무! 그 범상스러운 부름속에 얼마나 부드럽고 뜨거운 정이 넘치고있는가.
그들은 출입문을 나서는 부소장을 정겨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려깊고 인정이 많은 사람에게 마음이 쏠리는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