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99(2010)년 제11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땅과 함께 전해지는 이야기

(2)

정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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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주형섭은 낮과 밤이 따로없이 논배미에 붙어살다싶이 했다.

쌀쌀한 가을바람이 가벼운 삼베등거리만 걸친 그의 몸을 으스스하게 했다. 그는 초조한 마음을 달랠길없어 논에 들어가 여기저기로 돌아다니며 무거워지는 벼이삭들을 손끝으로 더듬어보았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가을을 해도 되겠군.》

형섭은 혼자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결에 논벌은 어둠에 잠기고있었다.

형섭은 내가에 매여놓은 점박이황소에게로 다가가 길게 드리운 고삐를 사려들고 내물을 건넜다. 느릿느릿 가고있는 황소를 따라 시적시적 걷고있는 형섭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침울해보였다.

12살나던 해에 부모를 다 잃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살아가던 형섭은 지주 최가네 집에 꼴머슴으로 들어갔다.

8마리나 되는 엄지소와 4마리의 송아지를 방목하는것도 힘에 겨웠지만 매일 한지게씩 바쳐야 하는 겨울먹이풀때문에 언제한번 허리를 펼새가 없었다. 여름엔 찌는듯 한 뙤약볕아래서 소와 함께 더위에 시달려야 했고 겨울엔 귀가 얼어터지는 혹한속에 소들과 함께 외양간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그래도 소들에게는 덕석이라도 차례졌지만 형섭은 외양간건초더미속에서 개처럼 머리를 틀어박고 자기를 두고 먼저 간 부모들을 찾으며 슬피 울다가 잠들군 했다.

최웅배지주놈은 그가 일을 잘하지 못한다고 늘쌍 말채찍으로 피터지게 때렸고 지주녀편네는 그의 귀박죽이 빠지도록 잡아끌어 외양간기둥에 탕탕 머리를 짓쪼아놓군 했다.

그런 날이면 보잘것없는 저녁밥마저 차례지지 않았다. 거기에 또 애비를 닮아 악착한짓은 도맡아놓고 하는 아들놈은 격검채로 치고 발길질을 해대여 어느 하루도 얼굴이 퍼렇게 멍들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이런것으로 하여 형섭은 항상 공포에 질려있었고 자그마한 일에도 흠칫흠칫 놀라군 했다.

그의 소년기는 소외양간구석에서 눈물속에 흘러갔고 어느덧 청년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들바람에 그슬려 나무등걸처럼 겉말라보이는 군밤색의 둥그런 얼굴에선 언제한번 밝은 빛을 찾아볼수 없었다. 어질고 순한 눈길, 모난데 없는 턱을 따라 길게 돋아난 수염들로 하여 그의 얼굴은 한결 더 컴컴해보였다.

어릴적부터 고역에 시달린탓인지 그의 등허리는 늙은이의 등처럼 구부중했고 몸을 가리운 토스레옷은 비참한 그의 처지를 적라라하게 보여주고있었다. 하지만 얼어터지고 주눅이 든 가슴에도 소박한 꿈은 있었다.

거부기잔등만 한것이라도 제땅을 가지고싶었던것이다. 그래서 친하게 지내던 영세와 강주변의 땅을 일쿠다 최지주에게 들켜 졸경을 치르기도 했지만 그 꿈만은 버릴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늘 머리를 숙이고 땅만 보며 다녔다.

땅, 형섭은 꿈에도 이것을 소원했다. 하지만 땅은 고사하고 빚만 자꾸 늘어갔다. 제땅 한뙈기 못가져보고 집도 없이 머슴을 살아야 하는 인생을 저주하며 눈물 흘린 밤은 그 얼마였던지…

그러던 형섭이에게도 사람답게 살 행복이 찾아왔다. 민족의 어버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강도 일제를 쳐부시고 조국을 찾아주신것이였다.

꿈같으면서도 꿈이 아닌 행복한 날과 달이 흘렀다. 지긋지긋하던 머슴살이에서도 풀려나고 그렇게도 소원하던 땅도 분여받고 얌전한 처녀를 안해로 맞아들이고…

 

생각에 잠겨 천천히 마을길을 걸어가던 형섭은 인기척소리에 눈길을 들었다.

《이거 주서방 아니슈?》

어둠속에서 탁하고 갈린듯 한 취한 목소리가 울리더니 이어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왔다.

형섭은 저도 모르게 이마살을 찌프렸다. 마을에서 건달군으로 소문난 량용구였다.

《아, 형님은… 내가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꺽꺽 딸꾹질을 하며 조롱하는듯 한 눈매로 형섭을 흘겨보는 그에게선 역한 술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자네 병때문에 군대에 못 나간다구 하더니 술을 마시는걸 보니 다 나은 모양이군.》

《다 망한 세상에 이제 와서 콩이야 팥이야 그걸 따져서 뭘하겠수. 난 꾀병을 하느라 안 나간거구 형님은 사지판이 무서워 안 나간거구… 다 같구 같은거지.》

용구는 이마우에 깊숙이 내리썼던 모자를 밀어올리며 시까스르는 어조로 말했다.

《뭐라구? 알지도 못하면서…》

《아, 사실이 그렇지 않소.》

《됐네. 술을 마셨으면 어서 집에나 가게.》

형섭은 소고삐를 잡아당기며 걸음을 옮겼다.

《형님… 가더라도 내 말을 마저 듣고 가라구요.》

용구는 비칠거리는 걸음으로 뒤따라오며 계속 말을 이었다.

《형님은 아직 모르고있지요? 인천에 미군이 상륙했대요. 읍거리에는 벌써〈치안대〉가 조직되구요.》

《그게 무슨 소리야?》

두세발자국 앞서걷던 형섭은 그 자리에 흠칫 멎어섰다.

《공화국세상이 이젠 끝났다 이 말씀이요.》

용구의 탁한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기까지 했다.

《에끼 이 고약한 놈,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다 급살맞지 않나봐라.》

형섭은 분김에 발까지 구르며 소리쳤다.

《허…형님은 일만 할줄 알았지 시국돌아가는 형편엔 영 깜깜이외다. 하여튼 아무 소리말구 일이나 하시우. 미군이 들어오면 이 용구가 보증을 서리다. 비록 형님이 애국미와 원호미를 선참 바쳤지만… 내 말을 잘해보리다.》

《별 희떠운 소리를 다 듣는군.》

형섭은 정신을 어리뻥뻥하게 만드는 용구의 수작질을 더 듣고싶지 않아 소잔등에 채찍을 얹으며 발길을 다그쳤다.

《믿든 안 믿든 건 형님맘대로 하시우.》

비칠거리면서도 흥에 겨워 코노래를 부르며 어둠속으로 사라져가는 용구를 쏘아보던 형섭은 그가 아직도 곁에 있기라도 한듯 침을 탁 뱉았다.

《에익 더러운 놈같으니… 내가 뭐 전쟁판이 무서워 군대에 안 나갔다구?》

말은 이렇게 했어도 알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섬찍하게 압박하는것만 같아 온몸이 떨려나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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