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99(2010)년 제11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땅과 함께 전해지는 이야기

(1)

정 철

아들 성혁이가 군복을 입은 모습은 아버지인 동수의 마음을 어느 정도 기쁘게도 했고 무겁게도 했다.

줄줄이 딸만 내리낳던 안해가 뜻밖에도 아들 성혁이를 낳았을 때 동수는 이미 40대 중엽이였다.

그런 아들이여서 그런지 더욱 정이 갔고 그만큼 기대도 컸다.

군복입은 아들의 모습은 의젓했다.

동수는 아들과 나란히 고향길을 걸었다.

아들의 성장과 함께 몰라보게 달라진 고향마을이다.

동수는 아들의 옆모습을 이따금 바라보며 관개수로제방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넓은 수로로는 맑은 물이 찰랑거리며 흘러가고있었다.

《여기서 시원히 세면을 했으면 좋겠어요.》

몹시 흥분한듯싶은 아들의 너부죽한 얼굴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돋아있었다.

《그럼 여기 좀 앉았다가자. 세면을 하렴.》

동수는 제방 한쪽에 서있는 버드나무밑에 앉아 푸른빛으로 점차 변해가는 커다란 논배미들을 바라보았다. 무연한 논벌에 비하여 금방 꽂힌 벼모들은 작고 연약해보였다.

바람에 쉴새없이 파르르 잎을 떨고있는 저 벼모들이 이제 며칠만 있으면 시퍼렇게 살아오르리라는것을 땅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쉽게 믿지 못할것이다.

문득 동수는 옆에 앉아있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보동보동한 얼굴에 솜털이 엿보이는 아들의 목덜미가 별로 상큼해보인다. 어쩐지 무연한 논벌에 꽂혀 파르락대고있는 벼모가 동수에게는 아들처럼 느껴졌다.

(내가 무슨 생각을…)

그는 혼자 시뭇이 웃었다. 소학교때부터 입버릇처럼 《내가 이제 군대에 나가면…》 하면서 몸단련을 해온 아들애가 이 생각을 알게 된다면 분명 어이없어할것이다.

부모들의 심정이란 참…

동수는 다음순간 불그스레한 땅을 심각한 눈빛으로 보았다.

어찌 보면 피빛으로 보이는 저 땅, 어디선가 멀리에서 중오에 찬 절절한 아버지의 부르짖음이 들려오는것만 같았다.

《성혁아, 여기 와서 앉지 않겠니?》

동수는 나지막하게 말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갈려있었다.

《네게 해줄 이야기가 있다.》

《무슨 이야기인데요?》

성혁이도 무엇인가 가볍지 않은 이야기라는것을 예감했는지 옆에 와 앉았다.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란다. 언젠가는 너에게 꼭 해주자고 생각했었지. 너와 같은 새 세대들이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교훈이 담겨있는 얘기라고도 할수 있지…》

동수는 먼 하늘가를 추연히 바라보았다.

 

미제와 그 앞잡이들에 의해 조국해방전쟁의 일어난 뒤였다.

그날도 동수의 아버지 주형섭은 어뜩새벽부터 논김매기에 온 정력을 쏟아붓고있었다.

며칠새에 몰라보게 자란 벼포기들이 손끝에 미칠 때마다 느끼군 하는 흐뭇한 기쁨이며 바닥이 안 보이게 아지를 치는 모습을 보는 재미에 해가 중천에 떠올라 불볕을 쏟아붓는것도 의식하지 못하는듯싶었다.

《형섭이, 자넨 정말… 밤이나 낮이나 논에서 떨어질줄 모르는구만.》

마을세포위원장인 영세가 건네는 청높은 목소리를 듣고야 형섭은 허리를 폈다. 논머리에 주저앉은 영세는 땀이 줄줄 흐르는 형섭의 얼굴을 이윽히 쳐다보았다.

형섭은 흙탕물이 게발린 손을 논물에 씻고나서 영세의 곁에 가앉았다. 땀에 화락하니 젖은 그의 몸을 식혀주려는듯 한결 서늘한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그래, 생각해봤나?》

형섭은 영세의 말을 듣고야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얼굴을 붉혔다.

리인민위원회 앞마당에 설치해놓은 라지오앞에 온 마을사람들이 모여 위대한 수령님의 방송연설 《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를 듣고난 뒤였다. 그때 제일 흥분한 사람은 세포위원장 영세였다. 그는 당장 군대로 나갈 자세였다.

《여러분! 해방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았습니까. 땅 한뙈기가 없어서 우리 어머닌 눈을 펀히 뜨고도 굶어서 죽었습니다. 썩은 좁쌀 한말때문에 빚값으로 끌려간 우물집 부엌녀는 어떻게 죽었는가 말입니다. 그게 어디 한두집의 일입니까.

나라없는 백성은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고 일제놈들과 지주놈들의 채찍밑에서 우리모두가 피눈물인들 좀 작게 흘렸는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미제침략자들이 우리를 또다시 노예로 만들려고 합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주신 우리 땅과 행복을 빼앗으려고 한단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모두 군대로 나갑시다. 손에 총을 잡고 우리 땅과 행복을 지킵시다.》

《군대로 나가자!》, 《조국을 지키자!》 마을청년들은 이렇게 웨치며 인민군대입대를 탄원해나섰다.

주형섭은 고개를 짓숙인채 땅만 내려다보고있었다. 옆에 앉은 안해가 민망스러운 눈길에 의문을 담고 자기를 쳐다본다는것도 그는 알고있었다.

주형섭은 모임이 끝나고 마당이 텅 비여버릴 때까지도 그냥 한자리에 앉아있었다.

마을로 가는 호젓한 길에서 영세가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난 군대로 가려네. 자넨 어떻게 할셈인가?》

형섭의 눈길은 저도 모르게 논에 가 박혔다.

정갱이가 넘도록 거름독을 쓰며 한창 크고있는 벼포기들이 살붙이나 다름없이 귀중하게 안겨왔다.

 (저것들을 두고 어떻게…)

젖품에 매달려사는 젖먹이를 떼놓고 떠나가는 어머니의 심정이라 할가. 아무리 전쟁이라 해도 커가는 벼포기들을 두고 떠날 용단을 내릴수 없었다. 이런 때 안해가 맡아주었으면 좋으련만 안해는 산후병으로 힘든 농사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더우기 산후병으로 앓는 때가 더 많은 안해였다.

《난… 지금…》

한참 갑자르던 형섭은 더 말을 잊지 못하였다.

《잘 생각해보게.》 영세는 이런 말을 남기고 먼저 가버렸었다.…

《왜 대답을 못하나?》 하는 영세의 말에 생각에서 깨여난 형섭은 긴숨을 내쉬였다.

《심어놓은 곡식을 거두어들인 다음 군대에 나가면 안되겠나? 암만 생각해봐도 이걸 놓고서는…》

영세의 기름한 얼굴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자네 무슨 소릴 하나? 원쑤놈들이 우리 땅을 빼앗고 다시 노예로 만들겠다구 피를 물고 날뛰는데 어쩌면…》

하지만 형섭은 영세의 절절한 말에도 아랑곳없이 논에 눈을 박은채 고집스럽게 앉아있었다.

이윽고 자리에서 움쭉 일어난 영세는 마디마디 그루를 박으며 말했다.

《명심하라구, 형섭이. 지킬줄 아는 사람만이 땅의 영원한 주인으로 될수 있다는걸 말일세.》

형섭은 영세의 뒤모습을 점도록 바라보며 그가 여전히 앞에 있는듯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포위원장, 날 탓하지 말라구. 내 이제 자네네 곡식까지도 말끔히 거두어들이고나서 전선으로 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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