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99(2010)년 제11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고향에 온 첫날밤에
(2)
정 순 성
23시 05분.
창호는 뜻밖의 광경에 한동안 어리벙해 서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어쨌든 명백한것은 그냥 가서는 안된다는것이였다. 이 귀한 탄, 우리 탄부들이 어떻게 캔 탄이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누구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없나 해서였다. 둘이면 넉근히 이 차단물을 해제할것 같았다. 하지만 고즈넉한 주변에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할수 없지. 제대병사 한창호! 벌써 군인자세를 헝클었는가. 이 정황에선 혼자서라도 전투에 돌입해야지.)
창호는 배낭을 벗어놓고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탄무지속에서 블로크장들부터 골라 한옆에 쌓아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돌기, 두돌기 허물어진 적재장담을 다시 쌓아올렸다.
속내의가 땀에 젖기 시작한다. 흠씬 땀에 젖은 얼굴에선 방울진 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이젠 탄을 춰올려야겠는데 도구가 하나도 없다. 허리를 편 창호는 적재장주변을 어설픈 전지불빛으로 살펴보았다. 드디여 귀퉁이가 반나마 무질러진 삽 한가락이 눈에 띄였다.
창호는 정말 기뻤다. 전투무기가 생긴것이다.
다시 새롭게 북돋아오르는 힘으로 한삽, 두삽 탄을 춰올리기 시작하였다.
이때였다. 저쪽 길가에서 펑끗, 펑끗 전지불이 춤을 추듯 흔들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는것과 함께 《게 누구요?》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소리에 너무 반가워 창호는 움쭉 허리를 폈다.
《예, 지나가던 사람인데 날 좀 도와주시오.》
전지불은 창호며 무너져내린 적재장귀퉁이를 쭉 훑어보고나서 형편이 헤아려지는지 군소리 안하고 웃저고리를 벗는다.
《원, 동무두 참… 이걸 혼자 하려고 하다니…》
전지불은 창호의 손에서 덥석 삽을 앗아쥐고 힘있게 탄을 퍼대기 시작했다.
《야,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 도와주어서… 그런데 누굽니까? 여기서 삽니까?》
무등 반가운김에 창호는 두서없이 물었다.
헌데 그 대답이 가관이였다.
《나요? 탄붑니다, 한창 자라는 탄부.》
《예?》
잠시 의아쩍어 말을 잊고 섰던 창호는 그만에야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 대답이 참 묘한데요.》
전지불도 허리를 펴더니 함께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나니 둘사이의 초면의 서먹함이 가시여지는듯싶었다.
창호는 담을 쌓고 전지불은 탄을 춰올리기 시작하였다. 한동안 그들은 말없이 작업에 열중하였다.
한참후 허리쉼을 좀 하느라고 일손을 멈췄을 때 전지불이 창호에게 물었다.
《동무 제대군인같은데… 어떻게 여기 있소?》
창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뻑 문대며 말했다.
《예, 여긴 제 고향입니다. 두루 일이 있어 늦어지다나니 이렇게 밤길을 걷게 됐구만요.》
그러자 전지불이 옆에 있는 전지를 들고 창호쪽에 비쳐본다.
《그럼 혹시 창호동무 아니요?》
창호는 움쭉 놀랐다.
《예, 그런데 동문 누군데 나를?…》
《나요, 국철이요. 부모님들이 얼마나 기다린줄 아나. 그런데 오늘 이렇게 오다니…》
국철이는 다가와 덥석 붙안으려다 서로의 옷주제를 의식했는지 그저 소리만 쳐댔다.
그렇다. 자세히 바라보니 수밤송이처럼 빳빳한 머리칼을 상고머리로 바싹 깎아서 그렇지 아까 영예사진판에서 본 그 국철이가 분명했다.
《야, 정말 너 국철이구나. 국철이!》
《창호!》
너무도 뜻밖의 환경에서 중학교졸업후에 처음 만나는지라 둘은 그저 반가워 어쩔줄 몰라했다.
《내 방금전에 영예사진판에서 동무의 사진을 보았소. 축하하오.》
《자, 우리 이걸 빨리 해제끼구 집에 가서 회포를 나누자구.》
다시 일감을 잡은 둘의 일손에 나래가 돋혔다.
서둘러 일판을 제끼는 창호의 머리속에 중학교졸업반때 있은 일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
학교 소년단림을 맡아보던 한창호는 새를 몹시 사랑했다.
이깔나무, 잣나무, 가래나무가 무성한 소년단림으로는 이름모를 온갖 새들이 찾아들어 고운 목청을 뽑으며 숲의 정서를 한껏 보태주고있었다.
창호는 그 새들중에서도 소년단림에 새살림을 편 밀화부리를 좋아했다.
밀화부리는 겨울이면 따뜻한 지방에 날아갔다가 봄이면 어김없이 날아와 이 가래나무에 둥지를 트는 철새였다. 몸매와 색갈이 아름답고 꾀꼴새처럼 울음소리가 고운 리로운 새였다.
졸업을 몇달 앞둔 어느날 한창호는 하급반처녀애들이 밀화부리를 보여달라고 졸라대는통에 소년단림으로 올랐다.
《이거 벌써 인계사업이 시작됐는가?》하며 시까스르는 목소리가 울렸다.
돌아보니 국철이였다. 그는 공부는 성실히 하지 않고 체육단에 간다면서 축구공구럭만 메고다니는 애였다.
국철이는 축구공이 들어있는 구럭을 흔들며 창호에게로 다가왔다.
《괜찮아, 처녀애들을 척 데리구… 확실히 소년단림책임자가 다르단 말이야.》
《국철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창호는 기분이 나빴지만 애써 참으며 나직이 말하였다.
《여, 너무 우쭐렁거리지 말라구. 이제 중학교를 졸업하면 누가 학교의 명예를 떨치겠는가는 두고봐야 해.》
국철의 말에 창호는 단호히 대답했다.
《좋다, 두고보자.》
그 일이 있은 후 한창호는 국철이와 말 한마디하지 않고 학교를 졸업하였던것이다.
그런 동창생을 수년세월이 지나서 청년이 되여 만나고보니 지나간 일는 시시하고 좀스럽게 생각되였다. 그에 대해 옹이졌던 마음도 봄눈 녹듯 풀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