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99(2010)년 제10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새해를 축하합니다
박 기 성
섣달그믐날 저녁, 식사를 끝낸 진규는 습관대로 앉은뱅이책상앞에 마주앉았다.
이밤 그에게는 긴요하게 할 일이 있었다. 어머니와 형님 그리고 그리운 사람들에게 보낼 새해축하장을 쓰는것이였다.
나이가 들면 이런 일은 자식들에게 맡기는것이 례상사였지만 진규는 꼭꼭 제 손으로 쓰군 하였다. 리유는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이 눈에 차지 않기때문이였다. 설사 같은 내용의 글이라도 제가 쓴 글이라야 만족해하는 성미였다.
천천히 엽서들을 당겨놓은 그는 단숨에 일을 끝낼 잡도리로 서둘러 만년필뚜껑을 열었다.
《새해를 축하합니다. 희망찬 새해를 맞으며…》
먼저 청진에 있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글을 썼다. 마지막점을 찍고보니 어딘가 미흡한것만 같다.
첫 인사말부터가 미음에 들지 않았다. 작년에도 이렇게 썼었다.
불현듯 재작년에도 이와 같은 설인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허구픈 웃음이 나갔다.
이것만 봐도 의식과 사회활동에서 전진이 없이 답보상태에 있는 자기를 알수 있었다.
진규는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올해 얼마나 거창한 변들이 났던가!
온 나라가 이룩한 거창한 승리속에는 진규와 그의 분조원들의 몫도 들어있다. 생각만 해도 진규는 끓어오르는 희열과 흥분으로 가슴이 막 터질것 같았고 소리쳐 자랑하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는 충동에 한동안씩 휩싸이군 하는것이였다. 바로 그 마음의 충동으로 새해축하장앞에도 마주앉은 그였다. 이럴진데 새해인사가 범상해서야 되겠는가.
그렇다, 달라야 한다. 새해에는 새롭게 인사를 해야 한다.
그는 편지지를 갈았다.
이제 그리운 사람들에게 보내는 그의 설인사도 푸른 하늘을 날으는 비행기처럼 거침없이 진행될것이다. 그러나 진규는 무춤했다. 그는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이 단순한 례의를 표하는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큰 변을 창조하는 사업마냥 장엄하게 생각되였다. 하여 그로 하여금 단어 하나,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 사색을 기울이게 하였다. 결국 그는 30분이 지나도록 한글자도 쓰지 못한채 앉은뱅이책상앞에 앉아있었다.
(맞춤한 말마디를 고르기가 이렇게 힘이 든가. 머리속에선 뻔한데…)
이때 그의 눈에 별찌처럼 우연히 걸려드는것이 있었다. 웃몸을 일으킨 그는 부랴부랴 책상곁에 있는 장안에서 크지 않은 지함을 꺼내였다.
집에 온 편지들을 건사해두는 지함이였다. 진규는 그속에서 새해축하장들만 따로 골라들었다.
첫눈에 띈것이 올해 설에 받은 축하장들이였다.
그는 틀린 글자들을 찾아내려는듯 눈을 부릅뜨고 한장한장 읽기 시작했다.
《새해를 축하합니다. 희망찬 새해를 맞으며 온 가정의 행복과 아울러 형님의 사업에서 성과가 있기를 바라며 설인사를 드립니다. 동생 진철 드림:》
읽는것마다 비슷했다.
《희망찬》, 《승리자의》, 《가정의 행복과 사업에서》, 《아울러》… 단어들의 순차가 바뀔뿐 거의 한판에 찍어내기라도 한것처럼 문장들이 비슷했다.
여러장을 넘길 때까지 자기가 찾으려는 문구가 나타나지 않자 그만 화가 났다. 그러나 축하장들을 한장한장 넘길수록 새로운것을 느끼게 되였다.
그것은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였다.
도시와 멀리 떨어진 고요한 산촌에서 농사나 짓고있는 자기를 잊지 않고 념려해주고 위해주었던것이다.
마침내 그는 흥남에 있는 조카애가 보내온 축하장을 보며 가을황소가 영각하는만큼이나 큰소리로 웃었다. 조카는 첫 구절을 이렇게 뗐다.
《우리 조국청사에 길이 아로새겨질 새해…》
얼마나 좋은 글인가. 마음에 들었다. 그다음 《삼촌의 사업에서…》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역시 웃었다.
(내가 하는 일을 사업이라고까지 할수 있을가. 원, 자식두… 차라리 농사를 잘 지어 하고 썼으면 더 좋았을걸.)
하지만 그속에서 삼촌을 위하는 조카의 마음이 어려와 저도 모르게 눈굽이 뜨뜻해났다.
그는 앉은뱅이책상우에 놓인 축하장들을 점도록 바라보았다. 그 한장한장의 축하장들은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으로 느껴졌다.
그랬다. 그들은 한결같이 진규의 건강을 념려했고 보잘것없는 그의 일을 사업이라고 불러주며 성과를 바랐다.
지금은 그들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진규에게 이렇게 묻는듯싶었다.
《너는 올해사업에서 어떤 변을 가져왔느냐?》
진규는 고개를 버쩍 들었다. 그는 이제 자기가 새롭게 해야 할 설인사가 어떻게 시작되여 어떻게 끝나야 하는가를 바로 이 물음속에서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것 같았다.
진규에게 축하장을 보내온 사람들은 모두가 이제 그의 설인사를 받게 될 사람들이다. 그들은 진규의 사업에서 일어난 변에 대하여 묻고있다.
진규는 이에 대하여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새해의 대문을 열고 설인사를 할수 있는 자격을 쥔다고 믿었다.
어느새 그의 마음은 변을 가져오던 사연많던 그날에로 줄달음치고있었다.
×
진규의 분조관리일지에는 그날이 4월 28일로 기록되여있다.
그날도 진규는 새박골 모판들을 돌아보는것으로 긴장한 하루일과를 마치고 뒤늦게야 퇴근길에 올랐다. 집뜨락에 들어선 그는 소를 외양간에 들여다매고 덧먹이를 준 다음 닭장문을 닫고 터밭에 있는 남새모판에 나래를 씌우기 시작했다.
그는 늘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제가 도맡아 했다. 그것은 새해축하장을 쓰는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눈에 차지 않기때문이였다. 안해가 하는 경우라도 같았다. 때문에 안해는 의견이 이만저만 많지 않았다.
《그저 저만 저라고 한다니까.》
이렇게 산지도 스무해가 된다.
모판나래를 다 덮고 허리를 펴던 진규는 별로 잔등이 선뜩한감을 느꼈다.
10시가 좀 지나 돼지물을 주고 들어온 안해가 《쌀쌀한게 서리가 올것 같지 않아요?》하고 물을 때에야 그는 잔등이 선뜩해지던 저녁의 그 느낌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설마하며 밖에 나가보니 대번에 등골이 오싹했다. 이쯤되면 영낙없이 서리가 내린다. 야단이였다.
올해 분조에서는 예상외로 봄기온이 낮기때문에 모판들에 무조건 두벌나래를 덮기로 결정하였다. 그래 거의 전반적인 벼모판들에는 두벌나래가 씌여졌으나 새박골 모판에만은 아직 두벌나래를 덮지 못하였다. 래일모레가 되여야 나래 만드는 일이 끝나게 된다. 이런 조건에서 서리를 맞게 된다면 큰 피해는 없겠지만 생육에는 지장을 받게 된다. 그러면 수확고가… 안될 말이다.
진규는 벌침을 맞은듯 껑충걸음으로 대문을 차고 달음질쳤다. 지나친 흥분때문인지 몇걸음 못걸었는데 벌써 숨이 차기 시작했다.
달도 없는 하늘을 이고 홀로 밤길을 걷느라니 몇달전 일이 어제일인듯 눈에 삼삼해지는것이였다.
새박골로 말하면 해발고가 여느 논보다 좀 높은데다 토질까지 시원치 못하여 진규네가 맡아 가꾼이래 아직까지 계획을 해본적이 없는 다된 땅이였다. 그 땅때문에 분조의 체면이 벌써 몇년째 납작해졌다. 그래서 진규는 새해에는 단호하게 새박골을 내놓든지 계획을 조절받든지 둘중에 하나를 선택할 결심이였다.
그런데 작업반에서는 또다시 진규네 분조에 새박골을 맡기기로 작정하고 계획까지 찍어 발표하였다.
《아무리 튕겨봐야 새박골을 맡아줄건 1분조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번엔 한번 잘해봅시다.》
믿어주는 작업반장의 마음은 고마왔으나 이미 세운 결심을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바로 그무렵에 전국의 근로자들에게 보내는 강선로동계급의 12월호소문을 받아안았고 그로부터 얼마후에는 강선의 12월호소와 새해공동사설을 관철하기 위한 농장궐기모임을 가졌었다. 궐기모임의 여운은 컸다.
여기서 심장의 피를 끓이지 않는다면, 여기에 자기 한몸을 내대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강성대국건설대전의 참전자라고 하랴.
그날로 진규는 전진하는 시대의 발걸음에 따라서지 못하고 일시나마 체면주의에 빠져있던 새박골흥정안을 산산쪼각내고 무조건 새박골에서 최고수확년도의 수확고를 자기들의 목표로, 기준수확고로 정하는 놀라운 결심을 굳히였다.
그의 결심은 사랑과도 같이 아직은 자신만이 알고있는 비밀이였다. 이 일을 혼자서 할수만 있다면 자신있게 공개하고 자신있게 뛰여들었을것이다.
그러나 새박골은 그 한사람이 아니라 분조전체의 성실한 노력을 필수적요구로 제기하고있었다.
그런데 분조형편은 어떠한가. 또 분조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접수할것인가.
진규의 사색은 며칠째나 여기서 헤매고있었다.
이전에 그와 함께 분조의 명예를 떨치던 분조원은 불과 서너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외에 분조원들인 정국사, 최정배, 최기수… 이들은 대다수가 다른 분조에서 오거나 혹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분조를 옮긴 사람들이였다.
좋고나쁜 사람이 따로 있는것은 아니지만 왜서인지 진규는 그들에게 마음이 붙지 않았다. 때없이 옛 분조원들이 그리웠다. 분조장의 말 한마디에도 두세가지를 넘겨짚으며 일 하나를 해도 칼로 두부모 베듯 깨끗이 할줄 알던 그들, 그들은 10여년을 진규와 달고 쓴 고비를 함께 넘어온 사람들이였다. 야속하게도 그들은 진규가 제일 골치거리인 새박골을 맡아안던 때에 다른 분조들로 조동되여갔다.
만약 그들만 있었더라면 새박골에서도 분조의 명예는 고수되였을것이며 기준수확고는 결심이 아니라 현실로 이루어졌을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어떤 날에는 해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가 너무 편협하게 생각하는것은 아닐가?)
어느날 진규는 앉은뱅이책상우에 새박골의 결심이 적힌 사업수첩과 분조출석부를 나란히 놓고 한사람한사람 이름을 되뇌이며 결심앞에서 남몰래 동요하는 자기의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날 진규가 되뇌여본 이름은 아래와 같다.
《정국사.》
이름처럼 무게가 느껴지는 사람이다.
분조에 첫 출근을 한 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국사라고 합니다. 많이 배워주십시오.》
그동안 지내본데 의하면 그는 제가 한 말과는 달리 누구의 말을 귀담아듣거나 조언을 부탁한적이 없었다. 매사에 진중한 편이였는데 일솜씨는 좀 서툴렀다.
그는 아직 밭갈이를 곱게 하지 못한다. 진규가 배워주려고 하면 《그만두십시오. 나도 이제 잘하게 되겠지요.》하고 자존심을 세우며 서둘러 소를 몰고 가버리는것이였다. 분조에 사건적인 일이 제기될 때마다 그는 진규를 찾아오군 했는데 매번 국사를 론하는듯 한 엄숙한 표정으로 《이렇게 하면 어떨런지 해서…》하고 넌지시 속생각을 비치고는 결론은 진규에게 맡기군 하였다.
진규가 새박골을 포기하려고 한다는걸 알고 남먼저 달려온것이 바로 그였다. 그것 역시 사건이라면 사건이였으므로 그가 온데 대해서는 놀랍지 않았으나 그의 말을 듣고나서는 다시 보지 않을수 없었다.
《새박골을 내놓으려고 하는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하나 줌안에서 걸구어야지 땅이 나빠 내놓는다는게 어쩐지…》
그 자리에서는 너도 농사군이 옳구나 하고 웃는것으로 그쳤댔는데 보내놓고나니 지그시 감정이 오르는것이였다.
제가 이 김진규를 알면 얼마나 알아서 감히 잘못된 생각이요 뭐요 하며 제법 훈시까지 해, 교만하다, 염소새끼 뿔이 나자 제 어미를 받는다더니.
생각하면 쓸쓸한 일이였지만 진규는 너그럽게 그 일을 덮어버렸다. 만약 그것으로 국사가 구실을 할수만 있다면 그런 훈시쯤은 열번도 웃으며 받고싶은것이 진규의 마음이였다.
이제 새박골소식을 알면 국사는 기뻐할것이다. 그리고 저로서의 신중한 의견을 표명할것이다. 그것이 현실성있는것이라면 물론 기쁜 일이지만 해야 한다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장이라면 피곤밖에 가져다줄것이 없다.
그에게 기대를 거느니 밭갈이나 온전히 배워주는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정배.》
인정을 등에 지고 다니라는 뜻에서 지어준 이름이라는데 자식 셋이 되도록 그의 잔등에서 인정보다 술배낭을 더 많이 보았다고 한다. 그는 온 동네가 인정하는 애주가였다. 물론 옛날 일이긴 하지만 한번은 야밤중에 그의 안해가 진규의 집을 찾아온적이 있었다. 그날은 명절날이였다.
남편이 두시간전에 탈곡장에 간다면서 나갔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는것이였다.
《탈곡장엔 왜 간답디까?》
《마당에 벼단이 들어와 쌓이기 시작하는데 아무래도 근심스럽다면서…》
《제길, 근심두 찰떡같다. 제가 아니면 사람이 없을것 같아 그러나…》
《욕은 암만해도 좋으니 지금은 절 좀 도와주세요. 그러다 어디 가서 사고라도 치면…》
《방정맞을 소린 작작하구 따라서기나 하오.》
한동안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찾아냈는데 뜻밖에도 그곳은 제집 창고안이였다.
이런 일화를 빚어낸 덕에 주정배로 불리우긴 했지만 일 하나만은 잘했다. 무슨 일이든 손에 잡기만 하면 대패질한것처럼 미끈하게 마무리하는 일솜씨는 남이 하는 일은 웬만해서는 눈에 차하지 않는 진규까지도 흐뭇이 웃게 했다.
《일솜씨는 있는 사람인데 고놈 술이 문제거던.》
지금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명절때나 조금 마시는지… 그가 가끔 희극같은 일화를 만들어내는것은 사실 술때문이 아니라 능청스러운 말재간때문이였다.
낚시질을 가면서도 그는 사냥을 간다고 했고 앉아 다리쉼을 하면서도 개구리가 하는 말을 듣고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평소의 무뚝뚝한 표정을 조금도 달리하지 않고 말했으므로 상대방은 진짜로 믿어버리기가 일쑤였고 그로 인한 희극이 벌어지면 그 원인을 마시지도 않은 술로 찾았던것이다.
정배란 대체로 이런 사람이였다.
그는 새박골에 대해 어떻게 나올것인가.
《나야 뭐… 분조의 졸이나 같은데》
진규는 그 목소리를 듣는듯싶었다.
그외에도 미타한 분조원들이 적지 않았다.
어려운 모퉁이에 남먼저 어깨를 내대는 좋은 점이 있으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안해때문에 일에서 마력을 다 내지 못하고있는 최기수, 오가는 말들에 더 적극적인 요철국…
자기 능력과 사업에 자부심을 가지고있으며 요구성이 높기로 소문이 난 진규에게 있어서 그들이 마음에 들리 만무했다. 하여 진규는 평소에 무엇보다 분조원들의 교양에 끈덕진 주의를 돌렸다. 그가 아침에 출석을 부르는 그 하나만 보아도 그것이 알렸다.
《최정배, 왜 대답이 약한가?
자네가 술을 끊었다는 소린 낮에 보름달이 떴다는 소리보다도 더 믿기 어렵네만 난 믿네. 그러니 일을 잘해보자구. 참, 요전날에 준 알약은 하루도 건너뛰면 안되네.》
《최기수, 또 뭘 그리 생각하나. 걱정말게.
이제 떡돌같은 아들이 생기지 않으리. 믿으라구.》
이런저런 방법으로 부단히 자극을 주지만 잘되지는 않는다. 언제면 그들을 하나같이 쟁쟁 소리나는 실농군으로 키워낼가.
이런 생각에 잠기느라면 언제나와 같이 자기가 산모범이 되여야 한다고 여기는 진규였다. 그래서 그는 늘 두몫, 세몫씩 일을 하고 바삐 뛰여다녔으며 혹 사정이 있더라도 마지막까지 작업장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가 오늘은 우리에게 맡기고 먼저 들어가라고 하면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그래두 작업장에야 분조장이 있어야지.》
그러면 요철국이 주요발언을 한다.
《분조장동문 언제봐야 자기가 있어야만 일이 되는것처럼 생각하는게 탈이예요. 자기만 똑 제일인척 한단 말입니다.》
《그게 어째서. 난 그걸 긍지로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러니 그런 허튼 생각은 말고 일이나 착실히 하라구, 입은 다물고.》
이것은 결코 먼 옛적의 추억이 아니였다. 지금껏 그가 알고있는 분조원들에 대한 재확인이였다.
성격도 각각이요, 사정도 몫몫인 분조원들과 함께 과연 새박골에 기발을 꽂을수 있겠는가.
사색은 쏟아져내리는 물줄기처럼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결과는 예상그대로 기대할만 한것이 못되였다. 여기서 한가지 명백한것은 기준수확고였다.
오늘날에 와서 그것은 흥정할수도 없고 흥정해서도 안되는 필수적과제로 그들앞에 나서고있었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킨다는 격으로 다된 땅이라고 새박골을 내놓는것과 같은 사고관점을 가지고서는 전진하는 시대의 발걸음에 도저히 따라설수가 없는것이다.
하자, 해야 한다. 내가 앞채를 메자!
분조원들이 미처 따라서지 못하면 그 걸음을 일일이 내가 대신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이 하자. 일단 결심하고 발을 내짚으면 방법도 생기고 길도 열릴것이다.
남모르는 비상한 결심을 굳히며 진규는 흔연히 잠자리에 들었다.
래일 아침 첫시간에 그 결심을 분조원들에게 선포할 작정이였다. 그런데 밤에 찾지도 않은 정국사가 나타날줄이야.
그는 진규의 속내를 빤드름히 알고있는것 같았다.
새박골을 분조가 맡을 결심이라는걸 알자 대뜸 낯빛이 환해졌다.
《그럴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 오늘 분조장동지와 그 문제를 가지고 토론하고싶었습니다.
합시다. 땅도 걸구고 늦종으로 모를 냅시다.
주위에 있는 나무들은 다 떠옮깁시다. 그러면 해비침시간을 매일 한시간이상씩 연장할수 있습니다. 우리 농장의 적산온도는…》
너무나 자신있게 말하기때문에 허망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국사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 진규는 그의 말에 일리가 있으며 잘하면 범도 잡을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는데까지 이르렀다.
지금까지 새박골에는 올종만 심었었다.
그런데 국사는 모든것을 정확히 알고있었다. 뿐만아니라 언제 모를 부어서 언제 모내기를 하고 언제 김매기를 하면 어느날에 가을을 할수 있다는것까지도 확신성있게 말하고있었다.
《괜찮아, 아직 장담하긴 이르네만 자네말을 듣고보니 신심이 생기누만. 그래 언제 이런 훌륭한 생각을 해냈나? 적산온도랑은 누구에게 물어서 알구?》
《작년초에 제가 새박골때문에 분조장동질 찾아왔던 생각이 나십니까?》
그런 일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밤이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새박골에 다된 땅이라는 진단이 내려진 때였으므로 더 들어볼 흥심조차 없어 례절있게 돌려보냈었다.
그럼 그때 벌써 국사에게 이런 훌륭한 안이 있었단 말인가?
《사람두 참, 무슨 사내가 그런가. 일단 결심을 품고 왔으면 벽도 문이라고 내밀었어야지. 그때 자네가 완강히 나왔더라면 우린 작년에 기준수확고를 낼수도 있지 않았는가 말이야.》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하고 국사는 심중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때 제가 분조장동지로부터 공연한 열성이라는 평가를 받는 순간 부끄러웠습니다. 해야 한다는 욕망에만 들떠있다보니 구체적인 타산 하나 없이 결심만 가지고 걸음을 했던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날부터 새박골에 올라가 토질을 조사하는 한편 매일 해비침시간과 하루평균온도를 재여 기록하고 새박골의 지형, 바람과 습도, 주변나무와 풀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료들을 수집하였습니다. 물론 농장기술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그 자료들을 농업과학원의 해당 부서에 보냈습니다.
그래서 작년가을에 기준수확고를 거둘수 있는 자료를 손에 쥐였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콤퓨터에서 얻은 수확이지 실물은 아닙니다. 실물을 얻자면 우린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물길공사, 흙깔이, 거름생산… 그밖에 자연재해도 각오해야 합니다. 이걸 분조힘으로 해내겠는지…
그래서 선뜻 분조장동질 찾아오지 못한겁니다.》
역시 정국사다왔다. 진규는 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런데 오늘은 어떻게 날 찾아올 용단을 내렸나?》
《모르겠습니다. 새해에는 나도 배짱이 자랐는가 봅니다. 분조장동지가 새박골을 타고앉을 결심을내린것처럼 말입니다.》
《허허, 사람두… 이젠 제법 날 걸고들기까지 하구.》
다음날 진규는 새박골에 대한 자기의 결심과 정국사의 대책안을 정식 분조원들에게 통과시켰다.
그에 대한 분조원들의 태도는 대단히 긍정적이였다. 그들은 그 어떤 시련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는것 같지 않았다.
《합시다, 무조건 합시다. 이렇게 보검까지 쥐였는데 두려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 기껏 불렀다는게 기준수확고요? 같은 값이면 초과해야 우리 국사가 고생한 보람두 있을게 아닌가.》
《허, 이거 정말 변이 났다. 정배가 다 하자하자하구 주먹을 내두르는 판이니 변은 변이로다.》
《요놈의 요가는 혀바닥에 기름을 바르구 다니나.》
《하하하.》
진규가 고심하고 고심하던 새박골농사는 이렇게 아무런 구애도 받음없이 분조전원에게 접수되였다.
진규는 정국사의 대책안에 몇가지 중요한 문제를 수정보충하고나서야 그것을 정식 작업반에 통보하였다.
날들이 흘렀다. 그사이 새박골에는 이전에 볼수 없었던 새 모습들이 연줄연줄 생겨났다. 유적령샘줄기를 끌어들이는 물길공사, 커다란 거름더미와 방풍장, 해토전의 두벌갈이…
언땅을 파헤치며 만든 랭상모판에는 파란 잎새들이 보였다. 세월을 앞당겨 자란 새싹들은 헌신적인 손길들이 마련해준 요람속에서 약동하는 삶의 희열에 넘쳐 설레였다.
이 모든것들은 진규와 분조원들에게 더없는 기쁨을 안겨주었고 활력을 북돋아주었다. 그러나…
모든것은 이제부터 시작이였다. 이제 남은 모내기전까지의 한달을 진규는 대단히 중시하고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첫 시련이 닥쳐올줄이야…
갑작스레 시작된 한밤중의 봄추위는 새박골전체를 졸지에 얼궈버릴듯 무섭게 기세를 돋구며 빠른 속도로 육박해오고있었다.…
깊은 회억에서 깨여난 진규는 달리기 시작했다.
(빨리 가자, 빨리!)
진규의 입에서는 단김이 퍽퍽 뿜어졌다.
돌부리에 걸채이며 엎어질듯 새박골입구에 이른 진규는 고삐 채인 소처럼 우뚝 멈춰섰다.
(이렇게 맨손으로 와선 어쩌자는건가?)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을 다잡으며 침착성을 잃지 않던 진규에게 있어서 이것은 처음으로 되는 실수였다. 그렇다면 다 온 길을 여기서 돌아설수는 없었다. 모판들의 상태와 바람에 나래가 날리지 않았는가 보아야 안심할것 같았다.
오늘밤 모판관리원은 정배였다.
원래 요철국이 맡아보았는데 분조뜨락또르부속때문에 오후에 농기계작업소로 가고 대신 진규가 서기로 되여있었다. 그런것을 정배가 가로채다싶이 맡아안았다.
《분조장동문 봄에 들어와 한번도 발편잠을 자본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진중하고 인정미가 넘쳤던지 진규는 눈굽이 다 찡해날 정도였다.
그러고보면 근간에 정배는 많이 달라졌다. 아직까지 술냄새를 피운적이 없었고 사람들을 놀래우는 능청맞는 잡소리와도 인연을 끊은듯 했다.
진규는 그의 성의를 물리칠수 없어 모판을 맡겼으며 새벽에 교대해줄 작정을 하였다. 그는 습기나 찬기운에 오래 견디지 못했기때문이였다.
하지만 지금 진규의 마음은 무작정 불안하기만 했다. 정배가 지금 뚝막에 있기나 한지, 혹시 술을 마시고 취해서 나래가 날려가는줄도 모르고 자고있지나 않는지… 그와 관련한 가지가지의 일화들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초조해났다.
(분조원들은 지금 뭘하고있을가. 그들도 분명 추위를 느꼈겠는데… 알고 제 할바를 찾아하면 감사한 일이지만 느끼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대도 탓할수는 없는 일이다.
하루종일 얼마나 많은 일을 했던가. 피곤할것이다. 이럴 때는 분조장이 열곱, 스무곱을 뛰여다녀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분조장이 있는것이다.)
진규는 자기가 언제 방풍장안에 들어섰는지 알지 못했다. 사위는 캄캄했다. 열걸음앞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진규는 관리원부터 찾았다.
《정배―》 두번째로 이름을 불렀을 때 저켠에서 응답이 있었는데 마주서고보니 정배가 아니라 요철국이였다.
《자네가 여길 어떻게?!》
《부속품을 받아가지고 곧장 오는 길입니다. 우연히 군기상관측소에 다니는 동무를 만났댔는데 오늘밤에 해발고가 높은 지역들에서 서리가 내릴것이 예견된다더군요.》
《그래서 밤길을 걸어왔단 말인가?》
《오늘은 웬일입니까. 난 분조장동무에게서 주인다운 자각이 부족하다구 비판을 받을가봐 부랴부랴 왔는데요.》
《원 사람두, 이틈에두 롱담인가.》 짜릿한감을 느끼며 진규는 철국이의 어깨를 툭 쳤다.
《좌우간 수고했네. 헌데 정배 이 사람은 어데 갔나?》
《모르겠습니다. 국사한테 물으니 자기도 모르겠다더군요.》
《국사두 나왔나?》
《국사뿐이 아닙니다. 모두가 나래를 이고지고 정말 굉장했습니다. 최기수는 달구지에 자기집 남새모판나래까지 몇장 더 실어가지고 왔더군요.… 지금 모두 마른 나무가지들을 줏고있습니다. 우등불을 피우겠다고 말입니다.
전 여기서 불을 피울 분공을 받았습니다.》
그제서야 진규는 뚝막곁에 있는 달구지와 모판에 덧씌워진 나래들을 보았다. 목이 메였다.
《분조원들이 다 나왔단 말이지.…》
《나래들은 다 덧씌웠는데 분조장동무 마음에 들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마치 분조원들의 대변인이기라도 한듯 스스럼없이 말했다. 역시 요철국은 요철국이였다.
그러나 오늘은 그의 행동이 사랑스럽기만 하였다.
정국사, 최기수… 모두가 한없이 대견하였다.
그런데 최정배는? 이밤 누구보다도 뛰고뛰여야 했을 그는 지금 어디 가 무엇을 하고있단 말인가.
진규의 의혹은 요철국이 사방 피워놓은 모닥불우에 분조원들이 날라온 나무가지들에 놓여져 삼단같은 불길이 나래치며 타오를 때에야 비로소 깨끗이 풀렸다.
지금도 진규는 그밤의 정배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어깨를 파고든 멜끈, 비지땀이 돋은 얼굴, 그 얼굴밑에서 깍지낀 손에 받들려있는 담요…
늦기는 했지만 모판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어려와 분조원들은 저저마다 달려가 그를 맞아주었다. 요철국이 담요를 받으며 큰소리로 떠들었다.
《허… 이거 변이 났다. 안해가 시집올 때 가져온거라구 손도 못대게 하는걸 이렇게 안고왔으니 이게 변이 아니구 뭐요. 혹시 새박골을 제집 창고와 삭갈린건 아니요?》
《요가라는건… 아직두 술마시는 사람이 있나.》
《하하하.》 한바탕 웃음판이 터지고난 뒤 사람들을 둘러보며 정배가 말했다.
《아닌게아니라 변이 나긴 났수다.》
온 분조가 그에게 시선을 모았다.
《집에 있는 나래를 다 가져간대야 모자랄건 뻔한거구. 그래 처에게 담요를 있는대루 다 내놓으라구 했더니 대번에 눈이 함박만 해지는게 아니겠소. 그건 내 말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제것이 아까웠기때문이지요.
녀자들이란 원래 제것이라면 무섭지 않습니까. 우리 천 더하지요. 그러니 담요를 내놓자고 할리 있겠습니다.
온 분조가 나를 믿고 발편잠을 자고있는데 내가 똑똑한 구실을 해야 할게 아닌가구 열변을 토했는데두 막무가내더군요. 그래 한참이나 마주앉아 사상교양을 했습니다.
이 최정배가 지난 시기 얼마나 사람을 웃기며 살았는가, 왜 같은 사람으로 태여나 나는 이렇게밖에 못 사는가, 난 아침마다 분조장이 내 이름에 력점을 찍으며 출석을 부를 때마다 가책으로 모대기군 한다. 새박골은 매일 새 모습으로 가꿔지는데 나도 응당 달라져야 할게 아닌가, 지난날처럼 남들의 웃음거리가 아니라 시대의 환영속에 살고싶어하는 이 마음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이야 알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더니 그제서야 내놓더군요. 그런데 그 말이 참 고약합니다.
새박골은 상관없는데 내가 발전한게 고마워 담요를 내놓는다나요. 그리고는 같이 가자고 따라나섭디다. 없던 일이지요. 이런거야 뭐 변이라고 하겠습니까. 진짜변은 이제부터입니다.…》
빨리 새박골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처보다 한발 먼저 집을 나선 정배는 나래무지앞에서 주춤했다. 안해와 함께 지고가기에는 너무 컸다. 설사 지고간다 한들 그 많은 모판을 어떻게 다 덮겠는가.
정배는 자기 생각이 짧았음을 깨닫고 그길로 최기수를 찾아갔다.…
《소도 없고 기수도 없는데 방안에서는 그의 처가 배를 붙들고 신음소리를 내는게 아니겠습니까. 왜 그러는가고 물었더니 그저 배가 아파 그런다고 하더군요. 이 미련한 놈은 몸조리를 잘하라고 하고는 씽 문을 닫고 나왔지요.
그런데 처가 그말을 듣더니만 무릎을 탁 치는게 아니겠습니까.》
《가만!》하고 진규는 최기수에게 눈을 돌렸다.
《여기로 올 때까진 아무 일도 없었나?》
《초저녁부터 배가 띠끔띠끔 아프다는 소리는 했습니다. 예정일두 박두했다지 해서… 자리를 뜨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기 걱정은 말구 빨리 새박골에 가보라구 한사코 떠미는 바람에…》
《이렇게 우둔하다구야. 그러니까 5년동안 살았다는게 도토리만 한 계집애 하나 못 건졌지.》하고는 다시 정배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처는 산모에게 달려가고 전 곧장 진료소로 달려갔습니다. 의사선생님이나 모셔다놓고 가야지 어디 발길이 떨어집디까.
우리 기수가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입니까. 우린 또 얼마나 고대했구요. 몇년동안 분조장동무랑 분조원들이 구해다준 랭증에 좋다는 약만 해도 쌓아놓으면 아마 혼자서 지고가기는 힘들겁니다. 그러니 제 발길이 선뜻 떨어질리 있습니까. 그러는데 글쎄 이 발목을 접지르지 않았습니까. 마침이다 했지요.》
《허튼소린 그만하구 결과부터 말하게. 그래 어떻게 됐다는건가?》
《결과야 명백하지요.》
《그럼 아이를 낳았단 말인가?!》
《그렇지 않구요. 아들인데 얼마나 큰지 4키로 몇이라고 했는데… 좌우간 의사선생의 말이 쌍둥이를 합친만큼이나 크다고 합디다.》
《그럼 우리 기수가 장수를 봤다는건가?》
《아무렴 5년동안 준비한 아들인데 어련하겠소.》
《멋있습니다. 새박골에선 한밤중에 우등불이 생겨나구 집에선 장수가 태여나구… 안팎으로 변이 나니 이거야말로 우리 분조가 흥할 징조가 아니구 뭡니까.
이보라구 기수, 뭘하나, 만세라두 한바탕 부르지 않구.》
요철국의 말에 국사가 발을 달았다.
《만세도 좋지만 이왕이면 이름을 하나 척 지어가지구 집에 들어서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국사의 말이 옳네. 내 여기까지 오면서 체면도 없이 아기이름을 하나 지어봤는데 … 에, 마음에 들겠는지… 변이 나는 때에 태여난 아이라는 의미에서 최변,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그게 좋겠수다.》라고 분조원들이 한마음으로 대답했다.
최기수는 더없는 기쁨과 행복으로 뜨거운것을 삼키고있었다.
이렇게 되여 아이에게는 변이라는 멋쟁이이름이 분조의 명의로 지어졌고 그 이름을 소중히 간직한채 최기수는 총총히 새박골을 떠나갔다. 그의 걸음을 축복해주는듯 우등불은 더 세차게 활활 타올랐다.
한밤중의 거세찬 불길에 무섭게 기세를 돋구며 육박해오던 추위는 허공에서 이슬로 녹아내렸고 모판을 감싸고있는 두벌나래와 담요들은 불빛에 더욱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너무도 평범한 인간들, 진규의 마음에는 손색이 없다고 하기에는 아직 거리가 있어 매일 잔소리가 가야 했던 바로 그들이 피워올린 불길이였고 그들이 마련한 따뜻함이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들의 마음속엔 이미 따뜻함을 가져온 그 불길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것이 있다는것을 진규자신은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심장의 박동이런듯 진규의 가슴을 쿵쿵 울리며 되새겨지는 모습들이 있다.
그것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지펴주신 새로운 혁명적대고조의 불길드높이 우리의 정신력과 잠재력을 남김없이 발휘하며 폭풍쳐달리자고 한 강선의 12월호소와 새해공동사설을 받아안고 진행한 농장궐기모임때 분조원들의 모습이였다.
그때 그들은 열정에 넘쳐있었다.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100돐을 맞는 2012년에 기어이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제끼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올해에 풍요한 가을을 마련하자고, 나라의 쌀독을 책임진 농민의 본분을 다하자고 심장을 끓이던 그들이였다.
그렇다, 변은 그때 이미 났다. 그들의 심장에서 먼저 났다.
변이 난 심장을 지닌 인간들이 있어 새박골에 새 모습이 펼쳐졌고 뜻밖의 찬서리도 한밤중의 우등불로 용용하게 물리칠수 있었던것이다.
여기서 진규는 자기를 알았다.
새박골에 돌부리를 차며 뛰여갈 때까지만도 자기가 있어야만 이밤을 무사히 넘길것이라고 생각했던 진규였다. 그러나 현실은… 놀랍게도 현실은 저만 저라고 하던 진규에게 자신에 대한 가책만이 아니라 희열까지도 한가슴 안겨주었다.
진규는 고개를 들어 분조원들을 바라보았다.
정국사, 최정배, 최기수, 요철국… 얼마나 미더운 사람들인가. 그들과 함께라면 한밤중의 찬서리가 백번을 다시 내린들 두려운것이 무엇이랴.…
×
올해는 그 어느해보다 일감도 많았고 그만큼 시련도 많았다. 그때마다 분조는 한마음이 되여 새박골의 우등불로 시련을 이겨냈고 기준수확고를 넘쳐하는 기적같은 결실을 안아왔다.
돌이켜보면 올해 얼마나 많은 변들이 일어났던가.
《광명성2》호의 성과적인 발사, 인민경제 여러 부문에서 CNC화의 실현, 우리 식 주체철의 완성…
그렇다면 변이 난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인사는 어떠해야 하는가.
생각도 많다. 진규의 생각은 이해의 마지막밤과 함께 점점 더 깊어진다.
탁상시계는 어느덧 12시를 가까이하고있었다.
그의 앞에는 어머니와 그리운 사람들에게 써야 할 새해축하장이 이제나저제나 때를 기다리고있었다.
진규는 만년필을 들었다.
그는 더없는 긍지와 자부심에 넘쳐 한자한자 쓰기 시작했다.
《변이 난 해를 보내고 더 큰 변이 날 해를 맞으며…》
(함경북도 무산군 새골리 농장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