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99(2010)년 제9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참된 모습
최 학 명
창가로 조용히 다가선 나는 불야성을 이룬 수도의 밤거리를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시원스레 뻗어나간 도로우를 달리는 승용차들과 불밝은 궤도전차와 뻐스들, 거리를 더욱 환하게 하여주는 현대적인 불장식등들, 퇴근길에 오른 사람들의 활기에 넘친 모습들… 곳곳에 세워진 대형구호판들과 선전화들이 들끓는 시대의 힘찬 숨결을 느끼게 해준다.
허나 이 아름답고 장엄한 시대의 숨결을 안은 거리의 야경도 덧쌓여지는 나의 불안한 마음을 풀어주지는 못하였다.
나는 괴로움으로 하여 지그시 두눈을 감았다. 그러자 한순간 영화의 한토막처럼 아침에 있은 일이 나의 눈앞에 또렷이 떠올랐다.
…아담하게 피여난 수선화꽃잎우에는 방금전에 물을 주고난듯 맑은 이슬이 어룽져 령롱한 칠색을 내뿜고있었다.
흰서리가 다분히 내려앉기 시작한 50대 중엽의 부국장은 이번 출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듯 엄지손가락으로 책상우의 문건을 꾹 누르고 서서 웅글은 목소리로 나를 향해 말했다.
《이번에 우리가 수입하려는 설비는 그 절박성과 수익성으로 보나 나라의 경제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설비요.》
나는 부국장이 넘겨주는 문건을 무심히 펼쳐보다가 그자리에 돌부처마냥 우뚝 굳어져버렸다. 예리하게 벼리여진 쇠끝이 가슴 한구석을 사정없이 찌르는듯 한 아픔을 느꼈다.
《T합금강 랭간압연설비》
차거운 전률이 나의 온몸을 훑어내려갔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2년전에 내가 스스로 버린 연구과제였던것이다.
(아, 이 무슨 지꿎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나의 마음속 변화를 알길 없는 부국장은 하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T합금강 랭간압연설비는 현재 칸회사의 독점물이니만치 값이 간단치 않을수도 있소. 하지만 금속부문에 꼭 필요한 설비니만치 무조건 사와야 하오. 될수록 유리한 가격한도에서 사와야 나라에 주는 부담을 덜겠는데…
그러자면 명성동무가 자료를 잘 연구해서 대방과의 면담준비를 잘해야겠소.》
부국장의 방에서 문건을 들고 나선 나는 갑자기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인생길에는 때때로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그런 일들에 부닥치는 경우도 있군 한다. 그런 일을 두고 사람들은 우연이라고 말들을 한다.
그럼 이것도 우연이란 말인가?
나의 귀전에는 연구소를 떠나던 그날 연구과제를 포기한 나를 준렬히 타매하던 학철이의 그 서슬푸른 목소리가 들려오는것만 같았다.
《자넨 오늘일을 두고 반드시 후회하게 될걸세.》
김학철, 2년전 나는 그의 상급연구사였다.
시원스럽게 탁 트인 이마, 보기 좋게 빗어넘긴 굽실굽실한 머리칼, 우뚝 선 코날이며 고집스레 닫긴 입술, 사색으로 불타는듯 한 작은 눈… 이것이 나의 머리속에 새겨진 그에 대한 표상의 전부였다.
내가 소환장을 받고 연구소와 작별하던 그날, 학철은 넓은잎나무들이 하나, 둘 떨어져내리기 시작한 구내를 오래도록 나와 함께 걸었다.
하늘은 침울한 회색빛을 띠였고 까치들은 불안스레 우짖었다. 키높이 자란 뽀뿌라나무에서는 가을을 맞아 푸름을 잃은 잎새들이 락엽져 허공을 돌며 방향없이 떨어져내리고있었다.
《그래 정말 떠나겠나?》
그가 나를 향해 던진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기대가 어린 질문이였다.
《가겠네!》
나는 단호한 나의 립장을 보여주듯 짤막히 대답하였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듯 그 자리에 멈춰섰다.
《잘있으라구.》
학철은 나의 인사를 외면해버렸다. 그는 야속함과 원망이 력력히 비낀 싸늘한 눈빛을 피끗 던지고는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서서 오던 길로 가버렸다.
얼굴조차 한번 돌리지 않고 무겁게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느라니 형언키 어려운 고독감과 괴로움이 파도처럼 가슴속에 밀려왔다.
쓸쓸한 심정으로 학철이의 뒤모습을 바라보던 나의 눈앞에는 마지막실험이 실패하던 그날의 처참한 광경이 되살아올랐다.
숨죽은 계기들과 여기저기 흩어진 도면들, 실험일지들… 머리를 싸쥐고 주저앉은 학철의 김빠진 모습이 아프게 눈을 찌른다.
틀림없는 성공이라고 장담했던 실험이였다. 그런데 얻은것이란 많은 경제적손실액과 로력 그리고 흘러보낸 시간뿐이였다.
성공에 대한 확고한 신심과 락관적인 기대는 실패라는 선언과 함께 산산이 부서져버린듯싶었다.
나는 정신육체적으로 더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실패가 가져다준 결과였다.
병원침대에서 정신을 회복한 나는 그때에야 비로소 리론과 실천간에는 서로 다른 그 어떤 차이가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날 저녁 어느 성기관에서 사업하고있는 대학동창생이 찾아왔다.
그는 언제부터 나를 찾아다니며 외국과의 과학기술교류를 전문으로 하면서 필요한 설비들을 사오기도 하는 새로운 국이 나오는데 오지 않았는가고 권고하던 친구였다.
《기회란 나무가지에 앉은 새와 같아 잡지 않으면 흘쩍 날아가버린다네.
내 일전에도 말했지만 이번에 성에서 새로 내온 국에는 자네처럼 외국어에도 능하고 전문기술에도 밝은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기술로써 나라를 위하는거야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의 권고는 몇년간의 연구에서 실패의 쓴맛을 뼈저리게 절감하고있던 나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후에 안 일이였지만 그때 성에서는 이미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을 선정해놓았다는것을 나도 친구도 전혀 모르고있었다.
얼마후에 나는 소환장까지 받게 되였다.
그때에야 나는 함께 연구사업을 해오던 학철이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뭐라구?! 그게 진심인가?》
언제나 사색에 넘쳐있던 학철이의 작은 눈이 번뜩이며 허공에서 나의 눈길을 붙들어세웠다.
《어찌겠나, 벌써 소환장이 내려왔네.…》
나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학철이의 눈빛을 피해 고개를 떨구며 기여들어가는듯 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였다. 나자신도 그것이 한갖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물론 외국과의 과학기술교류도 중요하겠지.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것은 우리 식의 최첨단설비들을 만들어내는것이 아니겠나.
더우기 자네의 연구과제야 우리 나라 압연기술에서 그 해결을 기다리는 절박한 문제가 아닌가?
그러니 다시 잘 생각해보라구.》
학철의 이 말에 나는 쓸쓸히 웃으며 도리머리를 저었다.
《아니, 난 지쳤네!
지금까지의 연구과정은 우리의 현실정에서 그 설비의 제작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것일세.… 난 이번에 자신의 무력함을 통절히 느끼게 되였네.》
《자넨 지금 실패앞에 겁을 먹고 물러서려 하고있네. 과학은 불가능을 론증하기 위해서 필요한게 아니네.
우리 시대의 과학자라면…》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물론 과학이 점령 못할 요새란 있을수 없네. 모든것이 시간문제이니까.
하지만 인간의 욕망 그자체를 과학과 같이 볼수는 없다고 생각하네.》
《욕망이라구?!》
학철의 선이 굵고 진한 눈섭이 꿈틀하더니 눈동자에 금시 불이 펑끗 일어날듯 눈빛이 날카로와졌다.
나는 그때처럼 성이 난 학철이를 처음 보았다.
한동안 시간이 흘러서야 자신을 다잡은듯 학철은 저으기 가라앉은 음성으로 의미심장하게 말하였다.
《난 자네를 과학자의 참된 량심을 가진 성실한 인간으로 보아왔네.
지금도 잊혀지지 않네. 그때 연단우에 올라 가슴을 두드리며 나라의 경제발전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연구성과를 내놓지 못하는 과학자는 과학자가 아니라 밥벌이군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우리 나라에 절실히 필요한 T합금강 랭간압연설비를 자체의 힘으로 연구완성하겠다던 자네의 모습에서 난 정말 큰 감동을 받았었네. 아니, 과학자의 참된 모습을 보았다고 해야 할지…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그 모든것이 위선이였소. 이젠 더 늦기 전에 달아난다는거겠지?》
변명할 여지조차 없는 학철의 준렬한 타매앞에서 내가 과연 무엇이라고 자신을 변호한단 말인가.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있었다.
《온 나라가 강성대국건설에 떨쳐나선 오늘의 현실은 우리 과학자들이 그 누구보다도 더 어려운 짐을 2배, 3배로 질것을 바라고있네. 그래서 우리 조국에 필요한것이라면 설사 그것이 하늘의 별이라 할지라도 기어이 따와야 하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 과학자들이 시대앞에 지녀야 할 의무라고 나는 생각하네.
명성이, 자넨 오늘일을 두고 반드시 후회하게 될걸세.》
허나 학철이의 이 마지막충고도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리기 시작한 나의 마음을 움직일수 없었다.
이렇게 되여 나는 학철이와 석연치 못한 감정을 품은채 쓸쓸히 헤여지고말았다.
그후 나의 생활은 순풍에 돛을 올린 배마냥 순조롭게 자기의 길을 걸어왔다.
3개의 외국어를 능숙하게 활용할줄 알았던 나는 세계 여러 나라들과의 과학기술교류와 같은 실무사업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국에 보배덩이가 굴러들어왔다는 싫지 않은 칭찬이 한입, 두입 건너 나의 귀가에도 들려왔다.
오직 연구사업에만 몰두해야 했던 연구사시절과는 달리 사업상 범위가 넓어졌다.
아시아, 유럽의 판도를 뛰여넘어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많은 지역들을 메주밟듯 하였다. 비행기의 시창아래로 흘러가는 흰구름과 낯선 이국의 도시와 산발들을 내려다 볼 때의 감정이란 참…
나는 나의 사업에 만족하였으며 거기서 긍지와 보람을 찾았다.
어느덧 나의 머리속에서는 잊지 못할 2년전에 깊이 새겨졌던 그 일이 희미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때에 T합금강 랭간압연설비가 다시금 피할수 없는 운명처럼 외길목에 떡 버티고 내 앞길을 막아나선것이다.
이때에야 나는 시대의 의무를 외면한 인간은 그 어디에 가서도 결코 행복할수도, 떳떳할수도 없다는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기 시작하였다.
만일 학철이가 지금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T합금강 랭간압연설비를 수입하러 간다는것을 알게 된다면…
×
유럽의 어느 한 도시에서 진행된 면담은 시작부터 인위적인 난관에 부닥쳤다.
칸회사의 리사장 제퍼슨은 퍽 젊어보이는 60대의 늙은이였다. 그는 전통적인 유럽신사풍의 사나이답게 행동했다. 그러나 그뒤에는 감출수 없는 거만성과 교활성, 보이지 않는 음모가 숨어있었다.
그가 제기하는 엄청난 설비값과 높은 관세, 복잡하고 까다로운 수속절차, 수송계약… 여기서 나는 웃음속에 감추어진 무서운 칼을 보았다.
후에 알게 된 일이였지만 여기에는 미제국주의자들의 반공화국고립압살책동에 맞장구를 친 회사측의 검은 속심이 깔려있었던것이였다.
꿀발린 그자의 감언리설을 귀전으로 흘러보내는 나의 가슴속에서는 분노의 피가 끓고있었다.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침착한 어조로 여러가지 론거와 사실을 들어가며 회사측의 그릇된 처사를 신랄히 규탄하였다.
한동안 격렬한 론쟁이 면담탁의 이쪽저쪽으로 배구공마냥 넘나들었다.
《좋습니다. 나는 부디 우리 회사의 설비를 사달라고 사정하고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결심을 하시오, 사든지 아니면 그만두든지… 시간이 곧 돈이라는거야 당신도 잘 알테니까.》
시종일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면담을 파탄에로 몰아온 제퍼슨은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며 이제는 더 할말이 없다는듯 눈을 감았다.
나는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제퍼슨을 쏘아보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나는 이번 면담이 우리 나라에 대한 일부 불순세력들의 〈제재〉와 고립압살책동의 한고리로 리용된데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세력들의 꼭두각시놀음밖에 못하는 당신의 가련한 처지에 대해서도 동정을 표시합니다.》
면담은 끝내 결실을 보지 못한채 결렬되고말았다. 관례대로 제퍼슨이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으나 나는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제퍼슨은 입술을 삐죽이며 오만한 목소리로 지껄여댔다.
《에… 우리에게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나니. 어리석은자여! 아무때든 찾아와 자신의 죄를 참회할지어다.〉》
《천만에, 속단하지 마시오.
제퍼슨씨, 우리 나라엔 최후에 웃는자가 승리자라는 말이 있소!》
제퍼슨은 어깨를 으쓱이며 두팔을 쩍 벌리고나서 《노우.》하는 까마귀울음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쌀쌀한 랭기를 풍기며 면담장을 나섰다.
그날 저녁 나는 량심의 가책으로 하여 좀처럼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뜻밖에도 면담장에 학철이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면담탁우에 놓여있는 T합금강 랭간압연설비수입문건을 집어들더니 다짜고짜로 찢어버렸다.
너무도 돌발적인 행동에 칸회사의 대표들은 물론 나도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모두가 얼음판에 자빠진 소처럼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든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버럭 소리쳤다.
《자네 실성했나?》
학철이가 나를 향해 피끗 고개를 돌리였다.
그의 두눈에서는 금시 시퍼런 불찌가 당장 튀여나올듯 이글거리고있었다.
《정신차리라구. 자네가 물러선 그 한걸음때문에 오늘은 조국의 존엄이 침해당하고있네.
명성이, 제발 정신을 차리게. 여긴 자네가 있을 곳이 못되네. 가자구, 어서!》
학철은 나를 쏘아보며 준렬히 꾸짖더니 덥석 내팔을 잡고 면담장밖으로 나갔다. 나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그만에야 문턱을 넘어섰는데 아찔한 벼랑이였다.
《아―》…
나는 자기도 모르게 새된 소리를 지르며 침대우에서 벌떡 일어났다.
꿈이였다.
식은땀이 등골을 적시며 온몸에 흐르고있었다. 내 고함소리에 놀란 동무들이 근심어린 눈길로 나를 지켜보고있었다.
어느새 희붐하게 새날이 밝아오고있었다.
누구인가가 내 손을 잡으며 조용히 말하였다.
《조국에서 련락이 왔습니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가 준 용지를 훑어보았다.
《면담을 중지하고 돌아올것.》
조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나는 쓰려오는 가슴으로 하여 도무지 자신을 진정할수가 없었다.
바로 2년전 내가 그 연구과제를 끝까지 완성하였더라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팠다.
오늘의 과학기술은 민족의 존엄을 떨치고 나라의 국력을 강화하는데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것을 왜 깨닫지 못하였던가. 이제 무슨 면목으로 조국에 돌아간단 말인가?
뼈저린 자책과 후회가 몹시도 나를 괴롭혔다.
×
칸회사와의 면담과정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듣고난 부국장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제꼈다.
한여름의 청신한 바람결에 창문가의 수선화잎이 하르르 떨며 그윽한 향기를 내뿜고있었다.
나는 무거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금 부국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쨌든 수고했소. 집에 들어가 좀 쉬오.》
부국장은 심각해있는 나의 기분을 눙쳐주려는듯 따뜻하게 권하였으나 나는 선뜻 일어설념을 못하였다.
《그럼 이젠 어떻게 합니까?》
부국장은 잠간 나를 바라보다가 그동안 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대충 이야기해주었다.
현재 우리의 과학자, 기술자들이 T합금강 랭간압연설비를 자체의 힘으로 개발하기 위하여 총돌격전을 벌리고있다는것, 그래서 국에서는 여기에 보조를 맞추고 그들을 돕기 위한 사업을 짜고들고있다는것, 또 이 사업에 과학원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와나서고있다는것이다.
《그러니 T합금강 랭간압연설비를 우리 힘으로 만든다는겁니까?》
《그렇소. 연구조의 책임자는 김학철이라는 연구사인데 참 불같은 청년이요.
그런 사람들앞에선 불가능이란 그자체가 말도 되지 않소. 진짜 과학자란 말이요.
그래서 그 연구집단을 믿고 동무들을 철수시킨거요.》
나는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것처럼 갑자기 뗑해졌다. 그러니 학철이가 끝내…
평소에 별로 칭찬이란 할줄 모르는 부국장이 학철이에 대해 이 정도로 호감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는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였다.
어떻게 학철이의 연구가 물망에 올랐을가?
도대체 부국장은 어떻게 되여 학철이를 알게 되였을가?
나의 머리속에서 많은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나의 표정에서 이러한 심리상태를 알아본듯 부국장은 깊은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도 같은 과학기술부문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정말이지 그 동무앞에서 머리를 들수 없소.
그날은 동무가 외국출장을 떠난 다음날이였소.
글쎄 손에 붕대를 감은 한 청년이 도면들과 실험일지들을 한가득 안고 이 방으로 들어오는게 아니겠소. 그는 자기 소개를 하고나서 어떻게 알았는지 무작정 T합금강 랭간압연설비수입을 취소해달라는게 아니겠소.
난 그를 보며 놀랐소.
붕대를 감은 손, 부르튼 입술, 충혈진 두눈, 책상우에 가득 쌓인 도면들과 실험일지들… 나는 그만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그를 쳐다보기만 했소.》
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바로 학철이임을 더 듣지 않고도 알수 있었던것이다.
부국장은 천천히 장안에서 라이타와 담배를 꺼내였다. 평소에 담배를 즐기지 않던 그가 이렇게 담배를 꺼내들적에는 몹시 흥분하였음을 잘 알수 있었다.
두눈을 가늘게 쪼프린 부국장은 깊은 생각에 잠겨 담배를 한모금 빨고는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파르스름한 담배연기가 그물그물 피여올랐다.
그것은 마치 사색의 긴 공간을 지나 추억의 심연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는것만 같았다.
…학철은 책상우에 놓여있는 한아름이나 되는 도면들속에서 하나의 도면(그것은 너무도 보풀이 일고 손때가 올라 어지럽게 해졌다.)을 책상우에 펼쳐놓았다. 어떤 부분은 잘 보이지 않아 다시 그려놓은듯 한 무수한 점과 선들로 이루어진 도면이였다.
그는 붕대를 감아 불편한 손으로 한곳을 짚어보였다.
《부국장동지, 우리 힘으로도 얼마든지 T합금강에 대한 랭간압연을 실현시킬수 있습니다.
여길 보십시오. 얼마전의 시험과정에 지금껏 애를 먹이던 이 롤과 롤사이에 작용하는 압력의 불균형의 원인이 다름아닌 이 유압계통의 변환수치에 있다는 확고한 실마리를 잡게 되였습니다.》
학철은 거의 환희에 가까운 목소리로 손세를 써가며 압연설비의 작용원리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부국장은 도면을 보면서 그의 말에 긍정하듯 머리를 끄덕이기도 하고 때로는 부정하듯 도리머리를 젓기도 하였다.
도면을 보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능성이 전혀 없는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실마리에 불과하였다. 만일 그 실마리가 결정적요인이 아니라면…
그 어떤 욕망이나 동정이 과학연구사업을 대신해줄수는 없는것이다.
부국장은 도면에서 눈길을 떼며 랭정하게 입을 열었다.
《고심어린 동무의 연구과정을 듣고보니 여기까지 찾아온 그 심정이 리해되오. 동무도 알겠지만 이건 세계적으로 과학기술이 발전되였다고 자랑하는 몇개 나라밖에 못 만드는 최첨단설비요.
그런데 동문 지금의 그 자그마한 연구성과를 가지고 이 설비의 수입문제를 이래라저래라 하고있단 말이요.
동무에게 무슨 담보가 있소?》
순간 무섭게 타번지는 학철이의 두눈에서 섬광과도 같은 불꽃이 번쩍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지심을 뒤흔드는 뢰성과도 같았다.
《저에겐 담보가 있습니다.
얼마전 우리 과학자, 기술자들을 만나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제 가까운 몇해안에 우리 나라를 세계적인 과학기술선진국으로 올려세우려는것은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며 의지라고 하시면서 경제강국건설을 우리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에게 맡기겠다고 뜨겁게, 뜨겁게 말씀하시며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습니다.
이것이 저의 담보입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믿음을 받아안은 우리가 조국이 필요하는 그런 설비 하나 제 손으로 만들지 못해 외국에서 수입해오도록 한다면 어떻게 경제강국을 건설했다고 말할수 있단 말입니까.
부국장동지, 만일 먼 후날 후대들이 그렇게 수입해온 설비들을 본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마 그들은 우리 세대 과학자, 기술자들을 두고두고 원망할것이며 영원히… 자기 힘을 믿지 못할것입니다.》
이때 조용히 문이 열리더니 산뜻한 위생복을 입은 간호원처녀가 방에 들어섰다. 처녀는 부국장에게 인사를 하더니 학철이에게로 돌아섰다. 그의 두눈은 붉게 달아있었다.
《너무해요, 연구사동지.
당장 병원으로 돌아가시자요.》
《미안하오, 간호원동무. 지금 난 공장으로 가야 하오.
이제 마지막시험이 성공하면 그땐… 꼭… 내 발로 병원에 찾아가겠소. 그리고 1년이고… 10년이고 동무가 하라는대로 다 하겠소. 주사를 맞으라면 맞고… 자라면 자고…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나에게 시간을 좀 주시오.》
《연구사동지…》
간호원처녀는 눈물을 머금었다.
《연구사동무…》
부국장은 학철이를 와락 부둥켜안았다. 그의 진정에 머리가 숙어졌던것이다.
《제가 큰소리친걸… 용서해주십시오.
제… 살을 깎고 뼈를 바쳐서라도… 어떻게 하나 기어이 T합금강 랭간압연설비를 완성하겠으니 제발 수입조치만은… 다시 토의해주십시오.》
학철의 두눈은 비장한 각오로 번뜩이였다.…
《그후 이 문제는 해당 단위들의 토의를 거쳐 결국은 학철동무의 연구사업을 적극 도와주어 우리의 힘으로 T합금강 랭간압연설비를 만들기로 결정하였소.
후에 안 일이지만 사실 학철동무는 처음부터 이 연구사업의 발기자는 아니였소. 그 발기자는 거듭되는 실패에 겁을 먹고 중도에서 연구사업을 포기하였으며 나중에는 어디론가 떠났다고 하오.
그러나 학철동무는 이 연구의 중요성을 알고 자기가 자진하여 연구과제를 받아안았소. 그 나날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연구사업을 중단하지 않았소. 얼마나 많은 애로와 난관을 이겨냈는지 모르오.
솔직한 말로 누가 그 연구사업을 하라고 강요한 사람도 또 실패앞에서 물러섰다고 추궁하는 사람도 없었소. 하지만 그는 누가 보건말건, 알아주건 말건 과학자의 참된 량심을 지켰던거요.
정말이지 그 불같은 연구사동무의 참된 모습에서 난 자신을 심각히 돌이켜보게 되였소.》
부국장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으나 그가 남긴 이야기의 여운은 좀처럼 나의 귀전을 떠나지 않았다.
나의 눈앞에는 학철이의 모습이 돌격전의 진두에서 불뿜는 적의 화점을 향해 육박해가는 영웅의 모습으로 부각되여 나타났다.
그렇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바라시는것이라면 기어이 해내고야말겠다는 결사관철의 정신, 바로 이것이 우리 과학자들의 철의 신념으로 되여야 하는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귀전에는 신사인체 하던 제퍼슨의 거만한 지껄임소리가 들려오는것 같았다.
《난 당신들이 다시금 우리를 찾아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절대로 그렇게는 안될것이다.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이 선진과학기술을 마치 저들의 독점물처럼 내흔들면서 우리의 존엄높은 사회주의조국을 고립압살할 기회만을 노리고있는 이상 오늘의 과학기술전이야말로 총포성없는 대결전인것이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굳은 결심이 어린 눈빛으로 부국장을 바라보다가 결연히 입을 열었다.
《제가 그 동무를 돕게 해주십시오.
사실… T합금강 랭간압연설비의 첫 발기자는… 바로 … 저였습니다.
이제라도… 늦게나마… 제모습을 찾도록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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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금 연구소로 가게 되였다.
내가 마지막문건수속을 미치고 부국장의 방에 들어섰을 때 그는 더없이 반가운 표정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이거 벌써 보냈어야 하는건데… 이런 보배덩이를 옆에다 척 끼고도 외국에 〈구걸〉을 보냈으니… 이젠 나도 눈이 먼것 같소.
어쨌든 동무가 부럽소. 나도 한 10년만 젊었어도… 하긴 나이가 기본이 아니지. 어떻게 제모습을 찾는가 하는게 중요하지.》
부국장은 나의 수속문건에 활달한 수표를 남기며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나는 롱삼아하는 그의 말을 새겨들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내가 작별인사를 마치고 방을 나서려는데 부국장이 나를 불러세웠다.
《아, 명성동무, 잠간만.》
그는 책상에서 무슨 서류인가를 찾아들더니 나를 향해 내밀었다.
《칸회사에서 우리 나라 무역대표부를 통해 보내온 전보내용이요.
우리의 요구조건을 고려해볼 용의가 있으니 면담을 다시 하자고 요청해왔구만.》
나는 전보내용을 보지도 않고 책상우에 도로 밀어놓으며 물었다.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부국장은 나의 물음에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것이나 있소. 대답은 동무가 이미 주지 않았소. 최후에 웃는자가 승리자라구!》
《옳습니다. 우리 과학자들에게서 다른 대답이란 있을수 없지요.》
나는 발걸음도 가벼이 거리로 나섰다.
2년전, 생을 잃고 떨어지는 락엽마냥 쓸쓸히 떠나온 그곳으로… 나는 가고있다. 그때에는 량심의 가책으로 하여 발걸음이 몹시 무거웠지만 지금은 떳떳한 마음으로 이 길을 걷고있다.
수도의 거리에는 부강조국의 래일을 위해 자기들의 일터마다에서 위훈을 떨쳐가고있는 사람들이 열정과 확신에 넘친 모습으로 걸음을 다그치고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벅찬 대오속에 자신도 있다고 믿어왔으며 숨결을 같이 하고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같은 과학자로서 나는 학철이와 같이 자그마한 사심도 없이 진정으로 조국의 래일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왔던가.
높은 과학적성과로 조국의 부강번영에 실질적으로 이바지하는 참된 인간이 되는것, 이것이 조국이 바라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바라시는 과학자의 참모습이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에 잠겨 묵묵히 걸어가던 나는 문득 누군가가 나를 향해 반갑게 손을 저으며 마주달려오고있음을 보게 되였다.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의 모습은 더욱 뚜렷이 안겨들었다.
나의 두눈에 갑자기 눈물이 핑하니 고여올랐다.
그는 다름아닌 학철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