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100(2011)년 제11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길
함 무 광
1
○○혁명전적지답사도로 건설을 맡은 돌격대지휘부의 사업총화가 끝나기 바쁘게 철명소대장은 밖으로 나왔다.
밖은 쟁반같은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라 대낮처럼 밝았다.
그는 숲속의 오솔길을 따라 소대병실쪽으로 머리를 수굿하고 걸어갔다.
은은한 달빛이 머리우에 드리운 무성한 나무가지들사이로 흘러내렸다.
발밑에선 해묵은 락엽들이 부근부근 밟히였다.
산들바람이 가볍게 불어올 때마다 무수한 나무잎새들은 살갑게 몸을 흔들며 무엇인가 애틋이 속삭이는듯 했다. 그럴 때면 숲속으로 흘러든 달빛은 물결처럼 일렁이며 갖은 조화를 다 부리였다.
어디를 둘러보나 그윽하고 향긋한 정서가 풍기는 달밝은 숲속의 여름밤이다.
방금전 사업총화에서 울리던 대장의 열기띤 목소리가 다시금 귀에 쟁쟁했다.
《동무들, 우리가 닦아나가는 이 길은 단순한 도로가 아니라 우리 혁명의 빛나는 혁명전통을 대를 이어 만대에 길이 빛내이기 위한 사업이라는것을 언제나 명심하고 제기일에 무조건 완공하기 위해 더욱 분발해나갑시다.》
대장은 전반적인 도로공사속도가 떠지고있는데 대해 모를 박고 말했다.
철명이네 소대도 이런 속도로 나가다가는 제기일에 공사를 완공하기 힘들었다. 결정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기계화수단들을 전혀 들이댈수 없는 가파로운 산중턱으로 길을 내야 하는 소대의 임무는 결코 헐한 일이 아니였다. 그런대로 어렵고 힘든 일은 참고 견디여낼수 있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최대한 시간을 얻어내자면 부득불 병실을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 공사를 시작할 때에는 병실이 작업장과의 거리도 가깝고 그옆에 샘터까지 있어 아주 리상적이였지만 날이 갈수록 도로가 멀리 뻗어나가는 바람에 이제는 병실과 작업장을 오가는 시간만 합쳐도 2시간이나 걸리군 했다. 그러니 병실만 옮기면 하루 2시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얻어낼수 있었다.
그러나 철명이 선뜻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있는것은 생활조건때문이였다.
물론 소대원들은 공사를 앞당기기 위해서라면 생활토대가 잡히고 이제는 제집처럼 정이 든 병실을 두고 작업장가까이에 설치할 가설막에서 야외생활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한다고 해도 적극 지지해나설것이다.
제일 난문제는 그곳에 물이 없는것이였다.
골짜기를 따라 한참 내려가야 물이 있는데 소대취사장에서 쓰는 물만 길어오자고 해도 식사보장을 맡은 은혜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소대원들이 짬시간에 물긷는 일을 도와준다고해도 지금처럼 잘 꾸려진 취사장과 병실앞에 샘물이 있을 때보다는 애로가 많을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처녀의 몸으로 한개 소대의 식사를 보장하느라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는지 모르겠는데 이제 그런 조건에서 아무리 이악한 제대군인처녀라 해도 소대의 식사를 원만히 보장해내겠는지 걱정이였다. 그러다가 소대에 한명밖에 없는 처녀가 쓰러지면 더 야단이였다.
철명은 무슨 일이든 일단 실천으로 넘어가기 전에 구체적이고 면밀한 타산을 세우고 한치의 드팀도 없이 앞뒤로 모든것이 딱 들어맞을 때에만 시작하군 했다. 여하튼 그런 성격으로 하여 때로는 우유부단하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그런 말을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히려 그는 흥분이나 욕망부터 앞세우는 사람들을 그리 탐탁하게 보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재고 또 재며 최정밀도의 부속을 깎아내는 선반공으로 일하면서 생겨난 습관인지도 모른다. 이 습관으로 하여 그는 사람들속에서 일명 노기스로 불리웠다.
2
어느덧 그는 병실앞마당까지 이르렀다.
병실안에서는 벌써 저녁식사를 하고난듯 오락회가 한창 벌어지고있었다.
누군가의 건드러진 노래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합창으로 번져졌다.
어렵고 힘든 생활속에서도 락천적으로 생활하고있는 소대원들을 보니 무겁던 마음이 한결 개운해졌다.
철명은 지금 병실에 들어서면 그들의 흥겨운 분위기를 깨뜨릴것 같아 마당앞을 가로질러 박우물가로 걸어가 시원한 샘물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넙적한 바위에 걸터앉아 하얀 차돌이 한벌 쭉 깔려있는 정가로운 박우물을 굽어보았다.
은혜의 알뜰한 일솜씨가 이 박우물에 그대로 어려있는듯 했다.
하늘의 보름달도 맑고 깨끗한 박우물을 그저 내려다보고만 있을수 없는듯 고요히 내려앉아 움직일줄 모르고 미소를 떠올린다.
어느덧 보름달이 은혜의 모습으로 바뀌여졌다.
그는 철명을 마주보며 야릇한 표정을 짓고 물었다.
《제가 믿음이 가지 않는 모양이군요.》
그의 목소리에는 원망스러운 감정이 짙게 깔려있었다.
(은혜가 언제 또 저 말을 했던가? 아, 그렇지.…)
하나의 추억이 눈앞에서 등불처럼 확 켜졌다.
지난해 봄날이였다.
제대되여 공장에 온 은혜가 철명의 작업반에 견습공으로 배치되여왔다.
그날 직장장은 철명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작업반장동무, 이 제대군인처녀를 동무네 작업반에 배치하오. 해안포병출신인데 동무가 직접 책임지고 잘 배워주오. 이름은 신은혜요.》
그리고는 은혜에게로 돌아서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동무네 반장동무요. 선반에서는 기능이 높다고 공장적으로 소문난 사람이요. 한가지 결함이 있다면 눈이 어찌나 높은지 아직 장가를 가지 못한것이요.》
그 말에 철명이 멋적어하며 전주대같이 꺽두룩한 직장장을 흘겨보자 은혜는 호호 웃었다.
《어마나, 그럼 나같이 못난 처녀한테 기술기능을 제대로 배워주기나 하겠어요?》
철명은 오랜 지기처럼 스스럼없이 롱담까지 하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허허… 보통이 아니겠는데!)
처녀는 둥그스름한 얼굴에 류달리 길어보이는 속눈섭과 옹달샘같은 두눈이 새물새물 웃고있는것이 척 보기에는 아련해보였지만 성격은 영 딴판이였다.
그는 처음부터 6개월간의 견습기간을 3개월로 단축하겠다고 했다.
철명은 그 결심과 욕망은 좋으나 규정대로 6개월간에 제구실을 해도 괜찮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야릇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제가 믿음이 가지 않는 모양이군요.》
그는 제 계획대로 견습공생활을 앞당기기 위해 노력했다. 길을 오가면서도 기술규정과 리론들을 따라외웠고 작업이 끝난 후에도 기술을 련마하고 기계에 정통하느라 현장을 뜨지 않았다.
무서운 고집쟁이, 이악쟁이였다.
은혜는 끝내 남들이 6개월이 걸려야 할 견습기간을 단 3개월동안에 마치고 단독으로 기대를 잡았던것이다.…
이번에도 그때처럼 꽤 해낼수 있지 않을가. 아니… 지금은 무엇보다 우선 육체적으로 견디여내지 못할것이다.
처녀의 몸으로 물지게를 지고 그 험한 골짜기를 오르고내리면 하루이틀사이에 쓰러져버리고말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로력이 긴장하다 해도 한사람 아예 뚝 떼여 식당근무성원을 보충해주는것이 옳을것 같았다.
이때 등뒤에서 자박자박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철명은 뒤를 돌아보았다.
은혜가 무엇인가 소랭이에 한가득 담아들고 박우물가로 나오다가 한순간 깜짝 놀라는듯 했다.
《어마나, 소대장동무예요? 그런걸 난 산에서 곰이 내려와앉아있는가 했지요, 호호.》
그의 웃음소리가 숲속을 흔들었다.
철명이도 허허 웃었다.
은혜를 마주할 때면 그의 활달한 성격으로 하여 모든 근심이 다 사라져버리는듯 했다.
《언제 돌아오셨어요?》
《방금전에 왔소.》
《그런데 혼자서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철명은 말없이 은혜를 바라보았다.
달빛아래 서있는 그의 모습은 여느때없이 청신해보였다.
《은혜동무 생각을 하댔소.》
《저를요? 호호. 혹시 소대장동무 마음속에 오늘 무슨 지자기현상이 일어난게 아니예요?》
그는 또 까르르 웃었다.
《지자기현상이면 좋겠소. 사실은 지금 현장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작업에 지장을 받고있소. 그래서 병실을 옮겨야 하겠는데 은혜동무 일이 걱정되누만.》
철명이 웃음을 거두고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은혜는 그런 일때문에 걱정하고있는 철명을 오히려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전선이 멀어지면 보장부문도 따라서야 하는건 응당한 일인데 공연한 걱정을 다 하세요.》
《은혜동문 늘 보아야 군대식으로 말하누만. 고맙소. 그러나 조건이 보통 불리하지 않소.》
철명은 불리한 생활조건들을 한동안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대신 식당근무에 한사람 보충해주겠다고 했다.
잠시 말이 없던 은혜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예요. 한사람의 로력이라도 더 필요할 때 그러지 마시고 모두가 총돌격전을 벌려주세요. 저도 뒤떨어지지 않겠으니 걱정마세요.》
철명은 자신이 이러저러한 정황과 타산을 세워보며 오래동안 고심해온 문제를 은혜가 순간에 너무 쉽게 생각하고 말하고있는것 같았으나 어쨌든 바쁜 숨은 돌려지는듯 했다.
《하여튼 손이 딸리면 아무때나 제기하오.》
3
소대병실이 공사장가까이로 옮겨지자 작업능률이 오르는것이 눈에 뜨이게 알렸다.
소대원들은 뜨거운 폭양속에서도 사기가 충천하여 지칠줄 모르고 돌격전을 벌렸다.
구리빛으로 물든 그들의 얼굴과 몸에서는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으나 누구 하나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은혜는 이전보다 몇갑절이나 더 힘겹게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였으나 그속에서도 소대원들을 위하여 시원한 솔잎차나 오갈피차를 만들어가지고 현장에 나타나군 했다.
은혜의 그러한 소행은 소대원들을 크게 고무했다.
언젠가 소대현장에 나왔던 돌격대 대장도 은혜가 만들어온 오갈피차를 한고뿌 시원히 들이키고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친구들이 어디서 이런 왕성한 힘이 나오는가 했더니 이런 보약물만 마시고있었구만. 은혜동무, 이 친구들에게 너무 기운을 뻗치게 했다가는 동무가 위험할수 있소. 그러니 적당히 공급하오.》
《호호, 대장동진 제가 해안포병출신이라는걸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전 바다에서 그 어떤 목표도 단번에 명중할수 있는 우등사수랍니다. 하물며 땅에서야…》
그리고는 입으로 땅 소리를 내며 자기의 손을 권총처럼 가슴우로 쳐들었다.
《하하하.》
은혜의 익살스러운 모습에 대장과 소대원들은 즐겁게 웃으며 유쾌한 시간을 보내였다.
언제나 웃음과 랑만을 안겨주는 처녀였다.
은혜에게는 도대체 근심과 걱정이라는것은 있는것 같지 않았다.
연약한 처녀의 몸으로 남보다 더 무거운 부담을 지고있으면서도 언제한번 힘든 내색없이 웃음만을 담고있는 그의 모습이 철명에게는 새삼스럽게 안겨왔다.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자꾸 되새겨져 그의 마음속을 조용히 들여다보고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철명은 은근히 은혜에 대해 관심이 깊어지는 자신을 놀랍게 생각하였으나 곧 소대장으로서 그럴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단정해버렸다.
그는 짬시간이면 무엇이든 은혜의 일을 도와주고싶었다.
철명이뿐아니라 소대원들모두가 한결같은 심정이였다.
그러나 언제한번 그의 일손을 도와주기가 힘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물을 길어주려고 나오면 어느새 물통마다 물이 가득가득 차있었다.
아마 남 다 자는 밤이 아니면 이른새벽에 그 많은 물을 길어온 모양이였다. 그래서 불이라도 좀 때주려고 취사장안에 들어서면 그는 깔끔하게 말했다.
《소대장동무, 녀자들이 남자들을 제일 민망스럽게 볼 때가 어느때인줄 아세요. 소대장동무처럼 이렇게 부엌에서 서성거릴 때예요.》
그리고는 철명이 밖으로 나갈 때까지 고집스럽게 서있기만 했다.
철명은 될수록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그의 마음은 리해되였지만 자신의 진정이 무시당하는것이 섭섭하기도 했다. 더구나 공식적인 장소도 아닌 곳에서도 그저 소대장동무, 소대장동무 하는것이 어쩐지 귀에 거슬렸다.
그럴 때에는 그저 철명동무라고 부르면 안되는가, 하여간 처녀가 남의 도움을 그렇게 받아들이기 싫어해서 앞으로 시집은 어떻게 갈가?
제기랄!
그는 은혜가 제 누이동생이라면 저럴 땐 한대 때려주고싶었다.
날이 갈수록 그의 둥그스름하던 얼굴도 어느새 갸름해졌고 입술도 항상 부르터있어 그것을 감추느라고 화장을 해도 입술에만은 특별히 신경을 썼다.
정말 무서운 이악쟁이였다.
철명은 아글타글하는 은혜의 그 심정을 다는 알지 못하였다.
자기의 정확한 노기스로도 도저히 그를 측정하기 힘들었다.
은혜는 제대군인이며 당원이였다.
철명은 그가 돌격대생활에서 바랄것이 없다고 생각되였다.
그래서 철명은 은혜가 돌격대에 탄원해나섰을 때 그에게 물었다.
《은혜동문 군대에서 제대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왜 또 돌격대에 나가겠다고 그러오?》
그때 그는 웃으며 말했다.
《저와 함께 가는것이 싫어요?》
철명은 왕청같은 그의 대답을 듣고 그저 웃어버리고말았다.
어느날 대기가 눅눅해지고 먹장구름이 하늘을 메우며 밀려들더니 폭우가 쏟아져내렸다.
시퍼런 번개불이 번쩍이고 꽈르릉, 꽈르릉 천둥소리가 산발을 울렸다.
아름드리나무들도 우우― 소리를 지르며 비바람에 몸부림쳤다.
그런속에서도 돌격대원들은 한치한치 길을 열어나갔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사나운 파도를 헤가르며 전진하는 용사들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비바람은 더 세차게 휘몰아쳤다.
돌격대지휘부에서는 산사태가 날수 있으므로 무조건 작업을 중지시켰다.
철명은 할수없이 대원들을 데리고 좀 일찍 가설막으로 지은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서자 그들은 옷들을 짜입으며 떠들썩하니 웃고있었다.
철명은 휴식하는 대원들을 돌아보고는 취사장일이 걱정되여 은혜한테로 갔다.
그런데 은혜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폭우가 쏟아지는데 도대체 어디 갔을가?)
그는 취사장안을 둘러보았다.
밥가마에는 밥이 거의 잦아가고있었다.
철명이 취사장안에서 한동안 기다렸으나 은혜는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어디 볼 일이 있어 나갔다가 이 폭우속에 사고라도 생긴게 아닐가?)
그는 더럭 근심이 생겼다.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와지끈 딱 하고 벼락맞는 소리가 무시무시하게 들려왔다.
골짜기로 돌과 함께 흘러내리는 탕수소리도 더 요란스러워진듯 했다.
철명은 안절부절하다가 소대원들과 함께 은혜를 찾아나섰다.
《은혜동무!》
주변산들을 오르내리며 은혜를 부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메아리쳤다.
어느 산속에서 미끄러져내려 흐르는 탕수에 떠밀려내려갔을수도 있었고 어느 사태에 묻혀버렸을수도 있지 않는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고 몸서리쳐졌다.
그의 온몸은 비가 아니라 땀으로 화락하니 젖었다.
허청거리며 산발을 오르내리면서 은혜를 찾던 철명은 산등성이에서 그만 겁에 질려 멈춰섰다.
그 어떤 폭풍에도 꿋꿋이 서있던 아름드리참나무가 방금 벼락을 맞은듯 처참하게 허리가 부러져 시꺼멓게 죽어있었던것이다.
자연의 횡포한 힘앞에 철명은 전률했다.
그는 알지 못할 절망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목청껏 소리쳤다.
《은혜동무, 어디 있소?》
그의 목소리에 산발들은 멀리 메아리를 일으켰다.
《여기 있어요!》
어디선가 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건 착각이 아닌가?!
철명은 숨까지 죽이고 다시 귀를 기울여보았으나 사나운 비바람소리만 들리였다.
그는 다시한번 있는 힘껏 소리쳐불러보았다.
《은혜동무!―》
《예―》
분명 은혜의 목소리였다.
《은혜동무―》
산등성이길로 은혜가 나타났다.
철명은 은혜를 보자 정신없이 마주 달려갔다.
소대원들도 너무 기뻐 껑충껑충 뛰여올랐다.
《은혜동무, 어딜 갔댔소?》
《저너머 골짜기에 좀 갔댔어요. 그곳에 가니 아직도 산나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후방차가 못 와도 부식물걱정을 안해도 되겠어요.》
그는 무슨 큰 보물단지나 발견한듯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제서야 철명은 은혜가 잔등에 마대만 한 배낭을 지고있는것을 보았다.
사실 어제 도착하게 되여있던 후방차가 오지 않아 오늘 아침에도 된장국에 밥만 먹었던것이다.
그러나 돌격대생활에 그 누구도 그쯤한 일을 가지고 불평을 부리지 않았다.
오히려 은혜가 마치 제 잘못인듯이 미안해하자 순수한 장물맛이 별맛이라고 우정 곱배기를 신청하는 대원들까지 있었다.
그러나 은혜는 그것이 가슴에 더 걸렸던것이다.
철명은 말없이 은혜의 배낭을 벗겨내리였다.
얼굴은 여기저기 긁히우고 바지가랭이는 찢기워져있었다.
그의 손은 어떻게 상했는지 손수건이 붕대처럼 감겨져있었다.
철명의 가슴속에서 불덩이같은것이 콱 치밀어오르더니 눈굽이 화끈 달아올랐다.
《동문 도대체 뭐요? 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소.
정 그렇게 제 마음대로 하면 돌격대에서 제명해버리고말겠소.》
철명의 목소리는 저으기 갈려있었다.
그는 조금만 더 은혜를 바라보고 서있느라면 주책없이 눈물이 쏟아져내릴것만 같아 손을 홱 내젓고 돌아서버렸다.
《아이참, 이 정신 봐. 밥이 타면 어쩌나.》
은혜는 허둥지둥 병실쪽으로 달려갔다.
소대원들은 은혜를 바라보기만 할뿐 아무 말도 없었다. 멋모르는 줄대같은 비만이 여전히 야단스레 내렸다.
4
철명의 소대는 돌격대적으로 제일 앞서나갔다.
이제는 완공날자를 앞당길수 있는 확고한 전망이 내다보이였다.
대원들은 더한층 기세가 올라 마지막돌격전을 벌렸다.
한바탕 땀을 흘리고난 철명은 휴식구령을 주었다.
《오늘은 은혜동무가 어떻게 된건가?》
누군가 입술을 추기며 말했다.
목이 말랐던것이다.
모두가 이맘때면 어김없이 은혜가 물통을 지고 나타나군 하던 길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철명은 가만히 앉아서 은혜를 기다리고있자니 바늘방석에 앉아있는것만 같아 일어나 그를 마중 갔다.
철명은 은혜를 좀 휴식시키고 그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소대장의 권한도 행사해보고 인간적으로 애타게 설교도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그는 노상 웃음으로 슬쩍 넘겨버리군 했다.
이제는 철명이도 은혜의 고집앞에서는 손을 들고말았다.
그는 은혜가 늘 다니는 지름길을 따라걸어갔다.
수림속에 난 오솔길이였다. 이 길은 은혜의 발자국으로부터 생겨난 오솔길이였다.
얼마나 오르내렸으면 부석부석하던 땅이 도로처럼 다져졌다. 이 오솔길에 흘린 은혜의 땀방울을 다 모으면 아마 자그마한 호수가 될지도 모른다.
정말 자신을 깡그리 다 바치는 처녀였다.
철명은 은혜의 그 어디에서 그런 열정이 샘솟아나는지 그것이 부러웠다.
생각에 잠겨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던 철명은 길옆 큰 나무옆에 은혜가 늘 지고다니는 물통이 놓여있는것을 보았다.
은혜는 보이지 않았다.
철명이 은혜를 찾으려고 하는데 가까운 숲속에서 안깐힘을 쓰는 처녀의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나는쪽을 자세히 살펴보니 은혜였다. 그는 팔뚝같은 나무를 지레대로 삼고 무슨 돌을 굴려내느라 젖먹은 힘까지 다 짜내고있었다.
철명이 급히 달려가 함께 그 돌을 옆으로 굴려놓았다. 그러자 돌에 짓눌러져있던 애어린 이깔나무 한그루가 눈에 띄였다.
아마 전번 폭우때 굴러내려온 돌에 깔려있던 모양이였다.
은혜는 이마에 송글송글 내돋은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며 말했다.
《소대장동무가 정말 마침 오셨어요. 내 혼자힘으로는 땀깨나 흘릴번 했어요.》
그리고는 애어린 이깔나무앞에 꿇어앉아 제 모양대로 바로잡아주고 받침대까지 세워놓았다.
《허허, 은혜동문 이 수림속에서 나무 한그루가 무엇이라고 그렇게 애지중지하오.》
철명은 진귀한 꽃나무를 가꾸듯 정성을 기울이는 은혜를 지켜보며 말했다.
은혜는 철명을 한동안 생각깊은 눈빛으로 마주보며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철명동무, 전 이 전적지에 자라는 한그루의 나무, 한포기의 풀도 무심히 보게 되질 않아요. 지금도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운 항일혁명선렬들의 숨결과 그 넋을 고이 간직하고있는것만 같은 생각이 들군 해요.》
은혜는 애어린 나무를 정히 쓸어만지며 철봉산마루를 이윽히 바라보았다.
순간 철명은 은혜의 그 모습앞에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은혜와 자기와는 아득한 정신적차이가 있는듯 했다.
철명은 지금껏 자신도 선렬들의 고귀한 넋을 간직하고있다고 자부해왔지만 저렇듯 은혜처럼 고상한 정신과 순결한 마음을 안고살지는 못했던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이번 돌격대에 나오면서 자기자신의 발전의 길을 닦아보려는 타산도 세워보았던것이다.
철명은 말없이 은혜를 바라보며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은혜동무! 난 지금 동무앞에 서있는것이 어쩐지 스승앞에 서있는것만 같구만.》
그는 진심으로 말했다.
은혜는 인상적인 웃는 눈으로 한참이나 철명을 쳐다보더니 군사복무시절에 있었던 가슴뜨거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국과 인민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시고 끝없는 전선길을 이어가시던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께서는 외진 바다기슭에 자리잡고있던 우리 부대에도 찾아오셨어요.
그이께서는 우리 부대 군인들의 훈련모습도 보아주시고 교양실과 도서실에 비치된 도서들과 교양자료들을 구체적으로 료해하시고 혁명전통교양을 잘하고있는데 대하여 대단히 만족해하시였어요.
그러시면서 우리 당의 혁명전통으로 무장해야 수령결사옹위정신과 혁명에 대한 무한한 헌신성, 열렬한 조국애와 뜨거운 동지애를 다 발휘할수 있다고 하시였어요.
그때 우리는 우리 혁명의 만년초석인 혁명전통으로 튼튼히 무장하여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의 선군령도를 더잘 받들어나갈 불타는 맹세를 다졌어요.》
철명은 오늘도 그날의 감격을 그대로 안고있는듯 한 은혜를 뜨거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에야 은혜의 그 불같은 열정과 고상한 정신이 어디서 샘솟는가를 새삼스럽게 느꼈다.
그는 언제나 장군님의 뜻과 숨결로만 살아가고있는것이다.
순간 은혜에 대한 모든 추억들이 눈앞에 별처럼 반짝거리며 새로운 의미로 안겨왔다.
×
철명의 소대는 돌격대적으로 제일먼저 도로공사를 끝내였다.
길우에는 울긋불긋 단풍든 나무잎이 한벌 깔려있어 축하의 꽃보라를 뿌려놓은듯 했다.
그날 철명은 소대가 새로 닦아놓은 길로 은혜와 함께 걸었다.
그의 심장은 느닷없이 높뛰였다.
《은혜동무, 이번에 정말 동무의 수고가 많았소.》
《수고야 소대장동무가 더 많았지요 뭐.》
《아니요. 은혜동무는 정말 나에게 큰힘을 주었소! 난 은혜동무와 함께 생활하면서 인생의 길을 어떻게 걸어나가야 하는가를 깊이 깨달은것 같소.》
철명은 흥분된 심정으로 은혜를 바라보았다.
《전 그저 우리 장군님께서 바라시는 선군시대의 참된 인간으로 살고싶었을뿐이예요!》
은혜는 길우에 떨어진 빨간 단풍잎을 주어들며 조용히 말했다.
《바로 그 순결한 마음이 우리 인생길에 고이간직할 가장 귀중한것이라고 생각하오. 사실 난 지금… 은혜동무와 함께라면 머나먼 인생길도 언제나 웃으며 갈것 같소!》
철명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렸다.
높뛰는 심장을 진정할길 없어 걸음을 멈추고 은혜에게 몸을 돌렸다.
은혜는 놀란듯 한, 그러면서도 믿음어린 시선으로 철명을 마주보았다.
그의 얼굴은 온갖 열매 무르익는 가을날의 단풍처럼 점점 빨갛게 물들었다.
(무산광산련합기업소 공무분공장 로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