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99(2010)년 제7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알았습니다
리 원 일
분대장 한상렬은 한동안 얼떠름해진채 입을 열지 못했다.
자기 분대원인 오춘삼을 분대방어진지에서 뽑아야 하겠다는 중대장의 목소리가 그를 《벙어리》로 만들어버린것이였다.
오춘삼! 그가 어떤 병사인가. 48년도당원에 락동강의 불비속을 헤쳐온 구대원이다. 상렬의 왼팔이 되여 방어진지를 철벽으로 지켜온 쇠소리나는 싸움군이다. 그런데 그를 분대에서 뽑아가다니… 그것도 중대취사원으로…
상렬의 속마음을 꿰뚫어본 중대장의 차분한 목소리가 다시 날아들었다.
《분대장동무야 우리 중대의 실태를 잘 알지 않소. ΟΟ고지습격전투때 잘못된 취사원을 대신할만 한 적임자가 춘삼동무밖에 없단 말이요. 그러니 어찌겠소? 그렇게 하기요.》
중대장은 이어 상렬이가 말을 해볼새도 없이 련락병을 불렀다.
《련락병!》
《옛!》
어느 짬에서 솟았는지 오돌차게 생긴 중대장련락병이 차렷자세를 취했다.
《5분내루 오춘삼동무를 도착시킬것.》
《알았습니다.》
련락병은 바람같이 사라졌다. 담배 한대를 태울시간도 못되여 중대장감시소 출입문이 열리더니 오춘삼이 머리를 디밀었다.
감시소안에 들어선 오춘삼은 천정의 통나무가름대에 머리가 닿을가 저어하듯 허리를 약간 꺼꺼부정한채 넉가래같은 손을 귀바퀴옆에 가져다붙이였다.
《중대장동지, 상등병 오춘삼 명령대로 왔습니다.》
《춘삼동무, 한가지 중요한 전투임무가 제기돼서 동무를 불렀소.》
《?》
《중대는 말이요. 동무에게 중대취사원의 임무를 맡기자고 하는데 다른 의견이 없겠소?》
오춘삼의 눈이 금시 커졌다. 그의 두툼한 입술이 경련을 일듯 가볍게 떨리더니 힘들게 열렸다.
《제… 제가… 취사원을 말입니까?》
《왜? 보통취사원이 아니라 화선취사원이란 말이요.》
《그렇지만…》
중대장은 부러 엄한 표정을 지었다.
《총을 들고 싸우는것만이 적과 싸우는것이 아니라는거야 동무가 그래 모른단 말이요?
전사들을 배불리 먹여야 싸움도 잘할게 아니요. 그래서 중대는 동무를 믿구 적임자로 선정했는데 생각해보오, 동무의 임무가 얼마나 무겁구 책임적인 전투임무인가.》
오춘삼은 컴컴해진 안색으로 고개를 무겁게 숙인채 중대장의 목소리를 듣고있었다.
그러다가 머리를 들어 상렬을 얼핏 바라보았다.
이때라고 생각한 상렬은 춘삼을 향해 조용히 뜻있는 눈짓을 했다. 화성병사답게 배짱을 내대라는 암시였고 고무였다. 그랬건만 춘삼은 왜서인지 다시 머리를 숙이고 입을 다문채 말이 없었다.
잠시후 그의 입에서 가는 한숨소리가 슴배여나오더니 얼어붙었던 입술이 열렸다.
《그러니까 취사원의 임무가 총을 들고 싸우는것에 못지 않은 중요한 전투임무란 말이지요?》
《병사의 높은 자각과 적극적인 창발성이 없이는 집행하기 어려운 아주 힘든 전투임무요.》
중대장의 말에 오춘삼은 숙였던 고개를 쳐들더니 결연히 차렷자세를 취했다.
《언제부터 임무에 착수하랍니까?》
《이제부터 당장.》
중대장은 믿음어린 눈길을 춘삼에게 보냈다.
《알았습니다.》
춘삼의 기백이 넘친 목소리가 중대장감시소를 울렸다.
×
상렬이로서는 전혀 생각조차 못했던 뜻밖의 일이였다. 자기로서는 오춘삼을 끝까지 부둥켜안고 놓지 않으려 했던 일이 한순간에 당사자인 오춘삼으로 하여 맹랑스럽게 결속되고말았으니 정말로 아쉽고 분했다. 춘삼의 처신이 고깝기 그지없었다.
그래 오춘삼은 자기가 제자신은 물론 분대나 소대를 위해서도 어떤 위치에 서야 한다는것을 모른단 말인가.
아마 중대는 물론 대대나 련대를 다 뒤져도 오춘삼이만 한 병사를 찾아내기 쉽지 않을것이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거쿨진 몸집, 쩍 버그러진 어깨, 악마디진 넉가래같은 손, 전호속에 들어앉으면 영구화점마냥 듬직하고 믿음성이 가는 병사다. 중대장도 오춘삼이 이런 병사임을 모르지 않을것이다. 그런 오춘삼이여서 그가 고개만 좀 외로 틀었어도 취사원의 운명만은 면할수 있으련만… 뻐꾹소리 한마디 못하고 밥주걱을 쥐다니… 어쨌든 섭섭한 마음만은 어쩔수 없는 모양이였다. 배낭을 걸머진 오춘삼은 상렬이앞에서 눈을 슴벅이며 말했다.
《분대장동무, 저야 명령을 받은 병사인데 어찌겠습니까. 분대장동무 낯이 깍이지 않게 일을 잘 할테니 저때문에 너무 속쓰지 마십시오.》
오춘삼의 말은 빈소리가 아니였다. 그는 배낭을 벗어놓기 바쁘게 취사장을 새로 꾸리는 일에 달라붙었다.
힘이 장사같은 그다. 그는 혼자힘으로 굴착작업을 하고 동발목을 세우고 흙가마니를 쌓아올려 며칠사이에 반토굴식취사장을 번듯하게 일떠세웠다.
그는 백수십리터짜리 야전밥가마도 공기돌 다루듯 했다. 소대가리만 한 나무등걸도 그의 도끼질에 걸려들면 단번에 쩍 버그러졌다.
중대장의 입이 벌어지고 그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오춘삼동무야말로 진짜배기병사요. 고지식하고 성실하구 책임성높은 병사지.》
칭찬에는 야박스럽기 짝이 없는 특무장(당시)마저 옆에서 양념을 쳤다.
《중대장동지가 사람을 잘 골랐지요. 정말 군소리를 모르는 딱소리나는 취사원이랍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상렬은 기쁘다기보다도 오히려 약통실에 들어갔던 샛노란 탄알을 앗기운듯 한 심정이였다.
(젠장, 그런 오춘삼에게 중기관총을 맡겨보지? 중대 절반몫은 감당할테니. 그런 억대우가 바가지를 들고 쌀을 일고있으니 참.)
아마도 다른 병사가 오춘삼과 같은 처지였다면 사흘을 못 넘기고 뿔을 세울것이다.
《뭐, 고정식당근무를 서라구요? 제발 말같지 않은 소릴 그만두시오. 나야 적들과 싸우려 전선에 나왔지 밥당번 서자구 나온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런 관점이 태반이여서 오춘삼이 중대취사원으로 임명되기 전까지는 중대군인들이 륜번제로 식당근무를 섰다. 그들의 정신은 식당근무를 서면서도 전호속에 가있었다. 전투가 치렬해져 총포탄이 미친듯이 쏟아지고 고지가 몸부림치면 엄습해드는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전투진지로 달려가는 병사들도 있었다. 밥가마뚜껑이 세차게 내뿜는 증기에 요동치건말건 아궁속의 장작불이 혀를 날름거리며 밖으로 기여나오건말건 이에는 아랑곳없이 적들만 통쾌하게 족쳐대면 그만이라는 배심이다.
식당근무를 잘못 서서 받은 비판쯤은 꿈쩍도 하지 않고 그날의 전투성과만 가지고 무르팍을 철썩철썩 두드리며 웃음을 터뜨리는것이다.
그러나 오춘삼은 그렇지 않았다. 자기에게 맡겨진 취사원의 임무보다 더 중한것이 없는듯 곁눈을 팔거나 서운해하는 사소한 기색도 없이 수걱수걱 맡은 일을 했고 총포성보다도 전우들의 밥투정질에 더 바싹 귀를 강구었다.
그는 적들의 파장식공격으로 하여 중대가 식사시간을 놓치게 되면 밥배낭을 둘러메고 전호속을 오가면서 전우들에게 주먹밥을 나눠주었다.
《쯧쯧… 저놈들은 때식도 건느고 황천길을 가려는가? 여보게, 덤비지 말구 밥을 꼭꼭 씹어삼키라구. 국이 없어 안됐구만.》
전투가 더욱 고조되여 전사들의 입술이 갈라지고 중기관총 방열통이 뜨겁게 달아오를 때면 그는 물통에 물을 한가득 담아가지고 또 나타난다.
고지에서 물 한방울이 얼마나 귀중한것인가를 잘 알고있는 전사들은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러면 그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눈을 찔 흘긴다.
《무슨 공연한 소리. 이 오춘삼이가 있는 한 물걱정을 안시킬테니 적들이나 많이 잡으라구.》
상렬은 그렇듯 자기는 적들을 향해 총 한방 못쏘면서도 흔연히 웃으며 전우들의 뒤바라지를 하는 오춘삼이 보기 뭣해 두세명의 대원들을 뚝 떼내여 운반식사를 조직한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인차 빈손으로 돌아왔다.
《왜들 그냥 왔소? 밥이 채 안됐으면 좀더 기다리다가 올것이지.》
그러자 그들은 두손을 홰홰 내저었다.
《말두 마십시오. 춘삼아바이가 어찌두 무섭게 성을 내는지 쫓겨왔습니다. 싸움은 어떡하구 전투진지를 비우구 밀려오는가, 당장 가라고 호통을 쳐서 그만… 그러면서 전투총화를 단단히 짓겠답니다.》
이런 오춘삼이기에 병사들은 그의 모습이 먼발치에서 얼씬거려도 벌쭉거리며 어깨를 건드렸다.
《여여, 정신 바싹 차리라구. 춘삼아바이 복수기록장엔 매 사람의 전투성과가 다 적혀있다네. 꼴등을 했다간 종아리를 맞을지도 몰라, 하하하.》
비록 롱담이기는 하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긴장되지 않을수 없는 소리였다.
구대원의 말이라면 노루를 보고 사슴이라고 해도 무조건 그대로 믿는 오일남전사의 경우엔 더욱 그랬다. 그래서 일남은 한 전투만 끝나면 슬그머니 춘삼에게 달려가 자기의 전투성과는 물론 전투의 세부까지 일일이 보고했고 일장 훈시를 받고 돌아오군 했다. 병사들은 그런 일남에게 오춘삼과 성씨도 같은데 친아버지로 모시는게 더 좋지 않겠는가고 놀려대기도 했다. 지어 전쟁이 끝나면 그들사이에 부자간의 정을 맺기로 비밀약조가 있었다고 단연코 주장하는 병사까지 있었다.
그럴만도 했다. 오춘삼과 오일남의 관계는 남다른데가 있었다. 일남이가 미제놈들에게 부모를 잃고 열일곱나이에 전선에 탄원한 병사라고 해서 그런지 오춘삼은 일남을 각별하게 대했다. 밤이면 남모르게 방어진지에 나타나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일남의 잠자리밑에 손을 넣어보기도 했고 군복바지주머니에 가마치를 슬쩍 넣어주며 눈을 끔벅이기도 했다.
한번은 적들과 육박전을 벌려야 할 아슬아슬한 전투정황이 조성된적이 있었다. 바빠난 상렬은 춘삼을 급히 전투진지로 불러냈다.
《상등병 오춘삼, 오일남전사와 함께 예비전지를 차지하고 적들을 격퇴할것.》
《알았습니다.》
보병총을 꼬나들고 몇발자국 움직이던 오춘삼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근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 그새 밥이 타면 야단인데요.》
긴박한 전투정황에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늘어진 소리여서 상렬은 자기도 모르게 발끈했다.
《무슨 소릴 하는거요? 고지가 위험한데 밥이 다 뭐요? 밥이…》
(참, 그새 취사장안에서만 맴돌다나니 화약내를 싹 잊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상렬의 머리속에 떠올랐다.
다행히도 위기를 모면했다.
춘삼은 취사장으로 달려가고 그대신 오일남이가 탄성을 련발했다.
《히야, 춘삼아바이 말입니다. 보병총을 가지구두 기관총처럼 냅다갈겨대는데… 수류탄은 또 어떤지 알아요? 박격포탄 날아가는것 같아요. 야, 그런 아바이와 함께라면…》
오일남의 흥분은 그대로 상렬에게 옮겨졌다.
(글쎄 그러면 그렇겠지. 아무렴, 춘삼아바이가…)
그런데 그사이 춘삼이가 취사장을 비운것으로 하여 중대병사들은 밥탄내가 심하게 풍기는 밥을 씹어삼켜야 했다. 중대장의 추궁은 불같았다.
《동무는 왜 제멋대루 취사원을 전투진지로 불러냈소? 싸움은 동무만 하는줄 아는가? 취사원의 전투진지는 취사장이란 말이요.》
상렬은 가슴이 알알했다. 오춘삼이 중대취사원이라고 하지만 그의 소속은 의연히 우리 분대가 아닌가. 당장이라도 떼를 써서 춘삼을 취사장에서 뽑아오고싶은 충동이 불같이 일었다. 그러면서도 주저하게 되는것은 오춘삼당사자가 그토록 취사장에 마음을 붙이고 성수를 내고있는것이다.
특무장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지금의 오춘삼이야말로 나무랄데 없는 취사원인것이다.
그가 꾸린 취사장을 살펴보기로 하자.
취사장은 고지 뒤쪽의 산경사면을 깎아 반토굴식으로 꾸렸는데 세 벽면에는 굵직한 동발목들을 촘촘히 세웠고 수메터두께의 흙가마니로 덮개를 씌웠다. 취사장안에는 규모있게 부뚜막을 쌓고 산비탈을 따라 길게 골을 내여 연기가 흩어지게 반항공위장대책을 세웠다.
취사장안의 화식도구들은 또 어떤가. 야전밥가마는 반들반들하고 늄식기들은 번쩍번쩍하고 물통, 바가지, 적쇠와 지짐판들과 각종 구경의 조미료통이며 망돌, 절구, 공병도끼, 톱 등이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여있다. 취사장의 안쪽은 침실 겸 창고인데 식량과 통졸임상자들, 여러가지 부식물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오춘삼이 계산 또한 어찌도 밝은지 대대나 련대의 제노라 하는 후방군관들도 혀를 찼다.
《챠, 아바이 혹시 전쟁전에 부기장이라도 한게 아니요?》
《그럴수도 있지요. 하지만 난 공급규정대로 하자는겁니다.》
바로 이런 오춘삼이로 하여 중대가 배를 두드리게 된것만은 사실이다.
여름장마때 식량수송이 제때에 되지 않아 어떤 중대에서는 물알이 든 풋강냉이로 때식을 굼때기도 하였지만 중대는 배불리 먹으면서 적과 싸웠다.
하면서도 때때로 춘삼이가 기름튀기나 사탕가루를 뿌린 누룽지를 보장해주는데도 병사들은 만족을 모르고 이따금 《리론식사》를 펼쳐놓군 했다.
《리론식사》란 병사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손으로 만져볼수 없고 눈으로 볼수없으며 입으로 맛볼수도 없지만 말로 가공하여 귀로 맛보고 머리의 상상력이 동원되여 기분이 붕 뜨는 식사이다. 병사들의 변화무쌍한 해학과 기발한 기지, 화려한 허풍으로 버무려놓으면 아마도 세상에서 《리론식사》처럼 풍성한 식사는 없을것이다.
유명한 평양랭면이며 대동강숭어국, 가슴이 쩡―하게 열리는 동치미, 각 지방의 특산물들과 각종 떡류, 김치류들이 연줄연줄 쏟아져나오니 상렬이 어찌 말석에 앉아 꿀먹은 벙어리상이 될수 있으랴. 분대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절대로 그럴수 없는것이다.
상렬은 주먹을 입에 대고 어험 하고 헛기침을 한 다음 지난번 중대장과 함께 교차화력협동절차를 토론하려고 린접중대에 갔다가 푸짐히 대접받고 돌아온 이야기를 꺼냈다.
《거 1중대취사원 있잖나. 알고보니 전쟁전에 평양종로식당에서 이름을 날리던 유명한 료리사더구만. 야, 꽈배길 어찌도 맵시있게 꼬았는지… 그리구 난 편육을 썰어놓은걸 보구 무슨 꽃장식인가 했구만. 식탁이 온통 그림같더란 말일세. 그래서 주변부대 동무들까지 뻔질나게 찾아온다는거야. 그통에 취사장문턱이 다 닳아 다시 갈아댔다누만.》
상렬의 형상력이 얼마나 생동하고 신빙성이 있었던지 병사들은 숨을 죽이고 그의 말에 심취되여있었다.
이때 빈 마대를 꿍져 어깨에 둘러멘 오춘삼이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춘채 목을 길게 늘였다.
후방물자를 타러 가던 길인듯싶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오일남이 발딱 나서서 감탄사까지 련발하며 상렬의 말을 그대로 반복헸다.
그런데 웬걸, 오춘삼은 감동은커녕 코방귀를 뀌는것이 아닌가.
《흥, 그 친구가 덜돼먹었구만.》
모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그건 무슨 소립니까?》
《말 안하게 됐나. 전사들의 급식량을 가지구 제 생색을 내다니… 그런 사람은 화선취사원자격이 없어. 나같으면 칭찬은커녕 당장 철직시키고 말겠네.》
그 말에 병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아바이가 제법 원칙을 세우는데요.》
《취사원에서 철직되면 얼싸 좋게요.》
×
하늘은 더 높아지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왔다.
가을도 완연한 늦가을에 접어든것이다.
지동치던 포성도 즘즛해지고 포연이 서서히 잦아들 저녁무렵이면 북쪽으로부터 기러기떼가 나타나 머리우를 날아지난다. 끼르륵대는 기러기떼를 올려다보며 잠간 눈을 파는 사이면 어느새 사위는 어둑어둑해지고 주변의 모든것이 어둠속에 잠긴다. 늦가을의 밤은 이렇게 빨리 찾아드는것이다.
랭기가 스며들어 늦가을의 밤은 더 지루한듯 했다. 동틀무렵의 싸늘한 대기속에서 병사들은 찬물도 아껴가며 세면을 했다.
어느날 오춘삼은 분대장에게 자기의 안타까운 심정을 하소연했다.
《분대장동무, 날씨가 차지는데 중대동무들에게 더운물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고있으니… 더우기 빨래나 목욕은 생각도 못하고있으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상렬은 춘삼의 그 마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중대가 쓰고있는 박우물은 고지 앞쪽 골짜기에 있는데 적들이 항시적으로 눈을 밝히고 제놈들의 포화력권안에 넣고있는 형편이여서 밤에만 그 쏘구역을 극복해야 얼마간의 물을 길어올수 있었다. 게다가 마가을의 갈수기에 접어들면서 박우물의 바닥이 드러날 형편이다. 이런 어려운 조건에서도 오춘삼이 중대식사는 물론 중기관총의 랭각수까지 보장하고있으니 중대로서는 과남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상렬은 춘삼을 안심시키듯 조용히 대꾸했다.
《워낙 물이 바른 고지인데 별수가 있습니까, 참고 견디는수밖에…》
그러나 춘삼은 걱정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또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물이 바르다 해두 이 주변에 박우물이 하나밖에 없다는게 말이 됩니까?》
《그건 아바이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특무장동무랑 혹시 샘줄기를 찾을가 해서 얼마나 애썼는지 압니까? 하지만… 땅속을 들여다보는 박사라면 몰라라…》
상렬이 이런 말을 해서야 《허, 그렇다면 정말 난사로군.》하며 난색을 짓는것이였다.
오춘삼은 땅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아 넉가래같은 손을 무릎우에 올려놓고 먼 하늘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상렬은 그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아바이두 참… 생사를 판가름하는 고지에서 빨래와 목욕까지 걱정하다니…)
하루는 중대장이 분대장들을 불러다 취사장앞에 세워놓고 의미있게 말했다.
《동무들, 이 취사장을 보면서 생각되는게 없소? 얼마나 알뜰하구 규모있구 견고하게 꾸렸는가 말이요.》
상렬은 중대장의 의도를 제꺽 간파했다. 방어진지도 오춘삼의 취사장처럼 꾸리란 말이지. 못할것이 무엇인가. 하자, 본때있게.
다음날부터 진지작업이 시작되고 분대호상간 경쟁이 치렬하게 벌어졌다.
워낙 승벽이 센 상렬인지라 진지작업을 부리나케 내미는 한편 취사장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춘삼의 취사장은 공병기재창고나 다름없이 없는 공구가 없었고 정대나 곡괭이를 벼리자 해도 오춘삼의 손이 필요했던것이다.
(춘삼아바이야말로 어느 모로 봐도 보배덩이야.)
오춘삼 역시 상렬이 못지 않게 진지작업장을 누볐다.
《자, 고향생각이 절로 나는 구수한 숭늉이요.》
《자, 일남동무가 특별주문한 〈가마치바삭과자〉도 있어요.》
춘삼이가 그 큰 체통을 흔들면서 목청 간지러운 아낙네소리를 흉내내면 진지작업장이 유쾌한 웃음소리로 떠들썩했다.
《야, 정말 따끈한 숭늉을 쭉 들이키니 고향생각이 절루 나는걸.》
어떤 병사는 능청스럽게 춘삼의 옆구리를 쿡 꿰지르기도 했다.
《그런데 아바이, 취사장안에 후방물자를 가득 쌓아놓구두 유치원아이들 간식같은 〈가마치과자〉가 뭡니까? 좀 통이 크게 노십시오.》
그러면 오춘삼은 눈을 가로 찔 흘기며 한쪽발을 탕 굴렀다.
《에끼, 모르는 소리, 앞으로 특식 차릴 때 쓰자는거야.》
《특식이요?》
《아무렴, 전승의 날도 멀지 않았지 모두들 생일상까지 차려줘야지.》
《아니, 생일상까지요?》
《왜, 싫은가?》
《싫기야 뭘… 아바이가 힘이 들가봐 그럽니다.》
《별걱정, 하지만 똑똑히 알아야 할건 특식두 좋지만 조선사람은 밥과 국을 정상적으로 먹어야 힘이 난다는거야. 미제놈들을 보라구. 세상에 나서 밥이란 통 모르구 노린내나는것만 먹다나니 허재비 한가지가 아닌가, 하하하…》
중대의 소문이 련대에까지 퍼진 모양이였다.
련대참모군관들이 진지작업장을 몇번 돌아보더니 하루는 련대장이 직접 고지우로 올라왔다.
아침해가 빠끔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이른아침이였다. 중대장의 안내를 받으며 새로 설비한 전호의 엄개구간이며 믿음직하게 보강된 토목화점, 중대엄페부들을 다 돌아본 련대장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중대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호굴설을 잘했구만. 그런데 중대장동무, 취사장을 잘 꾸렸다지? 한번 구경하기요.》
국가마뚜껑을 열어놓고 국맛을 보고있던 오춘삼은 련대장이 가까이 다가오자 급히 옷매무시를 바로 잡고나서 거수경례를 했다.
《취사원 오춘삼, 식사준비중입니다.》
보고를 받던 련대장은 갑자기 두눈을 치뜨며 놀란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게 누구요? 소비조합책임자동무가 아니요?》
《예, 제가 바로 해방직후 련대장동지가 우리 군에 파견원으로 오셨을 때 자위대사업을 하던…》
《알고있소. 그때 동무는 면소비조합사업을 맡아보라니까 손에서 총을 놓지 않겠다구 뻗댔었지.》
《그땐 정말 제 생각이 짧았댔습니다.》
련대장의 입을 통해서야 오춘삼이 입대전에 면소비조합책임자로 사업했다는것을 알게 된 상렬은 놀라움과 함께 그런 오춘삼이가 중대취사원으로 련대장과 만나게 되였으니 얼마나 면구스러우랴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춘삼은 그런 내색이라고는 꼬물만큼도 없이 반가운 웃음만 짓는다.
련대장은 우선우선한 눈길로 취사장안의 구석구석까지 세심하게 살펴보고나서 두눈을 가늘게 쪼프리며 입귀에 가는 주름살을 지었다.
《잘사누만. 이쯤했으면 이젠 취사장을 인계하구 직속중대로 오지 않겠소? 나와 함께 있잔 말이요.》
《아니, 그건 무슨 당치않은 말씀을…》
《왜, 반대요? 화선취사원이 마음에 든단 말이요.》
《련대장동지도 참, 명령을 집행하는 병사가 마음에 들구 안 들구가 있습니까?》
《허허, 그러니까 오직 〈알았습니다〉밖에 모른단 말이지. 그렇다면 련대장두 어쩔수 없지.》
련대장은 믿음이 담긴 눈길로 춘삼을 바라보고나서 중대장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중대장동무, 요즘 동무네 중대 병사들의 사기가 대단하다면서?》
《예, 이젠 방어진지도 튼튼하게 다졌으니 한바탕 크게 싸우고싶어 몸살이 날 지경입니다.》
《허허… 그보다 잘 먹구 힘이 나니까 그렇겠지.》
련대장은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한바탕 크게 웃고나서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지만 동무네 정도로 만족할건 못되오.
얼마전에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께서는 깊은 밤중에 장거리전화로 우리 군단장동지를 찾으시여 1211고지 전투정황과 전사들의 건강상태며 생활형편을 일일이 알아보시고나서 벌써 선기가 나는것 같은데 전사들이 더운 밥과 국을 먹도록 해주고 잠자리도 춥지 않게 해주며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하시였소. 그러시면서 콩을 보내줄테니 고지에서 콩나물도 기르구 순두부도 만들어 먹여야 한다고 하시였단 말이요.》
그말을 듣고있던 오춘삼이 흥분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야, 최고사령관동지께서 콩나물을 기르라고 하셨단 말입니까?… 그런데 전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가요?!》
《그건 우리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요. 병사들의 생활을 잘 보살피는게 방어축성물 몇개와는 대비도 안될 중요한 문제라는걸 몰랐거던.》
련대장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중대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중대장동무,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께서는 고지에서 싸우는 전사들은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혁명동지라고 하시면서 화선휴양소도 운영하구 모든 고지들을 갱도화하여 전사들이 충분하게 휴식도 하고 갱도안에서 화선악기도 울리구 따끈한 콩나물국도 먹으면서 싸우게 해야 한다고 간곡하게 가르치시였소. 이렇게 되면 설사 미제놈들이 원자탄을 가지구 달려든다 해도 우리 병사들이 전투적랑만과 신심에 넘쳐 놈들을 서산락일의 운명에 몰아놓을수 있다고 하셨단 말이요.》
참으로 심장을 울리고 천백배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이였다.
중대장은 격정에 넘쳐 씩씩하게 대답했다.
《련대장동지,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의 말씀을 전달받고보니 저절로 힘이 솟구치구 눈앞이 환하게 열리면서 다 이겼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중대두 고지를 갱도화하구 콩나물도 잘 길러 방어진지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꾸리겠습니다.》
×
중대는 감격에 휩싸이고 흥분으로 들끓었다.
가렬한 전쟁의 불비속에서도 화선휴양소를 운영한다니 이 얼마나 희한한 일인가. 전사들이 갱도속에 척 틀고앉아 화선악기도 울리고 콩나물국과 순두부국을 먹으면서 적들을 족치게 된다니 이것이야말로 땅짚고 헤염치는 격이 아닌가.
중대당세포총회가 열렸다.
고지를 갱도화할데 대한 결정서가 채택되고 오춘삼에게는 콩나물을 기를데 대한 분공이 차례졌다. 박우물의 물량이 적어진 형편에서 중대식사를 보장하는것과 함께 콩나물까지 기른다는것이 쉬운일은 아니였다. 하여 상렬은 분대가 동원되여 춘삼을 돕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춘삼은 펄쩍 뛰였다.
《분대가 동원되여 콩나물을 기르다니요? 아예 그런 생각은 마십시오. 물원천이 문제지 이 오춘삼의 힘이 모자라는게 문제입니까?》
오춘삼은 말만 이렇게 한것이 아니라 샘줄기를 찾는 일에 달라붙었다.
상렬은 오일남을 통해 이 사실을 알았다. 밤마다 곡괭이를 메고 고지 뒤쪽의 산골짜기로 내려간다는것이였다.
쟁반같은 달이 사위를 환히 밝히는 밤이였다.
상렬은 산경사면을 톺아내렸다. 곡괭이질을 하는 춘삼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사방에 땅을 파헤친 흔적들이 눈에 밟힌다. 어떤 구뎅이는 한길이 넘는것도 있었다. 불뭉치처럼 뜨거운것이 목구멍에 걸려 상렬은 춘삼의 손에서 곡괭이를 앗아들었다.
《아바이, 이게 뭡니까?》
《그래두 애쓰느라면 샘구멍이 터질지 알겠습니까?》
《정말 답답합니다. 제 몇번이나 말했습니까? 여기엔 샘물이 없다구요. 공연히 맥만 뽑지 말구 있는 물이나 조절해씁시다.》
《그렇지만 타산이 서지 않습니다. 앞으로 콩나물을 더 기르자구 해두 그래, 두부를 앗자구 해두 그래 또 빨래랑 목욕은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원참, 또 빨래, 목욕소린가.)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수 없다. 상렬은 마땅한 말마디들이 생각나지 않아 입술을 꼭 깨문채 달빛이 가득한 밤의 대기속에 몽롱하게 비껴오는 산자드락쪽만 망연히 지켜볼뿐이였다.
두사람은 더이상 물문제를 꺼내기 두려운 이상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혀 이따금씩 화광이 벙긋거리는 달밝은 밤의 대기속에 꼼짝않고 앉아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왜서인지 춘삼이가 곡괭이를 들고 나다니는 일이 없어졌다.
단념했는가 아니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콩나물때문에 그럴 경황이 없어서 그런지.…
콩나물은 탐스럽게 자랐다. 하루도 빠짐없이 콩나물 면회를 오는 오일남이 싸리나무광주리를 덮은 보자기를 벗기더니 콩나물 한대를 쑥 뽑아들었다.
《아바이, 살이 퉁퉁하게 졌구만요. 이젠 뽑아먹을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조금만 참으라구.》
《콩나물이 늙어서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요? 수염이 너무 길면 맛이 없습니다.》
《그런 걱정일랑 말구 갱도작업이나 빨리 다그치라구. 그래야 나두 생각이 있을게 아닌가.》
오일남과 마주앉았던 춘삼은 옆에서 시물거리고있는 상렬에게 말했다.
《그런데 분대장동무, 콩나물국두 끓일 때가 되구 갱도공사두 끝날 때가 멀지 않으니 별스레 걱정이 더 커지는군요.》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글쎄 생각을 좀 해보십시오. 중대가 갱도두 멋지게 꾸리구 콩나물국에 특식을 차린다 해도 그들이 빨래와 목욕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면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앞에 면목이 없지 않겠습니까?》
순간 상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고지의 물문제를 푸는것이 몇개 중대의 적을 소멸하는것보다 더 난감한 문제라는 생각에 상렬의 가슴은 뻐근했다.
다음날이였다. 갑자기 오춘삼이 찾아와 거수경례를 하였다.
《분대장동지, 상등병 오춘삼 만날수 있습니까?》
《무슨 일이요?》
《한가지 방조받을 일이 생겨서 그럽니다. 저한테 한 동무만 붙여줄수 있겠습니까?》
《?…》
지금껏 자기 입으로 바쁜 소리를 하거나 방조를 요청한적이 한번도 없는 오춘삼이다.
상렬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참 일이 공교롭게 되였다. 탄약배정문제가 제기되였던것이다.
《이제 당장 말이요?》
《예, 잠간이면 됩니다.》
《탄약운반문제가 제기돼서 그러는데 다음에 봅시다.》
《그렇지만 저… 약속한 일이 튈가봐 그럽니다.》
뭐, 약속한 일? 그럼 취사원의 약속이 탄약운반보다도 더 바쁘단 말인가. 그렇다면… 할수 없지. 오래간만의 첫 부탁인데 내가 두몫을 할셈 치자.
《그럼 오일남전사를 데려가오.》
《알았습니다.》
그는 기쁨에 넘쳐 대답하고 나는듯이 달려갔다.
탄약운반을 끝낸 상렬은 취사장으로 향했다.
급한 일로 사람을 요구했으니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고 할일이 많으면 도와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취사장에 도착해보니 춘삼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일남이만 아궁앞에 쭈그리고앉아있는것이였다.
바쁘다고 사람을 데려가고선…
상렬은 부러 어성을 높였다.
《그래 춘삼아바인 어데 갔소?》
《춘삼아바인 급하게 다녀올데가 있다면서 저더러 밥이 잦을 때까지만 보아달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때 오춘삼이 숨이 턱에 닿아가지고 취사장으로 뛰여들었다.
상렬이 춘삼에게로 돌아서는데 그뒤로 중대장이 들어서는게 아닌가. 더욱 놀란것은 그뒤로 또 웬 낯선 병사가 들어서는것이였다. 오춘삼이와 엇비슷한 나이의 체소한 몸집에 얼굴이 갱핏한 상등병인데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취사장안을 휘둘러보는것이였다.
(웬 병사일가? 그럼 혹시 취사원인계때문에 련대에서?…)
이런 예감으로 선뜻 상렬은 입을 열지 못하고있는데 중대장이 벙글거리며 입을 열였다.
《분대장동무가 와있었구만. 인사하오. 입대전에 지질탐사대에서 일하던 지질기수인데 우릴 도와주러 왔소. 춘삼동무가 이 동무를 찾느라구 얼마나 애쓴줄 아오?》
그 소리에 상렬은 그만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사람마냥 뗑하니 굳어지고 말았다. 자기 억측이 기가 막히게 했던것이다.
(그럼 춘삼아바이가 물문제를 풀자구 지질기수를?… 그래서 춘삼아바이가 날 찾아왔댔단 말인가.)
이때 중대장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자, 이젠 우리 함께 샘줄기를 찾아보기요. 지금 우리한테 제일 급한게 물문제거던.》
상렬은 자기가 어떻게 발걸음을 뗐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순간이나마 그를 오해한것이 가슴에 맺혔다.
문득 앞서 걷던 병사가 걸음을 멈추고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밋밋하게 흘러내린 너럭바위 한끝이 뿌리를 박은 안침진 장소였다. 떨기나무와 무성한 잡초들이 마구 엉키여 덤불을 이룬 그곳에서는 락엽 썩은 냄새가 풍겨오고있었다.
《여기를 파십시오.》
《지대가 좀 높은감이 있지 않소? 좀더 아래쪽이 어떻소?》
중대장이 미타한듯 얼굴빛을 흐렸으나 그 병사는 확신성있게 말했다.
《지대가 낮다구 저절로 물이 나오는게 아닙니다. 지하수가 새지 않고 고일수 있는 차페층이라야 샘구멍이 터지구 물량도 많지요.》
그제서야 중대장은 리해가 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상렬의 귀에 대고 가만히 속삭였다.
《땅박사가 하는 소릴 들었지? 이번엔 지질기수를 꽉 붙들구 무조선 샘줄기를 찾아야 하겠소. 동무가 책임지구 말이요.》
상렬은 은근히 속다짐했다. 이번엔 끝장을 볼 때까지 열길이고 스무길이고 기어이 파들어가리라.
그런데 잡도리가 단단하면 예상밖의 행운이 트이는 모양이다. 삽 두기장도 파들어가기 전에 일남이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분대장동지, 물이 나옵니다, 물이…》
《뭐?…》
이들의 탄성소리를 들었는지 고지의 병사들속에서 와― 환성이 터져오르고 너도나도 달려내려왔다.
《야, 물이다! 샘줄기가 터졌다!》
모두들 머리를 맞비비며 정신없이 내려다보았다.
잔모래를 보글보글 일쿠며 줄기차게 용솟음치는 맑은 샘물.
오춘삼은 눈물이 그렁해서 그 병사의 손목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고맙네, 고마워. 이 신세를 무엇으로 갚겠나?》
그 병사는 짐짓 노여운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신세라니? 다시한번 그런 못난 소릴 했다간 다시는 상종 안하겠네.》
오춘삼은 그의 손목을 그대로 잡은채 바쁜 소리를 질렀다.
《아아, 제발 성은 내지 말라구. 동갑이, 앞으로 여기에다 화선목욕탕을 멋있게 꾸릴테니 그때 중대동무들도 다 데리고오게나.》
×
중대는 건설이 끝난 갱도안에서 생활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듯 했다.
오춘삼이가 야전가마로 끓인 더운물에 목욕도 하고 군복도 빨아입어 신수가 멀끔해진 병사들은 벙글거리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바이덕분에 중대가 때벗이를 했군요. 이만하면 금강산팔선녀라두 반할만 하지 않습니까?》
오춘삼은 그러는 병사들을 향해 버릇처럼 눈을 찔 흘겼다.
《뭐? 내 덕이라구? 화선병사들의 생활을 친어버이심정으로 보살피시는 최고사령관동지의 덕분이라는걸 알아야 해. 말은 바른대루…》
한쪽눈을 끔뻑하며 너스레를 떠는 병사도 있었다.
《그런데 참, 아바이. 이젠 취사장두 갱도안으로 이사해야겠는데 공들여꾸린 취사장을 가슴이 알알해서 어떻게 헐어버리겠습까?》
그러면 춘삼은 천연스럽게 대답했다.
《별걱정, 전쟁이 끝나면 멋진 〈전승박물관〉으로 쓰면 될텐데 헐긴 왜 헐어. 자넨 코앞의 미제놈들만 볼줄 알지 앞날은 내다볼줄 모르거던.》
고지의 이런 변화를 알수 없는 적들은 고지를 타고앉으려고 강력한 포사격으로 준비타격을 가하면서 총공격전에로 나왔다. 줄포탄들이 꼬리를 물며 하늘을 썰었다. 고지는 불도가니마냥 화염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 시각 병사들은 갱도안에서 흥겨운 오락회를 벌리고있었으니 얼마나 멋들어진 장면인가. 경쟁적으로 벌어지는 노래와 춤판으로 하여 시간가는줄도 몰랐다.
갑자기 흙먼지를 뒤집어쓴 감시병이 갱도입구에 머리를 디밀었다.
《아니, 아직두 셈평좋게 흥타령만 부르고있으면 어쩝니까. 적들이 턱밑에까지 와서 빨리 천당에 보내주지 않는다구 아우성인데…》
《그것들이 꽤나 보채누만. 때가 되면 어련히 보내주지 않으리.》
기세충천한 병사들은 지휘관의 구령에 따라 전투진지로 내달렸다.
《받아라, 멸적의 명중탄이다.》
《〈쇠만두〉가 날아간다. 실컷 처먹어라.》
병사들의 유쾌한 롱말속에 중기며 자동총, 보병총들이 《합창》을 하고 수류탄들이 벼락을 쳤다.
한차례 신바람나게 적들의 공격을 물리친 병사들이 갱도안에 들어서자 국통에 콩나물국이 철철 넘치게 담아든 오춘삼이 실팍한 어깨를 으쓱대며 그들의 둘레를 빙 돌았다.
《자, 따끈한 콩나물국이요. 맛이 어떤지 감상들을 발표하소.》
춘삼이가 듬뿍듬뿍 퍼담아주는 콩나물국을 배가 불쑥하게 들이킨 병사들은 얼굴들이 불깃불깃해서 저저마다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야! 콩나물국이 어찌나 맛있는지 혀까지 넘어가겠는걸.》
《야! 뭐니뭐니해두 콩나물국곱배기가 제일이야.》
그 소리들이 자기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라는것을 너무도 잘 알고있는 춘삼은 기분이 붕 떠서 국자를 호기있게 내둘렀다.
《동무들, 다음번엔 더 기막힌 순두부국과 비빔밥에 콩국도 대접할테요. 그러니 아무것이나 다 요구하란 말이요.》
그러자 누군가가 삐여진 소리를 했다.
《아바이, 그러다 밑천이 다 드러날게 아닙니까?》
《공연한 걱정, 화선병사들의 생활을 따뜻이 돌봐주시는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께서 계신다는걸 알아야 해. 그건 그렇구, 자네들은 내 턱만 받아먹구 자기들 턱들은 안낼셈인가?》
《?…》 모두가 눈이 둥그래졌다.
《그렇게두 말귀가 어둡다구야. 자랑들을 하란말일세. 미제놈 쳐부신 전투성과가 있지 않나? 난 그 소리가 제일 듣기 좋다니.》
《그건 아바이가 뒤받침을 잘해주었기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전투성과는 수자로 적을수 있지만 아바이공적은 소설로 써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소, 동무들?》
갱도가 떠나갈듯 와그르 박수갈채가 터졌다. 오일남이 살짝 자리를 옮겨앉아 춘삼의 턱밑에 다가들었다.
《들었지요? 다들 아바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귀맛은 좋은데 얼굴이 간지럽구만.》
이때였다. 갱도안에 들어선 중대장이 손짓으로 조용히 상렬을 불렀다.
《분대장동무, 련대로부터 적들의 중요지탱점인 ΟΟ고지를 습격점령할데 대한 전투임무가 우리 중대에 하달되였소. 이 전투에 오춘삼동무도 참가시키려고 하오.》
상렬의 심장은 터질듯이 부풀어올랐다.
(아, 얼마나 기다리던 소식인가. 춘삼아바이는 또 얼마나 기뻐하랴.)
공격출발진지를 차지할 시간은 밤 2시. 시간은 얼마 여유가 없었다. 중대장은 오춘삼을 불러 직접 전투임무를 주었다.
《상등병 오춘삼! 공격출발진지를 차지하기 30분전까지 야전식사준비를 끝내고 공격서렬의 후위에 서서 더운밥과 국을 보장할것.》
상렬은 그만 아연해졌다. 그러나 그가 미처 정신을 가다듬기도 전에 오춘삼의 대답소리가 들렸다.
《알았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는 굳세고 씩씩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상렬의 가슴을 때렸다. 그렇다! 병사는 그래야만 하는것이다.
(평양시 만경대구역 갈림길2동 58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