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100(2011)년 제9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멀리 더 멀리
방 태 일
(1)
누구나 공상하기를 좋아한다.
성장한 자기 모습, 성공한 기쁨이며 축복받는 환희며…
소년시절 한가로운 시간이면 이러한 공상이 새처럼 깃을 펴고 내려앉았다가는 자그마한 흔들림에도 깜짝 놀라 포르릉 날아가버렸다.
유민에게도 그러한 시절이 있었다.
무지개마냥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허황한것 같던 그 공상속에서 그는 자기를 찾아보군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오늘과 같은 외과의사가 되였던것이다. 어른이 되고 의사가 된 후에도 그의 공상은 계속되였다.
×
유민이 일하는 방은 조용하고 아담하다.
방안의 벽체도 희고 창문도 희고 입고있는 위생복도 역시 흰빛이다. 창밖에선 키높은 봇나무줄기가 잎사귀를 한들거리고 비쳐들어오는 해살은 어머니의 손길마냥 볼을 쓰다듬는다.
공상하기에는 그저 그만인 장소였다. 여기서 유민은 일을 했다.
울면서 들어왔던 환자도 나갈 때면 웃는다. 만약 웃지 못한다면… 공상은 여기서 끝나는것이다.
《아유ㅡ 이건 유민선생이 아직 태여나기도 전에 생겨난 만년필이 아니예요?》
언제인가 춘희라고 부르는 중년의 녀의사가 유민의 책상우에서 만년필을 집어들고 혀를 찬적이 있었다. 머리흰 과장까지 하던 일을 멈추고 돌아보자 녀의사는 더욱 신명이 나서 떠들었다.
《로과장선생님, 좀 보세요. 글쎄 유민선생의 이 만년필이 주인보다 더 나이들어 보이지 않아요?》
그럴만도 했다. 드문드문 도금이 벗겨지고 손때에 묻혀 윤기가 사라진 만년필이였다.
유민은 빼앗길가 겁나하듯 황황히 나꿔챘다.
《사실 이건…》
유민은 익은 고추빛이 되여 무엇인가 설명하려다 그만두고말았다. 로세영과장의 진지한 눈빛과 마주쳤기때문이다.
《내 보기엔…》
하루에 열마디이상 말해본적이 없다는 로세영이 입을 열었다.
《유민선생의 그 만년필이 보통물건이 아닌것 같구만.》
롱담인지 진담인지 가릴길 없는 그 어조가 마음속 깊은 곳을 살그머니 헤집었다.
멀리 흘러간 소년시절의 이야기, 잊지 못할 그 이야기가 고요하던 추억의 호수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겨울이였던지…
탁상등밑에 맥없이 드리운 팔, 고통으로 가드라든 손안에서 허리가 꺾어져나간 만년필, 신음소리는 냈던지, 안냈던지 모른다.
중학교졸업을 앞두고 대학입학공부를 하고있던 유민은 실신상태에 빠져 집에서 멀지 않은 산골의 작은 병원으로 실려갔다.
겨울이 분명했다.
밖에서는 온갖 생명을 짓누르는 찬바람이 자연을 꽁꽁 얼구었고 안에서는 격렬한 론쟁으로 달아오른 뜨거운 입김이 얼음도 녹일듯 했다.
《아니ㅡ 충수염일수 없습니다. 환자는 지금 왼쪽 아래배의 동통을 호소하고있습니다.》
《마음놓소. 급성충수염인 경우 그 아픔이 특수한 경로를 거쳐 뇌를 자극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이런 반대의식현상이 나타나는거요.》
의사협의회에 참가했던 유민의 어머니까지 눈물이 그렁하여 하소연했다.
《심사숙고해주세요. 만약 충수염이 아니면… 그땐 제 아들은…》
《난 환자의 생명이 아니라 나자신의 생명을 걸고 담보하는겁니다.》
더 말할틈도 주지 않았다.
《어서 수술준비를 하시오. 책임은 내가 지겠소.》
모든 사람들이… 유민의 어머니까지도 바위같은 그 선생의 주장에 굴복하고말았다.
수술대우에 누운 유민은 두터운 도수안경을 뚫고 와닿는 한쌍의 눈빛을 알아보았다.
《학생동무, 조금만 견디라구. 대학에 꼭 가게 돼.》
듣는 순간 마음이 평온해지며 스르르 졸음이 왔다.
(누굴가?)
수술이 끝나고 의식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그 고마운 선생은 곁에 없었다.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채 그밤으로 어디론가 떠나갔던것이다.
유민은 그가 이곳에 출장을 왔던 중앙병원의 유능한 박사선생이였다는것을 후날에야 알게 되였다. 마치 동화이야기에서처럼 유민을 구원하려고 어느 별나라에서 잠간 왔다간것 같았다. 떠나면서 그는 유민의 모지름쓰며 꺾어뜨린 만년필대신 자기의 만년필을 침대맡에 놓아두었다.
유민은 그것이 진짜 별나라만년필이나 되는듯이 소중히 간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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